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와 포털
네이버가 포털인 이상 인터넷 검열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검열사태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시작하겠다.
첫째, 국내 기업 죽이기
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이런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편향된 알고리즘으로 인해 정보 불균형으로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이 많다. 알고리즘을 편향되지 않도록 바꿔야 한다. 얼핏 들으면 바른 말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유튜브에 관심이 없는 영상이 추천 목록으로 계속 올라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무종교인에게 종교영상이 계속 뜨고, 잡식인 사람에게 채식 영상이 계속 뜬다. 원치 않는 정보를 계속 접해야 하는 소비자는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 다른 영상 플랫폼을 이용해야겠다. 당연한 결과다. 소비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면 시장에 외면 받는다. 페이스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짜뉴스 걱정으로 원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짜면 시장에 외면 받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예측이 가능한데 그 누가 알고리즘을 바꾸려 하겠는가? 자유국가에서 가짜뉴스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교차검증을 통해 판별해야 한다. 진짜와 가짜의 판별을 위해 개인의 정보선택에 간섭하다
보면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수의 개인이 가짜뉴스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으로 판별능력을 높여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 기업의 알고리즘에 간섭하는 것은 첫째로 책임회피고 둘째로 기업 죽이기다. 페이스북이 미국기업이므로 미국정계에 간섭을 받아
시장에 외면 받게 된다면 그게 바로 국내 기업 죽이기가 된다.
이번 검열사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기업에 주로 적용되는
이번 검열은 실질적으로 그냥 책임회피 및 국내 기업 죽이기다. 과거 다음이 이메일을 전송할 때 우표값을 받겠다고 선언하여 시장에 외면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같이 지금 당장 국민이 국내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버리고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외 기업이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국내 사정에 맞는 서비스를 공급하면 지금 국내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다. 답답하다. 세계시장을 공략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조차
도태되도록 압박하고 있다. 정말 감성적인 문제해결은 다방면에 피해만 준다. 단호히 말하겠다. 기본적으로 자유국가에서 개인의 인성은 공교육에서 형성해 나가야 한다. 기업에 검열이란 규제를 강요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단순한 책임전가에 불과하다.
타당한 규제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번 검열사태는 말 그대로 자유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사상 검증했던
것과 같이 페미니즘 광풍으로 성범죄자 색출을 위해 대화 검열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이성을 잃은 짓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간첩을 잡기 위해 국민을 예비 간첩으로 상정하고 검열과 검증으로 점철된
시대가 있었다. 불온전단지가 있을지 모른다며 불심검문으로 소지품
검사를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걸 이번 사태에 맞춰보자. 오픈채팅에서 이미지에 공산주의 관련 용어나 공산당 찬양이 나오면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 검열이 되며 이걸 근거로 국가에 잡혀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에 반대하는 건 간첩이라며 공격한다. 똑같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지금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간첩과 성범죄자가 같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다르다. 간첩이 더 심각한 문제다. 페미니즘 광풍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국가 분열과 전복을 노리는 간첩과 일개 범죄자를 같은 잣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간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다. 이웃이 간첩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걸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자가 독재정권과 싸워 얻어낸 결과 중 하나다. 그럼에도 간첩보다 중요도가 낮은 일개 범죄자 따위를
색출하기 위해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상정하고 대화를 사전 검열하는 이 사태는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자유침해며 국민능멸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 이번 검열은 독재와 맞서 싸운
이들이 찬성했다는 점에서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추태다.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다면 독재보다는 검열이 낫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겨 묻은 개가 똥 묻는 개를 나무라는 것이다. 독재에 맞선 자유의 상징과도 같던 이들의 퇴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둘째, 국가 이념 죽이기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나는 일관된 태도를
취하겠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것처럼 검열정권을 비판하겠다. 인간이 일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간첩일 수 있으니 국가의 안녕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네가 범죄자일수 있으니 국민의 안전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동일하다. 오히려 간첩수색이 더 타당하다. 그 방법의 잔혹성은 차치하고 명분만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런 자유침해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보다 더 약한 수준의 것을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가? 사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는 시대, 불변가치를 훼손하고 객관성도 갖추지 못한 수준 낮은 사상들이 정의라 떠들며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시대, 많은 이들이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일제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유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공산침공에 맞서 국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군사독재에 맞서 국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국가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임이 분명하다면, 이 검열사태는 이번 정권의 그 어떤 실책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을 향한 네 순수한 분노는 어느
때보다 정당하다.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실로 비참한 시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여성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사상들을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에 반대하겠다. 세 살 버릇 여든 살 간다는 속담에 빌어 말하자면, 세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나 다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성 상품화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남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자유롭고 여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부자유스럽다. 이건 멋대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걸 여성인권이라 포장하며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여성인권이 아니라 여성억압이다. 과거 유교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의 정조관념을 근거로 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다. 지금 한국에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억압받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여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자유로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 문화 억압이 있어야 성관계를 맺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성 문화 억압은 성 터부시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한다고
