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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2) 2021/11/08 PM 02:01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최근 KBS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와 같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PC주의와 여성주의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KBS 수신료를 보고 발상을 시작하여 KBS를 기준으로 하지만, 방송매체인 만큼 해결방법은 다른 방송국도 비슷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TV 수신료 인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다. 왜냐하면 오래지 않아 TV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TV는 이제 인터넷으로 세대가 교체될 것이다. 그러면 TV 수신료 인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 T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때에는 수신료 인상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수신료 인상은 TV의 소멸 시기를 앞당길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수신료 인상으로 납부부담이 늘면 국민들 사이에서 TV를 버리고 모니터를 대체하여 수신료를 내지 말자라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KBS는 딜레마에 빠졌다. 수신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물가상승에 의해 운영비 부족을 겪을 것이고, 수신료를 인상하면 납부자 수 자체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인상 전과 비용이 같아져 운영비 부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KBS TV 수신료 인상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재원을 찾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공영방송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새로운 형태의 세금은 국민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이제 방송국이란 형태로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을 한 곳에 묶을 필요는 없다. 과거 방송매체의 특성상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언론과 수익성과 공영성이다. 언론은 분명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 사회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언론 자체로는 수익을 얻기가 어렵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잇는 언론은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일 확률이 높다. 수익을 위해 권력이나 재력의 마이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론 외의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창작과 플랫폼이다. 간단히 말해 언론이 사회공헌을 하고 창작과 플랫폼이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하고 정보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수익창출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잠시 언론으로 가보자. 정보플랫폼은 공영방송뿐만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모든 언론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기여도에 따라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해둬야, 언론이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오자. 창작과 플랫폼도 수익성이 없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공영방송이란 공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금을 걷기 어려운 이상, 수익성이 높은 문화창작물의 성장과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플랫폼의 소유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저널리즘을 말하며 정보 생산자 특성(성별 또는 장애)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말하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부터 생각하는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생각해보자. 소비하는 정보의 생산자의 특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누가 정보를 생산했든 그 정보에 가치가 있으면 된다. 지금 기성방송매체가 외면 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정보의 품질이 인터넷의 접근성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성방송매체와 인터넷의 차이는 편리성과 편향성이다. 인터넷방송은 접근이 편리하고 원하는 정보만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편향적이다. 그 때문에 중립성을 중시해야 하는 기성방송매체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리성과 편향성을 넘어서는 고품질 정보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 품질에는 개인의 특성이 아닌 역할에 맞는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별유무나 장애유무와 관계없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없으면 결과적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수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생산자를 생각하다 상품경쟁력이 낮아져 국내의 소비자를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뒤쳐지게 만든 공산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차별이란 능력이 없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강조하겠다. 본래 지금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이런 역할에 맞는 능력만 보는 걸 의미한다. 거기에는 성별이나 장애의 유무는 관계가 없다. 부디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줘야 한다는 궤변에 선동되어 국가 전체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길 바란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귀족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공산당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권력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인맥,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소수자들. 어떤 사상이든 관계가 없다. 어떤 이유든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국가가 몰락하게 된다. 우수한 한국인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화가 난다. 귀족이나 권력자 또는 인맥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던 걸 욕하던 이들이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된 걸 모른다. 그런 건 단순한 권력투쟁이다. 인권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 누구든 역할에 맞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리사욕에 힘을 남용하는 것 또한 역할에 맞지 않는 것 중 하나다. 사리사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이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어야 국가가 발전할 것이다. 한국에는 힘이 필요하다. 국력이 낮아 국가적 치욕을 겪은 것이 백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겠다.

 

 

 

시청자 의견 영향 축소

 

새로운 수익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가 바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 축소다.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올바르나, 그것은 대부분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이나 방법 또는 의지의 차이에 따라 소수의 시청자가 공영방송에 지나치게 높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비민주적인 결과다.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투표율이 10%도 되지 않는다면, 그걸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소수가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상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객평가를 중시한다. 실제 상품을 구매한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영수증을 첨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을 정도다.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방송은 지나치게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 시청률이 1%에 보통 약 3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터넷 시청률을 포함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정말 적은 수의 사람이 시청자 의견을 낸다. 보통 인터넷에서 상품을 구매한 뒤 평가를 하는 비율이 약 10%에서 많으면 30% 적으면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100명 중 1명이 평가를 한다 치자. 그렇다면 TV는 시청률 1%의 방송에 의견을 내는 사람이 과연 3000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과 달리 TV는 의견을 내기가 너무나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인터넷 개인방송은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의견을 달 수 있지만, TV는 따로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가입한 뒤 의견을 내거나 전화나 엽서나 메일 따위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기 의견을 내는 사람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방송국이 전부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점 이전에는 이런 시청자 의견은 그리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시청자 의견은 단순한 참고자료다. 그걸로 언론이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본래의 방향과 달라지게 되면, 본래 방향을 원했던 나머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아예 의견을 받지 않으면 불통의 이미지를 뒤집어 쓸 우려가 있다. 따라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써야 한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그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도 높다. 신뢰도가 높기에 영향력이 높다. 자 답은 나왔다.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낮춰야 하고, 신뢰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진실된 의견이 아니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된 의견이 아닐 수 있는가? 그건 아무나 의견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 된다. 지금처럼 가입을 하고, 실명을 써서 의견을 내고, 그런 절차를 해서는 안 된다. 익명과 접근성을 높여 아무나 익명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분명 이러면 지저분해진다. 진실된 의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한 것이므로 이해를 구한다는 식으로 나가면 된다. 그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의견의 신뢰도가 낮아지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재미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외의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무한도전 등의 코미디 같은 프로그램의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주관적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몰상식한 일부 단체가 불편함을 토로하며 되도 않는 간섭을 할 수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단체의 수를 늘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성별이나 세대가 다른 이들이 특정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될 것이다. 이외 인터넷 플랫폼에 달린 댓글 또한 시청자 의견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에도 맞추기 때문에 일부 시청자 의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없다는 표명을 하면 될 것이다. 유행하는 빅데이터 수집을 표방해도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낮춰야 온전한 언론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로 고품질 정보와 영상을 생산하여 국민의 호의를 얻어 높은 수익을 통해 수신료 인상이 없더라도 방송국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적은 반면, 방송 매체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많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방송 매체의 정보와 영상이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과 경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창작의 자유

 

창작에 자유에 대해 잠시 다루겠다. 공영방송이기에 보다 신중하게 방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영은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지, 보수적인 것의 이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성적 컨텐츠를 억압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 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령 성적으로 자유로운 영상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국가의 이미지 상승으로 국익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공공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지금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주의에 의해 폐쇄적인 성 관념을 근거로 한 성적 억압으로 인해 이성애가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있는 중이므로 공영방송이야말로 자유로운 성 관념을 널리 알려 국민이 온전한 이성애를 획득해 충만한 애정을 통해 출산율을 올리는 걸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선도하여 공공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공영방송의 의무라 주장하겠다.

 

F20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KBS에서 조현병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한 듯 하다. 그런데 그걸 보고 조현병 관련 단체에서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그대로 담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으므로 TV 방영 중단 요청에 의해 TV 방영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는 보통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직시로만 끝났다. 아마 이 영화도 조현병에 대한 현실직시를 했을 것이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불편하다고 현실과 다른 왜곡된 진실을 공개하게 되면 실질적인 문제해결조차 못한다. 그저 불편하다고 다루지 말라 하게 되면 사회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회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예전에 영화 기생충이 현실직시만 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현실직시라도 해야 한다. 만약 기생충이 저소득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고 방영 중단의 요청을 받아 영화상영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전세계가 황당해했을 것이다. 진정 빈자를 위한다면 왜곡된 영상은 필요가 없다. 빈자가 행복하게만 표현된다면 그 누가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는가? 진정 조현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다면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다수가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적인 논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에 무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악당이 등장한다고 등장 자체를 불편해하면 어떻게 악당의 악행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떤 걸 혐오를 하는 인간이 있어야 혐오가 나쁘다고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며 그런 혐오를 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 어쩌자는 건가.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특정 직업을 깔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인물이 등장해야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자체가 불편한 인간은 그냥 특정 도덕에 세뇌된 것에 불과하다. EBS가 국정감사에서 포텐독이라는 컨텐츠가 폭력성으로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쁜 것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반발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컨텐츠라고 하더라도 폭력성은 있어야 한다. 폭력성이 등장해야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저 폭력성이 나쁘다고 무조건 등장조차 못하게 해서는 한국 아이들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국 아이를 미숙아로 키우는 건 바로 도덕에 세뇌되어 맹목적 비난과 반대를 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것에 분노한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EBS는 폭력성에 대한 경계와 아이의 성숙한 시각을 길러주는 지극히 올바른 일을 했다. EBS는 일차원적인 지적을 받았다고 올바른 태도를 바꾸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며 도덕을 명분으로 타인의 위에 서려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불편하다 싶은 것은 전부 인권침해라 주장하며 창작에 간섭하는 것으로 창작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이 취미와 도덕을 구분 짓지를 못한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취미인데, 거기에 도덕성을 붙여서 동물보호라는 식으로 몰고가 사회를 혼란케 만든다. 개나 고양이 보호를 주장하면 취미인 게 명확히 보이므로 의도적으로 동물보호를 붙인다. 특정 종에 대한 애호에 동물보호라는 도덕성을 붙이는 것으로 취미를 도덕으로 탈바꿈해버리며 사회의 도덕적 판단저하를 일으키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겠다.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건 취미다. 단순 취미를 맹목적으로 올바르다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 마녀사냥이나 홍위병 때도 그랬다. 시야가 좁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름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다. 제정신이 아닌 걸 옳다고 말하는 인간의 의견 따위는 들어줘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에서 도덕적 명분으로 검열하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척결을 명분으로 사상서 검열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자유국가에서 올바른지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도덕은 이제 인간의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이들이 최근 가장 많은 불편함을 호소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특혜에 반발이 심한 까닭이 무엇인가? 신세대 남성이 여성특혜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평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다수 기성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에 여성에게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평등에 익숙한 다수 신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여성특혜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성평등을 교육하자 주장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가 주장한 여성특혜를 신세대 남성이 수용할 수 없었단 것이다. 여성주의가 교육한 것으로 여성주의가 공격받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이 사상은 이 정도로 어설프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기독교적 등 그냥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손해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는 사상이다. 굉장히 조잡하고 천박하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를 결정해버리면 황당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세뇌된 여성의 손익으로도 인권 여부가 결정되어버린다. 유교 또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세뇌된 여성에겐 가부장적인 가치관인 여성의 약한 의지와 강한 수치심이 인권이 된다. 그러니까 그걸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똑같이 세뇌해버렸다. 마치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의 교리를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인간에게 세뇌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신세대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기에 감사지수가 낮아지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게 되었다. 보통 부당한 이익은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는 인정하고 감수해야 하는데,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여부를 결정하다 보니 부당한 이익을 인권이라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를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당시 유럽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이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은 것은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다. 바로 여성주의자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학교기관에 여성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남학생에게도 주입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또한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을 열등하게 만드는 사상이 전파되고 있다. 정말 인간을 퇴락시키는 사상이다. 그래도 보통은 성별 관계 없이 건전한 사상을 가진 정상적인 교사가 있어 아마 괜찮을 것이다.

 

도덕은 본래 주관적 이익이 객관화를 거쳐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다음에야 도덕성을 갖추게 되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는데, 여성주의는 그냥 모든 여성의 주관적 이익을 전부 인권이라 주장하고 주관적 손해를 전부 차별과 혐오라 주장하는 천박한 사상이기에 사회를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객관화가 된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도덕을 근거로 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유라던가 말이다. 여성도 이제는 그런 천박한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생각한다. 건전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방송매체 또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창작의 자유가 있어야 고품질 창작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강조하겠다.

 

 

 

경쟁원리

 

방송 매체 특성상 경쟁이 어렵다. 채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황금시간대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생산되는 창작물의 수가 적어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우니 아무래도 고품질 창작물이 양산되기가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 이것이 방송매체가 넷플릭스에 추월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점을 보완해야 한다.

 

우선 생산(창작자)과 유통(플랫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자. 일반적으로 생산보다 유통이 유리한 상황이지만, 생산자가 다양한 유통경로를 확보하고, 우수한 상품을 양산하여 수요가 높으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전제에서 창작물은 생산과 유통이 대등한 관계가 가능한 환경이다. 왜냐하면 문화 창작물의 수요는 전세계로 퍼지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상품의 경우, 생산품이 세계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쉽게 퍼지기가 어려운 반면, 창작물은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유통될 수 있다. 문화는 다양한 유통경로와 높은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품질 상품만 양산하면 생산이 유통에 비해 불리할 수가 없다. 지금 방송 매체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할 때가 있음을 기사를 통해 종종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야말로 다양한 유통경로와 다름이 없다. 굳이 적대적 관계를 성립할 필요가 없다. 이런 온라인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점도 좋다. 지금까지 창작은 보통 가장 우수한 일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 부족하더라도 가능성이 높은 창작자는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가령 지금 창작물 품질이 7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80인 것과 창작물 품질이 5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90인 것이 있다면, 전자가 선택되어 후자의 무궁한 가능성은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다양한 유통경로와 수요가 있으므로 무조건 많이 생산하면 되기 때문에, 약간 부족한 창작자도 기회를 주는 것이 큰 틀에서 이익이 된다. 이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창작물을 보면 매번 보는 배우만 나오는 것 같다. 창작물이 많아져야 재야에 붙인 유능한 배우들도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보통 양산의 경우 품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지만, 개인이 대량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수가 각각의 창작물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품질 자체는 유지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그런 방식으로 지금 성장하고 있다. 방송매체는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여 수많은 창작자로부터 다양한 창작물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한 뒤에, 그 중 가치 있는 것을 TV 편성표에 편성하여 송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존 셀러를 사들이는 것으로 덩치를 키워 7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한 스라시오라는 기업이 있다. M&A 또는 MCN과 같은 방식이라고 한다. 방송매체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학교의 영화동아리나 아마추어 영상제작팀을 대량으로 모집하여 간단한 교육과 함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생산된 창작물을 다듬어서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시청자 평가를 받도록 한 뒤에 평가가 높은 것을 방송국에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공영방송에 목적에도 부합한다. 한국의 창작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한국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자동화 시대가 되면서 각국은 산업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한국은 문화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본격적으로 문화도 미래 먹거리로 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관광지를 먹거리로 삼는 국가처럼 말이다. 물론 이미 그런 계획은 있을 것이다.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다수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모전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소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평가 받는다면, 이제는 다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시청자에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익은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에 200억원을 투자하여 1조원의 가치를 창출했던 것과 같다. 40 팀에 1억씩 투자했을 때, 40억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작물 하나만 건져도 본전을 얻고 두 개를 건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양산을 통해 어떤 형태의 경쟁이 발생하고, 그 경쟁을 통해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창작의 자유는 보장하되, 기술의 전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촬영이나 연기는 창작과 무관하게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기술전수는 대상을 까다롭게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공영방송인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고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건 바람직하다 본다. 창작에서 높은 수익을 얻게 되면 언론 또한 권력과 재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장 초반에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작은 영상제작팀조차 많은 경험을 통해 우수한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가의 문화 수준이 한층 높아지는 것으로 추후에는 이익을 얻을 확률이 높게 될 거라 생각한다.

 

 

 

해외

 

국내에서 인정 받는 것보다 해외에서 인정 받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이들이 많다. 흔히 말해 국뽕이다. 이런 걸 고려해서 처음부터 세계에 초점을 맞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범해도 세계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성공하게 된다. 그 성공이 여론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여론악화로 인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려웠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그 성공이 방송국 자체의 성장으로 이어져 수신료가 없어도 될 정도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TV가 사라질 시대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5천만명이 70억명을 만족시킬 컨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창작자가 필요하다. 이러니까 무조건 많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끌어올려서 고품질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량생산에 자원이 소모되는 다른 산업과 달리 한번 만들면 자원소모가 거의 없이 복제가 가능한 문화 산업은 고품질 창작물을 많이 만들수록 대체로 이익이다.

