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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교사경쟁, 역할분담 (0)
2019/06/30 PM 11:10 |
교사경쟁, 역할분담
우리나라의 성장에 경쟁의 지분이 크다는 건 아마
부정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경쟁을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을 통해 국가를 성장시켰습니다. 대기업, 엘리트 예체능, 엘리트 학교 등. 경쟁을 통해 능력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지원하여
국가를 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크나큰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절망하고 슬퍼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 질린 사람들은 안정적인 공무원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수한 사람들이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의료계나 법조계에
몰리는 현상은 국가 발전에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경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경쟁 때문에 생긴 부작용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경쟁의 단점도 장점도 전부 받아드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메기 효과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메기 효과는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메기 효과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으로 아마 이랬을 겁니다. ‘먼 곳에서 잡은 물고기를 오랫동안 살리기 위해서는
천적을 곁에 둬 긴장하게 만들어야 한다.’ 천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오랫동안 살 수 있다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게 거짓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빨리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경쟁의 장단점이 보였습니다. 경쟁은 높은 생산성과 낮은 생존력을 보장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 – 높은 생산성, 낮은 생존력
안정 – 낮은 생산성, 높은 생존력
대강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경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갖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이 회사는 강도 높은 경쟁으로 많은 사원들이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살인적인 업무와 쉬지 않는 자기개발을 하게 만든다고 하더군요. 분명 경쟁은 높은 생산성으로 집단을 성장시키는 초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될 때쯤 힘들어서 퇴직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생존력은 보장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은 단기적인 높은 성장과 함께,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을 때나 가능한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국민을 책임져야 하는 국가가 성장을 위해 쓰기엔 위험한 방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경쟁을 배제하면 생산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둘 다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경쟁의 시작은 학업입니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경쟁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은 보통 우수한 중등교육, 저조한 고등교육이라고 합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는 매우 뛰어나지만, 대학교나 대학원에 가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어째서 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과 과도한 경쟁이 부른
참사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입학과 쉬운 졸업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건 아마 과도한 경쟁으로 어렵게 입학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졸업해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자유학기 등을 도입해 경쟁을
줄이고 창의성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직업의 폭이 결정되는 대학의 입시제도가 그대로인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게 됩니다. 경쟁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수시제도는 입시컨설팅 업체의 배만 불려주고 있는 상황 속에
정시의 중요성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경쟁은 점점 더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있습니다. 경쟁이 없을 수가 없다면, 창의성이 보장되는 경쟁을 추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가능 하려면 입시제도가 바뀌어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모든 학교에서 최저수능점수제를 도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문제 하나 둘로 능력이 크게 차이 날 리가 없습니다. 컨디션이나 문제만 조금 바뀌어도 매번 결과는 달라질 겁니다. 어쩌면 하나 둘 못 푼 학생이 좀 더 우수한 창의력으로
고등교육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수업에 따라갈 수 있는 일정이상의 성적을 낸 학생들은 전부 만점처리를 해야 됩니다. 같은 만점에서의 경쟁은 역할에 맞게 진행되어야 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학, 교육, 정보 등 각 전공에 맞는 시험을 각 대학 또는 전국 공통으로 준비하는 것이 맞습니다. 수능 성적으로 관심도 없는 전공에 지원하는 것은
정말 그 전공을 공부하고 싶었던 학생에게 민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 불합리한 관행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수능의 자격증화를 주장합니다. 경쟁은 전공에서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창의성이 필요한 학문은 창의성을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죠. 그래야, 고등교육의 학업성취도가 높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전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 전공을 공부해야지
직업훈련소가 아니게 되어 전공의 학업성취도가 높겠죠.
변별력, 입시비리, 공정성, 이중노력 등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것이 산더미겠지만, 지향성이라고 해야 할까, 적성에 맞는 사람이 해당 역할을 맡도록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원한다는 가정하에.