성관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성 문화 억압으로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를 노리자는 주장은 애초에 성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해당된다. 한국은 유교의 남녀유별과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이성애결핍이
발생하여 출산율이 낮아졌고,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여 이성애가 더욱 결핍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이 출산율 저하는 한국의 인간관계붕괴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천박한 사상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더 심각해질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를 혼란케 하는 건 여성주의의
주장 자체가 아니다. 일부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별다른 여과 없이 그들의 주장을 감성적으로 판단하고 정책에 반영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여성주의의 주장을 이성적으로 받아드려
꼭 필요한 것만 반영했다면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괴롭다. 본래 삼권 중 어떤 권력이 잘못하면 다른 권력이 견제를 해야 함이 마땅한데 입법의 잘못에는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의 수장인 대통령은 입법과 같은 정당이고 관료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법 또한 종종 여론에 휘말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일부 정상적인 삼권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그 힘이 미약하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광기를 막기 어려웠던
것처럼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의 자유이념 붕괴나 사법의 법치주의 파괴나 행정의 권력에 고개 숙이기 따위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판사와 관료가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나 그 어떤 이의 주장도 막으면 안 되는 것처럼 판사와 관료의 주장 또한 막아서는 안 된다. 입법 또한 모든 정치가 개개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삼권에 요구하겠다. 광기의 흐름에 파묻히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길 바라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매카시즘의 사상검증 명분과 페미니즘의 대화검열 명분이 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그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광풍의 시대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매카시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의 시대. 후대에 광인으로 평가 받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이
광기와 선을 긋길 권하겠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당연한 걸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통금을 걸고 지역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황당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자유 억압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게 자유와 안전과의 관계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전하지 못하고 안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밤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위험한 지역으로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온라인도 마찬가지다. 댓글 자체를 막으면 악플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고 만다. 온라인에서는 악플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자유국가라면 온라인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 걸 감수하고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잘못이 나타날 걸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대화를 사전 검열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짓이다. 그야말로 국가 이념 죽이기다. 자유국가의 입법이 자유 이념을 죽이고 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통탄스럽다. 이러한 위험부담에 대한 약속은 대량생산도 동일하다. 대량생산을 하면 분명 불량품이 나타나 국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모든 생산을 수공업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많은 국민들에게 생산품을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국민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자유와 풍요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셋째, 국민 성장 죽이기
성장에는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가
필요하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강력한 통제로 질서가 유지되는
걸 보며 중국의 사회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해버리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강요하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다소 질서가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질서가 흔들리는 실수가 발생해도 보장을 해야
그 실수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인류는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안전을 명목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국민의 성장을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겠다. 이는 아동교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강력한 통제로 키우면 분명 자녀는 안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미숙아로 자라게 된다. 이는 사회가 발전하여 아동의 인권이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사회에서 아동의 인권을 중요시하여 보호자에게 아동보호를
강압한다. 그러면 보호자는 아동이 사고 치거나 당하지 않도록
보호자 및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의지가 약화된 아동은 스스로 성장하는 방법을 잃고 어른에게 의존하며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되어버린다. 특히 유교권 국가는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아동의
의지를 약화하는 일이 잦다. 아동의 의지가 약해야 어른의 말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보통 유교권 국가에서 교육실패는 보통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생한다. 사회초년생의 황당한 실수는 교육단계에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줘야 함이 마땅한데 안전을 핑계로 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사회에 내던져 버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성년 때 이미 운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성관계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6세에 운전이 가능하고 덴마크에서는 학교에서 성관계까지
허용하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가 자녀의 성교육을 반대할 수 없다는
법조항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진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암기만 달달 시키면 어떻게 하나. 진짜 슬프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는 유지하고 만변가치는 인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환경에 적응 실패한 동물이 도태되는 것과 같이 자유와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는 앞으로 도태될 것이다. 나는 한국이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럼에도 미성년에게 성교육은 이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 그러면 안 된다. 출산율 0.6을 찍고도 모르겠는가? 이제 변하지 않으면 멸망한단 말이다!
