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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네이버와 포털 (0) 2021/12/19 PM 10:24

네이버와 포털

 

 

 

네이버가 포털인 이상 인터넷 검열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검열사태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시작하겠다.

 

 

첫째, 국내 기업 죽이기

 

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이런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편향된 알고리즘으로 인해 정보 불균형으로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이 많다. 알고리즘을 편향되지 않도록 바꿔야 한다. 얼핏 들으면 바른 말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유튜브에 관심이 없는 영상이 추천 목록으로 계속 올라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무종교인에게 종교영상이 계속 뜨고, 잡식인 사람에게 채식 영상이 계속 뜬다. 원치 않는 정보를 계속 접해야 하는 소비자는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 다른 영상 플랫폼을 이용해야겠다. 당연한 결과다. 소비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면 시장에 외면 받는다. 페이스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짜뉴스 걱정으로 원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짜면 시장에 외면 받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예측이 가능한데 그 누가 알고리즘을 바꾸려 하겠는가? 자유국가에서 가짜뉴스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교차검증을 통해 판별해야 한다. 진짜와 가짜의 판별을 위해 개인의 정보선택에 간섭하다 보면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수의 개인이 가짜뉴스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으로 판별능력을 높여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 기업의 알고리즘에 간섭하는 것은 첫째로 책임회피고 둘째로 기업 죽이기다. 페이스북이 미국기업이므로 미국정계에 간섭을 받아 시장에 외면 받게 된다면 그게 바로 국내 기업 죽이기가 된다.

 

이번 검열사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기업에 주로 적용되는 이번 검열은 실질적으로 그냥 책임회피 및 국내 기업 죽이기다. 과거 다음이 이메일을 전송할 때 우표값을 받겠다고 선언하여 시장에 외면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같이 지금 당장 국민이 국내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버리고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외 기업이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국내 사정에 맞는 서비스를 공급하면 지금 국내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다. 답답하다. 세계시장을 공략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조차 도태되도록 압박하고 있다. 정말 감성적인 문제해결은 다방면에 피해만 준다. 단호히 말하겠다. 기본적으로 자유국가에서 개인의 인성은 공교육에서 형성해 나가야 한다. 기업에 검열이란 규제를 강요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단순한 책임전가에 불과하다.

 

타당한 규제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번 검열사태는 말 그대로 자유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사상 검증했던 것과 같이 페미니즘 광풍으로 성범죄자 색출을 위해 대화 검열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이성을 잃은 짓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간첩을 잡기 위해 국민을 예비 간첩으로 상정하고 검열과 검증으로 점철된 시대가 있었다. 불온전단지가 있을지 모른다며 불심검문으로 소지품 검사를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걸 이번 사태에 맞춰보자. 오픈채팅에서 이미지에 공산주의 관련 용어나 공산당 찬양이 나오면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 검열이 되며 이걸 근거로 국가에 잡혀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에 반대하는 건 간첩이라며 공격한다. 똑같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지금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간첩과 성범죄자가 같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다르다. 간첩이 더 심각한 문제다. 페미니즘 광풍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국가 분열과 전복을 노리는 간첩과 일개 범죄자를 같은 잣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간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다. 이웃이 간첩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걸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자가 독재정권과 싸워 얻어낸 결과 중 하나다. 그럼에도 간첩보다 중요도가 낮은 일개 범죄자 따위를 색출하기 위해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상정하고 대화를 사전 검열하는 이 사태는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자유침해며 국민능멸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 이번 검열은 독재와 맞서 싸운 이들이 찬성했다는 점에서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추태다.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다면 독재보다는 검열이 낫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겨 묻은 개가 똥 묻는 개를 나무라는 것이다. 독재에 맞선 자유의 상징과도 같던 이들의 퇴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둘째, 국가 이념 죽이기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나는 일관된 태도를 취하겠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것처럼 검열정권을 비판하겠다. 인간이 일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간첩일 수 있으니 국가의 안녕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네가 범죄자일수 있으니 국민의 안전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동일하다. 오히려 간첩수색이 더 타당하다. 그 방법의 잔혹성은 차치하고 명분만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런 자유침해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보다 더 약한 수준의 것을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가? 사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는 시대, 불변가치를 훼손하고 객관성도 갖추지 못한 수준 낮은 사상들이 정의라 떠들며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시대, 많은 이들이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일제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유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공산침공에 맞서 국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군사독재에 맞서 국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국가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임이 분명하다면, 이 검열사태는 이번 정권의 그 어떤 실책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을 향한 네 순수한 분노는 어느 때보다 정당하다.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실로 비참한 시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여성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사상들을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에 반대하겠다. 세 살 버릇 여든 살 간다는 속담에 빌어 말하자면, 세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나 다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성 상품화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남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자유롭고 여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부자유스럽다. 이건 멋대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걸 여성인권이라 포장하며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여성인권이 아니라 여성억압이다. 과거 유교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의 정조관념을 근거로 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다. 지금 한국에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억압받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여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자유로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 문화 억압이 있어야 성관계를 맺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성 문화 억압은 성 터부시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한다고 성관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성 문화 억압으로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를 노리자는 주장은 애초에 성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해당된다. 한국은 유교의 남녀유별과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이성애결핍이 발생하여 출산율이 낮아졌고,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여 이성애가 더욱 결핍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이 출산율 저하는 한국의 인간관계붕괴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천박한 사상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더 심각해질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를 혼란케 하는 건 여성주의의 주장 자체가 아니다. 일부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별다른 여과 없이 그들의 주장을 감성적으로 판단하고 정책에 반영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여성주의의 주장을 이성적으로 받아드려 꼭 필요한 것만 반영했다면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괴롭다. 본래 삼권 중 어떤 권력이 잘못하면 다른 권력이 견제를 해야 함이 마땅한데 입법의 잘못에는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의 수장인 대통령은 입법과 같은 정당이고 관료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법 또한 종종 여론에 휘말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일부 정상적인 삼권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그 힘이 미약하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광기를 막기 어려웠던 것처럼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의 자유이념 붕괴나 사법의 법치주의 파괴나 행정의 권력에 고개 숙이기 따위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판사와 관료가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나 그 어떤 이의 주장도 막으면 안 되는 것처럼 판사와 관료의 주장 또한 막아서는 안 된다. 입법 또한 모든 정치가 개개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삼권에 요구하겠다. 광기의 흐름에 파묻히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길 바라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매카시즘의 사상검증 명분과 페미니즘의 대화검열 명분이 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그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광풍의 시대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매카시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의 시대. 후대에 광인으로 평가 받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이 광기와 선을 긋길 권하겠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당연한 걸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통금을 걸고 지역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황당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자유 억압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게 자유와 안전과의 관계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전하지 못하고 안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밤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위험한 지역으로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온라인도 마찬가지다. 댓글 자체를 막으면 악플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고 만다. 온라인에서는 악플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자유국가라면 온라인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 걸 감수하고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잘못이 나타날 걸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대화를 사전 검열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짓이다. 그야말로 국가 이념 죽이기다. 자유국가의 입법이 자유 이념을 죽이고 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통탄스럽다. 이러한 위험부담에 대한 약속은 대량생산도 동일하다. 대량생산을 하면 분명 불량품이 나타나 국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모든 생산을 수공업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많은 국민들에게 생산품을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국민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자유와 풍요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셋째, 국민 성장 죽이기

 

성장에는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가 필요하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강력한 통제로 질서가 유지되는 걸 보며 중국의 사회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해버리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강요하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다소 질서가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질서가 흔들리는 실수가 발생해도 보장을 해야 그 실수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인류는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안전을 명목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국민의 성장을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겠다. 이는 아동교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강력한 통제로 키우면 분명 자녀는 안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미숙아로 자라게 된다. 이는 사회가 발전하여 아동의 인권이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사회에서 아동의 인권을 중요시하여 보호자에게 아동보호를 강압한다. 그러면 보호자는 아동이 사고 치거나 당하지 않도록 보호자 및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의지가 약화된 아동은 스스로 성장하는 방법을 잃고 어른에게 의존하며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되어버린다. 특히 유교권 국가는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아동의 의지를 약화하는 일이 잦다. 아동의 의지가 약해야 어른의 말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보통 유교권 국가에서 교육실패는 보통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생한다. 사회초년생의 황당한 실수는 교육단계에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줘야 함이 마땅한데 안전을 핑계로 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사회에 내던져 버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성년 때 이미 운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성관계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6세에 운전이 가능하고 덴마크에서는 학교에서 성관계까지 허용하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가 자녀의 성교육을 반대할 수 없다는 법조항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진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암기만 달달 시키면 어떻게 하나. 진짜 슬프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는 유지하고 만변가치는 인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환경에 적응 실패한 동물이 도태되는 것과 같이 자유와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는 앞으로 도태될 것이다. 나는 한국이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럼에도 미성년에게 성교육은 이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 그러면 안 된다. 출산율 0.6을 찍고도 모르겠는가? 이제 변하지 않으면 멸망한단 말이다!

 

중학생의 범죄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중학생을 의제강간의 대상으로 지정해놔 그들의 범죄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학생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열등하다 해놨는데 어떻게 성인과 비슷한 처벌을 행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높은 정보양을 고려하여 그것에 맞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신연령을 높여야 하는데 중학생은 미숙하다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학생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보호를 명목으로 억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버렸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우행이다. 중학생에게 성 강요를 하거나 노리개로 삼은 것에 대한 대처는 중학생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중학생에게 그 강요에 맞서 싸울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갖출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이 마땅했다. 만약 피해자가 바로 신고할 수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새장에 가두는 쪽이 현명한가, 새가 사냥하거나 위험에 도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가, 답답하구나. 지금 중학생이 범죄를 저질러도 이것 때문에 제대로 대처가 불가능하다. 중학생이 모텔에서 경찰을 조롱해도 어떤 대책이 없다. 그냥 조롱 당하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은 열등한 존재기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다.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정보양이 늘면서 중학생의 범죄 수위는 나날이 높아질 것이 분명한데 그걸 막을 방법을 원천 차단시켰으니 참 할말이 없다. 정보양이 늘면 정보양에 맞춰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아니면 질서가 흔들린다. 정보를 차단하면 된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이 얌전이 정보를 차단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얌전한 애들만 정보 차단으로 미숙하게 성장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를 법한 학생은 얌전한 학생을 괴롭히며 놀 것이고 말이다. 정보 불균형 현상만 가속화된다. 참 진짜 문제해결 방식 따위가 너무 낡았다. 페미니즘 광풍이 끝나야 법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 모든 국민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억압은 여성의 성장도 방해한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힘든 일은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몫이다. 그 세계관에서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성장할 수 없었고 남성은 힘든 일을 했지만 성장할 수 있었다. 여성은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여성의 성장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한국은 가부장제 세계관으로 지금까지 교육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의지약화는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힘든 일을 주지 않는 근거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적인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피했다는 것만으로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힘든 일을 주는 것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는 평등한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성차별과 혐오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복무가 그러하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이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군복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 의무를 맡기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으니까 여성인권이라 말한다. 그런데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개인의 성장도 하지 못하고 사회적 입지도 갖추지 못했다. 의무를 행하지 않고 어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지금 비정상적인 혜택은 페미니즘 광풍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정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의무를 행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사회적 입지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은 군복무를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복무에 필요한 체력측정을 남성과 동일하게 하면 일부 여성만 군복무를 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출산으로 병역면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권을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나 부동산 참패나 페미니즘 광풍 따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사실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정도로 큰 실패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역사와 영토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정책의 실패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실패가 있다. 바로 인간관계 유지 실패다. 한국이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상과 제도를 재정비했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인간관계가 붕괴하고 있다. 그 붕괴의 여파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성관계가 붕괴하니까 출산율이 낮아진 것이다. 가족관계가 붕괴하니까 학생자살과 노인자살이 늘어난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인간관계 붕괴의 징조라 해석하면 답이 나온다. 수직에서 수평으로의 전환 실패, 다른 말로 자유에 대한 적응 실패다. 하나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분열하는 관계를 잇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이보다 더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출산율이 더욱 낮아지고 자살률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다. 위기가 발생해도 인간관계가 튼튼하면 합심하여 맞설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붕괴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관계 붕괴를 방치하는 걸 넘어 보다 더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실패가 어디 있겠는가? 앞으로 온라인 산업 발달이 부르는 오프라인 관계희소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응을 하지 못하면 더욱 더 심각해질 것이다. 관계붕괴로 보다 빠르게 국가를 소멸시키고 있으며 사전검열로 국내 기업과 국가 이념과 국민 성장을 죽이고 독재정권의 사상검증에 정당성까지 내줘버렸다. 관계붕괴와 사전검열은 이번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실패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사랑한다면 부디 지금이라도 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고개 숙여 부탁한다.

 

 

 

새로운 개념

 

검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지금부터 주장할 새로운 개념을 적용할 때 방해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의 오픈 채팅 및 오픈 커뮤니티 사전 검열이라는 걸 오프라인으로 적용하면 소모임 대화의 사전 검열일 정도로 심각한 만큼 어떤 형태의 발전이든 이 검열이 방해가 될 확률이 높다.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네이버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네이버는 구글에 맞서 검색으로 경쟁하면서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다. 금융이나 쇼핑이나 커뮤니티 등에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 네이버는 검색으로 구글과 경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글이 구글링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검색의 이미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기술이 발전해 검색능력이 뛰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구글을 이용해 검색할 것이다. 이미지 선점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네이버는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검색을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검색의 개념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여 접근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정착되면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구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경쟁상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쟁상대가 한국기업이길 바란다.

 

우선 검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검색이란 포털에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정보를 출력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자 그럼 이 행위가 오프라인에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도서관 같은 정보보관소에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책이나 자료를 훑어보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효율과 편리와 용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다. 온라인에서는 간단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직접 수작업으로 일일이 찾아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단어의 정의를 찾을 때 국어사전과 포털 검색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색을 할 때 오프라인의 정보 수집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본질은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관계다.

 

통상 온라인에서 검색은 혼자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에도 실명의 지인에게 묻거나 익명의 커뮤니티에 찾아가 질문을 해야 한다. 묻는 이는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있지만 답하는 이는 정보 제공이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확률도 낮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이는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생겨 친구 집에 가거나 동아리 모임에 찾아가는 것과 같다.(오프라인으로만 접근하여 스마트폰 등의 기기는 제외했다.)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도서관에서 정보 찾기는 여럿이서 하는 일이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은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협동하여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행했기 때문에 묻는 이나 답하는 이나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같기에 답하는 이가 성실하게 정보를 제공할 확률이 높다. 이걸 온라인으로 바꿔보자. 검색을 하는 순간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온라인의 편리와 효율과 용량과 함께 오프라인의 관계까지 잡을 수 있다. 이게 검색의 새로운 개념이다.

 

가령 포털에서 어떤 키워드로 검색을 한다고 해보자. 특정 이슈가 발생할 때 그 이슈를 검색한다. 검색하는 순간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을 개설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면 어떤 특정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검색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아주 쉽게 익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종래의 검색과 커뮤니티의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메신저의 오픈채팅을 개설해도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나 포털 자체에서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 개설 또는 참여가 가능해지면 굳이 돌아다니지 않고도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만날 확률이 높다.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통해 수준 높은 정보 수집하게 된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어떤 도서관에서 특정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들고 돌아다닌다. 같은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든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정보에 관련된 질답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여 수준 높은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만 접근했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면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도서관에서 혼자서 정보를 찾는 것보다 여럿이서 정보를 찾는 것이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를 얻게 되듯이 말이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매우 단순했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가 있다. 지금까지 검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걸 부수고 여럿이서 검색하는 것을 확립하며 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다면 구글과 경쟁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에서 인기적인 LOL의 기초 개념은 과거 워크래프트3의 유저가 만든 게임일 뿐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 게임의 개념이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걸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굉장히 흥행하게 되었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실제 단순하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검색한다는 개념은 분명 훌륭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같은 시간에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 있다. 이건 두 가지 대처방안이 있다. 비슷한 키워드를 묶어서 채팅에 포함시키는 방법과 검색 인구수 자체를 늘리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양념치킨을 검색하고 어떤 사람은 후라이드치킨을 검색했을 때, 해당 오픈채팅이 없을 경우 치킨이란 키워드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이러면 웬만해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인구가 많으면 대중적이거나 유행하는 키워드로는 쉽게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에서조차 의견을 내지 않는 이들이 많다.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리면 통상 조회수의 십 분의 일 이하로 의견이 달린다. 대부분은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애초에 목적 자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게 된다. 더구나 익명이며 검색이 끝나면 헤어질 관계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정보 수집이라는 당장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 달성 이전까지는 서로 정중하게 대화를 나눌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채팅을 하기 위해 검색 오픈채팅에 참여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건 주류 오픈채팅과 비주류 오픈채팅으로 대응방식이 달라진다. 참여자가 많은 주류 오픈채팅에서는 신고와 제재를 통해 관리를 하면 되고 참여자가 적은 비주류 오픈채팅은 참여자가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인구수가 적은 곳은 어차피 사람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악의적인 채팅을 하는 사람이 적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유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온라인의 발달로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폐쇄화가 진행되는 곳이 있다. 만약 포털 자체에서 검색을 통해 오픈채팅이 나타나게 되면 활동 커뮤니티나 SNS와 관계없이 대등하게 만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이 마련되게 된다.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붕괴되고 있는 중에 온라인 인간관계도 커뮤니티의 폐쇄화로 점점 붕괴되고 있는 중이므로 이런 만남의 장소는 분명 관계 개선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검색 오픈채팅에서 주고 받은 대화는 검색창을 끄면 사라지게 된다. 그걸 블로그나 카페 등으로 스크랩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하면 대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보관하더라도 익명이기 때문에 대부분 괜찮다.

