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복지
복지는 사회의 기본 구조다.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복지가 있어야 사회가 유지된다. 복지는 행복과 이익을 뜻한다.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생활의
총칭을 뜻한다. 정리하면 인간의 조직화된 모든 집단생활은 행복과
이익이 기본 구조다. 국방과 정치와 경제 같은 분야도 사회의 기본 구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야들은 국가의 기본 구조로는 성립될 수 있어도 가족의 기본 구조로는 성립될
수 없다. 가족에는 그 분야들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국가와 회사와 가족과 같은 집단생활에 모두 포함되는
분야는 법과 복지로 한정된다. 사회는 평가로 조직되고 법 질서와 복지 체계로 구조가 유지된다. (평가는 인사 분야에만 속한 것이 아니므로 제외했다.) 예를 들어보자. 국가의 법과 복지와 회사의 사내규정과 사내복지와 가족의 가사분담 규칙과 휴가가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집단생활에도 반드시 법과 복지가
들어간다. 만약 법과 복지가 사라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체계가
깨져 집단생활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질서가 무너지면 문명이 죽고 체계가 깨지면 인간이 죽는다. 국가를 예로 들어보자. 법이 사라지면 마땅한 기준과 절차도 사라지면서 소통과 거래와 신용 등을 잃게 되어 갈등과 불신으로
인간관계가 죽는다. 질서가 무너진다. 그것으로 인간은 사회적 인간성을 잃고 짐승으로 전락한다. 문명이 죽는다. 복지가 사라지면 행복과 이익이 사라지면서 삶과 성장 등도 잃게 되어 저출산이나 자살로 사회가 죽는다. 체계가 깨진다. 그것으로 인간은 생존과 번영의 방법을 잃고 멸종한다. 인간이 죽는다. 회사나 가족도 마찬가지다. 법이 사라지면 회사와 가족이 죽고 복지가 사라지면
회사원과 가족 구성원이 죽는다. 예를 들어 회사 부도, 가족 붕괴, 갑질 퇴사, 학대 가출 등이 있을 수 있다. 법과 복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에 사회에 속한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집행된다. 국가의 법을 어기면 경찰이 체포하거나 군이 투입된다. 군의 무력을 넘지 못하는 이상 법의 집행을 막기는
어렵다. 국가의 복지는 어린아이에게 제공되는 교육을 떠올려보면
된다. 학생에겐 교육이 권리라 하지만 아기의 동의를 받지
않고 교육한다. 빈곤에 대한 지원이나 자살자의 구출도 마찬가지다. 강제다. 사회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 강제성의 정도가 달라진다. 국가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높고 회사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낮고 가족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거의 없다. 이처럼 사회에서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란 성질을 띠게 된다. 그런데 강제성은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성질을 뜻한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로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어 강제성이 악이 된다. 국가 체제는 강제를 잘못되었다 하는데 국가 유지를 위해 강제로 법과 복지를 집행한다. 모순된다. 이 모순을 개인주의 체제의 국가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 전에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집단주의는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가족주의, 혈통주의, 연고주의, 신앙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PC주의 등이 있다. 종교를 비롯한 구시대 사상 대부분이 집단주의에 해당한다. 개인주의는 집단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이 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속한다. 현대 정치는 자유주의를 보수라 하고 사회주의를 진보라 하는 것 같은데,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진보하는 문명의 흐름을 보면 집단주의인 사회주의가 보수나 퇴보고
개인주의인 자유주의가 진보다. 계급투쟁보단 문명의 발전도로 보수와 진보를 정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본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개인의 이익을 침해한다. 집단에 속해야 개인이 살 수 있고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 왕정, 신정, 전체, 공산 같은 체제의 국가들이 보통 그렇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이 집단의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을 개인주의라 한다. 집단에 속하지 않아도 개인이 살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이다. 그러나 한국의 체제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바로 그렇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최대한 자유롭게 능력을 펼쳐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이념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으로 원하는 정치가를 선출해도 선동정치나 부정선거가 아닌 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가 선출된다. 자본주의는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도 수요에
공급을 경쟁하게 되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소비자가 행복하게 된다. 이처럼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더라도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되려 개인주의 외엔 성립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집단주의 체제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 당해 이념이 붕괴되어 버린다. 민주주의가 집단주의 체제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투표를 하게 되어 개인의 주권이 훼손되게 된다. 자본주의가 집단주의 체제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에 개인의 소유물을 강탈당해 소유권이 훼손되게 된다. 보통 이런 이념 붕괴나 주권과 소유권 훼손은 독재국가나 공산국가에서 발생한다.
집단주의는 이타주의가 선이고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선이다. 이타주의는 타인의 의지인 모든 것을 말한다. 타인의 의지인 모든 것이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이 더 크다. 설령 본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명령으로 행해진 것은 타인의 이익이 더 크다. 그러므로 타인의 의지가 곧 이타주의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의지가 우선되는 집단주의는 이타주의가 선이 된다. 이기주의는 개인의 의지인 모든 것을 말한다. 개인의 의지인 모든 것이 본인의 이익만인 것과 같다. 설령 타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인의
의지로 행해진 것은 본인의 이익만인 것과 같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가 우선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선이 된다. 인간의 의지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가 결정되면 책임소재가 간단해진다. 타인의 의지로 행해진 것은 타인이 책임지고 본인의
의지로 행해진 것은 본인이 책임진다. 일반적으로 악이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가 없는 과한 이익을 말한다. 부당이득 대부분이 악에 해당한다. 명료한 책임소재가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갖춘 이익을 얻게 하여 악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타주의가 옳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그저 집단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다. 도덕은 진리가 아니고 이타주의도 진리가 아니다. 집단주의에서는 이타주의가 정당한 기준과 절차가 되고
개인주의에서는 이기주의가 정당한 기준과 절차가 된다. 한국은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이타주의가 옳다는 인식이 있으나 체제에서는 이기주의가
옳다. 그럼 관념과 체제의 충돌에 대해 알아보자.
1. 정치에서 세습은 왕정과 같이 집단주의에서 바르지만 민주정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지역구나 고용 세습을 시도하는 일이 있지만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그런 시도가 비판을 받는다. 2. 경제에서 담합은 노동조합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시장경제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노동자의 담합은 바르고 자본가의 담합은 그른 것은 체제가 다르기 때문으로 힘과 관계가
없다. 그렇기에 부유한 노동자의 담합은 권리가 되지만 관광지나
위수지의 가난한 자영업자의 담합은 비판을 받는다. 한국은 이념과 정치와 경제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이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였지만 노동은 아직도 집단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비정상적이다. 3. 교육에서 입시비리는 귀족주의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민주주의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입시비리가 많지만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그런 비리가 비판을 받는다. 4. 이성관계에서 정조관념과 남녀유별은 정략결혼 같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연애와 결혼의 사전작업에 필요한 관념이므로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정조관념으로 성을 죄악시하고
남녀유별로 이성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러다 개인주의 체제에 영향을 받아 중매혼이 줄어 들고 자유연애가 늘어나면서 출산율이 낮아졌다. 강요로 결혼하던 시대의 관념을 자유로 결혼하는 시대에
적용하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관념을 옳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더욱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단절시켜 출산율이 폭락했다. 5. 여성주의에서 강요는 탈코르셋이나 성인지감수성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꾸밈의 자유와 성적 자기결정권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여성집단을 위해 여성 개인에게 탈코르셋을 말하며 꾸밈을 죄악시하고
비혼을 말하며 이성관계를 멸시하고 있다. 사회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 성인지감수성을 강요하는데 그건 성인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유권 침해이기 때문에 자유인지가
부족한 것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성추행과 성폭행이 잘못된 것인데
거기에 특별하게 다를 성인지가 들어갈 곳이 어디에 있는가? 성인지의 성은 단순히 가부장에 세계관의 여성상의 여성성에 불과하다. 여성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형적인 집단주의로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6. 치안에서 감시와 검열은
간첩과 성범죄자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과거와 현재의 정치가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지만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그런 침해가 비판을 받는다. 7. 성문화에서 탄압과 검열은 풍기와 미성년 성지식 차단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개인의
자유권 침해와 미성년의 올바른 성관념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지만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그런 탄압과 검열이
비판을 받는다. 성문화 탄압과 검열은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성문화를
잘못되었다 배운 미성년은 성을 죄악시하는 잘못된 성관념을 가져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성관계를 멀리하고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유사연애산업이나
이성의 동성애에 빠져들게 된다. 이성관계 붕괴로 국가가 소멸하게 된다. 8. 시골에서 연상의 간섭과 명령은 장유유서와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자유주의와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시골이 소멸하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집단주의 관념도가
높은 시골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농업이 아무리 수익률이 높아도 연상의 명령을 받는 연하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가 드물다. 9. 사회에서 내부고발 멸시는 내부고발자가 배신자로 불리는 것과 같이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내부고발자가 칭찬 받는 것과 같이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한국에서 내부고발자가 고생하는 것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것이다. 횡령이나 배임을 방기하는 까닭도 내부고발로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옳고 그름이 정반대다. 보통 체제를 기준으로 범죄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관습법이 존재하나 체제와 충돌하면 체제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걸 고려하면 집단주의 관념에서 바르나 개인주의
체제에서 그른 것 또한 범죄에 해당한다. 그 범죄는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바르다 여겼으므로 단순한 범죄가 아닌 도덕적 범죄가 된다. 세습, 담합, 입시와 채용비리, 성 죄악시와 이성관계 단절, 국민 감시와 검열, 성문화 탄압과 검열, 연령차별, 내부고발 멸시, 횡령과 배임 방기 같은 것을 보편적인 도덕적 범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자유권 침해와 성 죄악시는 자유주의 이념을 붕괴시키고 출산율을 폭락시켜 국가의 문명과 국민에 해를 끼친 사상 최악의 도덕적 범죄다. 도덕적 범죄자가 함부로 옳고 그름을 말하며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성을 죄악시한다면 분노하며 논리로 단죄하겠다. 자유주의 이념을 붕괴시킨 자유권 침해라는 도덕적 범죄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을 말한다. 출산율을 폭락시킨 성 죄악시라는 도덕적 범죄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성을 죄악시하여 미성년 때부터 성관계를 막고 성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이성관계를 막고 성관계를 배우는 성교육을 막고 성관계를 즐기는
성문화를 막은 것은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된 미성년이 성년이 되어서도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게 한 것을 말한다. 한창 성욕이 들끓는 나이에 성을 잘못되었다고 배우는데
어떻게 올바른 관념이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성기능이 동작하기 시작할 때 대부분 성관계를 해야 한다. 성은 상품화되어야 하고 인간은 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악의적 의도 없이 성적 얘기만 꺼내기만 해도 성희롱이라 말하는 건 그저 성을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성은 죄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올바른 성관념이 자리 잡혀야 이성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할 수 있는 성관계를 맺으며 결혼하고 출산할 수 있다. 저출산은 복지 이전에 사상의 문제다. 아무리 복지로 돈을 쏟아 부어도 잘못된 성관념으로 나타나는 저출산은 막을 수가 없다. 관념을 바꿔야 한다.