여기서 이중노력은 학교 수업만 제대로 받아도 수능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해결될 거라 생각합니다. 굳이 학원에 가서 새롭게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대학 강의에 쫓아갈 수 있는 학력을 갖출 수 있게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교사경쟁에 대한 의견이 시작되겠습니다. 앞서 경쟁과 안정을 둘 다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래야 경쟁력과 생존력을 갖출 수 있다고요.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교사는 공무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과 불평등한 가치관으로 나타난 인력 천시로
공무원 중 하나인 교사를 인기직업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정말 사람을 교육하고 싶어서 교사가 되었다기 보다 그냥 안정적이고 유망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사가 된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교사의 근본 자체가 안정의 상징인 공무원이기 때문에
교사 또한 생산성이 낮아지고 생존력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교사의 낮은 생산성은 공교육의 교육품질저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사교육의 활성화를 부르게 되어 빈부에 따른 교육기회차등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이 활발한 것은 첫째는 경쟁이, 둘째는 공교육의 교육품질저하가 불렀다고 봅니다. 도대체가, 학교에서 잠을 자고 학원에서 공부한다는 이야기나, 학교 선생이 학원 강사의 동영상을 틀어주고 잔다는
이야기나, 어처구니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사교육을 막기 위해서는 학생의 경쟁을 없애거나 교사의
경쟁을 활성화시켜 공교육의 교육품질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학생의 경쟁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유망직종이 있고, 정원이 한정되어있는 이상, 경쟁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교사의 경쟁이 활성화 되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교사가 경쟁하게 되면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 경쟁, 경쟁하다 보면 지금보다 학생들이 더 힘들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안정적인 일을 하기 위해 교사를 지원한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이것이 앞서 설명한 경쟁과 안정을 둘 다 사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수업교사와 담임교사를 분리하여 경쟁과 안정을
둘 다 추구해야 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경쟁을 맡은 수업교사는 매년 교사전용시험을 보며
경쟁력을 갖추는 한편, 높은 성과금도 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정을 맡은 담임교사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에
귀를 기울이고, 학생과 학부모의 상담과 함께 안정성을 갖추는 한편,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를 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할분담을 하는 거예요. 수업교사는 혼내는 역할을 맡고, 담임교사는 감싸는 역할을 맡습니다. 혼내는 역할이므로 다소 힘들 수도 있는데, 학생과 부모를 상대하는 것은 담임교사의 역할이므로, 어쩌면 어려운 것은 담임교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방식은 년에 한 번 있는 교사시험으로 객관적인
지식 수준을 평가하고,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를 통해 교육 수준을 평가하여 경쟁력을 갖추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사실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으로 시험 보는데 경쟁이 그렇게 어려울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기가 가르치는 것도 제대로 풀지 못하면 어떻게
가르치고 있던 건지 궁금합니다.
학생과 부모를 상대하는 것보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는 교사는 수업교사로 경쟁을 맡게 하고, 경쟁보다는 안정적으로 학생과 부모를 상대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교사는 담임교사로 안정을 맡게 하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뭐 요새 보니까 교사들이 학부모들에게 전화로 시달려서
전용폰을 만들려고 하다가 학부모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교사 한 명에게 수업과 담임을 둘 다 맡게 하는 건 어쩌면, 과도한 업무를 짊어지게 하여 공교육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하나의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임교사가 동아리도 맡고, 대외활동도 지원하고 다양한 업무를 하게 만들면 교사경쟁체제가 도입되더라도, 학교본연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좀 더 세부적인 사항 (지역평준화, 학생과 교사의 선택, 시기, 급여, 반응, 학부모, 제도, 연계, 다양화 등)은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자사고 논란이나, 사교육활성화 논란이나,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기회 차등 등은 대체로 공교육의
경쟁력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높이기 위해서는 수업교사와 담임교사의 역할분담을 통해 수업교사를 경쟁하게 만들어 높은 생산성과 낮은 생존력을 갖추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을 경쟁시켜 높은 학업성취도를 이루고 싶으면
교사도 경쟁해서 교육품질을 향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학생자질로 경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육기관끼리 경쟁할거면 교육품질로 경쟁해야 합니다. 인적자원이 중요한 나라인 만큼 교육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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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약한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인간교육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정원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경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과도한 경쟁을 지양하고 올바른 경쟁을 추구하며 역할에 맡는 직종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지금 당장 인간교육론을 완성하지 못하여 지금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는 좀 달라질 수 있으나, 기본적인 틀은 아마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번에 어떤 학교에서 비리가 발생하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했습니다. 그 모습을 기사에서 봤죠.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생각하며 댓글을 봤는데, 댓글은 아직도 옛날에 머물러 있더군요. 평등이 없어요. 교사의 교권을 위해서 잘못했어도(아마도), 사과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평등하다면, 교사의 교권은 스스로 쟁취해야 합니다. 교사도 노력해야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중 받을 수 있는 상황이
교사의 부도덕과 무책임함을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사과한 교사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과 했다는 것 자체는 칭찬할만하다고 봅니다. 잘했어요.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이상한 말 같네요.