 

본래 외국의 상품은 내국의 견제를 받기 쉽다. 그러나 문화는 다르다.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검열이나 규제를 해도 어떻게든 보게 되어 있다. 중국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창작물 수준만 높으면 별다른 제약이 없이 수익을 얻을 확률이 높으므로 해외공략이 수월해지게 된다. 또한 문화의 영향이 커지면 그 나라에서 생산한 상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져 다른 산업의 진출도 돕게 된다. 어찌되었건 무조건 많이 만든다. 고품질의 창작물을 많이 만들면 70억명 중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논쟁

 

스마트폰 세대의 결점 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에 길들여져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보통 그걸 개선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지 않다. 사람은 점점 쉽고 편하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는 이런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화만 봐도 그렇다. 소설, 만화, 게임 같이 점점 편하고 재미있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본성이 인류의 발전의 원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쉽고 빠른 이동, 쉽고 빠른 식사, 쉽고 빠른 기억, 쉽고 빠른 기록, 쉽고 빠른 교류 등 이런 경향은 사회의 발전을 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경향에 따른 발전은 그대로 두고,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바로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본래 배움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고, 무지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배움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이고, 무지는 지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괴상하게 변했다. 이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험 평가를 높게 받는 것이 주관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에 시험 평가로만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인권이라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지적 당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손해기 때문에 차별이나 혐오로 인지하고 있다. 이 천박한 사상이 한국 사회에 독소처럼 퍼져 온갖 것을 갉아먹으며 인간을 퇴락시키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애초에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다. 단순히 스마트폰으로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편리한 도구와 별개로 인간의 능력은 인간 개개인이 알아서 키워야 한다. 그걸 권장하는 풍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론과 논쟁의 발달이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인지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말싸움을 하면서 배움의 폭을 넓히는 필요를 느끼게 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의 발달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을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하도 인신공격이나 일반화가 궤변이나 왜곡이나 논점이탈 따위로 지친 나머지 아예 토론과 논쟁 자체를 거부하며 네 말이 옳으니까 그냥 반론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는 정말 좋지 못한 현상이다. 일상에서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해야 시험 외의 배움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지에 자존심을 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논쟁의 예능화다. 토론이 아닌 논쟁을 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토론보다 논쟁이 보다 깊게 대화를 하게 된다. 둘째, 논쟁이 예능에 보다 적합하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주제를 겉 핥기 식으로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논쟁을 해야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재미가 없어 흥미를 끌기 어렵다. 예능이 되려면 논쟁으로 발전하여 승패가 갈려야 한다. 예능화를 한 이유는 논쟁의 단계별 학습을 위해서이다. 본래 지적 수준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다르다. 동화부터 시작해 어려운 인문학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논쟁 같은 걸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어려운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대체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기초부터 알아가야 한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의 힘을 갖추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힘든 운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논쟁을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예능을 통해 논쟁의 접근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쟁의 예능화를 주장하겠다.

 

논쟁이란 무엇인가? 사리를 따져 말이나 글로 다투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말싸움이다. 본래 이런 말싸움은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결투에도 일종의 예절이 있었던 것처럼, 논쟁에도 예절이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결투와 달리 신체적 상해를 입을 확률이 낮으므로 예절만 잘 지키면 관계를 해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하나로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하다. 논쟁의 예능화는 바람직한 논쟁의 방법론을 알려 건전한 논쟁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논쟁은 논쟁에 필요한 예의가 바로잡히지 못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능화를 할 수 있는가? 결투의 예능화가 바로 격투 프로그램이다. 몸싸움을 예능화한 것이 이미 존재하므로 말싸움을 예능화하는 것은 그걸 참고하면 된다. 우선 선수와 팀을 만든다. 방송국이나 대학 또는 기업으로 나눠 선수를 모집하고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홍보효과가 있을 것이다. 몸싸움에 필요한 것이 경기장이라면 말싸움에 필요한 것은 주제일 것이다. 논쟁의 주제는 예능인만큼 쉬워야 한다. 일상에서 갈등을 빚는 것을 주제로 하면 된다. 재활용 문제나 학교폭력이나 성별갈등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걸 주제로 해야 논쟁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몸싸움은 승패가 갈리는 것처럼 말싸움도 승패가 갈리게 해야 한다. 일목요연하게 승패가 갈려야 쉽게 접하고 즐길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심판의 결정으로 승패를 갈리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에 방영하면 실시간 투표가 가능하므로 시청자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TV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낮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적지만, 인터넷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높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높은 편이다. 물론 이래도 참고자료에 머물러야 한다. 논쟁에 승패가 있으면 위험한 결론이 승리할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지금 범죄의 양형이나 촉법소년 등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승패가 나오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예능의 좋은 점이 나온다. 첫째, 예능이기 때문에 무겁게 접근할 확률이 낮은 편이다. 둘째, 예능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로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한번 승패가 나온 주제라 하더라도 괜찮다. 승리한 결론에 도전할 다른 도전자가 나오면 된다. 본래 논쟁의 주제는 많은 편이나 쉬운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도전할 수 있으면 분량의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 세세한 부분은 몸싸움을 예능화한 격투 프로그램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선수선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보자. 격투의 경우 선수의 능력과 승패를 알기가 쉽다. 그러나 논쟁은 선수의 능력을 알기 어렵고 승패도 알기가 어렵다. 단순히 지식이 많다고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논쟁은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적더라도 관점이나 태도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유리할 수 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 않다. 과거 하루는 정의를 말하고 하루는 불의를 말했던 인간도 있었다. 논쟁의 기술에 따라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의 대결이 아닌 한정된 시간 내에서 논리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단순 지식으로 선수를 선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나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가? 얼마나 영리하게 주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얼마나 알기 쉽게 주장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가? 또한 예능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제삼자가 있는 논쟁은 대체로 대화상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시청자가 있는 이상 시청자를 고려하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통상의 논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유명하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기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 논쟁기술이 높은 인간을 기용해야 할 것이다. 격투기가 그러하듯, 능력이 뛰어나면 알아서 유명해진다.

 

논쟁의 예능화는 퇴락하고 있는 한국 인문학을 되살릴 불씨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단순 수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므로 공영방송에 적합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지역 영상 플랫폼

 

예전에 인터넷 영상 플랫폼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 틱톡과 숏이 유행, 지역 영상 플랫폼이 지역으로 말이다. 본래 지역 영상은 방송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인터넷 영상 플랫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면 좋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로 묶어 분류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부동산으로 묶어 분류한다. 영상을 주소로 묶을 수 있으면 지역의 정보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방송매체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래 방송매체가 지역의 영상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역 정보의 전문가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또한 방송매체는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플랫폼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했다. 넷플릭스도 생산과 플랫폼을 둘 다 하고 있지 않나. 둘째, 이제 방송매체는 국가의 세금이나 기업의 광고나 후원 없이도 정보와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탄산업 사양화로 인해 지역경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강원랜드를 설립한 것처럼, TV의 사양화로 인해 수신료 수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어떤 산업의 주도권을 주게 하는 것은 타당하다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것이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영방송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셋째,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지역 영상이 생산되어 지역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은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영방송에 적합한 일이다.

 

지금 국가에서 공공 플랫폼을 통해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춘 정보가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은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맞춰질 것이기 때문에 공공 플랫폼과 역할이 다르다.

 

 

 

언론

 

언론 자체로 수익이 보장되기는 어렵다. 언론은 가루받이를 통해 자연의 생태계를 지키는 것과 같이 정보를 잇는 것을 통해 사회의 생태계를 지키는 사회공헌을 하는 역할이다. 이제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 모든 언론은 자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창작물이나 플랫폼으로 자체 수익을 얻게 되면 정보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이 더 위험하다. 언론이 수익을 얻기 위해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생각한다.

 

대체로 한국 언론은 우수한 편이라 생각한다. 단지 특정 사상에 휘둘리거나 수익을 위해 정치와 경제 등과 유착하는 것과 같이 정보를 악용하는 것이 문제다. 언론의 폭거로 언론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언론이 자성을 해야 하지만 언론 자체적으로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는 환경 또한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을 위해 배를 곯는 것을 언제까지 요구해야 하는가? 이제 거대 언론만이 아닌 모든 언론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면 경쟁원리가 작동하지 못해 정보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품질 정보를 생산하거나 잇는 언론에 대한 대중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넷 영상 플랫폼에서도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제 언론은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방송국으로 분류될 것이 아니라, 언론계 자체적으로 특정 분야의 정보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인터넷의 정보보다 언론의 정보를 신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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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글은 잡담 글로 올릴게요. 잡담 글은 종종 올릴 것 같네요. 다음 잡담 글은 아마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입니다.

 

역할주의 사상 정리가 끝나면 아마 그건 제대로 관리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오타나 오류 있어도 사상의 양식이니 그냥 방치했는데, 그거부터는 관리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게 힘드네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외세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논란이 일어나면 외세의 개입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말해두겠습니다.

 

누가 정치권력을 쥐든 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제는 낡은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습은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하는 가족주의입니다. 이제는 혈통이 아닌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이 같은 이상을 위해 힘내야 합니다. 보통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하는데, 각국의 낡은 관습과 자본주의가 결합하자, 그릇된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사상이죠. 그런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생산자가 힘들게 됩니다. 생산자가 노력을 해서 품질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야 그걸 소비하는 소비자가 행복하게 되는 구조죠. 공무원이 힘들어야 국민이 행복한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과거 왕조시대 칭송 받는 왕들이 신하를 힘들게 할수록 백성이 행복하다 말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면 됩니다. 과학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상이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한 검열을 자행하는 무리들과 거기에 찬성하는 부류들은 중국과도 같은 자유의 적입니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남성이 즐기는 컨텐츠가 검열되는 일이 많아 착각할 수 있는데, 여성이 즐기는 컨텐츠를 검열해도 반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관한 일이지, 성별과 관계가 없습니다. 성별 국적 취미 세대 전부 관계없이. 예전에는 적성국의 사상이라고 공산주의 저서가 금지되었지요. 그것에 반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잊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검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검열하던 시대에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검열에 찬성하는 것은 그 외침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요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규정짓습니까? 사상서를 검열했다는 것으로 분노하던 이들은 도대체 무엇에 분노했던 겁니까? 자유의 개념과 가치를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성애 결핍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의 근원은 여성의 정조관념에 따른 성 터부시에 오는 겁니다. 미성년 때 자아가 형성되므로 그때 인생에 필요한 것을 전부 교육해야 합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를 말이죠. 학생이 야한 걸 봤다고 화내고 혼내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이성애 결핍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란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원인 중 하나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성애에 성욕이 빠지면 어떻게 이성애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성욕이 없는 애정은 그냥 친애입니다! 신체적 본능으로 시작된 애정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나타난 아이에 대한 애정은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이후 성욕이 떨어져도 시작은 성욕으로 시작해야 대를 이어나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부정해서 어떻게 합니까! 야한 걸 보면 잘못되었다,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면 혐오다, 이러면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이성애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된 겁니다. 성을 터부시하여 음란물을 악으로 몰고 있는 이들이 이 국가의 소멸을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 억압이 이성애 결핍을 부르고, 이성애 결핍이 남성이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게 하고, 여성이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게 만든 겁니다.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것과 성 상품화나 수익 공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단순 도구로 격하된 것입니다.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게 하려면 성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럼에도 음란물을 악으로 모는 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 성을 억압하며 국가를 소멸로 이끌고 가겠지요. 몹시 슬픕니다. 연령에 맞는 등급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등급 따위가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미성년 때 등급에 맞지 않는 컨텐츠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악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한국 치안이 세계적 순위입니까? 그러면 성적 억압을 자행하여 검열이 일상인 이슬람은 치안이 높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음란물 검열은 단순한 성적 억압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억압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상서를 검열하는 것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건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풍습에 의거해 아무 생각 없이 음란물을 막는 걸 올바른 일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국가를 소멸로 이끈 거라고. 조소할 가치도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그게 잘못된 거라고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사회현상 이해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방식으로 출산율 폭락되고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건 학습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단순한 일이면 학습능력이 부족한 걸로 끝나는데, 출산율 같은 문제는 국가소멸로 이끄는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 척결을 운운하며 사상서 검열하는 거나 성 감수성 운운하며 성 컨텐츠 검열하는 건 똑같은 겁니다. 성 감수성 운운하면서 성 억압하는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인지하십시오. 그 손에 놓여진 출산율 지표를 직시하십시오. 국가와 민족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으십시오. 성 검열을 운운할 때마다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관계의 종말이 부를 종의 마지막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꾸밈노동에서 벗어나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시선을 받지 않는 것은 남성이 사랑할 정도의 매력이 전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냥 그건 이성에게 사랑 받기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멋대로 도덕성을 부여한들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력사회의 끝은 학업의 목적이 취업이 아닌 창업이 되면 바뀔 것입니다. 창업의 성공에 학력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사업해서 성공하는 유능한 자본가 수의 증가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위해 이제는 교육이 학생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야 하겠지요.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객관적인 이기심입니다. 어떤 주관적인 이기심을 사회적 공감대를 사는 객관화를 통해 다수의 이익이 되면 정의가 되는 것이죠. 어떤 단순한 주관적인 이기심도 객관화가 되면 정의가 됩니다. 그런데 일부 천박한 사상들은 객관화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이익 그 자체를 인권이라 주장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어떤 암묵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교류합니다. 특정 풍습이나 관념 따위는 이미 사회에 속한 사람 내면에 새겨져 그 외의 영역에서 개성이 두드러지죠. 인간의 자아로 비유하면 무의식의 영역이죠. 그런 관점에서 풍습이나 관념은 사회의 무의식이라 해도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라는 규칙은 한국사회에서 당연한 약속이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댓말 같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암묵적인 약속,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을 하는데 있어 기초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정된 무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해 애정결핍현상을 해결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현상 하나에 이 정도로 파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문학 수준이 낮군요. 인문학에 있는 사람이 설거지 운운하는 건 우울하네요. 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도 못해서 남성이 주입한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의 본성으로 착각하고 그거에 맞춘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참. 솔직히 머리가 아파요. 한국이 자유적응에 실패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답답하네요. 조선이 에 중점을 두었던 유교국가라고 해서 인문학 수준이 높다 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가르침 내에서만 사고할 수 있었으므로 실상 인문학 수준이 종교국가 수준이었죠. 이제 한국 인문학은 조선의 유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사상가가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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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눈 아파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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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급이네요 우와
[글] 갤럭시와 아이폰 (0) 2021/10/11 AM 08:29

갤럭시와 아이폰

 

 

 

원래 구글 경쟁상대에 대해 써보려고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그건 주관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 급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예상 밖에 상황으로 그건 보관하고 다른 걸 써보기로 했다. 마침 유튜브에 갤럭시와 아이폰 관련 영상이 있길래 그걸 주제 삼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갤럭시와 아이폰을 써본 적이 없다. 삼성 제품은 꽤 소유하고 있어도 애플 제품은 아예 없다. 스마트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해보겠다. 그냥 이건 내 능력 실험이다. 어디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른다. 시작해보겠다.

 

스마트폰은 혁신이 어렵다.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는 배터리에서 정체되어 큰 혁신을 이루기가 어렵다. 단순한 성능 강화는 사실상 물가상승률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쓰던 걸 굳이 교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갤럭시가 액정을 접는 개념을 도입했다. 신선했지만 부진했다.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 최신버전인 갤럭시 Z 플립3는 예상외의 많은 수요가 있다고 한다.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많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을 쓰던 이재용 딸도 이젠 플립을 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폰은 그런 것이 없어도 인기가 많다. 아이폰13은 변화가 적어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아이폰 교체시기가 겹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정리하면 접는 개념을 도입한 갤럭시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아이폰이 둘 다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아이폰의 변화가 시작될 때 갤럭시가 아이폰에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폰의 수익이 높은 상황이었다. 갤럭시가 더 많이 팔아도 아이폰은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갤럭시는 다양한 모델을 판 반면 아이폰은 고가의 모델만 팔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 대수조차 뒤쳐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갤럭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스토리.

 

보편적으로 아는 것부터 정리해보자. 아이폰은 명품화가 되었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이 명품화의 뿌리를 알아보면 잡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기, 카메라, 인터넷, 음악감상, 게임 등을 합치다라는 혁신을 주도하여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전파했다. 아이폰이 최초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것은 아이폰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합치다라는 개념은 분명 혁신이었다. 이 혁신이야말로 아이폰의 명품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혁신을 한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가 애플에 남아 애플사의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인물에는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인물 자체가 명품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이야기가 명품을 만든다. 현대미술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작가나 작품에 스토리가 붙으면 가치가 폭등하는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이들의 스토리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윈도우를 만든 빌 게이츠가 다방면에서 기부와 봉사 또는 핵융합이나 환경 등을 말하는 것으로,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가 스페이스 X로 화성에 가겠다는 목표를 실천 하는 것으로, 회사의 생산품에 부가가치를 불어넣었다. 아이폰은 이런 방식으로 명품화가 되었다. 갤럭시가 아이폰과 대결하는 것을 현대미술로 비유하면, 이야기가 없는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가 있는 아름다운 작품과 가치 대결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을 안다면 이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대결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갤럭시가 성능 강화하고 수익다각화를 시도하고 광고 하고 깎아 내리고 단가를 낮춰보고 해도 아이폰과의 대결에 힘겨운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신앙 수준에 다다른 아이폰의 감성에 이성으로 맞서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간단한 결론이 나온다. 이제 갤럭시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접다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혁신에 가까워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접다라는 개념은 이미 있었다. 액정을 접다라는 개념이 새로울 뿐이지, 접다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있었다. 그러니 신선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워도 아이폰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접다로는 합치다를 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혁신은 아직 구현하기 어렵다. 그러니 일단 다른 방식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아이폰하면 순백이 떠오른다.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다. 다양한 색이 있지만 기본 색은 그렇다. 애플 제품 하나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애플 제품의 색이 순백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아름답고 경건하다. 순수하고 신성하다. 단정하고 품위가 있다.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 고지식하고 엄격하다. 완결성, 완전성, 무결성. 이 이미지에 고유한 AP IOS. 완벽하다. 명품의 조건이 성립한다. 아이폰은 보고 먼저 떠오르는 퍼스트컬러만 봐도 충분히 굉장하다.