한국의 불행은 간단하다. 집단주의의 옳고 그름과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임에도
사상가가 어떤 정리도 하지 않은 탓에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던 것이 체제에 악영향을 끼쳐 잘못된 결과가 나오고
있다. 끔찍하다. 정반대인 관념의 옳고 그름과 체제의 옳고 그름의
공존을 알기 쉽게 비유하면 물 속에서 공기로 숨을 쉬는 인간이 사는 것과 같다. 한국인은 물 속에 사는 인간이었다. 살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은 당연히 불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한국인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으면 멸종한다. 한국이 사이비 종교에 세뇌되거나 사회주의에 선동
당하는 일이 많은 까닭도 종교와 사회주의가 유교와 같은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비슷하니 선동 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저출산, 부자유, 애정결핍, 경제활동 둔화, 부정부패, 사회갈등, 지역소멸, 다양한 양극화 등 거의 모든 것이 사상가의 책임이다. 그런 사상가를 길러내지 못한 인문학과 사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한국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념과 체제 모두 개인주의로 진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국이 강대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호히 말하겠다. 아니다. 자유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규율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해야 개인이
최대한 성장하여 국민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민주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의사보다 개인의 의사로 정치가를 선출해야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적으로 올바른 정치가가 선출된다. 그릇될 경우 다음에는 다른 정치가를 선출하면 된다. 국민에게 정치가의 인사권이 있는 민주주의여야 개인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여 정치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자본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공동생산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수요에 맞춘 공급 경쟁 생산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성장하게 한다. 공급 경쟁을 해야 상품과 서비스가 품질이 올라가
국민인 소비자가 행복하고 높은 품질로 세계 시장에서 선택 받아 국가의 경제가 성장한다. 그걸 위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자유로운 생산 경쟁이 가능한 자본주의야말로 고품질
상품과 서비스가 가능하여 경제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인주의야말로 강대국가 경쟁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법과 복지는 사회의 기본 구조로 강제성을 띠고 있다. 강제성은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바른 것이 되나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른 것이 된다. 한국 같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성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주의 체제는 그걸 민주주의로 해결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의사로 정치가를 선출할 수 있다. 선출된 정치가는 법 제정과 복지 정책 입안을 주도하거나
관여할 수 있다. 개인의 의사로 선출한 정치가가 법과 복지를 만들면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된다. 이것으로 개인주의 체제에서 법과 복지의 강제성은 정당화되었다. 법과 복지의 만듦은 개인의 의사가 적용되어 개인성을 띠고 집행은 사회 기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성을
띤다. 법과 복지는 집행이 강제성일 띠더라도 개인주의 체제인
만큼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중시하여 법을 제정하고 복지 정책을 입안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보편적이고 무분별한 국민 감시와 검열은 악이다. 가능성만으로 간첩 검거를 위해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것과 성범죄자 검거를 위해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것은 논리적 구조가 같다. 전자에 분노하며 비판했다면 후자도 동일하게 분노하고 비판해야 마땅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을 감시와 검열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범죄의 위험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감수해야 한다.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그렇다면 판단은 어떻게 되는가?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판단된다. 판단이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므로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을
띠게 된다. 잠시 객관성에 대해 알아보자. 객관은 제삼자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일을 뜻한다. 그런데 정확히는 제삼자의 공통된 인식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제사자의 인식은 제삼자의 주관에 불과하다. 제삼자마다 다른 인식이 나오는 걸 객관이라 하기는
어렵다. 어떤 개인의 주관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그 주관을
제삼자의 공통인식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논리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면 주관도 객관이 된다. 정리하면 객관은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될 수 있는 논리를 갖춘 개인의 주관이나 제삼자의 공통인식이라
할 수 있다. 객관성은 그런 성질을 말한다. 물론 공통인식에 불과하므로 객관인 것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진리가 포함된 객관이 진리다. 제삼자의 공통된 인식이기 때문에 숫자야말로 왜곡되지
않는 한 보통 가장 객관적이다. 수의 계산식 자체는 대부분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다. 그래서 법과 복지는 수를 이용한 통계를 자주 인용한다. 객관성을 띤 법과 복지는 사회에 속한 일부 개인이 아닌 모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균형성을
띠게 된다. 법은 무죄를 주거나 죄질에 따라 형평성이 있게 양형을
결정하고 복지는 사회의 결핍에 따라 형평성 있게 행복과 이익을 지원한다. 법을 생각해보자. 살인보다 절도가 높은 형량을 받으면 살인범이 부당한 이익을 본 것과 같고 절도범이 부당한
손해를 본 것과 같다.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는 과한 이익이 악이 된다는 걸 상기하자. 살인보다 절도가 높은 형량을 받으면 절도에서 끝날 것이 살인까지 커질 수 있다. 어차피 높은 형량을 받을 것이니 살인까지 저지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이 커졌다. 모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형평성을 갖춰서 판결을 해야 한다. 복지를 생각해보자. 이미 행복과 이익이 충분한 사람에게 지원되는 복지는 과한 이익이 된다. 의미가 없다. 인간은 인간의 신체로 행복을 느끼기에 신체 이상의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가 없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은 뇌를 망가트려 인지할 수 없고 지나치게 높은 고통은 신경을 망가트려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이 정녕 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균형적인 행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보고 필요한 곳에 균형적으로
복지를 행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복지를 선별하면 행정력 낭비가 될 수 있다. 행정절차상 편의를 위해 보편복지를 행하고 세금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도 균형복지가 될 것이다. 예컨대 교육과 급식은 무상인 보편복지로 하고 세금으로
균형을 맞추는 균형복지가 행정절차가 더 편하고 비용도 적게 들 것이다. 이와 같이 법과 복지의 판단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거기에 개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다. 이를 배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배에 타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개인성을 띠나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강제적으로 선박평형수를 채우거나 비우고 사람과 짐을 필요한
곳에 머무르게 하거나 보관하는 것으로 강제성을 띤다.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 균형을 강제로 맞추는 것에는 개인의 의사가 중요하지 않다. 그와 같다. 법과 복지는 피해자 개인의 복수나 국민 개인의 행복을 위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일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포퓰리즘으로 감성법치나
감성복지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멋대로 짐을 싣다가 균형이 깨져 침몰하는 배와 같이 멋대로 주관적인 감성법치와 감성복지를 하면 균형이 깨져 사회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과 복지는 개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그저 단순히
사회의 기본 구조일 뿐이다. 정리하면 개인주의 체제에서 법과 복지는 다음과 같다. 만듦은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위해 개인성을 가지고 만들어져야 하고, 판단은 사회의 균형을 위해 객관성과 균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하고, 집행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강제성을 가지고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분립을 법에서는 삼권분립이라 한다.
