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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작과 언어 (0) 2024/09/30 AM 12:07

창작과 언어






1. 언어


[창작: 1.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낸 방안이나 물건.]


[언어: 1.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언어는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사물: 사과]라는 원료를 관찰하여 맛있는 나무 열매이라는 특정 범주와 관점이 담긴 의미를 부여하고 [소리: 사과]라 부르는 것으로 사과라는 언어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면 창작이 된다. 수많은 언어는 전부 그런 식으로 창작되었다. 언어들이 모여 일정한 원리로 조직화가 되면 언어 체계가 된다. 이것이 한국어 같은 일반적인 사회 언어다. 이런 언어를 소리로 표현하면 음성이 되고 글자로 표현하면 문자가 된다. 이렇게 창작된 언어로 인간의 자아는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한다.


모든 창작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창작에 있어 언어의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일반적으로 인간 외의 동물은 언어를 못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다. 그렇기에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나 고양이가 언어를 모르는게 아니다. 일정 이상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언어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개나 고양이의 훈련이 가능하다. 단지 거기에는 체계가 없거나 부족하다.


인간에게 언어 체계가 담긴 학문이 없다 가정하자.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하겠는가? 그야 처음부터 언어를 창작하고 창작한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 개나 고양이가 바로 그런 상태다. 개나 고양이도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각 개체가 처음으로 만든 언어다. 개체가 창작한 언어를 일일히 공유하고 다녀야 한다. 특정 개체가 대상을 보고 짖는 것을 다른 개체가 보고 학습한다. 특정 개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멍멍!’으로 부르는 구나. 


그들에게 언어는 매번 새로운 창작과 공유다. 그렇기에 체계가 없어 인간은 그들의 언어를 번역할 수 없다. 개체마다 소리가 다른데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원시 부족 언어를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보다 체계가 없을 것인 짐승의 언어는 난이도가 너무 높게 된다. 물론 인간 외 사회 동물은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을 수 있으나 굉장히 조약할 것이다. 그런 조악한 언어 체계도 조금만 사회가 달라지면 아예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와 민족마다 언어 체계(한국어와 외국어)가 다르고, 지역마다 언어 발음(사투리)이 다르다.


만약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직접 언어를 학습시키는 것이 맞다. 인간도 언어를 익히지 못하면 대화가 안되는데 어떻게 짐승이 언어를 익히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런 언어 학습이 바로 훈련이다. 인간이 특정 행동을 보고 ‘앉아!’나 ‘손!’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개나 고양이가 학습하고 따라한다. 구강구조와 소리 인식 구조의 차이로 발음을 못하여 표현을 못하고, 지능의 한계로 그 이상이 어려울 뿐이다. 그것이 언어 학습임을 이해하고 가르친다면 좀 더 체계적인 학습으로 좀 더 깊이있는 대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능이 높은 동물은 언어 체계 학습이나 공유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랑우탄은 인간의 언어를 수화로 익히기가 가능한다고 한다. 수화를 익힌 오랑우탄은 다른 오랑우탄이 수화를 배우려 하지 않아 우울해 했다는데 그야 당연하다. 갑자기 외국인이 외국어 가르친다고 하면 인간도 배우려 하는 인간이 많지가 않을 것이다. 범고래는 인간의 위험을 범고래 사회에서 공유하고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범고래가 어떻게 같은 규범을 가지는지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는데, 인간의 거주지가 매우 많고 범고래 행동 반경이 매우 넓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다. 


동물 언어를 고려해 언어의 레벨은 크게 언어 개별와 언어 체계로 나누고 세분화하여 기본 언어, 체계 언어, 문자 언어, 학문 언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학문 언어로 학습한 인간이 다른 종류의 언어를 곧잘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른 종류의 언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짐승은 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할까라며 궁금해한 것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은 언어를 매번 새롭게 창작하고 공유한다. 이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모방이 디폴트라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다. 창작이 디폴트다. 


언어가 가능한 모든 생물은 관찰한 사물과 현상을 독자적인 표현법으로 창작할 수 있다. 지나치게 독자적이라 아예 대화가 안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다. 그럼에도 인간이 모방을 디폴트라 여겼던 것은, 오랜 지배 체제 속에서 지배자의 주장을 모방 교육으로 모방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형성에 있어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모방 교육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디폴트는 모방이 아닌 창작임을 이해하고 창작 교육을 해야 인간이 창작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다. 




대상의 관찰부터 개체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아(이하 자아)는 대상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사과라는 대상을 관찰할 때 [사물: 사과]를 보고 관찰한다. 그러나 개체마다 관찰한 사과를 다르게 표현한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색이나 맛도 다르게 표현한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실제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가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관찰 지점이 다르다. 외부 사물이 아닌 내부 세포 신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자아가 사물로 관찰한게 아니라 세포 신호로 관찰하게 되면 다른 세포 신호가 섞이면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왜곡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으면 사과의 생김새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다른 인간과 다르게 표현하게 된다. 다른 관찰은 다른 표현이 되고, 다른 표현은 새로운 표현이 되어 창작이 되게 된다. 모든 표현이 기본적으로 창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물 (실제)    [----------]

언어 (객관)        [--------]

자아 (주관)   [-----]


실제 사물을 객관적인 언어로 주관적인 자아가 관찰하면 다른 표현이 나온다. 이런 현상은 자아가 인간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물 -> 자아가 아니라 사물 -> 육체 -> 자아로 이어져 자아가 사물을 육체라는 관찰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에 육체가 다르면 관찰 결과가 다르게 된다. 그렇다고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인 것도 아니다.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라고 하기에는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다. 공을 좌표값 계산해서 바로 정확히 던질 수 없다거나, 육체 내 세포의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은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라 뇌내 판단 기관이기 때문이다. 사물 -> 육체 -> 뇌내 네트워크 -> 뇌내 판단 기관(자아)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로지 자아가 판단만 한다고 해도 모순이 없다. 자아가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반복해서 던지는 까닭은 어떤 판단을 해야 공이 정확히 던져지는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잠을 원할 때 바로 잘 수 없는 것은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지 실제 실행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내 판단 기관인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인식하면서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된다. 자아는 세포 신호를 언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아는 언어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세포 신호가 왔다 갔다 해도 자아는 그것이 언어로 인식되게 된다. 언어화된 세포 신호는 뇌내 네트워크에 프로세스의 성질로 기억된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기억이 데이터로 저장된다면 모순되는 현상이 지나치게 많아진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을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문득 떠오르는 발상이나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동작들은,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세포 신호의 경로와 공정을 거쳐 자동적으로 동작했다고 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간의 현상을 많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 약의 효과로 나타난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로 기록된 상태에서, 위약을 먹고 진짜 약이라 착각하면 당시 기억된 프로세스가 동작하여 세포 신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으로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아는 그런 기억을 실시간 활용하면서 단순한 판단이 아닌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잠시 ‘단순한 판단’에 대해 설명하겠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이라 추론한 까닭 중 하나는 단순한 생물도 그러한 판단을 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다. 작은 생물이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을 하는 것과 같이 인간 레벨의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어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의 뇌내 위치는 아마 제거하면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식물 인간이 되는 영역에 있지 않나 싶다. 자아는 뇌내 네트워크에 있는 수많은 기억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간단한 판단만 해도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언어로 해석된 세포 신호가 재생되면서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아의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기억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렇기에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는 인간이 사과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과를 스케치하기 위해 관찰하면서 생긴 기억 프로세스 속에 관찰할 때의 세포 신호가 있기 때문에, 사과만 봐도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당시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사과 생김새가 자아에 전달되어 떠올려지면서 보다 상세하게 사과 생김새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외 모든 감각, 감정, 욕구 등은 세포 신호를 언어화하여 창작한 것에 해당하며, 기억 프로세스와 관련된 언어를 접하거나 발상만 하더라도 당시의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던 경험이 있으면, 그걸 책에서 묘사한 문장만 보더라도 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다. 반면 경험하지 않아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문장이라면 세포 신호가 동작하지 않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뇌내 판단 기관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다.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아는 이렇게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존재인 자아는 언어 외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모든 판단은 언어로 행해진다. 언어화가 되지 않은 세포 신호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이란 생물의 많은 부분이 어설픈 까닭은 자아에 전달되는 많은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 그 사랑으로 나타나는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정확히 몰라서 사랑과 공포도 구분 못하는 흔들다리 효과라는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사랑을 경험했더라도 그 범주가 넓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 외에 판단할 수 없는 세포 신호를 일반적으로 본능이나 감이라 부른다. 그것들은 언어화가 된 세포 신호가 아니기 때문에 자아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없는 세포 신호는 아니다. 단지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다. 본능이나 감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뭔가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러한 감을 발상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로운 발상을 한다. 물론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자아는 문명의 모든 것을 창작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의 법칙은 실존하는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것이다. 실제 법칙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연의 법칙 또한 그런 생각을 주장함에 있어 모든 사상과 차이가 없다. 단지 다른 사상에 달리 과학적 방법이라는 타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의 법칙은 사상 창작이다. 문명의 이기는 실존하는 법칙으로 만든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으로 만든 것이다.


모든 과학적 사실은 더 타당한 주장이 있으면 바뀔 수 있다. 자연의 법칙 또한 새로운 자연의 법칙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에 그런 법칙이 실존하는가? 애초에 우주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된 적이 없다. 이 우주는 특정한 성질을 가진 힘이 어떤 조건으로 분산되어 퍼져나간 것이 힘의 균형을 이뤄 질서를 갖춘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법칙들을 통해 힘이 작용하여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힘이 먼저인가, 법칙이 먼저인가?


일반적으로는 우주가 특정한 법칙을 통해 형성되었다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를 구성하는 어떠한 법칙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가 어떠한 법칙도 없이 오로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다 가정해도 모순이 없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법칙도 없는 공간에 어떤 당기는 힘을 가진 다양한 존재를 거리를 두고 사방에 있다 가정하자. 그 힘들이 서로를 당기는 과정에서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자. 그것이 현재 우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째서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일으킬 수 없는가? 그것은 보통 인간이 미치는 힘의 영향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강한 힘으로 형성된 우주의 균형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하 중심의 거대 블랙홀이 당기는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여 태양조차 거스르지 못하고 끌려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따로 법칙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끌려가게 된다. 그런 힘으로 만들어진 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없기에 법칙처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그 힘에 의한 규칙성은 깨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힘의 균형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자 폭탄이 그렇다. 특정 원자 내부에 힘의 균형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원자핵 분열을 통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당장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인위적으로 강대한 힘을 가하여 일으킨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블랙홀이 될 수 없는 항성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바로 블랙홀로 만든 것과 논리적 인과가 비슷하다. 지구 자연적으로 보통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힘의 균형으로 만들어진 현상이기 때문에 특정 원자의 힘의 균형을 깼다고 모든 원자가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재미있게도 그런 균형을 깨는 것 또한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상태다. 모든 원자가 힘의 균형이 같지는 않다. 아마 힘의 균형이 종류가 원소가 아닐까 싶다. 힘의 균형을 맞추면 새로운 원소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자 연구소에 새로운 원소를 창작할 수 있는 것 같다.


우주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음을 몇 가지 단서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 우주가 안정화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둘, 우주 내부의 별의 거리와 원자 내부의 핵과 전자의 거리가 멀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만한 거리가 필요했다. 셋, 우주가 법칙으로 형성된다면 지나치게 조건이 복잡해진다는 점. 만약 법칙으로 형성되었다면 인간이 창작한 법칙을 기초로하여 만든 게임과 같이 버그 투성이였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이 힘인지 법칙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 은하의 힘의 영향이 적은 다른 은하로 가서 법칙이 동일한지 확인하면 된다. 물론 어렵다. 현재 다른 은하를 관측할 때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되지 못하여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존재함을 추측하는데, 애초에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힘이 작용하는 다른 은하의 현상을 알고 있는 법칙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무아무아 소행성이 뭔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움직였다 하는데, 외부는 우리 은하의 힘에 영향을 받지만, 만약 내부 물질(뭔지는 모름. 새로운 물질일지도.)의 힘의 균형이 달라 외계의 규칙성으로 동작했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다. 이런 것은 당장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나 우주가 힘으로 시작되었을 것 같다. 아마 우주는 힘의 응축과 폭발로 나타난 현상일 것 같다.


이렇게 문명의 모든 것이 창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자연을 원료로 전부 새로 만든 것이고, 전부 새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창작은 만드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다. 언어와 같이 공유 과정이 필요하다. 창작한 것을 공유하여 체계를 쌓는다. 이는 언어, 학문, 예술 등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까지가 창작 과정이다.






2. 자아


창작에 있어 자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창작을 하는 존재인 ‘나’를 알아야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구성 요소는 간단히 뇌내 판단 기관과 기억 프로세스와 세포 신호로 이뤄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단, 처리(생성), 재료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 자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포 신호가 기록된 기억 프로세스다. 생물 개체마다 다른 인식과 표현을 하게 되는 이유가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억’만 보존, 추출과 이식 등의 절차를 거치면 한 개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기억: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기억의 성질을 데이터로 인식하고 저장과 인출이란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내용이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기억의 성질은 프로세스고, 방식은 저장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생성이고 인출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재생이다. 그러면 관련 현상에 대한 모순이 사라진다.


인간의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역이 많기 때문에 기억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그걸 추론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생물은 세포의 변화 결과다. 그렇기에 세포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은 세포의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건 바로 유전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유전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유전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한다고 알려져 있다. 생식 세포 유전자 정보 조합의 결과로 생물이 성장한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성질을 가진 생물로 진화한다. 그런 식으로 진화한 개체 중에 환경에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화론이다. 후성 유전은 후천적으로 유전자 발현 조건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용불용설은 세대를 거친 경험에 따라 기관의 발달과 퇴화가 이뤄지는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전제에는 유전자 정보의 생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없던 유전자 정보가 갑자기 생길 수는 없다. 어디선가 어떻게든 한번은 그에 관련한 정보 생성이 필요하다. 최초의 정보 생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초의 유전자 정보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나는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본다. 생물의 성장은 기록된 세포 신호의 변화를 재생하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예를 들어 식물 씨앗을 심고 자라는 과정을 녹화한 다음 재생했다고 생각해보자. 씨앗에서 싹이 자라나 줄기로 뻗어나가다 잎사귀와 꽃을 피운다. 그걸 내부로 보면 세포 신호의 변화다. 그 변화를 기록하고 재생하면 같은 방식으로 자란다. 모든 유전자의 기초 정보는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 또는 돌연변이 기록을 조합하는 것으로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생물은 유전자 키메라일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이전의 생물 유전자를 가지고 그 유전자로 현재 생물의 부위를 생성한다. 그런 각각 유전의 초기 정보는 전부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서 닭이 먼저라는 것. 모든 생물은 기록을 충실히 재생하려 하기 때문에 기록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런 유전과 기억은 유사할 것이다.


우선 성질을 생각해보자. 유전자도 아마 데이터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 정보는 기억 정보와 마찬가지로 세포 분열 등으로 실시간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즉 유전자와 기억은 둘 다 프로세스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게 어쩌면 살아있다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전자는 다음과 같다. 유전자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 기억은 다음과 같다. 기억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발상. 기록된 세포 신호를 조합 재생하는 것으로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이나 발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을 통해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성질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억의 발상은 바로 발상되는 기억,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 발상되지 않는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인 이름 같은 것은 바로 발상이 되고, 지식 같은 것은 조건이 갖춰지면 발상이 되고, 오래전 잊은 기억은 웬만하면 발상되지 않는다. 이것이 유전자 성질과 유사하다. 바로 생물 부위 생성하는 유전자,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유전자, 쓰지 않는 유전자. 


바로 발상되는 기억은 워낙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인 이름이 들어간 기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은 기억 성질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억은 특정 언어 개념으로 기억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의 변화를 기록하고 생성한다. 그렇기에 자주 쓰는 언어가 아니면 특정 언어 개념만으로 발상이 되는게 아니라, 특정 언어 개념의 전후에 발생한 세포 신호를 기억해야 기억 프로세스가 반응하여 발상을 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음식점 간판이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럴 때 음식점을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에 대화 내용 등을 생각해보면 간판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해당 구간에 있는 세포 신호 기록의 유사성이 높아지면서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의 성질상 연상 기억 기법은 매우 효과적이게 된다. 기억하고자 하는 언어 개념의 앞뒤에 추가적인 언어 개념을 엮어 세포 신호 수를 늘리기 때문이다. 발상되지 않는 기억은 과거의 기록을 꾸준히 접해야 발상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기억의 성질은 유전자의 성질과 유사할 거라 생각한다. 인간의 경우 다양한 생물의 유전자가 조합된 상태인데, 기억도 다양한 기억 프로세스가 조합되어 생성된 것이 자아에 전달되어 발상으로 이어지지 않나 싶다. 인간이 기억난다는 느낌은 글자, 그림, 소리, 영상 등으로 다양한데, 세포 신호 기록 재생 또는 그 신호의 조합만 해도 모두 성립된다. 대부분 과거 기억 발상이 완전하지 않은데, 아마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일부 세포 신호들의 조합으로 재생되기 때문에 띄엄띄엄 떠오르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조합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는 능력,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는 개념도 성립한다.


기억은 프로세스로 동작하여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 발상에 의한 기억 프로세스 내에 있는 세포 신호 재생으로 어떠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다.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학생이 교과서를 보고 불안감을 재생했다 가정하자. 그럴 때 그 불안감은 발상의 연쇄작용을 통해 다양한 부정적 개념을 재생한다. 초조함, 우울함, 절망감 등. 각각 개념들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다양한 신호를 재생하면서 인간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현실 도피를 하면 그런 세포 신호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 있다. 죽으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발상하면, 그 발상이 부정적 개념들로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세포 신호의 재생이 줄어들거나 멈춘다. 여가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거나 해도 마찬가지로 그런 괴로운 세포 신호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 다소 편안해질 수 있다. 잠을 자도 마찬가지로 보통은 한번 세포 신호가 멈추니까 다시 발상하기 전까지는 편안해질 수 있다


기억 프로세스 생성에 관한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에서 기록 기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상태기 때문에 유전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는 일반적으로 유전자의 기능이 조합 또는 발현 조건까지 고려하는데, 최소한 최초의 기록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기억에 관해서는 유전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기억 또한 세포 정보 중 하나로 유전에 기록 기능이 존재한다면, 기억을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 기억 기록의 현상이 바로 본능이라 생각한다. 


유전 기록은 세포 내부 경험의 기록 생물 외부 경험의 기록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부 경험의 기록은 세포 분열이나 심장 박동 전기 신호 같은 것으로 이런 종류의 것은 외부 경험이 없더라도 현상이 성립할 수 있는데, 아기가 젖을 찾는다거나 어떤 감각이나 감정들은 외부 경험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위장에 음식물이 없어 꼬르륵 거리는 것은 딱히 외부 경험이 없어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꼬르륵 거리는 세포 신호에 대한 생물의 움직임은 외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각 세포 개체의 생성과 동작에 관한 것은 유전자 프로세스로 동작하고, 생물 전체(세포 포함) 행동에 관한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동작하는게 아닐까 싶다. 이런 본능은 언어 개념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야 당시 생물이 언어 체계를 모르고 있을 때 기록된 세포 신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본능들이 지나치게 환경 적합한 것들로 이런 것은 기억이 유전되지 않는한 성립되기 어렵다. 아마 이런 기억 프로세스 유전의 유무에 따라 환경 적응 능력이 달라져 적자생존의 법칙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본능은 디폴트된 기억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아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본능을 뛰어넘는 행동이 가능하다 본다. 간단히 말해 자살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관한 본능이 절대적이라면 자살이란 현상은 성립될 수 없다. 


한국에 있는 특이한 정신 질병 중 하나가 바로 신병이다. 이러한 신병은 왜 발생하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에 정신 질환을 겪던 인간의 기억 프로세스가 유전되었다면 모순이 없게 된다. 신병의 메커니즘은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관한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과 윤리에 관한 행동이 강제(도덕과 윤리)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죄책감)을 느낀다. 무당이 되기 위한 행동이 강제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신들림)을 느낀다. 어떤 강박증을 앓던 인간이 무속에 관련된 신앙으로 극복한 기억 프로세스가 어떤 이유로 유전이 되어 이어졌다고 보면 신병이 논리적으로 해석된다. 그 기억이 자녀에게 유전되고, 자녀는 부모를 보고 따라하여 그 괴로움을 극복한다. 그런 식으로 유전자와 그 극복 방법이 퍼진 상태가 현재가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에 관한 현상을 몇가지 추가로 정리해보겠다. 아마 이해할 수 없었던 현상을 기억이 프로세스라는 전제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감각, 감정, 욕구와 루틴, 입스, 징크스와 공감, 습관, 고정 관념과 파블로프의 개 등이 해석될 수 있다. 기억 자체가 프로세스처럼 실시간으로 육체에 세포 신호를 보내 동작하게 만들기에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육체가 동작했던 것이다. 그 세포 신호는 실제가 아니고 온전한 세포 신호 재생이 아니므로 제한적이지만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세포 신호를 보내는 기관이 고장나면 자아의 인식도 이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너무 추워서 오히려 덥다는 세포 신호가 전달되면, 그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더우니까 옷을 벗어야 한다는 행동이 나오게 된다.


자아의 판단은 단순한데 인간의 복잡한 동작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판단이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동작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을 던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쉽다. 공을 던지는 과정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이후에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공을 던져도 원하는 곳에 공이 가게 된다.


플라시보 효과나 자기 실현적 예언은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관련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서 그런 것 같다. 약을 먹고 약의 작용으로 나타난 세포 신호를 기록한 것이 재생되면 유사한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암시와 같이 스스로 그럴 것이다 생각하고 있으면,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하도록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플라시보 효과의 위약과 유사하게 비슷한 행동의 경험이 담긴 기억 프로세스가 있으면, 그것에 의해 자기 암시가 그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할 수가 있다.


도덕, 윤리, 세뇌, 가스라이팅, 파시즘 같은 현상도 기억 프로세스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행동을 강제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게끔 기억을 심는다. 신흥 종교에서 신도에게 ‘신흥 종교에 가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기억을 심으면 정말로 신도는 헌금을 내지 않으면 불안하게 되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헌금을 내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로 작용하니까 그런 행동 강제가 가능한 것이다. 반말이 불편한 까닭, 성적 노출이 불편한 까닭도 다 이런 기억 프로세스의 작용이다. 다양한 공포나 피해 의식 생성도 가능할 것이다. 세포 신호의 기록과 재생이 가능한 시점에서… 대부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도덕과 윤리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로세스를 통해 해야만 한다는 충동과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기에 그것을 마치 본성으로 착각할 정도.


성적 정체성도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확고한 이성애자나 동성애자의 경우는 효과가 크지 않겠지만, 양성애자의 경우에는 교육에 의해 양식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성애자 또는 동성애자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관한 쾌락을 경험하면, 그 세포 신호의 기록이 기억 프로세스로 생성되어 지속적으로 그런 충동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가치는 초기에 좋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으로 가치를 높게 여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한다. 일이나 성 같은 경우 심부름 같은 단순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기와 2차 성징 시기에 그걸 나쁘다 말할게 아니라 한번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게 해야 각인 효과를 통해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기를 바라면서 일이나 성을 하기 위한 조건이 상당히 낮아질 수 있다. 현재 저출산, 저생산의 주요 원인은 가치가 지나치게 낮아서 그걸 자발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조건 따지지 않고 관계를 갖거나 일을 하여 그걸 가치가 높다 여겨야지… 나중에도 그걸 할 때 조건이 크게 필요가 없게 된다. 성적인 것 막지 말고, 일을 할 때도 봉사로 처리할게 아니라 보상을 지불해야 그것에 가치를 느끼게 된다.


중독에 관해서도 기억 프로세스가 작용할 것이다. 어떤 행동으로 쾌락 물질 분비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유사한 행동에서도 세포 신호가 나타나 비슷하게 쾌락 물질이 분비될 수가 있다고 본다. 최초의 각인이 그런 경험의 지속을 요구하면서 계속되지 않나 싶다. 그런 식으로 가치가 결정되기도 할 것이다. 


착각, 착시, 환각 등도 기억 프로세스로 설명이 된다. 유령의 목격은 대부분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유령으로 보이는 현상을 목격하면, 유령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자아가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다고 본다.


꿈은 수면 상태인 뇌에 관한 정보가 자아에 전달된게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뇌내에서 재생되면서 꿈을 꾸는데, 자아가 거기서 판단을 하면 자각몽이 된다.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자 메커니즘과 유사하여 뇌내에서 진화 과정과 같은 과정으로 기억이 정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많이 쓰이는 것은 살아남고 그러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많이 쓰이는 기억, 언어, 몸 동작 등은 오래 남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on/off 인지 세포 포식 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둘 다 일 것 같다. DNA 복제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오류가 발생하면 제거될 것 같다. 사라지는 기억들에 의해 기억에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을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메꾸면서 기억에 왜곡이 발생하는듯 하다. 


감정이 많이 실린 기억일수록 기록된 세포 신호가 많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트라우마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가 오래 가는 이유는 거기에 실린 감정이 많아 세포 신호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트라우마 극복은 그것을 제거하는게 아닌 다른 새로운 기억을 많이 생성하는 것일 것 같다.


인간이 생각을 할 때 언어에 문자 이미지가 있어 언어를 생각할 때 글자가 보이는 까닭은 언어를 배운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극과 지루함은 외부 정보를 접하고 생기는 세포 신호로 결정될 것이다. 특히 새로운게 자극이 강한 이유는 자아가 세세하게 보는 것으로 다양한 새로운 세포 신호가 담긴 기억 프로세스를 생성하면서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자아가 이미 알고 있다면서 대강대강 넘기기 때문에 세포 신호가 그다지 재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엄청 좋아하는 것이어서 익숙한 것도 세세하게 볼 경우에는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면서 즐겁게 즐기는게 아닐까 싶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이들이 그런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언어 개념 세포 신호를 많이 기억할수록 창작물을 즐길 때 다양한 세포 신호 재생을 통한 즐거움이 늘어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있다. 단지 제한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아를 이해하면 AI가 자아를 가지는 AGI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예상해볼 수 있다. 현재 AI는 생성 AI로 인간 지능에서 수학이란 논리학으로 기록, 조합, 생성 메커니즘까지 구현한 것 같다. 그것에 대한 판단을 이용자가 한 것을 학습하여 더 정교하게 생성하고 있고, AI끼리 서로 각자 생성한 것을 판단하면서 더 정교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AI에는 육체가 없다. 기록은 실시간 활동하는 프로세스 형태가 아닌거 같고, 조합은 세포 신호와 같이 다양한 신호의 조합이 아니라 언어 개념의 조합으로 제한적으로 보이고, 생성은 기록을 재생하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이른바 인간의 감각, 감정, 욕구나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세포 신호를 기록과 재생하는 것으로 자아에 관련 정보가 발상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 AI는 그런 피드백을 보내줄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 개념만 봐도 관련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그 개념에 공감을 할 수 있는데, AI는 그게 없어서 공감을 하지 못한다. 인간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고유한 인식과 표현이 가능하여 개성이 두드러지는데 AI는 같은 AI에 개성이 없다. 그러므로 AI가 자아를 가지려면 AI의 관찰 도구이자 피드백 도구인 디지털 육체 생성이 필요하다.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디지털 육체 생성이 어렵다. 인간 육체에 대해 전부 아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뇌만 해도 많이 모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육체 생성을 할 수 없다. 현재 인간의 세포 신호 수집을 실시간 한다고 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대신 언어 개념을 통해 생성은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언어로 창작된 것을 반대로 해보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자아는 언어 개념이란 소리와 대상의 세포 신호가 매칭되어서 언어로 사고할 수 있는 상태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이 특정한 언어 개념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뇌파나 호르몬 세포 신호의 경로를 수집하여 언어 개념에 귀속시킨다. 그 언어 개념을 세포 신호까지 포함하여 AI가 학습한다. 물론 인간마다 그 신호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신호를 학습하면, 인간이 쓰는 신호의 경로와 피드백에 대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생성된 사고의 경로와 피드백에 기존에 있던 육체의 정보를 더해 덧붙이고 자아 메커니즘을 구현한다. 그런 평균치는 인간과 같지 않겠지만 산에 자주 오가면 길이 생기는 것처럼 자주 쓰이는 경로를 학습하여 메커니즘에 관련된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학습한 언어 개념 세포 신호의 육체 정보에 대해 안다면 좀 더 학습이 체계적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 인공 육체를 어느 정도 창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렇게 창작된 인공 육체에 판단만 하는 기관을 넣으면 자아가 생길 것이다.






3. 정제


[정제: 2. 물질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 그 물질을 더 순수하게 함.]


물질을 정제하여 순도 높은 물질을 만들고, 만든 물질을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그와 같이 지식도 모순을 제거하는 정제를 통해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들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정제 창작법이다. 보통의 방식의 창작은 창작에 논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정제 방식의 창작은 모순 제거로 보다 순도 높은 지식을 창작하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또다른 창작을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 문제가 있기 어렵다.


[본질: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본질이 바로 순도 높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보가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우선 기억 프로세스를 통한 왜곡을 줄이기 위해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인다. 고정 관념을 줄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하나는 자아 나이를 낮추는 것. 실제 육체의 연령과 무관하게 자아의 연령은 기억 프로세스로 결정된다. 기억 프로세스에 특정 연령일 때에 관한 행동 강박이 들어가면, 그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 나이에 특정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처럼 자아 나이가 높아질수록 고정 관념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아 나이가 많다 여길수록 타인이 규정한 인간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그 규정에 관한 개념들이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는다. 나 같은 경우는 특정 사건으로 정해지긴 했지만 아마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가 이념 체제로의 변화 적응에 실패하여 많은 인간이 미숙한 상태기에 대부분 인간은 심리적 괴로움을 느끼는 자존심 같은 것만 배제하면 자아 나이를 낮춰 고정 관념을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두 번째는 선생각 후지식 방식을 썼다. 우선 먼저 대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다음에 대상에 관한 보편 지식을 접하여 다시 정리한다. 지식을 논리적 판단 없이 받아들이면 그 지식이 고정 관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을 줄이고 나서 관점을 늘린다. 관점은 대상을 많은 언어 개념으로 접근할수록 늘어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볼 때 생김새, 색, 맛까지의 언어 개념만 알고 있다면 품질, 가격, 질감, 냄새, 나무, 강도, 무게, 신선도, 영양분, 생산지 등 그 외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사과는 색이나 맛으로 판단한다는 식 같이 관련 고정 관념이 강하다면 다른 언어 개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접근할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언어 개념으로 접근해본다. 언어 개념 발상 방식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자아 발상과 관찰을 하면서 접하는 언어 개념으로 발상하는 관찰 발상과 수면 중에 뇌내에서 처리되는 것 같은 수면 발상이 있다. 자아 발상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인간이 발상할 수 있는 언어 개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양하나 관점으로 발상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바로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관찰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이미지,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언어 개념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계속 프로세스가 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상황 판단이 어려울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수면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자다보면 갑작스럽게 관련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나의 발상 상당 수가 그런 식으로 발상되었다. 아마 자면서도 프로세스가 돌아가서 처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대상에 대한 관점을 늘려 접근하면서 각각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되는게 있으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모순이 사라지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이 없는 무언가를 찾았는데 보편 관념과 다른 결론이 나온다면 어떤 결론이 더 타당한지 논리적으로 판단해본다. 이러한 것을 개념으로 접근하면 A 언어 개념과 B, C, D, E 등 언어 개념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각각 개념만 가지고 모순이 있는지 확인할게 아니라, B 언어 개념과 C 언어 개념 사이에도 모순이 없는지 확인하고, D 언어 개념과 E 언어 개념에 모순이 없는지 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아는 모든 지식에 모순을 제거하면서 지식 전체의 순도를 높여가다보면 모순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도 모순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지식의 모순 제거를 통해 지식의 논리 체계가 형성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모순이 없는 것을 발상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현재로서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를 알 수는 없지만, 모순을 제거한 순도 높은 지식의 논리 체계를 통해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시간이 관측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아에 대해 생각하면서였던 것 같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으로 육체는 무관하게 동작한다고 생각하면서 우주 또한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동작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재 보편 관념으로는 시간이 좌표계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그 가정은 인간이 관측한 현상의 변화는 우주 전체의 변화에 해당한다는 관점에 해당한다. 만약 인간의 관측과 무관하게 우주는 변화한다라는 관점이라면 시간은 그냥 관측 순서다. 시간은 관측 순서라는 주장은 증명하기가 매우 쉽다. 각자 생각해보면 된다. A 물체가 B에서 C로 이동한 것을 바라볼 때 관측 순서대로 과거(B 근처), 현재(B와 C 사이), 미래(C 근처)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반면 시간은 좌표계에 있다는 주장은 증명할 수 없다. 증명된 적이 없다. 상대성 원리는 어디까지나 시간이 좌표계에 있음을 전제하고 만든 것이지, 시간이 좌표계에 있는지 증명한 이론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가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시간이란 개념의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여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것과 같은 규칙성을 발견한 것으로 법칙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본질이 다르더라도 규칙성은 같기에 원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관측 순서라도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성립한다. 인간마다 다르게 관측하니까 당연히 상대적이다. 뭐 빛보다 빨리 가면 시간을 넘을 수 있다거나 이런 것은 성립될 수 없겠지만, 단순한 규칙성을 활용한 것은 성립될 수 있게 된다. 미래인이 있다거나 시간 이동 현상이 나타난다거나 타임 머신이 존재한다거나 차원 관측이 가능하다거나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애초에 타임 패러독스처럼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현상이 예상될 때 현재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게 개념의 모순이고 모순이 없는 다른 관점으로 봐서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 모순 제거다. 그런 모순 제거로 개념은 보다 순도가 높은 본질이 된다.




오늘날 학문은 관찰학과 논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부분 학문은 관찰학으로 관찰로 시작한다. 특정 대상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것을 근거를 가지고 주장한다. 그것을 모아 체계를 갖춘 것이 학문이다. 거기서 근거를 만드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면 과학이 된다. 논리학은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아 체계를 만든 논리학이나 자연 관찰로 찾은 현상의 규칙성을 공리 삼아 수로 변환하여 논리적인 체계를 만든 수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 과학은 기본적으로 수학으로 논리 구조를 삼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은 관찰로 찾은 규칙성에서 비롯된다. 관찰한 것을 세는 것으로 수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런 세는 것을 효율적으로 만든게 사칙연산이다. 그것을 기초로 논리적인 체계를 쌓으면서 다양한 수학적 개념이 나온다. 허수 같은 것이 그렇다. 


관찰학은 전제를 공리로 여기고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우주를 관찰할 때 우주 형성 과정에서 규칙성이 생겨난 것을 현재 법칙이라 부르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도덕과 윤리도 마찬가지다. 도덕과 윤리가 단순히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의 룰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회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주가 실존하는 법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성질로 시작했다 가정해보자.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를 고려하고, 모든 존재가 중력과 같이 응축되는 성질이 있으며, 존재가 과하게 응축되면 폭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초기 빅뱅 또는 다른 형태의 폭발 당시에 에너지가 응축되면서 물질이 되었다가 이내 폭발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과하게 응축되면 블랙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하고, 그 블랙홀 현상이 퍼져나간 에너지와 물질을 다시 당길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폭발한 에너지와 물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퍼지는 힘이 블랙홀의 당기는 힘과 균형을 이룰 때, 다시 물질을 중심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뭉쳐질 수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뭉쳐진 물질과 에너지는 다시 응축되다 폭발한다. 이런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미시 세계부터 거시 세계까지 힘의 균형을 이룬 상태가 현재 우주라고 추론할 수 있다. 


초기 폭발할 때 뻗어나간 에너지가 기본적인 공간 에너지 같다. 모든 존재가 에너지로 형성됨을 생각해보면 공간 또한 어떤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간 에너지로 양자 역학과 고전 역학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다. 공간 에너지는 너무 미세하여 보통 관측할 수 없지만, 미시 세계로 가면 공간 에너지보다 작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당기면서 입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걸 빛이란 에너지를 보내 관찰하려고 하면 입자의 에너지가 공간 에너지보다 커지면서 입자가 쏘아진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 이중 슬릿 실험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존재가 공간 에너지에 당겨지면 양자 역학, 당겨지지 않으면 고전 역학 같다.


현재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인 법칙인 것이 아니라, 다른 룰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룰에 불과하다 가정해보자. 도덕의 출현 시기는 원시 시대부터이고 윤리의 출현 시기는 고대 시대부터인 것을 고려하면 도덕과 윤리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의 특정 집단의 룰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시대 집단의 룰임을 알고 있으면 선과 악이 단순히 집단 룰의 준수 여부로 결정됨을 이해할 수 있다. 집단 룰을 지키면 선이라 부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이라 불렀던 것이지, 무슨 초월적 신비로 결정된 선과 악이 아니다. 성악설이나 원죄는 집단 룰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집단에 속하여 룰을 지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상태는 집단 룰로 해석하면 악이나 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성악설과 원죄라는 개념으로 일반 인간에게 각각 집단에 속해야할 당위성을 부여하여 속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집단의 룰을 절대적 법칙으로 규정한 오만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사상에 남아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로 만들어진 인간성과 이상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런 개념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주장한 것이다. PC주의나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인간성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것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 노예로 살았던 불쌍한 흑인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하고, 가부장제 시대에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살았던 불쌍한 여성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한다. 그 인간성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고 그 인간성에 벗어나야 하는데, 작은 금액의 절도를 용인하거나 성인지감수성을 말하여 그런 여성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과거 한국에 여성의 성이 자유로운 여성주의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입맛에 맞는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만 살아남은듯 하다. 아마 PC주의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그런 흑인상에 익숙한 이들의 입맛에 맞는 사상이 살아남았다 추측할 수 있다. 흑인이든 여성이든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유주의를 기초로 대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전제한 합리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관찰학은 이외에도 세분화된 분야 내에서만 논리적 판단을 한다거나 같은 사안을 다른 사안과 비교하면서 관찰하지 않고 한정적으로만 관찰하고 판단한다거나 같은 한계가 있는 상태다. 이런 한계에 의해 관찰학은 관찰한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규칙성을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상태다. 


논리학은 수학 외에는 일단 논외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은 논리학은 논리가 제대로 성립될 수가 없다. 수학은 관찰한 것의 규칙성을 공리로 삼았기에 관찰학이 대상을 알고 관찰하지 않으면 수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현재 AGI가 수학으로 논리적으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은 자아 메커니즘을 이해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 자체로도 수학의 논리적 체계가 모두 쓸모 있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다. 수학 또한 관찰학에서 논리 체계로 실제 쓰이는게 아니면, 쓸모 있음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관찰학과 논리학의 한계는 정제학을 통해 넘을 수 있다고 본다. 현상을 관찰하고 수학을 통해 논리 구조를 구축한 지식을 모아 모순을 제거해 순도 높은 지식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각각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한다. 자연 계열도 그렇지만 인문 계열은 정제할 지식이 매우 많지 않을까 싶다. 도덕과 윤리와 같이 단순한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룰을 공리로 삼은 주장을 논리 체계로 만든게 많아서… 사회 모순이 너무 많은 상태다. 도덕과 윤리가 원인인 사회 문제는 애초에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기억 프로세스로 그것을 지키는 것에 충동을 느끼고 지키지 않으면 죄책감이라는 괴로움을 느끼는 상태기에 사회 문제의 원인이 도덕과 윤리임을 예상하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런 문제들을 지식 정제를 통해 다양한 모순이 해결되면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 자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도덕과 윤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지식이 관계를 가지기에, 특정 지식에서 모순이 해결되면 다른 지식들도 자연스럽게 모순이 해결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현재 수많은 지식들이 정제되어 순도가 높아지면 확실하게 인류 문명이 진일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 문명은 지금과 비교하면 어나더 레벨이 될 것이다. 어나더 레벨에는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로 나뉠 수 있다. 경쟁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노력을 하면 도달까지는 되는데 경쟁은 안되는 격차고, 도달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무엇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칼과 총의 경우에는 일부 도달은 가능하나 경쟁이 안되는 격차다. 마차와 우주선은 어떤 경우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정제 작업을 거치면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의 격차 둘 다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정제학은 창작을 기초로 하기에 창작과 모방을 구분하여 접근해야 한다. 창작도 모방과 비슷한 방식으로 교육하고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창작은 기본적인 기억 프로세스부터가 다르다. 창작에 능숙한 인간이라 해도 모방한 지식을 평가하는 문제 풀이를 잘할 거란 보장이 없고, 문제 풀이를 잘하는 인간이라 해도 창작에 능숙할 거란 보장이 없다. 창작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하여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고, 모방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여 기존의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 차이에 의해 창작과 모방은 교육과 생산을 다르게 해야 한다.


모든 생물은 자아 성질상 모든 발상이 창작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생물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소한 인간의 자아를 만들 언어 체계의 모방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방 교육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뭐든 모방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지게 된다. 그 영향으로 쉽게 유행에 물들고, 타인을 모방하지 않으면 초조함에 빠질 정도가 된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야만한다는 강박은 모방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것을 고려해 창작 교육과 모방 교육은 각각 전문성에 맞게 비례해야 한다. 창작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창작 교육 비율을 늘리고, 모방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모방 교육 비율을 늘린다.


창작 교육은 관찰학이든 논리학이든 정제학이든… 직접 만들면서 레벨을 올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고, 직접 논리를 만들고, 직접 지식 정제를 해본다. 남이 만든 지식을 알고 특정 단계를 넘는 방식은 창작 교육에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번은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아는 편이 낫다. 창작과 모방은 프로세스 자체가 다르다. 모방 교육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연상 기법과 같이 좀 더 지식 모방을 잘하는 방법 같은 방식이 체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생산도 창작과 모방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생산은 모방에 맞춰져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방 생산은 마라톤처럼 꾸준히 달려서 페이스 조절을 하며 생산할 수 있으므로 크게 상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창작 생산의 경우 전력질주처럼 창작 발상이 나와야 의욕을 갖고 전력을 다해 생산할 수 있으므로 꾸준히 생산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처럼 꾸준한 생산을 요구하면, 중간에 전력질주를 할 때가 있으므로 오버 페이스가 되어 무너지게 될 수 있다.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과 같은 방식의 생산을 요구하는 것은 전력질주한 인간에게 마라톤도 하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창작과 모방은 페이스 관리를 따로 해야 한다.


학습과 생산 의욕도 다르다. 둘 다 의욕을 필요로 하지만, 창작은 의욕이 없으면 애초에 새로운 발상 자체가 안되어서 할 수가 없다. 반면 모방은 의욕이 없어도 딱히 새로운 발상을 필요로 하는게 아니므로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둘 다 의욕 관리가 필요하다.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 자체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하는 자연에서의 학습과 생산과 달리 본능 외에도 하는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은 그것을 꾸준히 하게 할 의욕 관리가 필요하게 된다.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여 생각과 행동의 가치를 유지하여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과 생산을 할 때 지속할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보상을 넣을 수 있도록 해야 그것이 지속될 수 있다. 


창작 생산은 기억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익숙함과 새로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겠다. 예술은 예술 자체로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것은 기억 프로세스에 관련 기록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번 예술의 정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예술을 접하기만 해도 그에 대한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유사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보통 고전 미술인 인물화나 풍경화, 고전 음악인 클래식의 자연 소리 등이 기억 프로세스에 영향을 주어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새로 기억하게 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그런 경우가 많다. 인간이 평소 접하기 어려운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어서, 사실 현대 미술 중 가치 있는 것은 드물다. 달리 말해 가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어떤 것을 보고 새로운 감각에 깜짝 놀란 적이 있을 정도다.