 

잠시 과거로 가보자. 원시부족의 제사장부터 시작해 대부분 국가가 과거 1신분이 성직자고 2신분이 귀족이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유학자가 최고의 위치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유학자의 공통점은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최고 지위를 누렸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질서가 담긴 도덕을 가지고 민중을 선동과 세뇌와 강압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 세상에는 수많은 힘이 있는데 도덕은 그 힘의 방향성을 결정하여 인류 최고의 권위에 있는 힘이다. 이런 배경으로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낡았다. 이제 도덕은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 인간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현재 정상적인 사상가는 평지에서 선행 후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면 도덕이 인간의 위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유교는 진리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도덕은 이제 인류의 위가 아닌 인류의 곁에 있어야 한다.

 

반면 갤럭시는 삼성의 파랑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푸른 하늘과 청아한 파란 바다가 떠오르는 파랑이다. 그런데 이걸 갤럭시의 색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애플의 순백은 아이폰의 순백이란 느낌으로 이어지는데(또는 반대로도) 삼성의 파랑은 갤럭시의 파랑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없다. 갤럭시로 떠오르는 색이 없으니까 삼성의 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은 퍼스트컬러부터 차이가 났다. 파랑 자체만 봐도 순백에 비하면 약간 격이 떨어진다. 파랑이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이 사상들에는 도덕성이 부족하다. 백의 민족, 올바른 느낌, 백인의 상징, 웨딩 결혼 등. 아무리 생각해도 순백이 파랑을 넘기가 어렵다. 백인을 언급했다고 특정 인종의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단지 일부 국가에서 백인의 이미지가 좋다는 현상은 확실히 있다는 걸 말해두겠다. 현상은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갤럭시는 우선 퍼스트컬러부터 확실히 인류에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퍼스트컬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적이 없다. 갤럭시와 아이폰 둘 다 없었는데 퍼스트컬러에 대한 인식 차이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 있었다면 제 역할을 못했다.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에 대해 생각해보자. 별빛이 담긴 검푸른색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밤하늘이다. 밤하늘이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은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한다. 갤럭시와 비슷한 느낌의 색,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동심,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인류의 꿈, 그걸 위해 발전하는 과학, 과학 속에 담긴 미래,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거대한 크기와 거리.

 

밤하늘이란 아이의 꿈을 자극하는 색이라 생각한다. 별빛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색상. 활발하면서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가 눈을 반짝일법한 색상. 언제나 밝고 명랑하며 활기찬 아이의 색상. , 모험, 호기심, 설렘 등. 거기에는 인류의 꿈이 있다.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했던 인류는 비행기를 통해 하늘을 날았고, 우주로 가고 싶어했던 인류는 우주선을 통해 우주로 날아갔다. 그러나 하늘에 비하면 아직 우주는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다. 우주는 아직 대부분 인류의 꿈이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초등학교 바나나 사건 전후쯤에 아마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밤하늘 별을 보며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우주는 아이의 동심을 자극한다. 나는 아직도 어린왕자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떤 이는 동화기 때문에 읽기 쉬워 가치를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거지 읽기 난이도 같은 걸로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신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이상이라 본다.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종교는 도덕이고 과학은 기술이기에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종교와 과학은 방향성이 같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대체된다.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 내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면 과학은 지구를 포함한 전 우주와 있는지도 모르는 다차원의 세계까지 고려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영역 자체가 다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춰 과거와 미래로 대칭을 맞춰야 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완성된 순백과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 Pure white color VS Night sky color 나름 괜찮은 대결이 될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이란 이미지는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는 삼성과 어울리는 느낌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을 감각 있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색의 경우에는 편하게 깔끔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별이 들어가면 별의 위치, 크기, 색상, 여백 등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밤하늘 색 바탕에 작은 별들이 입체감을 주며 살아 숨쉬듯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별의 배치가 감각이 있다면, 그 배치가 고유하다면, 분명 그 밤하늘은 갤럭시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어렵지만 우수한 디자이너라면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각국의 국기에 별이 붙을 걸 보면 밤하늘을 좋아하는 국가들도 많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도 밤하늘은 좋은 퍼스트컬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밤하늘 색을 퍼스트컬러로 정하고 나면 노선도 확실하게 된다. 미래와 과학이다. 가령 스마트폰 판매금 몇퍼센트를 우주개발에 쓰인다고 홍보할 수도 있다. 연구개발을 할 때 우주관련 소재를 연구개발 한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연구개발 하는 거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가 써먹은 상당히 쓸모 있는 방식이다. 당연하다 여기는 것조차 거기에 부가가치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 영업이나 수리도 밤하늘 색을 포인트로 잡은 옷을 입거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서리를 달면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색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색을 메인 컬러나 악센트 컬러로 쓰기만 하면 된다. 별빛을 수놓은 밤하늘이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강해 개인적으로 액세서리가 어울리다 생각한다.

 

잠시 좀더 진지하게 말하겠다. 내게 있어 갤럭시는 평범한 스마트폰이었다. 갤럭시는 다른 스마트폰 브랜드와 같은 선상에 놓여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브랜드 자체가 부가가치를 만드는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성능이나 가성비를 비교하여 적당한 스마트폰을 썼었다. 아이폰은 IOS가 불편할 것 같아서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폰은 앞서 말한 이미지 때문에 언젠가 한번쯤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말하고 싶다. 예쁜 색, 유행하는 디자인, 빅데이터로 뽑아낸 수요, 그런 것은 일시적인 판매율에 영향을 줄 수 있어도 근본적인 브랜드 성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기존 고객의 수요에만 맞추기 때문에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빅데이터에 과도한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참고자료다.) A가 유행하여 A한 느낌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면 A의 유행이 끝날 때엔 다시 브랜드 성장을 해야 한다. 브랜드 성장이 없으면 지금 당장 잘 팔리더라도 다음에 잘 팔릴 거란 보장이 없다. 브랜드와 유행은 명확하게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브랜드는 줄기로 삼고 유행을 가지로 삼아야 한다. 브랜드를 성장시켜 변화가 없거나 부진하더라도 잘 팔리는 명품처럼 되어야 한다. 애초에 같은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게 만드는 것이 잘못되었다. 같은 천을 쓴다고 명품 브랜드랑 일반 브랜드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이제 갤럭시도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독보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대상.

 

대상은 나이와 자산으로 나눠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모델을 단순히 성능으로 나누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본다. 나이는 편의성의 차이로 소프트웨어적으로 접근하면 되므로 굳이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고, 자산은 가치판단의 차이로 하드웨어적으로 접근하기에 모델을 나눌 필요가 있다.

 

나이부터 해보자.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외면을 받는다는 그런 느낌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아저씨 폰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 보통 스마트폰은 초기앱이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 있다. 갤럭시는 써본 적이 없어서 검색으로 알아봤는데 비슷한 것 같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저것 다 넣으면 안 된다. 특히 기술에 자신이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다 넣는 함정에 빠진다. 필요하다고 다 넣으면 멋이 없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낡고 고지식해 보인다. 기성세대용으로 보인다. 또한 과도한 정보는 인간에게 피로함을 준다. 꼭 필요한 기능만 있으면 된다. 전화, 카메라, 인터넷, 앱 플랫폼, 스마트폰 설정. 스마트폰은 이것만 설치되어 있으면 된다. 구글을 생각해보자. 구글은 검색기능을 중앙에 띄어놓고 세계를 제패했다. 구글의 기술이 발전해도 그걸 유지했다. 이것이 다양한 기능이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음을 증명한다. 드라마의 예도 같다. PPL을 넣는 드라마와 넣지 않는 드라마 중에서 보통 후자가 인기가 좋다. 부가기능이 없는 구글과 PPL이 없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각 역할의 본질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꼭 필요한 것만 초기에 있는 것이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도 필요한 앱이 있으면 그냥 플랫폼 들어가서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초기앱이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 과도한 초기앱은 젊은 세대에 그다지 호감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 본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앱을 설치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커스터마이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런 감각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초기앱을 전부 없애면 필요하던 이들은 당황할 수 있다. 그러니 멋과 편의를 둘 다 잡으려면 초기설정에서 초기앱의 설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나이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경향 별로 A, B, C 같이 나눠서 비슷한 경향의 앱 설치 루트를 안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갤럭시는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쓰는 기능을 높은 순으로 정리한 뒤, 그것에 충실히 하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이런 나이에 대한 구분은 소프트웨어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기성세대도 프리미엄 폰을 바라고 있었다고. 굳이 기성세대 전용 폰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들지는 못할 거라 본다. 지금 당장 나이로 구분 짓기는 했지만 이건 보편적인 구분일 뿐이다. 실제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할 수 있고, 기성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런 나이 구분은 굳이 겉으로 표출할 필요가 없다. 안에서는 나이로 구분 짓되 밖에서는 편의성으로 구분 지으면 될 것이다. 기성세대도 젊은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본다. 그러니 굳이 기성세대에 맞출 필요가 없다.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선택 받기 위해서는 기본을 젊은 세대에 맞추고 필요한 이들을 따로 기성세대에 맞추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스마트폰으로 가되 기술발전으로 등장하는 추가기능은 언론이나 매뉴얼 등으로 홍보하는 것이 좋다 본다. 그것이 갤럭시의 명품화에도 이롭다. 절제의 미가 명품화를 도울 것이다.

 

자산으로 가보자. 모델의 구분을 단순한 성능으로 하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생각한다. 간단히 접근해보겠다. 매우 예쁘지만 잘 깨지는 A, 덜 예쁘지만 튼튼한 B. 요컨대 부자는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여기게끔 하고, 빈자는 스마트폰을 전자제품으로 여기게끔 하면 된다. 명품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허세와 과시인데, 스마트폰은 그러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자제품이어서 가격차이가 극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한쪽은 소모품, 한쪽은 전자제품으로 여기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밖에서는 미관의 차이로 가지만 안에서는 자산의 차이로 간다. 이렇게 내구도의 차이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명품은 대놓고 명품이라 말하는 것보다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쳐 명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좋다 본다. ,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쓰는 사람은 부자구나. 미를 명목으로 명품의 인지를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 부자는 돈을 많이 써야 하므로 이런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본다. 물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전자제품의 소모품화는 분명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고장 난 것을 회수하여 재활용한다는 것을 공표할 필요가 있다. 최신폰일 경우 고장 난 것을 반납시 얼마를 되돌려주거나 다른 폰을 구매할 때 가격을 깎아준다는 방식으로 가면 된다.

 

스마트폰도 명품화를 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프리미엄 폰을 따로 몇 기종 비싸게 판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폰은 명품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명품을 구매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굳이 튼튼할 필요는 없다. 다시 사면 되니까. 가격 차이가 발생하기 어렵다면 구매 횟수로 차이를 벌려야 한다. 소모용으로 만든 것은 내구성, 품질, 기간 전부 짧게 제공되나 외견과 성능을 좀 더 올리면 된다. 외견은 아름답지만 잘 깨지는 소재로 쓰고, 성능은 오버클럭으로 대응한다. 무기를 한계까지 날카롭게 갈면 내구도가 저하된다. 그런 것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아름답지만 깨지기 쉽다는 인식도 이해는 어렵지 않을 거라 본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정해두면 방식은 무궁무진할거라 본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소모품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스마트폰 정보를 인터넷에 전송해둬야 새로운 폰을 구매할 때 바로 이어서 쓸 수 있다.

 

덜 예쁘지만 튼튼한 폰은 그냥 일반 폰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주선에 쓰이는 소재를 써도 가격이 맞는다면, 쓰고 나서 그에 관련된 홍보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는 우주인이 사용하는 것도 홍보가 될 것이다. 컨셉과 대상을 명확하게 정해두면 방향이 결정되어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방법도 계속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명품화는 의류 브랜드를 참고하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상품을 명품화하여 판매했다.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재료의 가격이다. 전자업계나 자동차업계도 명품화가 된 곳이 있지만, 보통 그런 곳은 재료가 비싸다. 반면 의류업계는 상대적으로 재료가 저렴하다. 현대미술과 같이 재료의 가격이 낮아도 명품화가 되고 있는 것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거의 브랜드 가치만으로 명품을 유지한다. 같은 명품이라도 다 같은 방식이 아니다.

 

 

하드웨어.

 

스마트폰의 혁신은 대부분 배터리에서 좌초된다. 무게도 모양도 배터리의 한계로 인해 바꾸기가 어렵다. 소재도 효율도 지금 당장은 정해져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면 실상 앞으로도 스마트폰은 하드웨어적 혁신이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아는 기술이 많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만약 다른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걸 조합하여 새로운 혁신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 배터리 기술 발전이 계속 된다 가정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 몇 가지 떠올려보겠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면 분리라는 형태로 혁신을 할 수 있다 본다. 지금 당장 이용자가 쓰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분리시키는 것이다. 액정과 나머지 하드웨어를 분리하여 무선으로 신호를 연결한다. 이러면 액정과 무선송수신기가 있으면 된다. 카메라는 액정 자체에 내장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배터리는 혁신을 통해 가볍게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충전한다. 액정은 들고 다니고 하드웨어는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는다. 하드웨어 분리가 가능하면 스마트폰의 기존 성능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 합치다 다음에 접다 다음에 분리하다. 분명 그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액정을 접어서 카드처럼 들고 다녀도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액정 분리형 스마트폰은 화면과 컨트롤러를 분리한 것이기에 무선송수신이 가능한 컴퓨터와도 연동이 가능할 것이다.

 

배터리 혁신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존 기술의 발전. 둘째, 생체 에너지. 셋째, 무선 충전의 발전. 첫째는 그냥 기존 배터리가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소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를 넘었다. 둘째는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굳이 충전하지 않고 액정을 손에 들고 다니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셋째는 무선 충전이 발전하면 된다. 점점 장거리 무선 충전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해지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무거울 필요가 없으므로 분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배터리 혁신이 가능하면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가벼운 스마트폰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나 굳이 분리하는 까닭은 더 얇고, 더 가벼운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리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얇은 액정과 수신기를 더한 두께 정도의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얇아서 불편할 것 같았는데, 직접 통장 들고 만지작거려본 결과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배터리 혁신이 되지 않는 이상 무게 측면에서 분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배터리 문제가 해결된다면 분리는 분명 새로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기술에 의존하는 혁신제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성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본다.

 