법은 다음과 같은 구조다. 입법이 만들고 사법이 판단하고 행정이 집행한다. 입법이 개인성이고 사법이 객관성과 균형성이고 행정이
강제성이다. 이런 삼권분립으로 법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그러나 복지는 법과 비슷할 정도로 중요함에도 이런
구조가 없다. 개인성은 선거로 선출된 정치가가 복지 정책을 입안하는
일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괜찮다. 그러나 객관성과 균형성은 보건복지부와 사회보장위원회의 힘이 사법부에 미치지 못해 정치가가 입안한 복지 정책에 간섭하기 어렵다. 집행 또한 단순히 정책대로 집행할 뿐이다. 이와 같이 복지는 견제가 어렵기 때문에 정치가의
포퓰리즘에 지나치게 취약하다. 한국 정치가 포퓰리즘에 취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토지 민주주의로 인한 선동정치다. 토지 민주주의는 지역의 대표에서 정치권력을 주는 체제로 지역의 대표가 내세우는 정치공약은
지역의 이익을 위하게 되어 직접 이해관계가 토지 소유자인 10%에 불과해진다. 나머지 90%는 간접 이해관계
또는 아예 이해관계 자체가 없어 선동 당할 확률이 높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데 90% 정도가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토지 민주주의는 비정상적 민주주의가 된다. 행정은 지역 행정이 필요하기에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되어도 입법은 직접 이해관계를 위해
지역의 대표가 아닌 분야의 대표로 선출해야 할 것이다. 둘은 복지의 합리적인 권력 체계 미비다. 법과 복지가 비등한 중요도와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음에도 체계는 다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복지는 정치가의 포퓰리즘에 취약하다. 선거에 뽑히기 위해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워
세금을 펑펑 쓰기도 한다. 반대로 행정관료의 자의적 판단도 견제를 받기 어렵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복지 정책은 포퓰리즘이라 반박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준과 절차가 부족하니 관료의 의견에 정치가는 반민주주의라
하고 정치가의 의견에 포퓰리즘이라 말한다. 정치가는 간혹 정치가의 정책을 행정관료가 반대하면 반민주주의라며 비판을 하는데, 법과 복지가 비슷한 걸 고려하면 논리적으로 입법이 사법이나 행정의 견제에 불만을 가지며
비판을 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그럼에도 복지는 체계가 미비하여 그런 반론이 나오기 어렵다. 행정관료는 행정관료대로 간혹 정치가의 정책을 무조건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기준과 절차가 부족하니 갈등과 불신으로 인간관계가
무너졌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 또한 법의 삼권분립과
같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관료가 정치가를 견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관료가 권력을 갖는 만큼 관료 또한 견제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 관료는 행동의 책임을 정치가가 지기 때문에
다소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힘과 책임의 균형이 필요할 때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온 걸까? 분명 복지는 법과 비슷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권력은 그다지 없다. 변호사와 사회복지사의 자격과 대우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뭘까? 법과 복지의 구조 차이일까? 사회의 기여도 차이일까? 역할을 난이도 차이일까? 모두 아니다. 단지 복지의 주요 힘이 국가의 복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국가의 구조를 떠올려보자. 과거 국가의 사회 질서는 주로 국가의 영역이었던
반면 사회 복지는 주로 종교의 영역이었다. 고대 인류는 번개 불에 공포를 느끼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으로 공포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고자 했다. 그걸 이용한 것이 원시 종교다. 종교는 관혼상제로 인류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걸
주관하고, 사후세계를 주장하여 현생이 불행해도 사후나 후생에는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사랑을 외치고 빈민을 구제하고 고아를 길러내었다. 그렇게 사회 복지로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종교다. 과거 국가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귀족과 비등하거나 높았던 것을 고려하면 복지의 힘은 강대했다. 프랑스의 제1신분이 성직자고 제2신분이 귀족인 것을 생각해보자. 종교의 교리가 도덕으로 자리잡아 그를 기반으로 질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종교가 복지만으로 힘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민중의 지지는 복지가 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종교의 힘은 복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괜히 종교가 사회 복지를 행한 것이 아니다. 복지가 힘의 원천이었다. 그러다 현대 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국가 복지의 역할은 커져갔는데 국가 복지의 힘은 과거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법과 복지의 중요도는 비슷했음에도 힘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사회 구조의 관습으로 나타난 힘의 불균형이다. 종교의 영향력 감소로 힘 또한 감소하였는데 그 힘은
국가 복지가 아닌 의료계가 계승하였다. 문과와 의과의 힘이 법조계와 의료계로 양분된 것을 생각해보자. 과거 복지는 종교와 국가와 의료가 나눠 담당했어도 힘은 종교가 주로 쥐고 있었던 반면, 현재 복지는 종교와 국가와 의료가 나눠 담당하고
있으나 힘은 종교와 의료가 쥐고 있다. 국가가 복지를 총괄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종교는 과거 복지로 권력과 재력을 쥔 경험이 있으나 의료는 그런 적이 적어 권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머지 재력은 높아도 권력은 상대적으로
낮다. 의료계 출신 정치가의 수가 적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현재 정교분리로 종교의 정치참여가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복지의 정치참여는 국가 복지와 의료계가 했어야 했다. 문과의 법조계와 이과의 의료계로 나뉘어져 의료계의 경쟁상대가 법조계로 착각할 수 있는데 의료계의 경쟁상대는
종교와 국가 복지다. 의료계가 목적이 어떠하든 의사 수를 늘리는 것에 반대한 순간부터 권력을 포기하고 재력을 선택한 것과 같다. 만약 의료계가 권력을 얻고 싶다면 과거 종교가 세를
불려 권력을 얻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회 복지는 종교와 국가와 의료가 하고 있는데 힘은 종교와 의료계가 쥐고 있으니 복지 관료와 사회복지사는 책임은 있는데 힘은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복지 정책에 개입하는 힘은 있을 수 있어도 사법과도
같은 힘은 없다. 이 또한 사상가의 책임이다. 사회 구조 변화에 따라 복지 또한 새로 정립했어야
했음에도 과거 관습에 따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기준과 절차가 부족하여 각종 폐해가 나타난 것이다. 법은 법조계로 국가의 법 질서를 담당하는 분야로 통합할 수 있으나 복지는 종교계, 복지계, 의료계 등으로 분할되어 모두 권력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종교는 정교분리로 멀어지고 복지계는 애초에 힘이
없고 의료계는 권력보단 재력이 높다. 이를 정리해야 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종교는 분리되더라도 복지계와 의료계는 복지로 통합해야 한다. 그래야 복지가 정당한 권력을 얻는 것으로 삼권분립과 같이 복지권력 분산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다. 복지가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삼권분립으로 나눠
서로를 견제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복지가 가능해지고, 의료는 명확한 목적을 얻어 국민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의료가 의료과학으로 과학 분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사회의 역할로 보면 복지 분야다. 배움의 방향은 비슷해도 목적의 방향은 다르다. 정부의 부서도 보건복지부다. 그러므로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의료가 복지를 흡수하던 복지가 의료를 흡수하던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정계는 법과 복지의 개인성을 위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민주주의로 정치가를 선출되어야 한다. 법조계는 법 전문가가 모이고 복지계는 복지 전문가가 모인다. 그렇게 하여 정계가 개인의 자유를 책임지고 법조계가 국가의 질서를 책임지고 복지계가 국가의 행복을
책임지면 된다.
종교의 복지는 다양하다. 그걸 육체와 정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종교는 빈민구제나 고아원 운영 등으로 사회에 속한
인간의 육체를 건강하게 했다. 그러다 현대 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국가 복지와 의료계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물질 지원은 국가 복지가 담당하고 육체 건강은 의료계가
담당했다. 종교는 맹신으로 사회에 속한 인간의 정신을 건강하게
했다. 인간은 맹신하면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을 종교의 뜻대로 하니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드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정신은 건강할 수 있다. 종교의 이점 중 하나인 정신건강은 맹신에서 온 것이다. 흔히 종교를 맹신하는 신자를 보고 어리석다 말하는데
신자는 그걸로 평안을 얻는다. 맹신이 잘못되었더라도 그런 효과가 있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다 현대 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국가 복지와 의료계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고민상담은 주로 국가 복지가 담당하고 정신의학은
의료계가 담당했다. 그러나 맹신이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종교를 맹신하지 않는 사람이 정신적인 이유로 고민상담을 받거나 정신의학에 방문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특히 정신의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어 백안시될까 걱정되어 방문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맹신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단지 맹신하지 않는 똑똑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은 알수록 불행하다. 흡연히 해롭다는 것을 몰랐을 때엔 타인의 실내흡연을
불편해하지 않다가 알고 나서 불편해졌다. 아니까 불편함을 느끼고 불행해졌다. 정당한 근거 없이 잘못되었다고 알아도 불편함을 느끼고 불행해질 수 있다. 성을 죄악시하는 낡은 관념을 알게 되면 그것이 부당한 근거라도 성을 보면 불편함을 느끼고
불행해질 수 있다. 아니까 불편함을 느끼고 불행해졌다. 앎이 진리든 아니든 알게 되는 순간부터 아는 것이 부정되는 것을 보면 불편해진다. 한국에서 불편한 사람이 많아진 것은 단지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든 아니든 말이다. 한국은 행복도가 낮기 때문에 수준이 낮아서 불행한
국가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수준이 높은 진보한 문명의 똑똑한 국민이어서 불행했던 것뿐이다. 한국은 문명이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면서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인해
옳고 그름의 혼란이 발생하여 불행했고, 국민이 맹신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불행했다. 한국보다 발전이 느린 국가가 행복한 것은 대부분 아직 집단주의 체제에 머무르고 있으며
종교에 맹신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인이 그런 국가에 가면 대부분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문명의 진보에 따라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하고 종교에 맹신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맹신을 대신할 정신건강 대책이 필요하게 된다. 그걸 보통 국가 복지의 고민상담이나 의료계의 정신의학이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를 맹신하는 사람의 정신 건강과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정신 건강과 비교하여 최소한
비등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고민상담과 정신의학은 발전되어 일반화되어야 할 것이다. 잠시 의견을 하나 내겠다. 일부 정신의학은 모든 게임을 악으로 여기며 명백한 게임중독이 아닌 과몰입이나 단순 취미조차도
게임중독으로 몰아가며 게임을 질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래서 다소 신뢰도가 낮아졌다. 내가 게임을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치에 맞는 걸 말해야 한다. 다른 분야도 같은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정신의학계는 문화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기술의 책임으로 떠넘길
것이 아니라 기술에 적응하면서도 인간이 건강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게임으로 게임중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중독으로 나타나는 폐해를 게임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폰중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스마트폰의 탓만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탓은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걷거나 뛰는 일이 줄어들어 신체건강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교통수단의 탓만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기술이 가져다 주는 폐해로 기술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기술에 적응해야 한다. 정리하겠다. 이제는 국가 복지와 의료계가 통합되어 복지계가 되는 것으로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삼권분립과 같이 나눠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정립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게 복지가 가야 할 기본적인 길이다. 그 외 몇 가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행복한 가치 생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 주관적으로 사람이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면 행복하게 된다. 보통 인간은 바라는 걸 이룰 때 행복하다. 나 같은 경우 크게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나의 사상으로 인류를 바르게 안내하여 세상을 행복하게 바꾸고 싶다. 둘은 불로불로가 되어 영원히 우주를 떠돌며 인류를