중학생의 범죄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중학생을
의제강간의 대상으로 지정해놔 그들의 범죄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학생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열등하다 해놨는데 어떻게 성인과 비슷한
처벌을 행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높은 정보양을 고려하여 그것에 맞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신연령을 높여야 하는데 중학생은 미숙하다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학생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보호를 명목으로 억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버렸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우행이다. 중학생에게 성 강요를 하거나 노리개로 삼은 것에 대한 대처는 중학생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중학생에게 그 강요에 맞서 싸울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갖출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이 마땅했다. 만약 피해자가 바로 신고할 수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새장에 가두는 쪽이 현명한가, 새가 사냥하거나 위험에 도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가, 답답하구나. 지금 중학생이 범죄를 저질러도 이것 때문에 제대로
대처가 불가능하다. 중학생이 모텔에서 경찰을 조롱해도 어떤 대책이 없다. 그냥 조롱 당하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은 열등한 존재기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다.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정보양이 늘면서 중학생의 범죄 수위는 나날이 높아질 것이 분명한데 그걸 막을 방법을 원천
차단시켰으니 참 할말이 없다. 정보양이 늘면 정보양에 맞춰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아니면 질서가 흔들린다. 정보를 차단하면 된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이 얌전이 정보를 차단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얌전한 애들만 정보 차단으로 미숙하게 성장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를 법한 학생은 얌전한 학생을 괴롭히며
놀 것이고 말이다. 정보 불균형 현상만 가속화된다. 참 진짜 문제해결 방식 따위가 너무 낡았다. 페미니즘 광풍이 끝나야 법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 모든 국민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억압은 여성의 성장도 방해한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힘든 일은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몫이다. 그 세계관에서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성장할
수 없었고 남성은 힘든 일을 했지만 성장할 수 있었다. 여성은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여성의 성장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한국은 가부장제 세계관으로 지금까지 교육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의지약화는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힘든 일을 주지 않는 근거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적인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피했다는 것만으로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힘든 일을 주는 것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는 평등한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성차별과 혐오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복무가 그러하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이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군복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 의무를 맡기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으니까 여성인권이라 말한다. 그런데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개인의 성장도 하지 못하고 사회적 입지도 갖추지 못했다. 의무를 행하지 않고 어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지금 비정상적인 혜택은 페미니즘 광풍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정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의무를 행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사회적 입지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은 군복무를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복무에 필요한 체력측정을 남성과 동일하게 하면
일부 여성만 군복무를 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출산으로 병역면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권을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나 부동산 참패나 페미니즘 광풍
따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사실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정도로 큰 실패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역사와 영토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정책의 실패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실패가 있다. 바로 인간관계 유지 실패다. 한국이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상과 제도를 재정비했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인간관계가 붕괴하고 있다. 그 붕괴의 여파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성관계가 붕괴하니까 출산율이 낮아진 것이다. 가족관계가 붕괴하니까 학생자살과 노인자살이 늘어난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인간관계 붕괴의 징조라 해석하면
답이 나온다. 수직에서 수평으로의 전환 실패, 다른 말로 자유에 대한 적응 실패다. 하나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분열하는 관계를 잇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이보다 더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출산율이 더욱 낮아지고 자살률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다. 위기가 발생해도 인간관계가 튼튼하면 합심하여 맞설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붕괴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관계 붕괴를 방치하는 걸 넘어 보다 더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실패가 어디 있겠는가? 앞으로 온라인 산업 발달이 부르는 오프라인 관계희소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응을 하지 못하면 더욱 더
심각해질 것이다. 관계붕괴로 보다 빠르게 국가를 소멸시키고 있으며
사전검열로 국내 기업과 국가 이념과 국민 성장을 죽이고 독재정권의 사상검증에 정당성까지 내줘버렸다. 관계붕괴와 사전검열은 이번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실패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사랑한다면 부디 지금이라도 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고개 숙여 부탁한다.