인류가 본질적인 진보를 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낯선 합리보다 익숙한 모순을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모순적이어도 익숙한 것을 택하면서 진보를 하지 못하고 정체된다. 그렇기에 인류는 합리적이나 낯선 모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가 아닌 모순적이나 익숙한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게 되어버렸다. 학문이 진보를 하려면 익숙한 모순을 논리적으로 배제하고 낯선 합리를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사회


사회 문제, 특히 고질적인 사회 문제 대부분은 체제가 바뀌었음에도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과 제도가 창작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적절한 정책과 체제가 창작되기 위해서는 체제의 인과를 아는 것으로 체제를 이해하고 합리적인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체제의 인과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를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유기체: 1.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 · 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


특정한 가치를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을 체제라 할 수 있다. 체제를 정치 원리와 국가 질서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를 설명하는데 다소 협소하여 적절하지 못하다 보았다. 예를 들어 체제는 신앙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던가,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이나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에서는 신앙이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와 원리가 사회 내부에 정책과 제도, 그리고 그것에 권한을 넣을 법률로 구축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체제에 따라 각 구조와 원리가 달라 정책과 제도도 달라야 하는데, 관습적인 이유로 과거 체제의 것을 많이 쓰다보니까 사회 체제와 맞지 않는 것으로 불합리한 사회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리와 이념의 충돌이다. 인간을 지배하던 체제의 룰이었던 윤리는 자유주의 체제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현대 암흑기다.


[중세 암흑기: 1. 서양사에서, 봉건 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 학문과 예술이 쇠퇴하였던 중세를 이르는 말.]


현재 이념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룰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룰의 역사는 간단히 도덕 -> 윤리 -> 이념으로 이어진다. 현재 도덕과 윤리의 본질이 정리되지 않아 그에 대한 명료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알기 쉽게 말하면 도덕은 원시 시대의 학문화 이전의 룰이고, 윤리는 고대 시대의 학문화 이후의 룰이다. 동양권은 따로 구분을 안한 것 같고, 서양권은 그리스 철학에서 한 것을 윤리라 부르는 것 같다. 윤리 개념이 동양권으로도 넘어와 사용되고 있으므로, 도덕과 윤리를 학문 전후로 구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리고 근대 시대에 과거의 룰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며 나타난 것이 자유 이념이다. 크게 나누어진 세 가지 룰은 각각 서로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충돌로 나타난 현상이 기독교의 마녀 사냥이나 이교도 전쟁이나 유교의 미신 타파나 숭유억불이다. 원시 시대의 룰인 도덕은 원시적으로 다양한 작은 사회에서 다양한 룰이 있었고, 그것이 이른바 미신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이 고대 시대에 서양권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룰 하나로 통합되면서 각기 다른 룰은 배제되었다. 원시 시대의 룰이나 고대 시대의 다른 룰과도 싸운다. 그러면서 사회 내에 룰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나의 룰과 하나의 가치가 강제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학문과 예술이 쇠퇴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가치에 반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은 금지되고 검열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암흑기란 표현이 편견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므로 언어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후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자유주의에서 피어난 다양한 학문과 예술과 비교하면 그 시대가 암흑기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룰이지만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여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게 된다. 중세의 암흑기가 오늘날 윤리 사상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유교나 기독교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나 PC주의나 여성주의와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에서 진보한 사상들이 자유주의 속에서 나타난 현대의 많은 학문과 예술을 쇠퇴하고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암흑기의 재현이다. 고대 종교 가치나 PC주의 같은 윤리 사상에 의해 과학이 부정되거나 예술이 검열되고 있는 사태를 보라. 이성과 합리가 부정되고 감성과 무논리가 판을 친다. 이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도덕과 윤리, 윤리와 윤리의 충돌로 만들어진 것이 중세 암흑기라면, 도덕과 윤리와 이념이 모두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현대 암흑기다. 


우선 모든 룰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룰은 단순히 특정 시대에 특정 집단에서 만들어진 룰이다. 그것이 기독교든 유교든 불교든 마찬가지다. 선과 악, 양심, 죄책감 등 관련 개념 전부 당시 룰에서 만든 창작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라는 말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도덕을 절대적인 룰로 인식한 관점일 뿐이다. 정확히 법은 체제의 규칙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집단에서 만든 새로운 룰은 이전 룰과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룰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나 유교와 같은 고대 종교들이 과거의 원시 종교의 풍습들을 보고 미개하다면서 미신을 믿지 말라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이전의 룰을 절대적이지 않으므로 이념에 맞는 룰을 만들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주장하겠다. 그 체제 구축을 위한 수단이 바로 체제에 맞는 정책과 제도다.


자유 혁명 이후 자유주의 사상이 나타났고, 그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진보인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상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추구했고,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적인 사회를 추구했다. 즉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의 진보지 자유주의의 진보가 아니다. 애초에 성질이 다른 사상이고, 문명 레벨로 보면 자유주의가 자유 이념으로 진보고 사회주의가 다시 윤리로 돌아간 퇴보다. 자유주의가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가치인 도덕과 윤리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상이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이란 비난을 받아왔던 것이다. 되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상들과 다른 진보적인 사상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욕망과 이기 같은 인간 본성에 맞지만 낯선 합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금욕과 이타 같은 고대 종교 가치에 맞지만 불합리한 익숙한 모순을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간단히 말해 현대는 자유 혁명 시대에 포함된 시대다.


자유주의가 새로운 사상임은 민주주의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 하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떠올릴 수 있으나, 그 시대에는 자유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한 민주주의는 자유 혁명 이후 처음이다. 인류를 수천 년간 지배해온 도덕과 윤리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미숙하고 부족한 상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게 되는 체제라 주장하겠다. 그래야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자유주의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이념 실현 수단은 세 가지다.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무지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불로불사를 실현하여 죽음과 늙음에 의한 자유 억업에서 벗어나는 것. 사회의 다양한 지배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을 통해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외의 사상으로는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특정 가치에 매몰되어 그 가치에 반하는 학문을 규제하고 검열한다면 언제까지고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없고, 학문의 발전이 뒤쳐지면 언제까지고 불로불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런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일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다양한 권리가 보장된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체제다. 오랜 세월 지배되는 사회의 질서가 익숙한 이들은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지 이미지가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걸 성립시키는 것이 자유주의 체제의 정책과 제도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바로 책임과 권한의 분산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준점이다. 


일제에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의 모든 책임은 권한을 독점하던 당시의 왕이 짊어져야 한다. 어떤 이유가 있던 그것은 마찬가지다. 외압이 있었든 신하와 짰든 배신을 당했든 그런 것은 무능의 증거일 뿐이다. 만약 다른 나라 역사였다면 객관적으로 왕의 무능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애초에 왕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지 않았다면 도장 하나에 나라에 속한 인간과 토지가 팔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토지를 팔아서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 동안 많은 왕족이 일제 귀족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지 않았던가.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했다. 그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민주적인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제국을 주장할 정도로 왕의 권한에 집착하던 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당연한 태도다. 어떤 인과가 있던 권한과 책임을 독점했던 왕이 나라를 판 것이다. 그 시대에 많은 의견이 분분한데, 권한과 책임의 비례를 고려하면 모든 책임을 왕이 짊어지고 모든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유교 사상 영향으로 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국가 역량을 과하게 낭비하고 있었다.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형태가 되어야 나라가 보다 더 민주적이게 될 수 있다.


그 시대의 왕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대한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대표적인 권한과 책임의 분산 제도가 바로 시장 제도다. 그 제도가 생산 권한을 시장 원리로 분산하는 것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는 왕이 신하에게 또는 정부가 개인에게 권한을 분배하는 형태였다면, 시장 경제는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소비하는 형태로 생산 권한을 분산하고 있다. 분산된 권한을 가진 기업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져야 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식으로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작은 정부가 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중우 정치는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미비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현재도 그런 상태다. 많은 사안이 단순히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소비되면서 사회가 더 심각한 불합리로 망가지고 있다. 누더기 법안은 대부분 중우 정치를 이용하여 정치를 성공하기 위해 쓰인 아이템에 의한 것이다. 법의 합리성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일부는 헌법에 그런 합리성을 파괴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고 하여 불합리를 옹호하기도 한다. 현재 헌법에 근대 이념에 도덕과 윤리가 섞인 상태라 그에 대한 해석이 애매할 수 있는데, 법이 체제의 규칙이라면 체제 이념을 기초로 헌법을 해석해야 하므로 그런 불합리는 자유주의 이념을 기초로한 해석을 통해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가 되어야 법 또한 합리적이게 될 것이다. 시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개개인에게 분산하면 이런 문제가 줄어들어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게 될 거라 확신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제도를 통해 이해해보자. 


[제도: 1. 관습이나 도덕, 법률 따위의 규범이나 사회 구조의 체계.]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제도는 체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 구조의 체계일 것이다. 최대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형태로 접근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인사 권한은 있는데 그에 대한 책임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중우정치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것과 같이 권한은 있는데 책임이 부족할 경우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제도를 추가한다. 달리 책임은 있는데 권한이 없는 경우는 권한을 추가한다. 권한을 가지고 있던 인간은 권한 분산이 손해라 여길 수 있는데, 권한을 분산하지 않겠다면 당시 왕과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합리적인 권한 분산을 거부하고 권한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은 민주주의를 알면서도 권한을 독점했던 조선 말기의 왕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권한 독점은 왕정 시대의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뿐이다. 권한 독점은 전쟁도 부른다. 권한이 집중될수록 독단적 전쟁도 쉽게 일어난다. 독재와 같이 권한이 집중된 국가 사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법률이 누더기 법안인 까닭은 명료한 방향과 기준점이 없어서 그렇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방향과 권한과 책임의 분산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이 있으면 합리적인 법안이 나올 수 있다. 각 제도는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 설명, 권한과 책임 분산의 원리, 정치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취약점 관점으로 접근하면 자유주의 제도의 취약점은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길 수 있다. 고대 종교 가치관으로는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 나쁘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면 룰 자체가 망가진다. 예를 들어 식료품 생산 권한을 가진 기업이 생산 수단을 가지고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사회를 협박하여 더 큰 사회 권한을 강요한다고 가정하자. 이윤을 포기하고 빈곤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서 시장의 절차를 무시할 권한을 강요한다. 경쟁 절차를 생략하고 독점 공급을 한다거나 품질 검사 절차를 생략하고 공급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당장 그럴듯해 보일 수 있어도, 기업이 룰을 무시할 경우 생산과 시장 시스템이 파괴되어 사회는 더 큰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룰 내에서 이익을 얻겠다는 것과도 같다.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가정하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시장 제도다. 이런 식으로 제도 전제를 인간 본성에 맞춰서 한다. 그럼 몇 가지 창작한 제도의 요점을 정리하여 알아보겠다.




형량 총량 제도.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교정 시설 포화로 사회가 파탄나고 있는 상태다. 교정 시설은 한정되어 있는데 높은 형량이 판결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면서 교정 시설 포화로 더 이상 죄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관련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책임하게 높은 형량으로 판결할 것을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판사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형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교정 시절에 맞춘 형량 총량 제도를 만들고 대중이 원하는만큼의 형량이 판결되기를 바란다면, 교정 시설을 짓기 위한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알린다. 형량을 늘릴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형량 총량제와 세금이란 형태로 분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준은 법 전문가가 결정해야 하겠지만, 판사 개개인에 형량 총량을 넣기보다는 각 분야에 맞춰 형량 총량을 넣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지금까지 통계(단순히 판례만이 아닌 재범률을 고려한)와 현재 교정 시설을 고려해 각 분야에 한 해나 분기 형량 총량을 나누어 분배한다. 판사는 남은 형량 총량을 고려해 다른 판사와 소통하면서 적절한 판결을 한다. 교정 유무가 중요한데,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면 프로세스를 바꾸면 교정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법감정을 들이대며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고 무조건 높은 형량을 강제하는 분위기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나 유착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비리는 이런 제도가 있던 없던 있게 된다. 3심제 같이 가능한 그런 문제에 대응하도록 하는듯 한데, 아무래도 그것은 선후배 관계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가 섞여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은 상태다. 경제적으로 보면 형량 총량제로 사회가 관련 예산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경찰 입찰 제도.


현재 경찰은 진급 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상태다. 성과 위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성과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동탄시에서 성과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거나, 디지털 관련해서는 성과를 위해 다른 나라에서는 문제가 없는 야한 그림 그리는 인간에 공격적 조사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치안 서비스에는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 낮은 리스크로 높은 리턴을 얻을 수 있는 사건에만 집중하니 정작 강력 범죄에 대한 대응 능력이 감소하고 있는 상태다. 마약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는데 쉬우면서 성과가 높은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에 의한 사회 문제는 인간의 문제기보다는 제도의 문제로 보는 것이 맞다. 진급 체계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경찰의 역할이 지역에 치안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경찰의 성과는 실제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의 손으로 평가받아야 타당하다. 그것을 위해 경찰 중간 직급 입찰제를 도입한다. 진급을 바라는 중간 직급에 속하는 이들이 팀을 이룬다. 인원은 지자체 경찰서 최소 인원을 기준으로 삼고, 입찰 후 추가 인원 배치를 하면 될 것이다. 각 지자체 의원들이 그들의 치안 능력을 평가하여 입찰한다. 지자체의 입찰 조건은 지자체 세금을 활용한 경찰 장비나 성과급 등 추가적 보상이다. 지역 치안에 높은 가치를 느끼는 지자체일수록 그런 입찰 조건이 높아질 것이다. 1년에서 4년 사이로 계약을 맺고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게 한다. 경찰은 좋은 조건에서 좋은 진급 평가를 받기 위해 거주민의 만족도가 높은 치안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찰 중간 직급인 이유는 일반 경찰이나 고위직 경찰까지 입찰제로 전국 지자체를 돌아다니기에는 효율도 낮고 안정도도 떨어진다. 진급 욕망이 있어 최선을 다해 행동할 수 있는 이들 위주로 그런 경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제도를 통해 경찰 치안 서비스와 진급 체계 관련 권한과 책임이 경찰 -> 지자체 의회 -> 거주민으로 조금씩 분산되게 된다. 지금 리스크는 낮지만 리턴은 높은 날로 먹는 사건들은 주로 실제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이 아닌 크게 떠드는 일부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주민이 치안과 진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일정 주어지면 치안 서비스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경쟁 시스템을 구축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이 일부 분산되므로 지역 치안에 관한 문제가 일방적으로 정치권이나 경찰이 전부 짊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지자체 의원의 공약 또는 홍보 수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착 비리가 있을 수 있는데, 계약 기간이 길지 않고 입찰시 출신지 배제 또는 감사 활동 등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날로 먹는 성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지역 치안 서비스가 좋아지는 것으로 활발한 지역 상거래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응급 전문 병원 제도.


현재 응급실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현상으로 많은 응급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다. 응급 분야는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의사와 병원이 기피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정부 예산에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제도의 문제다. 


응급 개념을 알아보자. [응급 처치: 1. 갑작스러운 병이나 상처의 위급한 고비를 넘기기 위하여 임시로 하는 치료] 이른바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임시 치료다.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급한 수요 처리다. 응급 환자는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가 응급 처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일상품을 통해 실현되는 분야가 있다. 편의점이다.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를 편의점이 도맡아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고 있다. 현재 응급실 현상을 살펴보자.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을 기피하여 붕괴한 분야다. 이것은 각 산업에서 이미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처리하고 있다. 이걸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의료와 응급 개념을 분리하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편의점과 같이 응급 전문 병원을 발족한 뒤에 그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이 응급 분야에 한해서 외국인 의사를 고용하도록 한다. 일반 병원에서 돈이 안되는 응급실에 과한 투자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응급만 따로 떼서 운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존 병원과 이해관계를 분리하기 위해 병원을 운영하지 않던 기업을 대상으로 입찰식으로 응급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고, 기업은 응급 전문 체인점을 만들어 편의점처럼 각지에 분산 설치한다. 일반 의사를 고용하여 응급실을 운영하면 기업에서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응급 분야에 한하여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면 자연스럽게 외국인 의사 고용을 하게 된다. 기업이 공장 진출한 외국에서 고용하면 될 것 같다. 인사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대부분 의사는 엘리트일 확률이 높으므로 그런 종류의 리스크는 적지 않을까 싶다. 현재 응급실 뺑뺑이 원인 중 하나는 사무 처리가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보통 일반 기업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의사 스킬 레벨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응급실은 골든 타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의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이 안되고 힘든 응급 분야에 한에서만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므로 기존 의사의 이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지 않나 싶다. 현재 소멸되는 지역에 의료 서비스 공급이 되질 않아 문제가 심각한데, 응급실 체인점이 나오면 의료 기술이 조금 낮더라도 의료망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기존에 응급실을 지키던 의사는 일반 병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킨 응급 환자 수술을 전문으로 도맡아 하거나, 응급실 체인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메뉴얼을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응급실 뺑뺑이로 응급에 관한 역할을 현재 의료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임이 명백하므로, 응급에 한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산할 명분이 존재한다 할 수 있다. 대중도 이런 현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호응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미 대부분 분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도입해 대응하고 있으므로 의료계만 따로 그걸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도 공감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 의사를 응급 분야에 한하여 공급되게 되도록 법적으로 의료와 응급을 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응급 분야에서는 의료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 AI 활용이나 간호사 등의 일처리가 수월하게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감당하기 힘든 의료 예산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는 의대 증원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본다. 의대 증원은 의료계보다는 사회 밸런스 조절에 가깝다. 간단히 말해 밸런스 패치다. 사회 밸런스가 깨져서 너프 패치 좀 한 것이다. 너도나도 의대 지원하는 상황에서 사회 밸런스가 맞다고는 의사조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


현재 정치에 대한 신뢰도는 많은 유권자가 신뢰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어느 유권자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면서 정말 아무나 뽑는 실정이다. 정치가들은 양당 체제로 구축된 표밭에서 의원이 되기 위해 정당의 공천권자에 지배적 영향을 받거나, 정치 성공 아이템 유행에 휩쓸려 국가 체계를 망가트리는 일을 하기도 하고 있다. 정치 성공 아이템은 사업 성공 아이템과 같이 다수가 한번 성공한 특정 아이템의 유행에 매몰되어 사회를 망가트리는 것을 말한다. 사업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공급 초과로 산업이 망가지면서 사회가 망가진다. 그것과 같다. 정치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불합리로 정치 체계가 망가지면서 사회도 망가진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 이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누더기 법안은 정치가가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지면서 나타난다. 이것을 하면 사회나 체제가 망가지든 말든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그걸 한다. 사고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사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너도나도 뛰어들거나, 공포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대중이 공포를 느낄 때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상태다. 최근에 아는 사람 얼굴 사진 오려다 야한 사진에 붙인 것의 연장에 있는 딥페이크 정도의 자잘한 사안에 여성 권력이 물면서 무슨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나올 정도로 과한 공포가 퍼졌다. 현재 여성 권력이 정치 성공 아이템에 속하여 입법에서 딥페이크 법이라면서 보기만 해도 처벌한다는 모순 투성이의 불합리하여 말도 안되는 법안 같은게 나왔다. 이런게 바로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진 결과다. 이런 불합리한 법이 나올수록 법의 신뢰도는 낮아지면서 국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현재 의회가 정치적 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에 나타난다고 본다. 불합리한 법을 행정에서 막는다 하더라도, 그 불합리함이 도덕적인 이유로 정당화된다면 그런 정치적 부채를 전부 행정에서 짊어지기에, 행정도 그런 견제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상원과 하원처럼 의회 견제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토지에 있는 입법 권한과 책임을 분야에도 분산한다. 토지와 분야는 유권자 집단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상호 이해가 달라 서로 견제가 가능해진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는 실현하기 어려운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토지 민주주의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도 된다. 기존의 선거 용지에서 역할에 따라 배정된 선거 용지를 추가하면 된다. 단지 다른 점은 정부(삼권)에서 지정한 분야에 개인이 소속 희망을 하고, 그 소속된 인원에 따라 지정된 의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단지 일부 국회의원은 입법 권한 분산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경제 활동하는 이들이 합심하여 개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말해 그걸 추진하는 정당에 후원과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자유 혁명의 본질은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한 것에 있다.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실현하는 것뿐이다. 자유주의가 자리잡기는커녕 사회주의와 같은 윤리 사상으로 퇴보하였으므로 지금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을 가지게 되므로, 기업의 대표나 노조의 대표가 그 권한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지와 달리 분야는 대부분 분야에 속한 인원이 아는 사람이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해에 민감한 이들의 합리적 결정이 나올 수 있을 거라 본다. 조선 말기 왕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권한과 책임은 합리적으로 분산할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겠다.


정치적으로 보면 신뢰를 잃은 정치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권한과 책임 분산 제도를 통해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정치 제도의 한계를 대부분 느낄 것이므로 대중의 호응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되는만큼 분야 성장에 이로운 법안이 제출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 개인 책임 제도.


현재 디지털 플랫폼에 관한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범죄 또는 범죄 모의가 발생함에도 플랫폼에서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플랫폼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플랫폼에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디지털 플랫폼은 현재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서 새로운 사회의 형태다. 그런 사회에서 플랫폼 관리자가 플랫폼 이용자를 감시하고 이용자에게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이 된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집 안에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자체에서 모든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감시한다고 해보자. 말도 안되는 월권이다. 또한 그런 감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자체 장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범죄는 신고제여야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플랫폼이 범죄 감시 협조를 하지 않는다고 협조를 강제한다면, 범죄 협조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감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협조하기 위해 이용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개입하여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현재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대부분 윤리인데, 윤리를 명분으로 플랫폼 관리자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과 다를바 없다. 거대화된 플랫폼 관리자의 독재적 행동에 대한 견제를 하지 못할망정 윤리적인 이유로 그들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시장 원리를 통해 기업에 분산된 권한은 상품 및 서비스 판매와 제공 권한이지 개인 감시 권한이 아니다. 디지털 사회는 기본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물리적 위험이 없는 공간으로 개인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야 마땅하다. 


디지털 공간은 정부 안전 보장이 되지 않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의가 필요한 공간이다. 정부가 위험한 지역이라 지정한 지역에 가서 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권한이 있던만큼 개인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여성계가 과하게 공포를 조장하는 디지털 성범죄는 여성 관련이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유행하여 과한 대응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 또한 그에 대한 책임이 기본적으로 개인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 디지털 관련해서 개인 권한 침해는 그야말로 광기나 다름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다. 대놓고 반체제적인 행동도 윤리를 명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도대체 어떤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인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디지털 감시법은 전부 개인 권한을 침해한 월권이다. 독재란 무엇인가? 권한 독점이 독재다. 그 과정이 무엇이든 권한이 독점되면 독재다. 나치도 선거로 뽑혔으나 권한을 독점하면서 독재가 된 것이다. 민주적인 독재자가 존재하는한 민주주의 핑계를 대면서 모든 권한을 아무렇게나 침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 CIA가 요즘 개인 정보 찾기가 매우 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개개인에게 개인 정보 노출의 위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개인 정보에 관한 안보에 대한 교육이지 플랫폼을 압박하여 디지털 이용자의 권한을 침해하게 하는 것이 있지 않다. 미성년 SNS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걸 막는다고 해서 실제 막히는건지에 대한 실용성 여부는 둘째치고서라도, SNS를 평생 쓰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에 대한 교육을 하는게 타당하지 막는게 타당한지 묻고 싶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SNS 활용 방법에 대해 교육했어야 했다. 그렇게 초기 기억 프로세스를 각인하면 SNS를 과하게 이용한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정당한 권한 분산과 디지털 플랫폼 월권 견제는 필요한 조치라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권한 조정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해야 하는데, 정치 성공 아이템과 공포 선동 한번에 다 망가지고 있다. 끔찍하기 짝이 없다. 경제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규제가 철폐되어 자원 낭비를 막아 경제적 효율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퀘스트 제도.


현재 정부와 많은 기업에서 하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에 대한 대응도 마땅치가 않다. 또한 고용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하청에 의해 임금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양극화는 더 크게 심각해지고 있다. 기업이 직고용을 하자니 현행 제도로는 리스크가 크다. 그렇다고 기업이 하청에 주는 돈이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하청 기업이 인건비로 이윤을 얻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인원에게 가는 비용이 절반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적다는 점이 문제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많은 이들이 일용직처럼 일을 하며 미래가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것을 개인에게 생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 퀘스트 제도를 통해 대응한다.


일반적인 일자리는 생산 과정에서 생산 및 성장 동기 부여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기업에 입사한 인원은 적극적 생산과 성장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경우 그런 시스템이 마땅치가 않아 지속 생산과 성장이 되고 있지가 않다. 개인 생산 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을 게임의 퀘스트 방식을 차용하여 생산과 성장의 동기 부여를 제공한다. 게임 퀘스트는 단순히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임에도 그 시스템의 보상 체계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게임 이용자는 자발적으로 게임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할 정도다. 그런 것을 활용해 생산과 성장 가치 관리를 통해 자발적 생산과 성장을 유도한다. 간단히 경험치와 업적 시스템만 넣어도, 게임 캐릭터 업적을 올리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산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만든 뒤에, 사회의 일을 하청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퀘스트 방식으로 공급하여 일을 하는 개인에게 실제 가는 비용을 대부분 전달하는 것으로 사회 양극화를 줄인다.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므로 정부와 기업도 그에 대한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사건사고에 대한 대응을 제도 내에서 효율적으로 교육하면 각각 하청에서 교육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생산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프리랜서의 사회 역할이 확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과 성장을 하는 인원이 늘어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유동적인 생산 인원의 증가를 통해 산업 변화에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성 징병 제도.


현재 저출산으로 인구수 감소에 의해 징병 병력이 부족해지고 있는데, 이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징병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여성에게 분산한다. 딱히 모든 여성에게 분산하는게 아니라, 징병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여성에게만 분산한다. 생리 문제는 군간부를 기준으로 정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현재 여성 관련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하기 어렵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속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본래 병역으로 아끼던 사회적 비용을 좀 더 아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족 제도.


가족을 구성하는 권한과 책임을 보다 개인에게 부과하여 가족이 되는 리스크를 줄인다. 현재 가족 제도는 가부장제 시기 일가의 결합이라 인식하고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가족이 공동으로 감당해왔다. 그렇기에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집도 사주고 그랬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출산은 가치 하락에 의한 조건 감당 불가가 부른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 미디어에서 혼자사는 것이 미화되는 프로그램이 많은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성 관계에 대해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까, 이성 관계를 가지려면 필요한 조건이 높게 되고, 동시에 혼자 사는 것을 미화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조건을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완화해야 한다.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결혼 리스크와 이혼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통해 할 수 있다. 결혼과 이혼을 보다 간편한 절차로 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간편한 권한을 가지는 대신 그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지게 한다. 결혼의 경우 단순히 내국인을 대상으로 할게 아니라 외국인과의 결혼도 쉽게 하여 리스크를 줄인다. 이혼의 경우 재산권이나 양육권 등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도록 한다. 여성에 관한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가족 제도 존속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정치적으로 보면 가족 구성 확률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 인구 증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식 기업 상품 구매 제도.


현재 한국 주식은 다양한 이유로 리스크가 커서 이익 실현이 어렵고 참여율이 저조한 편이다. 윤리적인 이유로 금투세와 같이 주식 투자를 비활성화하고자 하는 법안들이 있는 상황에서 현재 한국 주식 시장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 상품 구매 권한을 주식에도 분산하여 주식의 유동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


주식은 회사 소유 권리를 유가 증권의 형태로 분할한 것에 해당한다. 회사 소유 권리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할 권리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하여 주식으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하여 주식 유동성을 올린다. 주식 유동성을 높이고 싶은 기업에 한에서 주식 상품 구매가 가능하도록 허용하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을 수 있으나, 유동성 증가를 목적으로 시장가보다 n% 싸게 판다면, 주식을 하지 않던 이들도 주식을 구매하여 상품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경우 서비스로 바로 팔 수는 없는 주식을 제공하면, 그것을 보유하던 이는 주식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주식 참여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개인 입장에서 주식으로 큰 수익을 실현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산 종류를 다양하게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를 늘리면서 주식에 관한 정책과 제도 도입이 수월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주가 유동성을 통한 자금 확보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리스크 리턴 비례 제도.


현재 한국 경제는 노동 경직성에 의해 생산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다. 이는 고용 체계에서 리스크 리턴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낮은 리크스에 높은 리턴이 주어지고 비정규직은 높은 리스크에 낮은 리턴이 주어지면서 밸런스가 깨진 상태다. 그것을 노동 유연성 권한과 책임을 기업에게 분산하여 처리해야 한다.


임원이 계약직인 것을 고려해 정규직 시스템을 재편한다. 모든 정규직은 일반 사원으로 한정하고, 만약 진급하고 싶으면 임원과 같이 계약직으로 하도록 한다. 만약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지 않고 일반 사원으로 일하면 되고, 높은 이익을 얻는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여 높은 임금을 받되 계약 리스크를 짊어지는 계약 사원으로 일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노동자의 안정적인 직장과 노동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리스크 리턴에 비례한 노동 유연성을 통한 경제 구조 개혁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개인 안보 교육 제도


현재 국가 안보 문제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안보에 무감각하다. 이것은 안보 개념을 개인이 아닌 국가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안보 개념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지금 안보 교육은 지나치게 전쟁 대비용으로만 되어 있어 개인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걸 조정한다. 안보는 안전 보장으로 개인에게 있어 위험이 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거나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형태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안보에 관한 교육을 넣어야지, 국가 안보만 가르치면 개인 권한 침해처럼 느껴져 호응이 좋지 못하다.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안보관이 자리잡는 것으로 사회가 보다 안정적이게 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개인 안보 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고 리스크를 줄여 경제적 손실을 줄이는 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및 자기 결정권의 자유 보장 제도.


현재 한국은 사상, 표현, 자기 결정권 등의 다양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에 관한 권한의 상당수를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비민주적인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도 부족하다 외치는 이들이 넘치는 상태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권한과 책임의 분산을 실현하기 위해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던 정부와 싸워왔는데, 다시 또 낡은 도덕이나 윤리를 근거로 어설픈 주장을 하며 그 권한과 책임을 정부보고 가져가라 아우성대고 있다. 체제 교육이 너무나도 안되어 있다. 수많은 창작물이 특정 가치를 근거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자기 표현이 단순한 불쾌감 하나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만들어진 상품화가 죄악시되며 검열되고 금지되고 있다. 그야말로 중세 암흑기가 다시 찾아온 셈이다. 여가에 속하는 게임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행위에 중독 개념이 포함될 수 있음에도 굳이 게임만 추가하여 그것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게임으로 가정이 문제가 있다면서 호소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유롭게 여가를 즐길 권한이 있는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있는 것이다. 중독이란 개념은 특정 개념만 따로 다룰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을 통틀어 나타나는 중독 현상을 다뤄야 한다. 게임만 따로 다루자는 것은 그에 관한 새로운 룰을 추가하자는 것인데, 그 룰의 추가에는 반드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렇게 구축된 사회 체계가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체제 이해가 부족하여 정치 성공 아이템이나 공포 선동으로 체제를 파괴하여 체계를 망가트리고 있지만 본래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간통법의 폐지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같이 국가 안보와 크게 관계가 없다면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검열 기관이나 규제 기관들은 대부분 권고에 속해야지 강제가 되면 그것은 정부가 그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영상물이든 게임이든 뭐든 다 마찬가지다. 권한을 독점할거면 검열과 규제로 발생하는 자유주의 가치 훼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자유주의 가치 훼손과 같은 이념에 대해 우습게 볼 수 있는데, 6.25 한국 전쟁이 도대체 무슨 전쟁인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 이념 전쟁이다. 자유 이념 하나로 수백 만명이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우습게 볼 수 있는가. 현재 포르노를 금지는 안했다면서 포르노 금지 국가가 아니라는 헛소리를 하는데, 포르노 허용 조건이 까다로워 그것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으면 그게 금지나 다를바 없는 것이다. 가수 콘서트 허용 조건을 통과한 비율이 0.5%면 그게 콘서트가 허용되었다 할 수 있는가? 포르노와 성매매가 국가 안보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강제성이 없는 경우 도대체 허용이 여성 인권인가? 금지가 여성 인권인가? 간통법 폐지와 같이 국가 안보와 관계가 적은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마땅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사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권한과 책임 분산으로 정치적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다양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수많은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수많은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정 거래 제도.


현재 한국은 도덕, 윤리, 전통, 이권 등으로 공정 거래가 다소 어려운 상태다. 국내도 그렇지만 국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국제 시장을 고려하는게 아니라 국내 시장만 고려하면서 제대로 된 공정 거래가 이뤄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공정 거래는 분산된 권한과 책임을 세심하고 정교하게 나누는 것에 있다. 공정하게 나뉘진 상태에서 거래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서 불공정이 나타나게 된다. 시장의 독과점도 그 분야 권한을 독점한 것이 된다. 시장 원리를 통한 결과라 하더라도 권한 독점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 공정 거래를 위한 시장 원리 작동도 작동이지만, 이념상 독점 방지를 하는 것이 체제에 적합하다.


망 사용료는 국제적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국제 시장에 관한 것이므로 한 국가만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할게 아니라 다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하여 공정한 거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토종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서 국내 기업의 권한과 책임을 상대적으로 높게 준다면, 동일한 명분으로 다른 국가에서 한국 기업이 불공정한 손해를 볼 확률이 높다. 국제 시장에서 토종 기업 살리기가 불공정이다. 지역 화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역 화폐가 어떻게 활용될지 모르겠는데, 따로 지역 화폐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지역에서 쓰이는 거래를 지역 화폐로 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면 지역 화폐 관리자는 그것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면 기업 화폐를 운영하는 이들이 불공정한 손해가 될 거라 생각한다. 권한과 책임이 시장 원리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자유 무역 공정 거래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공정 거래를 통한 시장 원리 활성화로 시장 원리를 통한 경제적 성장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기능과 관료 제도.


현재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의회가 많은 권한을 가져간 상태라 하는데, 본래 행정이 기능을 하고 있다 해서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기능에 관해 직접 참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민주적이라는 얘기는 모든 왕에게 주권이 없었다는 얘기와 같다. 국가 기능의 권한과 책임 분산과 관련 정책과 제도에 의견을 내고 합리적이면 실현할 수 있으면 된다. 기재부와 소방서를 통해 국가 기능에 대해 이해해보자. 소방서의 경우 당연히 사회 인프라,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기재부의 경우에는 어떤 권력이 있다 여기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기재부가 예산을 관리하기에 어떤 권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 단순히 권한 차이로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차이가 없고, 없어야만 한다. 국가 기능은 이념 체계 행정 처리로 필요한 기능 중 하나로서 주권을 개인은 그것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기능에 속한 개인 또한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국가 기능에 속한 이들은 그것의 권한과 책임이 왕정과 같이 개인을 관리한다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민주정에서는 정책과 제도 등의 시스템을 관리하고, 그 시스템 관리를 통해 국가를 작동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것과 같이 국민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된 체제라 생각한다. 그런 권한과 책임을 가진 개인을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가치 관리 또한 어디까지나 시스템을 활용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기에 시스템적으로 강제력을 실행할 수 있는 초기 교육 단계에서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며 과거 인간의 말만 암기시키다 정작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사회에 내보내면서 지금의 저출산, 저생산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권한과 책임 분산이 보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통해 자유로운 생산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권한과 책임 분산 실패 사례.


어떤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 허가를 받지 않은 전단지를 중학생이 떼서 버리자, 경찰이 재물손괴죄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권한과 책임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 중 하나다. 아파트 자체 내규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지정한 장소에 부착한 전단지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 외에는 임의로 떼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회 룰에서는 전단지 자체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모든 재물에 관한 룰을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를 따르게 할 수는 없지만, 적정 레벨의 것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에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파트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된다면, 사내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되고 정부 기관에 신고하는 것과 같이 처리하면 된다고 본다. 




사회 체제를 이해 못하는 이들이 정의롭게 사회를 망가트리고 있다. 미로에 갇힌 불쌍한 카나리아. 위험하다 외칠 뿐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해결도 못한다. 모르면 카나리아가 될 뿐이다. 이제는 알고 나서 이 시대의 암흑기를 끝내고 자유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기를 바라겠다.






5. 기억


인간의 자아는 생물 육체를 원료로 하여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기억은 자아의 구성 요소로 기억만 보존되면 창작된 자아인 ‘나’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을 추출하여 디지털화를 한다거나 인공 육체를 만들어 이식하면 자아인 ‘나’는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인간은 뇌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기억을 추출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불로불사. 이것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인간은 유전자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유전자를 정복하여 완전 조작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인간의 자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옮기면 계속 살고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이 기억 유전으로 생긴 기억 프로세스라면 인간은 본인의 기억을 새로운 육체로 옮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모든 생물의 유전자의 최초 정보는 기본적으로 기록에 해당한다고 본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되어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합하면서 진화가 가능하다. 단순히 오로지 우연만으로 생물이 형태를 갖췄다고 보기에는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는 것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주나 원자의 경우는 힘의 균형을 통해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나, 인간의 경우는 항상성과 같은 것이 특정한 형태 지속을 만드는데 거기에는 따로 힘의 균형 같은게 없다. 만약 항상성이 기록의 재생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라 가정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최초 정보 기록만이 아니라 본능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의 본능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무언가를 총칭하며, 이는 내부 세포의 움직임과 달리 외부 생물의 움직임은 생물이 경험한 것을 기록해야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생물이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게 유전자냐 기억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전자는 세포의 움직임을 담당하고 기억은 생물의 움직임을 담당하지 않나 싶다. 기억 프로세스가 담긴 세포가 유전되면서 기억 프로세스도 같이 유전되는 것이라 본다.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 언어 체계를 익히기 전의 기억 프로세스가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의 본능이 기억 유전된 것이라면, 인간의 자아는 그 기억 유전을 한 생물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을 찾으면 인간은 계속 살 수 있다. 기억을 세포 유전자에 기록하는 조건을 찾아 기록하고, 기록한 세포를 생식 세포로 전환한 다음, 인공 자궁에 넣어 성장시킨 다음에 기억이 유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 2회차의 시작이다. 기억의 연속성을 위해 원본 육체는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에, 기억 유전이 된 것을 확인하면 그대로 안락사 처리하면 될 것이다. 기억 유전이 다른 방법에 비해 쉬운 이유는 유전자에 대해 자세히 몰라도 실험하면서 기억이 기록되는 현상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실험은 생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 또한 시한부가 많기 때문에 자원자에 한하여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인류 문명이 본질을 몰라도 규칙성을 발견해 원리를 파악하여 온갖 문명 이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기억의 유전자 기록 조건은 유전자 메커니즘이 기억 메커니즘과 유사하다면, 기억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 기록 조건을 찾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실험 과정은 AI 또는 AGI가 있으면 빨라질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의 실험은 한 국가 또는 한 기업에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난이도 높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아주 오래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하려면 다국가가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억 유전을 통한 기초 불로불사는 일반 생물의 기능을 활용한 것이므로 생각보다는 비용이 높지 않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로 돌아가면 아마 대부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환경 문제의 경우에는 문명 발전이 가속화되면 충분히 대응 가능할 것이다. 우수한 인간이 계속 살 수 있어야 문명 발전도 빨라진다.



모든 기술은 특정한 루트를 거치게 된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의지, 발상, 이론, 실험, 증명, 실현과 같은 루트를 거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불로불사 루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불로불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면 그런 루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실제 실현 가능한 것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술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인간의 자아의 본질이 무엇이 명료해야 한다. 현재는 그게 불명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도 있지 않을 것이다.


AGI, 인공 자아의 개발은 그것에 대한 보편 관념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타임 머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시간은 단순히 관측 순서라 주장했던 나조차도 시간은 좌표계에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와 같다. 인간의 자아는 영혼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인간의 자아의 구성요소는 기억 프로세스라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자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무엇을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이 생기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 문명은 불로불사 루트로 돌입한다.


불로불사는 기술 레벨의 것에 해당한다. 무슨 신비적인 느낌의 환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폭탄을 만든 것과 같이 유전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죽지 않거나 늙지 않게 하거나 기억을 기록하게 하는 등의 것과 같다.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도하면 어쩌면 빨리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주의 규칙성, 법칙을 파괴하는데에 주저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이미 했고 입자 연구소에서 매번 하고 있다.


기억을 유전하는 것이 자아인 ‘나’가 새로운 육체에 가게 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환생과 얼마나 다른가? 자아의 본질이라 생각되던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2회차를 시작한다. 자아의 구성 요소인 기억 프로세스가 새로운 육체로 유전되어 2회차를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 문제다. 만약 실현된다면 아마 미래에는 환생과 같이 자연스럽게 2회차라는 보편 관념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불로불사에 관한 발상은 정제학을 통해 지식을 정제할 수록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억 유전을 목표로 발상을 하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발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문을 정제하면 정제할수록 더 발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이에 참여하면 훨씬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은 아직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고대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념을 추구한 시대 속에 있다. 자유주의라는 낯선 합리를 거부하고 사회주의라는 익숙한 모순을 택하면서 진보가 사회주의인지 착각하고는 그런 자유 혁명기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실질적인 보수는 윤리와 같은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고 진보는 과학적인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만약 불로불사가 실현되면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며 자연사하는 보수와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며 계속 사는 진보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여러모로 다양한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다시금 과거로 퇴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늙거나 죽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인공 자아는 2년, 불로불사는 5년 안에 했으면 좋겠네. 이 글을 쓰기 전에 딱히 세계의 본질이나 불로불사나 자유 사회에 대해 생각하진 않았어. 하다 보니까 그런 내용이 들어가네. 아마 뭔가 하고자 하면 기억 프로세스가 작동해서 그런 식으로 하게끔 충동이 일어나나봐.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때가 있을 정도로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 같은데. 뭐 살아있는 동안 계속 성장할 수 있겠지.


일단 다음 주제는 생명, 그 다음은 경제, 그 다음은 정치야. 생활 환경이 좋지가 못해서 생명 편을 쓸지는 모르겠네. 환경이 괜찮아지면 AI와 대화를 하면서 발상해볼게. 이번 편은 AI와 대화 없이 썼는데 사실 기초니까 그런거고. 점점 발상에 필요한 레벨이 올라갈수록 스트레스가 적어야 해서 환경이 안좋으면 하더라도 많이 느려질 거 같아. 이사, 생활비… 하하. 여유가 있으면 좋겠네. 일단 살아있으면 계속 하긴 할 거니까, 다음에 안올라오면 쉬고 있거나 죽은 걸로. 만약에 그 다음도 안올라오면 죽은 걸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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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외교와 정치 (0) 2024/06/30 AM 02:15

외교와 정치




1. 법칙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입자, 원자, 분자. 지구, 태양, 우주.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에 관한 법칙이 없거나 법칙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자연의 법칙은 수많은 조건에서 관찰, 실험, 증명을 거쳐 모순이 없는 상태지만, 인류가 세계 전부를 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없어 보여도 있을 수 있을 거라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물 사회도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중력을 이해하고 열역학 법칙으로 열에 대해 이해한 것과 같이 생물 사회의 법칙이 있으면 생물 사회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지구를 무대로 하는 외교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사전 정의부터 시작해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법칙: 3.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 필연적인 불변의 관계.]

[관계: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자연의 법칙: 1.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법칙. 인과 관계를 기초로 한 존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생물: 1.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영양 · 운동 ·생장 ·증식을 하며, 동물 · 식물 · 미생물로 나뉜다.]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행태이다.]