퍼트리고 우주의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것으로 영원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셋은 이상의 이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런 바람을 이루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람은 사람마다 달라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도덕성이 없다. 도덕성은 도덕적인 품성으로 선악의 견지에서 본 인격과
판단과 행위 등에 대한 가치를 뜻한다. 흔히 행복한 것 자체가 도덕적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행복 자체에는 도덕성이 없다. 행복 자체가 도덕적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만으로 바른 것이라며 잘못된 복지 정책을 강행하기도 한다. 분명히 말하는데 정당한 행복이 바른 것이지 부당한 행복은 그르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죽이거나 덮치거나 빼앗는 걸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걸 정당한 행복이라 할 수 있는가? 타인을 불행케 하는 행복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가
없다면 부당한 행복으로 그르다 할 수 있다. 물론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가 있다면 그런 부당한 행복도 정당화될 수 있다. 예컨대 정당방위가 있다. 살해 위협을 받는 인간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죽이거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덮치거나
무기를 빼앗는 걸로 기쁘고 즐겁고 만족한다면 그 행복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예로 알아보자. 요즘 길고양이로 논란이 많다. 길고양이를 좋아하는 A의 행복을 위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 개체 수를
늘리는 것으로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B가 불행해도 되는가? 길고양이로 A는 행복하고 B는 불행했다. 이렇게 어떤 사안에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나타나면 정당방위와 같이 그것이 정당한지 알아봐야 한다.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라면 B가 불행해도 되고 아니라면 B가 불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정당한지 알아보자. 인간은 인류에 이익이 되는 생물과 손해가 되는 생물로 구분하여 대한다. 그렇기에 단순한 동물보호로는 인간을 불행케 하는 생물의 개체 수 증가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모든 생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근거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서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해충 또한 같은 논리로 정당화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길고양이는 인류에게 이로운가? 아니다. 길고양이가 생태계를 해치는 유해조수 중 하나가 되었으므로 인류에게 해롭다고 할 수 있다. 유해조수를 근거로 개인이 길고양이를 처리할 수는
없어도 기관이 처리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길고양이를 좋아하는 A을 위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B가 불행한 것은 A의 부당한 행복으로 B가 불행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길고양이 복지 또한 부당한 복지가 된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자는 측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측이 충돌하여 분쟁이 발생하면 주지 말아야 한다는 측의 말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어떤 사람은 길고양이를 중성화하여 개체 수를 늘리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데 중성화에도 세금이 들어간다. 특정 동물을 위해 중성화하는 비용이 세금으로 지불되면 다른 동물도 똑같은 논리로 지불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지 않으면 객관성과 균형성이 깨진다. 그래서 다른 동물까지 중성화하다 보면 세금이 무한이
들어간다. 그런 건 논리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길고양이와 다르게 집고양이는 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므로 인류에게 이롭다 할 수 있다. 길고양이는 해롭고 집고양이는 이롭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으면 집에서 키우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길고양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낡은 관념에 의해 애정이 결핍되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들이 길고양이를 좋아한다면 거주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정된 구역 내에서는 허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복지는 철저하게 객관성과 균형성을 갖춰야
한다. 마땅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가 불행해도 된다면 그것이 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법과 복지의 강제성은 민주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로 정당화되고 있다. 개인의 의사로 선출된 정치가가 법과 복지를 만들기 때문에 강제성이 정당화되고 있다. 이런데 법과 복지가 개개인의 주관과 어긋날 수 있는
객관성과 균형성을 갖춰서 만들어져야 할 까닭이 있는가? 있다. 법과 복지의 구조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판단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있으나 판단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있으므로 만들어진 법과 복지가 판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객관성과 균형성을 포함해야
한다. 정리하면 객관성과 균형성이 포함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된 법과 복지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정상적인 삼권분립이라면 객관성과 균형성을 잃은 법은 판단과 집행을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판단과 집행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를 갖춘 복지 정책을 입안해야 할 것이다.
복지는 객관성과 균형성을 갖추고 정당한 행복에 지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 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 체제와 무관하게 복지 정책에 어떠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복지가 개개인의 도덕과 무관하게 단순한 사회의 기본
구조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복지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므로 사회를 위한 복지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인간을 위한 복지는 사회 복지가 아닌 인류 복지다. 사회를 위한 복지는 복지 대상이 인간이므로 인간에게
행복과 이익을 주면 사회가 이로워지는 걸 말하게 된다. 모든 사회 복지 정책은 인간의 행복과 이익으로 사회가 이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행복과 이익이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인가? 행복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자.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행복 그 자체로는 주관적이어서
특정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소비하는 행복과 생산하는 행복으로 기준을 정해 분류해보자. 하나는 소비하는 행복이다. 가치가 있는 상품이나 재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욕망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상품과 재화를 구매하여
행복을 얻는다. 소비하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에 참여하여 얻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비자 상품과 노동력 상품 수요에 상품을 공급하여 얻은 이윤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여 행복을 얻는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하는 행복을 위해 돈을 지원하는
복지를 하게 되면 생산이 멈추게 되어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소비하는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다. 사회에 이롭지 않다. 대부분의 생산공정이 완전자동화가 되기 전에는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소비하는 행복을 위한 근거 없는 복지가 보통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잠시 돈에 대해 알아보자. 돈이면 대부분 소비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기에 금전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돈은 단순히 평균적인 물건의 가치를 수고
객관화한 물가와 반비례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물가가 오르면 돈의 가치라 내리고 물가가 내리면 돈의 가치가 오른다. 그것뿐이다.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로 물건을 거래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돈에 힘이 깃든 것일 뿐이다. 실질적인 힘은 돈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약속에 있다. 약속이 중요하다. 인간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도 보장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해치는 것은 돈으로 구매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예컨대 인신매매나 노동과 성 착취가 그렇다. 돈이 먼저가 아니라 약속이 먼저기 때문에 다른 약속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과 성은 착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본인의 노동력
상품과 성 상품은 반드시 본인이 소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노동력 상품과 성 상품은 거래되어도 괜찮다. 물가와 별개로 인간과의 약속이 깨지면 돈의 가치는 폭락한다. 돈이 아니라 약속이 먼저기 때문에 약속이 깨지면 돈의 가치가 폭락하는 것이다. 약속의 신용을 유지하는 것에는 무력과 지력(가능성)과 매력(수요)과 권력 또는 욕망이나 운이 있을 수 있다. 보통 전자가 화폐고 후자가 코인이다. 코인이 도박으로 불리고 화폐가 될 수 없는 것은 배경에 무력과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상자산으로 불리고 있다. 만약 본질적인 힘을 얻고 싶다면 돈에 휘둘리기 보다
약속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둘은 생산하는 행복이다. 가치가 있는 상품이나 재화를 비롯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것을 생산하는 것으로 욕망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으로 가치가 있는 특정한 것을 생산하여 행복을 얻는다. 생산하는 행복은 시장경제와 무관하게 생산하여 얻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장경제는 실시간 직접 수요를 중심으로 돌아가 수요에 필요한 학습이나 미래 수요를 위한 생산이나 수요가 낮은 생산이나 간접 수요를 위한
생산은 이윤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시장경제와 무관한 생산이 된다. 생산하는 행복을 위해 돈을 지원하는 복지를 하게 되면 생산이 지속되어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소비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사회에 이로운 편이다. 물론 그 생산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평가해야 한다. 이런 생산하는 행복이 보통 사회를 이롭게 하는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행복한 가치 생산이라 하자.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겠다. 하나, 수요에 필요한 학습을 하는 것은 보통 학생이다. 지원되는 복지는 보통 장학금이다. 학생은 학습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주입식 교육이 일반화되어 학습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학습은 지적 호기심 충족으로 행복을 얻는 행위다. 학습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학문에 따라 그 과정이 다소 험난할 수 있으나 힘들다는 것만으로 행복이 아니라는 논리는
등산도 행복이 아니라는 논리와 같게 된다. 등산과 같이 학습 또한 다소 힘들어도 보람 있는 결과가 나오면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게 된다. 이런 수요에 필요한 학습을 하는 학생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이후 가치 있는 걸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행복한 가치 생산을 돕는 복지가 된다. 물론 이런 학습 또한 사회에 이로운 정도에 따라 복지가 지원되어야 할 것이다. 보통 과학이 사회를 이롭게 할 확률이 높으므로 과학을
배우는 이들에게 높은 복지가 지원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실제 그러고 있다고 알고 있다. 잠시 자사고에 대하 의견을 내보겠다. 자사고 유지는 교육 양극화를 부를 수 있고 자사고 폐지는 교육 하향 평준화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이상적인 것은 자사고 폐지 이후 교육 상향 평준화인데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 특목고는 교육 양극화가 발생하더라도 유지되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 그러므로 자사고를 폐지하고 특목고를 늘린다면 높은 수준의 교육환경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와
사회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둘, 미래 수요를 위한 생산을 하는 것은 보통 임산부나
연구자다. 지원되는 복지는 임신과 육아에 필요한 지원비 또는
연구 지원비다. 임산부는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비혼이 유행하여 그것을 불행하다 오해할 수 있는데