 

검색 오픈채팅으로 온라인 익명 유저의 통합의 장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단순히 검색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넘어 온라인의 주도권 자체를 쥐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처럼 질문자가 답변자가 되고 답변자가 질문자가 될 수 있는 검색이 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유지하고 거기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자유와 풍요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매카시즘의 사상검증과도 같은 사전 검열을 해버리는 바람에 검색 오픈채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포털이 어떻게 발전할지도 모르겠다. 길이 막혔다. 괴롭다. 하루라도 빨리 이성을 잃은 광기가 끝나길 바라며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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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초점을 맞춘 건 그냥 상대적으로 자주 써서입니다. 별 이유는 없어요. 다음 글은 현대와 자동차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요. 국민은행이나 LG전자나 바이오산업이나 병원 등 아무거나 씁니다. 생각하는 건 익숙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 정상적인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을 맡겨줄 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착잡하네요.

 

사법은 사회질서를 위한 것이지 사회정의를 위한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하는 이들이 주로 감성적인 판결을 요구하지요. 가령 사전검열 따위와 달리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발생하여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생기면 개개인의 인권은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신패스에는 반대하지만 일시적이기 때문에 사전검열과는 다르게 접근해야겠죠. 백신패스와 사전검열을 음주운전 측정으로 비교하면 잠깐 일부에게 하는 것과 매일 모두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온라인이라서 체감하기 힘든데, 후자가 훨씬 심각한 겁니다. 사회질서에 초점을 맞춰야 사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건 그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유한 이의 부패를 평등하게 판결해야 하는 것도 사회정의가 아닌 사회질서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사리사욕 따위로 불평등하게 판결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리게 되겠지요. 아, 아! 인문학! 눈물 나게 슬프군요.

 

 

답답하군요. 어째서 인간이 만든 현상을 해석할 때 인간의 사상을 간과하는 건가요.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인간의 사상을 근거로 합니다. 동북아가 빠른 발전과 저출산과 중산층 파괴가 발생한 건 유교사상에 근거한 겁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 사상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제적 사상을 바꾸어 빈곤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상명하복 사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으나,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전환을 실패, 즉 자유에 적응에 실패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운 거죠. 거기에 한국은 페미니즘 광풍으로 이성관계붕괴 및 성 터부시가 증가되어 출산율도 유지 못하는 상황까지 도달했던 겁니다. 그걸 몰라서 동물의 생리활동이나 경제적 원인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거죠. 일본도 경제적 성장의 멈춤을 사상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뭐더라 일본은 태어났을 때부터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인식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정치권의 세습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제 또한 인간이 성장시키는 겁니다. 인간이 성장하지 않으면 경제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일본 정계는 일본 국민의 순응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정치했겠지만 그 때문에 일본 경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정치권도 위협할 정도로 날카로운 도전정신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일본이 이 이상 성장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최대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사상적 제도적 지원을 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동의 성장을 막는 장유유서나 여성의 성장을 막는 가부장제 세계관 따위는 이제 역사서에 남겨야 할 낡은 관념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며 최대한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이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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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5) 2021/12/06 PM 01:03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할 분야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다. 누구나 다 안다. 오프라인 유통업에 미래가 없다는 걸 말이다. 통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유통업체 매출이 전년 대비 오프라인은 3.6% 감소하고 온라인은 18.4%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유통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에서 유리하다. 온라인은 스마트폰으로 상품을 고르기만 해도 집까지 배송되기 때문에 편리경쟁에서 유리하다. 오프라인 유통업은 가격과 편리에서 온라인 유통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역할이 달라질 뿐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교육은 단순한 지식주입이 아닌 자아형성 후 지식 검색 및 활용으로 바뀌어야 하고, 언론은 단순한 정보공급이 아닌 정보의 연결로 인간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정보관리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단순한 수요에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있는 수요에 생산품을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수요를 만들어서 유통을 해야 한다. 인간이 모여 수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수요에 상품을 유통해야 한다. 온라인이 가격과 편리를 담당한다면 오프라인은 이제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한다. 수요에 맞춘 유통과 수요를 만든 유통은 전혀 다르다.

 

이번 글에서 신세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단지 신세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신세계가 유통업에 전념하는 것 같고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을 보았을 때 수요공급이 아닌 수요창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초점을 맞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글은 하나씩 어떤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할 이유는 기술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희소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애정결핍

 

한국은 애정결핍국가다. 장유유서로 인해 세대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가정과 학교와 기업에서 나이차이가 나면 인간관계에 선이 그려져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 결과 가족여행이나 회식자리를 꺼려하는 사람이 늘었다. 장유유서는 연상과 연하의 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기에 다수의 연상이 연하와의 평등을 불편해하기에 연하와의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가 어렵다. 불평등을 바라는 연상과 평등을 바라는 연하가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따위로 인해 성별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어린 시기부터 이성과 가까이 지내며 이성애를 키워나가야 함에도, 연상의 권위로 남녀를 갈라놓아 이성관계를 줄이고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여 성관계를 막은 탓에 정상적인 이성애로 성장치 못했다. 그 결과 남성은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거나 여성은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핵가족과 1인가구 증가, 저출산이나 가족애 결핍 따위는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여성인권을 빌미로 남녀의 관계와 성관계를 더욱 줄이고 막으면서 한국의 이성애는 심각할 정도로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말았다. 이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여성주의의 특성이 야기한 것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을 주관으로 여기는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다 보니 이런 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통상 인권이라 함은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함에도 여성주의는 성 상품화나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의지를 무시하고 여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다. 성 상품과 매매는 그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거지, 그 자체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노동 상품과 매매가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은 한국 여성 인권이 아닌 가부장제 세계관 속의 여성 인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지 않은 여성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존재기 때문에 약한 의지에 맞춘 할당제와 강한 수치심에 맞춘 성적 억압이 나타나게 된다. 유교적 여성주의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가 보통 이렇다. 한국 여성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성의 독선을 비판하던 이들이 여성의 독선을 주장하고 있다. 대다수의 신세대와 일부 기성세대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났음에도 일부 신세대와 대다수 기성세대가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가부장제 세계관 속 있는 사람은 가산점이나 할당제 따위의 여성특혜나 성적 억압을 주장하지만,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극단 여성주의나 온건 여성주의나 차이가 없다. 근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정녕 여성의 인권을 바란다면 여성을 억압하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진지하게 말하겠다. 나는 여성을 객관적으로 우수하다 생각하고 있다. 학교성적 따위의 다양한 지표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여성특혜나 여성 성 억압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현명한 여성을 응원한다. 우자와 현자는 성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여성인권은 인간의 인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

 

한국은 애정결핍국가였음에도 과거에는 강요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세대간에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이성간의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강요가 사라지자 관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핵가족, 1인가구, 저출산 따위는 인간관계 감소로 인한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감소한 관계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자아를 유지하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업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그나마 살아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으로 생계유지조차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또한 앞으로 기존 산업은 대부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할 예정이다. 온라인 일자리가 늘고 오프라인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하게 된다.

 

다른 국가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만큼 애정이 결핍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애정결핍 된 상황에서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은 대다수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소멸시킬 기폭제가 될 확률이 높다. 현재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안보,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장 오프라인 관계 소멸의 위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와 NFT를 막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건 기술발전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교통의 발달로 인간의 체력이 저하된 것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간의 문해력이 저하된 것과 같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된 것일 뿐이다. 발전은 발전대로 하게 두고, 그 발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저출산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땅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인구수가 줄어들게 되는 저출산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출산이 애정결핍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애정결핍을 만든 사상은 불변가치가 아니라 만변가치기 때문이다.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사상의 변화로 애정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신세대에 맞춰야 한다. 지금 신세대는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메타버스와 NFT가 성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희소될 확률이 높다. 저출산이 과거서부터 수많은 징조 속에서 현재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인간관계 희소 또한 수많은 징조 속에서 미래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사회의 변화로 저출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면, 현재와 미래는 기술의 변화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라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변화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인터넷 이전에서 이후로의 변화로 기술적응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이 동시에 필요한 국가존립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 한국은 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관점으로 가보자. 어째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온라인 인간관계로 충분하지 않는가? 어쩌면 먼 미래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불변가치에 해당하는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이성의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있어야 출산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이성이 서로 사랑을 해야 종이 존속된다.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통상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사상과 기술의 발전은 인본주의를 근거로 한 불변가치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한 사상이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말한다. 본래 보수와 진보가 논쟁을 벌어야 할 사안은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다. 인간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싸워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선동과 이권 다툼으로 점철된 정치를 보면 몹시 슬퍼 삶의 허망함을 느낄 정도다. 인권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에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무엇이 정녕 인간을 위한 길인지 고찰하길 간곡히 바란다. 내가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가 옳다 말하고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진보는 지나치게 과거의 것을 지우려 한다. 내가 가고 싶은 미래는 인간을 위한 미래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전부 그것이 인간을 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런 것은 나 개인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일도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인류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향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최근 가상자산이나 메타버스 등에서 논의 중인 탈중앙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탈중앙화는 불변가치인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국가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중앙화로 세금을 걷지 못하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곳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결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어떤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탈중앙화는 탈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나키즘 수준으로 저급하다. 만약 진정 탈중앙화를 원한다면 탈국가를 하고 나서 탈중앙화를 원하는 이들끼리 살아가길 바란다. 탈중앙화는 사상적 관점이 아니라 기술적 관점에서 나타난 것일 것으로 보인다. 탈중앙화는 부디 인문학적 고찰을 좀 더 하고 나서 하길 주장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기본적인 불변가치를 부정하였다. 분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승패는 상품화 능력으로 결정된 것은 맞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며 경쟁을 통해 상품가치를 높여 그걸 소비하는 국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경제를 발전하게 하였다. 공산주의는 생산자를 생각하는 바람에 경쟁을 없애 상품가치를 높일 이유가 없어 상품 품질 저하로 국내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경쟁 없이 만든 상품이 경쟁 속에 만들어진 상품을 이길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돌아섰고 중국은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공산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상품가치를 올리는 방안을 사용했다.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난의 행군을 할 정도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떤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가 상품가치를 높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에는 미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란 불변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는 기득권층은 마음대로 욕망을 추구하고 있고 그 외는 살기 괴로울 정도로 절제시키고 있다. 이런 차별로 인해 불만이 쌓이게 되고 언젠가 그 불만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다. 어떤 사상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을 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사법 언론 은행 등에 대한 불만이 치솟고 있다. 이는 특별히 한국이 무능하기 보다는 한국 국민이 접하는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사회를 보다 엄격하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런 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법을 옹호하고 언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할이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불변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따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을 비판하며 사법의 인공지능화를 주장하면서 삼권분립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맹목적으로 원하는 판결이 아니면 화부터 내며 법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사법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일부 판사가 성인지감수성이 법치주의 기본인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차별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을 행함을 보면 국민들의 비판은 지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다고 본다. 성인지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냐면 돈인지감수성 따위를 생각해보면 된다. 약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빈민 또한 약자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성인지감수성은 돈이 적은 빈민은 약자기 때문에 부자와 다르게 판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주의 자체가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여성주의가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법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겠다. 사리사욕 또는 전관예우 따위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판결을 하는 일이 많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논리로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가 매우 낮음에도 언론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생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만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 아직까지 없다. 얼마나 많은 개인방송이 수익이 안 되는 일에 집중하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언론의 쇠퇴가 아닌 언론의 새로운 길을 주장했던 것이다. 은행을 비판하며 가상자산의 탈중앙화를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탈중앙화를 비판하는 까닭도, 탈중앙화가 국가 내에서 은행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지 못하는 이상 탈중앙화는 결코 은행이나 경제를 대체할 수 없다.

 

많은 사상이 불변가치에 대해 무지하다. 채식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잡식을 부정한다.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을 부정한다. PC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비웃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채식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공육이 바람직할 것이고 비폭력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게임이나 격투기가 바람직할 것이며 PC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그가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 인간에게 피해를 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인본주의적 방법이다. PC주의를 잠시 말해보자. PC주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를 생각했던 공산주의처럼 타인이 아닌 본인을 생각하자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바로 이런 흐름에서 나타난 것이다. 본인을 생각하며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게 만드는, 인간의 향상심을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만변가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보통 사상이 그러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자리잡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장유유서나 정조관념 따위가 한국인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걸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불변가치는 훼손하면서 만변가치는 굳게 지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애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면서 특정 사상에 매달리는 꼴을 보면 속이 터진다. 유교의 연령차별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상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제 연상이 아닌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가령 어떤 노인이 피해를 입으면 노인공경할 줄 모르냐고 말할 게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건 나이 성별 관계 없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불변가치고 특정 인간에게만 공경하는 건 만변가치다. 많은 이들이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요즘 시대는 논쟁이 쉬운 측면이 있다. 어떤 주장에서 불변가치를 훼손 또는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걸 지적하는 순간부터 논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논쟁이 불변가치만 파악하고 있어도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정말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 짓지 못한다. 취향과 도덕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인권과 독선을 구분 짓지 못한다. 허용과 권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권장과 강요를 구분 짓지 못한다. 자유와 방임을 구분 짓지 못한다. 재력과 전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개인과 집단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의지와 세뇌를 구분 짓지 못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수하다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자와 교수가 작성이나 번역 또는 해제한 사상서로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를 보면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게 몹시 괴롭다. 어린애도 논파할 수 있는 저급한 논리를 가지고 선동하고 있는 꼴을 보면 환장하겠다. 평등하다면서 한쪽에 특혜를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거나, 성 상품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남성 성 상품화는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한다거나 말이다. 이런 것은 가부장제 세계관에 익숙한 인간들이 저지를법한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단순히 인문학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 기초인문학 수준이 낮은 편임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인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보통 낮은 수준의 인문학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에게 묻고 싶지 않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상적인 사상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굳이 책임을 묻자면 사상가 또는 인문학이다. 그러나 과거의 것은 물을 수 없어도 현재의 것은 물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책임져야 할 일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낡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애정결핍으로 인한 저출산이라는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그만 문제를 악화시키길 간곡히 바란다. 어떤 종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악이라면 한국인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도 악이다. 도대체가, 사회에 그렇게나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애국심이 없단 말인가? 작디 작은 나라가 열강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낭비할 힘 따위 없단 말이다. 유교의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아동과 여성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성적 억압과 한국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세계관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인권화하고 있는 무지한 작태는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오프라인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이성애는 인류가 단성생식 따위 같이 이성관계 외의 방법으로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가 된다. 인본주의적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불변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새로운 역할이다.

 

 

 

유통업계

 

온라인 유통업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말이 없다. 세부적으로 개선하거나 발전해야 하는 방향은 알아서 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프라인은 온라인과 가격경쟁과 편리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여가다. 아이쇼핑 또는 쇼핑데이트 따위가 보통 소비와 여가가 합쳐진 형태다. 이런 여가는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이길 수가 없다. 이후 온라인 또한 어떤 형태를 통해 여가까지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나 아직까지는 어렵다. 오프라인은 이 점을 공략해야 한다. 물론 단순히 공략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면 앞서 장황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한국의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를 담당해야 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상품의 수요에 유통하는 걸 담당하고 오프라인은 수요를 만들어서 상품을 유통하는 걸 담당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보통 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시장경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그 역할을 하길 바라게 되었을 뿐이다. 역할의 영역은 만변가치에 해당한다. 딱 부러지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인간이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제인식이 미비하기에 이 역할은 과거 빈 땅을 점령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선착순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 명백해지면 정부에서는 그런 이들에 대한 어떤 특정한 혜택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세금감면이라던가 말이다. 그럼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우선 종래의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가령 술집이나 PC방은 술과 서비스가 아닌 안주와 부식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보통 수요를 만든 다음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술과 게임이라는 라는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안주와 부식이라는 수요를 만들어 수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특별히 인간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수요와 수익을 고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가 나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시로는 충분하다. 이런 형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이상 이런 방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런 걸 보다 더 확장된 형태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신세계의 야구단 운영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여가와 유통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가령 메타버스와 NFT에 익숙해진 미래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 자체가 어색하여 야구장에 갈 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까지 필요하다.