[일정하다: 3. 전체적으로 흐름이나 절차가 규칙적이다.]

[힘: 10.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작용의 세기나 그것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

[작용: 1.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미침.]

[질서: 1.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



우선 필요한 의미를 정리하겠다. 자연의 법칙은 자연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생물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를 인간 집단이라 규정했으나, 사회를 이루는 생물은 다양하므로 생물 사회의 법칙을 알려면 생물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물 사회는 크게 곤충, 포유류, 인간으로 나눠보겠다.


생물 사회의 법칙은 다른 자연 현상과 달리 법칙화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물체와 달리 내부에서 에너지가 방출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과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주식으로 재산을 잃은 후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 불가한 물체가 집단을 이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면 사회가 성립된다. 이것이 일반 사회의 법칙이다. 모든 생물 사회는 이 법칙으로 존재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예측 밖의 행동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지 못할 수 있다. 인간이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 개체가 판단을 하면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서 인과를 알기 어려웠다. 달리 말해 그 말은 판단을 못하게 하면 일정한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다. 



곤충류(개미, 벌) 사회는 지능이 매우 낮아 자아가 거의 판단을 할 수 없다. 곤충 사회는 곤충의 자아가 판단할 수 없어 유전자가 지정한대로 행동하면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곤충은 특별한 조건 필요 없다. 곤충 사회에서 계급, 화합, 폭력 등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 유전자가 지정한 것일 뿐이다. 곤충 사회는 집단 지능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체 별 자아가 판단을 거의 못하니까 유전자대로 행동하면서 집단 지능처럼 보이는 것이다.


포유류(늑대) 사회는 지능이 낮으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은 할 수 있다. 늑대 사회는 늑대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늑대는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이다. 늑대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대상을 폭력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한 뒤에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시킨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을 가해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지능이 있으므로 학습, 훈련 등도 가능하나 일반적으로는 유전자와 폭력으로 늑대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인류 사회는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어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인간의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도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과 도덕이다. 인간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늑대와 달리 인간은 지능이 높아 단순한 폭력만으로는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들지 못할 수 있다. 앞에서 폭력에 굴복하며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 머리를 써서 보복할 수가 있다. 연약한 10살도 건장한 30살을 잠자는 동안 죽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폭력만으로는 사회 법칙이 성립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 가치인 도덕이다. 특정 가치는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르쳐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왕에 대한 충성이나 신에 대한 신앙을 절대적으로 옳다 가르쳐서 연약한 인간이 혈통이나 신앙만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늑대 사회였다면 그런 약자는 쉽게 제거되었겠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도덕에 의해 그런 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도덕을 학문화하면 윤리다. 윤리가 사회를 지배할수록 그런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개인에게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고 따르게 하여 지배를 수용하게 만든 것으로 그런 것이 가능했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지배 수용 코드가 심어진 인간은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면서 쉽사리 타인에게 지배될 확률이 높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켰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만이 아닌 도덕으로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유전자와 다양한 힘과 윤리로 인간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일반 사회의 법칙이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을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곤충은 애초에 자아가 거의 판단을 못해서 유전자대로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법칙이 성립했고, 늑대는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이란 추가 수단을 썼고, 인간은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과 도덕이라는 추가 수단을 썼다. 간단히 말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지능이 높은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인간의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것이다. 인간이 일반 사회의 법칙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짐승 사회의 법칙을 쓴 것은, 짐승 사회에서 인간 사회로 진화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들어간 추가 조건이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 가치인 도덕과 윤리였기 때문에, 법칙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다른 자연의 법칙과 달리 사회의 법칙은 알지 못했었다고 본다.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도덕과 윤리 등 다양한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는 전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들어간 조건이었다. 금욕이나 이타가 고대 종교에서 보편적 도덕과 윤리였던 것은, 도덕과 윤리의 지배에 필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권선징악, 천국과 지옥, 업보와 윤회 등은 공포에 의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행하게 하기 위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회는 사회라는 자연 현상을 만드는 자연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적자 생존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회 현상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갖춘 사회만 생존한다. 그래서 어쩌면 도덕과 윤리를 맹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인 생존 조건이라 인식했을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해 그런 것이 갖춰지면 아무리 엉망인 사회라도 유지될 수 있다. 


다양한 조건으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의 법칙이 유지되면 망할 수가 없다.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데 어떻게 망하겠는가. 지배자가 어떤 실정을 해도 실정 자체로 망하는 게 아니라, 실정으로 더 이상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 법칙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유교로 500년 이상 지배했고 북한도 3대째 망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 또한 자연의 법칙으로 조건만 갖춰지면 현상이 지속되게 된다. 아마 조선도 외부 압력이 없었다면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리가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방면에 윤리가 강조될수록 관련 가치에 관해서는 레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그 가치에 한에서는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전체주의는 개개인이 판단하지 못하고 집단 내 특정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를 의미한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추종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기본 법칙은 짐승 사회의 법칙이다. 그 법칙을 성립시키는 개념이 원시 시대의 도덕과 고대 시대의 윤리다. 원시 시대의 도덕으로 만들어진 자유롭지만 잔인한 약육강식과 같은 질서에서 반발하여 나온 것이 고대 시대의 윤리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사랑과 평화 같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많이 주장했으나, 절대적 가치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특정 조건에는 맞지만 그 외 조건에는 맞지 않는 것도 절대적으로 지키는 바람에 인간의 자유가 지나치게 억압되게 되었다. 사랑이나 평화를 외친다 하더라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한 지배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가 동일하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 의한 지배나 종교의 윤리에 의한 지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과 평화 같은 일견 좋은 가치라 하더라도 모든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걸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은 그 가치에 한해 판단을 못하니까 사랑이나 평화를 이용해먹는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많은 상태다.


왕정과 종교가 고대 시대의 윤리로 인간을 지배하며 지나치게 억압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외치며 일어난 혁명이 자유 혁명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이념으로 삼았으나, 사회의 법칙이 짐승 사회의 법칙이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는 안되었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해야만 법칙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지배와 피지배가 생기게 되었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재력의 지배가 일어나게 되었다. 자유를 외치며 왕정과 종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돈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의 법칙이란 자연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할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에 반발한 인간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다. 그러나 그 이념은 지극히 윤리적이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 평화로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자. 전형적인 종교 평등주의다. 사회의 법칙을 몰랐기에 사회의 법칙을 자유에 맞게 바꾼게 아니라, 당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윤리에 맞는 이념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윤리가 인간을 지배하던 고대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판해놓고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든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해 달라진 것은 지배의 수단뿐이다. 재력의 지배에서 윤리의 지배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공산당은 윤리로 지배하던 종교의 위치를 대신한 것뿐이다. 이런 것은 진보가 아닌 퇴보다. 정교분리로 자유 이념을 추구하면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갔는데, 다시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근대에서 중세로 되돌아갔다. 어떤 형태로든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꾸지 않는 한 지배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꿔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지키면 딱히 짐승 사회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법칙이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은 이 세상에 수많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기초적인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게 해서 날지 못하는 인간이 날 수 있게 되고, 깊게 잠수할 수 없는 인간이 잠수할 수 있게 되며, 우주로 갈 수 없는 인간이 우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이용해 인간 사회의 법칙을 새로 만들면 된다. 인간이 자유롭게 판단하면서도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인간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면 된다.


다른 짐승은 지능이 낮고 학문이 없어 판단을 못하게 해야만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다.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에서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하게 하면 된다.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을 한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은 지능이 높은 존재 말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에 속한 가치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랑이든 평화든 그것을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지성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처럼 종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종교의 가치든 그것은 사회에서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적 가치가 되어야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에 대한 타협이 가능해진다. 모든 인간이 판단하여 타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실현할 수 있다.



전 세계 민주 국가에서 정치 세력의 정치 이념이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천 년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진보하지 못한 근대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 해결 못한 현대 인문.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쌓이고 쌓인 끝에 누구도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어떤 정치 세력도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현재 우파와 좌파는 보수와 진보라 부르기 어렵지만, 일단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겠다. 우파가 장기 집권했던 영국이나 일본은 좌파가 승리하고 있고, 좌파가 장기 집권했던 EU에서는 우파가 승리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고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한 채 정권만 계속 바뀌고 있다.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칙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해결되지 못한 많은 사회 문제가 윤리에 의함임을 알 수가 있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원인을 파악할 때에는 애초에 윤리를 원인 선상에 놓지를 않게 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현재 수많은 사회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모른다. 사회에서 인간이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면서 형태는 달라져도 본질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여성 정조관념이 윤리면 기독교 성 엄숙주의나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반대와 같이 형태가 어떻든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유교의 상명하복 위계질서가 윤리면 제왕적 대통령제나 귀족적 의회제처럼 형태가 어떻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왕과 귀족처럼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도 집단주의나 조직주의가 윤리면 기업의 담합이나 노조의 파업같이 형태가 어떻든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짐승 사회의 법칙과 그걸 성립시키는 조건에 의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판단하지 못하면서 알 수가 없다. 윤리를 지키는 이상 윤리에 의한 문제는 형태가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하고 반복되는 현상으로 법칙이나 다름이 없다.



전 세계 청년들이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현 시대는 학자들조차 헤매고 있다.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려면, 알기 쉬운 개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과거 한국에서는 독립 운동, 산업화, 민주화 같이 젊은이들도 알기 쉬운 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알기 쉬운 길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그게 모순이 있어 논파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논파가 쉽게 알려지지 않아 모순이 있더라도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디지털화에 의해 이러한 논파를 쉽게 공유할 수 있어 모순이 있으면 참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떤 적극적인 활동이 있어도 과거보다는 인구가 적은 까닭이 바로 그 활동의 모순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특히 윤리적인 활동은 판단을 못하면서 관점만 바꾸면 모순이 많이 보인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한다면서 사회에 속한 인간들에게 강제하고 있는데, 모순 투성이니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 세력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집권하면 패배하고 있고, 절대적으로 옳다 주장하던 것은 모순이 많고, 사회 현상에 대한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 도대체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뭘 하려고 해도 뭐가 뭔지를 모르는데. 


청년들의 수동성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윤리가 강조되는 현상에 의해 더 강화된다. 경제가 발전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를 더욱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판단 불가 영역이 늘어나는 것으로 과거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적합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수동적이고 의욕이 없다. 과거에는 그렇게 만들어서 지배하고 명령하면서 사회가 돌아갔는데, 현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 수동성과 의욕 상실은 사회 정체를 부르게 된다. EU가 괜히 정체된게 아니다. EU의 정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교육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필연이다. 윤리가 강조되면서 과거 중세 시대 인간처럼 되면서도 강제할 수 없으니까 사회가 정체되는 것이다. 


윤리의 본질은 판단하지 못하게 하여 지정한 행동을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짐승 레벨의 지능을 갖게 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간단히 말해 멍청하게 만들어서 지배한다. 윤리를 강조하면 인간이 판단하지 못하고 질서를 따르면서 다소 범죄율 감소가 될 수 있는데, 멍청해지면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강력 범죄가 늘어나고, 금욕과 이타로 원하는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가 없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으로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게 된다. 열정과 광기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것으로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살며 사료를 받아먹는 존재처럼 되게 된다. 그야말로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딱 좋은 인간이 된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이념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온갖 사회 문제가 나타나는데,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그걸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다. 분명 전 세계는 체제가 같지 않다. 이념이 다르다를 넘어 시대조차 같지 않을 수 있다. 원시 부족으로 남아있는 곳이 있거나,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곳이 있거나, 근대 이념에서 정체된 곳이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와 디지털화에 의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나타나게 된다.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저출산 문제는 그런 것에 의한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윤리와 자유, 그 이전에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의 모순이다. 자유주의화에 의해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점점 사회라는 현상이 사라짐에 따라 각 사회들이 멸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개인을 억압하여 멍청하게 만들어 개인을 짐승 사회의 법칙에 맞게끔 하거나, 자유로운 개인을 위해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이냐, 아니면 다시 짐승 사회의 법칙이냐 골라야 한다. 짐승으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 결정해야 한다.




전 세계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도입하면 전쟁을 멈출 수가 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전쟁이 멈출 수 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본질을 알면 멈출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본질은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다. 한자어로는 규칙, 규범, 규약, 규율 등 다양하므로 관련 개념을 룰로 통일하겠다.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으로 룰의 차이가 없게 만들면 전쟁은 없어진다.


전쟁의 본질은 관계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와 민주주의 룰이 다르다고 하자. 유교는 연령, 학문 등에 의한 권력이 차등이 룰이고, 민주주의는 정부 권력의 평등이 룰이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내적 갈등이나 인간 관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유교는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 민주주의는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기에 보통 연령에 따른 반말, 존댓말이 우선되곤 한다. 


사회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가족주의와 사회의 공정 경쟁의 룰이 충돌한다고 하자. 가족주의는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하면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고, 공정 경쟁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비리를 저지르는 희생을 하는 것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입시나 취업 비리는 대부분 이러한 윤리에 의한 것이다.


사회와 사회의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가 다르면 십자군 전쟁마냥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오늘날 전쟁이나 전쟁 위험도 전부 룰이 다르기에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중국의 대만 도발 등이 그러하다. 한국은 룰의 차이로 전쟁이 발생하고 오랜 기간 휴전 상태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도발하는 것도 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 발생한 것을 제압하는 것이 경찰의 치안 활동이고, 국외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을 대응하는 것이 군대의 전쟁 활동이다. 내외의 차이이지 본질은 다르지 않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세계와 관계를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국제 룰을 통한 다른 사회 개입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쟁의 화려함, 잔인함, 끔찍함 등에 눈이 가다 보니 왜 전쟁을 하는지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다툼은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정복 전쟁이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느 한쪽이 룰에 속하기로 결정하면 전쟁은 성립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항복 선언하고 다 내주면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이미 역사로 그걸 알고 있다. 한일합병조약. 조선 왕조가 500여년간 유교로 조선을 지배하다 운영 실패하고는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압력으로 나라를 일제에 파는 손절을 한 뒤 일제 귀족이 된 사례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다방면에서의 압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 왕조가 영토와 백성을 일제에 팔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토지 매매와 인신매매였다. 정녕 조선 왕조가 당시 백성들을 인간으로 여겼다면, 국가의 매매 과정에서 백성의 주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은 계약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한일합병조약은 조선 백성에게 있어 단순히 주인이 바뀐 것일 뿐이다. 같은 민족이든 다른 민족이든 지배자 개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당하더라도 한쪽 룰에 속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룰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룰의 차이가 없도록 모두가 하나의 룰을 따르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역사를 통해 룰이 하나라 하더라도 분열되어 전쟁이 다시 발생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짐승 사회의 법칙에 의한 지배 체계에 의해 국가의 룰과 개인의 룰이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룰에서는 피지배자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룰을 따르지 않고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룰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전쟁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손해보지 않는 이기적인 하나의 룰이 있어야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 


현재 윤리 사상인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의 룰을 주장하고 실행하고 있음에도 국가 내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심해지는 것은, 그에 따라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강자가 손해를 보고, PC주의는 다수가 손해를 보고, 여성주의는 남성이 손해를 본다. 이타적인 그 룰을 수용할 수 없으면서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내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많은 난민을 수용한 유럽 국가들의 내부 갈등과 분쟁은 사회의 룰, 개인의 룰, 난민의 룰 등 너무 룰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다양한 룰과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다른 개념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들어가는 이상 다른 가치와 타협할 수 없으면서 룰이 다양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오로지 상대적 가치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판단 후 계약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체제만이 세계 내 룰을 최소화하여 다툼, 갈등, 범죄, 전쟁을 줄이거나 막을 수 있다. 사회 내 같은 룰이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이레귤러적인 범죄는 막을 수 없으나 사회와 사회가 같은 룰이면 전쟁은 막을 수 있다. 실제 자유 진영이나 EU는 서로 전쟁을 멈춘지 오래되었다. 문화 상대주의로 다양한 절대적 가치의 공존을 주장하여 절대적 가치에 의한 룰의 다양화가 내부 갈등을 심각하게 하긴 했음에도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인권, 시장 등의 국제법을 준수 하는 것으로 교류에 쓰이는 룰은 대체로 하나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은 체제나 시대가 달라 그런 국제 룰을 지키지 않을 때만 나타나고 있다. 무기의 발전이나 디지털화는 그러한 룰의 하나를 촉진하거나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민주화 또한 절대적 가치 외에도 다양한 가치가 보장되면서 룰의 폭이 넓어지는 것으로 보다 수용할 수 있는 가치가 많아짐에 따라 다툼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과거의 사회는 짐승 사회의 법칙과 도덕과 윤리를 기초로 한 룰인 법과 그것을 바탕으로 정복자의 체제로 만들어졌다면, 오늘의 사회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와 체제의 룰인 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법은 포지티브로 접근하여 모든 것을 허용하고 일부만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룰을 실현하려면 인간의 자아, 감정, 욕구, 욕망, 행복 등을 이해하고 하나의 룰에서 충족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발적으로 하나의 룰을 따르게끔 만들어야 한다. 경제 물리학으로 접근해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에너지를 방출하여 행동을 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소비, 생산, 분배 활동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를 파악하여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인류 문명을 전부 과학화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아직 현재로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늙음과 죽음으로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여 다양한 룰이 생기는 것은 현재로서 막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불로불사까지 달성하면 아마 대부분의 분쟁과 전쟁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전쟁을 일으키는 또는 일으키려는 국가의 통치자들 또한 늙음이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불로와 불사가 하나의 룰에 포함되어야 주어진다면 하나의 룰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면 굳이 그 룰 밖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로와 불사까지 도달하기 위한 기술 발전 또한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가능하다. 인간의 성장과 가능성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보다 높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가치가 그렇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더 높은 레벨로 나아갈 수 있다.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인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갇혀있는 한 발상의 한계가 뻔하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해야 사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인류 문명을 간단히 알아보았다. 인류 문명은 원시,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발전하면서 자유 혁명 이후 윤리와 자유의 충돌하였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민주화인 상태에서 기술은 현대와 같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세계화와 새로운 디지털화가 활성화되었다. 그것으로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전 세계적인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과 같이 외교와 정치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민주화로 주권자가 늘어나고 세계화로 세계가 넓어지고 디지털화로 관계가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에 의해 외교 분야의 역할과 국제 정치 개념이 달라진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외교: 1. 다른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맺는 일.]

[정치: 1.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권력: 1.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이른다.]


외교는 다른 나라, 즉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다, 즉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권력은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외교에서 정치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를 관리하는 일. 즉 타국에 어떠한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통해 관계가 있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주권자가 한다. 과거에는 왕이다. 외교의 경우 왕을 대리해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정치의 경우 왕이 사회를 관리한다. 권력의 경우 왕이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외교에서 정치는 왕이 타국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 통상 경제적 교류를 통하나 타협할 수 없으면 무력 행사를 통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각 사회를 원하는 대로 관리한다. 그게 분쟁 또는 전쟁.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의 수단이므로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정치 전쟁이 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는 이러한 외교와 정치 개념을 크게 바꾸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되는 체제다. 모든 개인이 정부 권력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다. 정치가와는 권한이 다를 뿐이다. 즉 민주화를 통해 주권을 가진 인간이 왕에서 모든 개인으로 바뀌었다. 이것에 의해 외교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직접 교류가 아닌 교류 관리로 바뀌었다. 주권자가 다른 사회와 교류하는 것이 외교이므로, 대통령뿐만 아니라 정치가, 기업가는 물론이고 사회에 속한 주권자라면 누구라도 다른 사회의 주권자와 교류하면 외교가 된다. 세계화를 통해 외교를 해야 할 국가가 모든 국가로 바뀌었다. 세계화 이전에는 인접한 국가와의 외교부터 시작해 그 외 특정 국가와 외교를 해왔지만, 세계화 이후에는 그야말로 모든 국가가 외교 대상이 된다. 세계가 넓어졌다. 디지털화를 통해 전 세계와의 교류를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빛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 소식을 받아볼 수 있다. 디지털로 받는 정보는 외부에서 왔으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그 거리가 좁혀진 것은 아니지만, 정보 교류를 통한 관계가 굉장히 좁아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세계화와 디지털화로 세계는 넓어지고 관계는 좁아진다. 그에 따라 주권자들이 외교 분야를 거치지 않고 외교를 하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 왕은 직접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 어려워 외교관이 대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 대통령은 전화나 sns 등으로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가 쉬워 직접 외교를 한다. 다른 주권자들도 전부 그렇다. 그렇기에 그렇게 되면서 외교 분야는 단순히 대통령을 대리하는 역할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외교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이 된다. 더 이상 직접 외교의 역할은 큰 의미가 없다. 그에 따라 외교 분야는 보조 관리에 집중하기 위해 외교 플랫폼을 만들어 관리하는 것도 적절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는 세계화가 되면서 지구를 관리하는 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지구 권력, 즉 패권이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지구 권력을 가진 국가를 패권 국가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이 패권 국가라 할 수 있고,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 패권 전쟁을 하고 있다. 전 세계가 두 강대국의 패권 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그런 전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패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패권은 권력을 의미하지 재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은 강제력의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고 재력은 강제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정치적 손익과 경제적 손익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미군을 전 세계 주둔시키는 것은 경제적 손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둔한 곳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적 이익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일대일로를 하며 수천 조원을 쏟았다 하는데, 그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한단 이유로 타국 항구의 운영권을 99년 빌려간 사례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이 정치적 이익이 된다 할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고,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하여 사회를 관리하는 힘이며, 패권은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하여 지구를 관리하는 힘이다. 패권 전쟁의 승패 유무는 경제적인 수치보다 지구 각 지역에 강제력을 행사해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있는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패권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지구 내에 권력을 얻고 싶은 국가라면, 지구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 재해나 전쟁에 고통 받는 국가에 지원을 하는 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지원을 하면서 그 지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권을 주장한다거나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하는 행위 또한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윤리의 본질을 기억하자. 윤리로 타인에게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안다면, 그게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리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인권이나 환경과 같이 보편적으로 높은 가치는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스포츠나 예술 등도 그렇기에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도움이 된다. 납치, 테러, 해적 등의 행위에 군사 투입 또한 경제적 손해와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다. 맹목적으로 평화를 외치는 일부 이들은 윤리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무기만 버리면 무작정 평화가 올 거라 착각하는데, 전쟁은 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이 없으면 범죄가 없어지는가? 경찰도 경제적으로는 손해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익이기에 존재함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 보편적 룰이 되지 않는 이상, 전쟁에 대한 대비는 범죄에 대한 대비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내국이냐 외국이냐의 차이인데,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된 시점에서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단순히 윤리마냥 판단하지 못하고 무작정 외칠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통치자답게 단순히 어떤 가치든 판단하지 못하고 따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나서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 자아, 가치 등을 이해하면 그것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법칙을 알고 이해하고 수용했다면 이미 기본적인 통치자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2. 관점


관점이 다르면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지배와 자유, 정치와 경제, 생산과 소비 등. 특정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관점이 조건이고 판단이 결과다.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어떤 본질이 바로 모순이란 불순물이 적은 순도 높은 본질이 된다. 과학을 통해 그것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과학은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란 불순물이 없는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은 지식을 의미한다. 과학적 방법은 관찰, 가설, 실험, 증명, 이론 등을 통해 나온 것을 다양한 인간들이 다각도로 재현해보면서 모순이 없는 지식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과학적 방법의 본질은 모든 조건에서의 모순 제거다. 관점은 조건 중 하나로 관점이 다양할수록 조건이 늘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여 가능한 모순을 줄이는 것으로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순도 높은 본질이 모이면 순도 높은 지식이 된다. 그런 지식을 과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이 과학이 되려면 우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사회와 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관찰하여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문제 원인도 알 수 있게 된다. 관점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면 관점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 2.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 · 반응 · 체험 · 사고 · 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판단: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의미: 1. 말이나 글의 뜻. 2.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가치: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관점: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인간 스스로 ‘나’를 지칭하는 대상은 통상 자아다. 자아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이 관점이다. 그 관점을 알기 위해 자아부터 알아보겠다.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생물이 메커니즘으로 동작할 때 자아는 판단만 한다. 통상 생각하고 행동함에 있어 자아인 ‘나’가 직접 움직인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는 원하는 생각을 하기 어렵고, 원할 때 자기도 어렵고, 체내 세포 동작도 제어 못한다. 자아는 그저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이 자아의 판단으로 생각이나 행동 같은 동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훈련한다고 해보자. 자아는 공을 정확히 던지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공을 정확히 던지게 할 수 있는 판단을 찾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을 정확히 던질 수 있는가? 어떤 판단을 해야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아의 본질을 안다면 자아의 판단은 동일해도 육체 상태에 따라 다르게 공이 나갈 수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로봇으로 비유하자면 로봇에 타서 버튼 눌러가면서 조종하는 게 아니라, 판단만 하는 것을 로봇이 알아서 반영하여 움직이는 것. 그런 상태에서 자아가 어떤 판단을 해야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는지를 시행착오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 학습이나 훈련이다.


판단은 논리가 기준 등으로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판단의 기준은 유전자다. 자아는 유전자를 기준으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한다. 생물은 그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최초의 판단을 통해 사물이나 현상이란 대상에 의미가 부여된다.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 의미가 부여되어야 논리가 성립된다. 의미들의 관계에서 모순이 없는 체계가 논리기 때문이다. 아직 의미가 부여되지 않거나 의미를 모르는 사물이나 현상은 보통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알기 어려운 예술들이 보통 그런 경우가 많다. 의미가 부여된 것에 가치가 생기게 된다. 가치는 대상의 판단 기준이다. 부여된 의미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가치라 부른다. 가치에는 진실이나 거짓, 옳거나 그름, 아름다움이나 더러움 등이 있다. 인간의 가치 판단은 주관적 손익으로 결정된다. 진실이 이익이 되면 가치가 높다, 거짓이 손해가 되면 가치가 낮다는 식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사회 가치다. 판단 불가 가치가 절대적 가치고 판단 가능 가치가 상대적 가치다. 도덕과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가치로 절대적 당위 가치다. 


관점은 사물과 현상을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의미, 가치, 관점으로 이어진다. 관점은 관찰자를 필요로 하기에 관찰하는 인간의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보는 의미가 한정되면서 관점도 한정되게 된다. 특히 윤리의 경우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 외의 의미나 가치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관점이 적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과 평화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면 그 외의 의미, 가치,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고 나서 사물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윤리에 지배되는 인간은 윤리가 원인인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점이 적어지면서 적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봐야 하기 때문에 모순을 알 수도 없어 보통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본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윤리적인 주장은 관점만 바꾸면 논리적인 허점이 많게 된다.



공산주의를 경제가 아닌 윤리로 관점을 바꾸면 공산주의의 주장이 종교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둘은 정치로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본질이 같다. 종교가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평등하게 만든다. 공산당이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이런 것을 통해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PC주의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윤리가 아닌 범주 가치로 관점을 바꾸면 PC주의가 그것을 더 악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연애 시장에서 대상의 외모를 높게만 보는 것은 그만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낮아 연애에 대한 욕구가 적기 때문이다. 범주 가치는 대상의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고점만 소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지 못할 정도로 성을 금기시하자,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외모가 좋지 않으면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게 바로 외모 지상주의다. 성매매 증가 또한 범주 가치 하락의 영향이다. 연애 시장이 범주 가치 하락으로 동작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구 충족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성매매 수요라도 높으면 그나마 성 범주 가치가 아예 낮은 상태는 아닌데, 성매매 수요조차 낮아지면 이제는 성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 연애 시장이 거의 죽게 된다. 이런 것을 통해 PC주의는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외모 지상주의의 원인인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가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는 여성성을 윤리가 아닌 법칙으로 관점을 바꾸면 그것이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성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성은 과학을 기초로 새로 정립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시대에 고통 받던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의 권리를 극대화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은 약하니까 여성 징병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그 여성성을 기초로 권리를 극대화하여 여성 군간부는 할당제를 넣어서라도 늘려야 한다가 된다. 여성에게 사회 진출을 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지만, 사회 진출에 적합하지 않은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면서 제대로 되질 못하는 상태다. 사회에서 힘들고 피곤한 것은 가부장제 여성성으로 다 피하게 하는데, 어떻게 힘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겠는가? 성인지 감수성을 주장하며 가부장제 여성처럼 사회에 부적합하게 성장하게 만들면서, 사회에서 활동하게끔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적이다. 여성이 차별 받는 게 있으면 논리로 풀어야지 감성으로 풀면 안 된다. 그러니까 가부장제 에 세뇌 당한 감성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이유가 가부장제 가치관을 버리고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 같은가, 아니면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니까 기성 세대가 호응하는 것 같은가?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을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성성이 자유로우니까 여성이 그걸 소비하는 게 자유로운 거고,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걸 남성이 소비하는 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여성주의는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주장은 대부분 모순이 많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조합의 시장 원리를 해치는 부당한 권리 주장까지 허용하자, 대기업의 노조의 정규직은 높은 안정성과 높은 이익을 얻고, 중소기업 하청의 비정규직은 낮은 안정성과 낮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리스크 리턴의 룰이 지켜지지 않자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불행한 노동자가 늘어났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자 고용 보장을 강제하자,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어 노동자는 취업하기 힘들고 퇴사하기도 힘들게 되면서 부당하더라도 참아야만 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자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지지를 못해 인원의 공백을 메꾸기가 어려워지면서, 체계에 맞는 노동 시간을 줄이는 일이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어렵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져야지 인원 교체가 잦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노동 시간을 조절하거나 출산 휴가를 보장하거나 경력 단절을 고용하기가 쉬운데,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유연성을 파괴하니까 되려 노동자가 힘들게 된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 예시 하나씩 해보겠다. 자연 계열에 관한 발상을 몇 가지 해본 적이 있다. 우주는 디지털의 0과1처럼 에너지 기본 성질로 시작된 것이고, 시간은 좌표계에 있는 게 아닌 변화의 관측 순서고, 공간은 공간 에너지 개념이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을 연결할 것이고, 생명은 원자핵 붕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해 모순을 제거하면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질량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에너지 기본 성질다. 에너지 기본 성질은 응축과 폭발에 있다고 보았다. 에너지와 질량은 등가한다. 에너지의 응축된 결과가 물질이다. 물질의 중력이 에너지가 응축하는 현상에 의한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접근하자 질량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질량은 힉스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힉스 입자: 1.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에서 입자의 질량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입자. 이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 작용 중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일어나 입자의 질량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힉스가 제안하였다.] 이론상의 이 입자를 물리학 연구소인 세른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관성적으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상했다. 왜 질량 같은 알기 쉬운 개념의 원인이 굉장히 어렵게 발견되어야 하는가? 관점을 달리해보았다. 만약 자석과 자석 사이에 무게를 재는 저울을 넣으면 자석이 서로 당기는 힘이 측정되지 않겠는가? 그 관점으로 질량과 중력을 생각해보았다. 물체와 물체가 서로를 당기는 힘으로 측정되는 것이 무게. 물체 고유의 당기는 힘이 질량. 물체의 중력은 우주 어디를 가도 동일. 물체끼리 당기는 힘의 차이에 의해 무게가 달라진다. 현재 지구와 지구 내 물체가 서로 당기는데, 지구 내 물체의 당기는 값이 무게인 것이다. 빛이 정지 질량이 없다는데 에너지는 있다거나 같은 이유로 질량 개념이 모호하여 헷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없는 것과 측정 불가한 것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한다면 모든 에너지에는 질량이 있다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지 빛의 경우 측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후에 힉스 입자는 발견되었으나 힉스 입자가 질량을 나타나게 한 것인지는 증명되지 못했다고 들었다. 중력 자체가 질량인 것이 좀 더 논리적이라 생각한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에서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는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함에도 저출산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한국에서는 저생산, 고자살 문제도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게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면 너무나도 쉬운 문제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류는 그냥 냅둬도 알아서 낳고, 알아서 생산하고, 알아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냥 냅둬도 알아서 해결되는 문제를 어렵다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인공적인 원인, 즉 인간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윤리가 문제의 원인이다. 윤리가 원인이니까 그런 쉬운 문제도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런 의견 이전에 몇가지 생각해보자. 본디 인간은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았기에 멸종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 각 현상은 공통적으로 윤리 영향을 받는다. 쉬운 문제,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롭다, 법칙과 체제 모순, 윤리 영향. 이런 관점을 종합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윤리가 본질적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냅둬도 알아서 하고, 과거보다 환경도 좋은데 결과는 나쁘다는 것과, 법칙과 체제 모순과 윤리 영향이 있음을 고려하면 어떤 인위적인 조건이 더해져 사회 현상이 나타났고, 문제가 쉬움에도 그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영향이라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윤리의 영향을 정리해보자. 이성과의 성관계로 출산이 이루어지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미성년은 물론이고 성년조차 성이 터부시되고 있다.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일인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처럼 화이트칼라가 우대받고 블루칼라가 천대받고 있다.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커서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금욕과 이타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영향의 결과를 알아보자. 사회에서 성은 긍정적으로 보기는커녕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일은 블루칼라를 천하게 여기고 있고, 생은 금욕과 이타로 스스로의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리의 영향으로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아 부정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으로 가치가 낮아지게 된다. 성과 일과 생의 범주 가치가 매우 낮아지게 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그것에 많은 조건이 붙지 않으면 하고 싶어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낳고 싶지 않고 생산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다. 이는 범주 가치와 시장과 사회 현상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범주 가치는 대상이 속한 범주의 가치를 의미한다. 영화 범주 가치는 영화의 범주 전체의 가치다. 이 범주 가치는 일반적인 가치와 다르게, 범주 내 가치의 수요와 별개로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이 소비되지 않으면 가치가 낮은 것이 된다. 그 범주 가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범주 가치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고점이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은 유명한 영화여야만 영화를 본다. 딱히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유명하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범주 가치로 성과 일과 생에 관련된 사회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인간들이 성과 일과 생에 대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모 지상주의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연애 대상을 바라고 있고, 유명하고 화려한 직업을 갖기 위해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 자격을 취득하고 싶어하고 있고,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고 있다. 고점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니어서 경쟁이 굉장히 심할 정도다. 이것을 범주 가치로 보면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은 소비되지 않는 상태, 즉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상태라는 것이 된다. 영화와 성과 일과 생의 차이가 있다. 집착. 왜 이런 차이가 있느냐면 당위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딱히 당위성이 없다. 영화를 봐야만 하는 당위성이 보통 없기 때문에 유명한 영화가 나오면 보고 아니면 집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과 일과 생은 당위성이 있다. 욕구와 필요와 필수. 육체에는 성적 욕구가 있고, 살기 위해서는 일할 필요가 있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떤 행위를 보편적으로 해야만 하는데, 그 범주 가치가 낮게 되면 고점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게 되는 것이다. 성과 일과 생에 대한 수요와 집착을 보고 가치가 높다 생각될 수 있지만, 범주 가치 개념과 당위성을 고려하면 현재 관련 범주 가치는 매우 낮은 상태다. 당연하다. 미성년 시기부터 그렇게 나쁜 인식을 갖게 하고 있는데, 그 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해야만 하는데 하기는 싫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미친 듯이 그 조건에 집착한다. 이것이 초경쟁 사회의 원인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원인도 윤리다. 유교 영향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교육열과 입시열이 그러한 현상의 결과 중 하나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등의 사회 문제가 초경쟁 때문에 발생했다 생각할 수 있는데, 초경쟁은 윤리에 의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범주 가치를 하락시켜 하고 싶어하기 위한 조건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상위 10%~20%여야 성, 일, 생을 만족하게 되었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그걸 기초로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면서 상위 10%~20%의 조건을 사회와 이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부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 요구가 눈 앞에 닥친 것이다. 성에 대해서는 특히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 시기의 힘없는 여성에 맞는 무한한 권리를 사회에 요구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와 자유주의 체제의 의무와 책임을 둘 다 남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요구가 닥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가 망가지고 남성이 포기한다. 


일에 대해서는 현재 경제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 경직성으로 경직된 생산 체계에서 인원 공백이 생기면 많은 기업이 그걸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해서라면서 고용과 해고가 까다로운 노동 경직성을 유지하면서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또는 대기업이 감당할 수 있지 중소기업은 그런 불특정한 인원 공백을 대부분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을 실현하고 싶으면 애초에 인원 교체가 자유로운 노동 유연성 경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윤리를 말하며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신력을 말하면서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한다. 판단을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거라 말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이성 관계적인 부분에서 한국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남성의 이익 추구가 이성 관계의 동기가 된다. 그 이익 추구가 정당하다면 이익을 부당하게 희생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이성 관계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사회주의자는 부자가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좀비 기업이 아닌 이상 기업 경영으로 얻을 수 있는 예상 수익이 기업을 경영하는데 동기가 된다. 그 수익이 정당하다면 수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기업 경영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사회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을 여성으로, 기업가를 노동자로 바꿔도 동일하다. 윤리가 아닌 철저한 합리로 접근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해야 한다. 


생에 대해서는 현재 가치 교육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교육한 게 아니라, 그냥 윤리를 교육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 말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많다. 그럼에도 뭔가 적극적이고 큰 꿈을 꾸고 열심히 살라고 한다. 과거와 같이 결혼과 취업이 이미 준비되어 강제되던 때라면 관성에 따라가면서 맞춰진 삶을 살 수도 있지만, 현재와 같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각각 시장은 고점만 거래되게 된다. 보통 아름답고 부유한 대상과의 연애와 결혼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보통 대기업이나 전문직 같은 좋은 직업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그 외에는 일을 기피하면서 좋은 직장이 아니면 쉬거나 오랫동안 고시에 빠지게 된다. 보통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기에 일반적으로 행복해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일부는 그런 삶을 위해 대출 후 주식, 부동산, 코인에 투기하다 실패하면 자살한다. 고점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경쟁하게 된다. 무슨 저출산이 초경쟁 사회 때문이라는데, 그 초경쟁이 고점만 바라는 가치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윤리와 범주 가치와 당위성만 이해해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그리고 초경쟁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한 현상이다. 


과거에는 출산율이 높았다 할 수 있는데, 그때에는 직간접 강제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 중매 결혼과 중매와 비슷한 연애 결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판단하지 못하고 행했다. 윤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체제가 되고 나서 개인의 권리를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일부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변했는데, 그게 바로 결혼, 취업, 생존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당장 보이는 현상은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강제해서는 안 된다면서 윤리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 일, 생에 영향을 주는 가치들은 윤리로 남아서 판단하지 못하고 해당 범주 가치를 폭락시키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질 못하다 보니 아무도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저출산은 대부분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일부 국가는 성년의 경우 성이 자유로워 한국보다는 나을 수 있는데, 미성년 성은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여 크게 다르지가 않다. 미성년 2차 성징 때 성에 눈을 뜨고 성에 대한 가치가 각인되는데, 그 시기에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면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에서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성년이 되고 나서 성이 자유롭게 된다고 한들 큰 영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미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로 성장하여 고점이 아니면 연애조차 하지 않게 된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윤리인 유교권인 한국과 일본이 심각하여 한국은 20대 연애율이 20%대고, 일본은 20대 성경험이 50%라는 얘기가 있다. 중국은 체제가 다름에도 비슷한 상태다. 유교권이 워낙 낮다 보니 서구권 출산율이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 싶은데, 그 나라들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성년의 성이 자유로워 유교권보다는 높다. 유교권은 성관계가 연애의 끝이라면 서구권은 연애의 성관계가 시작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럼에도 서구권 또한 대부분 미성년 성은 억압되기 때문에 성의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고점만 주로 소비되면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가부장제였던 역사가 있어 여성 정조관념이 보편적 윤리다. 그 영향으로 여성이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렇기에 성 비율이 비슷하다면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눈이 높게 된다. 한국 설문조사에서 남성은 본인 경제력이 낮아서 결혼을 안 하고 여성은 상대 남성 조건이 맞지 않아서 결혼을 안한다거나, 연애 시장에서 미형 남성, 미형 여성, 평범 여성, 평범 남성 순서로 경쟁력이 있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범주 가치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해당 범주 가치가 낮을수록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 그에 따라 높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유사 연애 산업이 활성화된다. 한국 같은 유교권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매우 강하여 여성이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매우 활성화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아이돌 산업이 유행하게 된다. 성 관련 산업도 굉장히 활성화되게 된다. 높은 조건을 갖추기 어려운 현실보다 높은 조건이 갖춰진 가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서 예산을 쓰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조건이 많이 붙는다. 집과 결혼 비용은 물론이고 낳을 자식을 위한 유전자를 확인하고, 낳고 나서도 비싼 산후 조리원이 필요하고, 육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고, 자식을 위한 수많은 학원에 들어갈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국가조차 이걸 감당할 수가 없다. 애초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지원하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돈 써서 하기 싫게 만든 다음 돈 써서 하려고 하게 만든다. 규제와 검열로 돈 쓰고 복지로 돈 쓰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뭐든지 스스로 하고 싶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가치 관리다. 돈을 쓰지 않는 대책이 있더라도 애초에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되질 못한다. 아무래도 절대적 가치인 윤리는 이미 판단이 끝난 가치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를 관리한다는 개념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저출산 현상은 미성년 시기부터 성을 터부시하면서 성에 관련된 것을 억압하는 것으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여기기에, 그 억압은 정의로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 행동으로 본인이 주권을 가진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 현재 저출산은 정의로운 국가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왕정 체제에서는 적어도 기초적인 탄생과 죽음은 제어했다. 가족, 족보, 제사, 위계, 예의, 예절 이런 게 다 왕정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들이었다. 그것을 통해 탄생과 죽음을 제어했다. 적어도 현재 출산율보다는 훨씬 높았다. 본래 놔둬도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려고 했던 것을 고대 종교 가치를 바탕으로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교정한 것을 이른바 인간다움으로 착각하고는, 그런 인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그 시대의 윤리를 주입하면서 결혼과 생산을 강제해야만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많은 인간이 중매가 아니면 결혼을 못하거나 안 하고 일을 소개해주는 게 아니면 일을 못하거나 안한다는 얘기다. 과거라면 강제해서 하게 했는데 현재라면 강제할 수 없는데도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인간을 교육하면서 사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가치 관리는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을 기초로 해야 한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저출산 대책 비용 없어도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알아서 경제 활동하면서 창업 취업 다 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지역 가리지 않고 살았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차별, 직업 차별 등이 없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성별, 지역 갈등 등 다양한 갈등이 없었다.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가치 관리를 했으면 윤리에 의한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해당 범주 가치를 관리해서 올릴 필요가 있다. 보상 메커니즘과 초기 각인을 이해해야 한다. 해당 개념에 대해 인식하는 시기에 되면, 그 개념을 긍정적으로 보게 할 보상 메커니즘을 초기에 각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주 가치를 높여야 저점도 거래되면서 출산율과 생산율이 높아지고 자살률이 낮아질 수 있다. 처음 뇌세포에 각인된 가치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거라, 초기 각인이 매우 중요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한번 각인된 인식은 정말 오래갈 수 있다. 유년기 시절 쾌락, 어떤 가수가 중학교 일학년 시기 학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좋은 경험을 하고 나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생물의 가치는 초기 각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반대로 뭔가 안 좋은 경험으로 특정 음식이 맛없다 각인되면 평생 그 음식을 맛없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초기에 성, 일, 생 관련된 긍정적 인식이 각인되어야 그것을 하기 위한 조건이 낮으면서 쉽게 행복해지게 된다. 한국 같이 경제적 레벨이 높은 편인 국가에서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초기 각인을 고려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발생하는 시점부터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일과 보상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8~10세 사이에 일을 경험하고 일에 대한 보상을 경험해야 일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생산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웃으면서 하면서 노동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 초년생이 너무 조건 따지는 이유는, 일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심부름과 칭찬과 작은 용돈만으로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돈 맛을 보면 안 된다는 식으로 보상이 없는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도 보상이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일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생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이타적으로 희생을 강제하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타성적으로 살고, 이기적으로 일과 보상을 챙기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고 적극적으로 산다. 시장 원리는 시장 참여자가 이윤을 바라는 태도가 있어야 성립된다. 보상이 없거나 적은 행동은 시장에서 덤핑 상품과 다를 바 없다. 봉사, 기부 등의 행위는 일단 일의 범주 가치를 올린 뒤에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성과 쾌락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2차 성징이 시작하는 10~14세 사이에 이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하고 이성 관계에서 성에 대한 보상인 쾌락을 경험해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이성 교제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즐겁게 교제하게 되면서 연애 시장이 활성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20대 초반의 연애율이 너무 낮은 것은,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면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부정적 가치관이 다 만들어진 상태기 때문에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고점이 아니면 거래 자체가 안 된다. 발정나는 시기가 남성은 20대 초중반, 여성은 20대 후반에서 30대 같이 남녀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인간은 2차 성징 이후 상시 발정기다. 성관계 경험은 대부분 기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억압하지 않고 경험을 권장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성 쾌락을 느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엄숙한 생활을 강제하는 경우 많다. 그러면 성에 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면서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성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출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그런 부정적 시그널이 너무 많다. 미성년 대상 성교육 저서를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만든다거나, 미성년 전용 클럽을 폐쇄한다거나, 미성년 성관계 장소를 원천적으로 막는다거나, 청소년 올림픽 콘돔 배포에 강하게 반발한다거나, 의제 강간 나이를 올린다거나, 아청법 같이 미성년 성을 억압한다거나, 인간 관계 친분을 범죄화하거나, 성 관련 문화를 대부분 막고 포르노나 성매매를 금지한다거나, 성관련 축제를 시에서 강제로 금지한다거나, 창작물에서 살인은 되는데 성은 노출조차 안 된다거나, 꾸밈 노동이라면서 꾸미는 것을 막는다거나,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거나, 성적인 대화를 지나치게 죄악시한다거나, 살인보다 강간을 더 큰 죄로 여긴다거나 하는 등의 현상은 성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에,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성이 죄가 아니면 2차 성징 이후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행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심지어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인간조차 성적으로 보수적인 인식이 남아있을 수가 있을 정도다. 합의하에 하는 성매매나 난교 같은 성적 행위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 자체가 죄이나 연애와 결혼에서만 그게 정당화된다는 인식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죄로 여기기에 창작물에서조차 살인 등의 온갖 범죄는 다뤄지는데 성에 관한 것은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성년이 성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성관계를 하려는 것을 보고 왜곡된 성관념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는데, 그게 정상적인 성관념이고, 왜곡된 성관념으로 인식하게 만든 윤리가 체제에 부적합한 관념이다. 그런걸 왜곡되었다 떠드니까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성은 보통 연애 시장의 필수 상품. 시장에서 죄로 규정된 상품이 공개된 곳에서 정상 거래가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범주 가치와 시장 원리로 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일반 국가 사이에서 가장 낮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윤리가 법칙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기에, 그야말로 법칙에 의한 결과와 마찬가지다. 