힘들어도 보람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일 거라 본다. 이런 미래 수요를 위한 생산을 하는 임산부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다. 잠시 의견을 하나 내겠다. 임산부에게 복지가 제공되는 것은 타당하나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 임산부의 복지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 출산은 실현되었을 때 사회에 이로운 것이지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 사회에 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산부와 여성은 사회 입장에서 다른 존재다. 만약 여성 징병을 하게 된다면 임산부는 면제되고
나머지 여성은 징병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런 제도가 여성에게 임신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착각할 수 있어서 말해둔다. 만약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남성 또한 면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단지 현재 일반적으로 여성만 가능하니까 여성 임산부만
면제될 뿐이다. 임산부의 징병 면제는 남녀 차별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한 임산부 특혜다. 그런 가능성을 지닌 여성 또한 임신 강요를 받는 것이 아니라 특혜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을 뿐이다. 연구자는 연구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결과가 나오지 않아 초조할지언정 연구 자체를 불행하다
느끼는 연구자는 드물 것이다. 행복하기 때문에 연구한다. 연구하니까 행복하다. 이런 미래 수요를 위한 생산을 하는 연구자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이후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돈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생명공학이나 우주공학이
보통 그렇다. 그 외도 다양할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인류가
불로불사에 도달하고 우주를 떠돌 수 있는 우주선이 개발되어 모든 인류가 우주를 떠돌며 인류 종을 퍼트리고 우주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영원진리에 도달하길 바란다. 미래에는 모든 인류가 우주개척에 나서길 바란다. 연구자에 대한 복지는 사회뿐만이 아니라 인류도 이롭게 될 것이다. 셋, 수요가 낮은 생산을 하는 것은 보통 수요가 낮은 예술가나 장애인이다. 지원되는 복지는 생계지원비(정확히는 모르겠다)가 있을 수 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일부를 빼고 수요가 낮아 아무리
노력하여 품질이 높더라도 생계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수요가 낮은 생산을 하는 예술가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언젠가 가치가 있는 예술을 만들어 사회를 이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은 노동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노동력 상품의 수요가 낮아 아무리 노력해도
생계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수요가 낮은 생산을 하는 장애인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꾸준한 생산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다. 잠시 의견을 하나 내겠다. 장애인 복지를 위해 장애인에게 맞춘 직무를 만드는
것은 타당해도 이미 있는 직무에 가산점과 할당제를 넣는 것은 인간의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과 같으므로 잘못되었다 본다. 장애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산점과 할당제는 평가를
조작하기에 부당하다. 어떤 복지가 필요하다면 다른 형태로 지원되어야 할 것이다. 넷, 간접 수요를 위한 생산을 하는 것은 보통 사회기반시설이나 사회복지시설이나 노숙자나 수용자다. 지원되는 복지는 공원이나 고아원 등의 시설이나 급식 배급이 있다. 사회기반시설로 보자. 공원 같은 사회기반시설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복지에
해당한다. 이런 것은 특이하게 사람이 아닌 사물이 생산한다.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의 간접 수요에 사물이 생산하고
있다. 생산하는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에 부동산 복지가 어려울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사물 또한 특정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노숙자로 보자. 모든 노숙자는 아니지만 일부 노숙자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도박이나 마약으로 쾌락회로가 망가져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거나 각종 장애와 질병으로 생산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기에 생산하는 행복을 위한 복지에 적용될 수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도 일종의 간접 생산으로 취급한다. 물론 생산의 가치가 낮으므로 그에 대한 복지 지원도 많기는 어렵다. 수용자로 보자.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 주지 못한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생산하는 행복을 위한 복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범죄를 저지른 인간은 살아있는 것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그것도 일종의 간접 생산으로 취급한다. 물론 생산의 가치가 낮으므로 그에 대한 복지 지원도 많기는 어렵다. 생산 불가능한 사람은 둘째치고 타인의 존엄을 해친
범죄자에게 복지가 행해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복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복지는 개개인의 주관과 관계 없이 단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구조일 뿐이다. 그들에게 지원되는 복지는 그저 단순히 사회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법의 제정과 복지 정책의 입안이 개인성을 띠므로 복지 수준은 어느 정도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어도,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객관성과 균형성 측면에서
복지 유무 자체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기 어렵다. 정리하겠다. 수요에 필요한 학습이나 미래 수요를 위한 생산이나 수요가 낮은 생산이나 간접 수요를 위한 생산은 이윤을 얻기 어려우나 이런 이들의 생산은
사회에 이로우므로 복지가 행해지는 것이 타당하며 복지 지원의 수준은 기본적으로 가진 행복과 이익에 맞춰 균형적으로 제공되나 추가적으로 사회에 이로운
정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이걸 회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생산하는 행복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복지가 회사에 이롭다. 무작정 휴가나 회식을 하기 보다는 생산에 도움이 되는 시설이나 주거와 교통 또는 생산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해주는 것이 생산하는 행복에 도움이 되는 복지가 되어 회사에 이로울 것이다.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같은 보편적 복지를 제외한 복지는 이런 식으로 가치 생산의 행복을
객관적 기준으로 삼아야 사회에 이로운 균형 있는 복지 정책이 가능할 것이다.
생산하는 행복은 체제와 무관하게 복지정책이 적용될
수 있다. 이런 건 사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나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무엇인가?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을 말하며 개인이
개인으로 살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이런 체제에서의 복지는 개인이 개인으로 살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기본적으로 사회 복지는 세금을 받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세금을 받는 국가가 국민의 행복과 이익을 민간에게 떠넘기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본다. 특히 종교에 떠넘기는 것은 그들의 세를 불리는데
협조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집단주의 체제인 종교가
세를 불리면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 악영향을 끼친다. 코로나 사태에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던 사이비 종교인을 떠올려보자. 보통 종교인은 국가보다 종교가 우선되기에 그런 이들이 세를 불리며 국가에 해롭다. 그럼에도 2023년 소년원을 종교단체에서 맡게 될 거란 소식을 접했다. 암울하다. 만약 한국이 집단주의 체제였다면 그런 사이비 종교가
날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개인주의 체제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위하다 보니 개인의 자유를 위해 사이비 종교도 막을 수 없게 되어 사이비 종교가 날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체제의 집단은
막기 어려운 해악이기에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집단주의 체제인 집단을 경계해야 한다. 민간의 기부단체도 전혀 믿을 수가 없다. 기부금이 어떻게 유용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곳이 극히 드물다. 어떤 곳은 대부분의 기부금이 운영비로 활용되는 것을
보면 도대체 뭘 위해 기부단체를 운영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개인주의 체제인 만큼 개인이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기부를 할 수도 있다. 그걸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런 기부가 종교나 기부단체에 이용당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개인의 기부가 기부대상에게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부의 시장경제화다. 국가의 사회 복지는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판단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객관성과 균형성으로 복지는 계획경제와 유사하게 된다. 국가의 사회 복지가 계획경제와 유사한 만큼 민간의
사회 복지는 시장경제와 유사하게 되면 적절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민간의 기부가 시장경제와 같이 수요와 공급 체계를 활용하는 것이다. 순서대로 접근해보자. 복지가 필요한 대상을 선정한다. 대상의 성격과 능력을 기부상품으로 만든다. 만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기부금의 분배 기준을 미리 고지한다. 기부자는 기부 대상의 성격과 능력을 보고 마음에
드는 기부상품을 구매한다. 이런 흐름이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하나, 복지가 필요한 대상을 선정한다. 보통 생산하는 행복으로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이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일반 시장경제에서는 본인을 이롭게 한다는 근거가 있어야 수요가 생기지만 기부 시장경제에서는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근거가 있어야 수요가 생긴다. 둘, 대상의 성격과 능력으로 기부상품을 만든다. 성격과 능력으로 기부상품을 만드는 걸 보고 인간이 상품화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성격과 능력을 고려하여 장학금을 주는
것을 생각해보자. 성격과 능력만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인정보가 없이 익명의 성격과 능력에 기부하는 체계는
인간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격과 능력을 상품화한다. 그 상품의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본인이다. 성격과 능력은 특정 기관에서 검증을 거치면 된다고 본다. 학교나 복지기관 또는 은행이나 새로운 기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격은 평가자의 평가로 이루어질 것이고 능력은 성격이나
자격증 또는 창작물 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셋, 만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기부상품을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 등록하여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기부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주식을 하는 것이나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것과 같이 쉽고 편하게 기부할 수 있다면 기부가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넷, 기부금의 분배 기준을 미리 고지한다. 지금까지 기부단체는 기부금의 활용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이 드물었다. 더구나 횡령 같은 범죄도 언론에 자주 노출되었다. 그런 탓에 기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에 따라 기부금의 분배 기준을 미리 고지한다면 그런 불안감을 방지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가령 기부금의 5~10%는 앱 운영비로 쓰고 10~20%는 팔리지 못한 기부상품의 소유자를 위한 보편적 복지로 쓰고 나머지는 기부 대상에 지급되도록
자동화 체계를 갖추면 된다. 이러면 기부금의 활용을 기부단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자동화 체계가 고지된 분배 기준에 따라 자동적으로 운영비와 보편기부금과 대상기부금으로
분배할 것이다. 다섯, 기부자는 대상의 성격과 능력을 보고 마음에 드는 상품을 구매한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성장을
위해 전체적인 능력이 높아 사회에 공헌할 가능성이 있는 인재에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을 좋아한다면 과학 분야를 키우기 위해 능력을 보고 가능성 있는 과학자에게 지원하고
예술을 좋아한다면 예술 분야를 키우기 위해 작품을 보고 가능성 있는 예술가에게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취미나 특기가 마음에 들거나 성격이 재미있어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부상품 구매는 기부자가 기부대상의 성장을
보는 것으로 인재를 키우는 보람을 느끼고 기부대상은 기부 받기 위해 성장할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기부자는 선행을 했다는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고 사회는 생산성 있는 인재에게 복지가 지원되어
이롭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개개인이 자유롭게 기부단체가 아닌 기부대상에게 직접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부 시장경제가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하다 본다.