소상공인이 힘든 이유가… 다른 곳에도 있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시대의 흐름이 오프라인
소상공인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 유통 강자들도 힘들어서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오프라인 소상공인이 힘들지 않기는 어렵겠지요. 이들도 어쩌면 시대의 변화가 만든 산업의 이재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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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타다, 안정인가 경쟁인가 (1)
2019/06/24 PM 07:47 |
타다, 안정인가 경쟁인가
택시의 문제는 전부 비경쟁으로 나타나는 경쟁력 상실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공무원이나 교사의 문제와 아주 흡사하죠. 국가에서 택시 수 조절을 하거나 택시 면허가 한정된 국영산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경쟁력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규제를 허점을 찌른 민영 기업인 타다가 이익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혁신이냐, 혁신이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애초에 별반 차이가 없는데 혁신이라 부르기는 어렵지요. 지금 택시들 규제 풀고 타다처럼만 운영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냥 택시 민영화라고 봅니다. 타다는.
국가관리 택시 – 택시 수 조절과 택시면허 고정으로
경쟁력 부족으로 나타나는 현상 (골라 태우기, 상대적 불친절, 서비스 감소)
기업관리 타다 – 기존 택시와 경쟁할 수 밖에 없어
경쟁력 증가로 나타나는 현상 (골라 태우지 않기, 상대적 친절, 서비스 증가)
택시는 수가 늘어 경쟁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택시 수를 줄여주더군요. 경쟁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비경쟁제도, 택시는 국영화된 산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번 타다 사건은 택시 민영화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택시면허를 사거나
택시 업을 하는 모든 차량 수를 한정시키면 국영화를 유지하는 거고, 안 사거나 차량 수 유지를 하지 않는다면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국영화와 민영화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타다의 미래가 예상이 됩니다. 성장을 위해 경쟁하는
동안엔 우수한 서비스가 보장될 수 있으나, 잠식하고 나면 경쟁력이 유지될 지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안정성 문제도
있습니다. 의료수요민영화, 전기민영화, 수도민영화 따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민의 필수수단으로
자리잡은 교통은 안정성이 중요합니다. 택시, 버스, 지하철 파업을 보세요. 시민의 발을 인질로 삼아 이권을 주장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 파업의
정당성을 문제삼지는 않겠습니다. 분명 파업하는 사람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항의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의료, 전기, 수도 같이 삶에 필수요소가 안정성을 잃게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AI로 인한 달걀파동 때도
아마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달걀을 미끼 삼아 비싸게 팔던 사람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입했더니 물량이
너무 많아 팔리지 않았던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듯 삶의 필수요소는 안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택시는 삶의 필수요소로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차량이 없는 사람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도 보통 해결이 되니까요. 우수한 교통정책이 택시의 필요성을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택시가 파업해서
시민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파업을 해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거리가 깨끗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의 필요성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한마디로 안정성의 필요가
적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안정과 경쟁. 국영과 민영. 둘 다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존 택시기사의 권익보장문제만
해결되면요.
시대의 변화는 산업의 파괴를 부르고, 산업의 파괴는 산업의
이재민을 부릅니다. 앞으로 이런 이재민들이 한두 명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매년 매년 이재민들이
늘어날 전망인데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됩니다. 키오스크(무인 정보 단말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는
판매원과 달리, 크나큰 반발을 부른 택시 산업은 이 시대의 첫 번째 이재민 집단이라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들에 대한 대처가
앞으로 발생할 이재민들에 대한 대처의 표본이 될 것이므로, 미래시대의 첫 단추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산업의 이재민들이 발생할 때마다 계속 계속 국가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까지
보장하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할까요? 예전에 한번 정론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만, 지나친 대우도, 일방적인 희생도 어려우므로 그 정론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의견은 산업의 이재민들이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리고 이재민들을 만든
자동화 산업이 이들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두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익을 위해 국가의
발전을 늦출 수는 없어요. 앞으로는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일자리 보전이 아닌, 일자리 상실로 인한
피해를 어느 정도 책임져 달라고 해야 합니다. 책임 방안은 예전부터 있었지요. 로봇세, 기본소득제, 일자리 쪼개기(급여는 같은 상황) 등이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앞으로 발생할 산업의 이재민들을 얼마나 구해줄 수 있을까요? 걱정이 되네요.