배터리 혁신이 되면 날다도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가볍기 때문에 공중에 띄우기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드론 방식보다는 전자석 공중부양 같이 다른 방식으로 띄우는 것이 미관에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 외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다. 안경형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없다. 홀로그래피로 입체영상을 띄우는 건 유명하니 넘어가겠다. 홀로그래피가 가능해지면 홀로그램의 3차원을 3차원 프린터로 바로 출력할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카멜레온이나 투명 소재를 생각해봤는데 그리 매력적이지는 못하나 재미는 있을 것 같다. 공공 자전거처럼 공공 스마트폰 같은 것이 있어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 모듈만 들고 다니는 것이 떠올랐으나 그다지 쓸만할 것 같지는 않다. 형상기억합금은 이미 필요한 곳에 적용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위성통신 기능은 이미 있을 것이다. 우월감에 초점을 맞춰 통신장악을 위한 통신영역을 통해 통신방해기능을 떠올려봤으나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병렬연결 방식이 떠올랐다. 소모임 같은 곳에서 스마트폰을 모아 하나의 어떤 영상이나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노는 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화질도 별로 좋지 않고 연결도 불안정하며 소프트웨어적으로 인터넷 연결이 될 것 같아 별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괜찮다. 어떤 걸 합심하여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액정 분리가 가능해진다면 자르거나 붙이는 것이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전기충격 기능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합치다라는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므로 거기에 전기충격 기능이 하나 더해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면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위험해서 조심스럽다. 촉각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만약 스마트폰 내부에서 어떤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신호를 촉각을 통해 뇌로 전달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을 들고 있기만 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킹을 생각해보았다. 보안에 예민해지는 만큼 블루스나핑 외의 모든 형태의 무선 재킹 방지대책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일부 모델은 가능하면 천문사진 촬영이 되도 재미있을 것이다. 뇌파 수신기능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대로 바로 메모되는 기능이 되면 좋을 것이다. 피를 넣어 유전자를 기억하게끔 할 수 있으면 완전한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드웨어는 발상의 제약이 많다. 바 형태에 맞춰진 소프트웨어도 그렇고 딱딱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자.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넣다, 빼다, 돌리다, 던지다, 밀다, 당기다, 사다, 팔다, 빌리다, 굵다, 얇다, 쉽다, 어렵다, 가깝다, 멀다, 높다, 낮다, 서다, 앉다, 기다, 뒤집다, 늘다, 줄다, 많다, 적다, 젊다, 늙다, 빠르다, 느리다, 가볍다, 무겁다, 켠다, 끈다, 맞다, 피하다, 추다, 누르다, 말다, 만지다, 비비다, 맡다, 쏘다, 자르다, 쪼개다, 같다, 틀리다, 다르다, 만들다, 부수다, 뭉개다, 부러지다, 막다, 참다, 버티다, 조용하다, 시끄럽다, 깨다, 자다, 꾸다, 개다, 일어나다, 깨우다, 원하다, 애타다, 아프다, 다치다, 터지다, 채우다, 비우다, 푸다, 떠나다, 남다, 비치다, 튕기다, 키우다, 물다, 보다, 하다, 핥다, 흘리다, 달리다, 느끼다, 마시다, 싸다, 놀다, 빨다, 뽑다, 듣다, 담다, 쏟다, 열다, 닫다, 덥다, 피다, 파다, 재다, 세다, 갈다, 섞다, 꿰매다, 뱉다, 묶다, 꼬다, 읽는다, 적는다, 닿다, 찢다, 베다, 매다, 흔든다, 더하다, 나누다, 잠그다, 풀다, 조이다, 벌리다, 심다, 고르다, 뜨겁다, 차다, 바꾸다, 새기다, 베끼다, 낳다, 뚫다, 찾다, 잃다, 안다, 대다, 굴리다, 찌르다, 휘두르다, 붙다, 때다, 옳다, 그르다, 튀기다, 찌다, 굽다, 볶다, 말리다, 비튼다, 아끼다, 소홀하다, 맡기다, 올리다, 내리다, 따르다, 걸치다, 애쓰다, 새롭다, 낡다, 예쁘다, 더럽다, 맑다, 귀엽다, 흉하다, 홀리다, 내치다, 털다, 잡다, 놓다, 바라다, 숨기다, 넘기다, 후비다, 훔치다, 체하다, 알다, 모르다, 고맙다, 미안하다, 맞추다, 걸리다, 늘리다, 줄이다, 다루다, 친하다, 젖히다, 바르다, 떼다, 붙이다, 부드럽다, 거칠다, 말랑하다, 사납다, 비웃다, 무섭다, 싸우다, 먹다, 생각하다, 기억하다, 부르다, 귀하다, 천하다, 배고프다, 배부르다, 취하다, 뻗대다, 불다, 쏠리다, 겹치다, 데었다, 묻다, 잔다, 주다, 뺐다, 미루다, 내밀다, 오므리다, 띄우다, 떨구다, 받다, 버리다, 휘다, 펴다, 가다, 오다, 멈추다, 웃다, 울다, 화내다, 속이다, 되돌리다, 데우다, 누리다, 찍다, 모으다, 뿌리다, 식다, 얼다, 녹다, 떨다, 살다, 죽다, 싣다, 달다, 맵다, 짜다, 쓰다, 시다, 떫다, 싱겁다, 뭉치다, 흩어지다, 졸이다, 입히다, 벗기다, 좋다, 나쁘다, 젖다, 놀리다, 뛰다, 박다, 그리다, 지우다, 찐다, 뺀다, 날다, 잇다, 끊다, 스며들다, 치다, 튄다, 부푼다, 타다, 썩다, 씻다, 씌우다, 닦다, 찌른다, 끼우다, 숨쉬다, 쭈그리다 등 다각도로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어렵다.

 

말다는 액정말기, 씻다나 젖다는 방수기능, 떨다는 진동기능, 막다는 보안, 벗기다는 케이스를 주기적으로 벗겨서 깨끗한 표면을 유지하는 것, 사다와 팔다는 구매와 판매, 날다는 액정 날기, 겹치다는 액정필름, 놀다는 게임, 찾다는 GPS, 잃다는 원격잠금, 푼다는 계산기, 생각하다는 인공지능, 부르다는 음성인식, 듣다는 음성신호, 보다와 찍다는 카메라, 띄우다는 홀로그래피, 닿다는 촉각 감지, 만지다와 비비다는 지문인식, 밀다는 슬라이드폰, 맡다는 스마트폰 후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냄새인지, 아프다는 터치입력 강도에 따라 통각감지, 핥다다 빨다는 스마트폰 미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맛인지, 쏘다는 전기충격, 쓰다와 그리다는 필기입력. 이중에서 오감을 뇌가 인지하게 하거나 구현하는 것이 괜찮아 보인다. 감각인지 및 구현 폰이다.

 

합치다, 접다, 분리하다, 날다 그리고 느끼다. 이 감각을 느끼다가 가능해지면 확실히 합치다를 넘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앱 플랫폼의 존재로 하드웨어 제조사에서 주력으로 갈 필요는 없는 분야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만 쓰겠다.

 

인공비서. 인공지능이 평소의 패턴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데이터를 쌓은 뒤에,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패턴 또는 다른 답을 내놓으면 주인임을 의심한다. 평소와 다른데 A가 맞나요? 그것으로 인공지능은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인간성으로 넘어간다. 의심이야말로 지능 높은 동물인 인간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인식이 특별한 관계를 낳고, 특별한 관계가 특별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스마트폰을 특별하게 여기는 기제가 될 것이다.

 

자아에 대해 잠시 말하겠다. 인간은 유전자란 알고리즘과 내외부의 입출력을 통해 생각(연산)하고 행동하고, 그걸 통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반복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최초의 알고리즘이 의식을 담당하고 쌓인 기억이 무의식을 담당한다. 의식은 알고리즘에 연산이 있냐 없냐에 따라 생각의 유무가 달라지고, 무의식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 생각의 유무에 따라 의지가 달라진다. 의지에 따라 생각의 다양성이 달라진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여 각자 다른 생각이 나타나고, 전체주의에서는 집단의 의지를 중시하여 비슷한 생각이 나타난다. 여기서 통상 내외부 입출력인 육체와 환경이 없다면 인간 수준의 자아는 형성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처럼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자체 생성할 수 있다면 어쩌면 비슷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가상화. 요즘 메타버스나 버튜얼 유튜버가 유행하고 있는 것만큼 가상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에 맞춰 어떤 사물을 카메라로 스캔하여 가상의 비슷한 물건과 매칭 후 화면에 띄울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가령 공을 스캔하면 가상의 공이 스마트폰에 뜨고, 그걸 문자나 영상 등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된다. 단순하지만 포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현실의 물건을 가상의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스마트폰이 현실과 가상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차원전송기가 된다. 그걸로 보다 특별한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폰에 집어넣은 사물에 대한 상세정보지원을 하면 아동교육이나 언어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치기록.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에 위치기록이 되어 지도에 촬영한 위치가 뜨면 좋을 것 같다. 이것도 포장하면 재미있을 듯하다. 시공간을 기록하세요. 같이 말이다.

 

녹음. 법적 분쟁에 쓸 수 있도록 전문화된 녹음기능이 있으면 선호될 것이라 생각한다. 타사의 스마트폰보다 갤럭시의 녹음이 법적 증거로써 더 효력을 발휘한다면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변조할 수 없는 특별한 포맷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 각국의 법조계의 도움을 받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외 다양한 법적 증거에 최적화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견적. 어떤 목적에 필요한 금액을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예컨대 게임용 컴퓨터를 물어보면 자동으로 부품 검색을 통해 평균 가격을 더해 최소와 평균과 최대 금액이 출력된다. 특정 지역 여행을 물어보면 그에 필요한 금액이 출력된다. 구체적인 금액은 직접 조사를 해야 하겠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필요한 일반적인 금액을 알기에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완전삭제 또는 복구. 삭제한 파일도 복원되기에 그걸 이용해 사진을 유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완전삭제기능은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복구기능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밤하늘에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면 좋다. 방식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도 좋다. 중요한 점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제만 주고 알아서 만들게 해야 한다. 아니면 밤하늘과 연관된 작품과 연계하는 것도 좋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밤하늘의 이미지를 전부 장악하겠다는 감각으로 가면 된다. 순백하면 아이폰이 떠올랐던 것처럼 밤하늘 하면 갤럭시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시장의 수요 장악만이 장악이 아니다. 이미지 장악 또한 장악이다. 시장 장악은 당장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으나 이미지 장악은 오랫동안 수익을 보장할 확률이 높다. 미래나 과학 같은 것은 장악하기 어려워도 밤하늘 색 하나는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한다. 물론 가능하면 다 장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인데, 체급이 큰 브랜드는 어떤 특정한 색이나 이미지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놓고 제품을 등장시키는 PPL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본다. 대놓고 홍보하는 것은 거부감을 준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무의식에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에서 밤하늘색을 자주 사용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인지시킨 다음에 다양한 곳에서 밤하늘과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스마트폰이 이어지는 연출을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갤럭시하면 밤하늘이 떠오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역할.

 

대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역할을 얻는 것이 좋다. 구글이 최상의 검색능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검색의 역할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밤하늘 이미지를 장악하면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학적인 미래형 스마트폰의 역할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행.

 

옷의 유행 주기가 30년 정도 되듯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유행을 젊은 세대는 신선하게 느끼게 된다. 30년전 인간이 즐기던 것을 세련되게 바꾸기만 해도 충분히 통한다. 브랜드는 줄기고 유행은 가지. 이걸 명확하게 해둬야 유행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브랜드만 치중하면 가지가 죽고, 유행에만 치중하면 줄기가 죽는다. 유행에 따라 색이나 컨셉을 다양하게 내놓아도 브랜드는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유행을 아예 무시하면 시장에 외면 받을 가능성이 있다.

 

 

홍보.

 

아이폰과 라이벌이라는 것은 좋으나 유머나 위트가 없는 깎아 내림은 단순한 뒷담이나 괴롭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디스하고자 하면 반드시 유머나 위트를 넣어야 한다. 직접 또는 의류브랜드와 협업하여 밤하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사리를 만든 뒤, 그걸 갤럭시 관계자가 입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스마트폰과 같이 파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홍보에 쓰이는 만큼 이걸로 수익을 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밤하늘이 갤럭시의 대표색상이 되면 밤하늘 액세서리를 쓰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갤럭시를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름이 아닌 색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효과가 있다.

 

 

노조.

 

사실 노조랑 갤럭시는 큰 관계가 없다. 심각한 노동착취가 아닌 이상 고객의 수요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는 거시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방법이지, 미시적인 이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잠시 노조에 대한 의견을 내보자. 최근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높은 인상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임금협상에만 초점을 맞추자. 이건 기업이 기여도를 분석해서 적절하면 받아드리고 아니라면 거부하면 되는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어째서 노조의 요구는 매번 모든 직원이 동일한 임금 인상인가? 부서별로 기여도가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기여도가 다를 수 있다. 모든 노동자의 동등한 임금인상요구는 모든 노동자를 등에 업고 회사와 싸워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마인드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건 사회주의적 투쟁이다.  자본주의의 협상이라면 노조와 회사가 같이 토론하여 특정 부서의 임금을 높거나 낮게 인상하거나 동결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는 게 타당하지 않는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전직원 포상금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여도에 따라 임금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삼성이 처음으로 임금협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구식의 방식으로 임금협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임금을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노조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노사관계의 임금협상이 임금체계의 토론으로 나아가면 긍정적일 거라 본다.

 

사실 이런 대기업 노동자 협상은 대기업 직종에는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에는 영향을 주기 어렵다. 진정 모든 경제에 속한 인구의 인권을 위한다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국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강력히 주장하겠다. 대기업 노조가 모든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더 민주주의적이다. 지역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에게 가깝다고 보는가? 지역 대표는 부동산관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인데 분야 대표는 그나마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업계가 좁을수록 그럴 확률은 높을 것이다.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일단 지역 대표와 분야 대표 모두 입법권을 쥐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겠다. 이게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선동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동정치는 진정한 정치가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폰은 아마 갤럭시나 아이폰이 될 것 같다. 카메라가 툭 튀어나오지 않고 전면 카메라 숨김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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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운동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에 찬사를 보냅니다. 기자가 수상했다고 하더군요. . 생각해보면 기자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황당한 거였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도덕은 그냥 과거 종교가 만든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도덕은 어떤 과학적 증명도 되지 않았어요. 그냥 그 당시 필요한 규칙일 뿐입니다. 과거에 필요했던 규칙 모든 것이 현재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기초를 인식하지 못하면 이 기초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행동원리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나와버려요. 어떤 옳거나 그르다는 감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미신이나 토속신앙부터 오래된 종교나 사이비 종교까지 전부 비과학적인 것은 거의 다 거짓일 것입니다. 전능을 주장하는 이들이 전지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거짓일수밖에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솔직히 한국은 문제점이 많죠. 내가 봐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국가가 출산율이 저하하고 경제 양극화로 경쟁력도 악화하고 주입식 문제풀이로 문제해결능력도 저하해서 뭐 지금 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종교, 민족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 자유방임주의, 금전만능주의 같은 걸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자본가 루트를 타고, 경쟁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할만한 자본가를 양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봅니다. 지금 경쟁을 통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시를 보는 것처럼 경쟁을 통해 자본가로 성공하는 길을 일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정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능력의 상품화와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모두 갖추면 자본가 루트가 아니더라도 자본가 마인드로 기업에 협력하여 성장을 돕고 거기에 부가가치를 받은 후 자본이 모이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업유연화가 나타나 상품경쟁력이 높아져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우수한 기업들이 늘어나겠죠. 세계시장에 선택되는, 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랍니다.

 

정치를 보면 참. 슬프네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부당한 사리사욕 유무가 검증기준이라는 것이 절망적일 정도네요. 빨리 선동정치가 끝나야 될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주장하겠습니다.

 

내게 있어 자유주의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지요. 민주주의가 사회를 구성하기에 집단적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이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자본이 있었다면 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었다면 지역 영상 플랫폼 같은 걸로 창업 시도를 해봤을 텐데 아쉽군요. 개인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한 화면에 주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꽤 오래 살아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대체로 가던 길만 가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난 구역은 잘 모르죠. 유튜브가 한 화면에 취향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오는 것처럼 지역에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와서 필요한 서비스를 편하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풀이를 중시해서 시험을 잘 보면 능력이 높고 못 보면 낮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도 문제풀이능력이 낮으면 아무래도 선호되기가 쉽지 않네요.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업로드 속도가 저하될 것 같네요. 업로드 시기는 모르겠는데 다음 글은 문제해결능력 또는 역할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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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9) 2021/10/01 AM 07:32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열등주의다.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므로 여성주의(페미니즘) 찬반과 별개로 선입견 없이 바라보길 바라겠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 알기 쉽게 여성주의로 부르도록 하겠다. 한국 여성주의는 조선의 종교였던 유교와 서양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의 결합으로 여성열등주의가 되었다. 유교부터 알아보자. 유교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여 사회진출을 방해하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유교는 여성열등주의다. 여성주의를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부르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불렀다. 이 주관적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하다. 여성주의 자체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같이 다른 사상에서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손해를 보면 여성차별이라 말했다. 이러니 여성주의자마다 군복무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주관적으로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이익이면 남성혐오가 여성인권이 되고 그걸 막는 것이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어째서 여성주의자가 남성혐오를 옹호하는지 알겠는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된다. ,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와 여성주의의 여성인권을 합쳐보자. 유교에 세뇌된 여성은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만족시키는 걸 이익으로 여기기에 그걸 여성인권이라 말하여 여성을 열등하게 세뇌한 뒤에,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위해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사회에 강요하게 된다. 이 강요를 사회는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의지 약화와 성적 수치심 강화는 기성세대의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약화한 걸 여성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걸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세뇌된 노예가 자발적으로 주인의 가르침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꼴을 본 거나 다름이 없다. 끔찍하다. 이런 이유로 여성주의는 사회에 쉽게 흡수되었다. 여성주의자와 기성세대가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열등하니 배려해달라 강요했다.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배려하는 것에 동의했고,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배려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대별로 유교의 세뇌 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여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성별 평등으로 자라난 세대의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을 열등하다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일부 여성이 장애인 혜택과 같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로 받는 혜택을 여성의 이익으로 여겨 그 배려를 여성인권이라 말하게 되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남성은 그 배려를 이해하지 못해 여성우월주의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에 따라 그 남성은 여성우월주의 반대라며 반발하였다. 그 반발을 보고 일부 여성은 이런 장애인 혜택과도 같은 배려야말로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더욱 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다음 혜택 받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나타났다. 정조관념을 주입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해진 여성은 성관계를 터부시하고 성적 문화나 창작물도 검열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의 정조조차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마호메트를 신성시하라는 세뇌를 당한 이슬람이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마호메트 묘사에 몹시 불편해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성 상품화는 무시하고 여성 성 상품화에만 예민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어 강하게 세뇌된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며 이성애의 욕구를 해소했다.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 수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 수가 줄어들었다. 국가의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1인 가구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 본인이나 타인의 경험으로 볼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정조를 굳게 지키며 살다가 정말 잘생긴 남성과만 관계를 맺자, 그 여성과 관계를 맺어야 할 다수의 남성이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한 욕구를 충족 못한 남성은 포르노나 성매매도 금지 당해 이걸 막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은 여성대로 열등하게 세뇌 당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여성이 불행하다라고 세뇌 당하면 어떤 여성은 실제와 관계 없이 주관적으로 불행하다 여기게 된다. 그 불행함을 남성에게 쏟아내며 더욱더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단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현재 한국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인권이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라면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인권은 대부분 헛것이 된다. 그에 따라 반론을 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여성주의자는 유교의 세뇌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말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유교의 세뇌가 바로 연령차별이다. 장유유서를 통해 연상과 연하는 차별 되었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하의 반말을 들으면 몹시 불편해진다. 건방지고 예의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는 여성주의자가 성적 창작물을 불편해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세뇌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이 벗어났다 해도 다른 이들이 벗어났다 단언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인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유교의 세뇌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여자는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성적 수치심(성 과민이나 창작물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이 강하다는 감각이 있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강한 의지나 수치심이 적길 바라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로지 유교의 세뇌 때문이다. 원시 부족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건 철저하게 남성의 의도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대다수 한국인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유교에 세뇌되어있다는 것과, 여성주의자가 유교에 세뇌되어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다는 논리에 대한 반론은 불가능하다. 연령차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인간이 여성열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여성특혜고 둘째는 여성 성 과민이다.