둘째, 불행예방
종교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세뇌로 얻는 행복은 괜찮은 걸까? 행복하면 그걸로 되는 걸까? 본인의 의지로 세뇌 당해 행복해지는 걸 부정할 수
있는 걸까? 분명 개인주의 체제인 한국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 그렇지만 개인주의 체제인 한국은 집단주의 체제인
종교와 상충된다. 그럼에도 개인이 행복하면 괜찮은 걸까? 깊게 생각했다. 결론이 나왔다. 개인으로는 괜찮다. 그러나 사회로는 괜찮지 않다. 만약 사회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종교에
세뇌 당하여 맹신하는 것으로 사고회로가 죽어 자유의지를 잃고 시간과 재산을 바치는 자기파괴와 그런 자기파괴를 선교로 전파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논리적으로 사회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마약에 중독되어 깊게 빠져드는 것으로 뇌가 파괴되어 자유의지를 잃고 시간과 재산을 바치는 자기파괴와 그런 자기파괴를 친애나 장사로 전파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마약이 허용될 수 없듯이 세뇌도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세뇌로 얻는 행복은 괜찮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약이 허용되지 못하는 걸까? 생각해보자. 마약으로 얻는 행복이 허용되지 않는 까닭은 단지 그 행복이 사회에 해롭기 때문이다. 하나, 자기파괴는 복지적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기에 허용할 수 없다. 자기파괴를 허용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사회 체계의 균형이 깨져 사회가 붕괴하게 된다. 자살과 같은 자기파괴를 막는 복지는 도덕적 근거가 아닌 사회 구조 유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다소 균형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극단적 고통을 겪거나
시한부에 한에서는 마약이나 존엄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실제 일부는 허용되었다고 한다. 둘, 전염성은 법적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기에 허용할 수 없다. 마약으로 인한 자기파괴를 본인만 겪는다면 복지적으로는 문제가 될지라도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기 어렵다. 복지가 사회 체계 유지가 목적이라면 법은 사회 질서
유지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질서를 깰 정도로 많은 수의 인간이 자기파괴를 하지 않은 이상 일부 개개인의 자기파괴는 질서에 큰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자기파괴가 전염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약의 자기파괴는 전염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파괴를 전염시켜 수를 늘리기 때문에 방치하면
자기파괴자가 늘어나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이처럼 자기파괴는 복지적으로 허용할 수 없고 전염성은 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뇌와 마약은 둘 다 그것이 개인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사회에서는 허용할 수 없다. 종교는 관습적으로 많은 인간이 믿고 있기에 이미
믿고 있는 걸 강제로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설득을 하거나 새로 믿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사회 복지는 사회에 해로운 개인의 행복을 멀리하고 사회에 이로운 개인의 행복을 권장하여
사회가 불행하게 되는 걸 예방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해로운 행복과 이로운 행복은 무엇인가? 집단주의 관념인 유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은
분명 개인에게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주의 관념은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여 체제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 된다.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명 개인에게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개인주의 관념은 개인주의 체제와 어울려 체제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 된다. 이런 것은 다문화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대부분 문명이 아직 집단주의 관념과 체제에 머물러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에 거주하거나 이민 온 이들도 대부분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집단주의 관념은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여 분쟁을
만들게 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종교적 이유로
프랑스인을 참살한 사건이 있다. 종교는 집단주의 관념만이 아닌 관념과 체제 둘 다 해당한다. 아직 집단에서 집단주의 체제를 유지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종교라는 집단주의 체제와 자유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가 충돌하여 사람이
죽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도 자잘한 부분에서 집단주의인
다문화는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게 된다. 히잡, 할례, 할랄 등의 행위는 문화 충돌이 아닌 체제 충돌이다. 집단주의 체제에서 나타난 문화가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한 것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것을
상기하자. 체제가 다른 다문화는 성립될 수 없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개인주의 체제를 가진 문명의
문화는 다문화가 성립되나 집단주의 체제를 가진 문명의 문화는 다문화가 성립될 수 없다.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체제의 충돌을 보고도 체제가 다른 다문화를 맹목적으로 허용하자는
주장은 그저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인 유교만으로도 벅차다. 정리하면 외국인 문제는 체제가 같은 다문화와 체제가 다른 다인종으로 접근해야 한다. 체제가 같으면 다문화를 존중하고 체제가 다르면 체제에 맞는 문화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사회문제가 된다.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 갖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복지다. 사회에 해로운 행복을 갖게 하면서 그것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지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는 개인이 이로운 행복으로 관념을 바꿔야 한다. 그럼 사회에 해로운 행복과 이로운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하나, 저출산. 출산율이 폭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동물의 생태학적 특징을 말하며 동물이 주거와 먹이가 부족하면 새끼를 낳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경제적 원인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애초에 동물은 대부분 대를 잇지 못하고 죽는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같은 인간의 생태를 보면 다르다. 동물의 생태를 근거로 한 논리는 인간의 생태를 근거로
한 논리로 논파된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빈부격차자 큰 국가도 한국보단 출산율이 높다. 그걸 보면 한국은 경제적 원인으로 출산율이 낮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이 원인이다. 차근차근 알아보자. 과거 조선은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과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에서 개인의 결혼과
출산을 결정했다. 그걸 위해 개인이 자유롭게 연애와 결혼을 하는 걸
막았다. 막는 데에는 정조관념과 남녀칠세부동석이나 남녀유별과
같은 관념이 활용되었다. 과거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얻지 못하고 도구로 취급되었다. 도구이기 때문에 여성의 순결은 새것의 징표가 되었다. 그것으로 정조관념이 나타났다. 정조관념은 여성을 도구로 취급하며 스스로 새것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정조관념을 세뇌하여
결혼 전 순결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남편 외의 인간에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정절을 세뇌하여 결혼 후 정절을 지키게 했다. 그 정조관념을 근거로 남녀칠세부동석이나 남녀유별을
세뇌하여 어릴 때 이성관계를 맺는 것을 죄악시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개인이 자유롭게 연애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유롭게 연애와 결혼을 못한 개인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혼과 출산을 했다. 개인은 집단이 정해준 상대와 결혼하고 집단의 의사에
따라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아들을 낳도록 강요당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천대를 받을 정도였다. 개인은 집단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다 한국이 되면서 개인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 따라 점차 집단은 개인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성을 남성의 도구로 여겼던 정조관념과 개인을 집단의 도구로 여겼던 남녀유별이란 관념은 남았다. 정조관념과 남녀유별 따위로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기
위해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멀리하는 관념을 교육받아 학습되었다. 미성년은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게 성을 탄압과 검열을 당했다. 이성과 성관계는커녕 성문화도 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성교육조차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전부 낡은 관념에 의해 자행된 도덕적 범죄였다. 그러자 실제로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을 가지고 이성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성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인간은 실제 이성과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아이돌이나 창작물 같은 유사연애산업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이돌이나 이성의 동성애 문화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까닭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러면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인간의 수가 급감함에
따라 출산율도 폭락하게 되었다. 정리하겠다. 낡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기 위해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단절시켰는데 개인주의 체제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면서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자 이성관계가 사라져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주의자가 그런 정조관념과 남녀유별을 올바른 여성상이라 인식하고 성인지감수성이라
말하며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새로운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성관계가 파탄이 나서 출산율이 더욱
폭락했다. 참으로 끔찍하지 짝이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성을 죄악시하며 성에 대한 탄압과 검열이
올바른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이다. 분명 성을 죄악시하는 것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미성년에게 성은 잘못된 것이라며 미성년이 접하는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사회에 해롭기 때문에 출산율이 폭락하여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 사회에 이로운 행복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친숙하게 여기며 자유롭게 연애하고 성관계를 맺고 결혼하는
행복이다. 성년의 성은 막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 이미 대부분 관념이 고정될 대로
고정된다. 미성년 때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세뇌 당하니까
대다수 성년이 되어서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이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일부는 이성관계를 맺더라고 다수가 그러지 않으니까 결혼을 하지 않게 되면서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미성년의 성관계와 성관계가 나타날 수 있는 이성관계를
죄악시해놓고 출산율 대책에 돈을 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답답하다.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념과 체계를 바꿔야 한다. 먼저 성을 죄악시하는 것을 모두 도덕적 범죄로 규정한다. 성문화와 이성관계에 대한 탄압과 검열은 도덕적 범죄다. 그리고 정조관념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나 남녀유별과
같은 낡은 관념을 부순다. 아기 때부터 모든 남녀를 붙인다. 특정 성별 학교를 전부 폐지한다. 학생 90% 이상이 연애와 성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그 절반 이상이 졸업 후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얻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미성년 부부의 부도덕함이 드러나 이른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현재 성을 죄악시하는 한국에서 이른 결혼을 하는 사람은 애초에 도덕을 신경 쓰지 않았단 말이 된다. 도덕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부도덕한 행위를 할 확률이