새로운 개념
검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지금부터 주장할 새로운
개념을 적용할 때 방해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의 오픈 채팅 및 오픈 커뮤니티 사전 검열이라는 걸 오프라인으로 적용하면 소모임 대화의 사전 검열일 정도로 심각한 만큼 어떤 형태의
발전이든 이 검열이 방해가 될 확률이 높다.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네이버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네이버는 구글에 맞서 검색으로 경쟁하면서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다. 금융이나 쇼핑이나 커뮤니티 등에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 네이버는 검색으로 구글과 경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글이 구글링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검색의 이미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기술이 발전해 검색능력이 뛰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구글을 이용해 검색할 것이다. 이미지 선점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네이버는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검색을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검색의 개념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여 접근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정착되면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구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경쟁상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쟁상대가 한국기업이길 바란다.
우선 검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검색이란 포털에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정보를
출력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자 그럼 이 행위가 오프라인에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도서관 같은 정보보관소에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책이나 자료를 훑어보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효율과 편리와 용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다. 온라인에서는 간단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직접 수작업으로 일일이 찾아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단어의 정의를 찾을 때 국어사전과 포털 검색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색을 할 때 오프라인의 정보 수집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본질은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관계다.
통상 온라인에서 검색은 혼자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에도 실명의 지인에게 묻거나
익명의 커뮤니티에 찾아가 질문을 해야 한다. 묻는 이는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있지만 답하는 이는 정보 제공이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확률도 낮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이는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생겨 친구 집에 가거나 동아리 모임에 찾아가는 것과 같다.(오프라인으로만 접근하여 스마트폰 등의 기기는 제외했다.)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도서관에서 정보 찾기는 여럿이서 하는 일이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은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협동하여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행했기 때문에 묻는 이나 답하는 이나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같기에 답하는 이가 성실하게 정보를
제공할 확률이 높다. 이걸 온라인으로 바꿔보자. 검색을 하는 순간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온라인의 편리와 효율과 용량과 함께 오프라인의 관계까지 잡을 수 있다. 이게 검색의 새로운 개념이다.
가령 포털에서 어떤 키워드로 검색을 한다고 해보자. 특정 이슈가 발생할 때 그 이슈를 검색한다. 검색하는 순간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을 개설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면 어떤 특정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검색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아주 쉽게 익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종래의 검색과 커뮤니티의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메신저의 오픈채팅을 개설해도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나 포털 자체에서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
개설 또는 참여가 가능해지면 굳이 돌아다니지 않고도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만날 확률이 높다.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통해 수준 높은 정보 수집하게 된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어떤 도서관에서 특정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들고
돌아다닌다. 같은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든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정보에 관련된 질답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여 수준 높은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만 접근했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면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도서관에서 혼자서 정보를 찾는 것보다 여럿이서 정보를
찾는 것이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를 얻게 되듯이 말이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매우 단순했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가 있다. 지금까지 검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걸 부수고 여럿이서 검색하는 것을 확립하며 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다면 구글과 경쟁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에서 인기적인 LOL의 기초 개념은 과거 워크래프트3의 유저가 만든 게임일 뿐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 게임의 개념이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걸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굉장히 흥행하게 되었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실제 단순하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검색한다는 개념은
분명 훌륭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같은 시간에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 있다. 이건 두 가지 대처방안이 있다. 비슷한 키워드를 묶어서 채팅에 포함시키는 방법과 검색 인구수 자체를 늘리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양념치킨을 검색하고 어떤 사람은 후라이드치킨을 검색했을 때, 해당 오픈채팅이 없을 경우 치킨이란 키워드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이러면 웬만해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인구가 많으면 대중적이거나 유행하는 키워드로는 쉽게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에서조차 의견을 내지 않는 이들이 많다.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리면 통상 조회수의 십 분의
일 이하로 의견이 달린다. 대부분은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애초에 목적 자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게 된다. 더구나 익명이며 검색이 끝나면 헤어질 관계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정보 수집이라는 당장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 달성 이전까지는 서로 정중하게 대화를 나눌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채팅을 하기 위해 검색 오픈채팅에
참여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건 주류 오픈채팅과 비주류 오픈채팅으로 대응방식이 달라진다. 참여자가 많은 주류 오픈채팅에서는 신고와 제재를 통해 관리를 하면 되고 참여자가 적은 비주류 오픈채팅은
참여자가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인구수가 적은 곳은 어차피 사람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악의적인 채팅을 하는 사람이 적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유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온라인의 발달로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폐쇄화가 진행되는 곳이 있다. 만약 포털 자체에서 검색을 통해 오픈채팅이 나타나게 되면 활동 커뮤니티나 SNS와 관계없이 대등하게 만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이
마련되게 된다.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붕괴되고 있는 중에 온라인 인간관계도
커뮤니티의 폐쇄화로 점점 붕괴되고 있는 중이므로 이런 만남의 장소는 분명 관계 개선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검색 오픈채팅에서 주고 받은 대화는 검색창을 끄면
사라지게 된다. 그걸 블로그나 카페 등으로 스크랩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하면 대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보관하더라도 익명이기 때문에 대부분 괜찮다.