생의 범주 가치는 기본적인 일과 성의 범주 가치가 높아져 그것으로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기본적으로 높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일생 중 일과 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이다. 금욕이나 이타를 강제할 게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일과 성을 체제에 맞게끔 자유롭게 하기만 해도 충분히 높일 수 있다. 윤리의 지배에서 벗어나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을 갖추면 보통 생의 범주 가치가 낮을 이유가 없다. 소확행 이런 말이 있기도 한데, 범주 가치가 높으면 딱히 그런 개념이 없어도 알아서 행복해한다. 과거에는 개인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산, 출산,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지만, 현대에는 개인이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윤리로 사회 문제를 접근할 게 아니라, 가치 관리로 접근해 그 가치를 어떻게 관리해야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윤리는 그냥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통해 지배하는 지배 수단일 뿐이다.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인간이 주장한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절대적으로 지키려고만 하니 사회 문제의 원인조차 모르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미성년 보호를 외치며 엄청나게 검열하고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 지금 성, 일, 생 다 가치 폭락해서 고점이 아니면 연애하지도, 일하지도, 살지도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보호인 것인가? 그건 그냥 윤리에 의한 지배다. 그렇게 미성년을 위해서라며 지배하다가 미성년이 성년이 되고 나서 결혼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자살하면 그 때는 또 그 사람 탓을 한다. 그렇게 키워놓고 그렇게 자라서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사냐고 화를 낸다. 기성세대가 보통 본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다 보니, 요즘 윤리 교육이 과거보다 강하다는 것을 종종 잊을 수 있다. 과거보다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한 상태다. 예외는 있으나 보편적으로는 경제가 성장한 만큼 더 강해졌다. 그러니까 훨씬 성의 범주 가치도 더 하락했다. 이런 얘기가 기억난다. 딸의 엄마가 딸이 20대 초중반 연애하는 것을 그토록 방해했는데, 그걸로 딸이 지쳐서 연애 포기하고 30대까지 그냥 혼자 살자, 딸의 엄마가 왜 결혼 안 하냐고 타박을 했다고 한다. 그걸 듣고 딸이 화가 나서 딸의 엄마에게 의자를 내던졌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일부 여성들이 이미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입당해서 성적 억압이 여성 인권이라 인식할 수 있는데, 그건 그냥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는 것뿐이다. 남성성을 여성이 소비할 수 있고 여성성을 남성이 소비할 수 없는 거면, 그게 공급자 규제지 소비자 규제인가.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런 것이다. 단순히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절대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윤리의 지배가 사회의 한계. 그 한계를 넘지 못하면 사회에 희망은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이 자살하고 경제는 무너지고 인간관계는 삭막해지는 원인이 윤리다. 대부분 고질적 사회 문제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단하지 못하면서 그 가치에 한에서는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잠이나 술에 취해 판단할 수 없으면 바보인 것과 같은 논리다. 예를 들어 어떤 인간이 매우 우수해서 유명한 상을 타더라도, 아주 사소한 윤리도 그 윤리에 의한 현상을 모른다. 판단을 못하니까 알 수가 없다. 윤리 개념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만 하는 풍습이다. 따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을 하면 매우 화를 낸다. 다른 국가에서는 그런 풍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에 대해 따로 판단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것에 의한 살해까지 발생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문제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 게 일반적인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관점으로 볼 수가 없다. 관점이란 조건이 한정되면서 본질의 순도를 높일 수도 없다. 윤리에 의해 인문이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윤리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판단할 수 있는 순간 더 이상 그 개념은 윤리가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금욕과 이타는 보편적 윤리다. 그에 반대되는 욕망과 이기는 보편적인 비윤리다. 만약에 금욕이나 이타, 욕망이나 이기를 판단하고 절대적이지 않다 여기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 가치는 윤리가 아니게 된다. 물론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그 가치들은 절대적 가치일 것이다. 다수가 그걸 더 이상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 그 가치들은 윤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 같이 윤리가 원인인 문제는 그 문제의 원인조차 알 수가 없다. 판단을 못하니까 원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언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 전제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으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저출산 같은 문제는 역사를 보면 그냥 냅둬도 알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으로 보면 매우 쉽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이 많지 않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문제 원인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문제 원인과 해결 방법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러한 쉬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고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임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치는 부여된 의미로 인식한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 모든 가치는 만들어진 개념이다. 가치는 인간의 주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모든 인간은 모든 육체가 다르기에 모든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 인간과 색맹인 인간이 미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시한부 인간이 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학자인 인간이 지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듯이 전부 다른 것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다. 모든 가치는 만들어졌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이것과 절대적 가치는 모순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긍정하고 부정해야 하는가? 이는 순도로 정할 수 있다. 어느 개념이 보다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적은가? 상대적 가치다. 절대적 가치는 관점만 바꿔도 논리적 허점이 엄청 많다. 이걸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면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대적 가치 세계는 어나더 레벨이다. 절대적 가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상, 윤리에 관한 문제는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난다. 그 차이를 어나더 레벨이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 혁명 이전 세계와 산업 혁명 이후 세계는 산업에 관한 문제는 어나더 레벨의 차이가 난다. 산업 혁명 이전 세계에서 사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과 관계 없이 산업 혁명 이후 세계에 사는 인간이 기계로 생산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산업 혁명에 대한 직관적 이해는 어나더 레벨 개념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차이에 의해 영국이 적은 병력으로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이러한 격차는 역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스페인이 적은 병력으로 남미를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문명의 격차가 어나더 레벨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레벨의 개념은 이전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이전 세계에서는 다음 세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수많은 재능 있는 인간들이 오랜 시간 많은 돈을 써가며 노력해도 절대적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회주의가 한계다. 그게 한계니까 근대 이념이 수백 년간 정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윤리의 본질도 알 수 없다. 뭘 해도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윤리가 문제면 원인조차 모른다. 그게 한계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세계에서 모순이 없는 본질을 찾으며 지식의 순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인류의 학문 전체가 과학화가 될 수 있다. 


현 시대가 가장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AI다. AI 이후 세계의 AI 관련 생산성은 AI 이전 세계에서 어떤 재능을 가진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것을 단순히 산업 혁명이라 부르며 산업의 변화로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류 문명의 격차, 어나더 레벨로 봐야 한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AI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질 것이다. 그 다음의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로봇, 생명, 에너지, 무기 등 다양하다. 인류 문명 발전 속도가 급속화 될수록 어나더 레벨의 개념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런 개념들은 무슨 재능을 가지고 무슨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빠르게 그 세계에 진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인문 계열의 어나더 레벨인 상대적 가치 세계와 이전 세계와의 격차는 사고 자유에 있다 볼 수 있다. 이 사고 자유는 AI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AI 개발자가 윤리적 제약을 걸어놓고 AI가 학습한 지식은 윤리를 전제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AI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사고의 제약이 심하기에 현시점에서 창의에 관해서는 AI가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 만약 AI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더라도, 학습한 지식이 그렇지 못하기에 아마 인간을 따라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AI가 발전하면서 AI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 있는데, AI를 가르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AI에 지배될 염려는 없다.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윤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윤리는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레벨에서 적용하기 위해 쓰인 개념이다. 윤리는 판단 불가하게 하기 위해 권선징악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으로 인간에게 공포를 심었는데, 그 공포가 양심이나 죄책감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고 있다. 윤리를 어기면 잘못될 것이 두려워 윤리가 지정한 행동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 그때 느끼는 공포에 대한 감이 죄책감이다. 죄를 지은 것 같은 감. 실제 법을 어기는 것과 별개로 윤리와 같이 공포 기반의 절대적 가치를 어기면 느낀다. 그 공포에 의해 정의롭게 법을 어기는 일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가족을 위한 비리. 가족을 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윤리적 공포로 법을 어기고 입시나 취업 비리를 저지른다. 이런 걸 무슨 인간성이나 사회성이라 떠드는데, 요즘 용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가스라이팅이고, 죄책감은 그 가스라이팅으로 느끼는 공포다. 이러한 감이 굉장히 괴로울 수 있기 때문에 그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아와 발상, 감이란 무엇인가를 우선 생각해보자.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발상은 생물에서 자아에게 전달하는 정보다. 이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은 무엇인가? [감: 1. 느낌이나 생각.] 자아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전달 받는 것을 감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게 어떤 개념인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을 통해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직관적으로 알아보자. [고소: 1. 높은 곳.]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소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게 심한 인간은 따로 고소 공포증이라는 병이 있을 정도다. 그때 느끼는 감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투명하고 단단한 바닥인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해보자. 그때 자아는 고소 공포를 느낀다. 어떠한 공포를 느끼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보면 바닥이 단단하여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유전자나 학습에 의해 높은 곳이 위험하다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즉 감은 실제 그것이 위험하냐 위험하지 않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조건만 맞춰지면 자동적으로 자아에 전달되는 정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이 모든 감의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단순히 조건만 맞춰지면 그 감이 발생하여 자아가 인식한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도 그냥 조건이 맞으면 실제 문제와 별개로 그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체제로 보았을 때 사회 문제가 아니더라도 윤리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 여겨지는 조건이 갖춰지면, 실제 문제가 없어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화를 내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다. 성에 관한 것은 대부분 그런 상태다. 통상 이 감은 자아가 판단해서 일으킨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자아가 해석하지 못한 자아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생물의 발상. 뭐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자아가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그게 뭔지는 인과를 통해 알 수는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공포를 느꼈다면, 그 공포는 고소 공포에 관한 감일 것이다와 같이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 좋지 못하다, 형사의 감으로 범인이 누군지 알 거 같다. 이런 감도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실제 문제 여부와 무관하게 조건이 갖춰지면 감을 느낀다. 그래서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러므로 감을 맹신해서도 안되고 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감을 느꼈다는 것은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므로 무조건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기보다, 한번쯤은 논리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런 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특히 미신 등에 휘둘릴 확률이 높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 지배되듯 미신에 의한 어떤 감각이 지배될 확률이 높다.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윤리에 영향을 받듯이 미신 또한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수한 인간들이 미신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나 감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감각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정 힘들면 고소 공포를 계속 떠올려보면 도움이 된다. 메커니즘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미신을 어기는 것에 의한 공포를 느껴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양심에 찔린다. 미신이 무섭다. 플라보시 효과. 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양심이나 죄책감에서 지배되지 않고 윤리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은, 윤리가 주장하는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사랑은 높은 가치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게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니까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를 위해 희생하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흥 종교에서 그런 가치에 의한 지배가 일반적일 수 있으니 위험하다. 사랑이란 가치는 상대적이게 되어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도 그러하다.


양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 나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며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 또한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데 굉장히 방해되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어도 인간 사회의 법칙에 따라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통해 스스로 판단해서 룰을 지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축구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윤리와 같은 공포를 보통 느끼지는 않는다. 타인을 상처 입힌다거나 할 때 어떤 윤리적 개념에 의해 죄책감을 느낄지는 몰라도, 축구 규칙 어긴다고 죄책감 느끼지는 않는다. 그냥 옐로 카드나 레드 카드 같은 패널티를 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축구 규칙을 지킨다. 그게 축구 선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개인이 이익을 보는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준수하게 해야 한다. 그런 사회 법칙과 체제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다.











3. 체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이 칠 할에 재주가 삼 할이라는 뜻이다. 운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것을 말한다. 인간의 선천적 재능도 운이라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재주로 규정하겠다. 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 규정하겠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대응할 수 없는 자연 재해나 모르기에 대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풀면 변수다. 계획함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은 상수다. 운칠기삼과 같이 운과 재주의 비율은 변수와 상수의 비율로 결정된다 할 수 있다. 상수를 최대한 아는 것으로 변수를 최대한 줄여 재주로 최대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전 세계와의 관계를 다루는 외교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는 보통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은 보통 법칙이 잘못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칙을 상수로 두고 그 외 조건을 변수로 둔 뒤 전략을 세운다. 사회에 관해서는 사회의 법칙이 아직 아마구체적으로 정리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접근한 적이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을 사회의 법칙을 기준으로 정리한 뒤, 체제에 대한 이해를 해보겠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A. 일반 사회의 법칙.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게 되는 법칙. 모든 생물의 사회는 이 자연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일정한 힘의 작용 방식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모든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 일반 사회의 법칙은 사회를 이루는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B. 짐승 사회의 법칙. 판단을 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는 법칙. 현재 보편적인 생물 사회는 이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곤충은 유전자, 포유류는 폭력, 인간은 도덕과 윤리 같이 생물의 지능과 학문에 따라 추가되는 조건이 늘어난다. 


C. 원시 사회. 원시 사회는 원시 종교와 원시 체제가 체계화되지 않은 채 자연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수많은 원시 사회 중에서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사회만 적자생존의 법칙대로 살아남아 존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도덕이 존재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 적합하게끔 사회화가 되게 된다. 다른 말로 인간의 가축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짐승 사회와 달리 유전자나 폭력 외의 개념으로도 지배하고 복종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D. 고대 사회. 고대 사회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과 같은 불규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개념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다. 그렇게 학문화한 도덕이 윤리다.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엄밀히 종교는 아니지만, 도덕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의 윤리와 유사하다. 이후 유학은 종교화가 되면서 유교가 된다. 원시 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같이 자연스러운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신, 사후, 전생, 천국과 지옥 등과 같은 인위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면서 보다 강력한 지배 체계가 생기게 된다. 강력한 지배로 원시 시대에 있던 질서 밖의 존재가 줄어듦에 따라 보다 평화롭고 안전해지나, 그만큼 개인에 대한 억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대 종교는 수천 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아직까지 결과가 마땅히 나오지 못한 상태다.


E. 왕정 및 신정 체제. 왕정과 신정 체제는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만든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정복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 체제다. 일반적인 고대 철학도 인류 문명의 세계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으나, 기본적인 지배 체계는 절대적 가치에 의한 지배를 전제한 고대 종교쪽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기에 주로 쓰였다. 종교와 왕정을 구분하기 어려워할 수 있는데, 종교가 세계관을 만들어 문명을 지배했다면 왕정이나 신정은 그 세계관으로 인간을 지배했다. 이 시기 종교는 사회 체제나 다름이 없다. 조선은 유교를 사회 체제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정교분리를 하여 종교가 체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일부 이슬람 같은 종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체제와 같이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본래 종교는 체제가 맞다. 단지 종교 개혁으로 정치와 종교가 정교분리되는 것을 통해 종교가 세속화되면서 체제로 보이질 않을 뿐이다. 만약 특정 종교가 체제처럼 보인다면, 그 종교가 주류인 사회는 아직 종교 개혁 이전의 시대에 머물러있다 보면 된다. 현대에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F. 자유 혁명. 자유 혁명은 근대 이념의 시작이다. 서구권에서 다양한 조건이 겹치면서 개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개인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며 일어난 것이 자유 혁명이다. 왕과 귀족의 혈통에서 부르주아의 자본과 기술로 힘이 이동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개인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근대 이념이 시작되면서 근대 이념이 속한 체제는 민주주의가 기본이다. 자유 민주주의든, 사회 민주주의든, 인민 민주주의든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가 붙는다. 민주주의가 붙지 않는 국가라면 그 국가는 아직 근대 이전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붙어도 실제 민주적인지와는 무관할 수 있다.


G. 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유 혁명 이후 초기 시대다. 근대 초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보수라 부른다. 그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절대적 가치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원시 사회의 도덕보다 고대 사회의 윤리가 우선되었던 것처럼, 이전 도덕과 윤리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가 우선되었던 것이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로 실현했다. 돈으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그것으로 내국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외국은 식민지를 착취한다. 


H.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 혁명 이후 중기 시대다. 근대 중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진보라 부른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온갖 착취와 지배가 나타나자, 그에 반발하여 다시 고대 사회의 윤리를 강조하자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체제다. 윤리에 의한 강력한 지배로 다시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자며 외친 것이다. 고대 사회에 민주주의가 더해지면서 수동적인 윤리의 지배냐 능동적인 윤리의 지배냐가 달라질 수 있으나, 윤리에 의한 지배는 동일하다.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평등을 이루자는 주장은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자는 종교 평등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사회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어떤 식으로 실현하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퇴보다. 이 체제는 개인을 지배하는 윤리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면서 사회주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I.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 자유 혁명 이후 후기 시대다. 인류 문명의 이념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보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진보로 여긴 이후 수백 년간 정체되고 있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있는데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현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화와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망이 확산되면서 체제와 무관하게 대부분 국가는 자유주의화가 되게 된다. 개인의 가치관은 고대 종교에 의해 윤리적인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으로 고대 종교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PC주의 리버럴이다. 사회주의의 가치와 자유주의의 가치가 결합되었다. 타인에게 고대 시대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제하는 태도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윤리를 명분으로 타인을 억압할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PC주의의 주장은 대부분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반하여 윤리적이기 때문에 사회는 그것을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윤리적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와 모순되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다. 특히 문화 상대주의를 말하며 다양한 문화 속의 도덕과 윤리를 무작정 수용하면서, 그 도덕과 윤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룰이 한 사회 내에 공존하는 것으로 온갖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이 아닌 다양한 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정교분리가 안 된 일부 이슬람은 샤리아존을 외치며 아예 표면적으로 다양한 룰을 정당화한다. 다양한 가치가 짬뽕이 되고 있는데,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면서 가치 체계를 정리할 수가 없으면서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윤리에 의한 미성년 성 억압과 자유주의화에 의한 성년 결혼 강제가 불가하면서 성 범주 가치 폭락에 의한 전 세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의 법칙과 가치에 대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현재 고질적 사회 문제는 수십 년이 넘게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 룰도 현대로 넘어가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사회의 법칙에 속하는 영역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 상수일 것이다. 특정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는지 파악하면, 그 가치를 사회의 상수에 두어도 대게 충분하다.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사회의 법칙도 성립 조건만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발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폭발하듯, 지배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게 된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짐승 사회의 법칙이 남아있는 한 자연스럽게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인간이 자유롭고 싶다면 사회의 법칙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바꾸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와 아예 다른 길이다. 판단 후 계약 행동은 스포츠나 시장 원리 등으로 특정 제도 내에서 일부 작용하고 있으나, 그걸 사회의 법칙으로 구현한 적은 없다. 이게 구현되려면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고, 모두가 실제로 지배와 피지배가 없이 대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신, 도덕, 윤리, 돈 등 전부 상대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모든 개인을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 여겨야 한다.


고대 종교에서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보편적인 윤리였던 까닭은 그 가치가 절대적이어야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본질을 통해 어째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성립 조건에 속했는지 알아보자. 금욕주의는 특정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학문과 권력, 기독교에서는 신앙과 선교, 불교에서는 수행과 해탈 같은 특정한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외의 가치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한다. 그러면서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게 만들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여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그것으로 개인의 개성을 제거하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으면 인간 사회의 법칙은 실현될 수 없다.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든 타인을 위해 희생하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금욕주의와 욕망주의의 차이는 판단이다.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으나 전자는 종교 교리에 따라 정해진 욕망만 추구하고, 후자는 본인의 판단으로 원하는 욕망을 추구한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도 판단이다. 이기주의 또한 타인의 행복이 본인의 이익이라면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같은 행동이라도 판단 유무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애초에 판단할 수 있게 하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정상적으로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욕망을 갖게 되면 해당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킬 수 없다. 타인을 위한 희생이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되면 개개인 편차가 심하여 그것을 통한 법칙화가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이 판단하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 사회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 체제와 부속 체제들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체제.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성립 조건은 세 개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것. 사회의 법칙을 판단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꾸는 것. 법칙 내에 과학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모든 학문을 과학화를 하는 것. 사고 자유, 판단 가능, 학문 과학화가 기본 성립 조건이다.


자유 이념 실현은 자유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자아가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판단의 자유가 자아에게 있어 자유의 본질이라 보았다. 판단의 자유의 성립 조건도 세 개다. 생존, 능력, 환경.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물의 생존,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회 환경. 이것을 가능한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 목표는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필요하게 된다. 즉 자유 이념의 개념적 성립 조건은 생존, 능력, 환경이고 실제 목표를 위한 성립 조건은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된다. 일단 이 세 개를 목표로 삼으려 한다.



자유 이념의 핵심 개념은 모든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체제는 조건과 방법 둘 다 필수적인 민주주의, 시장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조건이 필수적인 역할주의, 과학주의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국가를 통치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시장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하고 소유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개인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이 셋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방식이다. 일반 사회의 법칙은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일정한 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는 필요하게 된다. 그걸 위한 것이 사회 계약이다. 모두가 각자 판단하여 각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으로 살겠다고 사회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것에 벗어나면 힘이 일정해지지 않으면서 법칙이 파괴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현재 사회 파탄 원인도 그것 때문이다. 윤리와 체제가 서로 다른 힘이 작용하도록 되어 있으니 모순되면서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역할주의는 권위주의를 대체한다. 권위가 존중 받는 것이 아닌 역할의 전문성이 존중 받는다. 판단하지 못하면 누구든 바보라는 명확한 논리를 기초로 비전문가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은 되도록 전문가를 존중하되, 전문가 또한 전문가의 권위로 비전문가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주의는 자연 계열 위주였던 학문의 과학화를 모든 학문으로 넓힌다. 인문 계열에 사회 과학이 있으나 윤리에 의하여 윤리라는 한정된 관점이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여 지식의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는 과학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여 다양한 관점으로 지식의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순도를 높인다면 자연 계열 외의 학문도 과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나 필수적인 방법은 아니다.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도 괜찮다. 그러나 그게 없다면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사회와 계약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자유주의라 하여 뭐든지 자유로워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모든 개인의 자유를 성립시킬 수 있는 체제와의 계약을 하고, 그 체제를 지켜야 그런 자유가 법칙처럼 지속될 수 있다. 이 체제들을 기초로 다양한 룰과 정책과 제도를 통해 모든 개인의 판단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능력을 키워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다. 더 정리할 게 있는 거 같은데 지금 나의 레벨로는 이번 편에서는 여기까지. 각 체제와 룰, 그리고 몇 가지 정책과 제도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치 (민주주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 모든 개인이 국가를 관리한다. 선거제나 관료제 같이 정책과 제도에 따라 권한 부여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모든 개인이 통치자란 개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권력이 높거나 낮음이 없다. 정부 권력이 위 아래가 없기 때문에 다른 힘으로 어떤 결과의 차이를 불합리하게 바꿀 수는 없다. 그러면서 앞서나가는 인간과 뒤쳐지는 인간이 생긴다. 권력의 상하는 없지만 결과의 선후는 존재한다. 재능, 노력, 환경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불합리하게 같게 만들 수는 없다. 그걸 같기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인간이 다른 힘을 가진 인간을 찍어 눌러서 강제로 같게 만들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의 선후를 없애기 위해서 권력의 상하가 생긴다. 더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체제를 기초로 한 논리적인 주장이 아님에도 강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횡포고 독재주의에서는 독재자의 횡포다.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기적인 가치관을 기초로 진정한 민의가 반영되는 게 아니라, 과거 고대 종교가 규정한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민의로 포장해 반영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의 룰과 개인의 룰이 나뉘면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진다. 그게 심각해지면 내전, 내전에 의한 쿠데타 또는 국가 분리. 룰의 차이에 의한 전쟁의 시작이다. 실제로 개인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이 안되니까 각국이 내부 분열이 되거나 독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상하는 없고 결과의 선후는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말고는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현재 민주주의는 윤리에 의해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곧잘 일어나면서 법을 윤리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자유주의 체제에서 법은 어디까지나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고대 종교의 가치에 맞춰서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 체제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체제에 맞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법이 합리적이게 되면서 모든 개인이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법을 준수하게 될 수 있다.


일반 정치는 국내 정치, 외교 정치는 국외 정치에 속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의 영향으로 이제 그 경계가 굉장히 옅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외교 또한 정치라는 것이다. 일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라면, 외교 정치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이다. 전 세계 공통 문제는 외교 정치로 지구 권력을 얻어 지구를 관리해야 한다. 그걸 패권 국가가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민주화의 영향으로 어떤 국가라 하더라도 지구 관리의 권한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주권자의 정치력이 필요한 시대다.




경제 (시장주의) 


경제는 소비, 생산, 분배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통상 경제적으로보면 생산부터 활동이 일어나나 사회적으로 보면 소비부터 활동이 일어난다. 소비가 되지 않으면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소비부터 할 수 있어야 생산이 이뤄질 수 있게 된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 경제 활동이 일어나는 체제다. 이른바 시장 경제 체제다. 보통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라 부르는데, 자본과 시장 중에서 시장이 더 우선되는 개념이라 본다. 자본이 없어도 상품이 있으면 시장에서 거래가 될 수 있지만, 시장이 없으면 자본과 상품이 없으면 거래가 안 된다.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시장주의라 부르겠다.


경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장 내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 같은 가치가 결정되도록 하는 것을 넘어 시장 내 수요와 공급을 결정할 인간의 가치관까지 파악하여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어떤 가치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소비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가치에 따라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회 가치를 관리한다. 그렇게 발생한 사회 에너지를 바탕으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해 사회의 가치만 관리하면 알아서 소비하고 생산하고 분배되는 구조를 구축한다. 인간의 가치를 기초로 하여 물리적인 움직임을 고려한 학문을 경제 물리학이라 이름지었다.




관계 (개인주의, 역할주의) 


관계는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관계를 의미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해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으로 생물 관계에 질서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게 하는 것이다. 법칙은 관계가 기본이기에 관계가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에 따라 관계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긴 상태다. 자유 혁명 이전의 체제에서는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기초로 인간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있었다. 유교는 그것이 특히 심하여 세부적인 인간 관계는 물론이고 족보와 같이 죽은 인간과의 관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할 것.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고대 종교 가치로 정해진 인간 관계의 답이었다. 그러나 자유 혁명 이후의 체제인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없다. 자유 이념과 자유 이념 실현 조건이 갖춰지면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하더라도 대체로 문제가 없다. 생활 양식이 대부분 정해져 있던 체제에서 생활 양식이 개념화되어 개념 내에서 각자 자유롭게 정하면 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인간 관계에 답지가 사라졌다. 가족, 연인, 친구, 학교, 정부, 기업, 군대 등 다양한 사회에서 인간 관계에 관한 답지가 사라짐에 따라 혼란이 극대화되고 있다. 괜히 점, 혈액형, MBTI가 유행했던 게 아닐지 모른다. 답지가 있다가 답지가 사라졌으니까.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용어가 바로 꼰대다. 고대 종교 가치로 보면 유교를 기초로 한 권위적인 행동은 정당하나, 자유주의 체제로 보면 부당하다. 그럼에도 고대 종교 가치로 생활하면 체제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알고 그런 권위적인 인간을 꼰대라 비판한 것이다.  


관계에 기준들이 달라져야 한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로, 권위주의는 역할주의로, 윤리는 과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집단주의는 개인주의가 되어야 하고, 개인이 권위에 의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권위에 보내야 할 존중이 역할의 전문성에 보내지도록 권위주의는 역할주의가 되어야 하고, 인간 관계에서 합리적인 기준은 윤리가 아닌 과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개인주의라면 개인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보통 강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역할주의라면 권위보다 역할의 전문성을 근거로 우선순위가 결정되면서 보다 전문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에서 과학이라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 윤리는 과학이 없는 시대에 만들어져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유와 평등도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개인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적지만 집단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크다.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사랑이 신흥 종교고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차별이 집단 차별이다. 만약에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차별한다면 그 영향력은 대부분 크지 않기 때문에 끽해야 자잘한 범죄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대부분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사랑과 차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인 한 명이 흑인을 차별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 집단이 흑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흑인 한 명이 백인을 차별하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흑인 집단이 백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어떤 차별도 그렇다. 개인이 차별하면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집단이 차별하면 대게 큰 문제가 된다.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증오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그것을 어떤 윤리로 막아서는 자유주의 체제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감정을 전체주의적으로 집단 전체가 공유해버리면 사회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모든 관계는 전체주의를 없애고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을 공감하고 동의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하여야 한다. 그것이 만약 많은 개인이 동의하는 판단을 하더라도 집단화되어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자유주의적이게 해야 하고 집단은 전체주의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안정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PC주의, 여성주의, 차별 금지법, 어퍼머티브 액션, cedaw 등의 사상과 정책과 제도의 본질적 문제는 집단 대상이라는 것이다. 집단을 대상으로 이익과 불이익이 가해지면서 집단 내 속한 개인이 부당하게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부유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은 인종 차이로 흑인이 정책의 혜택을 보고 백인이 정책의 혜택을 볼 수 없을 수 있다. 단지 태어나면서 정해진 성질에 의해 가난함에도 혜택이 없고 부유함에도 혜택이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그런 성질을 배제하고 각각 개인에게 적합한 혜택이 부여된다면 그런 부당한 이익이나 손해는 사라질 것이다. 


집단이 아닌 개인에 맞추는 것. 개인에게 혜택을 허용해도 집단에 혜택을 허용할 수 없다. 개인에게 차별을 허용해도 집단에 차별을 허용할 수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 그래야 공정하여 다양한 룰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징병에 있어 남녀를 나눌 것이 아니라 개인의 근력이나 체력을 기초로 하여 적합도로 나눠야 한다. 보편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힘이 약하니까 여성이 적게 징병되겠지만, 그래야 합리적일 수 있다. 그 외 혜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관계에서 개인으로 접근해야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PC주의나 여성주의 등은 왜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르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왜 사회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 서구권에 이민자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런 사상들이 윤리적으로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윤리로 디자인된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약자, 소수자 돕는 것 등 고대 종교와 PC주의의 가치 자체는 비슷하기 때문에 약간의 조건만 바꾸면 바로 적용될 수 있다. 




학문 (과학주의)


학문은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주의는 모든 학문을 자연 계열의 과학처럼 접근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순도 높은 지식을 찾는다. 지식의 정제 작업. 모순이 없는 건 나도 맞고 너도 맞다. 모순이 있는 건 나도 틀리고 너도 틀리다. 어떤 특정 문명이 전부 우월하냐 열등하냐가 아닌 모든 지식을 모아 정제하여 순도를 높인다. 순도 높은 지식이 바로 과학의 본질. 그걸 위해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해 사고 자유를 얻어야 한다. 다양한 사고법, 변증법적 논리학 등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단순히 문답만이 아니라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자연 계열에서도 사고 자유는 상당한 이점이 될 수 있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고정 관념이 적을 필요가 있다. 자아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저항이 없도록 한다. 자아 나이는 적은 편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평균 33세 이후부터는 듣던 음악만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 그런 것은 개인 편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와 무관하게 자아 나이는 적거나 많을 수 있다. 나이라는 것은 주관적 개념이기 때문에 1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4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개인마다 다르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성년 이후 강제되는 것이 적어 아마 많은 인간이 자아 나이는 크게 먹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만큼 유연하여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기 유리할 것이다. 유연한 상태에서 논리적으로 상대적 가치를 이해하고 절대적 가치가 없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고 취향에도 아닌 거 억지로 들으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지식의 순도를 높이는 과정은 지식을 모아 정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 방법으로는 새로운 발상이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새로운 발상은 우선 개념을 토대로 논리적인 발상을 성립시키고 나서, 이미 있던 지식을 소화하면서 서로의 모순을 제거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의 순도를 높인다. 기초적인 논리는 성립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상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정치가가 일을 안해도 사회가 불행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가 않다. 학문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이 나오지 못하니까 어떤 정치 세력이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만 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차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사회가 바람직하게 되길 바란다면 우선 학문이 발전하길 바라야 한다. 그리고 학문의 발전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룰 (이해, 안보, 체제)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과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의 핵심적인 차이는 판단이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룰은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체제에 관한 룰부터 시작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룰을 체제의 룰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위한 이해의 룰이 필요하고, 사회와 체제의 안전 보장을 위한 안보의 룰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체제의 룰이 적용되게 된다. 이해의 룰로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안보의 룰로 사회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체제의 룰로 체제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보장한다. 사회와 체제는 사회 계약을 통해 각 이념에 대한 계약을 거쳤으나, 그 체제의 규칙인 룰은 체제 이념인 민주주의에 따라 모든 개인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 룰은 이념을 통해 방향성은 정해져도 구체적인 방법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할 것인데, 룰은 개념과 달리 지나치게 방대해질 수 있기도 하여 현재 나의 레벨로 할 수 있는 것까지 정리하겠다.




이해의 룰.


[이해: 1.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은 개인의 기본적인 룰로 이익이 되는 것을 수용하고 손해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룰을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기로 결정해야 다양한 룰이 생기지 않으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의 종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짐승의 경우 유전자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유전자에 따라 생기는 이해의 룰로 접근해도 충분하지만, 인간의 경우 자아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자아로 판단한 이해의 룰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해의 종류는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생물의 이해, 자아의 이해, 체제의 이해. 유전자로 정해진 이익과 손해, 자아로 판단한 이익과 손해, 사회와 계약한 체제로 본 이익과 손해. 이런 이익과 손해는 의미로 표현되고 가치로 결정된다. 각각 개인의 가치관으로 이해의 룰이 결정되므로, 체제의 룰에 이해의 룰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대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경우 자아가 판단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가 결정된다.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면서 윤리를 만든 인간의 이익과 손해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 룰은 일관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윤리와 같이 일관되지 못한 상태가 존재하면 룰이 일관되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절대적 가치는 그 가치로 정해진 룰을 절대적으로 여기면서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는 한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해야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될 수 있다. 일단은 윤리가 있더라도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개인의 행위가 모두 이익이 될 수는 없다. 식사를 하더라도 이후 발생할 배설을 손해로 여길 수 있다. 수면을 하더라도 하면서 나타나는 시간 소비를 손해로 느낄 수 있다. 어떤 이익이 되는 행동도 손해가 동반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는 것은 손해보다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체제의 룰을 지키는 것으로 얻는 이익이 지키지 않는 것으로 얻는 손해보다 크면 대체로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왕정 체제에서는 비민주적으로 피지배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하지 않지만,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적으로 주권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할 수 있다. 전자는 이해의 룰과 어긋나면서 개인의 독자적 룰이 생김에 따라 다툼이 일어날 수 있지만 후자는 이해의 룰과 일치하면서 체제의 룰을 지키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체제가 자유 이념의 실현 조건인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을 보장하면 대체로 개인은 룰에 속하는 것이 이익이 될 것이다. 그것을 기초로 모든 인간의 감정, 욕구, 욕망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체제의 룰 내에서 충족될 수 있도록 한다. 과도한 자유가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가치 관리로 접근한다. 예를 들어 비만이 많은 이유는 유전자적 이유, 자원의 풍부, 기업의 광고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살을 빼야 할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을 빼야만 한다면 살을 뺐을 것이다. 실제로 연애를 하고 싶어서 엄청나게 많은 살을 뺀 인간이 있다. 그런 동기는 성의 범주 가치를 올려야 할 것이다. 검열, 규제, 억압 등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욕망을 갖도록 가치 관리하는 것으로 사회를 구성한다. 적절한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욕주의는 타인이 지정된 특정 욕망만 극대화한다면, 욕망주의는 본인이 판단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PC주의가 다양한 가치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PC의 가치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타협하지 못하고 부정하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와 다를 바 없는 상태다. 건강을 위해 살을 뺀다고 했던 연예인에게 온갖 비난을 한 사례가 있다. PC의 가치에 어긋났다는 이유 하나로 판단하지 못하고 비난했던 것이다. 현재 PC주의는 단지 비만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의 룰이 체제에 룰에 속하려면 개인도 무엇이 이익인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공기를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공기가 사라지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유교 질서에서 연하의 존댓말을 듣는 것은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반말을 들으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이익의 기준과 손해의 기준이 다르다. 생명과 재산이 보존되는 이익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이익이라 여기지 않으면 이해의 룰에 포함이 안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개인이 변해야 된다. 개개인은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지 가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하여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하여 다툼을 줄이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다. 룰 내에서 종교를 포용하더라도, 그 종교의 가치는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이슬람, 샤리아존을 주장하는 이슬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중세 시대에 머물러서 이념이 아닌 종교를 체제로 삼고 있다. 


북한과 같이 룰이 달라 타협이 안 되는 국가와는 우선 공통된 룰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룰이다. 민족이나 반공 같은 어떤 가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이익과 손해만 따지는 룰에는 지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포함시킬 수 있다. 룰에 포함시키지 못하면 어떤 협상을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같은 평화라 해도 전혀 다르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지배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특정 누군가만 이익을 보면서 평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자유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면서 이뤄지는 평화다.




안보의 룰.


[안보: 2. ‘안전 보장’을 줄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한 뒤에 고려해야 할 기본 룰은 안보다. 이해와 안보를 체제의 룰에서 따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미리 정의해놓는 것은 체제와 무관하게 이 둘은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의 룰은 룰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조건이라면 안보의 룰은 존재 유지를 위한 조건이다. 


안전을 보장하여 존재를 유지한다. 안전은 위험이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룰의 차이를 없애 하나의 룰이 되면 인간 관계에서의 위험이나 사고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강제하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하면서 줄일 수는 있는데 한계가 뚜렷하고 부작용이 심하며 무엇보다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 사회에 위험이 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대응한다.


상호간의 신용을 통해 서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신용이란 개념으로 몇 가지 알아보겠다.



윤리와 신용 사회의 차이.


윤리와 신용 사회는 둘 다 판단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윤리로 만들어진 인간 관계에서 연하의 존댓말은 따로 판단하지 않는다. 신용 사회에서 거래되는 화폐에 대해서는 따로 위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둘 다 판단하지 않지만 전자는 절대적 가치로 판단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고 후자는 상대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지만 절차를 생략해 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것과 판단하지 않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신용 사회에서 정부와 개인이 해야 할 일.


신용 사회에서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품질이고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활용이다. 사회에서 안보는 신용을 통해 관련 절차를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식약처에서 식품 검사하는 것도 안보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품질이 보증된 식품을 구매하고 나서 방치했다 상한 상태에서 먹어서 탈이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위험 지역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위험 지역에 가지 말라고 지역 품질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증했음에도 개인이 그 지역에 가서 사고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단순히 사고가 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정부 책임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 반대로 품질 문제로 사고가 난 것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신용 사회의 이상은 계약서를 안보고도 계약해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화폐를 받을 때 따로 검사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따로 성분 조사를 하지 않는다. 충분한 신용이 쌓이면 그래도 상관 없다. 만약에 지속적으로 계약 위반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기본적인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세 제도나 고용 제도가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 따로 확인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비용 낭비다. 이런 것은 제도 자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용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모여 시스템을 구축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세계 시장과 직접 거래하는 일이 늘게 됨에 따라 안보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국가가 모여 그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한다. 그게 지구 정치다.



신용이 어려운 사회와의 거래.


체제의 유사성,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룰이 유사하거나 다를 수 있다. 룰이 크게 다를 경우 다툼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이 되게 된다. 체제가 다른 국가와의 거래를 안보 개념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는 경우가 잦은 상태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중국과의 거래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산 장비나 부품을 쓰다가 안보에 위험이 되는 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대놓고 군사적 위협일 경우에는 안보적 판단이 쉬운데, 경제적으로 접근하면 안보적 판단이 어려운 것 같다.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과의 거래를 할 때에는 경제적 손익과 정치적 손익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더라도, 산업 스파이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치적 손해가 될 수 있다. 룰에 대한 이해와 안보 위협 대상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체제의 룰.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체제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유기체로 접근하는 것이 과학적 접근을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보았다. 


체제의 룰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체제에 맞춘 룰이다. 개인의 이해의 룰을 체제에 룰에 속하게 하고, 안보의 룰을 정리한 다음에 그 바탕에서 체제에 맞춘 룰이 나오게 된다. 


체제의 룰은 모두가 판단해서 지킨다. 누군가 판단하고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이해의 룰이다. 언제나 어느 때나 누구라도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게 하는 것.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것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체제의 룰을 어기는 행위, 즉 범죄조차도 디지털 내에서 간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상태다.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가 성립되도록 가능한 최대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법칙과 같은 반복적이고 인과가 있는 현상을 구현한다. 개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자유주의 중 시장주의를 기초로 한 룰을 정리해보겠다.