 

첫째, 여성특혜

 

여성가족부, 여성할당제, 여성가산점, 여성창업지원, 여성대학존재, 여성징병의무 없음, 여성폭력방지법, 성매매여성 지원, 여성전용주거, 여성주차장 등 여성 전용 서비스는 전부 여성열등주의를 근거로 한다. 보자, 장애인가족부, 장애인할당제, 장애인가산점, 장애인창업지원, 장애인대학, 장애인징병의무 없음, 장애인폭력방지법, 성매매장애인여성 지원, 장애인전용주거, 장애인주차장 등 여성에 장애인을 넣으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지금 일부 여성은 장애인 혜택 받으면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는 인간 절반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긴 이들은 당연하니까 굳이 반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은 열등하지 않은데도 혜택을 받으니 장애인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꿔서 해보자.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지적 장애인 여성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은 장애인 수준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은 간단히 말해 약자인 여성의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일컫는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열등하니까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가령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여성에도 해야 한다는 게 성인지감수성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설령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의 이익이 되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을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해외에서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법과 큰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주의는 그걸 억지로 법과 연결 지어 여성의 열등함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징병의무가 없는 것은 간단한 논지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징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이 이런 논리가 나온다. 최근 여성징병에 대한 찬반조사 결과 40대 이상의 남성만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교에 세뇌된 농도가 높을수록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해진다. 여성주의가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여성징병에 회의적이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성징병에 찬성하게 되어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대부분 여성징병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의 가족폭력 비율을 보고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피해를 입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성이 비율이 높지만 성인 남녀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남성이 폭력적이고 여성이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의 차이로 인해 비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만약 여성이 힘이 더 쌨다면 남성이 폭력피해를 받는 비율이 높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여성폭력방지법을 추진한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가족폭력방지법이 차라리 낫다.

 

 

둘째, 여성 성 과민

 

여성 성 과민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 당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정조관념은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한 여성이다. 정조관념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소유물화하기 위해 만든 악의적인 관념이다.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주입하여 다른 남성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혼 전에는 관계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결혼 후에 과부가 되더라도 재가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을 앗아간 무거운 족쇄다. 그런데 이걸 유교적 여성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결혼 전 미성년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므로 최대한 야한 것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년 여성조차 야한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유교적 여성주의자에게 세뇌된 새로운 여성주의자들도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치마를 입는 여성에게 득달적으로 다가가 잘못되었다고 비난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적 대상화라던가 성적 착취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걸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나! 남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적 대상화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되려 이상하다. 이성이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야 사랑하고 출산하고 그럴 거 아닌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일부를 성적 대상화하였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평등해진 지금은 그저 서로의 매력을 사랑하는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라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등하다면 성적 대상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여성의 인권을 운운하는 이들이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부정하는가? 여성도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자유롭게 야한 옷을 입을 수 있다. 이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건 그냥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세뇌되어 불편한 감각이 발생하여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흔들다리 효과가 대표적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사랑인지도 분간 못해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불편해진 감각을 성적 대상화니 뭐니 말하며 가져다 붙인 것이 여성 성 과민의 본질이다. 이런 세뇌를 당한 여성은 성에 몹시 취약해져 남성 구조원이나 경찰관의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니 구조하는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정상인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멀쩡한 여성을 장애인으로 만든 다음 배려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은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나. 남성은 여성 알몸 본다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 여성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직접 보는 것 자체는 보통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알몸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 차이가 잘못되었음을 모르는가? 본다는 행위에 육체적인 체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니지 않나. 이건 오로지 의지와 지성의 영역이다. 세뇌 당하지 않았다면 남녀 모두 인간의 알몸을 본다고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

 

성 과민이 이성적이었다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할 수가 없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하는 것은 남성의 정조가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정조관념이 불편함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서양에서도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해한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받아 정조관념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했던가? 이성으로 만든 주장이 아니라 감성으로 불편해진 감각에 이유를 갖다 붙였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실제 여성의 정조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등장하는 가상 여성의 정조까지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창작물에 나오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있거나 노출이 되면 검열을 통해 가린다. 이것이 보통 2D인권부여라고 하는데, 2D남성에 대한 인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2D여성인권부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노출은 괜찮은데 여성의 노출은 안 되는가? 그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물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은 연하의 반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나 마호메트 세부묘사에 불편해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공통점은 세뇌되어 창작물에서조차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의 춘화를 보고 조선시대보다 한국이 더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유교의 탓이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면 해석이 된다. 과거 조선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춘화가 있더라도 과연 불편하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한국은 여성의 인권이 높다. 발언권이 많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나타나는 불편함을 대놓고 호소하며 마구잡이로 야한 것을 검열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주의의 본질이 더해진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주관적으로 불편한 것이 그들에게 차별과 혐오였기에 여성차별과 혐오를 막기 위해 창작물 검열에 힘을 쓴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창작물까지 간섭하며 검열하는 모습. 이 얼마나 웃기는 꼴인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되도 않는 검열은 자유와 여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수다.

 

이제는 남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기능을 명확하게 알고 그 기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중시했으면 지금 성인들도 성교육 지식이 낮다 하나? 아직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면 학부모가 반발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있는 건가. 이러니까 터무니 없는 창작물 검열을 사회가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야한 그림을 까맣게 검열하는 걸 보면 속이 터진다. 이외 실제 여성인권과 거리가 먼 용어나 형태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세뇌의 결과물이다. 그게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했기 때문에 용어나 형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불편하다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 내에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잘못된 법에 대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입법부에 전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 사법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제정하면 그에 대한 견제작용이 필요하다 주장하겠다. 성별에 차등을 둬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악법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같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누가 되었건 강요가 없는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인지, 유교 국가인지, 여성주의 국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정해 판결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의 본질은 인류열등주의다. 유교는 상명하복 사상으로 윗사람은 우월하고 아랫사람은 열등하다 가르쳤다. 윗사람은 조상과 연상이 있고 아랫사람은 연하와 여성과 아동이 있다. 신분으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상명하복을 도덕으로 만들어 열등한 아랫사람은 우월한 윗사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이 사상이야말로 동북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상명하복과 민주주의는 수직과 수평으로 전혀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열등한 인간은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차이점은 기독교는 외향적이나 불교는 내향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해외를 떠돌며 선교하러 다니고 불교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쌓는다. 뭐 그거 말고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열등하단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주장하며 인간이 열등하다 말하는 거나, 인간의 선천적인 육식성이나 폭력성을 죄로 말하는 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종교가 그 원조다. 괜히 새로운 용어 써가며 새로운 것마냥 대하지 말고 그냥 종교식 세뇌라 말하면 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에 세뇌되지 않도록 온전한 자아를 갖추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뇌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걸 당할 우려로 과민반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열등하게 만들면 이용하기가 쉽다. 여성도 같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의지를 약하게 하여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것처럼, 부모나 교사가 아동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세뇌하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다뤘던 것이다. 그거에 세뇌되어 열등한 걸 여성의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있다는 게 참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체력이나 근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보편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은 체력이나 근력에 있는 게 아니다. 의지와 지성에 있다. 힘만 따지면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이 우열의 기준을 힘으로 하는 게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의지와 지성은 성별로 우열이 나눠지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동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처사가 된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상 따위가 없다. 그냥 주관적으로 이익이면 옳고 손해면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러니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따위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하면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로 바꿔보면 안다. 남성주의를 남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남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남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라 가정해보자. 미국 남성의 손익과 이슬람 남성의 손익은 다를 것이다. 미국 남성은 보통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주관적인 이익이 아닐 것이다. 하나 이슬람 남성은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때 남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남성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슬람 남성이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남성인권이 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사상인지 알겠는가? 이슬람적 남성주의자는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남성인권이라 주장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남성차별이나 혐오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자가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화를 내는 것도 같다. 정말 천박한 사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약 이슬람에 여성인권이 올라 여성주의가 퍼지면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히잡은 여성인권이라고요! 실제 한국이 그러고 있지 않나. 꾸미지 않는 게 여성 인권이라고요! 그러면서 아나운서한테 치마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자가 맨스플레인이나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바꾸고 싶다면 여성이 노력을 해서 바꿔야 하는데, 여성주의가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라고 말을 하면 차별이나 혐오라 되받아 치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할당제나 가산점을 요구하는 게 여성주의다. 이는 비만이어서 사람에게 사랑 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 말하면 차별이나 혐오로 되받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달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가 있다. 자유방임주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유로움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그냥 지 감각으로 자유로우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방종한 행동을 정당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조잡하다. 금전만능주의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이 있고, 패권을 무력으로 쥐고 있음에도, 독재자가 권력으로 뭐든지 하고 있음에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돈으로 뭐든지 하는 걸 합리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지성이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 마음에 불편하면 차별과 혐오라 인식한다. 이러니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이 지 심기가 불편하다고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천박하다. 천박하다의 뜻은 뒤섞여서 바르지 못하다. 또는, 순수하지 못하다. 아니면 얕고 얇다. 라는 뜻이다. 이 세 사상은 지극히 조잡하고 지성이 없으며 천박하다. 이 세 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자본과 여성을 천박하게 만든다. 자유방임주의는 자유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금전만능주의는 자본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여성주의는 여성인권을 천박하게 만든다. 이런 사상은 자유와 자본과 여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만 되므로 부디 가지지 않길 바라겠다. 그 외에는 중우정치가 있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위해 페미니즘적 첫 저서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었다. 메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당대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에 대해 여성의 본성 탓이 아니라 교육의 탓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 주장했다. 여성을 위해 여성이 충분한 지성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사람도 기독교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당대 환경이나 교육으로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나 자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황했다. 이미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천박한 여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인가? 당대 유럽이 환경이나 교육으로 인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놔두고 멋대로 한국적 여성주의를 추구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이 사람을 여성주의자라 불렀는가? 여성주의는 단순히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지 않나. 이 사람은 그냥 자유주의자다. 인간의 권리 옹호를 먼저 작성한 자유주의자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지, 실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부른 적도 없다. 여성주의의 시작은 1837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애초에 여성주의 자체가 없었다. 이런 고상한 자유주의자에게 천박한 여성주의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면 부디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라겠다.

 

 

한국 여성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은 여성주의자에게 열등하게 세뇌되어 불행하다. 생각해보자. 네 주관적인 이익은 전부 옳고 주관적인 손해는 전부 그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은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겠는가? 정당한 손해에 차별이나 혐오라 느끼고 부당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의지약화와 성적수치심 강화까지 더해지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차별과 혐오로 느끼게 된다. 이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나. 여성주의자는 한국 여성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남성이라던가 국가라던가 출산율이라던가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하겠다. 이건 여성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별 쓸데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마음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이 차별과 혐오로 가득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세뇌되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아, 돌아버리겠구나. 하루 종일 너는 불행하다고 세뇌 당한 사람이 행복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뭐든지 감사하라나 힘든 형편을 지닌 사람보다 낫다거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온전한 자유의지! 현명한 지성! 객관적인 시각! 통찰력! 사고력! 따위를 길러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은 어떠한가? 보호를 명목으로 여성의 의지를 꺾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옷차림의 자유를 막는다. 외모 꾸밈의 자유를 막는다. 인간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성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막는다. 여성 자유 억압이 일상이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정하고 행하면서 나온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걸 싹 다 막았으니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창작물 따위 여성인권이랑 아무 관련 없지 않나, 여성 아나운서가 치마를 입거나 여성 아이돌이 야한 옷을 입었다고 여성인권이 낮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왜 그거에 불편하도록 세뇌한 건가.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불행한 것처럼 유교적 여성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져서 불행하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이 불행하기에 불행하다. 원래 남녀는 그런 관계다. 남성이 불행하면 여성도 불행하고 여성이 불행하면 남성도 불행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적은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을 바꿔도 결과는 같다. 만약 남성이 성적 억압을 받았다면 여성이 성욕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었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로 불행한 것은 철저하게 여성이 열등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여성이 열등함에서 벗어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출산율 추락에 대해 알아보자.

 

출산율 추락은 이성애 결핍 따위로 인해 연애와 출산에 대한 욕구의 순위가 낮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본래 유교사상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애 결핍이 발생해 출산율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강요로 출산율을 올려 유지했다. 집안 어른의 강요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강요로 한 결혼은 자발적이지 못하기에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해 아이가 크고 나서 이혼하는 황혼이혼을 하곤 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 황혼이혼을 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황혼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1위로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성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에 대한 성에 대한 터부는 여전하여 다수의 미성년이 제대로 된 이성애를 배우지 못하며 자라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 순위가 낮아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 여기서 여성주의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의 주관적인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인권이 되었다. 보다 더 미성년에게 성적 억압을 강요한다. 보다 더 성적 문화를 검열하고 억압한다. 유교의 성 터부시나 성적 억압에 여성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리해보자. 처음부터 한국은 유교로 인해 자유로울수록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최근에 급격하게 떨어진 원인은 그 유교를 올바르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중용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유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부동산 따위가 원인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결코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그거 하나면 이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다. 다수가 애정결핍된 상태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보통 정말 사랑하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정말 아이를 낳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낳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취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있지 않는가? 취미의 욕구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후순위로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낮은 것은 단지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떤 욕구의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욕구 순위를 높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 등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고려해보면 인간의 저출산의 원인이 파악된다. 북한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시점에서 물질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된다. 2018년 한국이 0.98이고 북한이 1.90.

 

여기에 꾸밈노동을 죄악시하는 탈코르셋 따위가 원인의 일부로 더해진다. 꾸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한다. 그걸 죄악시하면 사람에게 사랑 받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 서로를 사랑할 확률도 줄어든다. 강요가 없는 이상 사랑이 줄면 연애도 줄고, 연애가 줄면 결혼도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도 준다. 당연히 출산율이 떨어진다. 이 천박한 사상은 인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밈노동거부에 대해 알아보자.

 

남성이 여성에게 꾸밀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꾸밈이란 타인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사랑 받기를 바라는가?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했다 하여 현재 꾸밈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타인이 아닌 본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공산주의적이다. 생산자를 먼저 생각하다 소비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공산주의처럼 본인을 먼저 생각하며 꾸미지 않다가 타인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나 가산점도 이런 같은 맥락으로 접근이 된다. 경찰이 할당제를 도입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경찰 역할을 맡으면 치안 서비스가 악화되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당제로 들어가는 경찰을 먼저 생각했기에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외면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외면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할당제로 들어가는 사람 생각하다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이 불행해지는 걸 생각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된다.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버리면 타인이 불행해진다.