 

 

 

오프라인 플랫폼화

 

온라인 유통업은 현실을 가상으로 연결하여 유통과 소비과정을 생략하는 것으로 가격과 편리를 잡은 것이라면, 온라인 플랫폼은 가상과 가상을 연결하여 시공간을 생략하는 것으로 거리와 관계를 잡았다. 관계, 온라인 인간관계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 오프라인 유통업은 온라인 플랫폼을 참고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온라인 플랫폼 몇 가지를 살펴보자. 유튜브나 로블록스 등의 특징은 어떤 생태계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고 있다. 목적이 영상이나 게임 따위로 다를 뿐이다. 이는 국가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목적이 인간이라는 것으로 다를 뿐이다. 즉 플랫폼 경제란 국가 안의 작은 국가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플랫폼 생태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플랫폼을 운영하고, 플랫폼에서 생기는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이런 구조를 오프라인 유통업 또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온라인의 경우 법적인 규제가 아직 들어서기 전이기 때문에 큰 제약 없이 성장하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경우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 만약 온라인에서는 허용되나 오프라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면 통상 법이 낡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깐 정리해보자. 오프라인 유통업이 가야 할 길은 있는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게 아닌 창출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출하느냐?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요가 창출된다. 창출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여 수익을 얻는다. 이 기본 구조에서 여가를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제공하면 된다. 그리하면 플랫폼 내에서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요에 대한 상품 유통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온라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수수료뿐만이 아니라 현실 상품 수요에 유통하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가 최근 상품광고를 하는 것을 볼 때 유사하게 수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유통과 간접 유통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한국 전통인 김치 담그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김치 담그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본래 생산하지 않는 소비자인 사람이 혼자 또는 집단이 가서 김치를 담근 다음, 소비해야 할 것 외의 남는 김치는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김치를 담근 사람은 남는 김치로 수익을 얻었다. 오프라인 플랫폼은 그 생산과 판매 과정 속에서 김치재료 유통수익과 김치생산 수수료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본래 오프라인 유통업체에서 소비를 하던 사람이 생산을 하여 수익을 얻었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체도 온라인 플랫폼과 비슷하게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었다. 차이점은 추가로 재료 유통이라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조가 바로 오프라인 플랫폼화다. 물론 이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산자의 인성, 생산된 김치의 품질이나 가격, 수요가 결정되지 않은 점 따위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건 온라인 플랫폼도 원래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문제다. 유튜브의 경우 우수한 품질의 영상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쉬운 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겠다. 그나마 나은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은 온라인 플랫폼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이 거쳐온 시기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담근 김치를 플랫폼 관리자가 시식해보고 맛을 품평하여 판매 허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최저품질을 보장한다. 생산자의 판매기록이나 맛의 평점 따위를 온라인 앱에 기록하는 것으로 생산자의 인성이나 가격 따위가 결정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식사를 해야 한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어차피 요리할 것이라면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잔뜩 한 뒤에 남는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어떤 일가가 있다.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여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 때 일가가 자신들이 먹을 요리를 만든 다음 남은 요리를 저렴하게 판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DIY를 하는 이들이 직접 취미로 만든 걸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이들과 같이 노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이렇게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었다. 점심시간에 생산하고 이후 시간에 소비를 한다. 이 과정이 전부 즐거운 여가다. 가족과 합심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걸 나누는 것으로 여가에 필요한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한다. 다른 생산자도 비슷하다. 여가 시간의 일부는 생산하고 일부는 소비한다. 그 과정 전체가 여가다. 이런 것이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합쳐진 오프라인 플랫폼, 오프라인 생태계다. 이것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온라인은 놀아주는 것으로도 비용이 지불되고 있다. 오프라인도 그런 식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사 입장에서 온라인 게임 무료 이용자는 다른 유료 이용자를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료 이용자를 위해 들어가는 고용이나 서버 유지 비용은 실질적으로 무료 이용자에게 지불되는 것과 같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놀아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무료 이용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즉 어떤 측면에서 그건 생산활동이다. 이걸 오프라인 플랫폼도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쓰고 있다. 예컨대 어떤 대회를 열고 상금을 준다고 해보자. 그때 주최측은 광고효과 따위를 목적으로 상금을 지급한다. 여기서 관점을 바꿔보자. 상금을 얻을 정도의 우수한 인간이 대회에 참가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대회에 참가하거나 관람하는 이들을 즐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요는 간단히 말해 놀아주는 비용이다. 주최측은 상금 수여자에게 놀아주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콘서트에서 떼창이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게 만약 다른 관객을 즐겁게 하여 콘서트 티켓 구매에 영향을 끼쳤다면 충분히 생산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산활동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생산활동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다. 어떤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광고가 생산활동이라면 이런 것 또한 생산활동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소비자의 소비 이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떼창이라면, 그런 떼창을 하는 소비자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사한 결과 떼창으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다른 소비자를 즐겁게 했다는 근거가 명확하다면, 그 근거로 티켓 할인이나 또는 적당한 금액을 환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지 못한 생산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아 다시 한번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가 속에서 생산과 소비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여가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라지는 직업들이 있다. 계산하는 직업이나 서빙하는 직업이나 홍보하는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여기서 관점을 바꾸자. 이 직업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라지는 걸 굳이 사라지지 않게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여가를 목적으로 하였을 때다. 어떤 사람이 여가를 즐길 때 2시간 정도 계산이나 서빙이나 인형탈을 쓰고 홍보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놀이를 즐긴다고 가정해보자. 여가 동안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생산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짧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계산이나 서빙에 지불되는 비용은 실질적으로 소비촉진 비용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광고비로 인식하면 된다. 계산이나 서빙에서 지불된 비용을 다른 유통상품으로 지불된 비용보다 더 크게 회수한다.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된다. 설령 회수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놀아주는 비용과 같이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다른 소비자의 소비를 촉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플랫폼 내에서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을 어떤 다른 소비자가 들어주는 것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소비자가 아이 돌보기를 원한다면 다른 소비자가 그걸 들어줄 수 있다. 물론 아이 돌보기는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외 심부름이나 상품 구매 고민상담 또는 디지털 문맹자가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을 구매하는 걸 잠시 도와주는 걸로도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가를 목적으로 한 오프라인 경제 플랫폼이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 거기서 발생하는 수요에 대한 재료 유통 수익과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 수익으로 생태계를 유지하고, 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세금으로 국가를 유지한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라인의 온라인화

 

온라인 인간관계와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가장 큰 차이는 익명이다. 온라인 인간관계는 오프라인과 달리 인간관계에 있어 익명이라는 영 번째 관계가 존재한다. 오프라인은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통성명을 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이 익명관계가 성립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지쳐 좀 더 가벼운 익명의 관계가 성립되는 온라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굳이 인간관계에 지치지 않더라도 편하고 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특성상 그렇게 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수직적인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많아 수평적인 온라인 인간관계를 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같이 수평적인 관계성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사상은 변하기가 쉽지 않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령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온라인과 같이 익명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어떤 특정 플랫폼 내에서는 모두가 익명의 닉네임으로만 교류할 것. 이것을 지정해두면 된다. 가령 혼자서 플랫폼에 출입한 후에, 테니스를 치고 싶다면 플랫폼 내에 있는 사람 중에 테니스를 치고 싶은 사람을 찾아 같이 치며 논다. 오프라인 플랫폼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혹시 따로 실명으로 만나고 싶다면 플랫폼 외의 지역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면 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같이 술만 마시면 되고,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만 같이 하면 된다. 이런 방식을 써서라도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시켜놔야 앞으로 있을 메타버스나 NFT 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익명 오프라인인 만큼 출입자의 인성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가 달라지는데, 그에 따라 2가지 필터를 적용한다. 첫째, 성년은 신용등급으로 미성년은 보호자의 신용등급으로 출입여부를 결정한다. 둘째, 익명 오프라인 진영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반말을 사용한다. 직원조차 반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반말이 불편한 인간은 출입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평등개념이 박힌 사람만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해 출입구 밖의 직원은 존댓말을 쓰고 출입구 안의 직원은 반말을 쓴다. 출입구 밖의 직원은 안에 들어갈 때 주의사항을 설명한다.

 

온라인은 지극히 편향적이다. 원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오프라인도 그걸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즐기던 문화를 접하자, 신체 나이 또한 어려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문화를 접함으로써 뇌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착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결과가 있기 때문에 온라인과 같이 구역을 만들어서 특정 세대에 최적화한 상품선별을 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오프라인의 역할극

 

오프라인 유통업의 변화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완전자동화 시대를 대비하여 일이 없어도 오프라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직업이 없어도 역할이 있어야 인간은 오프라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동호회 따위의 간사나 협회의 참여자 또는 무상봉사자 따위의 역할. 연금을 타거나 주식 또는 코인 또는 부동산 또는 상속 따위로 수익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인간 또한 사회에 속하여 살아갈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자는 역할주의를 통해 그것에 대응하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도 그것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역할 판매다. 각 역할을 판매하고 인기 있는 역할은 +가격이 높고 인기 없는 역할은 가격이 높다. 인기가 높은 역할은 돈을 지불하고 인기가 없는 역할은 돈을 지불 받는다. 어떤 역할극을 꾸미고 거기에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전문 배우를 섭외하고, 그 외의 배역들은 판매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생산을 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 소비자의 생산을 다른 소비자가 보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역할을 구매한 사람이 아마추어일 때에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걸 어려워할 수 있다. 그걸 다른 전문 배우가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게끔 유도한다. 인기가 없는 배역은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충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역할 판매의 특이할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해당 역할에 맞춰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기사 같은 배역을 하고 있으면 역할을 구매한 동안에는 기사 대우를 해준다.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특별 대우가 특정 역할의 가격을 높여줄 것이다. 해당 구역에서만 적용되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평등을 훼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역할극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플랫폼 내의 역할을 판매 또는 역할에 대한 비용 지불이 이루어져도 좋을 것이다.

 

국가 안의 작은 국가. 이미 온라인은 그걸 해냈다. 오프라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온라인은 상품을 유통하고 오프라인은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연결한다.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로 이제 오프라인 유통업은 단순한 유통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왔다고 주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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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쓸 생각이었는데 자꾸 과거의 생각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시간이 걸렸네요. 솔직히 우울하군요.

 

다음 글은 네이버와 포탈 또는 현대와 자동차 또는 국민과 은행 또는 병원과 간호사 등 살아있으면 아무거나 씁니다.

 

군 급식 개선을 하겠다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국군의 최고에 있는 이가 말한 걸 허언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 사태를 쉬이 넘기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낙태를 허용한다고 해서 낙태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포르노를 허용한다고 해서 포르노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매매를 허용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포르노나 성매매의 경우 범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허용과 권장의 차이도 모릅니다. 취향과 도덕의 차이도 모릅니다. 답답하군요.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인간을 도구로 만든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도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성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노동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산업혁명 시대 농지를 팔고 도시로 나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죠. 시골의 고령화가 되고 있는 만큼 이제 농지를 사들여 식량의 대량생산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미국식 대량 생산이 되어야 국민들이 식재료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비싸요. 생산자를 생각하다 소비자가 불행한 것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가 흘러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대량생산계획을 시도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치는 노동자용 교육을 해놓고 취업이 안 된다. 학벌사회다. 노동자 인권이 낮다.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본가 수가 줄고 노동자 수가 늘면 당연히 자본가가 희소해짐에 따라 노동자 수요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게 되는 거죠. 자본가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데 담합하게끔 유도했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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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1    친구신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tta    친구신청

좋은글 감사합니다

루리웹-5344056515    친구신청

오프라인의 플랫폼화에 대해 말씀 하시는데, 본문에서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글쎄요.

우선 플랫폼이라고 해서 새로운건 없습니다.

유튜브는 예전 방송사에서 하던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죠.. 무한도전 볼 때 돈 내고 봤습니까? 앞뒤 광고 끼고 봤죠.

배달 라이더는, 화물차 지입제랑 동일하고

가사도우미나 아이 돌보미는 이전에도 인력소개소가 있었죠. 대리운전도 플랫폼이죠.

지금들어 플랫폼이 각광 받은 것은 기업 입장에서 기존의 노동법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버나 라이더 같은 플랫폼 기업에서는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파트너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즉, 둘의 관계가 노사관계가 아니라는거죠.

이렇게 되면 기업은 파트너가 사고가 나든 문제가 생기든 책임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주몇시간 근무, 수당, 연차, 퇴직금.. 이런 것에서 해방되는거죠.

즉, 제가 말하고 싶은 것 플랫폼 이란게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노동법을 비껴갈 꼼수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부주에서 우버가 노동자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타다 직원이 노동자라는 것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튼 말이 길었는데 플랫폼 기업이라는 건 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예시로 김장을 들으셨는데, 제가 기업가라면 일일이 김장김치 평가하고 관리할 담당자 고용할바에 그냥 일정한 맛 보장되는 공장 김치 유통하는게 더 낫습니다.
거기다, 대량생산하는 공장보다 단가도 비쌀건데, 경쟁력이 있을려면 가격도 많이 높이지 못할겁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거나 없을 확률이 큽니다.

또한 플랫폼 업체에서 품질관리 담당자를 둔다는 거 자제가 플랫폼으로서 자신의 이점을 버리는거에요.

배민에서 입점식당들 맛 관리합니까? 오픈마켓에서 판매상품이 가품인지 확인합니까?

일일이 자기 상품 다 확인하고 품질관리 하는건 이미 플랫폼이 아닌 기존 유통업체랑 다를게 없죠.

트랜지션앤트랜지션    친구신청

신세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유통 업체라고 생각 하셔서 제목을 이리 다신거 같습니다.
유통업은 온라인 + 오프라인도 되고 오프라인 + 오프라인으로도 되는 양방향이라고 보는 시각이 유통업계 경영자들에겐 더 크다고 보셔야 할듯합니다. 아마존의 성장이 엄청났기 때문에 빛을 잃었지만 코스트코와 월마트의 성장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죠.

온라인 쇼핑, 이커머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행이나 흐름이었다가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인류에게 소개된 새로운 물품거래방식으로 아직 그 역사가 30년 남짓 밖에 안된것이니까요. 반면에 물건을 산지에서 가져와 수요지에 파는 것은 수백년이 된 비즈니스 모델이니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비교는 오프라인 시장 유통이 역사적으로만 놓고보면 앞선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거래방식의 채택의 펀드멘탈을 그럼 들여다 봐야하는데 수요지-산지-소비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전통의 유통업계의 영향력을 무시할수도 없으니 신세계나 롯데는 어찌보면 대박은 없지만 쪽박도 없는 시장을 원할수도 있습니다. 그게 치킨게임이고 창고와 운송에 돈을 집어넣어야 하는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이지요.

유통업계의 흥망은 사실 판매량 보다는 구독경제 방식의 회원권 판매와 배송비 절감, 그리고 물건의 매입 금액에서 남기는 차익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마케팅과 재무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요에 맞춘 재고 관리등 업체의 내재가치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한자 적어봅니다.

격리해제자    친구신청

요즘은 정책적으로 온라인 보다 오프라인이 가격이 비슷하게 해놔서
오프라인 가서 인터넷 가격 비교해보고 삽니다.
직접 만지고 보고 입어보고 하니 구매율이 올라가죠
[잡담]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2) 2021/11/08 PM 02:01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최근 KBS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와 같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PC주의와 여성주의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KBS 수신료를 보고 발상을 시작하여 KBS를 기준으로 하지만, 방송매체인 만큼 해결방법은 다른 방송국도 비슷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TV 수신료 인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다. 왜냐하면 오래지 않아 TV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TV는 이제 인터넷으로 세대가 교체될 것이다. 그러면 TV 수신료 인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 T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때에는 수신료 인상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수신료 인상은 TV의 소멸 시기를 앞당길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수신료 인상으로 납부부담이 늘면 국민들 사이에서 TV를 버리고 모니터를 대체하여 수신료를 내지 말자라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KBS는 딜레마에 빠졌다. 수신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물가상승에 의해 운영비 부족을 겪을 것이고, 수신료를 인상하면 납부자 수 자체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인상 전과 비용이 같아져 운영비 부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KBS TV 수신료 인상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재원을 찾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공영방송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새로운 형태의 세금은 국민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이제 방송국이란 형태로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을 한 곳에 묶을 필요는 없다. 과거 방송매체의 특성상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언론과 수익성과 공영성이다. 언론은 분명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 사회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언론 자체로는 수익을 얻기가 어렵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잇는 언론은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일 확률이 높다. 수익을 위해 권력이나 재력의 마이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론 외의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창작과 플랫폼이다. 간단히 말해 언론이 사회공헌을 하고 창작과 플랫폼이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하고 정보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수익창출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잠시 언론으로 가보자. 정보플랫폼은 공영방송뿐만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모든 언론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기여도에 따라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해둬야, 언론이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오자. 창작과 플랫폼도 수익성이 없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공영방송이란 공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금을 걷기 어려운 이상, 수익성이 높은 문화창작물의 성장과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플랫폼의 소유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저널리즘을 말하며 정보 생산자 특성(성별 또는 장애)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말하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부터 생각하는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생각해보자. 소비하는 정보의 생산자의 특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누가 정보를 생산했든 그 정보에 가치가 있으면 된다. 지금 기성방송매체가 외면 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정보의 품질이 인터넷의 접근성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성방송매체와 인터넷의 차이는 편리성과 편향성이다. 인터넷방송은 접근이 편리하고 원하는 정보만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편향적이다. 그 때문에 중립성을 중시해야 하는 기성방송매체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리성과 편향성을 넘어서는 고품질 정보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 품질에는 개인의 특성이 아닌 역할에 맞는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별유무나 장애유무와 관계없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없으면 결과적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수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생산자를 생각하다 상품경쟁력이 낮아져 국내의 소비자를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뒤쳐지게 만든 공산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차별이란 능력이 없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강조하겠다. 본래 지금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이런 역할에 맞는 능력만 보는 걸 의미한다. 거기에는 성별이나 장애의 유무는 관계가 없다. 부디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줘야 한다는 궤변에 선동되어 국가 전체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길 바란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귀족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공산당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권력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인맥,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소수자들. 어떤 사상이든 관계가 없다. 어떤 이유든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국가가 몰락하게 된다. 우수한 한국인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화가 난다. 귀족이나 권력자 또는 인맥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던 걸 욕하던 이들이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된 걸 모른다. 그런 건 단순한 권력투쟁이다. 인권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 누구든 역할에 맞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리사욕에 힘을 남용하는 것 또한 역할에 맞지 않는 것 중 하나다. 사리사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이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어야 국가가 발전할 것이다. 한국에는 힘이 필요하다. 국력이 낮아 국가적 치욕을 겪은 것이 백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겠다.