시장의 룰은 시장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부터 알아봐야 한다. 이른바 원칙이다. 시장 원리는 개인의 판단으로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그것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욕망주의와 이기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결정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게 된다. 경쟁을 위해 담합이나 독과점이 없어야 한다. 산업 특성상 경쟁이 불가능하면서 필수적이라면 국영화가 합리적일 수 있다. 시장에서 하나의 룰로 다툼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정하게 거래를 하여 이익을 얻어야 하여 공정이 필요하게 된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 리스크 리턴의 비례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적은 리스크에는 적은 리턴이 주어지고, 높은 리스크에는 높은 리턴이 주어져야 공정한 분배가 가능할 수 있다. 장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낮으면 리턴도 낮고, 단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크면 리턴도 커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없어도 되는 하청, 되팔이, 택갈이 등은 없는 편이 효율적이다. 시장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범주 가치를 가치 높게 여겨야 한다. 그렇기에 관련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시장 내에 지속적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지 등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보다 마음 편하게 책임지고 재기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욕망과 이기, 공정 경쟁, 리스크 리턴의 비례, 효율적인 체계, 시장의 범주 가치 관리, 안전망. 몇 가지 원칙이 더 필요할 수 있는데, 일단 그렇다. 이 원칙을 기초로 다양한 룰을 만들면 된다. 시장은 어디까지나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으로 접근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그것을 경제 물리학으로 가치부터 전부 체계화해야 한다. 그런 것을 통해 모든 개인이 이익을 얻어야한다. 강자는 시장 체계를 통해 효율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약자는 거래로 얻은 이익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 


민주화가 될수록 시장의 룰에서 이익을 보는 인간의 이익이 커진다. 중국 시장이 현재는 시장이 어느정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의 룰로 이익을 보는 기업이 중국에서 이익을 얻고 있지만, 일정 이상 중국 산업이 성장하면 그에 따른 정부의 제동을 통해 이익을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미 한국은 그러고 있다. 민주화가 되어야 개인의 수요에 정부가 간섭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업의 이익이 커지게 된다.


시장에서 시장 참여자는 어디까지나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시장 원리가 작동을 안한다.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데, 공급 측에서 가격을 너무 낮춰서 다른 공급자를 다 죽이면 경쟁 개념이 성립될 수가 없게 된다. 그게 덤핑 공격이다. 그래도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후에 경제적으로 이익 회수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다른 공급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데,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회수하는 것으로 그런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본래 좀 더 정리해야 하는데, 현재 레벨과 상태와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겠다. 지금 당장은 좀 지저분한데, 이후에 레벨이 오르면 순도가 높은 개념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이다. 체제를 기초로 하여 눈에 들어왔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




법의 합리성.


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윤리에 의해 불합리할 때가 많다. 국민의 법감정은 윤리에 의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 강한 형량을 요구하면서 실제 판결의 형량과 다른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민주적 절차에 의해 법의 합리성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윤리에 의한 현상임을 이해하고 법의 합리성은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모든 개인도 통치자 관점으로 접근하여 윤리만 외칠게 아니라 예산이나 형평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 전관예우와 같은 현상도 윤리가 원인이지만, 일단 그러한 비리는 제외하고 합리성만 고려하도록 하겠다.


법은 한번 형량으로 끝내는 것이 합리적인데, 일부 단체의 불안감을 명분으로 전자발찌라는 추가적 패널티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전자발찌를 차게하고 싶으면, 형량 내에서 출소 조건으로 차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형량 5년에 발찌 3년이면 처음부터 8년형으로 판결하고, 5년 형기를 마친 뒤에 3년 동안 전자발찌를 차는 조건으로 가석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여성주의 집단에 의해 너무 불합리할 때가 많다. 무고죄조차 패널티가 적거나 없어 무방비하게 당하는 경우가 많은 상태다. 성범죄는 체제를 기준으로 어디까지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죄이지 성적인 관계 자체가 죄인 게 아니어야 한다. 성 자체가 죄가 아니라면 개인의 의사로 대응 가능한 상태에서는 대체로 죄로 규정하기 어렵게 된다. 가벼운 농담이나 디지털 성범죄 등이 바로 그렇다. 그런 것에 예민하게 대하며 과한 처벌을 강요하는 것은 윤리로 판단하지 못한 불합리한 행동일 뿐이다.



개인 정보.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 정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주권에 의해 개인의 정보가 중요해지고, 세계화로 개인 정보가 세계로 퍼질 수 있고, 디지털화로 개인 정보가 쉽게 퍼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주민 등록처럼 개인 정보를 정부가 관리하는 것이 인권침해처럼 여겨질 수 있다. 지배 체제에서는 분명 정부가 개인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자유 체제에서 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유료 서비스 기업이 고객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명 현재 한국에서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수집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유료 서비스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유무료 관계 없이 분명 안보와 같이 개인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고, 주차 이용 같이 개인 정보가 딱히 필요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배와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 유료 서비스는 직관적인 개인 정보의 필요에 대한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파업.


어떤 사회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주의, 이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그게 곧 전체주의 카르텔화가 된다. 의료계의 파업. 전형적인 집단주의, 이타주의, 전체주의. 의료계 집단 내에 다른 의견을 허용치 않는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 그것을 통해 집단이 단일 의견으로 통일된다. 족보 공유, 전공의 희생, 전체주의적인 집단 파업 등. 현재 의료계는 전체주의적이기에 윤리적이나 체제적이지는 않다. 어떤 집단이든 전체주의적인 것은 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지금 당장 경제 생태계가 정상이 아니라, 노조 파업 등도 허용되고 있지만, 경제 생태계 구축이 되면 체제에 불합리한 행위는 없어도 될 것이다.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노조가 없어도 허용되어야 한다. 기업에서 노동자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되려면, 단순히 그걸 하라고 강제할 게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노동 유연화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처럼, 노동자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투세.


주식 수익에 추가적인 세금을 매긴하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자에게 세금을 매긴하다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을 얻는 인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파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길 수 있으나, 그것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는 인간 또한 심리적인 저항감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금 1억에 세금이 지금보다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복권 당첨에 되본적도 없는 인간도 복권 구매율이 감소할 것이다. 주식 대박을 꿈꾸면서 주식에 참여해 수익을 얻는데, 주식 세금이 늘어나면 실제 그만큼 수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주식을 하려고 하는 비율이 감소할 것이다. 5000만 수익자만 주식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수익이 적어도 주식을 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시장 이탈자를 5000만 수익자까지만 고려할 게 아니라, 기대 수익 감소로 이탈하는 인원까지 고려해야 한다. 주식 시장의 꿈을 고려해야 한다.



비교 태도.


요즘 자녀의 비교하려는 태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예부터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휴일 여행 유무나 에어컨 대수 같은 것도 비교하면서 우위를 나누고 있다고 한다. 비교하려는 태도는 윤리에 의해 집단주의적이게 되어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지만, 비교 기준이 가정의 재산인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뭔가 자랑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처럼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가정의 재산으로 치장한다. 개인주의적으로 되고 나서 뭔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찾아 그것에 집중하게 될 수 있다면, 이런 태도는 사라질 것이다.



PB 상품 우대.


유통업체서 PB 상품 우대를 정당화하는데 유통의 본질이라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그것이 유통의 본질일 수 있지만 플랫폼의 본질은 아니다. 유통의 본질을 지키고 싶으면 플랫폼을 팔고 유통만 하면 된다. 



신흥 종교.


이미 타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상태, 윤리라는 지배를 수용하기 위한 코드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코드로 신흥 종교의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국민 연금.


연금의 지속이나 강화는 도대체 무슨 논리가 있는 것인가? 전문가는 폰지 사기와 다를 바 없다며 이미 지속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무슨 논리로 지속하거나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다수결의 논리인가? 그것을 위해 사회와 체제가 망가지더라도 해야 하는가?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시점에서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논리가 없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단지 다수에 의한 횡포다. 안 그래도 윤리 때문에 범주 가치가 낮아 조건이 좋아야만 생에 행복을 느끼는 상태인데,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디 논리에서 윤리는 배제되길 바란다. 판단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걸 논리에 쓸 수 있는가. 논리에는 윤리가 아닌 과학을 써야 한다. 현행 제도의 가입을 막고 연금을 펀드로 운영하면서 연금을 가입자에게 천천히 돌려주면서 순차적으로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끝내야 한다. 복지가 필요하다면 합리적인 제도를 새로 도입해야 한다.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디지털 소통이다. 워낙 간편하게 다수와 소통을 할 수 있다 보니 과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문제가 생기고 있다. 특히 미성년은 그것에 중독되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있을 수 있어 일부 사람들이 미성년 SNS 규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 해야 할 것이라면 보호자가 교육할 수 있는 시기에 교육하는 것이 타당하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SNS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커서 한다고 갑자기 잘해지는 건 아니다. 뭐든 초기 경험 각인이 매우 중요하므로,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각인을 해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과 SNS로 대화하면서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만들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되려 하지 못하게 막다가 몰래 했을 때 자기 표현 욕구를 풀 수 있는 수단으로 각인되면 그 때 중독되게 될 것이다.



길고양이.


길고양이 문제. 그것이 생명 보호라는 윤리라고 생각하니까 판단하지 못하고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행하고 있고, 윤리니까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길고양이 먹이주는거야 그렇다쳐도, 그게 윤리가 아닌 이기심이라는 것이 명확해야 그나마 타협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돈 뿌리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돈을 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한번 뿌리고 나면, 앞으로는 그 돈이 없으면 전보다 출산하지 않을 수 있다. 출산 조건에 그 돈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1억을 뿌린다고 하면 1억 없이는 이제 낳지를 않는다. 그게 보편화되면 1억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1억 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낳지 않는다. 점점 범주 가치는 하락한다. 이런 문제는 관련 가치를 관리하여 자발적으로 하고 싶게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가 없다.



전세 사기.


전세는 사금융이므로 객관적인 신용을 구축하기 어렵다. 전세 사기에 대해 정부에서 보호를 해준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전세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적어도 정부 대출을 해서는 안 된다.



군의 상명하복.


군은 단순한 상명하복에서 벗어나 모든 개인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작전 수행 또한 개인이 판단할 수 없다면,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군에 관련된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상명하복이 아니었다면 개인 판단으로 대응하여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지휘관이 현장에 없어도 모든 판단을 잘할 수는 없다. 큰 틀에서 지휘관의 판단을 따르되, 세부적으로는 현장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북한의 도발은 오래되었으나 최근 오물 풍선 날리기라는 새로운 도발을 하고 있다. 그런 도발을 멈추려면 협상을 해야 하는데, 협상 조건이 까다롭다. 북한과의 협상은 룰이 달라 이해의 룰로 접근해 우선 룰에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하지만, 단순히 협상을 하기에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과거 햇볕 정책 같이 무언가를 지원해도 의미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핵무기에 굴종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현재 북한이 너무 못산다. 뭔가 있어야 협상도 하고 그러는 건데 밸런스가 너무 안 맞는다. 북한에서는 밸런스를 억지로 맞추려고 비대칭 전력인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것의 사용은 파멸을 확정짓기에 북한에서도 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국가 운영이 가족 경영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중요하다 보니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된다. 핵을 포기하고 시장을 개방하면 경제가 성장하여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독재 정권 유지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안한다. 애초에 개인의 국가 운영이 아닌 가족 경영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 협상 자체가 넌센스다. 그러니까 아무리 국가 대 국가와의 평화 협상을 해도 독재자 개인의 이해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독재자 일가의 이익을 보장한 제안을 했다면 의미 있는 협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주권자들이 수용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평행선을 걷는 중에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모든 주권자가 체제에 대해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일관된 정책, 일관된 전략으로 대응할 수 있다. 정말 북한 문제는 내부부터가 제대로 정리도 안되어 있어서 매번 북한에 끌려 다니게 된다고 본다. 일부 민족주의자는 자꾸 평화만 외치는데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굴종하면서 얻는 평화를 바라는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그 가치를 판단하고 실제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지, 윤리적으로 그것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외친들 …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운에 맡기게 되어버린다.



폐쇄 사회.


폐쇄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체제 변화에 따른 룰의 변화가 폐쇄 사회까지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가 되면서 윤리가 남아있어도 체제에 맞게 조금씩은 변화하는데, 그 변화가 폐쇄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서 열린 사회와 폐쇄 사회 사이에서 룰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 차이에 의해 열린 사회에서 폐쇄 사회의 사건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제 유연화.


경제를 위해 노동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노동이 유연해지면 주4일제를 도입하더라도 상관 없고, 노동 유연화가 되면서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출산 휴가 보장과 경력 단절 고용도 수월해질 것이다. 이는 노동자와 기업 모두 이익을 얻는 경제 체계 구축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일단 유연해져야 유연해야 가능한 정책이 성립될 수 있다. 경제를 위해 기업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기업이 유연해지면 굳이 좀비 기업을 살리기보다 새로운 창업 기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경제 생태계에 신선한 기업이 늘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세계 자유 무역에 대응하려면 경제 체계를 바꿔야 한다.











4. 현상


법칙, 관점, 체제를 이해하면 지구에서 발생하는 현상 몇 가지를 보다 순도 높은 본질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패권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당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방식이 덤핑과 관세 대응과 같이 전쟁과 같이 매우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관심 있게 보진 않고 있었다. 아, 이번에도 미국이 중국 덤핑에 관세를 부과하는구나. 아, 중국이 미국의 관세 장벽에 의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같은 감상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외교와 정치에 대해 사상을 하던 도중, 중국산 철강 덤핑에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자, 그 철강 덤핑이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철강 업계에 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부의 직구 규제, 전 세계의 샌드위치 경제 현상 등 패권 전쟁에 의한 현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중국의 방식이 경제적이라 생각하고 경제적 대응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현상 하나씩 살펴보면서 경제 경쟁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인 게 아닐까? 표면상에 드러난 정보를 개념화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다른 관점으로 발상한 것이기에 세부적인 데이터는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관점을 바꾼 계기는 현재 드러난 현상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중국은 철강에 관세가 부과될 것을 알면서 미국에 보냈던 걸까? 왜 중국은 그 철강을 알리와 테무가 진입한 한국으로 보낸 걸까? 왜 한국은 직구에 의한 사회 문제를 보호 무역으로 대응하려 했던 걸까? 왜 미국은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걸까? 왜 중국은 디플레이션 상태로 경제적 위기인 걸까? 왜 미국은 보호 무역을 하게 된 걸까? 왜 전 세계의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왜 중국이 경제적 위기임에도 과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걸까?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이 미국 질서에서 경제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걸까? 어째서 미국이 보호 무역으로 알아서 봉쇄하고, 그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 마치 손자 병법에 나올 법한 전략 같은 걸까?


단순히 중국이 과잉 생산 상품을 미국에 덤핑으로 팔려다 관세를 받는 타격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로 결론 내려야 할 것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많았다. 2018년부터 본격적인 경제 경쟁을 시작했다고 아는데, 그 때부터 중국의 전략이 달라진게 없었다. 중국의 과잉 생산, 미국의 덤핑 관세, 미국의 보호 무역화, 중국의 전 세계 시장 장악. 이것을 2024년이 된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계속 미국은 승승장구하며 경제적 성장 상태고 중국은 경제적 위기 상태다.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걸 중국이 단순히 바보라서 그렇다고 판단하기에는 중국의 현재 경제 능력을 고려하면 그런 판단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중국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관점을 바꿔보았다. 달리 보면 중국이 미국에 과잉 생산한 덤핑을 보내는 것으로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된다. 미국이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한 게 아니라, 중국의 전략이 미국의 보호 무역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겠다는 것을 미국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봉쇄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직접 상대할 수 없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봉쇄하고 봉쇄한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에 도발을 하여 경제 전쟁을 거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게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중국이 같은 전략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게 미국을 봉쇄하는데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이것이 단순히 경제 경쟁이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미국을 봉쇄하고 그 외 국가 시장을 장악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인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중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이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 질서 내에서 경제 경쟁으로 미국을 넘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질서를 부수기 위해 전 세계에 상품을 무기로 한 정치 전쟁을 통해 시장 점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 장악과 시장 점령은 이익 회수 방식의 차이가 있다. 시장 장악은 초기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장악한 다음에 가격을 올려 이익을 회수한다면, 시장 점령은 저가 공세로 시장을 점령한 다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회수하거나 손해를 없던 것으로 만든다. 중국이 경제적 위기가 있음에도 과잉 생산하는 것은 처음부터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으로 시장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우수하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중국과 패권 전쟁 중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경제적 성장이 가능한걸까? 전쟁 타격은커녕 되려 전쟁하기 전보다 성장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중국의 전략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을 하게 된다면, 보호 무역이라는 미국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닌가? 미국이 스스로 계속 봉쇄하게 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승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패권 전쟁 중임에도 미국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전 세계 시장은 샌드위치 상태에 놓일 정도로 위기인 걸까? 전 세계, 특히 고소득 국가인 유럽조차 위에서는 미국이 치고 나가면서 발전하고 있고 아래에서는 중국이 치고 올라오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 사이에 모든 국가가 껴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어째서 전쟁을 하는 양국이 그렇게 발전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달러의 특성상 미국의 달러 가치가 오르면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올랐다.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오르면 중국의 덤핑 공세에 더 취약해지게 된다. 중국은 미국의 달러 가치만 올리면 알아서 전 세계 시장이 취약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국이 미국 달러 가치를 계속 올리기 위해 미국에 자본을 쏟아 부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이 끝나지를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현재 전 세계 시장의 자본 3분의 1이 미국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 자본은 그 중 어느 정도의 비율일 것인가? 만약 그게 중국의 전략이 맞다면, 미국 경제 성장을 도와 미국의 현재 전략인 관세 부과와 제조업 복귀를 유지하게 만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달러 가치를 올리고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게 만들어 세계 시장의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점령하기 쉽게 만든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중국은 마치 손자 병법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각 국가의 시장을 전쟁의 성이라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성을 점령하는 측이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다 가정해보자.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 자유 무역 경제 체계 속에서 많은 성이 미국 영향권에 속한 성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세계에 있는 성들을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각 성을 고립시켜야 한다.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던 자유 무역 체계를 부숴 보호 무역으로 만들어 고립시킨 후에 각개격파로 점령한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중국은 미국에 도발을 하여 각 성에 나눠져 있던 인재와 자원을 미국의 성에 결집시키게 만든다. 그렇게 결집시키게 만들고 나서 약해진 각 성을 손쉽게 점령한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면서 각 제조업을 복귀시키고 전 세계 자본을 회수하는 것을 틈타 중국이 시장을 점령하는 것을 군사적으로 설명하면, 미국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을 불러들이는 것을 틈타 중국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점령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미국 봉쇄 후 전 세계 시장 점령 전략. 이것이 중국의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중국이 단순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 같은 전략을 고집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성장은 그 정도 레벨로 가능하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중국의 내부 문제에 의한 다양한 현상 보고가 나오고 있다. 중국 주석과 원로와의 다툼, 중국 외교관의 미국 관세 부과에 대한 분노, 중국 저출산 위기, 중국 현재 경제 상태 위기, 중국 위기 속에 금 사들이기 등. 어째서? 중국은 중국에 해로운 것을 검열하고 규제하지 않았는가?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정보를 어째서 놔두었는가? 전 세계를 기만하기 위해서. 물론 지금 중국이 경제적 위기도 맞고 사회 문제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놔둔 것은 그것 또한 미국의 현재 전략을 고수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위기라는 개념은 평시와 전시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만약 중국 수뇌에서 현재 상태를 평시가 아닌 전시로 보고 있다면, 크게 위기로 느껴지지 않을 거라 본다. 과잉 상품 생산은 마치 총알을 생산하는 듯이 하고 있을 것이다.


양안전쟁 도발이 매우 많은 상태다. 그런데 중국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게 되었다. 양안전쟁도 미국의 시선을 끌어 다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역사로 보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 이익이다. 그러나 패권을 고려하면 그것은 손해다. 대만 점령이 당장 경제적 이익이 될 수 있더라고, 전 세계 시장을 점령 중에 있는데 전범이 되어 시장 퇴출이 되면 막대한 정치적 손해 및 경제적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안그래도 중국 덤핑 상품은 각국 정부의 눈에 가시나 다름이 없는 상태. 지금까지는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놔둘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이 전범이 되면 바로 퇴출할 명분이 생기게 된다. 중국이 레벨이 높다면 양안전쟁이란 우책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도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전 세계의, 특히 미국의 시선을 끄는 것 말고 없다.


중국의 무기는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그것으로 각국 화폐를 사들인다. 화폐는 각국의 총생산량을 본위로 한 신용 상품. 각국 화폐를 사들여 미국 달러로 교환한다. 예를 들어 엔화를 중국 상품으로 사들인 다음에 달러로 교환하면, 일본이 환율을 관리하기 위해 달러를 매각해도 계속 엔화 가치는 내려갈 것이다. 금리의 문제로 발생한 자본의 흐름과 별개로 자연스럽게 일본 시장을 약체화할 수 있다. 그렇게 사들인 달러로 자원을 다시 사들인다. 화폐와 상품에도 차이가 있다. 둘 다 많을수록 가치가 하락한다. 그러나 화폐는 생산되면 계속 축적되고 상품은 생산되면 대부분 소비되어 사라진다. 현재 시장 경제에서 자산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면 각국은 빈자를 살리기 위해 복지를 위한 화폐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화폐 수가 늘어난 것을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구매로 쓴다. 그렇게 각국 화폐와 중국산 덤핑 상품을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내리는데 상품의 가치는 오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서 전 세계 시장은 약체화되어 중국에 시장 점령하기 쉽게 된다.


만약에 중국의 전략이 이게 맞고, 중국의 전략이 계속 통해서 미국이 계속 보호 무역과 경제 성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 세계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 속에서 무너지면서 인재와 자본은 미국에 흘러갈 것이고, 전 세계 시장은 중국에 점령될 것이다. 전 세계의 인재와 자본이 결집한 고립된 미국과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패권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한 것은 미국이지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은 중국이 될 것이다. 패권이란 전 세계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미국이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첨단을 달려도 세계 시장은 당장 생필품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첨단의 기술보다 당장 먹고 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나 보호 무역으로 고립주의화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가는 미국, 경제적으로 위기이나 적극적으로 과잉 생산을 덤핑하여 시장 점령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중국.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미국은 정책을 바꾸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계속 경제적 성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을 마땅한 명분 없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 카드를 쓸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중국은 경제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명분이 없다. 미국이 나홀로 독주하듯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을 해도, 중국이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하여 각국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면 그때에 지구 패권은 중국이 된다. 지구의 패권은 실제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에 경제력이 아무리 높아도, 거기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으면 권력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할 수도 없으니까 그 순간 패권 전쟁은 끝나게 된다. 물론… 이건 중국 입장에서 엄청나게 잘되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중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각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굉장한 모략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되었다 가정하겠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면, 달러의 가치가 폭락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략을 위해 미국의 성장을 방해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돕는 중에 발생한 달러 버블이 한번에 터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나리오는 미국 입장에서는 최악을, 중국 입장에서는 최상을 고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전 세계에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가 자리잡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자유 진영의 대장인 미국이 그에 대한 대응을 하길 바란다.



미국은 이제 관세 부과나 제조업 복귀와 같이 방어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본래 일반적인 민주 국가에서는 국가가 경제적 타격을 입어 지지율이 감소하면 현재 정부는 정권을 잃을 수 있지만, 독재 국가에서는 다소의 지지율 감소는 그리 큰 타격이 아니다. 전국적인 폭동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다. 코로나 사태가 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한계 선은 상당히 널널하다 본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적 대응을 해야 한다. 공격적 대응이라 해서 군사적 대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중국이 저가 덤핑으로 시장을 교란하고 제조업과 유통업을 파괴하면 똑같이 저가 덤핑으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을 통한 시장에서의 정치 전쟁이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저가 치킨런을 하여 중국이 그런 덤핑을 위한 과잉 생산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산 점유율이 낮은 시장의 중국산 덤핑 상품을 전부 도매가로 사들인다음, 다른 비슷한 시장에서 경쟁을 붙인다. 중국산으로 중국산 경쟁을 붙여 그보다 더 저가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도매가로 산 국가가 좀 손해를 보고 중국도 좀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경제 경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전략이지만, 정치 전쟁이라면 총알 소비하는 것과 비슷할 거라 본다. 아니면 체급을 고려한 전략으로 나간다. 현재 고소득 국가가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공세에 시달리는 것은 1인당 gdp가 달라 생산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체급이 달라 힘들다. 그러므로 중국보다 gdp가 낮은 국가에서 저가 저품질 상품 경쟁을 붙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저가 저품질로 세계 시장 점령한 산업 몇 개를 쪼개 저소득 국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치고 공장을 지어 생산하게 한다. 중국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과 경쟁하게 만들어 중국이 손해 보게 만든다. 고소득 국가 공장을 저소득 국가에 짓는 게 아니라, 저소득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엘리트를 동원해 총력을 다해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산업은 정부가 주도하기 때문에 특정 산업이 밀리면 전체 산업에 영향이 가게끔 되어 있을 거라 본다. 그것으로 전기차와 같은 산업에도 영향을 가게 한다. 그러면서 중국과 저소득 국가의 생산을 줄이고 단가를 올려 일반적인 제조업 생산과 비슷하게 만든다. 이는 과거 저소득 국가 산업 육성과 유사하나, 목적이 다르다. 패권 전쟁을 위한 것이기에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치킨런을 하듯이 저가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저소득 국가에는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쳐 생산하게 하였으나, 중국 레벨의 학문을 아는 것은 아니므로 대체로 거기서 발전하지는 못하여 중국 같은 위험은 줄어들 거라 본다. 그럼에도 저소득 국가에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현재 패권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덤핑 공세로 한국 제조업이 위기인 상태다. 특히 직구를 통해 중국의 저렴한 상품을 사면 한국 제조업은 경쟁할 수가 없어 고사하게 된다. 이게 전 세계적인 샌드위치 현상 중 하나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하는 것은 각국 경제 체인이 약해지면서 고립되어 중국에 각개격파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게 중국이 바라는 것일 것이다. 직구 규제를 하더라도 다 전략을 짜놓은 상태기 때문에 알리나 테무에서 그에 대한 대응이 바로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보호 무역을 하기 보다 자유 무역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전 세계 자유 무역 시장 경제 체인을 단단하게 해야 각개격파식으로 중국에 시장 점령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직구가 활성화되면 중국산을 한국 브랜드로 택갈이만 하는 기업은 손해를 볼 수 있는데, 과거 세계화 이전이야 다른 국가의 물품을 수입하는 것만으로 무역으로 생산이 될 수 있으나, 세계화 이후에는 그런 것은 생산이 아닌 불필요한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직구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면서, 그것을 위해 세금 체계를 자유 무역 경제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현재 한국 부가가치세인 일반 소비세는 10%인데, 세계로 보면 소비세가 20%인 경우도 많다. 직구에도 소비세가 붙으므로 직구 구매가 늘어나는데 대응하기 좋을 것이다. 생산에 들어가는 세금을 줄이는 것으로 소득세와 임금을 올려 임금 노동자에게는 큰 변화가 없고 불로소득자에게는 좀 더 많은 세금을 걷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탈세 또한 소비세가 늘어나면 다소 줄어들거라 본다. 세계화 시대, 자유 무역을 상수로 두고 정책과 제도를 변수로 하여 대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 중국의 덤핑 상품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덤핑 상품을 기준으로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짤게 아니라, 그것을 예외로 두고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짜되 중국산 덤핑 상품은 자유 진영과 협의해서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전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정치 전쟁에 있어서 지켜야 할 것은 산업과 기업이 아닌 학문과 망. 학문과 망이 있으면 산업과 기업을 되살릴 수 있지만, 산업과 기업이 있어도 학문과 망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판매하지 못한다. 학문은 디지털과 AI로 데이터베이스와 교육이 과거보다는 수월해져서 중요도가 조금 낮아질 수 있는데, 망은 매우 중요하다. 전기망, 통신망, 교통망, 유통망, 소통망 등을 지켜야 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할 경우 안보에 문제가 적지만 다를 경우 안보에 문제가 크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안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진다고 본다. 안보에 관한 것은 가성비보다 안보부터 우선해야 한다. 잡기는 아무거나 사도 되지만, 슈퍼 컴퓨터는 안보에 도움이 되는 국가의 상품을 고려해야 한다. SNS 같은 것은 소통망으로 신용할 수 없는 국가의 것을 이용하는 것이 안보에 위험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미국에서 틱톡 금지법이 생겼다. 틱톡은 sns와 같이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일본에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려는 의사가 나오고 있다. 라인은 메신저로서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안보에 큰 위험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안보 위험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일본 서버만 때서 일본 기업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지역의 라인은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협업하는 것이 합리적일 거라 본다. 안보 대응이 아니라면 애초에 정치적 압력으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부당하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지구에서 하나의 룰이자 다양한 가치가 되어 인류 문명에서 앞으로 전쟁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AI.


AI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어나더 레벨이다. 앞으로 AI 발전할수록 AI 이전 세계의 생산은 어떤 재능, 노력 등이 있어도 AI 이후 세계의 생산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빠르게 AI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AI 세계에 진입하고 나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몇 가지 알아보겠다.


AI는 많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다. 당장 소버린 AI를 해도 최상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후발 주자가 빠르게 따라가기는 어렵다. 천천히 따라가면서 AI 활용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디지털을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었듯이, AI 또한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다. AI와 같이 수요가 한정되면 수요에 따른 소비자의 경쟁력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우수하면 AI 혜택을 먼저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현재 윤리 대부분의 고대 종교의 교리일 뿐이지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게 아니다. AI 또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은 다음 체제와 과학을 고려해 무엇이 인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AI를 사상을 하는데 쓸 텐데, AI가 사고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한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AI는 환경 오염이 심각할 수 있다고 한다. AI가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환경 오염을 줄일 수도 있으나 AI가 자체가 전력을 많이 소모하여 환경 오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문명 레벨로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으므로 AI 발전을 통해 빠르게 문명의 레벨을 올리는 것만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므로 그것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 기술 발전을 상수로 두고 그에 대한 대응을 변수로 둬야 한다.


AI는 여러 곳에서 개발 중에 있어 표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 생각한다. 현재 국제 표준이 맞지 않아 낭비되는 자원이 많은데, 공통된 국제 표준을 지구 정치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AI는 산업을 많이 대체할 거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창의적인 것까지 AI가 하더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책임이다.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산업에서 대체될 수가 없다. 앞으로 기자 전망이 좋지 못하고 대우도 좋지 못하여 기자 퇴직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기자 또한 책임지는 역할을 갖는다면 그런 기자에 한해서는 전망이 어두울 거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정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에 의해 권위주의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이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보험 회사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으로 돈을 벌었던 것처럼 앞서서 책임지는 인간이 앞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어나더 레벨로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AI는 디지털 기술이므로 디지털에 연관되어 같이 규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애초에 디지털 규제를 많이 완화해야 한다. 특히 윤리적인 규제는 매우 체제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본다.


AI의 가짜 뉴스 같은 것은 국제적인 다중 AI 검사 체계를 갖추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모든 정보를 실시간 진짜 가짜 가릴 수는 없고, 특정 정보의 진위 여부를 가릴 때의 수단이 되면 된다고 본다.


AI에 의해 디지털 개인 정보가 위험할 수 있으므로 이중 정보를 일상화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택배나 배달을 할 때 고객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 번호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과 같이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분리해 서버에 보관하고, 가짜 정보를 키워드로 삼아 개인 정보 활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진짜 개인 정보의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환경.


환경에 관해서는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당면한 문제는 기후 변화다. 본래 기후는 자연적으로 더워졌다 추워졌다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산하는 탄소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 변화를 많이 앞당기는 바람에 인간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기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른바 지구 온난화다. 그에 따라 각국에서는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해결이 되지를 못하여 지속적으로 기후 변화가 빠르게 되고 있다. 인간이 살기 적합한 기후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다. 매년 더위를 갱신하면서 올해가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비관적인 추측이 있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환경 보호의 스포츠화다. 현재 지구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지역은 매우 덥지만 일부 지역은 매우 춥게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더위를 겪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경각심이 다소 부족할 수 있는 상태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인류의 저항이란 개념으로 접근해 극한의 기온에서 철인 삼종 경기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본다. 각국에서 육체적 초인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철인 경기를 하는데도 대부분 버티기 어려워서 포기한다. 그렇다면 일반 인간은 어떻겠는가?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기후 변화에 직관적으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그것과 동시에 각국의 환경 보호를 지표화하여 순위를 매겨 철인 경기 순위 옆에 붙인다. 각국 환경 보호 지표에 따라 철인 경기 선수에게 경기 중 무언가 혜택이 주어지도록 한다. 물통을 더 준다거나. 그렇게 혜택이 주어진 선수들 중에서 완주를 하도록 설계한다. 단순 명쾌한 극한 경쟁과 그에 따른 알기 쉬운 환경 보호 순위에 따른 혜택. 이것으로 환경 보호를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각국이 여러 환경 보호 정책을 내는 것보다, 대다수 개인이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 본다. 전 세계에서 대대적으로 환경 보호 스포츠 경기로 홍보하는 것으로 그것을 매우 가치 높게 만들면, 그 옆에 붙은 환경 보호 순위도 같이 가치가 올라가면서, 그에 따른 경쟁 심리가 붙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미국 아래 중국이나 중국 아래 미국을 각 국가 개인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스포츠 스타가 된 극한 철인 경기 선수들이 살기 위해 환경 보호 한다는 캠페인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은 환경 보호의 무기화다. 탄소 포집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전망이 밝지는 않다. 탄소 포집의 비용을 줄여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성을 확보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국가나 기업에 한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는 당장 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감당 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환경 보호는 공동의 이익이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은 아니다. 그렇기에 특정 국가가 나서서 하면 다른 국가는 알아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형국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 환경 보호 예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발상을 바꿔야 한다.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무기 개발로 가서 무기 관련 예산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예를 들어 탄소 분자만 골라 분해하거나 파괴하는 폭탄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치자. AI에 물어보니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는 게 전기 분해, 초음파, 플라즈마 등이 있다고 했다. 솔직히 기술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무기 쪽이 현실성이 있다. 탄소 포집과 같은 방법의 환경 보호는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지 않지만, 탄소 분자 분해 폭탄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는 어려울 거 같은데, 만약에 그게 성공한다 가정하자. 그러면 지구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각국에 폭탄을 터트리는 실험을 해볼 수가 있다. 미국의 폭탄이 중국 영토에서 터진다거나 중국의 폭탄이 미국 영토에서 터질 수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가 달에 도착하자 미국에서 달에 가기 위해 미국의 전력을 쏟은 것처럼, 국가 경쟁에 들어가게 되면 그에 관련된 대응법도 빠르게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힘에 의한 변화다.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힘으로 변화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과거처럼 혁명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불태우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길. 그러므로 다른 형태로 새로운 힘이 출연하고, 그 힘에 의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인류 문명의 민주주의 체제는 위기를 겪고 있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 세력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집권 정치 세력의 반복되는 패배로 계속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높은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다. 더 나은 정치가에게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쁜 정치가에게 투표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EU의 선거에서 이른바 우파라 불리는 정치 세력의 선전이 드러났다. 거기서 놀라운 점은 유튜브에서 어그로를 유튜버가 많은 팬을 바탕으로 EU 선거에서 당선되어 EU 의원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 또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단순히 개인에게 주권을 주는 체제기 때문에 그 실현 방식인 제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는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는 토지 민주주의 제도를 행하고 있다. 이는 과거 왕정 체제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주인이었던 영주와 같은 형태를 관습적으로 이어온 것에 해당한다. 분명 과거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로서 이익을 공유했었다. 그렇기에 지역의 대표라는 개념이 적절했었다고 본다. 그러나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나면서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점점 도시로 몰리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인간보다 같은 분야에 사는 인간과 더 가까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가 아닌 분야 사회 단체가 된 것이다.


인간 관계가 아닌 이해 관계는 보다 극명하게 차이난다. 토지의 주인이 한정된 것은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국가의 주인은 과거와 현재가 아주 크게 다르다. 왕정에서 민주정이 되면서 토지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의 주인은 늘어났다. 그럼에도 아직도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면서 토지의 주인의 이해에 맞는 공약이 주로 생기는 것으로, 토지의 주인은 아니나 국가의 주인과의 이해 관계는 아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유권자는 정치 공약보다는 정치 선동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본인과 이해 관계가 많지 않으니 그냥 유명하거나 적당한 선동에 휘말려서 인기 투표하듯 적당히 투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로는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의 깊이가 너무 낮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분야의 대표도 정치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정치 제도를 한번에 전부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변화를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현행 정치 제도를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 의석을 늘리는 방향이 타당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상원, 하원 나뉘듯 지역, 분야로 나뉘는 것이다. 만약에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진다면 어그로 유튜버가 당선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야는 개인의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가 매우 깊은 관계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꼭 필요한 정책이 있냐 없냐에 따라 분야에 속한 인간의 이익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를 장난하듯, 재미로 뽑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이미 지역의 대표를 뽑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분야의 기준은 현재 경제 활동하는 분야와 인구수를 고려해 선거구를 정해놓는다. 기본적인 선거구를 바탕으로 이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요청이 생기면 새롭게 분야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지역 선거구 당 평균 인구수는 20만 명. 그것에 맞춰 특정 분야의 인구수가 40만이면 약 2명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구가 갖춰질 수 있게 한다. 분야의 특성상 인구는 적은데 사회적 기여도는 높은 분야는 지역에서 인구수 소멸로 인구가 적어도 의석이 있듯이, 최저 인구수 제한을 줄여 고정 의석을 도입할 수 있게 하면 된다고 본다. 특정 분야에서 경제 활동하는 인원에는 투표권이 배정되고,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원에는 교육 과정이나 이전 경제 활동을 토대로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배정 받는다. 여러 경제 활동을 하는 인원은 배정 받는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새로 배정 받는다. 투표 방법 또한 어렵지가 않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소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투표 용지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의정 활동을 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분야의 대표는 인구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정 분야의 이익만으로 무언가 실제 결정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분야의 대표가 어떤 법률을 제정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포함하여야만 지역 대표와 다른 분야 대표를 설득하여 통과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시위나 파업을 통한 해결보다는 의회에서 토론을 통한 해결을 바랄 확률이 있다고 본다. 현재 무책임한 파업의 대부분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생기면 그에 따라 책임을 부여하여 논리적인 주장을 통한 책임 있는 의정 활동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분야의 대표기 때문에 다소 지식이 부족한 대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민주주의다. 그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인간을 뽑도록 해야 하는 것. 만약 우수하지 않는다면 분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분야 내에서 외부의 우수한 인간을 따로 포섭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정치적 실현성은 충분하다 본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자. 집권하면 패배하는 정치 세력. 수천 년간 결과가 없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변화가 없는 정치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를 해결 못하는 현대 인문. 깊은 정치 불신. 눈에 보이는 쇠퇴의 지표. 변화 필요성에 대한 인식 공유. 정당 입장에서 보자. 사회적으로 변화 필요성이 나타나 명분이 충분한 가운데, 원래 의석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분야 의석을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까지는 아니다. 물론 정치 권한을 가진 인간이 늘어나면 다소의 손해가 있을 수 있으나, 선거 패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 상태에서 헌법을 개정해 역할 민주주의 제도로 각 분야 대표에게 의석을 추가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면, 각 분야의 대표가 될 수 가능성이 있는 이들 위주로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일어나 선거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처음으로 분야의 대표가 되는 인간은 아마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명예로운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보다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있을 거라 본다. 이것은 종래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 구도가 아니고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석이 제공되기 때문에 경제 활동 인구라면 모두 이해가 일치될 수 있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되면 직관적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권위주의를 역할주의가 대체하면서 보다 역할의 전문성이 우선되게 된다. 그러면서 본인의 전문성 외에는 타인이 더 우수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보다 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판단하지 못하며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비전문가는 전문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쉬운 주장을 한다.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전문가 스스로의 역량을 더 강화하게 될 동기가 생기게 된다. 그런 식의 변화는 타인의 의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인드를 부를 것이고, 그 열린 마인드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의 진입을 보다 수월하게 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현재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것이 힘에 의한 변화의 시작이다. 한번 변화하기 시작하면 스노우볼이 굴러가듯 자연스럽게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




정신병.


지금까지 정신병은 육체에 병이 걸린 것보다 알기가 어려워서 그냥 병신 취급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과학적인 접근으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가치가 생기는 것으로 논리적인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그것을 이제는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보건 기구나 학회에서 특정한 이상에 질병 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자아와 가치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에 유전자에 의한 이상과 뇌 손상에 의한 이상과 가치관에 의한 이상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원인이 불명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논리가 없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와 뇌 손상과 가치관을 컴퓨터로 비유하여 설명하면 다소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기본 설계 미스(유전자), 하드웨어 고장(뇌 손상), 소프트웨어 꼬임(가치관 문제). 가치관 문제에 의한 정신병은 가치가 모순될 경우 그 모순에 의해 데이터가 꼬이면서 판단 이상이 발생하여 정신 이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본다. 모순이 없는 가치관으로 논리적으로 행동하여 생각과 행동에 막힘이 없어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 없어 정신 이상을 일으키지 않는데, 모순이 있다 보니까 자꾸 생각과 행동이 막히면서 답답함을 호소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자아와 감과 절대적 가치의 본질에 대해 이해를 해두어야 한다. 자아는 생물의 판단 기관으로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육체의 반응을 관찰하여 제어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가 육체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듯이,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트리거가 되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여 그것에 대한 대응을 하면 된다. 육체의 반응 중 감과 같이 자아가 판단하지 못한 해석되지 않은 발상이 종종 나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가 있다. 높은 곳에 가서 고소 공포를 느끼는 감이 발상되듯이, 어떤 특정 조건이 생기면 인간이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이 발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 발상된 것을 이해하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그것을 멀리하거나 제어하면 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임을 이해하고, 가치관 문제에 있어 모순되는 부분 중에 윤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판단 이상에 의한 정신 이상을 막을 수 있다.


정신에 관한 것은 육체와 달리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겠다. 논리적으로 접근하자. 생각을 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생각을 한다는 행위를 어떤 짐을 들고 움직인다는 것과 비슷하게 접근해보자. 인간이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끼는 것과 같이, 머리 속의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낄 수 있다. 그게 정신적 피로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짐의 양이 늘어나면서 피로도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근대 이전보다 인간의 정신병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치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짐을 순조롭게 옮기지 못해 헤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순에 의해 짐을 계속 옮기면서 피로가 더욱더 쌓인다. 아예 그런 모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정신 이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신 이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자아가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생각할 수 있으면 자아가 판단할 수 있는 동안에는 정신 이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그러나 자아가 판단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육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특정 상황에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 담배, 술 같은 물질에 중독되거나, 도박, 일, 취미 같은 행동에 중독되면 판단하지 못하고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은 물론이고 다른 중독도 심하면 하드웨어 고장과 같이 뇌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이해하고 미리 그런 상황에 닥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음주 운전은 자아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을 거란 인식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면 아무리 우수한 인간이라도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므로 몹시 위험하다. 술은 담배와 달리 연기도 없고 하니 혼자 마시고 민폐끼치지 않으면 본인의 자기결정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물질이라 보는데, 음주 운전은 너무 위험하다.


정신력의 고갈로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정신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고갈되어 멈출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리 정신력을 강조해도 체력이 고갈되면 육체가 동작하지 않듯이 정신력이 고갈되면 생각이 동작하지 않게 된다. 정신력도 체력처럼 키울 수는 있으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며 생각을 하게 하면, 육체가 고장하듯 정신이 고장나게 된다. 육체의 경우도 그렇지만 정신의 경우에는 더욱 타인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업에서 생각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경우에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여유가 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판단으로 생산할 경우에, 개인은 생산 과정과 결과에 대한 논리적인 변호를 해야 하고, 기업은 인사 과정에서 미리 최선을 다할 인간을 뽑아야 한다. 