 

 

성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은 상품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이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 둘 다 해당된다. 특정 성이 상품화 되었다고 그 성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 남성 성 상품화가 된다고 남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 성 상품화에 불편해하는 건 오로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가능한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욕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각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어느 때에도 올바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포르노와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고백하겠다. 과거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성매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뉴트리아 항문 봉합에 대해 아는가? 뉴트리아의 항문을 봉합한 후 풀어주면 배변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신적 공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린 새끼들을 없애 뉴트리아 멸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를 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해소불가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성 터부로 관계가 어렵고 성 상품화를 금지시켜 욕구해소를 막으면 그게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다고 보는가? 매우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물이면 원래 욕구가 막히면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성욕은 의지로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로 뭐든지 가능하면 전국민이 채식주의를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간의 의지가 강하면 금주령을 내렸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일시적으로 욕구를 참을 수는 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면 강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욕구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성으로 안내하는 것이 올바르다. 성범죄보다 성 창작물이나 성매매가 낫다. 왜 이걸 모르는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면 본격적으로 포르노와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등주의 전파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이익이라 생각하는 열등함인 약한 의지나 강한 수치심을 남성에게까지 세뇌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성년 남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성년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미성년 남성에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미성년 여성에게 주입하던 열등함을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충격 받은 일이 있다. 본래 남성은 성추행을 당하면 곧바로 반격을 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그런 것에 대한 자유의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남성이 기숙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반격하거나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 가까운 카페로 도망쳐 울면서 인터넷에 성추행을 당했다며 호소하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게 뭔가. 의지가 약한 남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하던 여성열등주의가 여성을 열등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성마저도 열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여성이 열등하게 되었다고 남성도 열등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바로 맞대응하고 신고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줘야지, 그러지 않고 남성의 의지를 약화하면 어떻게 하나. 억압받고 있던 여성과 억압받지 않는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남성처럼 억압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예 그냥 전국민 장애인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된다.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약자를 돌보나.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만들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약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벅차기 때문에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약자를 돌볼 수 없다. 정녕 약자를 위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도덕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는가?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교리를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유의지보다 타인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양성되었다. 모든 자유의지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고, 자유의지가 아닌 행동은 개인에게 있어 이익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여부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이타적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도 같은 형태를 띤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올바름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질서강요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선천적인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고, 후천적인 인간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춘다. 여성주의의 경우 후자다. 주관적인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인권여부를 결정하는 이 사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는 사상이 보통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동물보호주의 따위다. 이런 것들은 과거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불교가 보통 육식금지와 폭력금지와 살생금지 차원에서 원조 격에 해당할 것이다. 동물보호주의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인간 개인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어떤 인간이 고양이나 개를 다른 동물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우대하고 해로운 건 천대했다. 그러니 귀여운 동물만 좋아하며 보호하자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귀여운 동물 보호를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지 전통의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개를 먹을 필요는 없다 보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걸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본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상은 전부 과거 도덕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도 도덕적이라 포장하며 활개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이 잘못되었다며 고기 집에서 행패를 일삼는다거나 폭력이 잘못되었다며 병역회피를 한다거나 특정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유지에 침범하여 음식을 놓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올바른 걸 하는 것 같음에도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오는 것은 과거 종교의 도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 같으면서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좋지 못한 낡은 결과가 나온다. 이럼에도,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사상들이 도덕성을 갖춰 횡포를 부리고 있음에도,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 같은 천박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추지 못해 이런 낡은 사상들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부도덕하다며 공격받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도대체 좌파와 우파가 왜 나오는 건가? 현대 세계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니라, 과거 종교의 도덕과 거기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다. 여성주의는 이 대결에서 과거 종교의 도덕에 속한 일부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이런 작고 천박한 사상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상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과거 질서강요로 회귀하겠다는 사상이므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자유로운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주의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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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를 억압하는 것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든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셧다운제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을 통해 통과된 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대다수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세뇌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고 구분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진보, 자본주의 진보와 역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길 희망합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중국은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한국을 지배하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와 국가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유교는 중국에서 온 사상이고 내가 만든 건 한국에서 시작한 사상이 되겠죠. 뭐가 더 한국적인가요

 

변호사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정상. 시장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우수한 변호사는 높은 수익을 얻고 그러지 않은 변호사는 적은 수익을 얻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교육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교육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수준이 낮습니다. 인공지능에 비유하면 지금 교육은 알고리즘 설계가 아니라 데이터 입력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에요.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포장해도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어요. 참 안타깝죠.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문제풀이능력 키워놨더니 상품화 능력이 떨어져서 자본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감소하고 문제풀이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죠. 자본가 수 감소로 인한 취업자 수 감소나 공무원 쏠림 따위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기업의 경력자 선호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문제풀이능력을 갖춘 반면 경력자는 기업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력자를 신입대우로 써먹기 위해서 그런 걸 희망한 기업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그냥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자동화 시대가 오면 올수록 자본가의 필요성은 늘어난다 봅니다. 이제 교육도 학생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노동자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능한 자본가가 나타나면 무능한 기업도 세대교체 될 겁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노동자 착취를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기피도 줄어들 거라 봅니다.

 

다음 글은 구글 경쟁상대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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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ppraiser    친구신청

좋은글이네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직접 쓰신건가요??

루리웹-4810785279    친구신청

좋은 글이네요. 물론 읽었습니다. 나름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BeanPaul    친구신청

이번 오징어 게임 여혐 논란 일으키는거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적인 유교사상이라는걸 다시 상기시키더군요.
국내 작가들이 보수적인 지상파 규제로 부터 벗어나, 넷플릭스라는 해외 플렛폼에서 한국인만의 독창적인 표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무대에서 흥행했지만, 한국 페미들은 여성혐오 범벅이라고 선동 및 불매운동. 거기다가 어떻게든 더 신빙성을 얻어보려고 노인 혐오까지 끼워맞추더군요.

숲바라기    친구신청

여가부 폐지만이 답

카림무스타파    친구신청

유교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 보이는 글입니다.

pians    친구신청

너무 주관적이네요. 자기의 생각을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진행하니
좀 읽기가 힘들더군요

예를 들면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거..

🌠별바다🌊    친구신청

논리적비약과 확대해석이 많은것 같습니다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구요

Air Zonk    친구신청

길게 뇌피셜 사족을 붙여 놓은 흔한 안티 페미 주장.

기복왕    친구신청

3줄요약좀..
[잡담] 지역 영상 플랫폼 (0) 2021/09/20 AM 08:21

지역 영상 플랫폼

 

 

 

간단한 발상 하나 적어보도록 하겠다. 발상방식은 다음과 같다. 구글의 독과점으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부작용을 해소하려면 규제 또는 경쟁상대의 등장이 필요하다. 경쟁상대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초점을 맞춰보자. 구글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유튜브를 종종 보므로 유튜브부터 시작해봐야겠다. 우선 유튜브의 부족한 부분을 생각해보자. , 유튜브는 분야나 취미의 접근도는 높은데 지역의 접근도가 낮구나. 그래, 당근마켓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상 플랫폼이 등장하면 괜찮은 경쟁상대가 될지도 몰라. 그렇구나. 기존 지역 영상 매체는 방송국이었어. 각 지역의 방송국이 따로 있지. 그러다 분야나 취미를 중심으로 한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가 등장했지. 유튜브가 성장하고 있는 중에 짧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틱톡이 등장했어. 중국산이어서 반중감정이나 개인정보유출 우려가 있음에도 가벼운 접근성으로 젊은 세대 입장에서 유행타기가 쉬워 많은 이들이 이용했어. 돈을 미끼로 한 호객행위도 한 몫 했지. 유튜브는 그걸 보고 숏이란 컨텐츠로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고. . 영상 매체와 플랫폼은 지금까지 크게 지역과 분야와 유행으로 세 가지가 나뉘었는데 큰 차이가 하나 있어. 유튜브와 틱톡과 달리 방송국은 단방향 영상공급매체라는 거야. 지역과 분야와 유행 세 가지 중 분야와 유행은 영상 공유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아직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어. 만약 지역 중심의 양방향 영상 공유 플랫폼이 등장한다면 유튜브와 틱톡을 이을 세계적 영상 플랫폼이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발상에 1분이 소요되었다. 1. 구글 뉴스를 접한 것이 문뜩 떠오름. 2. 유튜브에 대한 생각을 함. 3. 지역영상 플랫폼. 4. 당근마켓. 5. 방송국, 유튜브, 틱톡.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생각해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 사상은 발상도 어렵고 정리도 어렵지만 사상의 결과물은 발상은 쉽되 정리는 어렵다.

 

정리하기 전에 간단한 입장표명을 하겠다. 경쟁. 처음에는 구글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편이라 경쟁상대의 필요성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이야말로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만드는 길이었다.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경쟁상대보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기에 생산자가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높은 상품 가치는 국내의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의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 경제를 성장시키게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체제였다. 그러니까 소비자를 생각한 자본주의가 생산자를 생각한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다. 물론 생산자를 소홀히 대하여 착취하게 되는 문제는 자본주의의 결함으로 남아있다. 원래 생산자를 생각하면 소비자가 불행하고 소비자를 생각하면 생산자가 불행하게 된다. 이 부분은 올바른 부의 분배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승리하게 한 원동력인 소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그런데 독과점은 경쟁이 없기에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를 먼저 생각할 확률이 높다. 굳이 소비자에게 구애하지 않아도 사랑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상품 가치가 낮아져 소비자를 불행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 그러니 독과점에 있는 구글도 경쟁상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과 소비자를 생각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집단과 생산자를 생각한다. 어느 쪽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분명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도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집단에 개인이 묻혀 개성을 잃어버리고 한낱 부품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생산자를 생각하느라 상품가치도 없는 걸 생산하여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낫다. 따라서 결함을 해결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지역주의. 분명히 말하건대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역주의는 이제 낡은 갈등유발요소다. 그러나 나는 생각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지역과 연계되는 발상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지역 중고거래를 활성화시킨 당근마켓의 출현이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유발 또는 심화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지역 영상플랫폼도 큰 부작용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직 지역 영상 플랫폼이 마땅히 없는 듯 하다. 아마 방송국이 있기에 따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걸 떠올리고 언제가 만들지도 모른다. 어차피 만들어질 거라면 한국에서 하는 게 낫다. 설령 부작용이 나타나더라도 국외에서 만들어진 걸 국내로 받아드리는 것보다 낫다. 물론 이걸 쓴다고 꼭 한국에서 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가능하면 플랫폼 이름을 순수 한국어로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일상어를 순수 한국어로 바꾸는 것은 부자연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순수 한국어로 이름 짓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본다.

 

새로운 상품화를 하는 방법을 몇 가지 알아보자. 첫째, 국내에 있는 것을 본질은 같되 형태는 다르게 하여 상품화하는 것. 둘째, 국내에 없고 국외에 있는 것을 본질은 같되 형태는 다르게 하여 상품화하는 것. 셋째, 아직 세상에는 없지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걸 상품화하는 것. 지역 영상 플랫폼은 첫째에 가까우므로 첫째를 설명하겠다. 첫째는 둘째와 셋째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편임을 말해두겠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김치의 식감과 맛을 다른 형태로 구현해본다. 김치로 느끼는 감각만 뽑아다가 다른 형태로 구현하면 된다. 이러면 새로운 상품이어도 김치가 연상되어서 접근하기 좋을 것이다. 이게 김치맛 과자 같은 게 아님을 말해두겠다. 재료도 다르고 제조과정도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김치로 느끼는 만족감을 다른 형태로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공감각을 활용한 연상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김치를 선호하지 않기에 김치로 어떤 만족감을 느끼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걸로 만족감을 느끼는 한국인이 많기에, 그 만족감을 다른 형태로 구현한 상품이 등장하면 한국인에게 선호될 것이다. 또는 김치의 제조과정만 따서 다른 형태로 구현해본다. 김치는 재료를 굵은 소금에 절여 씻은 다음 양념과 젓갈을 넣어 버무려 발효시켜 만든다. 여기서 김치 재료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 된다. 예컨대 빵이나 치즈를 넣어본다고 해보자. 나도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데, 이러면 과정은 같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김치를 연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반대로 치즈의 제조에 김치 재료를 써도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맛은 보증할 수 없어도 말이다. 이렇게 감각을 남기고 나머지를 바꾸거나 과정을 남기고 나머지를 바꾸거나 하는 식으로 상품화를 하는 방법이 있다. 감각을 예로 들면 도박을 뽑기 게임으로 바꾼 것이 있다. 도박이나 뽑기 게임이나 낮은 확률로 높은 이익을 얻을 때 느끼는 쾌락은 같지만 형태가 달라져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감각은 목적이 같아 연상이 쉬워 새롭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다. 과정을 예로 들면 고문기구를 운동기구로 바꾼 것이 있다. 러닝머신은 원래 죄수를 고문하는 고문기구였는데 대상과 목적을 일반인과 운동기구로 바꾸자 과정은 같아도 감각이나 결과가 달라지는 새로운 것이 되었다. 고문 받는다고 생각하며 러닝하는 것과 운동한다고 생각하며 러닝하는 것은 느끼는 감각과 결과가 다를 것이다. 과정은 목적이 달라 연상이 어려워 새롭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많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감각과 과정을 바꾸면 새로운 것이라 인식한다. 어떤 것은 과거의 것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떠올리는 것을 어려워하기까지 한다. 그걸 간단히 알아보겠다.

 

나는 사상가를 목표로 하고 있음으로 사상으로 접근해보겠다. 한국에서 여성주의가 빠르게 확산한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PC주의가 빠르게 확산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성주의나 PC주의의 본질이 과거 종교와 흡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한국식 여성주의는 과거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를 닮았다. 유교는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가르쳤다. 남성이 여성을 아랫사람으로 다루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했다. 의지 약화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 강화가 여성의 정조를 지켰다. 남성이 여성을 편하게 다루기 위해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은 여성들이 여성은 열등하기에 배려해야 한다를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일반 남성과 비슷한 체력을 가진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징병에 적합하지 않다 주장한다. 남성보다 우수한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장애인 수준의 여성할당제가 필요하다 주장한다. 남성보다 성적 자유나 주도권이 있는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성적 노리개가 되므로 남성 성 상품화는 괜찮으나 여성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 주장한다. 여성은 열등하니 장애인과 같은 배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일련의 주장은 전부 여성열등주의로 이어진다. 여성이 장애인과 같은 혜택을 받는다고 하여 여성우월주의로 착각하는 일이 있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여성주의에 관련된 현상은 여성열등주의로 해석하면 대체로 답이 나온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여성주의를 쉽게 수용했던 것은 이와 같이 본질이 같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열등하니 천대해야 한다. 여성은 열등하니 배려해야 한다. 본질은 같다. 이는 사회주의도 동일하다. 보수적인 유교사상을 가진 기성세대가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쉽게 수용했던 것은 두 사상의 본질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회가 수용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수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 부분을 꼭 한번 고찰하길 바란다. 이럼에도 대부분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유교의 여성 억압과 이슬람의 여성 억압과 여성주의의 여성 억압이 결과적으로 같음에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유교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보고 어딜 여자가 문란하게 그런 차림을 하느냐 화를 내는 것이나 이슬람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체포한다거나 여성주의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비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성을 성적 억압하는 것은 같음에도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문기구를 운동기구로 목적을 바꾸자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처럼 여성 억압의 목적을 여성인권으로 바꾸자 좋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한국 여성주의자야말로 배려만 늘린 유교 근본주의자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이제는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PC주의는 과거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닮았다. 기독교는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모두가 신의 어린 양이다. 성에 대한 터부도 비슷하다. 그런 식으로 배우고 성장한 이들이 결과적 평등을 지향하는 PC주의에 세뇌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독교가 평화 평등을 외치는 것이나 PC주의자가 평화 평등을 외치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PC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조차 기독교 사상을 비판하기는커녕 근간이라는 걸 떠올리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유교에 세뇌된 사람이 한국 여성주의에서 유교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기독교에 세뇌된 사람이 미국 PC주의에서 기독교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영혼의 존재를 배운 사람이 과학이 발달해도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과 과거 종교를 배운 사람이 시대가 변해도 과거 종교의 도덕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같다. 이미 유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아의 일부로 자리잡은 사람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여성주의와 PC주의로 인한 사회갈등은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의 마찰로 보면 된다. 여성주의나 PC주의가 사상적으로 조잡한 면이 있음에도 그토록 퍼져나갔던 것은 근간이 수천 년간 체계를 쌓아온 과거 종교에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근간에 과거 종교가 있기에 이들의 극단적인 행위를 도덕적이라 포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은 같되 형태만 달라져도 새로운 것이라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상품화를 하면 본질은 같아도 많은 사람들은 그걸 새로운 상품으로 인식할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 사람을 위해 필요한 상품을 만들어 팔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번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번다는 과정 같지만 목적이 다르다. 결과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같으므로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대답하겠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도덕성이 있다.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 같은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PC주의와 여성주의 같은 사상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사상들에게 도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도덕성을 자본주의도 갖춰야 한다. 현대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니까 과거 종교의 도덕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들어 연하를 지배하려는 꼰대를 양산한 유교에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인류가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거나 모든 인류가 구세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류열등주의에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육식이나 욕망 같이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며 인간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배를 불리는 이들에게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이제 현대 사상으로 넘어가야 한다. 현대 사상도 이제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현대 사상이 인류의 자아형성을 도와야 한다. 현대 사상의 미덕과 악덕을 몇 가지 알아보자. 자유주의의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강제 세뇌다. 역할주의의 미덕은 전문가가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역할 수행자에 대한 존중이고 악덕은 전문가의 역할 수행을 근거 없이 방해하는 것과 역할 수행자에 대한 천대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여 행복하게 하는 것과 행복하게 하는 이에게 정당한 부를 분배하는 것이고 악덕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게 하는 것과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이에게 부당한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독과점과 담합이나 부동산으로 부를 불려나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악덕이 된다.

 

지금 한국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 사상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그 나라의 사회 수준이 높다는 걸 증명한다.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이 마찰은 현대 사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진통이기 때문이다. 마찰이 없는 곳은 아마 아직 과거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종교,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의 마찰, 현대 사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한국과 미국은 중간 단계에 있다. 아마 대부분의 선진국이 이 단계에 있을 것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사상 초격차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본다.