 

 

 

시청자 의견 영향 축소

 

새로운 수익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가 바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 축소다.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올바르나, 그것은 대부분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이나 방법 또는 의지의 차이에 따라 소수의 시청자가 공영방송에 지나치게 높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비민주적인 결과다.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투표율이 10%도 되지 않는다면, 그걸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소수가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상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객평가를 중시한다. 실제 상품을 구매한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영수증을 첨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을 정도다.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방송은 지나치게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 시청률이 1%에 보통 약 3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터넷 시청률을 포함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정말 적은 수의 사람이 시청자 의견을 낸다. 보통 인터넷에서 상품을 구매한 뒤 평가를 하는 비율이 약 10%에서 많으면 30% 적으면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100명 중 1명이 평가를 한다 치자. 그렇다면 TV는 시청률 1%의 방송에 의견을 내는 사람이 과연 3000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과 달리 TV는 의견을 내기가 너무나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인터넷 개인방송은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의견을 달 수 있지만, TV는 따로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가입한 뒤 의견을 내거나 전화나 엽서나 메일 따위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기 의견을 내는 사람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방송국이 전부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점 이전에는 이런 시청자 의견은 그리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시청자 의견은 단순한 참고자료다. 그걸로 언론이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본래의 방향과 달라지게 되면, 본래 방향을 원했던 나머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아예 의견을 받지 않으면 불통의 이미지를 뒤집어 쓸 우려가 있다. 따라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써야 한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그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도 높다. 신뢰도가 높기에 영향력이 높다. 자 답은 나왔다.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낮춰야 하고, 신뢰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진실된 의견이 아니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된 의견이 아닐 수 있는가? 그건 아무나 의견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 된다. 지금처럼 가입을 하고, 실명을 써서 의견을 내고, 그런 절차를 해서는 안 된다. 익명과 접근성을 높여 아무나 익명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분명 이러면 지저분해진다. 진실된 의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한 것이므로 이해를 구한다는 식으로 나가면 된다. 그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의견의 신뢰도가 낮아지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재미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외의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무한도전 등의 코미디 같은 프로그램의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주관적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몰상식한 일부 단체가 불편함을 토로하며 되도 않는 간섭을 할 수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단체의 수를 늘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성별이나 세대가 다른 이들이 특정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될 것이다. 이외 인터넷 플랫폼에 달린 댓글 또한 시청자 의견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에도 맞추기 때문에 일부 시청자 의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없다는 표명을 하면 될 것이다. 유행하는 빅데이터 수집을 표방해도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낮춰야 온전한 언론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로 고품질 정보와 영상을 생산하여 국민의 호의를 얻어 높은 수익을 통해 수신료 인상이 없더라도 방송국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적은 반면, 방송 매체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많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방송 매체의 정보와 영상이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과 경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창작의 자유

 

창작에 자유에 대해 잠시 다루겠다. 공영방송이기에 보다 신중하게 방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영은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지, 보수적인 것의 이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성적 컨텐츠를 억압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 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령 성적으로 자유로운 영상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국가의 이미지 상승으로 국익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공공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지금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주의에 의해 폐쇄적인 성 관념을 근거로 한 성적 억압으로 인해 이성애가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있는 중이므로 공영방송이야말로 자유로운 성 관념을 널리 알려 국민이 온전한 이성애를 획득해 충만한 애정을 통해 출산율을 올리는 걸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선도하여 공공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공영방송의 의무라 주장하겠다.

 

F20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KBS에서 조현병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한 듯 하다. 그런데 그걸 보고 조현병 관련 단체에서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그대로 담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으므로 TV 방영 중단 요청에 의해 TV 방영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는 보통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직시로만 끝났다. 아마 이 영화도 조현병에 대한 현실직시를 했을 것이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불편하다고 현실과 다른 왜곡된 진실을 공개하게 되면 실질적인 문제해결조차 못한다. 그저 불편하다고 다루지 말라 하게 되면 사회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회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예전에 영화 기생충이 현실직시만 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현실직시라도 해야 한다. 만약 기생충이 저소득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고 방영 중단의 요청을 받아 영화상영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전세계가 황당해했을 것이다. 진정 빈자를 위한다면 왜곡된 영상은 필요가 없다. 빈자가 행복하게만 표현된다면 그 누가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는가? 진정 조현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다면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다수가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적인 논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에 무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악당이 등장한다고 등장 자체를 불편해하면 어떻게 악당의 악행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떤 걸 혐오를 하는 인간이 있어야 혐오가 나쁘다고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며 그런 혐오를 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 어쩌자는 건가.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특정 직업을 깔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인물이 등장해야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자체가 불편한 인간은 그냥 특정 도덕에 세뇌된 것에 불과하다. EBS가 국정감사에서 포텐독이라는 컨텐츠가 폭력성으로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쁜 것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반발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컨텐츠라고 하더라도 폭력성은 있어야 한다. 폭력성이 등장해야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저 폭력성이 나쁘다고 무조건 등장조차 못하게 해서는 한국 아이들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국 아이를 미숙아로 키우는 건 바로 도덕에 세뇌되어 맹목적 비난과 반대를 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것에 분노한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EBS는 폭력성에 대한 경계와 아이의 성숙한 시각을 길러주는 지극히 올바른 일을 했다. EBS는 일차원적인 지적을 받았다고 올바른 태도를 바꾸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며 도덕을 명분으로 타인의 위에 서려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불편하다 싶은 것은 전부 인권침해라 주장하며 창작에 간섭하는 것으로 창작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이 취미와 도덕을 구분 짓지를 못한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취미인데, 거기에 도덕성을 붙여서 동물보호라는 식으로 몰고가 사회를 혼란케 만든다. 개나 고양이 보호를 주장하면 취미인 게 명확히 보이므로 의도적으로 동물보호를 붙인다. 특정 종에 대한 애호에 동물보호라는 도덕성을 붙이는 것으로 취미를 도덕으로 탈바꿈해버리며 사회의 도덕적 판단저하를 일으키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겠다.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건 취미다. 단순 취미를 맹목적으로 올바르다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 마녀사냥이나 홍위병 때도 그랬다. 시야가 좁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름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다. 제정신이 아닌 걸 옳다고 말하는 인간의 의견 따위는 들어줘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에서 도덕적 명분으로 검열하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척결을 명분으로 사상서 검열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자유국가에서 올바른지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도덕은 이제 인간의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이들이 최근 가장 많은 불편함을 호소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특혜에 반발이 심한 까닭이 무엇인가? 신세대 남성이 여성특혜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평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다수 기성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에 여성에게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평등에 익숙한 다수 신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여성특혜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성평등을 교육하자 주장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가 주장한 여성특혜를 신세대 남성이 수용할 수 없었단 것이다. 여성주의가 교육한 것으로 여성주의가 공격받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이 사상은 이 정도로 어설프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기독교적 등 그냥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손해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는 사상이다. 굉장히 조잡하고 천박하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를 결정해버리면 황당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세뇌된 여성의 손익으로도 인권 여부가 결정되어버린다. 유교 또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세뇌된 여성에겐 가부장적인 가치관인 여성의 약한 의지와 강한 수치심이 인권이 된다. 그러니까 그걸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똑같이 세뇌해버렸다. 마치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의 교리를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인간에게 세뇌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신세대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기에 감사지수가 낮아지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게 되었다. 보통 부당한 이익은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는 인정하고 감수해야 하는데,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여부를 결정하다 보니 부당한 이익을 인권이라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를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당시 유럽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이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은 것은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다. 바로 여성주의자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학교기관에 여성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남학생에게도 주입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또한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을 열등하게 만드는 사상이 전파되고 있다. 정말 인간을 퇴락시키는 사상이다. 그래도 보통은 성별 관계 없이 건전한 사상을 가진 정상적인 교사가 있어 아마 괜찮을 것이다.

 

도덕은 본래 주관적 이익이 객관화를 거쳐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다음에야 도덕성을 갖추게 되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는데, 여성주의는 그냥 모든 여성의 주관적 이익을 전부 인권이라 주장하고 주관적 손해를 전부 차별과 혐오라 주장하는 천박한 사상이기에 사회를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객관화가 된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도덕을 근거로 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유라던가 말이다. 여성도 이제는 그런 천박한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생각한다. 건전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방송매체 또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창작의 자유가 있어야 고품질 창작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강조하겠다.

 

 

 

경쟁원리

 

방송 매체 특성상 경쟁이 어렵다. 채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황금시간대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생산되는 창작물의 수가 적어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우니 아무래도 고품질 창작물이 양산되기가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 이것이 방송매체가 넷플릭스에 추월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점을 보완해야 한다.

 

우선 생산(창작자)과 유통(플랫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자. 일반적으로 생산보다 유통이 유리한 상황이지만, 생산자가 다양한 유통경로를 확보하고, 우수한 상품을 양산하여 수요가 높으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전제에서 창작물은 생산과 유통이 대등한 관계가 가능한 환경이다. 왜냐하면 문화 창작물의 수요는 전세계로 퍼지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상품의 경우, 생산품이 세계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쉽게 퍼지기가 어려운 반면, 창작물은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유통될 수 있다. 문화는 다양한 유통경로와 높은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품질 상품만 양산하면 생산이 유통에 비해 불리할 수가 없다. 지금 방송 매체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할 때가 있음을 기사를 통해 종종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야말로 다양한 유통경로와 다름이 없다. 굳이 적대적 관계를 성립할 필요가 없다. 이런 온라인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점도 좋다. 지금까지 창작은 보통 가장 우수한 일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 부족하더라도 가능성이 높은 창작자는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가령 지금 창작물 품질이 7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80인 것과 창작물 품질이 5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90인 것이 있다면, 전자가 선택되어 후자의 무궁한 가능성은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다양한 유통경로와 수요가 있으므로 무조건 많이 생산하면 되기 때문에, 약간 부족한 창작자도 기회를 주는 것이 큰 틀에서 이익이 된다. 이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창작물을 보면 매번 보는 배우만 나오는 것 같다. 창작물이 많아져야 재야에 붙인 유능한 배우들도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보통 양산의 경우 품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지만, 개인이 대량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수가 각각의 창작물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품질 자체는 유지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그런 방식으로 지금 성장하고 있다. 방송매체는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여 수많은 창작자로부터 다양한 창작물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한 뒤에, 그 중 가치 있는 것을 TV 편성표에 편성하여 송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존 셀러를 사들이는 것으로 덩치를 키워 7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한 스라시오라는 기업이 있다. M&A 또는 MCN과 같은 방식이라고 한다. 방송매체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학교의 영화동아리나 아마추어 영상제작팀을 대량으로 모집하여 간단한 교육과 함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생산된 창작물을 다듬어서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시청자 평가를 받도록 한 뒤에 평가가 높은 것을 방송국에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공영방송에 목적에도 부합한다. 한국의 창작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한국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자동화 시대가 되면서 각국은 산업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한국은 문화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본격적으로 문화도 미래 먹거리로 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관광지를 먹거리로 삼는 국가처럼 말이다. 물론 이미 그런 계획은 있을 것이다.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다수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모전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소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평가 받는다면, 이제는 다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시청자에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익은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에 200억원을 투자하여 1조원의 가치를 창출했던 것과 같다. 40 팀에 1억씩 투자했을 때, 40억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작물 하나만 건져도 본전을 얻고 두 개를 건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양산을 통해 어떤 형태의 경쟁이 발생하고, 그 경쟁을 통해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창작의 자유는 보장하되, 기술의 전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촬영이나 연기는 창작과 무관하게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기술전수는 대상을 까다롭게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공영방송인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고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건 바람직하다 본다. 창작에서 높은 수익을 얻게 되면 언론 또한 권력과 재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장 초반에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작은 영상제작팀조차 많은 경험을 통해 우수한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가의 문화 수준이 한층 높아지는 것으로 추후에는 이익을 얻을 확률이 높게 될 거라 생각한다.

 

 

 

해외

 

국내에서 인정 받는 것보다 해외에서 인정 받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이들이 많다. 흔히 말해 국뽕이다. 이런 걸 고려해서 처음부터 세계에 초점을 맞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범해도 세계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성공하게 된다. 그 성공이 여론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여론악화로 인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려웠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그 성공이 방송국 자체의 성장으로 이어져 수신료가 없어도 될 정도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TV가 사라질 시대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5천만명이 70억명을 만족시킬 컨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창작자가 필요하다. 이러니까 무조건 많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끌어올려서 고품질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량생산에 자원이 소모되는 다른 산업과 달리 한번 만들면 자원소모가 거의 없이 복제가 가능한 문화 산업은 고품질 창작물을 많이 만들수록 대체로 이익이다.

 

본래 외국의 상품은 내국의 견제를 받기 쉽다. 그러나 문화는 다르다.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검열이나 규제를 해도 어떻게든 보게 되어 있다. 중국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창작물 수준만 높으면 별다른 제약이 없이 수익을 얻을 확률이 높으므로 해외공략이 수월해지게 된다. 또한 문화의 영향이 커지면 그 나라에서 생산한 상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져 다른 산업의 진출도 돕게 된다. 어찌되었건 무조건 많이 만든다. 고품질의 창작물을 많이 만들면 70억명 중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논쟁

 

스마트폰 세대의 결점 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에 길들여져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보통 그걸 개선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지 않다. 사람은 점점 쉽고 편하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는 이런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화만 봐도 그렇다. 소설, 만화, 게임 같이 점점 편하고 재미있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본성이 인류의 발전의 원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쉽고 빠른 이동, 쉽고 빠른 식사, 쉽고 빠른 기억, 쉽고 빠른 기록, 쉽고 빠른 교류 등 이런 경향은 사회의 발전을 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경향에 따른 발전은 그대로 두고,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바로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본래 배움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고, 무지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배움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이고, 무지는 지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괴상하게 변했다. 이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험 평가를 높게 받는 것이 주관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에 시험 평가로만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인권이라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지적 당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손해기 때문에 차별이나 혐오로 인지하고 있다. 이 천박한 사상이 한국 사회에 독소처럼 퍼져 온갖 것을 갉아먹으며 인간을 퇴락시키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애초에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다. 단순히 스마트폰으로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편리한 도구와 별개로 인간의 능력은 인간 개개인이 알아서 키워야 한다. 그걸 권장하는 풍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론과 논쟁의 발달이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인지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말싸움을 하면서 배움의 폭을 넓히는 필요를 느끼게 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의 발달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을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하도 인신공격이나 일반화가 궤변이나 왜곡이나 논점이탈 따위로 지친 나머지 아예 토론과 논쟁 자체를 거부하며 네 말이 옳으니까 그냥 반론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는 정말 좋지 못한 현상이다. 일상에서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해야 시험 외의 배움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지에 자존심을 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논쟁의 예능화다. 토론이 아닌 논쟁을 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토론보다 논쟁이 보다 깊게 대화를 하게 된다. 둘째, 논쟁이 예능에 보다 적합하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주제를 겉 핥기 식으로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논쟁을 해야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재미가 없어 흥미를 끌기 어렵다. 예능이 되려면 논쟁으로 발전하여 승패가 갈려야 한다. 예능화를 한 이유는 논쟁의 단계별 학습을 위해서이다. 본래 지적 수준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다르다. 동화부터 시작해 어려운 인문학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논쟁 같은 걸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어려운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대체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기초부터 알아가야 한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의 힘을 갖추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힘든 운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논쟁을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예능을 통해 논쟁의 접근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쟁의 예능화를 주장하겠다.