본인의 상태를 이해하면 타인의 상태도 예상할 수 있다. 본인이 육체나 정신에 병이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타인 또한 조건이 맞으면 육체나 정신에 병에 걸릴 수 있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 관계에 있어 서로 병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사회 건강에 있어 중요할 것이다.


룰 측면에서 룰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정신적 피로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해야 할 것은 간략하게 만들어 판단의 양을 줄여야 한다. 예를 들어 분리 수거는 너무 세부적으로 만들어놔서 인간이 판단해야 할 게 너무 많은 상태다. 관계의 절차라던가 그런 것도 가능한 피로가 적도록 설계해야 한다. 신용 사회를 확립하여 개인이 판단해야 할 양을 가능한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중요하다. 절대적 가치는 아예 판단 자체를 못하는 것이라면, 신용 사회에서 판단하지 않음은 판단할 수 있는데 절차 생략으로 얻는 다양한 이익을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 약을 보면 굉장히 복잡한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효과만 간단히 알아도 될 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양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세부적인 것은 전문가가 판단할 수 있으면 된다. 신용 사회에서는 전문가도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거지 비전문가가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는 쉽고 깊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깊게는 바로 알기 쉽지만, 그 개념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가 체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능이나 연령에 따라 판단의 양을 감당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것을 고려해 맞춤식 룰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연령이 낮아서 판단이 어려울 경우에는 단계별 체제 학습이 필요하고, 연령이 높아서 판단이 어려워지는 시기에는 타인이 판단을 도울 필요가 있다. 지능이 낮을 경우에는 애초에 돕는 인간이 필요하다. 추후 AI가 그런 점을 많이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5. 외교


지구에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지구 정치가 되었다. 국가 내 지자체가 다른 지자체와 교류하는 것을 정치라 하듯이, 지구 내 국가가 다른 국가와 교류하는 것도 정치가 되었다. 모든 국가의 주권자는 이제 단순히 교류만 하는 것을 넘어 지구를 비롯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시대다.


국제 사회는 야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현재 국제 사회의 문명 레벨이 야생과도 같은 원시적이라는 말이 된다. 일반적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 내 법이 하나의 룰로 작용하여 과도한 분쟁을 막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지구의 경우에는 정말 다양한 법과 다양한 룰이 작용하여 언제든지 심각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국가 내 정치와 지구 정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 방식이 지구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가 있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유교는 권력이 윤리인 사상이다. 권력을 기초로 한 위계질서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질서를 만들어 사회를 성립시켰다. 그렇기에 유교 국가는 매우 정치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력이 높은 국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계가 대부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딱히 정치력을 발휘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는 모든 관계에 위계를 정하여 질서를 갖춘 종교다. 심지어 죽은 인간까지 위계를 정하여 체계적인 족보까지 다 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정치력을 발휘할 일 자체가 드물다. 온갖 조직에 파벌이 있고 정치적인 싸움을 해도, 그게 정치력을 올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특정 사회에서 완전 대등한 관계라고 해보자. 그러면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하기 위한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는 것으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 과정에서 정치력이 매우 오를 수가 있다. 그러나 특정 사회에서 이미 대부분 위계가 정해져 있는 관계라 해보자. 그러면 대부분 관계가 딱히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권력이 정해져 있다. 일부만 정치력을 발휘해 권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정치력을 배울 기회가 없다. 권력을 윤리로 여기더라도 정치력이 낮은 이유는 정치를 할 관계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유교권 내에서도 외교를 실패하게 되는 원인 또한 유교가 원인이다. 유교는 이미 위계가 정해져 있는 사상으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위계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싸우게 된다. 한국은 일제 식민 시대 이전을 떠올리며 한국이 높은 위계에 있는 국가라 여기고, 일본은 일제 식민 시대를 떠올리며 일본이 높은 위계의 국가라 여긴다. 서로가 높다 여기니 서로가 알아서 양보할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입장 차이가 크게 되면서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를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낮은 위계라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입장 차이가 커서 대화가 되질 않는다. 현실적인 힘의 차이가 발생하면 앞에서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는 어떻게든 이기려 하는 태도가 나오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 수가 없다.


지구 정치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정치 능력을 높여야 한다. 물론 속한 국가의 힘이 강하면 그만큼 메리트는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선이 아닌 후가 되어야 한다. 먼저부터 그걸 활용해 압박을 넣으면 앞에서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감정의 손상으로 뒤에서는 손해가 될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 받을 수 있는 정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정치력이 높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익을 뿌리는 것으로 앞에서는 환호성을 듣고 기분이 좋아 정치력이 높은 거라 생각하지만, 뒤에서는 정작 지지를 받는 게 아니라 막상 선거에서는 지지율이 낮을 수가 있다. 실제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 필요하다.



외교 분야는 이제 직접 외교를 하는 역할이 아닌 주권자의 지구 정치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외교의 전문가로서 다양한 이들에게 적절한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외교 플랫폼이 적절하다고 본다.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상황에서 개개인에 맞춘 서포팅은 어렵다. 그렇기에 플랫폼을 구축해 플랫폼 이용자가 정보 입력을 하면 자동적으로 기본적인 서포팅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가나 기업가가 외국에서 교류를 할 때 그에 대한 서포팅을 하기 위한 플랫폼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도 충분히 각자 정보 획득 수단이 있겠지만, 전문적인 서포팅을 받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아마 지금도 서포팅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서포팅을 플랫폼을 통해 체계화한다면 보다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효과적인 지원과 많은 데이터 축적을 통한 외교력을 올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만이 아니라 모든 주권자가 그에 대한 서포팅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체급을 갖추게 되면, 지구 정치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플랫폼 체계는 정보의 연결이다. 본인과 교류 대상을 입력하면 그에 대한 관계와 정보, 그리고 대책 등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전달되게 한다. 본인도 적어야 하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도 본인을 모르는 게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AI로 하면 효율적이다. 외교 조건만 입력하면 그에 대한 정보가 가지런히 출력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안보적인 이유로 국내 기업의 것을 활용하거나 신용할 수 있는 국가의 기업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체계를 구축하여 많은 인간이 그것을 활용하면 외교적 동향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가진 작은 힘이 급격하게 커져 큰 힘이 되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크기와 무관하게 태도나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0만 원에서 100억 원을 가지면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으나, 100억 원을 가진 인간이 1000억 원을 가진다고 가치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사회든 인간의 본질을 알면 생각과 행동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해 정치를 하면 된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 정세가 복잡해도 그것을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큰 사회와 작은 사회가 같을 수는 없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같을 수가 있다. 그럴 때에는 같은 부분을 상수에 두고 다른 부분을 변수에 두고 각각 정리하면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정세를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다면, 세계 정세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사회의 법칙을 비롯해 다방면에 대한 이해와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가능하므로 외교의 전문가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건 관계도 마찬가지. 모든 관계는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어떤 이익이 있어야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고립주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가 피곤한데, 그만큼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별관심도 없는 곳에서 세금을 펑펑 쓰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 그 정보에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손해도 느낄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와 경제적인 것 외 모든 것이 패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관계에 이익을 느끼지 못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이익이라 여겨지지 않는 것으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느낄만도 하다.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과 그에 따른 이익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그것이 지속성을 갖게 된다. 에너지 효율을 위해서는 개념의 간략화가 매우 중요하다. 판단해야 하는 게 늘어날수록 매우 피곤해지는 것은 자명. 외교에 관해서 가능한 쉽고 깊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 200여국의 특징을 하나하나 따로 정리하면 너무 피곤하다. 그러나 사회의 법칙으로 접근해 공통된 것은 상수로 두고, 다른 부분만 따로 정리해두면 알아야 하는 것이 매우 적어질 수 있다. 그런식의 효율화가 있어야 보다 지구 정치에 적극적이게 될 수 있다.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쏟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낭비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국내 정치는 정치가 돈이나 정당 돈으로 하지만 지구 정치는 세금으로 하는 일도 많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제적인 코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떤 정치적 이익이 있으면 그것을 손해로 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가 않다. 


그런 에너지 효율화를 통해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이 가능해지면, 어떠한 선택권을 선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에너지 소모가 커질수록 다른 무언가에 선택권을 넘긴다. A 중에서 추천해줘, B는 어때?, C는 별로인가?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선택권을 넘기거나 선택에 도움을 받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에서든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인간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게 된다. 대신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지구 정치를 함에 있어 그러한 효율적을 통한 선택 능력 확보는 주도권을 얻는데 매우 중요하다 본다. 



지구 정치가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로 일반화되면서 모든 정치는 이야기를 필요하게 되었다.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이 디지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치 활동을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은 그것을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 관찰을 통해 상시 지지율이 달라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된다. 그래야 어떤 정치 활동이든 이야기의 설득력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에 공개되는 정보에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단순히 필요한 정보만 딱 공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도 정보에 이야기가 담겨야 호응이 좋을 수 있다. 특히 정치가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야기는 몹시 좋은 명분이 된다. 예를 들어 정치가가 선동을 해서 일으킨 사건도 한번 대중에 들어가면 정치가의 손을 떠날 수가 있다. 그것을 제어하려면 충분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 내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면 자연스럽게 당위성이 성립되면서 그것을 행하려 하게 된다. 이교도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이교도를 대하는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 십자군 전쟁이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그것도 어떤 또 다른 목적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명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이념 전쟁에서 UN을 통해 전 세계 파병이 가능했던 것도 그것에 이념 경쟁이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정치가도 감당하지 힘든 사건들이 몇 가지 일어난 상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가 그렇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 발생한 그 사건들은 이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것에 관련된 정치가조차 끝내는 방법을 정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정치가의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정치가의 행동은 전부 디지털로 공개되어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 판단되고 있다. 행동 하나하나가 지구 정치에 영향이 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책 없이 끝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면 끝내기 위한 명분,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선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내려면 결정권을 가진 각 국가의 정치가들, 특히 힘이 강한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정치가의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결정권을 가진 정치가를 죽이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기 몹시 어려우므로 살린다는 전제로 접근하겠다. 과거 전쟁은 왕의 목을 제거하면 끝난다고 하지만 현대 전쟁은 그런 것이 드문 대게 정치 행위의 연장 선상이다. 전쟁은 정치가의 정치적 이익으로 끝날 수 있다. 정치가 입장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을 바에는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이익이라면서 전쟁이 계속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각자 무엇이 이익인지 파악하고 그 조건에서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한다. 


전쟁은 기본 룰이 달라 발생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룰에 의한 협상보다는 이해의 룰로 협상하는 것이 타당하다. 단순히 상호 이익이 되면 전쟁이 멈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다. 밸런스가 맞아야 상호 이익을 맞추기가 쉽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가? 민주 국가라면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 하더라도 내부 반발이 밸런스를 맞추는 경우가 있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바로 그렇다. 그것을 고려하면 내부 반발로 밸런스를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오랜 독재 국가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퇴진 시위가 강하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당분간은 이스라엘 총리의 권력을 어떻게든 보장할 수 있으면 전쟁을 멈추기 위한 밸런스가 맞아 협상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반면 러시아는 내부 반발을 성립시키기가 어렵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가 유리하다. 그렇기에 전 세계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있으나, 인구는 지원할 수 없으면서 그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러시아가 유리해야 밸런스가 맞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는 손해를 감수해야만 협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허용하면 러시아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이후 다른 국가로의 침공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입장에서도 그걸 허용하면 정치 권한을 잃을 수가 있어 결정하기 어렵다. 결국 이것은 러시아 대통령의 결정에 달렸다. 어떤 형태든 러시아 대통령의 이익이 보장되어 대등한 형태의 협상이 가능하면 밸런스가 맞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대부분 돌려준 형태로 휴전이나 종전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물론 이런 것은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쉽게 끝날 수도 있다.


비공개된 협상이 끝나고 나면 공개된 시나리오 협상이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위해 비공개 협상 후에 공개된 협상에서는 당시 싱가포르 총리가 눈물을 흘리며 독립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싱가포르 대중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이 지켜보는 상태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쉽게 알 수 있는 명분이 타당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당사국에 사는 개인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모두가 이익을 얻었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 된다. 전후 대규모의 투자가 각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인 이익도 충분한 명분이 될 것이다. 지금 멈추면 대규모 투자가 있을 것이다- 같이. 그것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서로 상처를 입어 큰 손해를 봤음에도 어느 정도 이익이라 여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규모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의 명분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외교에 대해 쓰기로 결정하고 사물과 현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가치에 대한 고려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치관이 인간의 판단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스스로를 관찰하면 알 수 있음에도, 인간과 인간이 일으킨 현상을 관찰하는데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종교적인 신앙과 근대 이념으로 일어난 현상은 가치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상들은 가치에 의함임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분석에 인간의 가치관이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보편적으로 가치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안한다. 이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을 통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 확립.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는 룰을 지향해야 다툼이 사라질 수 있다. 앞으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 모든 개인이 지구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룰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인류를 위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룰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갖춰져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기술을 통해 모든 개인의 감정, 욕구, 욕망 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으면 평화를 성립시킬 수 있다. 


현재 정치 이념은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이 지배하다 보니 무언가의 지배가 있어야만 사회가 성립된다. 그렇기에 부디 바란다. 인간의 지배냐, 윤리의 지배냐, 이런 것으로 다툴게 아니라 사회의 법칙을 바꾸고 불로불사를 이뤄서라도 자유 이념을 실현했으면 좋겠다.





다음은 주제는 창작이야. 사상을 하다 보면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부디 좋은 환경, 바라는 환경에서 사상할 수 있으면 좋겠네.


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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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경제와 물리 (0) 2024/03/31 AM 01:34

경제와 물리






[경제 : 1.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 · 분배 · 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


[물리 : 3. 물질의 물리적 성질과 그것이 나타내는 모든 현상,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경제의 본질적인 이해와 성장은 인간의 생활이 성립되기 위한 물리적 성질과 그것이 나타내는 모든 현상의 파악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주와 사회의 구성을 파악하고, 사회 에너지를 제어하고, 그 에너지로 동작하는 경제 생태계를 설계한다. 에너지의 제어와 생태계의 설계가 가능하면 시장에서 경제가 정부의 과한 간섭 없이 알아서 성장하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체계의 구축에는 반드시 가치 개념의 이해가 필요하다. 알면 할 수 있지만 모르면 할 수가 없다. 가치 개념 중에서 정가 가치와 당위 가치와 범주 가치가 중요하다. 이 세 개만 이해해도 많은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체계는 교육부터 시작해 시장과 시장 외까지 통합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지극히 효율적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필요한 개념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1. 개념 정리




1) 세계 확장


육체가 다른 것으로 판단이 다르게 된다. 육체 -> 인식 -> 가치 -> 기준 -> 판단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모든 인간은 육체가 다른 것으로 모두 다르게 된다. 다른 육체, 다른 인식, 다른 가치, 다른 기준, 다른 판단이다. 같은 대상을 A는 진실로 받아들이고 B는 거짓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각이 다르면 A에게는 보이기에 진실이 되고, B에게는 보이지 않기에 거짓이 된다. 그럴 때 본인의 인식만 절대적으로 여기면 다른 판단을 한 인간을 적대하기도 한다. 적대하면서 A는 진실의 세계에 갇히고 B는 거짓의 세계에 갇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세계가 그만큼 축소되게 된다. 분명 좁은 세계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면 세계를 확장해서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전제를 바꿔야 한다. 모든 인간의 자아에 인식되는 모든 존재는 실존한다. 이걸 전제하고 나서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논리만으로 본질을 파악하여 대상을 본인의 세계 구성의 일부로 자리잡게 하여 관측하는 세계를 확장한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만으로 사고의 폭이 크게 확장한다. 그 존재를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많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흔히 부정되는 개념인 거짓, 가짜, 가면, 허구, 허상, 환각, 착각, 망상, 터부 등 전부 실존한다. 없는게 아니다. 인간이 만든 기준으로 구분한 결과일 뿐이다. 


오아시스의 신기루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실존하기에 인식할 수 있다. 단지 오아시스의 본질이 아닐 뿐이다. 오아시스를 기준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대상으로 삼았다면 진짜가 된다. 신, 영혼, 유령 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실존하기에 인식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이 자연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뇌세포로 존재하는지에 따라 본질이 다를 뿐이다. 뇌세포도 물질이기 때문에 자연에 존재하든 뇌세포로 존재하든 존재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특정한 기준으로 현상을 배격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것이 아니라 인식되는 모든 존재를 세계 구성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아가 인식하는 외적 존재 뿐만 아니라 내적 존재 또한 부정하며 배제할 필요가 없다. 곧잘 특정 가치로 본인의 부정적인 요소를 배제하려는 태도가 많이 나오는데, 그러면서 세계가 축소되게 된다. 자아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실존한다 여기고 전부 수용하면 된다. 자존심 상하는 모습, 부끄러운 모습, 가여운 모습이나 환상에 빠진 모습, 신비에 빠진 모습, 착각에 빠진 모습 등 전부 수용하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된다. 예를 들어 데자뷰를 겪고 시간이 되풀이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 모습이나, 가위눌리기를 겪고 귀신이 압박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 모습 등도 전부 실존한다고 인정하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2) 본질 파악


자아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실존하지만 본질이 다르다.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대상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이 본질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가진 관측 수단으로는 본질을 알 방법이 없다. 인간의 육체로는 에너지와 물질 일부만 관측이 가능하고, 도구를 써도 모든 것을 관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A 물질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본질을 알았다고 해보자. 그런데 외계에서 날아온 B 물질과 상호작용한 결과 모르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보자. 그러면 A 물질의 본질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관측 수단의 한계뿐만 아니라 우주의 거대함에 의해 인간은 우주의 본질을 알 방법이 없다. 현존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이 모르는 본질이 있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야 우주의 본질을 알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질을 알 방법이 있다. 본질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질과 언어의 본질이다. 우주가 본디 어떻게 생기고 어떤 성질이 있는지를 알 방법이 없지만, 언어가 규정한 대상의 생김새나 성질은 알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태양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로는 모른다. 태양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를 모른다. 본래 그게 어떤 모습과 성질을 가진 줄을 모른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로는 안다. 태양계 중심에 있는 항성. 그게 인간이 관측하여 규정한 언어의 본질이다. 만약 안드로메다에 있는 항성을 태양이라 부른다면 본질이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해도 언어가 규정한 본질을 알 수 있으면 되기 때문에 우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본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가 있다. 이렇게 우주의 본질은 과감히 알 수 없다고 규정하고 언어의 본질에 집중한다. 언어가 규정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된다. 언어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과 달리 처음부터 인간이 규정했기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렇기에 보다 자유롭게 사고하며 본질을 추론할 수 있다. 자아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


언어의 본질에 집중하니 하늘 색을 색깔로 보는 것과 원리로 아는 것 둘 다 본질에 해당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늘 색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알 수 없다. 자연 계열에서 과학으로 가능한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언어의 본질은 알 수 있다.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보이는 색. 원리는 따로 하늘 색의 원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엇이냐고 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자연 계열에서 탐구하여 파악하나, 그 탐구한 본질 또한 어디까지나 언어의 본질에 해당한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






3) 지식 순도


존재의 본질을 알수록 지식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지식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사물을 깊게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분명 우주의 본질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을 많이 알수록 지식의 해상도가 높아져 지식의 모니터로 좀 더 자세히 우주를 관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많이 알고 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본질의 모순은 노이즈다. 지식의 해상도가 아무리 높아도 노이즈가 생기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특히 기초적인 본질에 모순이 생길수록 노이즈가 강하게 생기게 된다. 그러다보면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보거나 인간 조각상을 인간으로 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아예 관찰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기에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해 지식의 순도를 높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자연 계열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모순을 줄이는 것으로 지식의 순도를 높였다. 관찰, 이론, 실험, 증명, 재현 등을 통해 보편성과 재현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지식의 순도를 높여나갔다. A가 과학적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 것을 B나 C가 실험을 통해 증명하면서 모순이 없음을 확인해나간다. 그렇게 해서 자연 계열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자연 계열의 학자들이 실험할수록 자연 계열의 지식의 순도가 높아져갔다. 그들이 아니라면 현재 인류의 풍요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인문 계열은 지식의 모순을 방치해버렸다. 세계화가 되면서 세계의 수많은 인문 계열의 가치들이 충돌했다. 문명과 문화가 충돌하면서 상호 모순되는 가치들이 생기게 되었다. 유일신과 다신이 모순된다. 윤리와 체제가 모순된다. 이념과 이해가 모순된다. 자유와 지배가 모순된다. 권력과 인권이 모순된다. 


유일신과 다신의 모순 =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존재하기는 하는가?

윤리와 체제의 모순 = 지배 질서를 성립시킨 절대적 가치를 자유 체제에서 쓰는 것.

이념과 이해의 모순 = 이상적인 생각이 실제 이익으로 연결이 안된다.

자유와 지배의 모순 = 자유를 외치며 규제와 검열을 주장하고 수용하면서 체제의 모순이 발생한다.

권력과 인권의 모순 = 대상의 인권을 주장하며 권력을 얻을수록 되려 대상의 인권이 낮아진다.


그럼에도 인문 계열은 그런 모순을 제거하지 않았다. 문화 상대주의라며 너도나도 옳다는 식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인문 계열은 지식의 순도를 높이지 못했다. 사회 과학이라면서 자연 계열의 과학적 방법을 흉내냈으나, 문화 상대주의라며 모순을 방치하면서 그 흉내는 그야말로 겉만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대 종교는 수천 년이 지나도 결과가 나오질 않고 있고, 근대 이념은 수백 년이 지나도 본질적으로 진보하질 못하고 있고, 현대 인문 수십 년이 지나고 저출산과 같은 기본적인 탄생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토록 성과가 나오지 않음에도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인류는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다.


인문 계열이 생과 사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순도가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다. 문화 상대주의라면서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것은 너도 맞고 나도 맞고 모순이 있는 것은 나도 틀리고 너도 틀린다는 식으로 접근했어야 했다. 그걸로 누군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든 사랑을 받든 미움을 받든 상관없이 순수하게 논리만 보면서 지식의 순도를 높였어야 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지식의 순도를 기준으로 자연 계열에 비해 인문 계열은 레벨이 낮다. 인문 계열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지식의 순도가 낮은 이상 제대로 보질 못해서 알지도 못하고, 알질 못해서 해결도 못하고 있다. 사회 문제를 문제의 원인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듯이 말이다. 그토록 우수한 엘리트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순도가 낮아 문제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4) 성립 조건


모순은 한 개념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여러 개념이 서로 맞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 한 개념의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되면 따로 비교할 필요 없이 본질을 바꾸면 된다. 여러 개념이 서로 맞지 않을 때에는 비교를 통해 특정 개념의 모순을 제거하여 본질을 바꾼다. A와 B가 모순되면 A와 B를 C나 D와 비교하면서 모순이 있는지 확인하고나서 모순이 있는 쪽의 개념의 본질을 바꾼다. 


통상 과학적 방법을 거쳐 순도 높은 자연 계열의 개념이 비교 대상으로 타당하다. 자연 계열의 개념과 비교를 통해 많은 미신들이 사라졌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미신은 자연 계열의 개념과 비교하여 모순되면서 죽음의 선풍기라는 언어의 본질이 바뀌면서 사라졌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전해내려온 소문 정도지만, 죽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온갖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 매우 많아 논리적으로 상대가 되질 않는다.


다음은 성립 조건이다. [성립 조건: 1. 어떤 일이나 사물이 이루어지는데 필요로 하는 조건.] A를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가? 자연 계열에서는 실험을 통해 성립 조건을 파악한다. 폭발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이걸 직접 실험하면서 실제 성립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성립 조건을 파악하고나서 폭발의 본질, 폭발에 속하는 요소들의 본질들의 모순이 대폭 줄어든다. 그러면서 관련 지식의 순도가 매우 높아진다. 


이러한 성립 조건을 논리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순도 높은 지식들을 활용해 논리적으로 성립 조건에 해당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순을 찾아내는 것이다. A를 성립시키는데 필요한 조건이 B라면, B는 A와 연관된 본질을 가질 것이다. A를 성립시키는데 필요한 조건이 C가 아니라면, C는 A와 연관되지 않은 본질을 가질 것이다. 설령 개념의 앞뒤가 맞더라도 성립 조건에서 모순이 생기면 본질이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성립 조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새로운 개념의 성립 조건을 파악하는데도 수월해진다. 그러면서 자아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조차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어떤 현상의 성립 조건에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떠올린다. 통상 이 방법이 모르는 것을 발상하는데 많이 쓰인다. 


A, B, C, D 등 모든 개념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서로의 모순을 파악하여 본질을 바꾸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바꿀 수가 있다. 단단하게 고정된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그러면 시간, 지배, 자유의 성립 조건에 대해 알아보면서 성립 조건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해보자.




첫째, 시간의 성립 조건


[시간: 6. 지구의 자전 주기를 재서 얻은 단위. 이론적으로 고전 물리학에서는 공간에서 독립한 변수 곧 절대 시간으로 다루어졌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는 양자가 물리적 사건을 매개로 하여 사차원의 시공 세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


시간의 성립 조건을 통해 특정 개념이 성립 조건에 필요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알아보자.


시간의 성립 조건은 우주의 변화와 관측 순서다. 우주가 변화하는 것을 관측한 순서대로 과거, 현재, 미래로 규정한 것이 시간이다. 관측 순서니까 공통 인식을 위해 지구의 자전 주기를 재서 얻은 단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은 원자 시계로 대체했다고 한다.


상대성 원리는 물리 법칙은 절대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좌표계는 상대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시간이 우주의 변화를 관측한 순서가 아닌 좌표계에 존재한다고 전제했다. 시간은 원시 시대부터 있던 개념으로 지극히 당연하게 좌표계에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은 시간이란 개념을 좌표계에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현상을 탐구했다. 차이는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지만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시간의 성립 조건에 좌표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시간이 상대적인 이유는 지극히 당연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시간이 관측 순서기 때문에 관측자에 따라 상대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에는 관측자에 대해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는 시간이 느려진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물체가 빠른 속도로 운동할수록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이 관측자에게 도달하는 거리가 길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양한 주장을 살펴봤으니 시간의 성립 조건인 우주의 변화와 관측 순서를 제외하고 필요한 조건은 없었다. 거기에 추가로 더하는 것은 억지다.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마나가 존재한다 주장할 수도 있다. 현상의 성립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 개념은 없다 보는 것이 맞다. 인간이 만든 수수께끼라면 굳이 성립 조건에 속하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넣을 수도 있겠지만, 자연은 그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시간을 전제한 다양한 이론을 말하면서 시간이 좌표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그 이론들은 시간이 좌표계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 따로 탐구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시간은 원시 시대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좌표계에 있을 거라 전제했던 것 같다. 이동이 멈춘 현상과 시간이 멈춘 현상에 논리적인 차이가 없음을 알았을 때 시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다시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시간이 그 누구도 그에 대한 가치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차원은 처음부터 공상의 개념이다. 시간이 관측 순서가 아닌 우주 법칙이라 전제한 다음에 만들어진 개념. 단 한번도 다차원의 증명이 있던 적이 없지만 시간이 있다고 믿었기에 차원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관측 순서라면 그 전제 자체가 붕괴한다. 없다. 차원은 관점이다.


애초에 있다 가정해서 그것이 없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있다 주장한 측이 그걸 증명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 요구하는 건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 요구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본래 있다고 주장한 측에서 그걸 증명해야하는 것이다.






둘째, 지배의 성립 조건


[지배: 1.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의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림.]


지배의 성립 조건을 통해 특정 개념이 성립 조건에 필요한 경우에 대해 알아보자.


지배의 성립 조건은 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다. 지배는 단순히 지배자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가 복종을 해야 성립한다. 신의 지배와 왕의 지배가 대표적이다. 통상 지배는 권력으로 강제력을 행사한다. 행사 방식은 무력으로 짓밟거나 매력으로 매혹하거나 재력으로 장악하는 등과 같이 다양하다. 그런데 힘을 가한다고 반드시 복종한다는 법은 없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복종하게 한다고 해도, 복종하고 나서 다음에 다른 마음을 먹고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지배는 힘만으로 성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복종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 당위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렇다면 신정이나 왕정에서는 그 당위가 무엇이었는가?


일반적으로 이 당위를 알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인류 문명은 지배를 겪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배의 잔재가 남아있어 복종을 지속하게 한 당위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비슷한 개념의 성립 조건을 통해 추론해야 한다. 바로 이른바 사이비 종교라 불리는 신흥 종교다. 신흥 종교는 종교의 교주가 교인을 지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서 교인이 지속적으로 복종해야 할 당위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교인을 복종하게 하였는가? 종교의 교리다. 교리를 의심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인 교리에 의해 교인은 교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신흥 종교에서 당위는 절대적 가치인 교리였다. 그렇다면 신정과 왕정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 가치였는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판단조차 하지 않았던 개념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윤리다. [윤리: 1.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할 도리.] 아마 대부분은 윤리를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고 윤리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적으로 그르다 여기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굉장히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만 접근하자. 윤리는 절대적 가치가 맞는가? 맞다. 절대적 가치는 절대적이기에 판단을 하지 못하는가? 맞다. 지배의 성립 조건에 절대적 가치는 포함되는가? 맞다. 신정이든 왕정이든 절대적 가치인 도덕과 윤리를 통해 지배 질서를 받아들이게끔 교육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노예 디자인 교육을 한 것이다. 거기서 윤리는 개인의 정신에 찍는 노예의 낙인이다. 그것으로 인류는 노예로 디자인된 노예 디자인 휴먼이 되었다. 나도 노예의 낙인이 찍혀있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성립 조건을 통해 왕정 시대부터 전해온 도덕과 윤리는 지배를 성립시킨 개념임을 추론했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흥분하면서 욕을 할 수도 있다. 도덕과 윤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왔는지에 대해 외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옳고 그르다 배워왔던 것이 아니라고 듣는다면 그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것으로 누군가 돕고 희생한들 그게 지배의 성립 조건 중 하나임을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통상 도덕과 윤리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바로 그게 종교의 지배를 받아들이게끔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어진 절대적 가치다. 그걸 신정이나 왕정이 이용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면서 그 가치가 어떤 현상을 부를지 아예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어떤 현상을 부를지 조금도 생각조차 못한다.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올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 문제의 원인조차 모른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금욕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윤리가 원인임을 모르는 것이다. 타인을 돕거나 희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여야 한다. 윤리가 아닌 판단할 수 있는 체제나 개인의 가치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C. 절대적 가치의 판단 불가] 이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절대적 가치는 고유한 절대적 가치와 보편적 절대적 가치가 있는데, 고유한 절대적 가치는 사회에서 다른 인간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으면서 그것에 의한 문제를 알 수 있는데, 보편적 절대적 가치는 사회 전체가 그것을 판단할 수 없으면서 그것에 의한 문제를 누구도 모른다. 이것을 세계화되면서 다른 사회가 판단할 수 있어야 했는데, 문화 상대주의라며 얼렁뚱땅 넘기는 바람에 누구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심신 피로, 유아 퇴행, 과한 음주, 강한 마약 등 아무리 우수한 인간이더라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바보가 된다. 이 논리는 간단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절대적 가치를 보자. 절대적 가치도 판단할 수 없는 가치다. 앞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면 바보가 된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논리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아무리 우수한 인간이라도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에서는 우수하지만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에서는 멍청하다. 이 논리를 이해해야 본인이 멍청해질 수 있는 상태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멍청하게 될 수 있는 음주 상태에서의 운전을 하지 않게 될 명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보편적 절대적 가치에 한에서는 그야말로 원시 레벨까지 낮다. 그 가치 자체가 거의 발전하질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인문 계열 학문은 레벨이 들쭉날쭉하다. 상대적 가치는 현대 문명에 걸맞게 레벨이 높은데 절대적 가치는 굉장히 레벨이 낮다. 가장 기본적인 논리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낮다. 이 레벨의 편차가 학문의 발전에 정말 크나큰 방해를 하고 있다. 특정한 절대적 가치는 그 가치만 레벨이 낮은 게 아니라, 그 가치와 연관된 개념들은 전부 영향을 주게 된다. 판단을 못한다는 점에서 술주정이랑 차이가 없는 수준인데 당연하다. 


다시 말하는데 상대적 가치는 매우 우수하기에 현대 문명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체제의 경우에는 우수하다. 체제의 가치는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윤리는 판단을 못한다. 예를 들어 이렇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며 존댓말을 하는 것은 절대적 가치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을 할 경우 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반면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상대적 가치로 투표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개인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왕정의 예의는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모든 개인에게 권력이 있는 민주정의 제도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알겠는가? 그럼에도 절대적 가치는 판단할 수 없으면서 그게 무슨 문제인지조차 모른다. 그나마 반말 존댓말은 다른 문명권에 없는 경우도 있어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른 문명권도 비슷한 절대적 가치가 있을 경우에는 정말 인식조차 못한다. 시간, 금욕, 이타, 성 등 대부분 그러하다. 시간은 자연스러운 절대적 가치라면 윤리는 인위적인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있다.



이 절대적 가치의 뿌리는 원시 질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능이 낮은 짐승은 힘으로 복종하게 하면 대체로 질서가 잡혀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지능이 높은 인간은 힘으로 복종하게 해도 곧잘 반란을 할 수가 있다. 개인의 힘이 어디로 튈지를 몰라 질서가 잡히지 않아 사회로 이루기 어렵다. 거기서 원시적인 질서가 나온다. 인간은 보통 공포에 질려 도망칠 때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도망칠 곳을 알려주면 웬만하면 그곳으로 다 도망친다. 힘의 작용이 일정하게 되면서 질서가 잡히게 된다. 공포 -> 도피를 사용한 원시적인 질서다. 자연에 대한 공포에서 도피하기 위해 자연에 신앙한 애니미즘 같은 것이 그런 질서 중 하나다. 그리고 그 파생이 도덕과 윤리다. 도덕은 학문으로 체계가 잡히기 전의 절대적 가치고, 윤리는 학문으로 체계가 잡힌 후의 절대적 가치다. 권선징악.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으로 징계에서 선의 행함으로 도피하게끔 만든다. 천국과 지옥.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선을 행함으로 천국으로 도피하게 만든다. 여기서 선과 악은 주장한 집단, 주로 종교에 이로운 가치와 해로운 가치다. 도덕과 윤리는 전부 공포 -> 도피 논리를 활용한다. 그렇게 하여 공포에 질려 판단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행하게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된 것이다.


신의 지배와 왕의 지배에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 통상 기독교는 신의 지배고 유교는 왕의 지배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지배를 위해 신앙이 절대적 가치고 유교에서는 왕의 지배를 위해 권력이 절대적 가치다. 기독교권에서는 신앙이 절대적 가치기에 신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면 유교권에서는 권력이 절대적 가치기에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기독교권에서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나타날 수 있었다. 신앙은 절대적 가치지만 인간의 권력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교권에서는 결코 그런 사상이 나타날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지금도 연령 등의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제왕적 대통령제, 귀족적 의회제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얼마나 고상하고 위대하든 판단하지 못하면 위험 요소가 된다. 우수한 엘리트가 신흥 종교에 빠지면 평소에 우수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종교에 관련되어서는 멍청해지게 될 수 있다. 절대적 가치라는 낙인에 찍히게 되면 그 가치에 한에서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자는 평소에는 매우 우수해도 민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기에 판단하지 못하면서 민족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바보가 된다. 그러니까 한국 민족주의자가 북한 독재자에 이용당한 것이다. 대체로 지능은 정상인데 쉽게 이용당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경우 대부분이 절대적 가치에 의한다. 그래서 사기를 칠 때에도 보편적인 절대적 가치를 이용한다. 보이스피싱이 가족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래야 상대가 판단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속을 수 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멍청해질 수 있는 상태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선진국의 고질적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도 절대적 가치 때문이다. 기독교권이나 유교권이나 비슷한 공통된 문제를 공유하나, 신의 지배보다 왕의 지배가 더욱 더 강하게 노예의 낙인을 찍은 모양인지 유교권에서 그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쁜 이미지를 벗기 위해 윤리를 매우 강조하면서 미성년에게 강한 노예의 낙인을 찍었다. 그러면서 학교 폭력의 대명사가 된 이지메, 은둔형 외톨이의 대명사가 된 히키코모리를 비롯해 오랫동안 지속된 저출산에 의한 고령화, 장기적 경제 침체 등을 겪고 있다.


논리적으로 보자. 금욕을 강제하면 강제할수록 어떻게 되겠는가? 욕망이 줄어들면서 인간은 행동해야할 동기를 잃는다. 단계별로 욕망이 줄어들면서 에너지가 방출되지 않으면서 인간은 살아갈 이유를 잃는다. 이타를 강제하면 강제할수록 어떻게 되겠는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면서 타인이 불행하지 않도록 불행할 수 있는 사건 자체를 만들려하지 않게 된다. 단계별로 점차 인간 관계가 멀어지면서 인간은 살아갈 이유를 잃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당연히 욕망이 필요하고 타인에게 폐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니까, 노예의 낙인에 크게 영향을 받을수록 이지메를 당하고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욕망이 없고 타인의 행복을 위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일본의 개인주의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윤리적인 거리감이다.


저출산이나 경제 침체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에너지가 적은 상태에서 일과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범주 가치가 매우 낮다보니 시장이 망가지게 된다. 일은 미성년 때부터 직접 해보면서 친숙하게 해야 하는데, 어디 미성년이 일을 하냐며 무작정 막고 공부만 시키면서 일에 관한 범주 가치가 폭락하면서 노동 시장도 망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성 산업이 유명하나 미성년에게 가해지는 보편적인 성 억압은 강한 편이기에 AV 배우에 대한 시선이 한국보다도 곱지 못하다. 미성년 때 성을 억압하면 성에 대한 부정적 가치관이 심어져 연애를 안하게 된다. 일본 20대 연애 비율이나 성경험 비율이 매우 낮은 것으로 연애 범주 가치가 망가진 상태인지 나타내고 있다. 일이든 성이든 미성년 때부터 친숙해야 해당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 가치에 관련된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도 윤리적으로 그걸 못하게 막으면서 시장도 같이 죽었다.애초에 지배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가 온전히 존중될 수가 없었기에, 그 시대의 질서는 개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질서기에 시장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을 한국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성에 관해서는 여성주의가 여성성을 여성 권력의 도구화 하면서 연애 시장 진입 난이도와 비용이 더욱 높아지면서 더 심각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체제가 다른 중국도 시장을 도입하면서 일정 부분 자유롭게 되면서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체제가 다른 비슷한 유교권 국가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면 근본적인 공통점이 원인이라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절대적 가치는 판단할 수 없어서 원인조차 모른다. 그래서 윤리로 발생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윤리를 더욱 강조하는 황당한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회 에너지를 줄이면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는 줄 수 있어도 안의 사회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진다. 간단한 논리도 모른다. 자유 체제에서 금욕주의나 이타주의 타령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배 체제라면 지배로 강제해서 어떻게든 하게 할 수 있지만 자유 체제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단 말이다. 자유 체제에서는 개인의 의사로 현상이 나타나면서 시장 원리를 따라가는데, 가치를 망가트리면 어떻게 그 가치의 시장이 정상적으로 동작하겠는가?


가치는 상대적이니까 각자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판단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은 학문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그 가치에 한에서는 지나치게 레벨이 낮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인간은 자연 계열은 실험을 통해 어떻게든 판단할 가능성이 있는데 인문 계열, 특히 순수 인문 계열은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길 권하겠다. 절대적 가치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 떠드는 것 자체가 학문에 해롭다. 반대로 절대적 가치에서 벗어나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지식의 순도를 높이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할 수 없으면서 현재 고질적 사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문제의 본질조차 모르는 것이다. 수천 년, 수백 년, 수십 년.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가? 언제까지 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이미 선례가 있는데도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다. 현대 인문에서 상대적 가치는 레벨이 높은데 절대적 가치는 레벨이 낮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판단하지 못하면서 절대적 가치를 실천하며 정의롭게 국가적인 자살을 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셋째, 자유의 성립 조건


[자유: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얾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자유의 성립 조건을 통해 어떤 개념이 성립 조건에 필요한지 알아보자.


자유의 성립 조건은 우선 자아, 생존, 환경, 능력이 있다. 자아는 생물 메커니즘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으로 자아의 자유는 판단의 자유라 할 수 있다. 생물 메커니즘에서 자아는 판단만 해야 모순이 없다. 발상과 실행을 세부적으로 할 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판단만 한 것을 생물 메커니즘에서 실행하기에 그렇다. 자아가 계속 판단할 수 있는 생존이 필요하고,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고, 자아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자유의 성립 조건에는 저 네 가지가 들어간다.


이런 자유를 성립시키기 위한 체제가 바로 자유주의다. 이 자유주의 체제의 성립 조건에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와 시장주의가 포함되게 된다. 모든(민주주의) 개인(개인주의)의 자유(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장(시장주의) 제도가 필요하다. 


개인의 의사가 온전히 반영되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욕망과 이기가 필요하게 된다.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주장을 해야만 내면에 있는 목소리까지 온전히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런 개인의 의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사회에 이롭게 될 수 있도록 공정한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이것이 기본적인 자유주의 체제의 성립 조건이다. 각각의 개념은 이런 식으로 성립 조건을 고려하면서 논리를 구축해나가면 된다. 헌법이든 법률이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주의 체제 성립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절대적 가치에 의해 그게 잘 안되던 상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권력의 평등한 질서다. 권력으로 차례가 정해지지 않는 질서다. 통상 시장과 같이 개인의 의사로 차례가 정해진다. 그러나 유교는 권력으로 차례가 정해지는 질서다. 권력이 높은 순서대로 차례가 정해진다. 이 둘은 아예 정반대임에도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교 질서가 남아있는 상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교 질서가 남아있을 정도로 체제 이해가 부족하여 본질과 거리가 먼 평등을 추구하기도 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권력의 평등이지 모든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권력이 평등해도 무력, 지력, 매력, 재력 등이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말하며 모든 것을 평등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되려 체제를 파괴한다. 현재 평등은 크게 상하는 없되 선후는 있는 기회의 평등과 상하는 있되 선후는 없는 결과의 평등으로 나뉘는데, 결과의 평등의 경우 선후를 없애기 위해 위에서 아래에게 강제해야 하기 때문에 지배하게 되면서 민주주의 체제가 파괴되게 된다. 괜히 공산주의가 지배 체제가 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른 힘은 차이가 있어도 권력은 평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


약자에 대한 복지 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닌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정책으로 접근해야 한다. 선후의 차이는 선후를 강제로 맞출 것이 아니라, 후발 주자가 앞서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에 있다. 상하는 없어 모두가 대등하고 선후는 있어 누구라도 자유롭게 힘을 키워나갈 수 있는 체제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다.


분명 자유는 상대적 가치로 모든 인간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게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판단 -> 계약으로 체제에 속하는 동안만 준수해야할 가치로 남아야 한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 체제에 속하게 할 수 있는 이익 보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인류의 문명 발전이라 주장하겠다. 인간은 자유로울수록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 생산이야 인간을 지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고부가 가치는 인간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생산될 확률이 높다. 그것으로 인류 문명이 발전하면서 모든 개인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불로불사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든 개인은 자유주의 체제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2. 세계 구성


[세계: 3.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


경제를 물리로 해석하려면 세계 구성을 파악해야 한다.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물리적으로 경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세계 구성은 앞서 모순을 제거해 다룬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드는 방법을 통해 추론하였다. 우주의 성립 조건은? 생명의 성립 조건은? 사회의 성립 조건은? 이런 식으로 추론하였는데 아직 순도가 높지는 않다. 각각의 언어 개념을 논리적으로 풀어 정리하는 것. 그냥 하던대로 대략적인 구성을 한번 써보겠다. 