 

 

 

지역 영상 플랫폼을 정리해보자. 이것을 발상하게 된 계기는 구글의 인앱결제 뉴스다. 그걸 보고 경쟁상대의 필요성을 느껴 발상하였다. 그런데 그게 지역에 뿌리내린 역사 깊은 방송국의 단방향에서 양방향으로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본다. 지금 방송매체는 영상 플랫폼에 흡수되고 있다.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보기보다 유튜브로 보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방송매체가 영상 플랫폼 내에 있는 수많은 영상 중 하나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지역을 거점으로 둔 기성방송매체는 아마 존재가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기성방송매체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방송매체에 맞는 영상 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다. 이것은 지역을 거점으로 둔 만큼 방송국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저번에 정보의 확산과 포화로 이제 언론의 역할은 정보공급보다는 정보의 괴리를 줄이는 모든 걸 잇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우선 지역 영상 플랫폼의 형태를 알아보자. 첫째, 지도. 둘째, 주소. 셋째, 메타버스. 첫째, 지도. 유튜브는 일반적인 영상 플랫폼이고 틱톡은 짧은 영상 플랫폼이고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도 영상 플랫폼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만큼 기본적으로 지도의 형태를 띤 플랫폼이 된다. 지도의 형태이므로 지도에 있는 부동산에 영상을 업로드한다. 일반인이 업로드 할 때 개인정보노출이 싫다면 거주지가 아닌 동, , 시 단위의 지역에 영상을 업로드 하면 된다. 홍보를 바라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해당 부동산 바로 업로드 하면 된다. 음식점이라면 그 음식점에서 촬영한 요리 영상이 올라올 수 있고, 소방서라면 그 소방서에서 촬영한 화재진압 영상이 올라올 수 있다. 여기서 방송국의 힘이 나온다. 지금까지 방송국이 지역에서 촬영한 영상을 지도에 뿌리면 수도 없이 많은 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다. 둘째, 주소. 주소는 일반적인 영상 플랫폼과 비슷하되, 영상 범위를 주소로 하는 걸 의미한다. 해당 지역 영상을 보고 싶을 때 주소를 선택하여 보면 된다. 조회수나 추천수로 정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지역으로 나눈 지역 영상 플랫폼은 관광하기 전 관광지 답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메타버스. 가상의 세계라고 하는데, 현실을 구현한 가상의 세계에서 돌아다니며 현실의 영상을 보는 것도 상당히 이상해서 재미있을 것이다. 메타버스는 아무래도 접근성이 낮아 아직은 꼭 구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특징을 알아보자. 지역은 지역인만큼 오프라인의 성질이 강하다. 유튜브나 틱톡은 오프라인으로 묶을 대상이 없어 온라인의 성질이 강해 분야나 취미나 유행 같은 범주에서 조회수가 높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영상은 필요한 이들에게 공급되기가 어렵다. 조회수가 낮은 영상은 알고리즘의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살아남는 영상이 적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에 영상이 묶여있어 그 지역의 영상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조회수와 관계 없이 영상이 공급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산에 대한 영상을 접하고 싶다면 유튜브에서는 단순히 산을 검색해서 영상을 보게 된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지도에서 특정 산을 선택해야 그 산에 대한 영상이 나오므로 조회수와 관계 없이 영상을 접하게 된다. 물론 유튜브에서 검색을 통해 특정 산의 영상을 골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처음부터 그 범주가 결정되어있다는 점이 다르다. 유명하지 않는 산에서 올라온 영상은 유튜브에서는 철저하게 외면 받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그 지역 주민이나 관광객이 찾아보게 된다. 지역은 오프라인, 유튜브와 틱톡은 온라인이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말해두겠다. 다음 특징으로는 놀이성과 상업성의 차이다. 유튜브나 틱톡은 놀이성이 강하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은 상업성이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목적을 알아보자. 첫째, 상업 광고. 둘째, 지역 홍보. 셋째, 지역 정보 공유. 첫째, 상업 광고. 보통 상업 광고는 환영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상업 광고를 불쾌하게 여기는 이용자들이 많다. 그걸 이용해 광고가 없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람들이 상업 광고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건 상품을 구매하려고 할 때다. 상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품 판매 측에서 하는 상업 광고를 보고 싶어 한다. 소비자는 상품의 구체적인 스펙이나 활용법 따위의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 그와 같다. 특정 지역의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에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 A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지역 영상 플랫폼을 실행시킨 뒤 해당 지역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영상을 두루두루 살핀 후에 원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예컨대 헬스장이나 노래방이나 도장이나 학원 같은 서비스를 이용한다. 집 주변에 있는 서비스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그럴듯한 홍보 영상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으로 이용충동을 느끼게 된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오프라인의 성질이 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둘째, 지역 홍보. 관광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홍보 영상의 플랫폼을 제공한다. 관광지를 방문하고 싶어도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세세한 키워드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역에 영상이 묶이게 되면 그 지역만 선택해도 관련 영상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특정 지역에서는 홍보를 위해 실시간 영상을 제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유튜브와 다르게 영상이 지역의 부동산에 묶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상이 없는 부동산은 첫 번째 영상을 올리고 싶어하는 이들에 의해 영상이 업로드 될 확률이 높다. 셋째, 지역 정보 공유. A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도 A지역의 모든 걸 알기가 어렵다. 지역에 대한 정보는 개인정보노출의 우려로 유튜브에 업로드 되기가 어렵다. 상업적인 측면의 영상은 조회수가 낮아 접근도가 낮다. 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이 있으면 해당 지역에 있는 영상을 접하기가 쉽다. 일반인이나 자영업자가 올린 영상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뉴스 또는 공공기관의 영상이나 역사 자료 따위도 취급하기 수월할 것이다. 이런 것은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 내린 방송국이 전문이다. 지금까지 촬영한 영상을 체계적으로 지역에 분배해도 충분히 많은 영상정보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역의 정보가 공유되면 그 지역이 자체적으로 활성화 될 확률이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같은 지역에서 축제가 있어도 뉴스가 아니면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있다면 그 지역에 관련된 총체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그 지역의 사람이 특정 지역의 위험을 영상 업로드를 통해 공유할 수도 있고, 특정 지역의 이슈를 영상 업로드를 통해 공유할 수 있다. 사고 다발지역을 영상으로 공유할 수도 있고 길거리 연주회도 영상으로 공유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 영상을 업로드하면 특전이 제공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지도를 기반으로 한 영상 플랫폼은 이런 강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분별 없는 업로드가 미관에 좋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처도 필요할 것이다. 업로드 제한 지역이 있다거나 선택에 따라 필요한 영상을 위주로 볼 수 있도록 한다거나 말이다.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용납할 수 없고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도와준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의 모든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프라인에도 오프라인의 강점이 있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수익을 알아보자. 방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용자가 늘기 전까지는 수익을 얻는 걸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산이 세계화가 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급한 수익회수였다.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서 수익을 회수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시장 장악도 못해놓고 빠르게 회수하려다 시장에 외면 받고 뒤쳐진 게 하나 둘이 아니다. 당장의 수익성보다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기존에 유튜브가 분야, 취미 + 유행 + 지역을 통틀어서 영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면 거기서 유행을 틱톡이 가져가고 지역을 지역 영상 플랫폼이 가져간다는 느낌으로 가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틱톡보다는 유튜브 숏이 크길 바라고 있지만 틱톡에 많은 이용자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첫째, 연계. 둘째, 개인방송 수수료. 셋째, 관광지 홍보. 첫째, 연계. 지역 영상 플랫폼에 올라온 영상과 연계되는 상품이 팔릴 경우 일정금액을 수수료로 받는다. 아마 이게 기본적인 수익구조일 것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만큼 오프라인 사업과 연계가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음식배달이 있다. 각 음식점에서 요리영상을 올리면 배달이용고객이 그 영상을 참고하여 배달주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음식배달을 주문할 때 어떤 음식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싶을 때가 있다. 리뷰나 사진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해당 음식점의 요리영상에 대한 수요는 높을 거라 본다. 특정 페이와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특정 포털과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과 관련된 것은 대부분 연계가 가능할 거라 본다. 둘째, 개인방송 수수료. 지역 영상 플랫폼인만큼 개인방송은 유튜브에 비해 약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명을 알리고 싶은 예능인 지망자는 오프라인에 강점이 있는 만큼 의외로 수요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익명의 개인방송은 유튜브가 강할 것이고 실명의 개인방송은 어쩌면 지역 영상 플랫폼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후원 같이 후원금의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관광지 홍보. 온라인의 성질이 강한 유튜브나 틱톡과 달리 오프라인 성질이 강한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별로 관광지를 홍보하기가 쉬운 편이다. 유튜브에서는 외면 받는 영상이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관광목적으로 선호 되는 영상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은 지자체의 지원을 통해 영상을 제작하여 홍보하는 것으로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라는 플랫폼을 제대로 개발하여 이용자 수를 늘리면 수익은 사실 큰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처럼 지역에 기반을 둔 방송국은 유튜브에 흡수될 것이 아니라 지역의 강점을 살려 새로운 영상 플랫폼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방송국이 혼자서 할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맞서 대부분의 기성방송매체가 연계하여 제작해야 한다고 본다. 유튜브가 분야의 특기나 취미의 영역, 틱톡과 숏이 유행의 영역,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의 영역으로 유튜브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것이다. 지도 기술, 영상 공유 기술, 스트리밍 기술 등이 이미 있으므로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본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세계에 통하면 세계적인 영상 플랫폼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히 말해 이것은 감시사회의 가속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건 앞서 말한 것처럼 흐름에 따라 누군가는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게 될 거라면 한국이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나서 부작용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편이 좋을 거라 본다. 지역이 활성화되면 수도를 비롯한 모든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수도 집중화가 풀릴 수도 있다고 본다. 수도 집중화의 원인은 서비스 이용과 거주자의 수준 때문이다. 교육열이 높은 학생이 모인 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이사 가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다. 따라서 수도 집중화를 풀기 위해서는 모든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한국인 전원의 지성과 품위를 올려야 한다. 지역의 활성화가 그걸 도울 수도 있을 거라 본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의 전문은 아니다. 나의 전문은 사고방식, 행동원리, 자아형성, 가치관, 도덕 같은 사상이다.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사상이 전문이다. 길을 안내하는 사상이 전문이다. 이 글도 단순히 구글 관련 뉴스를 보고 쓴 충동적인 변덕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결과가 중요하지만 결과를 낳게 하는 그 발상 과정도 주목했으면 좋겠다. 구글 독과점이라는 사회현상을 보고 경쟁상대 필요라는 문제를 하나 만든다. 경쟁상대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자주 이용하던 유튜브의 독과점을 해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영상 플랫폼의 특징과 결핍을 찾아 지역 영상 플랫폼이란 답을 내놓는다. 그걸 통해 경쟁상대 늘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를 바꾼다. 없는 문제를 만들고 없는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한다. 보통 이런 것이 문제해결능력이다. 문제해결능력에 대해서는 이후 좀 더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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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출산율을 떨어트리는 사상이 도덕으로 자리잡고 있으니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 대부분 사상이 간섭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연령차별을 언급하면 이에 대한 반론 자체를 할 수가 없어요.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고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입니까? 아니잖아요. 만들어진 겁니다. 야한 여자를 보고 불편해하는 거나, 창작물 보고 불편해하는 거나, 그런 거 전부 만들어진 감각입니다. 유교 근본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는 교육을 하고 그걸 다른 유교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수용하는 바람에 지금 어떤 여성은 지나치게 약해졌어요. 끔찍하군요.

 

다음 글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멍청한 사상은 좀 빨리 치워야 할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는 멸종할 겁니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에요. 마땅한 자원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나라에서 출산율 저하와 상품화 능력 저하는 그야말로 몰락의 신호탄이죠. 이대로 두면 끝내 한국인은 멸종할 겁니다. 민족주의가 야기한 지역주의는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토록 사회갈등을 일으켰는데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갈등 일어난다고 해서 멸종할 정도의 타격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올바르다 여기던 것이 문제의 원인이면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계속 악화되어 끝내는 멸종까지 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습니다. 본래 문제가 발생하면 도덕이 올바른 길로 안내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잘못된 길을 안내하면 점점 악화되게 됩니다. 출산율과 같이 말이죠. 수백 조를 쏟아 부었는데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멍청한 도덕이 있으면 돈을 쏟아 부어도 더 악화됩니다. 솔직히 좀 많이 큰일 났어요. 원인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악화일로만 걷고 있으니 뭐 답이 없죠.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멸종 직전에? 여성이 장애인 혜택을 받는 걸 보고 이익을 보고 있는 거라며 어떤 남성은 그걸 가리켜 여성우월주의라 말하죠. 그렇게 우월한 거라 말하니 여성 측에서는 그런 장애인 혜택이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거라고 느껴버립니다. 그리고 더욱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어 혜택을 받는 것에 주력하겠지요. 이걸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됩니다. 여성이 장애인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열등하단 시각 때문임을 알려야 합니다. 이제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본질을 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는 우주개척을 하고 어디는 하늘에 광고판을 띄울 생각을 하는데 여기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유교로 몰락했던 국가의 후예가 유교로 다시 망가지고 있는 걸 보면 참 서글프네요. 멸종 직전까지 과거 종교의 도덕을 운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네요.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합니다. 정치가에 대한 불신으로 국회의원 감축을 주장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국회의원은 본래 성격이 국민의 참여입니다. 지역을 대표하여 의견을 내는 것이 국회의원이었지요. 그런데 지역 대표는 부동산에 영향을 많이 받아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는 국민은 지역 대표의 공약보다는 정당의 선동으로 선거를 하죠. 그러다 보니 선동정치가 되어 정치수준이 저하됩니다. 가능한 빨리 지역 대표뿐만이 아니라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선동정치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사회주의는 퇴보사상입니다. 과거 강요사회를 다른 형태로 답습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수주의는 정체사상입니다. 기득권이 아무것도 변하지 말자고 하자 사회주의가 진보라고 떠들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자본주의의 진보가 필요합니다. 그 외 자유주의 등의 현대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가 필요합니다. 역할주의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잡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노력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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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경제의 역할 (0) 2021/09/06 AM 10:12

경제의 역할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하고 매듭 져서 후대에 넘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시대의 세대가 과중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다소 여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한국은 전대가 물려준 산더미 같은 문제를 짊어져 불행하다. 몇 가지 알아보자. 노동자 착취 문제는 산업혁명 시대에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배려만 받고 있다.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배려만 받는 것은 상처를 치료 받지 못한 채 진통제만 먹는 것과 같다. 유교사상으로 인한 폐해는 광복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현대이념으로 넘어가질 못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외교, 역사, 교육, 여성, 아동, 세대, 갑을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문제는 아직 사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강요에서 자유로 사회가 바뀔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문민정부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출산율과 취업률이 박살이 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강요하는 수직사회에서 자유로운 수평사회로의 전환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나 자유가 이념인 이상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걸 그 시대에 해결했더라면 현 세대는 확실히 말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아쉽다.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교사상의 틀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유교 필터를 거치고 난 뒤에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니 더욱더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교 필터는 새로운 사상의 장벽이 되어 한국 사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한 나라다. 왜냐하면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와 본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드는 노동자 착취를 보고 질서를 강요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어떤 질서를 만들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춘다. 그 질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관계와 집단과 연대를 중시한다. 여기서 그 질서를 만드는 자만 달라졌다. 과거엔 왕과 귀족이었다면 현대엔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다. 아직 한국이 왕과 양반이 있던 시대에 쓰이던 유교사상에 머물러 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빠지고 자유를 외치는 이조차 사회주의식 억압과 강요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이해가 없으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제적으로 보수라 주장하는 정당이 권력을 쥐었었는가? 그 정당 구성원도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보수라 하더라도 다른 면면에서는 사회주의적 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의 계획경제도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나. 이후에는 그 시대의 향수와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 경제적으로 진보라 주장하는 정당도 열심히 선동해서 권력을 쥐었으니 한국정치는 선동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국정의 능력과 무관하게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다. 정책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던 국민이 얼마나 있었나. 애초에 정책만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상하다. 사상과 이념을 알면 정책의 방향성을 알게 된다. 그걸 먼저 알리는 게 우선 아니던가? 이런 선동정치의 근원은 역사적으로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의식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선동에 취약한 지역대표에 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유교의 틀 내에서 과거의 사상을 참고하여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자본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노동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도덕에 문제가 생기면 유교사상이나 다른 종교사상을 참고한다. 그리고 그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나 방향성을 결정하고 따른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결국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 못한 불완전한 사상이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다. 과거의 사상으로 현대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걸 안다. 과거 사상을 참고한 나로서도 그 사상의 위대함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 사상이라는 점은 달라질 수가 없다. 진실을 외면해서야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상들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해체주의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것 외의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PC주의는 과거 사상을 부정하며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불쌍하니까 배려하자를 강요하며 권력을 얻고자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걸 배제하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과거가 떠넘긴 문제와 현재 발생한 문제와 미래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답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실책은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빼앗긴 것에 있다. 경제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유지 및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본가가 그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착취 문제를 외면한 결과,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강탈당했다. 노동자 착취 문제는 부의 분배 문제다.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지 못한 결과가 노동자 착취다. 그렇다면 부의 분배는 누가 전문인가? 누구의 역할인가? 노동자인가? 정치가인가? 아니다. 자본가다. 경제 전문가인 자본가야말로 부의 분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가 문제를 방치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걸 방치했으니까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빼앗아간 이들은 고작 노동자를 배려 해주는 것에 머물렀다. 중국과 북한을 보면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공산주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을 모르니까 계속 배려만 해주고 있다.