다시 타다와 택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앞으로의 기술 발달로
운행산업은 거의 대부분 자동화가 될 것 같으므로 지금의 분쟁은 어쩌면 소요사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얼마 안 있어 이런
분쟁의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규제라던가, 법이라던가, 사람과의 조율이라던가
이런 것들을 자동화가 될 미래에 맞춰서 설계하는 걸 권해봅니다.
그전에, 택시의 수를 유지하여 국영의 감각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경쟁을 통해
민영의 감각으로 갈 것인지, 그러니까 민영화의 길을 걸을 것인지부터 확실하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안정인가, 경쟁인가. 미래시대의 첫 단추가
될 타다 논란, 부디 잘 해결되어 첫 단추를 잘 꿰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내외 정세가 복잡한데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뭐 행복해야 건전한 번영도 가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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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엉-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지… 나 참 진짜 한심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몇
가지 계획은 있긴 한데 어렵네요. 아 이사 가고 싶다.
내일이 6.25 전쟁일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워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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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영화감상] 기생충 (6)
2019/06/23 PM 02:40 |
[영화감상] 기생충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현실직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우선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의 감상임을 미리
이야기해둡니다. 잘 몰라요. 영화. 그래도 뭐, 이야기는 다 비슷하겠죠. 시작해보겠습니다.
최초 감상은 그냥 ‘재미있었다’ 입니다.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기대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사실 어떤 영환지 자세히 모르고 봤어요. 그냥 지금까지 결과를 냈던 감독의 작품이니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고 봤죠. 그리고 실제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전개기는 하지만 어딘가 인위적인 진행. 그러던 와중에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지하실. 그리고 약간 황당한 결론까지. 많은 인위적 감각 속에 가장 황당했던 건 역시 살해. 자기 딸을 죽인 인간에게 감정이입 하여 살해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고와 행동의 우선순위가 바로잡힌 인간이라면 있을 수가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무계획한 인간의 행동이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란 말이죠. 몰이해를 부르는 결론이었습니다. 부자의 순진함, 멍청함, 단순함, 친절함, 냉정함, 거리감. 빈자의 영악함, 교활함, 잔인함, 음흉함, 무계획, 무력함이 기억이 나네요.
두 번째 감상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가’ 입니다. 제가 요즘 기사 댓글을 보고 있는데, 기생충을 예시로 들어가며 노동자들을 자본가의 기생충에
빗대는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음. 무엇이 감독의 의도였을까요? 사실 양극화 문제를 지적하는 영화치고는 부자에 굉장히
관대했습니다. 부자의 부도덕이 드러나는 장면이 없어요. 냄새로 양극화를 표현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빈부만 벗겨내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둘이 빈부격차가 없다는 가정하에 한 쪽이 불쾌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죠. 그러므로 그건 부자의 부도덕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양극화를 표현하는 장치에 불과해요.