높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20대 이후에 결혼한 사람이 가정폭력을 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미성년 부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그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것일 뿐이다. 집안의 의사와 관계 없이 미성년이 멋대로 연애하고 결혼하는 걸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개인주의 관념에서 결혼은 이를수록 좋다. 왜냐하면 결혼과 출산을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넘칠 때 결혼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면 애정보다 조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조건 만남 결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어 애정결핍으로 인한 범죄가 있을 수 있다. 실제 그런 일이 있다. 그런 건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모든 개인이 이른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
모든 개인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런 행복을 위해 모든 학생을 위한 외모 복지가 지원되어야 한다. 심각한 성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치아교정이나 쌍수나 피부관리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게 아름다워지면 대부분 서로를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외모 복지를 하면 자존감이 올라가 자살률이나
학교폭력도 감소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자살이나 학교폭력의 원인이 학생의 낮은 자존감 때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쓸데 없는 데 낭비 말고 학생 자존감을 키워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부를 수 있어 안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인간은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인간도 물건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즐기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즐겨서는
안 된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미형이 아닌 대상을 괴롭히고 천대하는 것은 잘못되었을지언정 미형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오히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외모를 가꾸는 걸
막는 것은 서로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막는 것과 같다. 애정을 결핍시켜 이성관계를 멀리하게 하는 것으로 출산율을 낮추는 도덕적 범죄에 해당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막으면 안
된다. 몇 가지 출산율과 학생연애에 대한 의견에 반론해보자. 어떤 사람은 과도한 경쟁사회라 여유가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 사귈 여유는 있어도 연인 사귈 여유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냥 상대가 없는 거지 경쟁사회라 여유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다. 학생이 연애를 하면 학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사연애산업에 빠지는 시간과 실제 연애하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자위하는 시간과 성관계 맺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이성과 사랑을 해야 동기부여가 되어 학습효과가 늘어난다. 학습은 강요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 사회 입장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인간관계는 개인의
자유의지라면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다. 연령, 혈연, 동성 등 아무래도 좋다. 개인이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행복하다면 복지 체계가 깨지지 않아 복지적으로 바르고 법 질서가
무너지지 않아 법적으로 바르다. 오히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하나하나 간섭하며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잘못되었다. 그런 건 그냥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것일 뿐이다. 개인이 개인의 자유의지로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국은 이제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둘 경제활동 둔화. 경제활동이 둔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한다. 정확히 말해 고학력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한다. 일자리 자체는 있으나 학력이 높은 이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 탓에 누구는 일자리를 만들어달라 말하고 누구는 저학력 일도 하라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식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다. 고학력 노동자가 많아서 고학력 일자리가 부족하면
고학력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고학력 자본가를 늘리면 된다. 그럼에도 고학력자들이 자본가에 도전하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대기업이나 공무원 취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왜 그런 걸까? 그건 간단하다. 자본가용 교육이 아닌 노동자용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푸는 능력을 가르쳤기 때문에 창업을 시도하지 못하고 시도하더라도 실패하고 노동자나 공무원이 되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교육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였으나 현재는
교육 목적 불평등이 심각하다. 고학력자조차도 창업자가 아닌 대기업 노동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교육의 목적이 이미 정해져 버렸다. 처음부터 교육은 노동자용 교육이 아닌 자본가용 교육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창업이 가능한 사람은 창업을 하여 고학력
일자리를 늘렸을 것이다. 저학력 일자리는 이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되고 그 중간기간은 외국인 노동자로 매울 수 있기 때문에 저학력 일자리는 앞으로도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고학력 자본가와 그 자본가가 만드는 고학력
일자리는 미래를 봐도 반드시 필요하다. 고학력 일자리 부족으로 경제활동이 둔화된 것이라면 경제활동 둔화의 원인은 자본가를 길러내지 못한 교육이다.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현행 교육은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분명하게
나눠서 교육하고 있지 않은 듯 하다.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은 정반대에 가까울 정도이기 때문에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면 문제해결능력이 낮아지고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면 문제풀이능력이
낮아진다. 가령 문제풀이능력은 문제를 푸는 능력으로 주입식으로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시험으로 문제를 많이 풀다 보면 늘어난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풀면 풀수록 문제에 관한 관념이 답으로 고정되게 된다. 관념이 고정되면 될수록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면서 문제해결능력은 낮아지게 된다. 문제해결능력은 어떤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와 답을
만들어 해결하는 능력으로 문제를 많이 해결하다 보면 늘어난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해결할수록 새로운 문제와 답을 떠올리기 때문에 고정된 답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신속하고 정확하게
답을 떠올리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면서 문제풀이능력은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은 반비례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걸 분리하지 않고 교육하고 있다. 문제풀이능력은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풀기 때문에 만들어진 체계에 적응하는 것이 빨리
체계를 유지하는 현상유지에 적합한 능력이다. 보통 노동자에게 적합한 능력일 것이다. 반면 문제해결능력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고 새로운 답을 내놓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기에 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미래개척에 적합한 능력이다. 보통 창업자에게 적합한 능력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이걸 분리하지 않고 평가를
주로 시험으로 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문제풀이능력을 갖추게 되어 시장경제의 노동자나 공무원이 되게 되었다. 분명 현행 교육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활동을 둔화시키는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이걸 바꿔야 한다. 문제풀이로 평가하는 학생과 문제해결로 평가하는 학생으로
바꿔야 한다. 적성에 따라 시험으로 평가 받는 학생과 과제로 평가
받는 학생으로 나눠야 한다. 물론 과제는 표절이나 도용이나 외부의 도움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방식이 자리잡기 전에는 일부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 위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제에는 자본주의 구조를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조별과제를 할 때, 교사나 교수가 소비자가 되고 조장이 자본가가 되고
조원이 노동자가 되고 과제가 상품이 된다. 생산자인 학생들이 소비자인 교사나 교수에게 공급할 과제를 경쟁적으로 생산하여 판매한다. 판매로 얻은 이윤인 점수는 자본가인 학생이 과제의 기여도만큼 노동자인 학생에게 분배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학생은 부정부패가 일어나는지 감시한다. 이런 역할을 과제마다 매번 바꿔가면서 자본주의 구조를
학습한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기초적인 개념을 학습하여 실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적응한 학생 중에 자본가 적성에 맞는 학생은 창업자가 되어 고학력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면 교육이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분리해서
가르치고 적성이 맞는 이에게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며 조별과제에 자본주의 구조를 도입하여 자본주의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 고학력자 창업자가 늘어 고학력자 일자리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창업자를 위해 사회는 이런 창업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여 공정경쟁이 가능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불행을 예방할 것은 많다. 한국은 관념의 옳고 그름과 체제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였었기
때문에 관념만 바꿔도 대부분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활동 둔화에는 고학력자 일자리 부족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있을 수 있다. 갑질이나 꼰대질 같이 말이다. 그런 갑질과 꼰대질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연령이나
지위로 차례를 정하는 것이 올바르다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를 불행하게 하여 생산성을 낮추는 것으로 사회를 해롭게 한다. 이제는 갑질이나 꼰대질을 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한국은 장유유서와 같이 예의가 복종의 예였기 때문에 예를 갖추면 상대에 복종한단 느낌을 받아 예를 갖추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봉사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봉사하는 사람에게
봉사 받는 사람이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분명 복지는 사회의 기본 구조로 사회 복지에 감사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에 감사를 느끼는 것은 선거권에 감사를 느끼는
것과 같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봉사를 하며 친절을 베푸는
것에는 감사를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예를 갖추는 것을 개인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이외 부자유, 애정결핍, 부정부패, 사회갈등, 지역소멸, 다양한 양극화 등의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나타난 사회적 불행은 개인이 낡은 관념으로 나타나는 사회에 해로운 행복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가지고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갖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런 식의 불행예방은 거의 예산이 들지 않는 초고효율의 복지가 될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 유지
오랫동안 노동자와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인권운동이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그들은 천대를 받고 있다. 기묘한 일이다. 부유한 노동자는 귀족노조란 말을 들을 정도의 이익을 얻어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가난한 노동자는 참혹한 환경에서 죽을 정도로 갑질과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한 여성은 가산점과 할당제로 능력 이상의 자리를
얻는 이익을 얻어 역차별이란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 여성은 비참한 환경에서 성을 비롯한 다양한 학대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쁜 아동은 범죄를 저질러도 촉법소년으로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아 촉법소년을 폐지해야 한다거나 아동에게 매질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착한 아동은 보호자의 감시와 검열로 자유권을
침해 당해 선거권과 성적 자기결정권도 없는 상황에서 명령대로 로봇처럼 공부만 하고 있다. 굉장히 불균형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그건 간단하다. 노동자와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인권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이권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인권운동을 한 게 아니라 운동자나 대상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이권운동을 하니까 노동자와 여성과