검색 오픈채팅으로 온라인 익명 유저의 통합의 장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단순히 검색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넘어 온라인의 주도권 자체를 쥐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처럼
질문자가 답변자가 되고 답변자가 질문자가 될 수 있는 검색이 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유지하고 거기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자유와 풍요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매카시즘의 사상검증과도 같은 사전 검열을 해버리는 바람에 검색 오픈채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포털이 어떻게 발전할지도 모르겠다. 길이 막혔다. 괴롭다. 하루라도 빨리 이성을 잃은 광기가 끝나길 바라며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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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초점을 맞춘 건 그냥 상대적으로 자주 써서입니다. 별 이유는 없어요. 다음 글은 현대와 자동차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요. 국민은행이나 LG전자나 바이오산업이나 병원 등 아무거나 씁니다. 생각하는 건 익숙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 정상적인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을 맡겨줄 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착잡하네요.
사법은 사회질서를 위한 것이지 사회정의를 위한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하는 이들이 주로 감성적인 판결을 요구하지요. 가령 사전검열 따위와 달리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발생하여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생기면 개개인의 인권은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신패스에는 반대하지만 일시적이기 때문에
사전검열과는 다르게 접근해야겠죠. 백신패스와 사전검열을 음주운전 측정으로 비교하면 잠깐 일부에게 하는 것과 매일 모두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온라인이라서 체감하기 힘든데, 후자가 훨씬 심각한 겁니다. 사회질서에 초점을 맞춰야 사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건 그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유한 이의 부패를 평등하게 판결해야 하는 것도 사회정의가 아닌 사회질서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사리사욕 따위로 불평등하게 판결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리게 되겠지요. 아, 아! 인문학! 눈물 나게 슬프군요.
답답하군요. 어째서 인간이 만든 현상을 해석할 때 인간의 사상을
간과하는 건가요.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인간의 사상을 근거로 합니다. 동북아가 빠른 발전과 저출산과 중산층 파괴가 발생한
건 유교사상에 근거한 겁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 사상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제적 사상을 바꾸어 빈곤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상명하복 사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으나,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전환을 실패, 즉 자유에 적응에 실패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운 거죠. 거기에 한국은 페미니즘 광풍으로 이성관계붕괴 및
성 터부시가 증가되어 출산율도 유지 못하는 상황까지 도달했던 겁니다. 그걸 몰라서 동물의 생리활동이나 경제적 원인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거죠. 일본도 경제적 성장의 멈춤을 사상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뭐더라 일본은 태어났을 때부터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인식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정치권의 세습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제 또한 인간이 성장시키는 겁니다. 인간이 성장하지 않으면 경제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일본 정계는 일본 국민의 순응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정치했겠지만 그 때문에 일본 경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정치권도 위협할 정도로 날카로운 도전정신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일본이 이
이상 성장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최대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사상적 제도적 지원을 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동의 성장을 막는 장유유서나 여성의 성장을 막는
가부장제 세계관 따위는 이제 역사서에 남겨야 할 낡은 관념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며 최대한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이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