뭐가 목적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의 감상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사람은 이념에 치우쳐 평가절하하는 사람. 어느 사람은 도덕에 치우쳐 평가절하하는 사람. 어느 사람은 빈자를 탓하기 위한 용도로 쓰는 사람. 어느 사람은 부자가 불쌍하다는 사람. 어느 사람은 빈자가 불쌍하다는 사람. 어느 사람은 복선과 장치에 감탄하는 사람(주로 긍정적인 평가에 많았음). 어느 사람은 철학적 요소로 심도 있게 분석해보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감상을 읽으며 생각해봤습니다.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이런 감상들을 보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의도를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 배경, 사건, 주제, 복선, 장치, 결론 등. 전부 감독의 의도를 포장한 껍데기였다는 거예요. 뭐 다른 영화들도 결과적으로 보면 감독의 의도를 위한 껍데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보다 더 순수하게, 오로지 하나의 의도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 의도는 바로 ‘현실직시’ 그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부자의 부도덕을 조명했다면, 부자에 대한 성토가 주를 이루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부자의 부도덕을 조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양극화에 대한 특별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빈자의 무력함을 극복하는 장면도 없었습니다. 불편하고 또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그냥 조명했을
뿐이었습니다. 현실직시만을 위해 다소 인위적인 진행과 결론조차
감내했다고 봅니다. 부자연스러움조차 의도되었다고 파악됩니다. 감독은 영화를 보고 다양한 생각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현실직시만 하고 끝났으니까요.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만약 대안을 주장했더라면, 다양한 생각이 나오기 전에 그 대안의 옳고 그름, 적합성 따위들로 생각들이 소모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멀리서 조망하며 현실직시만 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거예요. 현실직시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양극화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은 알 것입니다. 체감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걸 조명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현실직시 하게
된 것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입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특별한 대안 없이 멀리서 조망하기만 하는 것은 분명
여러모로 이익입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 그 대안에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경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위계질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이만 또는 권위만 높아도
존중 받았던 사람들이 위계질서 붕괴를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요?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와 언어의 평등이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해보세요. 아이가 네 부모에게 반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느냐는
반발만 돌아오게 됩니다. 도대체, 평등을 사랑하긴 한 건지 모르겠어요. 학생 교육문제도 그래요. 학생과의 평등만 생각하지, 교사와 학생의 평등은 대부분 생각지 못합니다. 당연하니까. 그 둘은 불평등한 것이 당연하니까 생각을 하지 못해요.
양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비판하며, 거리를 두면 둘 다에게 첫 번째 타겟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안전한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그건 결국 진흙탕에 발을 딛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거예요. 복잡하고 다양한 사안에서 둘 다 똑같이 나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은 이쪽이 낫고 어느 쪽은 이쪽이 낫다. 그런 것을 종합해서 어느 쪽이 상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파악이 가능해지죠. 그것이 불가능 할 리가 없습니다. 특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게 불가능 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그게 불가능 했던 건 단지 미움 받고 싶지 않을 것뿐이죠.
분명, 어설픈 대안보단 현실직시만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직시로는 한계가 있어요. 냉정하게 말해서 현실직시 한 기사와 이 작품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포장지만 다를 뿐이에요. 예쁘고 아름답고 추하고 더러운 다양하고 화려한 색으로
포장된 영화이지만 내용은 객관적인 기사와 별반 차이가 없죠.
이 작품의 한계에 저는 두 가지를 집겠습니다. 감독 의도에 맞춘 결과론적인 진행과 대안 없는 현실직시. 한계라고 표현했지만 위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제된 표현으로 자기 의도를 확실하게 전달했어요. 단지 그 이상을 넘기 위해선 대안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안을 제시한 작품은 아마 현실직시보다 흥행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대안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의
반발이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래도 한계점은 분명 대안이 있는 쪽이 더 높습니다. 현실직시만으로 위대한 상을 수상했으니 대안이 있는 작품으로 위대한 상을 수상하게 되어 현실을 바꾸는데
초석을 다지게 된다면, 영화 역사뿐만이 아니라 일반 역사에 남는 감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인물 설정, 배경 설정, 사건 설정만으로 감독의 의도에 맞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걸까요? 자유 속에서 의도가 온전하게 포장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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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글이라면 매일매일 써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 모르겠다.