 

논쟁이란 무엇인가? 사리를 따져 말이나 글로 다투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말싸움이다. 본래 이런 말싸움은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결투에도 일종의 예절이 있었던 것처럼, 논쟁에도 예절이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결투와 달리 신체적 상해를 입을 확률이 낮으므로 예절만 잘 지키면 관계를 해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하나로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하다. 논쟁의 예능화는 바람직한 논쟁의 방법론을 알려 건전한 논쟁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논쟁은 논쟁에 필요한 예의가 바로잡히지 못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능화를 할 수 있는가? 결투의 예능화가 바로 격투 프로그램이다. 몸싸움을 예능화한 것이 이미 존재하므로 말싸움을 예능화하는 것은 그걸 참고하면 된다. 우선 선수와 팀을 만든다. 방송국이나 대학 또는 기업으로 나눠 선수를 모집하고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홍보효과가 있을 것이다. 몸싸움에 필요한 것이 경기장이라면 말싸움에 필요한 것은 주제일 것이다. 논쟁의 주제는 예능인만큼 쉬워야 한다. 일상에서 갈등을 빚는 것을 주제로 하면 된다. 재활용 문제나 학교폭력이나 성별갈등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걸 주제로 해야 논쟁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몸싸움은 승패가 갈리는 것처럼 말싸움도 승패가 갈리게 해야 한다. 일목요연하게 승패가 갈려야 쉽게 접하고 즐길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심판의 결정으로 승패를 갈리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에 방영하면 실시간 투표가 가능하므로 시청자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TV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낮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적지만, 인터넷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높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높은 편이다. 물론 이래도 참고자료에 머물러야 한다. 논쟁에 승패가 있으면 위험한 결론이 승리할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지금 범죄의 양형이나 촉법소년 등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승패가 나오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예능의 좋은 점이 나온다. 첫째, 예능이기 때문에 무겁게 접근할 확률이 낮은 편이다. 둘째, 예능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로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한번 승패가 나온 주제라 하더라도 괜찮다. 승리한 결론에 도전할 다른 도전자가 나오면 된다. 본래 논쟁의 주제는 많은 편이나 쉬운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도전할 수 있으면 분량의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 세세한 부분은 몸싸움을 예능화한 격투 프로그램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선수선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보자. 격투의 경우 선수의 능력과 승패를 알기가 쉽다. 그러나 논쟁은 선수의 능력을 알기 어렵고 승패도 알기가 어렵다. 단순히 지식이 많다고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논쟁은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적더라도 관점이나 태도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유리할 수 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 않다. 과거 하루는 정의를 말하고 하루는 불의를 말했던 인간도 있었다. 논쟁의 기술에 따라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의 대결이 아닌 한정된 시간 내에서 논리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단순 지식으로 선수를 선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나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가? 얼마나 영리하게 주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얼마나 알기 쉽게 주장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가? 또한 예능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제삼자가 있는 논쟁은 대체로 대화상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시청자가 있는 이상 시청자를 고려하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통상의 논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유명하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기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 논쟁기술이 높은 인간을 기용해야 할 것이다. 격투기가 그러하듯, 능력이 뛰어나면 알아서 유명해진다.

 

논쟁의 예능화는 퇴락하고 있는 한국 인문학을 되살릴 불씨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단순 수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므로 공영방송에 적합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지역 영상 플랫폼

 

예전에 인터넷 영상 플랫폼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 틱톡과 숏이 유행, 지역 영상 플랫폼이 지역으로 말이다. 본래 지역 영상은 방송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인터넷 영상 플랫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면 좋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로 묶어 분류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부동산으로 묶어 분류한다. 영상을 주소로 묶을 수 있으면 지역의 정보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방송매체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래 방송매체가 지역의 영상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역 정보의 전문가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또한 방송매체는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플랫폼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했다. 넷플릭스도 생산과 플랫폼을 둘 다 하고 있지 않나. 둘째, 이제 방송매체는 국가의 세금이나 기업의 광고나 후원 없이도 정보와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탄산업 사양화로 인해 지역경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강원랜드를 설립한 것처럼, TV의 사양화로 인해 수신료 수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어떤 산업의 주도권을 주게 하는 것은 타당하다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것이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영방송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셋째,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지역 영상이 생산되어 지역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은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영방송에 적합한 일이다.

 

지금 국가에서 공공 플랫폼을 통해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춘 정보가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은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맞춰질 것이기 때문에 공공 플랫폼과 역할이 다르다.

 

 

 

언론

 

언론 자체로 수익이 보장되기는 어렵다. 언론은 가루받이를 통해 자연의 생태계를 지키는 것과 같이 정보를 잇는 것을 통해 사회의 생태계를 지키는 사회공헌을 하는 역할이다. 이제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 모든 언론은 자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창작물이나 플랫폼으로 자체 수익을 얻게 되면 정보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이 더 위험하다. 언론이 수익을 얻기 위해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생각한다.

 

대체로 한국 언론은 우수한 편이라 생각한다. 단지 특정 사상에 휘둘리거나 수익을 위해 정치와 경제 등과 유착하는 것과 같이 정보를 악용하는 것이 문제다. 언론의 폭거로 언론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언론이 자성을 해야 하지만 언론 자체적으로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는 환경 또한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을 위해 배를 곯는 것을 언제까지 요구해야 하는가? 이제 거대 언론만이 아닌 모든 언론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면 경쟁원리가 작동하지 못해 정보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품질 정보를 생산하거나 잇는 언론에 대한 대중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넷 영상 플랫폼에서도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제 언론은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방송국으로 분류될 것이 아니라, 언론계 자체적으로 특정 분야의 정보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인터넷의 정보보다 언론의 정보를 신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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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글은 잡담 글로 올릴게요. 잡담 글은 종종 올릴 것 같네요. 다음 잡담 글은 아마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입니다.

 

역할주의 사상 정리가 끝나면 아마 그건 제대로 관리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오타나 오류 있어도 사상의 양식이니 그냥 방치했는데, 그거부터는 관리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게 힘드네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외세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논란이 일어나면 외세의 개입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말해두겠습니다.

 

누가 정치권력을 쥐든 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제는 낡은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습은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하는 가족주의입니다. 이제는 혈통이 아닌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이 같은 이상을 위해 힘내야 합니다. 보통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하는데, 각국의 낡은 관습과 자본주의가 결합하자, 그릇된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사상이죠. 그런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생산자가 힘들게 됩니다. 생산자가 노력을 해서 품질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야 그걸 소비하는 소비자가 행복하게 되는 구조죠. 공무원이 힘들어야 국민이 행복한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과거 왕조시대 칭송 받는 왕들이 신하를 힘들게 할수록 백성이 행복하다 말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면 됩니다. 과학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상이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한 검열을 자행하는 무리들과 거기에 찬성하는 부류들은 중국과도 같은 자유의 적입니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남성이 즐기는 컨텐츠가 검열되는 일이 많아 착각할 수 있는데, 여성이 즐기는 컨텐츠를 검열해도 반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관한 일이지, 성별과 관계가 없습니다. 성별 국적 취미 세대 전부 관계없이. 예전에는 적성국의 사상이라고 공산주의 저서가 금지되었지요. 그것에 반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잊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검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검열하던 시대에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검열에 찬성하는 것은 그 외침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요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규정짓습니까? 사상서를 검열했다는 것으로 분노하던 이들은 도대체 무엇에 분노했던 겁니까? 자유의 개념과 가치를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성애 결핍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의 근원은 여성의 정조관념에 따른 성 터부시에 오는 겁니다. 미성년 때 자아가 형성되므로 그때 인생에 필요한 것을 전부 교육해야 합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를 말이죠. 학생이 야한 걸 봤다고 화내고 혼내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이성애 결핍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란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원인 중 하나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성애에 성욕이 빠지면 어떻게 이성애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성욕이 없는 애정은 그냥 친애입니다! 신체적 본능으로 시작된 애정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나타난 아이에 대한 애정은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이후 성욕이 떨어져도 시작은 성욕으로 시작해야 대를 이어나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부정해서 어떻게 합니까! 야한 걸 보면 잘못되었다,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면 혐오다, 이러면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이성애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된 겁니다. 성을 터부시하여 음란물을 악으로 몰고 있는 이들이 이 국가의 소멸을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 억압이 이성애 결핍을 부르고, 이성애 결핍이 남성이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게 하고, 여성이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게 만든 겁니다.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것과 성 상품화나 수익 공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단순 도구로 격하된 것입니다.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게 하려면 성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럼에도 음란물을 악으로 모는 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 성을 억압하며 국가를 소멸로 이끌고 가겠지요. 몹시 슬픕니다. 연령에 맞는 등급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등급 따위가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미성년 때 등급에 맞지 않는 컨텐츠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악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한국 치안이 세계적 순위입니까? 그러면 성적 억압을 자행하여 검열이 일상인 이슬람은 치안이 높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음란물 검열은 단순한 성적 억압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억압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상서를 검열하는 것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건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풍습에 의거해 아무 생각 없이 음란물을 막는 걸 올바른 일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국가를 소멸로 이끈 거라고. 조소할 가치도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그게 잘못된 거라고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사회현상 이해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방식으로 출산율 폭락되고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건 학습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단순한 일이면 학습능력이 부족한 걸로 끝나는데, 출산율 같은 문제는 국가소멸로 이끄는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 척결을 운운하며 사상서 검열하는 거나 성 감수성 운운하며 성 컨텐츠 검열하는 건 똑같은 겁니다. 성 감수성 운운하면서 성 억압하는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인지하십시오. 그 손에 놓여진 출산율 지표를 직시하십시오. 국가와 민족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으십시오. 성 검열을 운운할 때마다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관계의 종말이 부를 종의 마지막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꾸밈노동에서 벗어나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시선을 받지 않는 것은 남성이 사랑할 정도의 매력이 전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냥 그건 이성에게 사랑 받기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멋대로 도덕성을 부여한들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력사회의 끝은 학업의 목적이 취업이 아닌 창업이 되면 바뀔 것입니다. 창업의 성공에 학력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사업해서 성공하는 유능한 자본가 수의 증가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위해 이제는 교육이 학생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야 하겠지요.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객관적인 이기심입니다. 어떤 주관적인 이기심을 사회적 공감대를 사는 객관화를 통해 다수의 이익이 되면 정의가 되는 것이죠. 어떤 단순한 주관적인 이기심도 객관화가 되면 정의가 됩니다. 그런데 일부 천박한 사상들은 객관화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이익 그 자체를 인권이라 주장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어떤 암묵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교류합니다. 특정 풍습이나 관념 따위는 이미 사회에 속한 사람 내면에 새겨져 그 외의 영역에서 개성이 두드러지죠. 인간의 자아로 비유하면 무의식의 영역이죠. 그런 관점에서 풍습이나 관념은 사회의 무의식이라 해도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라는 규칙은 한국사회에서 당연한 약속이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댓말 같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암묵적인 약속,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을 하는데 있어 기초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정된 무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해 애정결핍현상을 해결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현상 하나에 이 정도로 파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문학 수준이 낮군요. 인문학에 있는 사람이 설거지 운운하는 건 우울하네요. 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도 못해서 남성이 주입한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의 본성으로 착각하고 그거에 맞춘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참. 솔직히 머리가 아파요. 한국이 자유적응에 실패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답답하네요. 조선이 에 중점을 두었던 유교국가라고 해서 인문학 수준이 높다 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가르침 내에서만 사고할 수 있었으므로 실상 인문학 수준이 종교국가 수준이었죠. 이제 한국 인문학은 조선의 유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사상가가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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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눈 아파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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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급이네요 우와
[글] 갤럭시와 아이폰 (0) 2021/10/11 AM 08:29

갤럭시와 아이폰

 

 

 

원래 구글 경쟁상대에 대해 써보려고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그건 주관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 급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예상 밖에 상황으로 그건 보관하고 다른 걸 써보기로 했다. 마침 유튜브에 갤럭시와 아이폰 관련 영상이 있길래 그걸 주제 삼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갤럭시와 아이폰을 써본 적이 없다. 삼성 제품은 꽤 소유하고 있어도 애플 제품은 아예 없다. 스마트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해보겠다. 그냥 이건 내 능력 실험이다. 어디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른다. 시작해보겠다.

 

스마트폰은 혁신이 어렵다.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는 배터리에서 정체되어 큰 혁신을 이루기가 어렵다. 단순한 성능 강화는 사실상 물가상승률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쓰던 걸 굳이 교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갤럭시가 액정을 접는 개념을 도입했다. 신선했지만 부진했다.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 최신버전인 갤럭시 Z 플립3는 예상외의 많은 수요가 있다고 한다.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많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을 쓰던 이재용 딸도 이젠 플립을 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폰은 그런 것이 없어도 인기가 많다. 아이폰13은 변화가 적어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아이폰 교체시기가 겹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정리하면 접는 개념을 도입한 갤럭시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아이폰이 둘 다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아이폰의 변화가 시작될 때 갤럭시가 아이폰에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폰의 수익이 높은 상황이었다. 갤럭시가 더 많이 팔아도 아이폰은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갤럭시는 다양한 모델을 판 반면 아이폰은 고가의 모델만 팔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 대수조차 뒤쳐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갤럭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스토리.

 

보편적으로 아는 것부터 정리해보자. 아이폰은 명품화가 되었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이 명품화의 뿌리를 알아보면 잡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기, 카메라, 인터넷, 음악감상, 게임 등을 합치다라는 혁신을 주도하여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전파했다. 아이폰이 최초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것은 아이폰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합치다라는 개념은 분명 혁신이었다. 이 혁신이야말로 아이폰의 명품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혁신을 한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가 애플에 남아 애플사의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인물에는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인물 자체가 명품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이야기가 명품을 만든다. 현대미술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작가나 작품에 스토리가 붙으면 가치가 폭등하는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이들의 스토리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윈도우를 만든 빌 게이츠가 다방면에서 기부와 봉사 또는 핵융합이나 환경 등을 말하는 것으로,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가 스페이스 X로 화성에 가겠다는 목표를 실천 하는 것으로, 회사의 생산품에 부가가치를 불어넣었다. 아이폰은 이런 방식으로 명품화가 되었다. 갤럭시가 아이폰과 대결하는 것을 현대미술로 비유하면, 이야기가 없는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가 있는 아름다운 작품과 가치 대결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을 안다면 이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대결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갤럭시가 성능 강화하고 수익다각화를 시도하고 광고 하고 깎아 내리고 단가를 낮춰보고 해도 아이폰과의 대결에 힘겨운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신앙 수준에 다다른 아이폰의 감성에 이성으로 맞서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간단한 결론이 나온다. 이제 갤럭시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접다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혁신에 가까워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접다라는 개념은 이미 있었다. 액정을 접다라는 개념이 새로울 뿐이지, 접다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있었다. 그러니 신선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워도 아이폰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접다로는 합치다를 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혁신은 아직 구현하기 어렵다. 그러니 일단 다른 방식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아이폰하면 순백이 떠오른다.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다. 다양한 색이 있지만 기본 색은 그렇다. 애플 제품 하나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애플 제품의 색이 순백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아름답고 경건하다. 순수하고 신성하다. 단정하고 품위가 있다.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 고지식하고 엄격하다. 완결성, 완전성, 무결성. 이 이미지에 고유한 AP IOS. 완벽하다. 명품의 조건이 성립한다. 아이폰은 보고 먼저 떠오르는 퍼스트컬러만 봐도 충분히 굉장하다.

 

잠시 과거로 가보자. 원시부족의 제사장부터 시작해 대부분 국가가 과거 1신분이 성직자고 2신분이 귀족이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유학자가 최고의 위치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유학자의 공통점은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최고 지위를 누렸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질서가 담긴 도덕을 가지고 민중을 선동과 세뇌와 강압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 세상에는 수많은 힘이 있는데 도덕은 그 힘의 방향성을 결정하여 인류 최고의 권위에 있는 힘이다. 이런 배경으로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낡았다. 이제 도덕은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 인간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현재 정상적인 사상가는 평지에서 선행 후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면 도덕이 인간의 위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유교는 진리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도덕은 이제 인류의 위가 아닌 인류의 곁에 있어야 한다.

 

반면 갤럭시는 삼성의 파랑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푸른 하늘과 청아한 파란 바다가 떠오르는 파랑이다. 그런데 이걸 갤럭시의 색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애플의 순백은 아이폰의 순백이란 느낌으로 이어지는데(또는 반대로도) 삼성의 파랑은 갤럭시의 파랑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없다. 갤럭시로 떠오르는 색이 없으니까 삼성의 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은 퍼스트컬러부터 차이가 났다. 파랑 자체만 봐도 순백에 비하면 약간 격이 떨어진다. 파랑이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이 사상들에는 도덕성이 부족하다. 백의 민족, 올바른 느낌, 백인의 상징, 웨딩 결혼 등. 아무리 생각해도 순백이 파랑을 넘기가 어렵다. 백인을 언급했다고 특정 인종의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단지 일부 국가에서 백인의 이미지가 좋다는 현상은 확실히 있다는 걸 말해두겠다. 현상은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갤럭시는 우선 퍼스트컬러부터 확실히 인류에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퍼스트컬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적이 없다. 갤럭시와 아이폰 둘 다 없었는데 퍼스트컬러에 대한 인식 차이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 있었다면 제 역할을 못했다.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에 대해 생각해보자. 별빛이 담긴 검푸른색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밤하늘이다. 밤하늘이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은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한다. 갤럭시와 비슷한 느낌의 색,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동심,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인류의 꿈, 그걸 위해 발전하는 과학, 과학 속에 담긴 미래,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거대한 크기와 거리.