 

더 이상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 놔둬서는 안 된다. 경제의 전문가인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와 정치가가 부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가 아닌 간호조무사나 영업사원이 수술을 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자 착취를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의사가 대리수술을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같다. 문제해결을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고 의사는 환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가는 경제 원칙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윤을 얻는 방법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방법도 알 것이다. 경제계에서 알뜰살뜰하게 절약한 돈으로 낸 세금을 정부에서 낭비하는 걸 보면 분통이 터질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걸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이제 경제도 진보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닌 진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역할을 맡는 이에게 정당한 부의 분배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자본주의의 진보를 해야 한다. 지금 보면 부의 분배 단계에서 별 필요가 없는 이들이 과도한 부를 얻고 있다. 그런 점을 개혁하고 개선하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경제의 진보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 빼앗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사상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를 생각하느냐였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라는 이름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에 몰두했고 공산주의는 생산자라는 이름의 노동자를 집단의 연대를 통해 배려하는 것에 몰두했다. 소비자를 생각하고 만든 상품과 생산자를 배려하며 만든 상품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이 전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품화 능력에서 승패가 갈렸다. 상품 가치 낮은 걸 무료로 나눠줘 봐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리 없다. 상품 가치 낮은 걸 해외에 팔아봐야 팔릴 리가 없다. 상품화 능력만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애초에 승부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자 착취를 방치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승리했기 때문에 그걸 방치하는 것이 옳다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게 잘못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도 진보해야 한다. 승패는 상품화 능력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품화 능력은 키우면서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착취는 하지 않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 역할을 경제의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경제는 경제에 속한 이들에게 올바른 부를 분배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경제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안전망을 통해 생존을 보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다.

 

모든 인간은 보다 큰 욕망을 가져야 한다. 욕망이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것이라 한다. 선과 악이나 물질과 정신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무엇에 대한 강한 바람이 욕망이다. 이런 욕망이 나쁜 행동을 낳는다고 하여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득권이 잘못을 저지르면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욕망이 작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큰 욕망을 위해 작은 욕망이나 욕구를 참는다. 몸을 위해 식욕을 참거나 성적을 위해 수면욕을 참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기득권의 잘못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라는 큰 욕망보다 사리사욕이라는 작은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이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던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악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이들의 사상 때문이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규정하나. 사회를 구성하는 건 사회에 속한 인원이 다른 인원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밖에 없으면 애초에 사회구성 자체가 안 된다. 도덕이나 질서로 강요하지 않아도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야 사리사욕이란 작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큰 꿈을 추구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여 행복하게 되자는 사상이다. 인간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하고 욕망이나 꿈을 절제하게 만드는 건 유교 같은 종교나 사회주의다. 욕망을 줄인 결과가 조선 말기고, 종교의 부패다. 경제에 속한 인간도 더 큰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어째서 경제는 물질적인 욕망만 추구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감각이든 한계점이 있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지나치게 높은 슬픔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감각을 최고로 즐기기보다 다양한 감각을 복잡하게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보수에 머무르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는 자본주의를 추구하여 국가의 기초체력인 국민의 상품화 능력을 키우고 국민의 행복을 부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며 즐거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성장은 경제가 주역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발전 방식이나 이윤 추구는 분명 우수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그런 방식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사상이다. 시장원리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여기서 수요란 무엇인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일정한 가격으로 사려고 하는 욕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욕구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인간의 본성과 사상이다. 선천적인 욕구와 후천적으로 욕구의 방향을 정한 사상이다. 예컨대 선천적인 식욕과 그 식욕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 알려준 사상이 수요에 있는 욕구의 근거다. 그런데 지능이 높은 인간은 사상으로 본성을 제어하거나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본래 벌레를 역겹게 느끼지 않는 이도 교육을 통해 역겹게 느끼는 것처럼 사상에 의해 감각이 바뀌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실상 욕구의 근거는 사상일 확률이 높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한에 처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상에 의해 수요가 결정된다. 내가 다루는 영역은 경제의 원리보다는 수요에 영향을 끼치는 사상이다. 가치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사상이다.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가? 자본주의의 진보는 그런 걸 바꾸는 걸 의미한다. 시장원리는 그대로 둬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파악을 해야 한다. 현상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한국 경제의 상황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경제참여인구의 감소는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핵심을 보면 그렇다.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경제참여인구 수가 줄어들 수가 없다. 상품이란 사람에게 필요한 걸 의미하고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기업에 필요한 능력이 되어 취업이 가능할 터이고 사물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사회에 필요한 걸 만들 수 있어 창업이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상품화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건 과거에 그 능력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단순 노동의 수요가 높아 굳이 상품화 능력을 갖추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창업이 수월하고 적은 임금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교육이 발전하기 전에는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풀이능력의 필요성이 적었었다. 그래서 사회에 필요한 걸 찾아 파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이들이 창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시대가 달라졌다. 기술이 발전하자 단순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어 취업 풀이 좁아졌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기업에 필요로 되어야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창업이 어려워지고 적은 임금으로는 만족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중소기업을 가느니 취업을 포기한다. 이직의 어려움을 아는 부모도 중소기업에 가는 걸 만류하는 실정이다. 능력이든 사물이든 수준 높은 상품화가 가능해야 창업이든 취업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 발전하자 교육이 체계적이게 되었다. 시험을 풀 수 있는 문제풀이능력에 구애 받고 문제풀이능력을 키워 진학을 하고 취업으로 수익을 얻었다. 창업을 하는 것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더 중요시되었다.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이 뛰어난 취업자만 늘어난 것이다. 이는 집단에 종속되는 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상품화 능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음에도 상품화 능력에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는 바람에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취업 풀에서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기업에 필요한 능력자의 수가 줄어들고 사회에 필요한 상품을 팔 수 있는 사업자 수가 줄어들면서 결정적으로 경제참여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났다면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무능한 기업은 진작에 사라져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이 되려 경제 참여와 경제 선순환을 막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근간이 되는 사상이 낡으면 이런 현상도 일어나는 법이다.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정보의 확산이다. 이것이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성장공식이 노출되었다는 점이 크다. 경제성장은 일종의 공식이 있다. 경제 수준에 따라, 국가 환경에 따라, 국민 수준에 따라, 선진국들이 경제를 성장했던 공식이 있다. 한국 또한 그 공식을 차용하여 성장했다. 많은 한국인이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로 인해 제국주의와 그를 야기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이 그런 흐름의 막차를 탄 자유진영의 막내다. 지금 한국은 제국주의의 폐해를 줄인 자본주의 공식을 본받아 성장했다. 노동자 착취(군사독재 아래 가발 생산 따위)와 기술의 발전(중공업의 발전 등)과 다양한 상품화(다양한 산업 진출)와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중국이나 동남아 등)을 돕는 것으로 한국이 성장했다. 이런 것이 전부 공개되었다. 어느 나라나 이걸 본받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이후의 성장공식은 미지인 상태다. 개발도상국은 성장공식을 아는데 선진국은 성장공식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확률이 높다. 그토록 성장했던 일본이 오랫동안 정체된 까닭은 새로운 성장공식을 만들어낼 사상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양적완화를 한다고 다방면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로 갔다고 한다. 지금 금융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그건 올바른 길이 아니다. 금융으로 돈이 오가는 것은 기초적인 국가생산력과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금융 자본주의를 통해 다양한 자산을 늘려나가더라도 자본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으면 오래지 않아 도태되어버린다. 이건 양적완화와 비슷할 정도의 임시방편이다. 개발도상국과 격차를 벌리기 위해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정보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다. 정보공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중국에 노출하여 중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수많은 중국의 산업스파이가 미국에서 활동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빼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가 공개된 이상 기술 격차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중국은 한국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그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능한 많은 국민이 자본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장 같은 거대 자본재를 소유한 이들만 자본가가 되어 노동자를 착취하며 성장했다. 하나 현재는 다르다.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들의 시작은 컴퓨터다. 소프트웨어로 부를 창출하여 하드웨어로 나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다 능력만 있으면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사회에 필요한 것을 찾은 다음 그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소에서 찾은 후 협력하여 생산하면 새로운 상품화를 만들어 자산을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상품가치가 높으면 착취를 하지 않아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걸 전제하지 않았다. 상품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상품화가 되는 능력을 키웠다. 그런 까닭에 많은 학생들이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며 집단에 종속되기만을 희망하게 되었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다. 만약 한국에서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을 통해 상품화 능력을 키웠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순위에 많은 한국인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실무자가 많다. 그 실무자가 교육만 조금 다르게 받았어도 우수한 경영자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경영자 아래에서 취업자리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취업자리로 인력난에 시달려도 외국인이나 자동화 시설이 있으니 걱정이 덜하다. 능력만 있으면 마음껏 자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도 된다. 선진국에 도달한 한국의 앞길은 이제 본받을 대상이 없다. 이제 한국이 직접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국가의 기초체력은 생산능력에 달려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국가의 기초체력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기초체력 부실로 무너졌다. 그런데 경제 양극화가 발생하면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및 교육수준 저하로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단순 노동이 필요하던 시대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준 높은 지성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늘어야 선진국은 기초체력이 유지될 수 있다. 기초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가능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란 상품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부가 흘러가는 걸 말한다. 자본주의의 가치판단기준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도이고 미덕은 그런 필요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능력을 가진 능력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드는 사물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러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알아보자. 하나, 부동산.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자전거래나 정치적 수단 따위를 통한 부동산 가격 뻥튀기를 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실상 이런 부동산 부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능력에 관련된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은 사람이 바뀌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의 능력으로 기업을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보다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인력파견. 위험의 외주화를 명분으로 실제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원래 이런 회사가 없더라도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위험의 외주화로 좀 더 이익을 얻어보겠다고 하다가 잘못된 부의 분배를 해버렸다. 불필요한 인원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을 신체로 비유하면 피가 흘러가다 중간에서 줄줄 세어 나오는 것과 같다. 실제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무능한 기업.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본래 이런 기업은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자본가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그리고 경제도 그에 맞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투자를 하여 대체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착취를 하지 않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하고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유능한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몇 가지 한국 경제의 상황과 해결방법을 살펴보았다. 상품화 능력을 키워 자본가를 늘리고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면 당면의 경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상품이란 장사로 파는 물건이나 매매를 목적으로 한 재화라고 한다.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람이 구매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물건이나 재화라는 것이 된다. 필요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품화란 즉 사람에게 필요로 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그 능력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사물의 상품화는 그 사물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당장 주위의 상품을 보자. 이 상품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나온 것일 것 같은가?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필요를 느끼고 구매할까? 그야말로 엄청나게 생각해서 나온 것들이다. 상품화하는 사람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들이야말로 정말 많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어째서 노동자는 착취했을까? 그건 관습적으로 노동자가 농노의 위치에 있어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주로 생산은 노동자가 하고 소비는 기득권이 했다. 그러다 시대가 흘러가 평등해지면서 노동자의 소비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관습은 유지되어 노동자일 때에는 천대하고 소비자일 때에는 우대하게 되었다. 참 씁쓸한 상황이다. 상품화를 하는 이들처럼 사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만큼 노동자에게도 사랑 받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식만 살짝 바꿔도 자본가는 인본주의자가 된다.

 

노동자도 능력을 상품화하여 자본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능력자와 사물을 상품화는 능력자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일단 알기 쉽게 과거의 구분을 사용하겠다.) 상품화 능력의 개발은 어린 시기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애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처럼 상품화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취업하고 창업하며 생산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연애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포기하거나 조건으로 만나 결혼하고 있다. 조건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건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 중매와 비슷하다. 중매로 결혼한 다수가 황혼이혼을 바랄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조건 결혼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걸 알 것이다.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상품화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취업이나 창업을 포기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사람의 삶 중에 노동시간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만족스러운 일자리가 아니어서 행복한 노동이 불가능하면 삶 자체도 불행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다. 사회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 또한 행복하게 해야 한다. 한국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많은 국민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추면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품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화 능력은 어린 시기의 교육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다룬 글에서 따로 체계적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간단히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 평가부터 달라져야 한다. 학생 능력의 평가를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만든 상품을 점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교사가 소비자가 되고 학생이 생산자가 된다. 이런 개념을 초기부터 인식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소비자인 교사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들 수 있는가? 지식은 이런 연구에 필요할 때 각자 알아서 수집해야 한다. 이것으로 상품화 능력과 가치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과거 교육 체계가 정돈되지 못했을 때에는 수많은 창업자가 나타났다. 수준 높은 학력이 없더라도 상품은 생산할 수 있었다. 되려 고정된 지식이 자유로운 사고를 막아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방해가 된다. 간단한 지식의 상품화를 시작으로 복잡한 지식의 상품화로 나아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도 차근차근 키워 나가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보통 기업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걸 대신한다. 이제 그걸 교육 단계에서 해야 한다. 이후에는 조별과제를 통해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고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아 각자 사물의 상품화와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운다. 교사는 소비자가 되어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하고 조장은 판매한 과제로 받은 점수를 계약에 따라 조원에게 분배한다. 과제에 따라 역할을 바꾸며 모두가 능력과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익힌다. 이것으로 체계화된 상품화 능력과 계약을 통한 거래와 올바른 부의 분배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걸 키워나가면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연구 결과를 봐도 그것과 다른 것을 조합해 새로운 상품화를 순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는 선동정치를 바꾸기 위해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것에 필요한 분야의 모임인 모꼬지에 속하여 분야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실제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의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이렇게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춰 한국이 전세계에 필요로 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불필요한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과거 특권계층인 성직자와 귀족과 비슷한 계층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은 무엇인가에서 3신분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외의 특권계층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음을 역설했다.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필요로 되지 않는 이가 과도한 힘을 가지는 것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범죄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경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가 없음에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필요하던 걸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이제 점차 자취를 감춰야 한다. 부동산 자전거래나 주식 장난질 따위를 하는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보면 부도덕하다. 사람에게 필요 없는 걸로 부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부도덕한 이들에게 투자나 지원은 잘못된 일이다. 시장원리는 수요와 공급으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그런 이들에 대한 수요가 줄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들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위해 정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런 안전망에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 수 있는 상품화 능력을 키운 다음 다시 경제에 속하여 이익을 얻으면 된다. 그래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경제는 그런 이들에 쓰이는 복지 비용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직종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해 기술의 발전을 늦추는 것이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된다. 팍팍 발전하면서 뒤쳐지는 이들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이롭다.

 

경제는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할 것이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유능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가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리에 맞지 않는 능력자는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모든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이다.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무능한 노동자가 고위직에 있게 하는 것은 유능한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업의 유연화를 주장하겠다. 무능한 기업은 도태되고 유능한 기업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기업의 유연화에는 반대한다면 내로남불로 볼 수밖에 없다. 노동계가 유능한 노동자와 무능한 노동자를 구분 짓지 않는 것과 경제계가 유능한 자본가와 무능한 자본가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은 같다. 어째서 착취로 유지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같은 그룹에 묶이는가? 천 원짜리를 이천 원에 팔 경우 착취할 수 밖에 없다면 천 원짜리를 오천 원에 팔 수 있도록 상품 가치를 올리면 된다. 그런 기업만 살아남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업의 유연화다. 이런 식으로 기업의 유연화를 하면 착취하지 않고도 부를 분배할 수 있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하나 유능한 한국인이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인 상품화 능력을 갖춰 상품 가치를 올리는데 전력으로 도전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유연화에 속할 기업은 인력파견도 포함된다. 굳이 그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설령 프리랜서의 형태를 띠더라도 능력에 대한 대가가 온전히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걸 정리하면 기존의 수익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질 수 있을 거라 본다.

 

올바른 부의 분배가 미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익이다. 부의 분배에 대한 불만은 정치로 이어져 기업에 대한 규제와 억압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거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안다. 사회에 투자하고 환경에 투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면 된다. 당장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후에도 경제계에 속한 무능한 기업은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면 이익임을 강조하겠다. 상품화 능력과 올바른 부의 분배로 경쟁자를 늘리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한국인의 경쟁상대는 한국인이 아니다. 전세계인이다. 전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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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진실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가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의 직무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노상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 깃발은 기만적인 것이리라. 그와 반대로, 행정가의 의무는 문제점들의 성격에 따라 그 추진 방법을 연구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목적지에 있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행정가가 목적지를 보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마음에 들더군요.

 

이제 웬만한 현상은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걸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한가요. 평가 받기 위한 자격증을 위한 공부는 정말 불필요합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데이터수집을 위해 몇 가지 방법도 찾았지만 힘들더군요. 사상의 상품화는 선동과 세뇌입니다. 필요하게끔 만들어 파는 게 사상의 방식이죠. 종교나 공산주의가 대체로 그렇죠. 그런 걸 할 수는 없습니다.

 

역할주의 사상부터 글을 다듬고 사상가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상대하는 게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체계화된 사상들이라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생각에 초점을 맞춰 양식이 될 글까지 다듬지는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꽤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괴롭다.

 

다음 글은 아직 모르겠네요. 쓸 주제야 차고 넘치니까.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됩니다. 자유적응이 필요한 분야가 많으니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가 평가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직은 계획에 없네요. 하나만 말하자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전문가에게 지나치게 휘둘린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이 굳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을 지지한 까닭은 그런 구태정치를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일 텐데 말이죠. 할말은 더 많은데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독재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는 유교와 비슷한 사회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입니다. 자유주의는 유교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상대하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동해서 권력을 얻고 사리사욕을 추구하겠다는 생각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자 하는 야망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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