역할평등론 – 다름이 없는 기준(역할)로 가치를 판단해야 다름이 존중 받을 수 있다. 아무리 달라도 역할만 수행할 수 있으면 존중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름이 없어야 다름이 존중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교사경쟁 – 학생과 학생 사이의 평등뿐만이 아닌, 학생과 교사 사이의 평등도 필요하다. 학생을 경쟁시킬 것이라면, 교사도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경쟁이 곧 서열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공교육의 몰락은 무경쟁이 만들어낸 참상이다. 공교육의 품질 하락이 사교육을 불렀다. 사교육 활성화는 빈부에 따른 교육 품질 차이를 불렀다. 아, 그리고 단어가 마땅히 생각이 안 나서 사람에게 품질이란 단어를 썼는데, 기사를 보니까 자질이란 좋은 단어가 있었다. 다음에는 교사 자질, 학생 자질이란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다음에는 교사경쟁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역할평등론을 주장하는 사람다운 결론이 나올 거예요. 역할평등론답게, 입시제도를 이렇게 주장할 겁니다. 정시에서 수능점수는 강의에 따라갈 수 있는 최저
등급(또는 점수) 달성하면 모두 만점으로 처리되고, 나머지는 전공에 맞춘 전공 전용 시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수능 점수에 맞춰 전공을 결정하는, 대학 간판만 노리는 어리석은 관행을 끝내기 위해서는 전공 전용 시험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공기관 또는 공기업에서(정확히는 모름) 사용하는 블라인드 테스트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두 시험을 전부 만점으로 통과한 사람이 많아
동률이 많아지면, 나머지는 면접점수로 계산해야겠지요.
저는 정치를 대행(마땅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음)이라고 봅니다. 가치 분배는 대행의 일부에 불과해요. 국민의 대행자, 정치인. 피보호자의 대행자, 보호자. 집단의 대행자, 리더. 모든 것은 대행으로. 집단의 대행자로서 민주적이면 자율로, 독재적이면 강제로 대행하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대신 행동해주는 사람이라는 거죠. 권력으로 찍어 누른 힘으로 대신 행동하여 가치 분배하거나, 국민들의 지지로 대신 행동하여 가치를 분배하거나. 설령 타협의 결과로 각자 조금씩 의견을 섞게 된다고
하더라도, 일부는 다른 이를 대행하게 됩니다.
내 생각을 대신 행동하고 대신 책임져달라. 참여에 소극적인 태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의 정치질, 따위를 고려해보면 정치의 본질이 보입니다. 정치는 책임지는 대행자, 정치질은 책임지지 않는 대행자.
음, 잘은 모르겠는데, 페이스북의 리브라는 위험한 것 같네요. 저는 다국적 기업의 미래의 청사진 중 하나를 기업독재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국적 기업의 힘이 국가를 넘어설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기업독재의 가능성 첫 순위에 구글을 점 찍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페이스북이 첫 순위였던 것 같아요. 저는 세계가 점차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할은 정치가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가 맡으면… 경제논리로 접근하게 되어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위험하게 됩니다. 뭐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알아서 잘 하겠죠.
이게 경제 보니까, 작년 것과 비교하더라고요. 생산성도 그렇고 그냥 년 단위 같아요. 올해 –를 찍어 놓으면 내년엔 보통만 해도 +가 되겠네요. 음.
선거가 내년이었죠?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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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자사고, 무엇이 경쟁력인가? (5)
2019/06/20 PM 10:28 |
자사고, 무엇이 경쟁력인가?
요즘 뉴스를 매일 보고 있어요. 다양한 기사와 그에
대한 반응들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점점 정교해짐은 느끼고 있어요. 간결하고 읽기 쉽게 정리된 기사를
보니 정보를 얻기가 좋네요. 우수한 기자를 칭찬합니다. 이번에는 자사고 논란에 대한 의견을
간단하게 적어보고자 합니다. 뭐 별로 긴 건 아니에요. ‘아, 이런 의견도 있구나.’ 생각해주세요.
사실 지금까지 자사고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모르고 있었어요. 자사고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로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청의 지원과 간섭이 적어 학비가 비싼 학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간단히
‘학비가 비싼 학교구나’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죠.
뉴스를 접하고 나서 한번 자사고에 대해 알아봤는데, 뭔가 좀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특정 자사고는 교육자나 교육과정이 남달라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체로는 일반학교에서
자사고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교사나 교육과정이 남다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학교에 비해서
입시에 좀 더 치중한다는 정도? 교육 질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거죠. 자세한 건 몰라요. 검색해보니까 그런 의견이
있었고, 그 의견(일반고에서 자사고로 전환했기 때문에 교육자는 그대로)이 납득할만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런 전제로 접근하니까, ‘자사고의 경쟁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분명 자사고는 우수한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지요. 그런데 교육과정은 비슷해, 그렇다면 자사고의 경쟁력은 ‘자사고라는 타이틀 덕분에
모집한 우수한 중학생들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교육자가 아닌 학생이 경쟁력인
학교란 이야기죠.