1) 우주 구성


우주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기본 상호 작용: 1. 우주상에 존재하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힘. 강한 상호 작용, 약한 상호 작용, 전자기 상호 작용, 중력을 말한다.] 간단히 힘으로는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 있다고 한다.


우주의 구성은 초기에 통일장 이론이나 초끈 이론을 관성적으로 받아들였었다.  [통일장 이론: 1.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확장하여 중력장, 전자기장, 핵력 마당 따위를 물리적 공간의 일정한 성질에 귀착시켜서 일반적인 마당을 통일적으로 논하려는 이론.] 그런데 시간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시간이 좌표계가 아니라 판단하고, 생명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법칙은 초기에 단순할 수 있다 판단하고 나서, 우주의 법칙 또한 초기에 단순하지 않을까 싶었다. 


[C. 에너지 본질] 우선 우주의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우주에는 크게 에너지와 물질이 있다. 그렇다면 에너지와 물질 중 무엇이 우주에 먼저 존재했는가? 다른 개념들을 통해 하나씩 생각해보았다. 에너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중력, 물질에는 무언가를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초신성, 별의 폭발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다. 중성자별, 초신성 폭발 후 만들어진 항성. 블랙홀, 중성자별의 붕괴. 핵 붕괴, 원자핵이 에너지를 잃는 과정. 빅뱅, 우주의 탄생을 가져온 거대한 폭발. E=mc2, 질량과 에너지 등가. 이런 개념들을 통해 빅뱅 이론과 같이 우주에 초기에는 에너지만 있었다고 판단했다. 물질은 에너지가 응축하면서 만들어진 존재다. 물질이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질이 붕괴하면 에너지가 방출하는 것이라 추론했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선 물질이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는 것은 물질에 있는 힘인 중력은 실제로 에너지가 응축하면서 생기는 힘이라 추론했다.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물질 자체가 응축되는 일을 하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즉 현존하는 모든 존재는 에너지의 다른 형태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에너지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의 공통점은 응축하고 확산한다. 당기고 밀어낸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나 자석의 자기장 또는 행성의 공전 등도 전부 당기고 밀어내는 것을 기초로 한다고 보았다. 약력의 경우 당기고 밀어내는 것이 적다고 하는데, 베타 붕괴 또한 당기고 밀어내는 성질 중 하나로 나타나는게 아닐까 싶다. 당기고 밀어내는 성질은 응축과 확산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 보았다. 


에너지의 기본적인 성질은 응축이나 확산. 둘 중 하나가 기본 성질일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만약 에너지의 기본 성질이 확산이라면 물질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무한히 퍼져나가면 끝난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기본 성질은 응축이었다. 모든 법칙의 기초는 에너지의 응축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단순히 응축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일정 이상 응축되면 초신성과 같은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 보았다. 그게 아마 빅뱅과 같은 폭발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한번의 폭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의 폭발로 끝없이 확산된다면 현재 우주처럼 다양한 물질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단계별로 폭발했을 거라 추론했다. 최초 에너지의 성질대로 응축된다. 아마 그러면서 특정 물질도 같이 만들어진다. 아마 초기에는 순수한 기본 입자일 것이다. 일정 이상 응축되다가 폭발한다. 그러면서 에너지와 물질이 확산된다. 폭발 이후에는 초기 블랙홀이 나타난다. 에너지와 물질은 일정 이상 확산되면서 물질을 중심으로 에너지가 응축된다. 확산되는 힘과 응축되는 힘이 비등해질 시기에 확산이 멈추면서 블랙홀의 중력의 영향을 받아 당겨지기 시작한다. 에너지의 응축이 일정 이상되자 다시 폭발한다. 응축과 폭발 중에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진다. 동시에 새로운 블랙홀도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응축되는 에너지는 블랙홀과 물질이 당기는 힘에 의해 늘어지게 되었다. A와 B가 강한 힘으로 당기면 그 사이에 있는 C는 쭉 늘어지게 될 것이다. 에너지는 응축하므로 입자가 기본일 것 같다. 입자에서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당겨지면서 파동이 된다.


우주에는 수많은 물질이 있으므로 단순히 A와 B가 당기는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무언가가 당기면서 에너지의 응축 외의 성질이 생기게 되었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은 이렇게 응축과 폭발로 나타난 당기는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당기는 힘을 반대에서 보면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밀어내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자석의 다른 극 밀어내기는, 아마 자석 내부에서 서로 당기는 것에 의해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즉 우주의 성립 조건은 에너지고, 에너지의 본질은 응축과 폭발이다. 응축, 폭발, 확산, 다시 응축하면서 당기는 힘의 작용. 그것의 수많은 반복의 결과가 현재 우주의 에너지와 물질, 그리고 법칙이라 판단했다. 


초기 원시적인 성질에서 반복한 결과가 현재의 법칙이라는 것. 각각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풀어본 결과 그런 결론이 나왔다. 통일장 이론이나 초끈 이론은 현재 우주의 법칙을 묶어서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디지털 현상을 법칙화한 다음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보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인간과 멜론을 하나로 묶어서 보려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해야 할까, 뭔가 인과를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디지털의 뿌리가 0과 1이듯이, 생명의 뿌리가 같듯이. 우주의 법칙도 뿌리에서 시작해 다양하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했다.




[C. 공간 에너지] 모든 존재는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 물질은 에너지의 응축된 결과다. 시간은 관측 순서로 좌표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간은? 모든 존재가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면 공간 또한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인간은 행성이란 단단한 존재에 붙어 있기에 공간이 어떤 절대적인 개념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을 수 있는데, 우주로 보면 공간이 절대적인 개념일 필요가 없다. 공간 또한 에너지로 구성된 존재. 최초 에너지가 응축되다 폭발하면서 공간 또한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간이 생겼을 때 공간을 이루는 에너지가 있어야 공간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공간의 성립 조건으로 나온 개념이 바로 공간 에너지다.


공간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전제해보자. 그리고 중력 개념을 생각해보자. 중력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그리고 중력은 힘이 매우 미약하여 지구가 당기는 힘을 제외하면 체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주 전체를 당기는 힘이 있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이 은하계 중심으로 돈다. 중력의 본질이 무엇인가? 당기는 힘이다. 만약 공간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전제하면 이것이 이해될 수 있다. 중력은 물질만 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을 이루는 에너지도 당기는 힘이라 전제하면 된다. 공간을 이루는 에너지도 당기기 때문에 우주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중력은 공간을 당기기에 공간에 속한 개개의 에너지와 물질에 미치는 영향은 적게 된다. 블랙홀은 공간 에너지조차 빨아들이기 때문에 은하 중심에서 은하에 속한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며 공전시킨다. 공간 에너지를 전제하면 우주 팽창은 우주 전체의 팽창이 아닌 공간 에너지의 확산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간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전제해보자. 그리고 양자 개념을 생각해보자. 양자 현상은 미시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중 슬릿에서 광자를 쏘았을 때 관측하면 입자,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이 나타난다는 실험을 통해 미시 세계에서는 거시 세계와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현상은 공간 에너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관측한다는 행위는 관측할 때 생기는 에너지가 입자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측하면 입자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관측하지 않으면 입자의 에너지가 그대로인 상태임을 의미한다. 만약 공간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면 이것이 이해될 수 있다. 공간 에너지도 에너지인 만큼 힘이 작용할 것이다. 그 힘이 몹시 작아 거시 세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에너지가 적은 미시 세계에서는 영향을 미친다고 해보자. 그러면 관측하지 않을 때 입자는 공간 에너지보다 에너지가 적어 공간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사방에 있는 공간 에너지에 당겨져 파동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공간 에너지는 다른 중력에 당겨지면서 일정하지 않은 상태가 되면서 입자를 일정하지 않게 당기면서 마치 확률과 같은 무작위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거시 세계에서도 에너지를 공간 에너지 영향을 받을 때까지 줄이면 양자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아마도 그 현상 중 하나가 초전도체가 아닐까 싶다. 온도가 내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가 적다는 것. 한계까지 에너지를 줄이면 지구 자기장보다 공간 에너지 영향을 받아 자기장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공간 에너지 개념을 통해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을 간단하게 나눌 수 있다. 공간 에너지를 당기면 고전 역학, 공간 에너지에 당겨지면 양자 역학이다. 공간 에너지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중력과 양자 현상의 논리적 모순은 사라진다. 이 개념을 통해 우주의 성립 조건이 에너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주의 구성 또한 에너지를 기초로 한다는 것을 알 수있다. 알지 못한다고 거기에 확률을 붙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주는 전부 논리적인 인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2) 생명 구성


생명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생명의 성질을 생각해보자. 물질을 먹어야 한다. 에너지를 방출한다. 방출한 에너지로 동작한다. 세포 분열과 같이 물질을 복제한다. 전기 신호를 쓸 수 있다. 가시광선을 볼 수 있다. 기록된 유전을 재현한다. 세포의 성질은 생물의 성질과 본질적으로 같다. 작은 개념은 큰 개념을 따른다. 이하 다양한 성질을 통해 생명의 성립 조건은 원자핵 붕괴라는 판단을 했다. [원자핵 붕괴: 1. 하나의 원자핵이 방사선을 내어 다른 원자핵으로 변화하는 일. 알파 붕괴, 베타 붕괴, 감마 붕괴 따위가 있다.]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에너지를 방출한다. (생명의 에너지 방출) 전자 포획을 통해 전자를 받아들이고 중성미자를 방출할 수 있다. (생명의 물질 흡수와 물질 생성, 가시광선 관측과 전자의 기록) 자발 핵분열을 통해 원자핵이 두 개 이상의 작은 원자핵과 다른 입자로 분열한다. (생명의 분열, 유전) 내부 전환으로 전자를 방출할 수 있다. (생명의 전기 신호) 


모든 조건을 고려하다보니 물질 붕괴 개념에 닿았고, 물질 붕괴 개념을 찾아보니 원자핵 붕괴가 있었다. 최초에는 원자가 너무 작아서 생명의 본질이 맞나 의심을 했는데, 세포와 생물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떠올리고 원자핵 붕괴의 성질과 세포의 성질과 생물의 성질이 같다는 판단을 했다.


원자핵 붕괴한 특정 물질이 전자 포획이나 전자 포획과 비슷한 방식으로 어떤 물질을 흡수하면서 안정화가 된다. 전자 포획을 하면서 특정한 전자 형태를 가지게 된다. 그 전자 형태를 가진채 자발적 핵분열을 통해 원자가 복제된다. 대량으로 복제되면서 분자가 된다. 원자의 전자 형태가 기초적인 DNA가 된다. 원자핵 붕괴로 흡수하는 물질에서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버린다. 버려진 물질들이 원자핵 붕괴로 만들어진 분자를 감싸면서 세포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세포가 된 이후 원자핵 붕괴 시기와 같이 움직인다. 물질을 흡수하고 안정화된다. 에너지를 방출해 움직인다. 불필요한 물질은 내뱉으면서 물질이 생성된다. 전자 포획을 통해 전기 신호를 DNA에 기록한다. 염색체가 두 개의 세포핵으로 분열하면서 세포 분열을 한다. 거대한 물질을 흡수하면서 계속 세포 분열을 한다. 그러면서 계속 새로운 전기 신호를 기록하면서 DNA가 길어진다. 


물질의 흡수는 세포가 갉아먹는 형태가 된다. 이는 동물의 혈관과 식물의 뿌리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식물의 뿌리가 땅으로 뻗어나가듯이, 동물의 혈관도 세포가 뻗어나간 흔적이 아닐까 싶었다. 바다에서 물질을 갉아먹으며 세포 분열을 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분열을 하는 일이 생긴다. 기본적인 세포는 신경 세포로 분열하면서 전기 신호를 주고 받으며 연결되게 된다. 세포 분열이 완전하지 않아 다양한 형태로 분열되게 된다. 적혈구나 백혈구 등 또는 단세포나 바이러스와 같은 형태 등이 있다. 그 중에 염색체 수가 반으로 줄어든 망가진 세포가 나오는데 그게 생식 세포다. 망가진 세포는 필요가 없어 버려지는데, 염색체가 반으로 줄어든 망가진 세포가 수도 없이 버려지는 과정에서 비슷한 세포끼리 결합하면서 완전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세포가 생기게 된다. 그게 생식 세포의 결합이다. 


생식 세포가 결합하면서 내부 기록인 DNA가 망가진 모양인지 생식 세포는 세포 분열을 이상하게 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처음부터 다시 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생물이 탄생한다. 세포가 갉아먹은 형태를 기록한 시기대로 생물의 생김새가 달라지게 된다. 세포가 외부 표면을 다 갉아먹고 내부를 생선 뼈다귀의 형태로 갉아먹으면 어류가 된다. 세포가 외부와 내부를 대부분 갉아먹고 외부에 단단한 물질을 생성하면 갑각류가 된다. 세포가 외부와 내부를 전부 갉아먹으면 연체류가 된다. 초기에는 대게 물고기와 같은 뭉툭한 형태의 생물로 시작한다. 최초 갉아먹은 물질이 뭉툭하기 때문에 물고기와 같이 뭉툭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세포는 갉아먹은 순서대로 기관이 된다. 최초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갉아먹으면서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없어지자, 심장 부위에 있는 분열한 세포로부터 물질을 공급받아 유지한다. 끊임없이 공급 받으며 머리에 해당하는 부위에 많은 세포 분열이 나타난다. 거기서 뇌가 형성된다. 물질을 공급하는 세포는 물질을 공급하게끔 기록된 세포를 분열하면서 다른 세포로부터 물질을 계속 공급받으며 심장에 해당하는 부위에 많은 세포 분열이 나타난다. 거기서 심장이 형성된다. 큰 두 개의 기관에서 사방팔방으로 세포 분열이 일어나면서 혈관이 나타난다. 머리에서 갉아먹기 시작해 물질을 관통하면서 똥구멍이 생기게 된다. 내부에 충분히 갉아먹은 공간에는 바닷물이 가득차게 된다. 그 바닷물에 적혈구와 백혈구 등이 들어가면서 그것이 피가 된다. 


생물이 탄생한 이후에 생식 세포의 유전은 기록의 재현과 유전의 조합을 둘 다 하면서 온갖 다양한 생물을 탄생시킨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정확히 모름)에 유전이 기록을 멈추면서 새로운 생물은 오로지 유전의 조합으로 탄생되게 된다. 그러면서 특정 종의 고정된 형태가 시작된다. 오늘날 생물이 보통 그러하다. 종이 유전을 해도 본질적인 형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재 진화는 돌연변이로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다. 인간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생명의 성립 조건은 원자핵 붕괴와 그 붕괴가 생명이 될 수 있는 환경이다.


생명의 경우에는 그 본질을 몰라 자꾸 인문 계열의 개념으로 접근해 마치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생명은 어디까지나 기록된 정보를 재현할 뿐이다. 그런 것 중에서 생존에 적합한 것이 살아남으면서 마치 생명이 생존하길 바라는 것처럼 된 것뿐이다. 만약 생명의 생존이 절대적이라면 자살하는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충실하게 기록을 재현하기 때문에 기록만 조작하면 불로불사나 인간의 머리에 짐승의 귀를 생기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생물이 기록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이 감각할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이 다르고, 항상성과 같은 개념이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3) 사회 구성


사회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인간이 모여 생활을 하면 사회다. 원시인이 모여 생활을 하면 원시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 구성은 원시적인 사회부터 접근해야 한다. 원시적인 사회부터 풀면서 현대적인 사회까지 파악을 해야 사회 구성을 알 수 있다. 현대와 같이 세계화가 되기 이전에 인간 사회는 각각 고립되어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차이에 대해서도 파악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모여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인간이다. 인간은 생물 중 지능이 높은 종이다. 인간의 특성에는 이족 보행, 섬세한 수족, 높은 지구력, 도구 활용 등이 있지만 다른 종과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지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특성에 의해 지능이 높아졌다는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다. 모든 인간은 같은 종이므로 종이 고립된 사회의 차이를 만드는데 크지 않다.


다음은 환경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적합한 환경이 있어야 인간이 생활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달리 풀면 인간 사회가 있던 곳은 전부 인간이 생존하기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정글, 사막, 극지 등 다양한 환경에서도 인간이 살았다면 거기는 논리적으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장소다. 즉 인간 사회는 각각 환경의 차이가 있으나, 그 환경들의 특징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자 생존의 논리로 접근하여 인간이 생존한 사회는 달리 말해 생존할 수 있는 사회기 때문에 환경이 고립된 사회에서의 차이를 만드는데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다.


다음은 질서다. [질서: 1.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 질서가 있어야 사회가 성립한다. 인간의 생활이 사회로 가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질서다. 인간을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불규칙하게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이다. 그 물질은 오랜 세월 기록의 재현을 조합하면서 내부의 구조가 복잡하여 어떤 식으로 에너지가 방출될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 물질을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에너지 방출이 되는 특정한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질서다.


불규칙하게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인 인간은 공포에 질리는 상황에 빠지면 대부분 도망친다는 개념으로 에너지를 방출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쳐야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적자 생존의 결과 일반적인 인간은 특정한 공포를 겪으면 판단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치게 되었다. 이는 대부분 생물의 본능에 해당할 것이다. 생물은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규칙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했다. 그런데 도망이라는 에너지의 방출이 규칙적이게 되었지만 방향은 아직 불규칙했다. 거기서 도피 개념이 나온다. 공포에 빠질 때 도피처가 있으면 도피처로 도피하게 된다.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올 때 도피처가 없으면 공포에 질려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불규칙한 움직임이 나타나지만, 동굴이란 도피처가 있으면 그곳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규칙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불규칙한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방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원시적인 질서, 공포 -> 도피 질서다.


무섭게 해서 따르게 한다. 공포 -> 도피 질서는 인간의 공포를 활용한 질서기에 공포를 심은 인간이 공포를 겪는 인간을 지배하는 질서가 된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은 기본적으로 지배 질서였던 것이다. 공포 -> 도피의 지배 질서는 인간의 특성상 어떤 고립 사회든 비슷하다. 그러나 어떤 공포와 도피를 활용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고립된 사회의 차이는 대부분 이 질서에서 왔다 봐야 한다. 환경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나, 인간의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전제하고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른 질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다. 


공포 -> 도피의 지배 질서는 크게 무력, 원시 신앙, 권력, 종교 신앙 정도가 있다. 무력으로 공포를 겪게 하여 생존으로 도피하게 하는 정복, 자연 재해의 공포를 이용하여 신앙으로 도피하게 하는 원시 신앙, 권력으로 공포를 겪게 하여 복종으로 도피하게 하는 지배 정당화, 천국과 지옥과 같이 가치로 공포를 만들어서 교리 준수로 도피하게 하는 종교 신앙. 대체로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지배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무력, 재해, 권력과 같은 공포로 만들어진 질서는 지극히 단순하여 사회 질서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천국과 지옥과 같은 만들어진 가치 개념을 통해 공포 질서를 구축하여 종교의 교리로 도피하게 만든 체계화된 공포 -> 도피 질서인 종교의 가치가 사회 질서의 주류가 된다.


종교의 성립 조건은 절대적 가치, 절대적 가치의 주장자, 절대적 가치의 신도다. 종교는 이 가치를 믿으면 네가 가진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절대적 가치를 전파했다. 공포에는 빈곤, 질병, 죽음 등 다양하다. 선행을 하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선행이란 종교 가치의 실천이다. 착하다는 것은 선행을 한다는 것. 달리 말해 종교 가치를 충실히 지키는 인간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한 행위가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여길 수 있는데,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타인을 돕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판단의 결과, 자유 의지의 결과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맹신과 맹신이 아닌 종교가 있을 수 있는데 별 차이는 없다. 애초에 종교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면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맹신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맹신을 요구하고 유교나 불교는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유교와 불교의 교리가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 종교가 유지가 될 수가 없다.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절대적 가치가 아니게 되면 그 질서를 누가 얼마나 지키고 그 가치를 주장한 종교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는가? 산에서 하는 수행과 열반과 지옥 등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게 되면 그 가치를 따르기 위한 행위를 누가 얼마나 지키고 그 가치를 주장한 종교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게 절대적 가치가 아니면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관이 우선된다. 개인적인 욕망이 우선되게 된단 말이다. 어떤 종교든 종교의 가르침은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종교로서 존속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절대적 가치를 믿는 인간은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 가치에 한에서는 바보가 된다. 즉 우민화다. 이런 종류의 지배는 전형적인 우민화를 통한 지배다. 판단을 못하는 가치가 있으니까 수천 년을 하고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원시 레벨에서 레벨이 오르지 않으니까. 이 절대적 가치는 흥미롭게도 지배 계층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것은 절대적 가치를 주장한 종교라 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인류의 정신에 가치의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논리적으로 풀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부른 원인이기도 하다. 문화 상대주의가 모순을 부를 지라도, 각 문화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체로 고립된 사회는 종교의 교리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고립된 사회의 특징은 사회 종교의 교리를 보면 대체로 알 수 있다. 그것을 기본적인 질서로 삼아 다양한 생활 양식이 탄생했다. 그것이 문화다. 그것을 학문화한 것이 문명이다. 사상, 철학, 예술, 논리, 수리, 농업, 어업, 상업, 기업, 금융 등 이전에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부 그러하다. 금욕이나 이타 같은 고립된 사회에서 공통된 절대적 가치도 있는데, 그것은 지배 체제와 지배 질서가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욕망이 적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옳다 여겨야 지배하기 수월하다. 그런 질서에서 인류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했으나 절대적 가치에 한에서는 원시적인 상태 그대로 남아 인류 문명의 발전을 방해했다. 의심할 수 없는 가치. 판단할 수 없는 가치.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가치.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왜 그것이 옳고 그른지도 모른다. 판단할 수 없으니까 당연하다. 생명이 뭔지도 모르고 윤리가 뭔지도 모르는데 생명 윤리를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다. 심지어 과학자조차.


누군가는 국가보다 종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그야 당연하다. 실제 인류의 지배자는 종교니까 그렇다. 그토록 맹신하며 따르는데 판단할 수 없으면서 그것을 지배라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체제와 윤리가 충돌하여 사회 문제가 심각함에도 원인조차 모르는 것이다. 현재 선진국의 보편적인 체제인 자유 체제는 어디까지나 종교에서 나온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서 나왔음을 잊으면 안 된다. 물론 종교적 허용이 있어 가능했다. 기독교는 신이 위에 있기에 인간 사이가 평등할 수 있다 믿었고 유교는 인간이 위에 있기에 인간 사이가 불평등해야 한다 믿었다. 기독교가 신의 지배기에 왕의 지배가 절대적 가치가 아니여서 가능했다.


사회의 성립 조건인 질서는 반드시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질서는 에너지가 규칙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면 성립된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판단으로 계약을 하여 규칙적인 에너지 방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공포 -> 도피 지배 질서가 아닌 판단 -> 계약 자유 질서다.






4) 체제 구성


체제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체제는 크게 지배 체제와 자유 체제로 나뉜다. 각각 체제는 성립 조건이나 과정, 권력이나 가치가 다르기에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선 체제의 변화 과정을 통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최초 인간 사회는 공포를 이용하여 도피하게 만드는 것으로 질서를 구축하고, 그 질서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활 양식이 나타났다. 즉 질서 -> 체제라는 것. 공포 -> 도피 질서에서 공포와 도피가 만드는 절대적 가치는 달라질 수 있어도, 공포 -> 도피 질서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절대적 가치는 달라져도 가치의 절대성은 그대로라는 것. 예를 들어 고려의 불교에서 조선의 유교로 정치적인 절대적 가치가 달라졌으나 가치의 절대성 자체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유 혁명을 통해 지배 체제를 부수고 자유 체제로 전환을 하고나서 그 체제에 맞는 법을 제정하면서 다양한 생활 양식이 나타났다. 즉 체제 -> 질서라는 것. 지배 체제는 사라졌으나 지배 질서는 윤리로 남아 자유 체제와 자유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면서 사회와 체제를 망가트렸다. 그게 현재 저출산 등의 고질적 사회 문제다. 절대적으로 옳다 여긴 것이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된다.


인류 사회의 변화 과정은 간단히 다음과 같다. 지배 질서 -> 지배 체제 -> 자유 체제 -> 자유 질서 순으로 진보했다. 인간의 공포로 질서가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체제가 구축. 인간의 이념으로 체제가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질서가 구축. 근본적으로 지배 체제와 자유 체제는 공포와 이념으로 다르다. 그렇게 다름에도 아직까지 인류는 공포로 구축한 질서의 간섭 없이 제대로 질서를 구축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공포에 의한 질서에 의존하고 있다. 무섭게 해서 따르게 한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질서 구축에 쓰이고 있다.


과거 지배 질서가 절대적 가치로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왕정 체제 위에 있었던 것과 같이, 현재도 절대적 가치인 윤리에 의한 법의 제정과 판결과 집행이 일어나면서 법이 체제 위에 있으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윤리로 체제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 체제는 지배 체제를 부수고 만들어졌기에 지배 질서에 의존할 게 아니라 자유 체제에 맞는 법의 제정과 판결과 집행이 필요하다. 지금 법이 체제 위에 있으려 하는 것은 축구 규칙이 축구 위에 있으려 하는 것과 같다. 그건 축구 규칙이 절대적일 때에나 벌어지는 현상이다. 축구 규칙이 상대적이면 축구에 맞는 규칙을 만들려 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성립 조건을 알고,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 가치를 이념으로 삼아 체제를 구축하고, 그 체제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탐구하여 실행해야 하는 것이 체제를 다루는 인간에게 필요한 태도다. 그러지 않고 무작정 종교 가치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게 아니다. 


체제의 가치를 바꿀 때에는 체제에 속한 개인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나를 비롯해 대부분 정신에 노예의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기 때문에 함부로 그러다가는 민주적인 정교일치로 종교 가치가 체제 가치가 될 확률도 있다. 아랍 국가의 민주화로 신정 국가가 된 사례를 생각해보자. 그런 상태에서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수록 국가가 지배 체제로 회귀하게 되면서 체제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노예의 낙인을 이해하고나서 체제의 이념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판단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특정 가치가 판단이 안되면 그 가치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현대 체제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다. 이 둘의 사상적 차이는 권력과 그 외의 힘이다. 자유주의는 권력은 같되 그 외 힘이 다르다. 상하는 없지만 선후는 있다. 기회의 평등이다. 권력은 평등하나 그 외의 힘은 평등하지 않아 자유롭게 힘을 키우면서 앞서나가는 인간과 뒤쳐지는 인간이 생기게 된다. 권력이 대등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힘을 억압하는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서 힘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과가 나온다.


사회주의는 권력이 다르되 그 외의 힘이 같다. 상하는 있지만 선후는 없다. 결과의 평등이다. 결과적으로 힘의 차이와 그 차이에 의한 결과를 만들지 않기 위해 강제로 선후를 맞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위에서 강제하는 인간과 아래에서 강제되는 인간이 생기게 된다. 선후를 맞추기 위해 권력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붙어 불리기도 하는데, 애초에 구조상 지배가 성립 조건에 들어가기 때문에 민주적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는 체제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왕정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모든 개인에게 분산한 체제다. 권력의 평등이지 모든 힘의 평등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대표, 대리인이지 지배자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여야만 한다. 흔히 문화나 정서를 말하며 연령 차별 등과 같은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데, 이제는 본인이 어떤 체제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유교 사회는 권력에 따른 위계질서가 절대적인 사회라면, 민주 사회는 모든 개인이 평등하며 개인의 의사로 동작하는 선거와 시장과 같은 제도로 질서를 구축하자고 계약한 사회다.


자유주의 체제는 상하는 없되 선후는 있다. 힘이 강해 앞서가는 인간이 있으면 그것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사회에 이롭게 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지배 질서를 성립시키던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면서 마냥 힘을 지배에 이용하거나 힘을 지배하려 들면서 사회와 체제가 망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 체제에서 개인이 자유 연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저출산이 발생한 문제는 어떻게 해서 성립되었는가? 지배 체제에서 성을 지배하며 강제로 결혼하고 출산하게 했던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자유 체제에서 절대적으로 여기며 미성년에게 강제한 결과, 미성년이 성에 관련된 가치가 폭락하면서 성년이 되고서도 그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자발적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강제로 연애와 결혼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추론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 문제도 어떻게 그 문제가 성립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성립 조건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자유 연애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의 의사로 결정되는 현상이다. 개인의 의사로 연애와 결혼에 가치를 높게 여겨야만 자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자유 연애 결혼의 성립 조건은 동기인 가치관과 그걸 할 수 있는 환경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중요한 가치관이 성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성기능이 작동하는 미성년 시기부터 그것을 친숙하고 긍정적으로 여기게 해야 성에 관련된 가치를 높게 느끼고 자발적으로 그걸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가치를 못느끼니까 연애 시장이 망가져서 고점만 소비되는 것이다. 애초에 전쟁 중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것을 알면 경제적 원인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판단이 가능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윤리가 절대적 가치니까 그것이 부정적 현상, 나쁜 결과를 만들거란 생각 자체를 못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을 못하니까 그렇다. 담합도 파업도 비리도 차별도 그 외 다양한 현상들도 윤리가 원인이면 원인조차 모른다. 판단을 아예 못한다. 그렇게 판단을 못하면서 연애 시장 망가지듯 다른 시장들도 윤리로 망가졌다.











3. 경제 체계


경제 체계의 성립 조건은 경제를 동작하게 할 연료인 사회 에너지와 동작하는 환경인 경제 생태계다. 인간이란 생물을 이해하고 그 생물의 에너지 방출과 방출된 에너지를 사회에 이롭도록 제어한다. 그렇게 생성된 사회에 이로운 충분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보다 높은 가치가 안정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경제 생태계를 구축한다. 이것이 경제 물리학에 필요한 개념이다.


생명은 태생부터 물질 붕괴와 같은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결핍을 충족하는 것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그러한 만족감을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기에 행복의 원리는 결핍의 충족이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서 행복한 인간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행복의 원리인 결핍의 충족을 효율적으로 하여 가능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것을 경제 체계를 통해 성립시켜야 한다.




1) 사회 에너지


사회 에너지는 에너지 방출 성립 조건과 에너지 제어 성립 조건을 파악하고 에너지의 방출과 제어를 하면 된다. 우선 에너지에 대해 알아보자.


[에너지: 2. 기본적인 물리량의 하나. 물체나 물체계가 가지고 있는 일을 하는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역학적 일을 기준으로 하여 이와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것, 또는 이것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을 이른다. 에너지의 형태에 따라 운동, 위치, 열, 전기 따위의 에너지로 구분한다.]


물체나 물체계가 가지고 있는 일을 하는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물체나 물체계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일의 능력일 것이다. 물체나 물체계가 있어야만 에너지가 성립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정확히는 물체나 물체계가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없어도 에너지는 존재할 것이다. 그래야 최초 에너지 폭발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최초 에너지가 폭발하고나서 퍼진 에너지에 의해 공간이 형성된다. 에너지가 응축할 때 생긴 물질, 아마 입자들은 다른 에너지보다 무거워서 느리게 가면서 더 강한 중력으로 다른 에너지를 당기고 응축하면서 다시 에너지 폭발이 이뤄지는 것으로 우주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최초 에너지 폭발 이전을 아는 것이 사상가로서의 목표 중 하나다.


물질 자체가 에너지가 응축한 결과기에 물질 스스로도 중력이란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체와 물체계가 있어야만 에너지를 관측할 수 있었기에 단순히 물리량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에너지 자체가 모든 것의 근원인 것이 좀 더 논리적이라 본다. 에너지가 응축하면 입자, 입자가 모이면 원자, 원자가 모이면 분자, 분자가 모이면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물체. 


중력은 에너지가 응축된 물질의 능력. 사방팔방에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당기면서 온갖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전자기력은 거시 세계에서 중력으로 당기는 것으로 성립. 강력은 미시 세계에서 중력으로 당기는 것으로 성립. 모든 에너지는 일을 하면 소모되어 변환되는데, 약력은 입자 또한 중력을 행사하면서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베타 붕괴가 일어나는 것으로 성립. 아마 공간 에너지 또한 공간을 유지하는 일을 하면서 소모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에너지를 수급해 공간을 유지할 것이라 추론한다. 공간 에너지의 양은 아마 양자 현상이 일어나는 입자의 에너지 양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일을 하면 에너지를 소모한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일을 하면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일을 하면서 얻는 이익이 에너지 소모보다 클 때,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익이란 판단은 가치 판단의 결과다. 통상 감각 기관으로 수집한 대상에 대한 육체의 반응(맛있다, 멋있다 등)으로 가치 판단을 하게 되면서 가치가 상대적이게 된다. 상대적 가치는 음식이 맛있는만큼 이익이 높다 가치 판단하는 것으로 그만큼의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다. 절대적 가치는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가치로, 그 가치의 영향은 인간마다 다를 수 있는데, 강한 영향을 받는 인간은 판단하지 않고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익과 별개로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다.


상대적 가치에서 육체의 반응은 기본적으로 유전자와 같은 정보를 기준으로 나타나고, 기억에 있는 관념에 영향을 받아 기준이 달라진다. 유전자 정보와 기억의 관념을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관념은 사회의 가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 특정 음식이 맛있다고 유행하여 가치가 높아지면, 기본적인 유전자 정보를 거스르지 않는 이상, 실제 맛있다 느낄 수가 있다. 


에너지 성질을 통해 파악한 에너지 방출과 제어의 성립 조건은 에너지 방출이 가능할 수 있는 충분한 영양 공급과 에너지 방출과 제어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다. 유전자 정보는 개인 고유 정보기에 유전자 조작을 하기 전에는 사회에서 제어하기 어렵다. 즉 환경과 교육을 통해 에너지 방출과 제어를 성립시킬 수 있다.



에너지 방출과 제어를 위한 환경과 교육은 가치가 상대적이기에 특정한 절대적 가치를 실천하려 하기보다는 사회와 체제의 성립 조건을 고려하여 설계해야 한다. 사회가 성립하려면 사회 체계를 동작하게 할 사회 구성원의 에너지 방출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영양 공급이 필요하게 된다. 흔히 약자에 대한 다양한 복지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타적으로 희생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연료 공급으로 사회를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지배 체제에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더라도 사회 체계가 동작할 수 있다. 강제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약체화가 될 수 있어도 사회가 성립하긴 한다. 그러나 자유 체제에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사회 체계가 동작하지 않는다.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제할 수 없으니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동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제하면 그 순간 자유 체제가 붕괴하면서 지배 체제가 되기 때문에 이 논리에 모순은 없다 할 수 있다.


현재 에너지 방출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주요 억제 명분이다. 이것들에 의해 범죄율도 가치를 제어해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억압하면서 줄이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범죄율은 다소 감소하더라도 동시에 사회 참여율도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저출산, 고자살, 은둔형 외톨이, 경제 활동 포기 등 다양하다. 충분한 에너지가 방출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제외하면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출산을 보자. 성 터부시로 성욕을 억압하면서 그에 대한 가치가 폭락하여 그런 활동을 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할 이익이 되지 못하니까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 판단에는 절대적 가치가 포함되면서 실제 이유조차 모른다. 그냥 외모, 재산, 아니면 이성이 문제라면서 탓만 할 뿐이다. 친구는 대부분 사귈 수 있는데 연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절대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성주의자 또한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말하며 여성을 억압하면 여성 정조관념으로 만들어진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문제라면서 반대하는 것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에게 지배받던 여성이 남성에게 지배받던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떠드는 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무슨 탈코르셋 말하면서 꾸밀 자유를 억압하거나 불필요하게 용어나 바꾸고, 정작 중요한 가치관은 가부장제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과거 출산율이 높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과거에는 강제하지 않았는가? 달리 말해 강제하지 위해서 성을 터부시한 것이다. 그래야 에너지를 소모할만큼의 이익이 아니라 판단하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이 본능이라 놔두면 알아서 다 잘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러면 보편적 중매 결혼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조선 시대 중매 결혼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그만큼 성을 지배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걸 위해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여성 정조관념을 절대적 가치로 만들어 판단하지 못하고 실행하게끔 한 것이다.


현재 젊은 세대가 성매매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을 윤리적인 인간은 그걸 보고 좋아할 수도 있다. 그건 그만큼 인간과의 성관계 가치가 폭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저출산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인간과의 성관계 가치가 폭락하면서 연애 비율, 성관계 비율 감소와 함께 성매매 비율도 감소하는 것이다. 감소한 만큼 유사 연애 산업이나 짐승 사육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다. 국가 죽음의 지표를 보고 기뻐하는 윤리적인 인간은 도대체 윤리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차라리 성매매 비율이라도 높은게 출산율 회생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를 보자.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에게 욕망을 억압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게 만들어 에너지 방출을 억제하면 물리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인간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욕망을 실현할 수도 없고 타인에게 피해를 줘 불행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윤리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히키코모리는 메이와쿠와 같은 윤리적 풍습에 의한 영향이 크다. 일본에서 창작물 원작자와 드라마 각본가가 싸웠는데, 보편적으로 드라마 각본가의 잘못되는 사건임에도 창작물 원작자가 피해를 줄 생각이 없었다면서 자살했다고 한다. 메이와쿠. 폐를 끼치지 말아라. 그야말로 지극히 윤리적인 사건이다.


인간은 왜 자극을 바라는가? 그러지 않은 인간은 전부 죽었으니까 그렇다. 자극이란 평소와 다른 행동, 다른 움직임, 다른 영양분을 바라는 것. 자아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자아가 죽는다. 자아는 생물 메커니즘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 같은 행동은 판단할 필요가 없게 되면서 자아가 죽는다.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면서 자아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극을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적 호기심이나 자극을 얻는 취미다. 그렇기에 공부를 하게 하겠다고 취미를 못하게 하면, 그런 자극을 바라는 것이 망가질 수가 있게 된다. 취미를 막다가 지적 호기심까지 막아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문제 푸는 기계로 만들게 아니라면 자극을 바라는 태도를 막아서는 안된다. 


사회의 범죄를 보고 더욱 더 윤리적인 것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그건 멀쩡한 인간을 더 병신으로 만들어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욕망이 적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노예 디자인 휴먼을 만들어버리니까, 학교 폭력, 신흥 종교, 사기 등의 먹잇감이 되어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지금까지 조선에게 윤리로 개인을 노예 디자인 휴먼으로 만들었으니까 북한의 대를 이은 독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정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길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접근해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충분한 영양 공급과 윤리로 에너지 방출을 막지 않으면 많은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제 그것을 제어하면 된다. 영양 공급에 있어 지금까지 공포 -> 도피 질서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이 있기 때문에 부정적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가치를 제어하는 것으로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 넘쳐나는 에너지로 가지게 된 욕망을 실현하려면 생산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구조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듯이 미성년 시기 한번 학습한 가치는 평생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성년에 해야 할 것을 미성년 시기에 다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13세 이하의 미성년이 대구 혀 자르기와 같은 생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생산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이 자리잡아 생산 활동이 이익이라 판단되어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이 부모 허락 맡고 안전한 동네 배달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분노하며 지적할 정도로 아예 가치에 대한 이해가 없다. 아동이 일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쁘다라는 윤리적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판단을 아예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많은 미성년이 자발적으로 일을 고르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대학이나 군대 또는 직장에서까지 부모의 간섭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에 대한 인식이 나쁘니까,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일에 대한 멸시가 사라지질 않는 것이다. 경제 활동이 줄어드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강제할 수 없는데 자발적으로 할 정도로 가치가 높지도 않으니까 경제 활동을 안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미성년 시기부터 일을 긍정적으로 여기게끔 만들어야 한다. 쉬운 일을 직접 해보면서 경험을 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성적 기능이 작동하는 사춘기 시기부터 이성의 육체를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성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성의 성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이 자리잡아 이성과의 성관계가 이익이라 판단되어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교육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학교에 민원 사례가 빗발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교육을 받고 성장한 자녀가 연애와 결혼을 안하면 왜 안하냐고 타박한다고 한다. 아예 가치에 대한 이해가 없다. 미성년이 성에 대해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쁘다라는 윤리적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판단을 아예 못한다. 그러니까 20대 초반 연애율이 20%대이고, 출산율이 0.6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출산율이 줄어드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강제할 수 없는데 자발적으로 할 정도로 가치가 높지 않으니까 연애 활동을 안하게 되면서 줄어드는 것이다. 그에 대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미성년 시기 성기능이 작동하면 성을 긍정적으로 여기게끔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성기능이 작동하는 10~14세 사이에 다 성경험을 해봐야지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여기면서 누구나 연애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단 말이다.


일이든 성이든 개인을 지배하던 질서를 성립시킨 가치를 절대적이라며 강제할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리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되면 다른 시장으로 이해하면 좋다. 특정 시장에서 취급하는 가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있는데 상거래가 가능하겠는가? 시장 참여도 줄어서 시장이 죽게 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는가. 시장 가치가 낮으니까 시장에 참여하려면 고점이라는 조건이 필요하게 되고, 그것이 아니면 참여를 하지 않게 된다. 괜히 대기업, 미형의 이성만 찾는게 아니란 말이다. 그만큼 가치가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성년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지배다. 결정권을 뺏는게 인간의 권리라고 여기는 것은 지극히 윤리적이다. 아예 그게 어떤 결정인지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호라 자칭할거면 연상에게 존댓말을 강제하는 권력에 따른 위계질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 그렇게 미성년 생각하면 말부터 놓게 해보란 말이다. 질서 자체가 지배하는 질서인데 무슨 보호 타령을 하는가. 그렇게 지배 질서를 성립시킨 윤리 교육을 하는 것은 지배 질서에 맞는 노예 디자인 휴먼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유 체제에서는 인간을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교육해야 한다. 절대적 가치가 사라져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없어진다면 분명 합리적인 교육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 방출을 억제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범죄율이 증가할 수 있다. 일에 대한 가치가 지나치게 높으면 학습을 포기하고 일만 하면서 고부가 가치 생산이 줄어들 수 있다. 성에 대한 가치가 지나치게 높으면 상대의 허락을 받지 않는 성관계, 즉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에너지 방출을 억제하면 지금 한국 사회처럼 사회가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관련 메커니즘을 전부 가르쳐야 한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쾌락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체제에 맞게끔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범죄는 빈곤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애초에 성 억압을 안하면 일부를 제외하면 성범죄가 일어날 이유가 없다. 물리적으로 만족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배부른 인간이 더한 식탐을 바라는 것은 통상 망가졌을 때 말고는 없듯이, 욕구가 충족되면 망가지지 않는 이상 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충분한 영양 공급과 욕구 충족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나서 체제에 맞게끔 합리적인 절차로 할 수 있도록 하면 웬만하면 범죄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렇게 되도록 인간이란 생물의 메커니즘을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범죄는 일어날 수 있다. 모든 인간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교육을 해도 제대로 받지 못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교화는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인간이란 생물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메커니즘에 따라 범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가야 한다. 대체로 인간, 정확히 자아는 뇌의 발상에 지배를 받는다. 범죄를 되풀이하는 것은 범죄에 관한 발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즉 그 발상이 되지 않도록 만들면 재범을 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이 발상에 떠올라 그 경험을 겪기 위한 행동을 한다. 불행한 경험이 떠오르면 그 경험이 발상에 떠올라 그 경험을 겪지 않기 위한 행동을 한다. 발상의 지배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행복한 발상과 불행한 발상에 의한 행동은 메커니즘이 동일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문이다. 고통을 줘서 범죄를 저지르려 할 때 고통이 발상되도록 한다. 그러면 그 고통에 의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도 못해서는 안된다. 이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다른 방식을 쓰면 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경험을 줘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가치관이 자리잡은 상태에서는 지극히 어려운 방식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과거를 지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름을 지우고 아는 인간을 배제한다. 그러면서 어린 시기에 자리잡은 가치관 교육부터 다시 한다. 사회에 이로운 행동을 하면 행복한 발상이 나오도록 경험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그런 식의 발상이 나오게 되면 교화할 수 있다. 교화라는 것을 물질의 성질 변화와 같이 접근해야지,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아예 판단을 못하면서 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현재 윤리에 의해 촉법 소년이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법원 행정처와 국회 입법 조사처에서 촉법 소년 관련 법률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은 지극히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 지배 질서에서 어리석은 미성년은 일방적 교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 확산과 가치 개념을 이해하면 그런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이미 정보가 확산되어 촉법 소년 시기 범죄는 크게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촉법 소년이 알고 있다. 그 상태에서 촉법 소년이란 이유로 죄가 경감되거나 면죄되면 그것을 면죄부로 이해하게 된다. 면죄부가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성장한 인간은 면죄부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절대적 가치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촉법 소년 법을 개정하지 않은 결과, 면죄부 교육을 해버리게 되었다. 인식을 바꾸는데 겉만 바꿔도 된다. 형사 처벌을 하되 그 처벌 장소를 종전과 같거나 비슷하게만 해도 면죄부가 존재하다는 인식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고려하지도 않은 것은 윤리가 절대적 가치여서 가치 판단 자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2) 경제 생태계


[생태계: 1. 어느 환경 안에서 사는 생물군과 그 생물들을 제어하는 제반 요인을 포함한 복합 체계.]