 

밤하늘이란 아이의 꿈을 자극하는 색이라 생각한다. 별빛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색상. 활발하면서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가 눈을 반짝일법한 색상. 언제나 밝고 명랑하며 활기찬 아이의 색상. , 모험, 호기심, 설렘 등. 거기에는 인류의 꿈이 있다.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했던 인류는 비행기를 통해 하늘을 날았고, 우주로 가고 싶어했던 인류는 우주선을 통해 우주로 날아갔다. 그러나 하늘에 비하면 아직 우주는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다. 우주는 아직 대부분 인류의 꿈이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초등학교 바나나 사건 전후쯤에 아마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밤하늘 별을 보며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우주는 아이의 동심을 자극한다. 나는 아직도 어린왕자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떤 이는 동화기 때문에 읽기 쉬워 가치를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거지 읽기 난이도 같은 걸로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신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이상이라 본다.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종교는 도덕이고 과학은 기술이기에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종교와 과학은 방향성이 같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대체된다.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 내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면 과학은 지구를 포함한 전 우주와 있는지도 모르는 다차원의 세계까지 고려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영역 자체가 다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춰 과거와 미래로 대칭을 맞춰야 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완성된 순백과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 Pure white color VS Night sky color 나름 괜찮은 대결이 될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이란 이미지는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는 삼성과 어울리는 느낌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을 감각 있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색의 경우에는 편하게 깔끔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별이 들어가면 별의 위치, 크기, 색상, 여백 등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밤하늘 색 바탕에 작은 별들이 입체감을 주며 살아 숨쉬듯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별의 배치가 감각이 있다면, 그 배치가 고유하다면, 분명 그 밤하늘은 갤럭시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어렵지만 우수한 디자이너라면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각국의 국기에 별이 붙을 걸 보면 밤하늘을 좋아하는 국가들도 많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도 밤하늘은 좋은 퍼스트컬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밤하늘 색을 퍼스트컬러로 정하고 나면 노선도 확실하게 된다. 미래와 과학이다. 가령 스마트폰 판매금 몇퍼센트를 우주개발에 쓰인다고 홍보할 수도 있다. 연구개발을 할 때 우주관련 소재를 연구개발 한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연구개발 하는 거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가 써먹은 상당히 쓸모 있는 방식이다. 당연하다 여기는 것조차 거기에 부가가치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 영업이나 수리도 밤하늘 색을 포인트로 잡은 옷을 입거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서리를 달면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색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색을 메인 컬러나 악센트 컬러로 쓰기만 하면 된다. 별빛을 수놓은 밤하늘이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강해 개인적으로 액세서리가 어울리다 생각한다.

 

잠시 좀더 진지하게 말하겠다. 내게 있어 갤럭시는 평범한 스마트폰이었다. 갤럭시는 다른 스마트폰 브랜드와 같은 선상에 놓여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브랜드 자체가 부가가치를 만드는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성능이나 가성비를 비교하여 적당한 스마트폰을 썼었다. 아이폰은 IOS가 불편할 것 같아서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폰은 앞서 말한 이미지 때문에 언젠가 한번쯤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말하고 싶다. 예쁜 색, 유행하는 디자인, 빅데이터로 뽑아낸 수요, 그런 것은 일시적인 판매율에 영향을 줄 수 있어도 근본적인 브랜드 성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기존 고객의 수요에만 맞추기 때문에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빅데이터에 과도한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참고자료다.) A가 유행하여 A한 느낌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면 A의 유행이 끝날 때엔 다시 브랜드 성장을 해야 한다. 브랜드 성장이 없으면 지금 당장 잘 팔리더라도 다음에 잘 팔릴 거란 보장이 없다. 브랜드와 유행은 명확하게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브랜드는 줄기로 삼고 유행을 가지로 삼아야 한다. 브랜드를 성장시켜 변화가 없거나 부진하더라도 잘 팔리는 명품처럼 되어야 한다. 애초에 같은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게 만드는 것이 잘못되었다. 같은 천을 쓴다고 명품 브랜드랑 일반 브랜드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이제 갤럭시도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독보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대상.

 

대상은 나이와 자산으로 나눠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모델을 단순히 성능으로 나누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본다. 나이는 편의성의 차이로 소프트웨어적으로 접근하면 되므로 굳이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고, 자산은 가치판단의 차이로 하드웨어적으로 접근하기에 모델을 나눌 필요가 있다.

 

나이부터 해보자.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외면을 받는다는 그런 느낌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아저씨 폰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 보통 스마트폰은 초기앱이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 있다. 갤럭시는 써본 적이 없어서 검색으로 알아봤는데 비슷한 것 같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저것 다 넣으면 안 된다. 특히 기술에 자신이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다 넣는 함정에 빠진다. 필요하다고 다 넣으면 멋이 없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낡고 고지식해 보인다. 기성세대용으로 보인다. 또한 과도한 정보는 인간에게 피로함을 준다. 꼭 필요한 기능만 있으면 된다. 전화, 카메라, 인터넷, 앱 플랫폼, 스마트폰 설정. 스마트폰은 이것만 설치되어 있으면 된다. 구글을 생각해보자. 구글은 검색기능을 중앙에 띄어놓고 세계를 제패했다. 구글의 기술이 발전해도 그걸 유지했다. 이것이 다양한 기능이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음을 증명한다. 드라마의 예도 같다. PPL을 넣는 드라마와 넣지 않는 드라마 중에서 보통 후자가 인기가 좋다. 부가기능이 없는 구글과 PPL이 없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각 역할의 본질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꼭 필요한 것만 초기에 있는 것이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도 필요한 앱이 있으면 그냥 플랫폼 들어가서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초기앱이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 과도한 초기앱은 젊은 세대에 그다지 호감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 본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앱을 설치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커스터마이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런 감각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초기앱을 전부 없애면 필요하던 이들은 당황할 수 있다. 그러니 멋과 편의를 둘 다 잡으려면 초기설정에서 초기앱의 설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나이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경향 별로 A, B, C 같이 나눠서 비슷한 경향의 앱 설치 루트를 안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갤럭시는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쓰는 기능을 높은 순으로 정리한 뒤, 그것에 충실히 하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이런 나이에 대한 구분은 소프트웨어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기성세대도 프리미엄 폰을 바라고 있었다고. 굳이 기성세대 전용 폰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들지는 못할 거라 본다. 지금 당장 나이로 구분 짓기는 했지만 이건 보편적인 구분일 뿐이다. 실제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할 수 있고, 기성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런 나이 구분은 굳이 겉으로 표출할 필요가 없다. 안에서는 나이로 구분 짓되 밖에서는 편의성으로 구분 지으면 될 것이다. 기성세대도 젊은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본다. 그러니 굳이 기성세대에 맞출 필요가 없다.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선택 받기 위해서는 기본을 젊은 세대에 맞추고 필요한 이들을 따로 기성세대에 맞추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스마트폰으로 가되 기술발전으로 등장하는 추가기능은 언론이나 매뉴얼 등으로 홍보하는 것이 좋다 본다. 그것이 갤럭시의 명품화에도 이롭다. 절제의 미가 명품화를 도울 것이다.

 

자산으로 가보자. 모델의 구분을 단순한 성능으로 하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생각한다. 간단히 접근해보겠다. 매우 예쁘지만 잘 깨지는 A, 덜 예쁘지만 튼튼한 B. 요컨대 부자는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여기게끔 하고, 빈자는 스마트폰을 전자제품으로 여기게끔 하면 된다. 명품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허세와 과시인데, 스마트폰은 그러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자제품이어서 가격차이가 극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한쪽은 소모품, 한쪽은 전자제품으로 여기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밖에서는 미관의 차이로 가지만 안에서는 자산의 차이로 간다. 이렇게 내구도의 차이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명품은 대놓고 명품이라 말하는 것보다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쳐 명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좋다 본다. ,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쓰는 사람은 부자구나. 미를 명목으로 명품의 인지를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 부자는 돈을 많이 써야 하므로 이런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본다. 물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전자제품의 소모품화는 분명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고장 난 것을 회수하여 재활용한다는 것을 공표할 필요가 있다. 최신폰일 경우 고장 난 것을 반납시 얼마를 되돌려주거나 다른 폰을 구매할 때 가격을 깎아준다는 방식으로 가면 된다.

 

스마트폰도 명품화를 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프리미엄 폰을 따로 몇 기종 비싸게 판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폰은 명품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명품을 구매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굳이 튼튼할 필요는 없다. 다시 사면 되니까. 가격 차이가 발생하기 어렵다면 구매 횟수로 차이를 벌려야 한다. 소모용으로 만든 것은 내구성, 품질, 기간 전부 짧게 제공되나 외견과 성능을 좀 더 올리면 된다. 외견은 아름답지만 잘 깨지는 소재로 쓰고, 성능은 오버클럭으로 대응한다. 무기를 한계까지 날카롭게 갈면 내구도가 저하된다. 그런 것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아름답지만 깨지기 쉽다는 인식도 이해는 어렵지 않을 거라 본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정해두면 방식은 무궁무진할거라 본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소모품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스마트폰 정보를 인터넷에 전송해둬야 새로운 폰을 구매할 때 바로 이어서 쓸 수 있다.

 

덜 예쁘지만 튼튼한 폰은 그냥 일반 폰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주선에 쓰이는 소재를 써도 가격이 맞는다면, 쓰고 나서 그에 관련된 홍보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는 우주인이 사용하는 것도 홍보가 될 것이다. 컨셉과 대상을 명확하게 정해두면 방향이 결정되어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방법도 계속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명품화는 의류 브랜드를 참고하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상품을 명품화하여 판매했다.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재료의 가격이다. 전자업계나 자동차업계도 명품화가 된 곳이 있지만, 보통 그런 곳은 재료가 비싸다. 반면 의류업계는 상대적으로 재료가 저렴하다. 현대미술과 같이 재료의 가격이 낮아도 명품화가 되고 있는 것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거의 브랜드 가치만으로 명품을 유지한다. 같은 명품이라도 다 같은 방식이 아니다.

 

 

하드웨어.

 

스마트폰의 혁신은 대부분 배터리에서 좌초된다. 무게도 모양도 배터리의 한계로 인해 바꾸기가 어렵다. 소재도 효율도 지금 당장은 정해져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면 실상 앞으로도 스마트폰은 하드웨어적 혁신이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아는 기술이 많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만약 다른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걸 조합하여 새로운 혁신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 배터리 기술 발전이 계속 된다 가정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 몇 가지 떠올려보겠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면 분리라는 형태로 혁신을 할 수 있다 본다. 지금 당장 이용자가 쓰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분리시키는 것이다. 액정과 나머지 하드웨어를 분리하여 무선으로 신호를 연결한다. 이러면 액정과 무선송수신기가 있으면 된다. 카메라는 액정 자체에 내장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배터리는 혁신을 통해 가볍게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충전한다. 액정은 들고 다니고 하드웨어는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는다. 하드웨어 분리가 가능하면 스마트폰의 기존 성능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 합치다 다음에 접다 다음에 분리하다. 분명 그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액정을 접어서 카드처럼 들고 다녀도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액정 분리형 스마트폰은 화면과 컨트롤러를 분리한 것이기에 무선송수신이 가능한 컴퓨터와도 연동이 가능할 것이다.

 

배터리 혁신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존 기술의 발전. 둘째, 생체 에너지. 셋째, 무선 충전의 발전. 첫째는 그냥 기존 배터리가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소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를 넘었다. 둘째는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굳이 충전하지 않고 액정을 손에 들고 다니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셋째는 무선 충전이 발전하면 된다. 점점 장거리 무선 충전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해지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무거울 필요가 없으므로 분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배터리 혁신이 가능하면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가벼운 스마트폰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나 굳이 분리하는 까닭은 더 얇고, 더 가벼운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리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얇은 액정과 수신기를 더한 두께 정도의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얇아서 불편할 것 같았는데, 직접 통장 들고 만지작거려본 결과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배터리 혁신이 되지 않는 이상 무게 측면에서 분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배터리 문제가 해결된다면 분리는 분명 새로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기술에 의존하는 혁신제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성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본다.

 

배터리 혁신이 되면 날다도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가볍기 때문에 공중에 띄우기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드론 방식보다는 전자석 공중부양 같이 다른 방식으로 띄우는 것이 미관에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 외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다. 안경형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없다. 홀로그래피로 입체영상을 띄우는 건 유명하니 넘어가겠다. 홀로그래피가 가능해지면 홀로그램의 3차원을 3차원 프린터로 바로 출력할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카멜레온이나 투명 소재를 생각해봤는데 그리 매력적이지는 못하나 재미는 있을 것 같다. 공공 자전거처럼 공공 스마트폰 같은 것이 있어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 모듈만 들고 다니는 것이 떠올랐으나 그다지 쓸만할 것 같지는 않다. 형상기억합금은 이미 필요한 곳에 적용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위성통신 기능은 이미 있을 것이다. 우월감에 초점을 맞춰 통신장악을 위한 통신영역을 통해 통신방해기능을 떠올려봤으나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병렬연결 방식이 떠올랐다. 소모임 같은 곳에서 스마트폰을 모아 하나의 어떤 영상이나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노는 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화질도 별로 좋지 않고 연결도 불안정하며 소프트웨어적으로 인터넷 연결이 될 것 같아 별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괜찮다. 어떤 걸 합심하여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액정 분리가 가능해진다면 자르거나 붙이는 것이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전기충격 기능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합치다라는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므로 거기에 전기충격 기능이 하나 더해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면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위험해서 조심스럽다. 촉각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만약 스마트폰 내부에서 어떤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신호를 촉각을 통해 뇌로 전달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을 들고 있기만 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킹을 생각해보았다. 보안에 예민해지는 만큼 블루스나핑 외의 모든 형태의 무선 재킹 방지대책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일부 모델은 가능하면 천문사진 촬영이 되도 재미있을 것이다. 뇌파 수신기능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대로 바로 메모되는 기능이 되면 좋을 것이다. 피를 넣어 유전자를 기억하게끔 할 수 있으면 완전한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드웨어는 발상의 제약이 많다. 바 형태에 맞춰진 소프트웨어도 그렇고 딱딱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자.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넣다, 빼다, 돌리다, 던지다, 밀다, 당기다, 사다, 팔다, 빌리다, 굵다, 얇다, 쉽다, 어렵다, 가깝다, 멀다, 높다, 낮다, 서다, 앉다, 기다, 뒤집다, 늘다, 줄다, 많다, 적다, 젊다, 늙다, 빠르다, 느리다, 가볍다, 무겁다, 켠다, 끈다, 맞다, 피하다, 추다, 누르다, 말다, 만지다, 비비다, 맡다, 쏘다, 자르다, 쪼개다, 같다, 틀리다, 다르다, 만들다, 부수다, 뭉개다, 부러지다, 막다, 참다, 버티다, 조용하다, 시끄럽다, 깨다, 자다, 꾸다, 개다, 일어나다, 깨우다, 원하다, 애타다, 아프다, 다치다, 터지다, 채우다, 비우다, 푸다, 떠나다, 남다, 비치다, 튕기다, 키우다, 물다, 보다, 하다, 핥다, 흘리다, 달리다, 느끼다, 마시다, 싸다, 놀다, 빨다, 뽑다, 듣다, 담다, 쏟다, 열다, 닫다, 덥다, 피다, 파다, 재다, 세다, 갈다, 섞다, 꿰매다, 뱉다, 묶다, 꼬다, 읽는다, 적는다, 닿다, 찢다, 베다, 매다, 흔든다, 더하다, 나누다, 잠그다, 풀다, 조이다, 벌리다, 심다, 고르다, 뜨겁다, 차다, 바꾸다, 새기다, 베끼다, 낳다, 뚫다, 찾다, 잃다, 안다, 대다, 굴리다, 찌르다, 휘두르다, 붙다, 때다, 옳다, 그르다, 튀기다, 찌다, 굽다, 볶다, 말리다, 비튼다, 아끼다, 소홀하다, 맡기다, 올리다, 내리다, 따르다, 걸치다, 애쓰다, 새롭다, 낡다, 예쁘다, 더럽다, 맑다, 귀엽다, 흉하다, 홀리다, 내치다, 털다, 잡다, 놓다, 바라다, 숨기다, 넘기다, 후비다, 훔치다, 체하다, 알다, 모르다, 고맙다, 미안하다, 맞추다, 걸리다, 늘리다, 줄이다, 다루다, 친하다, 젖히다, 바르다, 떼다, 붙이다, 부드럽다, 거칠다, 말랑하다, 사납다, 비웃다, 무섭다, 싸우다, 먹다, 생각하다, 기억하다, 부르다, 귀하다, 천하다, 배고프다, 배부르다, 취하다, 뻗대다, 불다, 쏠리다, 겹치다, 데었다, 묻다, 잔다, 주다, 뺐다, 미루다, 내밀다, 오므리다, 띄우다, 떨구다, 받다, 버리다, 휘다, 펴다, 가다, 오다, 멈추다, 웃다, 울다, 화내다, 속이다, 되돌리다, 데우다, 누리다, 찍다, 모으다, 뿌리다, 식다, 얼다, 녹다, 떨다, 살다, 죽다, 싣다, 달다, 맵다, 짜다, 쓰다, 시다, 떫다, 싱겁다, 뭉치다, 흩어지다, 졸이다, 입히다, 벗기다, 좋다, 나쁘다, 젖다, 놀리다, 뛰다, 박다, 그리다, 지우다, 찐다, 뺀다, 날다, 잇다, 끊다, 스며들다, 치다, 튄다, 부푼다, 타다, 썩다, 씻다, 씌우다, 닦다, 찌른다, 끼우다, 숨쉬다, 쭈그리다 등 다각도로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어렵다.

 

말다는 액정말기, 씻다나 젖다는 방수기능, 떨다는 진동기능, 막다는 보안, 벗기다는 케이스를 주기적으로 벗겨서 깨끗한 표면을 유지하는 것, 사다와 팔다는 구매와 판매, 날다는 액정 날기, 겹치다는 액정필름, 놀다는 게임, 찾다는 GPS, 잃다는 원격잠금, 푼다는 계산기, 생각하다는 인공지능, 부르다는 음성인식, 듣다는 음성신호, 보다와 찍다는 카메라, 띄우다는 홀로그래피, 닿다는 촉각 감지, 만지다와 비비다는 지문인식, 밀다는 슬라이드폰, 맡다는 스마트폰 후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냄새인지, 아프다는 터치입력 강도에 따라 통각감지, 핥다다 빨다는 스마트폰 미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맛인지, 쏘다는 전기충격, 쓰다와 그리다는 필기입력. 이중에서 오감을 뇌가 인지하게 하거나 구현하는 것이 괜찮아 보인다. 감각인지 및 구현 폰이다.