단지 학생이 경쟁력인 학교라면, 그것이 과연 공정경쟁인지
의문이 들어요. 학교 위치, 학교 시설, 학교 제도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의 질 아니에요? 학교의 경쟁력은 교육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교사를 많이 모집한 학교일수록 우수한 학교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자사고처럼 단지 우수한
학생을 모았기 때문에 우수한 학교가 되는 것은 불공정 경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이유로 자사고 폐지에 찬성합니다. 학교도 경쟁을 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학생의 품질이 아닌, 교사의 품질로 경쟁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교사가 너무 철밥통이라서, 부도덕한 짓을 저질러도 금방 복귀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교사 경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학생끼리 경쟁시키지 말고 교사끼리 경쟁해야 합니다. 물론, 교사의 부담이 매우
늘어날 수는 있어요. 그리고 교사 품질 체크 기준을 객관적으로 잡기가 어렵긴 해요.
그러니까, 매년 교사도 교사시험을 보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교사가 수능처럼
시험을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험 결과를 공고하여 학생들이 우수한 교사들에게 교육받는 제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수한 교사 아래 우수한
학생이 있어야죠! 시설도 중요하지만 교사가 더 중요합니다. 물론 지식과 교육은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시험만으로 평가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학생 평가도
교사 품질체크에 영향을 끼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분명 교사의 부담이 커질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보조해줄
다양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수를 늘리거나 교사를 지원할 교무보조를 늘려 부담을 줄여보는 거죠. 뭐 구체적인 방법은
우수한 교육청에 기대해보겠습니다.
교사의 경쟁으로 학교의 품질이 결정되면 학군 문제도 사라질 겁니다. 위치가 어디에 있던
우수한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고 싶어할 테고, 그런 교육을 받고 싶어할 학생들이 모이면, 우수한 학생들로 인해
학교 분위기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자사고처럼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공정한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수한 학생을 모집하고 싶으면 우수한 교사를 고용하세요. 그게 우선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일단 자사고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그러면 폐지되는 자사고에
대한 의견을 적어보죠. 저는 자사고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폐지되는
자사고 중 한 곳은 조금 공정치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자세한 것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내막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폐지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쉽게 말할 수는 없어요. 단지, 말할 수 있는 건, 제삼자가 보기엔 공정치
못한 면이 있다는 겁니다. 전국형 자사고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전국이 같은
기준이 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자사고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자사고를 전부
폐지하고, 교사 경쟁체제로 돌입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수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상향평준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비겁하게 학생만 경쟁시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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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되었건 계속 쓸 겁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망할 힘드네요. 제가 무능해서 사회
적응하기 어려워요.
다음 글은 뉴스, 또는 영화 감상 써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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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불공정거래, 초거대기업국가 (0)
2019/06/18 PM 08:40 |
불공정거래, 초거대기업국가
기업의 부도덕은 국가가 견제해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건전한 시장경제가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정작용이 불가능한 초거대기업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계시장경제의 괴물,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입니다. 그들은 자체적인 국가의 견제가 없어 부도덕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습니다. 환경(미세먼지, 프레온가스, 유해물질배출 등), 인권(임금, 노동시간 등), 지원(국가 보조, 지원금), R&D 등 국가의 견제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 자체적으로 개발 발전 시켜야 할 것까지 국가에서 지원합니다. 해외에서 수학중인 우수한 자국인의 학자들을 마음껏 써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도덕과 양심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이윤을 추구하고 성장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저지릅니다. 이건 마치 국가가 기업이 되어버린 상황, 공산주의국가는 초거대기업국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초거대기업국가의 등장은
세계시장을 혼란케 했습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는 시장논리에 의해 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기업들은 특정 분야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그런 기업들을 보유한 국가들도 특정 분야에서만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거대기업국가인 중국은 부족한 분야에 정부지원금을 쏟아 부어 다른 기업들과 불공정한 경쟁을 하여 모든 분야에서 상승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까? 이런 초거대기업국가의 불공정경쟁, 불공정거래를 방관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저는 경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인권도 무시해, 환경도 무시해, 시장논리도 무시해, 이것이야 말로 부도덕한 기업의 이상향입니다. 이건 완전 어떤 기업이 땅을 사서 국가를 건설한
뒤 국가기업으로 거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인구수가 크고, 이념의 관점으로 접근하다 보니 이런 불공정거래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는 국가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오만합니다. 저번에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봤습니다. 이런 오만한 중국이 갑질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 어떤 기업도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겁니다. “소기업이 대기업에 대항해서 되겠느냐?” 도대체 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어떤 나라고, 어떤 상황이고, 어떤 일을 저질렀고, 어떻게 되고 있고, 어떻게 할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중국에게 힘을 실어주는 국가와 기업을
저는 모르겠습니다! 힘을 얻고 나면 으름장을 내놓겠지요. 공물을 요구하고 공녀도 보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요!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거부하면 이러겠지요.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
정의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은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봐도 중공은 정상적인 집단이 아닙니다. 오만하고 부도덕하며 이기적인 초거대기업국가로 세계의
시장경제를 뒤흔드는 불공정거래를 주도하고 있는 집단입니다.