아동 전체의 인권이 오르지 않고 일부의 이익만 주로 오르는 탓에 이런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 노동운동을 정치체제로 비유하면 신분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평민과 노예에게 배려와 혜택을 늘리자고 주장한 것과 같다. 만약 노동자가 인권운동을 했더라면 자본가가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인 것처럼 노동자 또한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대해달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등해질 수 있다. 그렇게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었다면 자본가는 계약 이상의 요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도 상품 임대로 수익을 얻었기 때문에
소비자 상품 임대와 노동력 상품 임대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고 소비자 상품과도 같이 노동력 상품을 소중하게 다루며 계약을 준수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력 임대 상품을 계약과 다르게 활용하면 계약위반으로
큰 위약금을 내게 했으면 되었다. 그러면 포괄임금제도 사라졌을 것이다. 계약만큼의 노동만 요구하고 계약 외의 노동은 추가계약으로 정당한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 또한 소비자가 기업에 상품의 추가
임대를 무료로 달라고 하면 초기 몇 번은 서비스로 가능해도 계속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 임대 상품과 소비자 임대 상품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면 노동자 착취가 나타날 수가
없다. 또한 노동유연화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기업유연화를
주장했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대등한 상인이기 때문에 노동력 임대 상품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기업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천대 받는 노동자의 위치에서 이익만을 요구했다. 자본가에게 종신고용으로 종속되어 많은 배려와 혜택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이러나 현대의 노동자가 농노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여성도 다르지 않다. 여성인권이 주장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이런 것이다. 운동장 자체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에서 계속 이익을 요구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평평해질 거라고 주장하는 게 바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논리다. 어처구니 없다. 대놓고 이권운동이라 말하고 있다. 만약 인권운동이었다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관계를 위해 처음부터 평평한 운동장에서 공정경쟁을
하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권운동이기 때문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주관적으로 평평해질 때까지 이익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권운동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평평해지더라도
그들은 기울어졌다 말하며 이익을 요구할 것이다. 아동의 경우 아동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동이 주류가 아니어서 보호자의 입맛대로 돌아가고 있다. 아동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동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아동이 이익만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버리는 바람에 아동의 위치가 천대받는 위치에서 변하지 않은 탓에 보호자가 아동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감시와 검열을 하고 보편적인 인권에 속하는 선거권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동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동이
천대 받는 것을 방치하고 아동의 이익이라 생각되는 학생인권조례 등을 추진했을 뿐이다. 실제 아동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심한 속박을 당하며 불행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끔찍하다. 인권과 이권의 차이는 강제성이다. 인권이라면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으나 이권이라면
강제성이 없다. 타당한 논리가 없으면 들어줄 이유가 없다. 지금 PC주의 같은 다른 인권운동도 이권운동이기에 천대 받는
위치에서 이익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등하지 않기에 계속 천대 받고 계속 천대 받기에 계속 이익만 요구하여 이익은 얻는데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책임을 회피하여 이익과 의무와
책임을 지는 이들이 역차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혼란을 부추겨 균형이 깨지면서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
노동도 이제는 노동자 개인을 위해 개인주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자본가는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어 서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시장경제에서 팔리지 않는 노동력 임대 상품을 소유한 노동자는 생계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억지로 노동자를 종신고용을
하게 하거나 일부 노동자를 위해 가산점이나 할당제를 도입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사에서 할 것이 아니라 복지에서 해야 한다. 인사의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흐름을 망치게 된다. 만약 남성이나 여성이 징병이나 임신으로 경력단절이 되어 노동력 상품의 가치가 낮아져 시장에 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시장의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할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시골 가산점? 반대한다. 유공자 가산점? 반대한다. 군인 가산점? 부활에 반대한다. 여성 가산점? 반대한다. 할당제? 전부 반대한다. 사회를 조직하는데 쓰이는 평가를 조작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평가는 오로지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만 봐야 한다. 그래야 개인주의 체제의 공정경쟁이 가능하다. 인간에 대한 복지는 인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이 생리나 출산으로 공정경쟁에 불리할 수 있다. 그걸 인사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복지로 해결해야
한다. 남녀 모두 휴가를 주가를 주는 것으로 평등하게 대하여
생리와 출산 휴가에 부담감을 줄이면 된다고 본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최저임금 아래의 임금을 받아 생계 유지가 어려워 행복과 이익이 낮을 수 있다. 그걸 위해 최저임금을 일괄적으로 올릴 것이 아니라 복지로 일괄적으로 보충해준다. 사회의 평가를 간섭할 것이 아니라 복지로 사회의
균형을 맞춘다. 그러면 시장경제는 온전하게 작동될 수 있다.
본래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면
노동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나뉠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임대 상품의 단기계약과 장기계약으로 나뉠 것이다. 통상 상거래를 떠올려보면 단기계약은 계약기간이 짧으므로
계약비용이 높을 것이고 장기계약은 계약기간이 길게 되어 장기고객이 되므로 계약비용이 낮을 것이다. 장기고객 할인요금을 떠올려보자. 그게 원래 시장경제에서는 당연하다. 단기계약은 안정성이 낮은 대신 계약비가 높고 장기계약은 안정성이 높은 대신 계약비가 낮다. 그렇게 되면 단기계약을 하는 사람은 재계약이 수월할
정도로 능력이 높기에 단기계약을 맺는 것이므로 노동유연화가 나타날 수 있다. 장기계약을 하는 사람은 다소 이익이 낮더라도 안정성을 위해 장기계약을 맺을 것이므로 낮은
계약비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러면 연공서열로 능력과 무관하게 높은 비용을 받는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연공과 무관하게 단기계약으로 높은 비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대기업 노동자의 노동자 임금은 크게 오른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적게 올라 임금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산업계가 지적할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장유유서 관념이 만든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과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의 담합이 만든 격차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노동의 개인주의
체제화다. 애초에 노동자 개인을 위해서라면 이런 식으로 단기계약과
장기계약으로 구분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은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종신고용과 정규직을 옳다는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능력이 있는 노동자조차 무기력하게 종속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하지 않은 종속관계가 아닌 대등한 거래관계가 되어야 한다. 낡은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자본가에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 노동자를 아직까지도 차별 받게 하고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노동이 개인주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 국가의 부서 또한 고용노동부에서 공정거래부로 바꾸어
노동자와 자본가 둘 다 노동력 임대 상품과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대하는 것으로 평등한 관계를 구축한 후, 시장경제에 팔리지 않는 노동력 임대 상품을 소유한
노동자가 겪는 불충분한 행복과 이익은 복지로 지원해야 한다.
복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복지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불로불사다. 인간은 육체로 행복을 느끼기에 육체가 노화되면 행복도
노화된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어려져야 한다. 나는 불로불사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면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몸 전체가
녹아서 나비로 새로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그와 같이 유전자 설계에 따라 기억을 보존하면서 육체 재구성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 성장과 같이 자연스럽게 어려져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진화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지향적인 복지는 생명공학이 된다. 모두 진화하여 우주에 진출해 우주개척에 나서길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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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정리하고 글을 쓰는 것이 마치 사막에서
사막의 모래와도 같은 만물을 보고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논리를 생각하며 길을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사막에서 지도를 보며 길을 걷는 사람과 지도를
만들며 길을 걷는 사람이 같은 속도로 걷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노력하고 있고 쓸모 있으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행복하고 싶어요. 아, 행복하고 싶어요. 아아 행복하고 싶어요.
아마 개인주의가 가장 진보적인 사상일 겁니다. 대부분 집단주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좌파와 우파 타령을 그만 보고 싶어요. 도대체 집단주의 따위가 어떻게 진보가 될 수 있나요? 정말 슬픕니다.
다음은 외교입니다. 복지가 생각보다 생각하고 정리할 것이 많았네요. 그 다음은 게임이나 만화 아니면 다른 겁니다.
잠시 메타버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의견을 내볼게요. 일반 성범죄는 물리적 강압이 있어 성추행과 성폭행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로 성립될 수 있으나 익명인 메타버스 내의 디지털 성범죄는 물리적 강압이 있을 수 없어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로 성립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냥 차단하면 되요. 어떤 물리적 제약도 없음에도 단지 주관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는 이유로 강제성이 있는 법적 처벌이 가능해지면 법이 객관성과 균형성을 잃게 될 것 같네요. 개인의 표현의 자유도 과도하게 침해될 것 같고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물리적인 강압을 받지 않는
디지털 내에서는 그냥 시스템으로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봅니다.
남성에게 여성은 도구로 이용당했다는 이유로 여성이
남성을 기쁘게 하는 게 잘못되었다 말하기도 하는데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겁니다. 되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 잘못된 거예요.
지금까지 의회가 행했던 그리고 행하고 있는 국민
감시와 검열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 명분으로 자행되는 것으로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범죄이기 때문에 도덕적 범죄라 칭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 성 문화 탄압, HTTP 검열, N번방 방지법 등과 같은 악법은 도덕적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런 도덕적 범죄자는 사상가의 부재로 인한 결과이므로
처벌을 주장할 수는 없어도 악법 폐지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악법들을 폐지해야 합니다. 어떤 자는 악법도 법이라는 조작된 말을 언급하며
악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명확한 이념이 있는 질서와 체계가 바로잡힌 국가에서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 있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잘못은
명백한 악으로 이런 법은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삼권분립에 따라 의회의 폭주로 나타난 이념붕괴는 견제 받아야 마땅하므로 사법과 행정은 악법을 어기는 일반인을 지켜줘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