 

합치다, 접다, 분리하다, 날다 그리고 느끼다. 이 감각을 느끼다가 가능해지면 확실히 합치다를 넘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앱 플랫폼의 존재로 하드웨어 제조사에서 주력으로 갈 필요는 없는 분야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만 쓰겠다.

 

인공비서. 인공지능이 평소의 패턴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데이터를 쌓은 뒤에,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패턴 또는 다른 답을 내놓으면 주인임을 의심한다. 평소와 다른데 A가 맞나요? 그것으로 인공지능은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인간성으로 넘어간다. 의심이야말로 지능 높은 동물인 인간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인식이 특별한 관계를 낳고, 특별한 관계가 특별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스마트폰을 특별하게 여기는 기제가 될 것이다.

 

자아에 대해 잠시 말하겠다. 인간은 유전자란 알고리즘과 내외부의 입출력을 통해 생각(연산)하고 행동하고, 그걸 통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반복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최초의 알고리즘이 의식을 담당하고 쌓인 기억이 무의식을 담당한다. 의식은 알고리즘에 연산이 있냐 없냐에 따라 생각의 유무가 달라지고, 무의식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 생각의 유무에 따라 의지가 달라진다. 의지에 따라 생각의 다양성이 달라진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여 각자 다른 생각이 나타나고, 전체주의에서는 집단의 의지를 중시하여 비슷한 생각이 나타난다. 여기서 통상 내외부 입출력인 육체와 환경이 없다면 인간 수준의 자아는 형성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처럼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자체 생성할 수 있다면 어쩌면 비슷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가상화. 요즘 메타버스나 버튜얼 유튜버가 유행하고 있는 것만큼 가상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에 맞춰 어떤 사물을 카메라로 스캔하여 가상의 비슷한 물건과 매칭 후 화면에 띄울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가령 공을 스캔하면 가상의 공이 스마트폰에 뜨고, 그걸 문자나 영상 등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된다. 단순하지만 포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현실의 물건을 가상의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스마트폰이 현실과 가상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차원전송기가 된다. 그걸로 보다 특별한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폰에 집어넣은 사물에 대한 상세정보지원을 하면 아동교육이나 언어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치기록.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에 위치기록이 되어 지도에 촬영한 위치가 뜨면 좋을 것 같다. 이것도 포장하면 재미있을 듯하다. 시공간을 기록하세요. 같이 말이다.

 

녹음. 법적 분쟁에 쓸 수 있도록 전문화된 녹음기능이 있으면 선호될 것이라 생각한다. 타사의 스마트폰보다 갤럭시의 녹음이 법적 증거로써 더 효력을 발휘한다면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변조할 수 없는 특별한 포맷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 각국의 법조계의 도움을 받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외 다양한 법적 증거에 최적화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견적. 어떤 목적에 필요한 금액을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예컨대 게임용 컴퓨터를 물어보면 자동으로 부품 검색을 통해 평균 가격을 더해 최소와 평균과 최대 금액이 출력된다. 특정 지역 여행을 물어보면 그에 필요한 금액이 출력된다. 구체적인 금액은 직접 조사를 해야 하겠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필요한 일반적인 금액을 알기에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완전삭제 또는 복구. 삭제한 파일도 복원되기에 그걸 이용해 사진을 유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완전삭제기능은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복구기능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밤하늘에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면 좋다. 방식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도 좋다. 중요한 점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제만 주고 알아서 만들게 해야 한다. 아니면 밤하늘과 연관된 작품과 연계하는 것도 좋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밤하늘의 이미지를 전부 장악하겠다는 감각으로 가면 된다. 순백하면 아이폰이 떠올랐던 것처럼 밤하늘 하면 갤럭시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시장의 수요 장악만이 장악이 아니다. 이미지 장악 또한 장악이다. 시장 장악은 당장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으나 이미지 장악은 오랫동안 수익을 보장할 확률이 높다. 미래나 과학 같은 것은 장악하기 어려워도 밤하늘 색 하나는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한다. 물론 가능하면 다 장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인데, 체급이 큰 브랜드는 어떤 특정한 색이나 이미지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놓고 제품을 등장시키는 PPL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본다. 대놓고 홍보하는 것은 거부감을 준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무의식에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에서 밤하늘색을 자주 사용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인지시킨 다음에 다양한 곳에서 밤하늘과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스마트폰이 이어지는 연출을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갤럭시하면 밤하늘이 떠오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역할.

 

대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역할을 얻는 것이 좋다. 구글이 최상의 검색능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검색의 역할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밤하늘 이미지를 장악하면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학적인 미래형 스마트폰의 역할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행.

 

옷의 유행 주기가 30년 정도 되듯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유행을 젊은 세대는 신선하게 느끼게 된다. 30년전 인간이 즐기던 것을 세련되게 바꾸기만 해도 충분히 통한다. 브랜드는 줄기고 유행은 가지. 이걸 명확하게 해둬야 유행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브랜드만 치중하면 가지가 죽고, 유행에만 치중하면 줄기가 죽는다. 유행에 따라 색이나 컨셉을 다양하게 내놓아도 브랜드는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유행을 아예 무시하면 시장에 외면 받을 가능성이 있다.

 

 

홍보.

 

아이폰과 라이벌이라는 것은 좋으나 유머나 위트가 없는 깎아 내림은 단순한 뒷담이나 괴롭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디스하고자 하면 반드시 유머나 위트를 넣어야 한다. 직접 또는 의류브랜드와 협업하여 밤하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사리를 만든 뒤, 그걸 갤럭시 관계자가 입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스마트폰과 같이 파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홍보에 쓰이는 만큼 이걸로 수익을 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밤하늘이 갤럭시의 대표색상이 되면 밤하늘 액세서리를 쓰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갤럭시를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름이 아닌 색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효과가 있다.

 

 

노조.

 

사실 노조랑 갤럭시는 큰 관계가 없다. 심각한 노동착취가 아닌 이상 고객의 수요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는 거시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방법이지, 미시적인 이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잠시 노조에 대한 의견을 내보자. 최근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높은 인상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임금협상에만 초점을 맞추자. 이건 기업이 기여도를 분석해서 적절하면 받아드리고 아니라면 거부하면 되는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어째서 노조의 요구는 매번 모든 직원이 동일한 임금 인상인가? 부서별로 기여도가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기여도가 다를 수 있다. 모든 노동자의 동등한 임금인상요구는 모든 노동자를 등에 업고 회사와 싸워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마인드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건 사회주의적 투쟁이다.  자본주의의 협상이라면 노조와 회사가 같이 토론하여 특정 부서의 임금을 높거나 낮게 인상하거나 동결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는 게 타당하지 않는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전직원 포상금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여도에 따라 임금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삼성이 처음으로 임금협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구식의 방식으로 임금협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임금을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노조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노사관계의 임금협상이 임금체계의 토론으로 나아가면 긍정적일 거라 본다.

 

사실 이런 대기업 노동자 협상은 대기업 직종에는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에는 영향을 주기 어렵다. 진정 모든 경제에 속한 인구의 인권을 위한다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국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강력히 주장하겠다. 대기업 노조가 모든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더 민주주의적이다. 지역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에게 가깝다고 보는가? 지역 대표는 부동산관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인데 분야 대표는 그나마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업계가 좁을수록 그럴 확률은 높을 것이다.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일단 지역 대표와 분야 대표 모두 입법권을 쥐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겠다. 이게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선동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동정치는 진정한 정치가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폰은 아마 갤럭시나 아이폰이 될 것 같다. 카메라가 툭 튀어나오지 않고 전면 카메라 숨김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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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운동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에 찬사를 보냅니다. 기자가 수상했다고 하더군요. . 생각해보면 기자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황당한 거였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도덕은 그냥 과거 종교가 만든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도덕은 어떤 과학적 증명도 되지 않았어요. 그냥 그 당시 필요한 규칙일 뿐입니다. 과거에 필요했던 규칙 모든 것이 현재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기초를 인식하지 못하면 이 기초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행동원리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나와버려요. 어떤 옳거나 그르다는 감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미신이나 토속신앙부터 오래된 종교나 사이비 종교까지 전부 비과학적인 것은 거의 다 거짓일 것입니다. 전능을 주장하는 이들이 전지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거짓일수밖에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솔직히 한국은 문제점이 많죠. 내가 봐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국가가 출산율이 저하하고 경제 양극화로 경쟁력도 악화하고 주입식 문제풀이로 문제해결능력도 저하해서 뭐 지금 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종교, 민족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 자유방임주의, 금전만능주의 같은 걸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자본가 루트를 타고, 경쟁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할만한 자본가를 양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봅니다. 지금 경쟁을 통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시를 보는 것처럼 경쟁을 통해 자본가로 성공하는 길을 일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정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능력의 상품화와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모두 갖추면 자본가 루트가 아니더라도 자본가 마인드로 기업에 협력하여 성장을 돕고 거기에 부가가치를 받은 후 자본이 모이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업유연화가 나타나 상품경쟁력이 높아져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우수한 기업들이 늘어나겠죠. 세계시장에 선택되는, 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랍니다.

 

정치를 보면 참. 슬프네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부당한 사리사욕 유무가 검증기준이라는 것이 절망적일 정도네요. 빨리 선동정치가 끝나야 될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주장하겠습니다.

 

내게 있어 자유주의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지요. 민주주의가 사회를 구성하기에 집단적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이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자본이 있었다면 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었다면 지역 영상 플랫폼 같은 걸로 창업 시도를 해봤을 텐데 아쉽군요. 개인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한 화면에 주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꽤 오래 살아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대체로 가던 길만 가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난 구역은 잘 모르죠. 유튜브가 한 화면에 취향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오는 것처럼 지역에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와서 필요한 서비스를 편하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풀이를 중시해서 시험을 잘 보면 능력이 높고 못 보면 낮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도 문제풀이능력이 낮으면 아무래도 선호되기가 쉽지 않네요.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업로드 속도가 저하될 것 같네요. 업로드 시기는 모르겠는데 다음 글은 문제해결능력 또는 역할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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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9) 2021/10/01 AM 07:32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열등주의다.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므로 여성주의(페미니즘) 찬반과 별개로 선입견 없이 바라보길 바라겠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 알기 쉽게 여성주의로 부르도록 하겠다. 한국 여성주의는 조선의 종교였던 유교와 서양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의 결합으로 여성열등주의가 되었다. 유교부터 알아보자. 유교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여 사회진출을 방해하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유교는 여성열등주의다. 여성주의를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부르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불렀다. 이 주관적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하다. 여성주의 자체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같이 다른 사상에서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손해를 보면 여성차별이라 말했다. 이러니 여성주의자마다 군복무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주관적으로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이익이면 남성혐오가 여성인권이 되고 그걸 막는 것이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어째서 여성주의자가 남성혐오를 옹호하는지 알겠는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된다. ,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와 여성주의의 여성인권을 합쳐보자. 유교에 세뇌된 여성은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만족시키는 걸 이익으로 여기기에 그걸 여성인권이라 말하여 여성을 열등하게 세뇌한 뒤에,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위해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사회에 강요하게 된다. 이 강요를 사회는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의지 약화와 성적 수치심 강화는 기성세대의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약화한 걸 여성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걸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세뇌된 노예가 자발적으로 주인의 가르침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꼴을 본 거나 다름이 없다. 끔찍하다. 이런 이유로 여성주의는 사회에 쉽게 흡수되었다. 여성주의자와 기성세대가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열등하니 배려해달라 강요했다.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배려하는 것에 동의했고,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배려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대별로 유교의 세뇌 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여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성별 평등으로 자라난 세대의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을 열등하다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일부 여성이 장애인 혜택과 같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로 받는 혜택을 여성의 이익으로 여겨 그 배려를 여성인권이라 말하게 되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남성은 그 배려를 이해하지 못해 여성우월주의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에 따라 그 남성은 여성우월주의 반대라며 반발하였다. 그 반발을 보고 일부 여성은 이런 장애인 혜택과도 같은 배려야말로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더욱 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다음 혜택 받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나타났다. 정조관념을 주입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해진 여성은 성관계를 터부시하고 성적 문화나 창작물도 검열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의 정조조차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마호메트를 신성시하라는 세뇌를 당한 이슬람이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마호메트 묘사에 몹시 불편해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성 상품화는 무시하고 여성 성 상품화에만 예민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어 강하게 세뇌된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며 이성애의 욕구를 해소했다.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 수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 수가 줄어들었다. 국가의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1인 가구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 본인이나 타인의 경험으로 볼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정조를 굳게 지키며 살다가 정말 잘생긴 남성과만 관계를 맺자, 그 여성과 관계를 맺어야 할 다수의 남성이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한 욕구를 충족 못한 남성은 포르노나 성매매도 금지 당해 이걸 막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은 여성대로 열등하게 세뇌 당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여성이 불행하다라고 세뇌 당하면 어떤 여성은 실제와 관계 없이 주관적으로 불행하다 여기게 된다. 그 불행함을 남성에게 쏟아내며 더욱더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단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현재 한국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인권이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라면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인권은 대부분 헛것이 된다. 그에 따라 반론을 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여성주의자는 유교의 세뇌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말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유교의 세뇌가 바로 연령차별이다. 장유유서를 통해 연상과 연하는 차별 되었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하의 반말을 들으면 몹시 불편해진다. 건방지고 예의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는 여성주의자가 성적 창작물을 불편해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세뇌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이 벗어났다 해도 다른 이들이 벗어났다 단언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인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유교의 세뇌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여자는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성적 수치심(성 과민이나 창작물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이 강하다는 감각이 있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강한 의지나 수치심이 적길 바라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로지 유교의 세뇌 때문이다. 원시 부족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건 철저하게 남성의 의도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대다수 한국인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유교에 세뇌되어있다는 것과, 여성주의자가 유교에 세뇌되어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다는 논리에 대한 반론은 불가능하다. 연령차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인간이 여성열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여성특혜고 둘째는 여성 성 과민이다.

 

첫째, 여성특혜

 

여성가족부, 여성할당제, 여성가산점, 여성창업지원, 여성대학존재, 여성징병의무 없음, 여성폭력방지법, 성매매여성 지원, 여성전용주거, 여성주차장 등 여성 전용 서비스는 전부 여성열등주의를 근거로 한다. 보자, 장애인가족부, 장애인할당제, 장애인가산점, 장애인창업지원, 장애인대학, 장애인징병의무 없음, 장애인폭력방지법, 성매매장애인여성 지원, 장애인전용주거, 장애인주차장 등 여성에 장애인을 넣으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지금 일부 여성은 장애인 혜택 받으면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는 인간 절반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긴 이들은 당연하니까 굳이 반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은 열등하지 않은데도 혜택을 받으니 장애인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꿔서 해보자.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지적 장애인 여성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은 장애인 수준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은 간단히 말해 약자인 여성의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일컫는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열등하니까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가령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여성에도 해야 한다는 게 성인지감수성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설령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의 이익이 되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을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해외에서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법과 큰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주의는 그걸 억지로 법과 연결 지어 여성의 열등함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징병의무가 없는 것은 간단한 논지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징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이 이런 논리가 나온다. 최근 여성징병에 대한 찬반조사 결과 40대 이상의 남성만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교에 세뇌된 농도가 높을수록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해진다. 여성주의가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여성징병에 회의적이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성징병에 찬성하게 되어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대부분 여성징병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의 가족폭력 비율을 보고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피해를 입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성이 비율이 높지만 성인 남녀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남성이 폭력적이고 여성이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의 차이로 인해 비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만약 여성이 힘이 더 쌨다면 남성이 폭력피해를 받는 비율이 높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여성폭력방지법을 추진한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가족폭력방지법이 차라리 낫다.

 

 

둘째, 여성 성 과민

 

여성 성 과민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 당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정조관념은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한 여성이다. 정조관념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소유물화하기 위해 만든 악의적인 관념이다.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주입하여 다른 남성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혼 전에는 관계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결혼 후에 과부가 되더라도 재가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을 앗아간 무거운 족쇄다. 그런데 이걸 유교적 여성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결혼 전 미성년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므로 최대한 야한 것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년 여성조차 야한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유교적 여성주의자에게 세뇌된 새로운 여성주의자들도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치마를 입는 여성에게 득달적으로 다가가 잘못되었다고 비난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적 대상화라던가 성적 착취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걸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나! 남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적 대상화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되려 이상하다. 이성이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야 사랑하고 출산하고 그럴 거 아닌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일부를 성적 대상화하였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평등해진 지금은 그저 서로의 매력을 사랑하는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라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등하다면 성적 대상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여성의 인권을 운운하는 이들이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부정하는가? 여성도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자유롭게 야한 옷을 입을 수 있다. 이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건 그냥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세뇌되어 불편한 감각이 발생하여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흔들다리 효과가 대표적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사랑인지도 분간 못해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불편해진 감각을 성적 대상화니 뭐니 말하며 가져다 붙인 것이 여성 성 과민의 본질이다. 이런 세뇌를 당한 여성은 성에 몹시 취약해져 남성 구조원이나 경찰관의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니 구조하는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정상인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멀쩡한 여성을 장애인으로 만든 다음 배려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은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나. 남성은 여성 알몸 본다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 여성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직접 보는 것 자체는 보통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알몸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 차이가 잘못되었음을 모르는가? 본다는 행위에 육체적인 체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니지 않나. 이건 오로지 의지와 지성의 영역이다. 세뇌 당하지 않았다면 남녀 모두 인간의 알몸을 본다고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

 

성 과민이 이성적이었다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할 수가 없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하는 것은 남성의 정조가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정조관념이 불편함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서양에서도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해한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받아 정조관념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했던가? 이성으로 만든 주장이 아니라 감성으로 불편해진 감각에 이유를 갖다 붙였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실제 여성의 정조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등장하는 가상 여성의 정조까지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창작물에 나오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있거나 노출이 되면 검열을 통해 가린다. 이것이 보통 2D인권부여라고 하는데, 2D남성에 대한 인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2D여성인권부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노출은 괜찮은데 여성의 노출은 안 되는가? 그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물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은 연하의 반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나 마호메트 세부묘사에 불편해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공통점은 세뇌되어 창작물에서조차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의 춘화를 보고 조선시대보다 한국이 더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유교의 탓이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면 해석이 된다. 과거 조선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춘화가 있더라도 과연 불편하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한국은 여성의 인권이 높다. 발언권이 많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나타나는 불편함을 대놓고 호소하며 마구잡이로 야한 것을 검열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주의의 본질이 더해진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주관적으로 불편한 것이 그들에게 차별과 혐오였기에 여성차별과 혐오를 막기 위해 창작물 검열에 힘을 쓴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창작물까지 간섭하며 검열하는 모습. 이 얼마나 웃기는 꼴인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되도 않는 검열은 자유와 여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수다.