도대체가, 14억이 넘는 사원을 가지고 있는 기업, 국가의 견제를 받지 않는 기업과 어떻게 공정경쟁, 공정거래가 가능하겠습니까? 주석은 회장이고, 공산당은 주주들이고, 공안은 SP들이고, 잘사는 지방은 정규직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회장의 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기업처럼, 주석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공은 초거대기업국가입니다. 국가기반시절 따위들이 아무리 잘 설비되고 정비되어도, 자유와 평등이 없는 공산주의 국가는 기업국가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기업들과 불공정경쟁, 불공정거래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깁니다.
공산주의는 평등이란 이념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시장을 개방한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와 양극화를 만들었던 자본주의가 수정자본주의로
전환되면서 민주주의 국가의 견제를 받아 건전성을 형성하고 있는 와중에 등장한 견제할 수 없는 초거대기업국가였습니다. 자본시장을 개방한 공산주의야 말로 가장 부도덕한
자본가들이었던 겁니다!
한쪽은 민주주의 국가의 견제를 받아 인권도 보호해, 환경도 보호해, 시장도 보호하는데, 한쪽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죠. 그런데 어떻게 공정경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건 완전 사기입니다! 이념으로만 접근하지 마십시오! 현상을 봐주세요!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념에 휘둘려서 공정경쟁을 할 수 없는 전세계의
건전한 기업들이 불쌍합니다! 포코폰을 보세요. 국가지원금을 받아 반값에 판매하여 인도시장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불공정경쟁에 항의하면 내정간섭이라며 당당하게 맞섭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어디 있습니까? 인권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호하고 시장을 보호해 공정경쟁을
하자고 제안하면 콧방귀도 뀌지 않고 내정간섭이라 대꾸하는 자들과 어떻게 거래하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공정을 추구하는 국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맞습니까?
우리나라의 정의를 외치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일부 세계화가 되었고, 모든 곳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세계의 자본시장을 망치는 자본시장을 개방한 공산주의라는 초거대기업국가의 불공정경쟁을 방치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세계 시장의 미래를 흔들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공정경쟁이 가능한 견제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업과 거래하길 바랍니다!
세계시장에서 공정경쟁이란 상도덕이 바로 서길 바라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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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뇌와 가까운 인공지능이라… 대단하네요. 아무리 발전해도 의지를 발산하는 세포가 없으니 인간
수준의 자아는 갖출 수 없을 것 같지만… 빠르게 발전하는군요. 뭐 저는 세포가 자아의 근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수준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포, 그리고 세포와 상호작용할 세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포털사이트에서 큰 회사에 대한 규제를 토로하는데… 전에도 말했고, 중국을 보면 알겠지만, 자율규제가 가능하면 국가에서 일부로 규제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하니까 규제하는 거라고 봐요. 거, 중국보세요. 규제 안 하니까 미세먼지니 프레온가스 신경 안 쓰잖아요?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그러나 과도한 규제는 기업의 발전에 해가 되기 때문에
자율규제를 통해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이루며 성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런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견제조차 받지 않는 자본시장을 받아드린 공산주의야말로 가장 부도덕한
자본가입니다. 정말 치사한 기업국가입니다. 세계의 견제를 받으면 변명거리도 완벽합니다. 내.정.간.섭!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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