 

이제는 남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기능을 명확하게 알고 그 기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중시했으면 지금 성인들도 성교육 지식이 낮다 하나? 아직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면 학부모가 반발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있는 건가. 이러니까 터무니 없는 창작물 검열을 사회가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야한 그림을 까맣게 검열하는 걸 보면 속이 터진다. 이외 실제 여성인권과 거리가 먼 용어나 형태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세뇌의 결과물이다. 그게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했기 때문에 용어나 형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불편하다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 내에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잘못된 법에 대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입법부에 전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 사법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제정하면 그에 대한 견제작용이 필요하다 주장하겠다. 성별에 차등을 둬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악법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같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누가 되었건 강요가 없는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인지, 유교 국가인지, 여성주의 국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정해 판결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의 본질은 인류열등주의다. 유교는 상명하복 사상으로 윗사람은 우월하고 아랫사람은 열등하다 가르쳤다. 윗사람은 조상과 연상이 있고 아랫사람은 연하와 여성과 아동이 있다. 신분으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상명하복을 도덕으로 만들어 열등한 아랫사람은 우월한 윗사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이 사상이야말로 동북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상명하복과 민주주의는 수직과 수평으로 전혀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열등한 인간은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차이점은 기독교는 외향적이나 불교는 내향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해외를 떠돌며 선교하러 다니고 불교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쌓는다. 뭐 그거 말고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열등하단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주장하며 인간이 열등하다 말하는 거나, 인간의 선천적인 육식성이나 폭력성을 죄로 말하는 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종교가 그 원조다. 괜히 새로운 용어 써가며 새로운 것마냥 대하지 말고 그냥 종교식 세뇌라 말하면 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에 세뇌되지 않도록 온전한 자아를 갖추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뇌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걸 당할 우려로 과민반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열등하게 만들면 이용하기가 쉽다. 여성도 같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의지를 약하게 하여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것처럼, 부모나 교사가 아동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세뇌하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다뤘던 것이다. 그거에 세뇌되어 열등한 걸 여성의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있다는 게 참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체력이나 근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보편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은 체력이나 근력에 있는 게 아니다. 의지와 지성에 있다. 힘만 따지면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이 우열의 기준을 힘으로 하는 게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의지와 지성은 성별로 우열이 나눠지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동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처사가 된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상 따위가 없다. 그냥 주관적으로 이익이면 옳고 손해면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러니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따위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하면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로 바꿔보면 안다. 남성주의를 남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남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남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라 가정해보자. 미국 남성의 손익과 이슬람 남성의 손익은 다를 것이다. 미국 남성은 보통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주관적인 이익이 아닐 것이다. 하나 이슬람 남성은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때 남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남성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슬람 남성이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남성인권이 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사상인지 알겠는가? 이슬람적 남성주의자는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남성인권이라 주장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남성차별이나 혐오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자가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화를 내는 것도 같다. 정말 천박한 사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약 이슬람에 여성인권이 올라 여성주의가 퍼지면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히잡은 여성인권이라고요! 실제 한국이 그러고 있지 않나. 꾸미지 않는 게 여성 인권이라고요! 그러면서 아나운서한테 치마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자가 맨스플레인이나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바꾸고 싶다면 여성이 노력을 해서 바꿔야 하는데, 여성주의가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라고 말을 하면 차별이나 혐오라 되받아 치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할당제나 가산점을 요구하는 게 여성주의다. 이는 비만이어서 사람에게 사랑 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 말하면 차별이나 혐오로 되받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달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가 있다. 자유방임주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유로움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그냥 지 감각으로 자유로우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방종한 행동을 정당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조잡하다. 금전만능주의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이 있고, 패권을 무력으로 쥐고 있음에도, 독재자가 권력으로 뭐든지 하고 있음에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돈으로 뭐든지 하는 걸 합리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지성이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 마음에 불편하면 차별과 혐오라 인식한다. 이러니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이 지 심기가 불편하다고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천박하다. 천박하다의 뜻은 뒤섞여서 바르지 못하다. 또는, 순수하지 못하다. 아니면 얕고 얇다. 라는 뜻이다. 이 세 사상은 지극히 조잡하고 지성이 없으며 천박하다. 이 세 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자본과 여성을 천박하게 만든다. 자유방임주의는 자유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금전만능주의는 자본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여성주의는 여성인권을 천박하게 만든다. 이런 사상은 자유와 자본과 여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만 되므로 부디 가지지 않길 바라겠다. 그 외에는 중우정치가 있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위해 페미니즘적 첫 저서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었다. 메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당대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에 대해 여성의 본성 탓이 아니라 교육의 탓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 주장했다. 여성을 위해 여성이 충분한 지성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사람도 기독교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당대 환경이나 교육으로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나 자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황했다. 이미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천박한 여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인가? 당대 유럽이 환경이나 교육으로 인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놔두고 멋대로 한국적 여성주의를 추구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이 사람을 여성주의자라 불렀는가? 여성주의는 단순히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지 않나. 이 사람은 그냥 자유주의자다. 인간의 권리 옹호를 먼저 작성한 자유주의자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지, 실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부른 적도 없다. 여성주의의 시작은 1837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애초에 여성주의 자체가 없었다. 이런 고상한 자유주의자에게 천박한 여성주의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면 부디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라겠다.

 

 

한국 여성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은 여성주의자에게 열등하게 세뇌되어 불행하다. 생각해보자. 네 주관적인 이익은 전부 옳고 주관적인 손해는 전부 그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은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겠는가? 정당한 손해에 차별이나 혐오라 느끼고 부당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의지약화와 성적수치심 강화까지 더해지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차별과 혐오로 느끼게 된다. 이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나. 여성주의자는 한국 여성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남성이라던가 국가라던가 출산율이라던가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하겠다. 이건 여성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별 쓸데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마음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이 차별과 혐오로 가득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세뇌되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아, 돌아버리겠구나. 하루 종일 너는 불행하다고 세뇌 당한 사람이 행복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뭐든지 감사하라나 힘든 형편을 지닌 사람보다 낫다거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온전한 자유의지! 현명한 지성! 객관적인 시각! 통찰력! 사고력! 따위를 길러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은 어떠한가? 보호를 명목으로 여성의 의지를 꺾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옷차림의 자유를 막는다. 외모 꾸밈의 자유를 막는다. 인간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성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막는다. 여성 자유 억압이 일상이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정하고 행하면서 나온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걸 싹 다 막았으니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창작물 따위 여성인권이랑 아무 관련 없지 않나, 여성 아나운서가 치마를 입거나 여성 아이돌이 야한 옷을 입었다고 여성인권이 낮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왜 그거에 불편하도록 세뇌한 건가.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불행한 것처럼 유교적 여성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져서 불행하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이 불행하기에 불행하다. 원래 남녀는 그런 관계다. 남성이 불행하면 여성도 불행하고 여성이 불행하면 남성도 불행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적은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을 바꿔도 결과는 같다. 만약 남성이 성적 억압을 받았다면 여성이 성욕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었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로 불행한 것은 철저하게 여성이 열등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여성이 열등함에서 벗어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출산율 추락에 대해 알아보자.

 

출산율 추락은 이성애 결핍 따위로 인해 연애와 출산에 대한 욕구의 순위가 낮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본래 유교사상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애 결핍이 발생해 출산율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강요로 출산율을 올려 유지했다. 집안 어른의 강요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강요로 한 결혼은 자발적이지 못하기에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해 아이가 크고 나서 이혼하는 황혼이혼을 하곤 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 황혼이혼을 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황혼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1위로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성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에 대한 성에 대한 터부는 여전하여 다수의 미성년이 제대로 된 이성애를 배우지 못하며 자라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 순위가 낮아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 여기서 여성주의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의 주관적인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인권이 되었다. 보다 더 미성년에게 성적 억압을 강요한다. 보다 더 성적 문화를 검열하고 억압한다. 유교의 성 터부시나 성적 억압에 여성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리해보자. 처음부터 한국은 유교로 인해 자유로울수록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최근에 급격하게 떨어진 원인은 그 유교를 올바르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중용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유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부동산 따위가 원인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결코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그거 하나면 이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다. 다수가 애정결핍된 상태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보통 정말 사랑하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정말 아이를 낳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낳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취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있지 않는가? 취미의 욕구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후순위로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낮은 것은 단지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떤 욕구의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욕구 순위를 높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 등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고려해보면 인간의 저출산의 원인이 파악된다. 북한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시점에서 물질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된다. 2018년 한국이 0.98이고 북한이 1.90.

 

여기에 꾸밈노동을 죄악시하는 탈코르셋 따위가 원인의 일부로 더해진다. 꾸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한다. 그걸 죄악시하면 사람에게 사랑 받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 서로를 사랑할 확률도 줄어든다. 강요가 없는 이상 사랑이 줄면 연애도 줄고, 연애가 줄면 결혼도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도 준다. 당연히 출산율이 떨어진다. 이 천박한 사상은 인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밈노동거부에 대해 알아보자.

 

남성이 여성에게 꾸밀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꾸밈이란 타인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사랑 받기를 바라는가?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했다 하여 현재 꾸밈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타인이 아닌 본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공산주의적이다. 생산자를 먼저 생각하다 소비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공산주의처럼 본인을 먼저 생각하며 꾸미지 않다가 타인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나 가산점도 이런 같은 맥락으로 접근이 된다. 경찰이 할당제를 도입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경찰 역할을 맡으면 치안 서비스가 악화되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당제로 들어가는 경찰을 먼저 생각했기에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외면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외면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할당제로 들어가는 사람 생각하다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이 불행해지는 걸 생각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된다.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버리면 타인이 불행해진다.

 

 

성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은 상품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이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 둘 다 해당된다. 특정 성이 상품화 되었다고 그 성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 남성 성 상품화가 된다고 남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 성 상품화에 불편해하는 건 오로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가능한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욕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각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어느 때에도 올바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포르노와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고백하겠다. 과거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성매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뉴트리아 항문 봉합에 대해 아는가? 뉴트리아의 항문을 봉합한 후 풀어주면 배변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신적 공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린 새끼들을 없애 뉴트리아 멸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를 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해소불가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성 터부로 관계가 어렵고 성 상품화를 금지시켜 욕구해소를 막으면 그게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다고 보는가? 매우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물이면 원래 욕구가 막히면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성욕은 의지로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로 뭐든지 가능하면 전국민이 채식주의를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간의 의지가 강하면 금주령을 내렸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일시적으로 욕구를 참을 수는 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면 강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욕구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성으로 안내하는 것이 올바르다. 성범죄보다 성 창작물이나 성매매가 낫다. 왜 이걸 모르는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면 본격적으로 포르노와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등주의 전파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이익이라 생각하는 열등함인 약한 의지나 강한 수치심을 남성에게까지 세뇌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성년 남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성년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미성년 남성에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미성년 여성에게 주입하던 열등함을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충격 받은 일이 있다. 본래 남성은 성추행을 당하면 곧바로 반격을 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그런 것에 대한 자유의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남성이 기숙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반격하거나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 가까운 카페로 도망쳐 울면서 인터넷에 성추행을 당했다며 호소하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게 뭔가. 의지가 약한 남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하던 여성열등주의가 여성을 열등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성마저도 열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여성이 열등하게 되었다고 남성도 열등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바로 맞대응하고 신고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줘야지, 그러지 않고 남성의 의지를 약화하면 어떻게 하나. 억압받고 있던 여성과 억압받지 않는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남성처럼 억압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예 그냥 전국민 장애인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된다.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약자를 돌보나.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만들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약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벅차기 때문에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약자를 돌볼 수 없다. 정녕 약자를 위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도덕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는가?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교리를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유의지보다 타인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양성되었다. 모든 자유의지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고, 자유의지가 아닌 행동은 개인에게 있어 이익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여부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이타적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도 같은 형태를 띤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올바름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질서강요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선천적인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고, 후천적인 인간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춘다. 여성주의의 경우 후자다. 주관적인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인권여부를 결정하는 이 사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는 사상이 보통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동물보호주의 따위다. 이런 것들은 과거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불교가 보통 육식금지와 폭력금지와 살생금지 차원에서 원조 격에 해당할 것이다. 동물보호주의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인간 개인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어떤 인간이 고양이나 개를 다른 동물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우대하고 해로운 건 천대했다. 그러니 귀여운 동물만 좋아하며 보호하자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귀여운 동물 보호를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지 전통의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개를 먹을 필요는 없다 보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걸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본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상은 전부 과거 도덕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도 도덕적이라 포장하며 활개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이 잘못되었다며 고기 집에서 행패를 일삼는다거나 폭력이 잘못되었다며 병역회피를 한다거나 특정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유지에 침범하여 음식을 놓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올바른 걸 하는 것 같음에도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오는 것은 과거 종교의 도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 같으면서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좋지 못한 낡은 결과가 나온다. 이럼에도,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사상들이 도덕성을 갖춰 횡포를 부리고 있음에도,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 같은 천박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추지 못해 이런 낡은 사상들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부도덕하다며 공격받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도대체 좌파와 우파가 왜 나오는 건가? 현대 세계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니라, 과거 종교의 도덕과 거기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다. 여성주의는 이 대결에서 과거 종교의 도덕에 속한 일부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이런 작고 천박한 사상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상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과거 질서강요로 회귀하겠다는 사상이므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자유로운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주의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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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를 억압하는 것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든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셧다운제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을 통해 통과된 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대다수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세뇌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고 구분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진보, 자본주의 진보와 역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길 희망합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중국은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한국을 지배하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와 국가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유교는 중국에서 온 사상이고 내가 만든 건 한국에서 시작한 사상이 되겠죠. 뭐가 더 한국적인가요

 

변호사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정상. 시장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우수한 변호사는 높은 수익을 얻고 그러지 않은 변호사는 적은 수익을 얻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교육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교육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수준이 낮습니다. 인공지능에 비유하면 지금 교육은 알고리즘 설계가 아니라 데이터 입력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에요.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포장해도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어요. 참 안타깝죠.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문제풀이능력 키워놨더니 상품화 능력이 떨어져서 자본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감소하고 문제풀이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죠. 자본가 수 감소로 인한 취업자 수 감소나 공무원 쏠림 따위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기업의 경력자 선호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문제풀이능력을 갖춘 반면 경력자는 기업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력자를 신입대우로 써먹기 위해서 그런 걸 희망한 기업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그냥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자동화 시대가 오면 올수록 자본가의 필요성은 늘어난다 봅니다. 이제 교육도 학생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노동자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능한 자본가가 나타나면 무능한 기업도 세대교체 될 겁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노동자 착취를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기피도 줄어들 거라 봅니다.

 

다음 글은 구글 경쟁상대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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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ppraiser    친구신청

좋은글이네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직접 쓰신건가요??

루리웹-4810785279    친구신청

좋은 글이네요. 물론 읽었습니다. 나름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BeanPaul    친구신청

이번 오징어 게임 여혐 논란 일으키는거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적인 유교사상이라는걸 다시 상기시키더군요.
국내 작가들이 보수적인 지상파 규제로 부터 벗어나, 넷플릭스라는 해외 플렛폼에서 한국인만의 독창적인 표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무대에서 흥행했지만, 한국 페미들은 여성혐오 범벅이라고 선동 및 불매운동. 거기다가 어떻게든 더 신빙성을 얻어보려고 노인 혐오까지 끼워맞추더군요.

숲바라기    친구신청

여가부 폐지만이 답

카림무스타파    친구신청

유교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 보이는 글입니다.

pians    친구신청

너무 주관적이네요. 자기의 생각을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진행하니
좀 읽기가 힘들더군요

예를 들면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거..

🌠별바다🌊    친구신청

논리적비약과 확대해석이 많은것 같습니다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구요

Air Zonk    친구신청

길게 뇌피셜 사족을 붙여 놓은 흔한 안티 페미 주장.

기복왕    친구신청

3줄요약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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