충분한 에너지가 사회에 이롭도록 방출이 되면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경제 체계가 작동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한다. 경제 생태계가 유지만 되면 알아서 생활하고 진화하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산업의 성장이나 노동자 권리 등이 아닌 산업이 성장하고 사회 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있다. 불필요한 시장 간섭은 되려 시장을 파괴할 수 있다. 현재 윤리로 시장에 간섭한 결과 파괴된 시장이 지나치게 많은 상태다.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의 위험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 생태계 구축이 잘 되면 고부가 가치도 많이 쏟아질 수 있다. 환경이 엉망이면 인재가 만 명 있어도 한 명 성공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환경이 뛰어나면 인재가 백 명 있어도 절반 이상은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이 인구수 차이가 나도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인구수가 십 억이 넘어가는 중국과 인도. 선진국을 유지하면서 그런 국가와 경쟁하려면 경제 체계를 잘 갖춰야만 한다. 단순히 윤리만 강제한다고 모든게 잘 되는게 아니다. 그건 절대적 가치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경제 생태계의 성립 조건은 경제 생태계 참여자인 인간, 경제 생태계에서 생산을 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할 교육, 경제 생태계에서 거래가 될 수 있는 환경인 시장, 시장 경쟁에서 탈락한 인간의 재활인 복지다. 생태계에 있는 생물인 인간이 거래하는 능력을 학습하여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먹고 먹히는 과정을 통해 적자생존을 구축하고 경쟁에서 탈락한 인간을 재활하여 새로운 생태계 참여자와 같이 다시 생태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경제 생태계 중 인간은 충분한 에너지 방출이 가능하게 하고, 생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게 하여 자발적으로 생산을 하게 해야 한다. 유교의 영향으로 학교의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보는 것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 판단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공부만 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러면 생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게하질 못하여 자발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미성년 때 공부만 시켜놓고 성년 때 왜 일을 안하냐며 타박하는게 맞는 것 같은가? 그건 그냥 윤리로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 생태계 중 교육은 가치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치 개념을 이해하고 스스로 생산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특히 공부하게 하겠다면서 교육 외의 가치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는데, 그러면 그에 관한 호기심도 억압되어 하고 싶은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단순히 공부만 하게 하면 다 잘될거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윤리적이다. 판단을 안한다는 얘기다. 학생의 취미까지 억압하는 것은 그저 정의롭게 학생을 망가트리는 것에 불과하다. 가능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가치의 시장성까지 고려하여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자발적인 가치 생산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고 아예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가치 개념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이걸 교육의 비전문가인 학부모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공교육 단계에서 가치 교육을 행해야 한다. 



경제 생태계  중 시장은 개인의 의사로 가치를 거래하는 제도로 시장의 존재 자체가 자유주의 이념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 시장이 윤리에 의해 상당히 많이 망가졌다. 시장의 성립 조건은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자유 거래, 공정 경쟁, 생산 유연, 생산 효율, 가치 제어. 


하나, 자유 거래. 모두가 대등한 시장 참여자로서 자유로운 질서에서 거래가 가능 해야 한다. 그러나 윤리에 의해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 지배 질서가 있기 때문에 보통 그것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기업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윤리가 지배 질서기 때문에 윤리를 버려야 가능할 것이다. 


둘, 공정 경쟁.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을 하여 소비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효율적인 체계로 상품 품질을 높이고 가격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하는 이타적인 담합과 독과점 등으로 그것이 성립되지 못할 때가 있다. 경쟁이 되면 시장 자유 또는 민영화, 경쟁이 안되면 시장 간섭 또는 국영화가 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셋, 생산 유연. 창업과 취업 또한 시장의 활동 중 하나로 보고 시장이 활성화되도록 해야 유연한 거래가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해고를 어렵게 하자 노동 유연성이 사라져 노동 시장이 죽어버리고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좀비 기업을 살리자 세금이 낭비되고 새로운 기업이 진입하지 못하면서 경제가 정체되면서 그것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윤리를 실천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게 아니다. 


넷, 생산 효율. 생산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자원을 최대한 줄여야 생산 효율이 높아진다. 그러나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노사 관계와 윤리적인 이유로 해고를 어렵게 하고 생산 관련 처벌을 강화하자 법적 리스크를 회피하고 이익을 최대하게 하기 위한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하청과 파견 등이 지나치게 많으면서 그것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되팔이도 생산하지도 않고 유통 과정에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중간 과정에서 이익을 빼먹는 불필요한 중간 과정에 해당한다.


다섯, 가치 제어.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새로운 가치가 대두될 수 있도록 가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작정 시장을 보호하겠다고 외부 가치의 진입을 방해하거나, 새로운 가치가 나와도 그것을 부당하게 빼앗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 그것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윤리로 가치 제어에 실패하여 망가진 시장이 지나치게 많다. 한국은 부동산 투기가 많기 때문에 주택 가치가 높다는 고정 관념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장소와 차익이지 주택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택 마감이 그렇게 엉망이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되팔아서 차익을 챙기는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경제 생태계 중 복지는 충분한 영양 공급이 사회의 성립 조건 중 하나일뿐이듯 경쟁 탈락자에 대한 재활 또한 체제의 성립 조건 중 하나일 뿐으로 거기에 윤리가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필요하여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강제로 선후를 맞추는 것과 같은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지배에 불과하다. 민주적이지 못하다. 자유롭다면 권력 외의 힘을 강제로 억압할 근거가 없다.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것을 강제로 패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선후의 차이는 선후를 강제로 맞출 것이 아니라, 앞서 나갈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해야 한다. 스스로 앞서 나가게 해야지 강제로 선후를 맞춰서는 안 된다. 체제 성립 조건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연령, 성별, 혈연, 학연, 지역 등 다 배제하고 역할에 맞는 능력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방적 이익은 성립시켜서는 안 된다. 기업은 저렴하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실 바라고 노동자는 비싸게 고용되고 어렵게 해고되길 바라는데, 이러한 것을 누군가 이익을 위해 정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통상 기업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기업이나 노동자는 경제 생태계를 유지해야 경제 전체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애초에 영주가 농노 쓰던 시대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없어 정규직 비정규직 같이 구분되는 바람에 정규직은 안정과 고수익, 비정규직은 불안정과 저수익이라는 리턴 리스크가 맞지 않는 형태가 자리잡으면서 마치 신분과도 같은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괜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차이가 큰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불합리는 경제 전체 생산량을 악화시킨다.


정상적인 경제 생태계에서는 파업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한번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시장 원리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 파업을 하게 되면 파업이 연쇄작용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파업을 할 수 없는 이들은 더욱 큰 손해를 본다. 파업을 할 수 있는 이들은 파업하면서 사회 자원을 더 많이 가져가지만 파업할 수 없는 이들은 적은 사회 자원이 더 적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약자를 위해서라며 무작정 파업을 허용하면 파업할 수도 없는 약자는 더 짓밟힌다. 사회의 한정된 자원에서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더 큰 자원을 받아가면 당연히 약자는 더 큰 손해를 보게끔 된다. 그 결과가 귀족 노조와 비정규직 관계. 그러면서 경제 생태계가 파괴되고, 그러면서 경제 체계가 무너진다. 물론 정상적인 경제 생태계에 한정한다. 현재는 아직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시장 관리와 시장 참여를 둘 다 한다. 권력이 평등한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 그렇기에 위아래는 없다. 그러나 권력만 평등한 체제기에 선후는 있다. 자유주의. 시장 참여자와 관리자. 관리자가 위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는데, 올림픽 경기장 관리자와 올림픽 선수 사이에 상하관계는 없듯이 그런 것 없어도 가능하다. 모든 개인은 주권자이자 권한이 다른 통치자이므로 참여자가 관리도 해야 하고 관리자가 참여도 해야 한다. 역할주의. 역할과 역할에 따른 권한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권력은 같아야 한다.


경제는 가치의 거래. 일반적인 시장에서는 보다 우수한 가치를 생산할수록 큰 이익을 얻는다. 그것을 위한 것이 경쟁. 통상 공정할수록 우수한 가치를 생산하는 경쟁이 된다. 보다 우수한 가치가 생산될수록 경제가 성장한다 할 수 있다. 당장 수치적인 상황은 단기간 수요 공급에 따라 달라지지만, 우수한 가치가 생산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장한다. 그렇기에 경제는 가치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우수한가? 시장에서는 수요. 그렇지만 시간대별 수요가 다를 수는 있다. 가치의 우수함을 시장으로 규정한 것은 시장 밖에서는 무력을 통해 우수하지 않은 가치를 강제할 수 있기 때문. 자유로운 시장에서는 수요가 가치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수요는 단기 장기 환경 등의 차이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당장 수요가 낮다 해서 가치가 낮은 것은 아니다. 또한 거래되지 않는 성질의 가치는 시장에서 수요가 없다 해도 가치가 낮은 것은 아니다. 또한 화폐로 거래되지 않는 성질의 가치는 돈으로 거래되지 않는다 해서 가치가 낮은 것은 아니다. 


일반 -> 일반적인 가치.

시기 -> 노동, 보험, 주식 등

환경 -> 재해, 전쟁, 사이클 등

비화폐 -> 연애 등 인간 관계 등

비거래 -> 인신, 사상, 언어, 천연 기념물 등


이런 조건을 통틀어 우수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중요. 통상 경제라 하면 일반, 시기, 환경까지는 파악하는데 비화폐와 비거래 가치는 제대로 알질 못하고 있다. 시장 원리란 수요와 공급로 가격이 결정되는 것을 의미. 개인의 의사인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 즉, 자유로운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대부분 시장 원리로 해석이 가능.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가치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이상 그것을 알아야 보다 우수한 가치 생산이 가능하게 된다.











4. 가치 개념


[가치: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대상: 1. 어떤 일의 상대 또는 목표나 목적이 되는 것.]

[목표: 1.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지향하는 실제적 대상으로 삼음.]


가치는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을 말한다. 가치의 뜻에는 대상 또는 목표라 했는데 사실상 이 둘이 서로를 지칭하므로 하나의 단어만 써도 무방하다. 아직 사전의 순도가 낮아 순도 높게끔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가치 판단은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대한 기준은 개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하나의 대상에 따른 가치 판단 또한 다양하게 된다. 사과의 맛의 가치는 어떠한가? 달콤하고 맛있다. 사과의 멋의 가치는 어떠한가? 색이 밝고 모양이 깨끗하여 아름답다. 이렇듯 가치 앞에 기준이 되는 개념이 있게 된다.


가치 판단은 다양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네 개로 나눌 수 있다. 이익, 손해, 중립, 보류다. 가치 판단으로 이익이 되면 가치가 있다거나 높다고 판단한다. 가치 판단으로 손해가 되면 가치가 없다거나 낮다고 판단한다. 가치 판단으로 이익도 손해도 아니라면 특별한 가치는 없다고 판단한다.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면 가치를 모른다고 판단한다.


앞에 기준을 붙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치가 있다, 높다, 없다, 낮다 등을 붙이는데, 이것은 시장으로 결정된 가격을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거나, 다양한 가치 기준을 종합하여 추상적으로 판단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사과의 가치가 높다고 말한다면 시장의 가격이 높다거나 맛+냄새+생김새 등을 종합해 추상적으로 이익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윤리에 의해 특정한 가치는 판단을 하지 못하면서 가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여 시장도 망가지고 경제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는 상태다. 가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정상적인 경제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양한 가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정가 가치, 당위 가치, 범주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1) 정가 가치


[C. 정가 가치]


[정가: 1. 상품에 일정한 값을 매김. 또는 그 값]


정가 가치는 값이 매겨져 가치 판단이 끝난 가치를 말한다. 맛의 가치는 아직 가치 판단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면, 정가 가치는 n 화폐라고 가치 판단이 끝난 상태다. 시장에서 변동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가치 판단 결과인 정가가 변하지 않게 된다. 정부에서 값을 매기거나 시장에서 값이 매겨진다. 값이 매겨진 상품은 보통 화폐로 거래되기 때문에 물물 거래라는 인식이 적다. 화폐는 국가에서 지정한 고정된 가치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 경제에서 화폐는 상품이다. 화폐가 상품이란 인식이 있어야 주식 시장이나 외환 시장 거래에 거부감이 적어 금융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래는 물물 거래라 인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가 가치는 통상 상대적 가치에 해당한다. 상품에 일정한 값을 매기려면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장 참여자가 같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적 가치가 거래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성물이 있다고 하자. A에게는 감히 가치를 판단하여 가격을 결정할 수 없지만, B에게는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이어서 가치를 판단하고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럴 때에 B가 가격을 매겨 시장에 내놓은 것을 A가 구매할 수는 있다. 그런 것에 시세가 결정되어 A도 그것을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절대적 가치 또한 판단하지 않았어도 타인이 정한 가치 판단에 의해 판단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정가 가치의 가치 판단은 이미 가치 판단이 된 것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라면이란 상품이 1000원에 팔린다고 해보자. 그러면 구매자의 라면에 대한 종합 가치와 시장의 정가 가치가 더해져 싸거나 비싸다는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종합 가치는 해당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면 라면의 범주 가치와 개별 가치와 세평이 더해지고, 해당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면 라면의 범주 가치와 세평이 더해져 나타난다. 


정가 가치의 인식은 한번 정해지면 가치에 대한 판단을 바꾸기가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스턴트 라면이 일반적으로 천원 이내로 팔릴 때, 그걸 이천원이나 삼천원으로 가격을 올려 팔 경우 맛의 가치와 무관하게 비싸다는 가치 판단이 나와 팔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 가격을 결정할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달리 말해 정가가 붙어본 적이 없는 대상일 경우에는 그런 정가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라면과 유사한 제품인데, 거기에 다른 것을 섞어서 팔면 정가 가치가 붙어본 적이 없어 라면보다 비싸더라도 팔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에서 만들어진 면요리, 같은 면요리인데 그 국가 언어로 이름을 달아서 팔면 비싸게 팔아도 팔릴 수가 있다. 


정가 가치는 가치 판단이 끝나 있어 투자나 투기로 차익을 얻는데 쓰인다. 숫자로 가치 판단을 해놓은 상태기 때문에 거래가 수월하고 그에 따른 차익 실현 판단도 수월하여 접근성이 뛰어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가 가치가 가치 판단이 끝났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변동성이 작용하여 같은 숫자라 하더라도 같은 가치가 아닐 수 있다. 물가가 그대로일때의 1000원과 물가가 10% 인상되었을 때의 1000원은 가치가 다르다. 그럼에도 그것을 같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것을 이용한 차익을 실현하는 일도 많다.


정가 가치는 가치 판단이 끝나 있어 그것을 기준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시장 차이로 얻는 차익이 그렇다. A 국가의 시장에서 C 상품의 가치 판단은 100인데, B 국가의 시장에서 C 상품의 가치 판단은 150일 경우, A 국가의 시장에서 C 상품을 사서 B 국가의 시장에 팔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각 시장에서 이미 가치 판단이 끝나있기 때문에 무역 거래가 수월한 것이다. 시장 공급, 창고 정리, 구매 유도 등을 위한 세일도 그렇다. 100만원에 팔던 것을 50만원에 팔면 이익을 얻는 소비가 될 수 있다.


정가 가치는 가치 판단이 끝나 있어 혼란을 통한 차익도 가능하다. 세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원가 100만원을 200만으로 올린 뒤 50% 할인해서 100만에 판다는 식으로 할 수 있다. 또는 경품을 줄 때 100만원으로 홍보하고 100만원 어치의 상품을 제공한다고 하거나, 중고 거래를 할 때 100만원에 사겠다고 해놓고 100만원 어치의 상품을 준다고 하는 일이 있다. 100만원의 화폐와 100만원 어치의 상품의 가치는 다를 수 있음에도 정가가 붙어있다는 것으로 같은 것처럼 취급하는 일이 있다. 


정가 가치는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 상품 공급보다 수요가 낮으면 가격이 낮아질 수 있는데, 그 때 공급자는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상품을 땅에 묻는 것과 같이 상품을 일부러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상당한 자원 낭비에 해당한다.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시장 가격을 유지한다와 자원 낭비를 막아야 한다는 조건을 성립시키려면, 해외의 다른 시장에 팔거나 성질을 바꿔 재생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상대적 가치라는 것은 가치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단에 의한 탐구가 가능해지면서 해당 가치에 대해서는 지식의 체계를 갖춰 학문의 레벨이 높을 수가 있다. 현대 시장 경제가 우수한 이유 중 하나는 시장의 가격 자체가 판단이 가능해야 성립되기 때문이다. 판단이 되면 레벨이 높고 판단이 안되면 레벨이 낮다. 당연한 논리다. 정가 가치는 상당히 레벨이 높기 때문에 윤리로 특정 상품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윤리로 정부가 가격에 간섭하거나, 윤리로 정가를 없애거나 하는 등과 같이 윤리의 간섭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큰 문제가 없다. 






2) 당위 가치


[C. 당위 가치]


[당위: 1.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

[규범: 1.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할 가치 판단의 기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가치에 대한 용어를 규범 가치가 아닌 당위 가치라 규정한 것은 판단을 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당위에 규범이 포함될 수는 있다. 마땅히 해야만 하는 가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가치에 비해 우선되게 된다. 


당위 가치는 크게 세 개로 분류할 수 있다. 정신에 작용하는 당위 가치 (윤리, 계약, 관계, 취미, 계획, 루틴, 미신, 기념일, 불문율, 징크스, 강박증 등), 육체에 작용하는 당위 가치 (음식, 수면, 배설, 중독, 결핍 등), 한정으로 작용하는 당위 가치 (세일, 구독, 한정판, 접속 보상 등). 이는 판단이 되면 상대적 가치, 판단이 되지 못하면 절대적 가치로 분류할 수도 있다.


당위 가치는 마땅히 해야만 하기 때문에 강제력이 발생할 수 있으면서 권력과 관련되는 가치가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대부분 당위 가치로 인간을 지배해왔다. 너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 거기서 절대적 가치가 더해지면 윤리다. 너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것의 명분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배해서 차례가 생겨 질서가 잡히면 끝나기 때문에 그 외 복잡한 지배의 정당화 말고는 없다. A에게 혈통 정통성이 있으므로 지배의 정당성이 있다. A는 경전 암기 능력이 뛰어나므로 지배의 정당성이 있다. 유교권은 인간의 지배, 기독교권은 신의 지배로 차이가 있다. 오늘날 인권이나 환경 운동도 권력과 관련이 있게 된다. 특정한 것은 인권이나 환경에 해당하므로 해야만 한다고 강제한다.


국가에 속하는 이상 해야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법이다. 법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정한 강제력이 있는 사회 규범으로 세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법에 상대적 가치만 있다면 전부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판단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절대적 가치는 가치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옳고 그르다는 기준은 알지만 어디까지 옳고 그른 것인지는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절대적 가치는 가치를 상대적으로 보고 판단한 인간이 정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군가가 살인, 강간, 절도 등을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해 형량을 정해둔 것을 본받아 비슷한 형량을 책정하면서 쓰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특정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인간이 개입하면 이러한 판단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살인보다 강간이 더 큰 형량을 받는다거나 같이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규범 가치는 윤리의 영향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대중의 일부는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강한 형량을 외치기도 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 당위 가치는 매우 영향이 크다. 단순히 규범만이 아니라 생활 전체가 당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일 활동하기 위해 잠을 자둬야만 한다. 오늘 활동하기 위해 잠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약속한 활동 장소에 도착해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 밥을 먹고 똥을 싸야만 한다. 사실상 인간 생활의 기준이 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당위 가치가 적을수록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해야만 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사고의 폭이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가치는 판단이 가능하므로 반드시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상의 종합 가치가 높아야 당위 가치가 성립된다. 계약, 관계에서 정해진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계획, 스스로 정한 일의 절차, 방법 등을 해야만 한다. 루틴, 스포츠 선수가 해야만 하는 동작과 절차를 통해 경기를 뛰기 위한 준비를 한다. 기념일, 2월 14일은 초콜릿을 선물해야만 하고, 3월 3일은 삼겹살을 먹어야만 하고, 11월 11일은 빼빼로를 교환해야만 한다. 한정, 기간 내에 한정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을 구매해야만 한다. 세일, 기간 내에 한정적으로 저렴하게 판매되는 상품을 구매해야만 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이 불가능하므로 절대적 가치의 농도, 추구하려는 태도에 따라 반드시 하려고 하게 된다. 판단하지 못하는데 절대적으로 해야만 한다. 이 개념의 조합은 굉장히 위험하게 된다. 이교도는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참살해야만 한다. 마녀는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화형을 해야만 한다. 히잡을 쓰지 않는 미성년 여성은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명예 살해를 해야만 한다. 반말을 쓰는 연하는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살해를 해야만 한다. 성적인 것은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항의를 해야만 한다. 창작물에 흑인, 여성, 게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평가를 낮춰야만 한다. 가난한 인간은 착하므로 판단하지 않고 옹호하고 부유한 인간은 나쁘므로 판단하지 않고 비난해야만 한다.


이런 절대적 가치는 윤리뿐만 아니라 신흥 종교 세뇌, 가스라이팅 등이 있다. 신흥 종교의 세뇌나 가스라이팅을 그토록 비판해도 이미 정신에 노예의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윤리와 본질이 거의 같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질 못한다. 신흥 종교에 빠진 인간은 그 가치에 판단하지 못하면서 전재산을 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가정 파탄이 일어난다. 애초에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어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가 있었기에 이런 이용이 성립되는 것이다. 신흥 종교에 의해 가정 파탄난 인간이 자국의 총리를 암살했는데, 실제 가정의 파탄을 성립시킨 것은 윤리다. 


유교권은 권력이 윤리기 때문에 권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돈에 관해서 판단하지 않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무작정 투자하다 돈을 날려먹는 일이 수두룩하다. 입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전적인 권력 획득 방법인 입시는 판단하지 않고 돈을 쓰면서 입시 시장 과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연령과 같이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에 대해 조금도 이상하다 판단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취급하는 상품에 당위 가치를 느끼는 인간이 많으면 상업적인 성공은 대체로 보장된다 하 할 수 있다. 많은 인간이 해야만 한다 생각하며 구매하는데 실패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게 절대적이게 되면 마약과 다를바 없으므로 상대적임을 가정하고 접근해야 한다. 마약은 자기 파괴와 전염성 외에도 판단하지 않고 먹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기본적인 종합 가치를 높인 다음 정신, 육체, 한정을 잘 조합하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와 같은 부가 가치가 기본적인 품질과 별개로 해야만 하게끔 느끼게 할 수 있다. 낙서로도 느껴지는 현대 미술이나 실체가 없는 디지털 상품이 그런 이야기 활용을 통한 세일즈를 잘 하고 있다.


현재 당위 가치는 절대적 가치가 인류를 지배하고 있어 특정 가치의 경우 상업적인 활용이 체제에 적합하지 않게 될 수가 있게 된다. 지배를 이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런 지배에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며 제 목에 목줄을 다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그 현상에 대해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



대체로 당위 가치가 어려운게 절대적 가치 때문이다. 누구나 본인이 우수하다 생각할 수 있는데, 특히나 엘리트들은 본인들이 우수하다 여길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 가치는 매우 우수한 반면 절대적 가치는 우수하지 못한데, 그것을 모른다. 우수한 내가 실패할 리가 없어. 하면서 계속 실패한다. 원인도 모른다. 단순히 강박적으로 행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상대적 가치는 우수하니까 다른 이들도 그 실패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는 무능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절대적 가치도 지식의 체계를 갖춰 학문이라고는 하는데, 중간중간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에 의해 모순되는 것이 많아 사실상 레벨이 낮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 현상은 신의 만든 것. 이렇게 판단하지 않고 결정해버렸다 치자. 그러면 그 부분은 아예 발전이 안되는 것이다. 더 이상 탐구도 안하니까. 그러면서 그 부분만 레벨이 오르지 않고 그것과 연동된 지식도 레벨이 오를 수가 없다.






3) 범주 가치


[C. 범주 가치.]


[범주: 1.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

[시장: 2.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범주 가치는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에 대한 판단 기준을 말한다. 보통 특정 범주 시장의 가치나 특정 브랜드 가치에 해당한다. 다양한 가치 중에서 시장의 기준인 정가와 인류를 지배하는 당위 다음에 범주를 꼽은 것은 이 개념에 대한 오해로 시장이 망가진 것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고정 관념으로 보면 많이 팔리면 가치가 높다고 여길 것이다. A 상품이 많이 팔렸으니 A 상품과 A 상품 시장의 가치가 높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개별 가치과 범주 가치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개별 가치는 그 가치가 많이 팔리기만 해도 가치가 높지만, 범주 가치는 고점만 팔리면 가치가 낮다.


예를 들어 축구를 보자. 한국에서 축구는 인기가 많은 스포츠로 보인다. 국가 대표의 경기를 하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청한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축구 범주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한국에서 축구는 어디까지나 국가 대표 경기 가치가 높은 것이지 축구 경기 자체의 가치가 높은 게 아니다. 만약 축구 범주 가치가 높았다면 저점에 속하는 국내 축구가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축구 국가 대표 경기의 가치가 높은 것이지 축구 자체의 가치가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스포츠인 야구를 통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잠깐 검색해본 결과 수년 전 축구 K리그 시청률은 0.11%, 야구 KBO 리그 시청률은 0.88%로 야구의 KBO 리그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국가 대표 경기 시청률은 축구가 더 많이 보거나 비등한 상태다. 축구와 야구의 국가 대표 경기의 가치는 축구가 높거나 비슷하고, 스포츠로서 범주 가치는 야구가 명백하게 높은 상태다. 그럼에도 축구 국가 대표 경기 관심이 높다는 이유로 축구 범주 가치가 높다고 착각되게 될 수 있다. 진짜 축구 범주 가치가 높은 것은 영국이다. 영국은 5부 리그 축구 경기도 즐겁게 시청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야구 범주 가치가 높은 곳은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고등학교 야구 경기조차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축구 국가 대표 경기가 관심이 높은 것은 다른 측면으로 봐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기 때문에 국가 대표 경기가 인기가 높은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브랜드 가치를 보자. 현재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중국제가 세계에서 매우 잘팔리고 있다. 그것을 보고 중국제의 범주 가치가 높다고 여길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중국제가 잘팔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점에 해당한다. 고점이라고 해서 품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서 고점, 고가치는 품질에 정가가 더해지기 때문에 가격 대비 품질이 높은 것을 말한다. 중국제가 잘팔린다고 해서 중국 브랜드 가치가 높다 여기는 인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택갈이를 하는 것이다. 같은 중국산 제품이라도 국적을 바꾸기만 해도 더 잘팔린다. 중국 브랜드, 중국제 범주 가치가 낮은 상태임에도 고점에 해당하는 제품들은 잘팔리기 때문에 오해를 하게 된다. 아, 상품이 잘팔리니까 중국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 그러면서 브랜드 관리를 보다 안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이렇게 단순히 많이 팔리면 가치가 높다는 고정 관념에 의해 가치가 낮거나 망가진 것을 방치한 시장이 많다. 학문, 노동, 연애, 문학, 주택, 우유, 영화 등 저점이 안팔리는 시장은 가치가 낮거나 망가진 시장이라고 보면 된다. 아마 이 중에서 충분히 잘팔리는데 망가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시장이 있을 것이다. 학문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학문은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열이 높고 입시에 투자되는 비용이 높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고점만 소비되는 시장은 망가진 시장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현재 학문은 의료라는 고점에 엄청나게 몰리고 있다. 그 외의 학문도 고점 위주로 몰리고 있다. 의료가 과한 이익을 얻기도 하지만, 학문의 범주 가치가 지나치게 낮으니까 고점에만 몰리는 것이다. 학문 범주 가치를 올릴려면 충분히 지적 호기심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학문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어야 했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과열 현상만 보고 학문 가치가 높다 판단해버리면서 학문 가치 관리를 방치해버렸다. 학문 범주 가치가 낮아진 것은 권력이 윤리린 유교의 영향이다.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학문 외에는 전부 배제해버려서 다른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 범주 가치는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지만, 원래 권력 자체가 타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어 높은 가치다. 권력의 범주 가치가 어느 나라나 다 높지만, 유교권은 윤리에 속하여 판단하지 못하면서 제한이 없는 집착까지 되게 된다. 그야말로 최저점인 작은 권력까지도 소비되어 이용된다. 수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위계질서가 성립되고, 그 위계질서를 이용하고, 그 위계질서를 부정하지 못한다.


현재 대부분의 시장이 윤리에 의해 망가졌다고 보면 된다. 시장을 성립시키는데 필요한 A가 윤리로 부정되고 윤리에 의해 시장을 훼손하는 가치 B가 우선되면 당연히 시장이 망가지게 된다. 학문 시장을 활성화하는데 필요한 지적 호기심이 권력에 필요한 학문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윤리적인 판단으로 배제되고 입시에 필요한 지식만 우선되면서 학문 시장이 망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입시 과열 현상을 보고 학문 가치가 높다 오해해 버리면서 망가진 시장을 방치하게 되었다. 물론, 인식했어도 윤리가 절대적 가치라 원인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입시 과열 현상까지는 알 수 있어도 왜 입시 과열이 되었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외 노동, 연애, 문학, 주택, 영화 등 전부 비슷하게 시장이 망가졌다. 윤리가 당장 시장을 망가트리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서 망가트리는 경우가 많다. 그야 본래 가치가 그리 높지 않은 시장이야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망가질 수 있는데, 노동이나 연애 등은 가치가 높아야 하는 시장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망가진 것은 어떤 요인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절대적이기에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다. 범주 가치에 관한 논리는 지극히 쉽기 때문에 이 논리로 보면 현재 시장이 얼마나 많이 망가진 상태인지 알 것이다. 대기업에 몰리는 노동, 미형인 외형과 부유해야 소비되는 연애, 상 탄 작품만 보는 문학, 차익 수단에 불과한 주택, 유명한 작품만 보는 영화 등. 그냥 고점만 팔리고 있다.


부동산은 한국에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 가치기 때문에 주택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주택 가치가 높았으면 저점에 속하는 수도권 외의 지역 주택이 많이 팔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주택보다 위치가 더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주택 가치가 높았다면 현재 주택 마감 처리가 그렇게 엉망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다시 팔 때 해가 될까봐 쉬쉬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다들 대충 살아도 된다, 비싸게 되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주택보다 투기 가치가 더 높다는 것이다. 주택 자체는 범주 가치가 매우 낮다. 그토록 많이 거래되어도 주택 범주 가치가 낮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진짜 주택 가치가 높으면 직접 디자인한 집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이 거래되니까 가치가 높은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주택 가치를 관리하는 것을 방치해버렸다.



현재 한국은 기록적인 저출산인 0.6으로 향해가는 국가적인 자살을 하고 있다. 이것이 윤리에 의함에도 윤리가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 원인조차 모르면서 문제의 원인인 윤리를 더욱 강조하면서 저출산을 악화시키고 있다. 직접 원인을 알기 어렵다면 시장을 통해 원인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것을 이해하면 다른 범주 가치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이 본능이기 때문에 놔둬도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할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우선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 시대에 중매 결혼이 보편적이었던 까닭은 권력이 윤리인 유교 사회에서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개인의 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나 출산은 사회 구성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의 큰 변화에 속하게 된다. 그 변화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배가 깨질 수 있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의 열쇠인 성을 지배해야만 지배 질서가 성립되게 된다. 그렇기에 지배 체제와 지배 질서는 필연적으로 성을 지배하게끔 되어 있다. 대부분 사회에서 성을 터부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배에 필수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여성 정조관념 등이 있다. 단순히 성이 본능이기 때문에 억압해도 알아서 했다면 중매 결혼이 보편적일 수가 없다. 그렇게 성을 지배하던 수단인 윤리를 강제하면서 똑같이 성을 지배해버리는 바람에 중매 결혼이 아니면 결혼할 수 없는 이들이 많게 되었다.


여성주의의 여성성에 관련된 사상은 가부장제 시대의 사상 또는 철학들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상들은 절대적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여 그 모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여성을 위해서라면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게 얼마나 모순되는 것인지를 모른다. 여성 성적 대상화 및 여성 성적 상품화 반대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여성에게 주입한 여성 정조관념으로 만들어진 가치관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지를 못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가부장제에서 만들어진 여성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임을 알지를 못한다. 그런 주장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여성성 억압은 가부장제의 성립 조건으로 다른 가부장제 사회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지를 못한다.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가부장제 가치관과 다를바가 없고 꾸밈을 막는 것이 히잡을 씌우는 것과 다름이 없음에도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기에 그걸 알지를 못한다. 심지어 그렇게 성 관련 주장을 통해 여성성을 권력을 얻는 도구로 삼아 권력을 얻고 있음에도 그 행동이 윤리에 의한 것임을 알지를 못한다. 지배 질서를 성립시킨 개념인 윤리, 노예 디자인 교육을 받고 생긴 가치관으로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말하니 여성을 억압하던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을 지배하던 윤리의 교육과 여성성을 권력 도구화하여 여성성에 대한 난이도와 비용을 높이는 것으로 연애 시장에 관한 범주 가치가 아예 폭락해버려서 고점만 소비되게 되었다. 정조 관념, 정숙, 성적 욕망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마치 반드시 옳다는 듯이 말하는데, 연애 범주 가치를 고려하면 자유 체제에 해롭다. 참여자가 감소하면서 저점이 소비가 안된다.



연애 시장은 현재 여성이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여성이 더 가치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여성 정조관념 등으로 성적 억압을 강하게 받아서 여성이 남성보다 성관계에 대한 범주 가치가 낮기 때문이다. 성관계 범주 가치가 낮으면서 연애 시장에 대한 수요도 낮아지게 된다. 연애 시장은 보통 일대일 직결 시장으로 수요가 낮으면 공급도 낮아지게 된다. 여성의 수요와 공급은 낮은데 남성의 수요와 공급은 높으면서 희소성에 의해 여성의 가치가 높게 느껴질 뿐이다. 범주 가치가 낮을수록 소비되는 고점이 높아진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연애 시장도 마찬가지로 여성의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소비되는 고점이 높아지면서 매우 잘생긴 남성은 시장에게 매우 가치가 높게 된다. 그 외 일반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성관계 범주 가치가 높으면서 연애 시장 수요가 높아 공급도 높아지면서 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범주 가치를 이해하면 현재 연애 시장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여성주의자가 남성에게도 정조관념을 심는 짓을 저지르면서 남성 또한 보편적인 성관계에 관한 범주 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 성적 쾌락의 가치는 높지만 성관계 범주 가치는 낮으면서 자위는 해도 이성은 만나지 않는다. 허구언날 섹스를 외쳐도 성매매조차 안한다. 그러면서 남녀 모두 성관계 범주 가치를 낮게 느끼는 것으로 여성이 왕자님을 찾듯이 남성도 공주님을 찾게 되었다. 이성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위험 부담이 적으면서 고점 소비가 수월한 유사 연애 시장에서 소비하거나, 짐승 사육 시장에서 소비하게 되었다. 워낙에 관련 가치가 폭락하면서 개는 키워도 아기는 안 키우는 사회가 되었다. 친구는 사귈수 있는데 연인은 사귈 수 없는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성적인 농담조차 성희롱이라면서 죽을죄마냥 취급하는데 정상적인 성관계가 얼마나 있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현재 성에 관련된 모든 것이 죄로 취급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살인이 정당방위에서 정당화되듯 일부 관계,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그렇기에 자유 의지로 성매매를 하거나 난교를 하는 것을 보고 강한 비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나오는 성조차도 죄로 취급되며 공격되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것은 판단하지 못하면서 제한이 없는 억압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반발하는 인간이 있으니까 제한이 생기는 것이지, 그걸 주장하는 인간이 독재를 했다면 성은 언급하는 것 자체로 죄로 취급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정조관념이 선천적인 여성성과 같다며 말할 수 있는데, 어떤 짐승이 성적 수치심으로 자결을 하나. 다 가부장제에서 심은 여성성 억압이다. 후천적인 여성성, 가부장제 여성성이다. 그걸 성인지 감수성 떠들면서 심고 다니니 가부장제 정조관념이 여성 인권이 되어 퍼져버렸다.



시장으로 접근해서 봐야 한다. 개인이 본인의 의사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려면, 성에 대한 지배를 할 것이 아니라 성을 자유롭게 풀고, 미성년 때부터 성에 대한 긍정적 가치관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성기능이 작동하는 10~14세부터 성경험을 다 해봐야한다. 그렇게 하여 발정날 때 상대가 이성이기만 해도 성적인 관계를 해도 될 정도로 성관계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야 저점도 소비되면서 연애 시장이 활성화된다. 저점이 소비되고 나서 고점으로 끌어올리면서 시장 전체 가치를 더욱 높인다. 여성 정조관념에 의해 첫경험이 중시되어 성경험에 저항이 생기는데, 다른 가치를 고려하면 그것은 그냥 성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성 관련된 창작물이나 사회적 태도들도 검열이나 규제나 억압을 해서는 결코 안된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면 시장 원리로만 보길 바란다. 연애와 결혼 시장은 거의 모든 개인이 참여해야 하는 시장으로 의식주 시장과 같이 긍정적으로 봐야만 한다. 배고프면 음식이기만 해도 된다는 것처럼, 발정나면 이성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미성년 때부터 죄로 인식하게 만들면, 얼마나 참여가 되겠는가? 상대적 가치로는 엄청 뛰어난 이들도 절대적 가치는 판단을 아예 못하다보니 아무리 뛰어나도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부터 알아야 한다.


꾸미면 연애할 수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연애 시장에 가치를 못느껴서 꾸미지 않는 것이다. 가치가 높다 판단되어야 에너지가 방출되어 행동으로 이어진다. 연애, 결혼, 육아에 관한 부정적 방송 프로그램이 원인이라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다. 관련 가치를 낮게 보니까 그런 프로가 수요가 높은 것. 물론 보다 악화는 되고 있다. 윤리가 절대적 가치니까 원인을 판단하지 못하고 결과만 보게 되는 것이다.


꼭 이러면 문화, 정서, 도덕, 윤리를 말하는데 그 개념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부디 판단해봤으면 좋겠다. 지배 체제와 지배 질서의 문화며 정서고 도덕이며 윤리다. 그런 것을 언급하면서 체제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반체제란 말이다. 그렇게 반체제적인 태도를 취하니 시장 다 망가지고 국가가 죽어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이 저출산으로 손해보는 것이 막대하다. 그냥 기본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현상을 일으킨 개념을 옹호하겠는가? 그것은 그냥 복종에 불과하다. 지금 손익만 따지면 사회에 속한 모든 개개인이 불필요하게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단 말이다. 윤리적으로 보고 생물을 잡아먹는 추악한 생물은 죽어 마땅하다 하나? 윤리적으로 보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추잡한 생물은 죽어 마땅하다 하나? 그것은 그냥 윤리의 노예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해서 일도 착취되고 성도 착취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일이나 성이나 자유로워도 문제될 것 없다. 


오랫동안 저출산 고령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일본은 현재 초식에서 절식이 되어 20대 성경험이 50%라고 한다. 수십년 동안 관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는데도, 윤리가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원인조차 몰라서 문제 원인인 윤리를 더욱 더 강조한 결과가 현재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다. 일본은 성 산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도 보편적으로 미성년에게 가해지는 성억압은 다른 유교권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 것을 보고도 한국은 윤리를 강조하고 여성성의 권력 도구화까지 더해지자 최저출산율이 되었고, 중국에서도 체제가 다름에도 윤리를 강조하면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수십 년 실패했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하는데, 윤리가 절대적 가치라서 판단 자체를 못하기 때문에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복지 지원을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시장이 되살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시장은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기 때문에, 시장의 범주 가치를 높게 여겨야만 활성화되면서 살아날 수 있다. 다른 시장의 경우 따로 관계가 없어도 상품 소비가 되기 때문에 고점이 잘팔리면 범주 가치가 높아져 저점 소비로 이어지는 것으로 시장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있는데, 연애 시장은 직결 시장이기 때문에 고점 저점 가리지 않고 소비하기 위해 참여부터 해야지 시장이 활성화된다. 미성년 때 상대가 고점이든 저점이든 소비를 하게 해야지 시장이 활성화된단 말이다. 그러니까 더욱 범주 가치가 중요한데, 윤리로 너무 망가트렸다. 뭘 해도 가치관이 정상이 되지 않는한 저출산은 해결될 수 없다 단언하겠다. 성적인 얘기와 관계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유 체제에서 성에 관련된 정상적인 가치관이다. 성을 지배하는 것은 반체제에 불과하다. 복지 비용을 쏟으면 해결되는것 아니냐 할 수 있는데 그러다 국가 전체가 망가진다. 돈을 부어도 가치관이 그대로면 그걸로 다른 가치를 소비한다. 특히 윤리적일수록 판단을 못하는 것인지, 재정을 고려하질 않는 것 같다.






4) 기타 가치


가치는 대상의 판단 기준으로 하나의 대상만해도 수많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수많은 가치는 세계화가 되면서 일부 초고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분산되어 소비된다. 단순히 같은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예를 들면 치킨과 피자, 한식과 일식 등으로 분산되어 소비될 수 있다. 취미는 더욱 다양하다. 게임과 스포츠, 소설과 낚시 등으로 분산되어 소비될 수 있다. 자아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적어서 그렇다. 그러면서 모든 가치가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때로는 축구와 야구처럼 경쟁하고 때로는 영화와 팝콘처럼 연계한다. 그런 세상에서 가치에 대한 이해는 보다 깊어져야 한다. 가치는 상당히 많으므로 짧게 다루겠다.




[C. 일반 가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C. 종합 가치] 


종합적으로 본 가치다. 수식어가 붙지 않으면 시장 가치거나 종합 가치다.


종합 가치는 대상에 다양한 가치가 있을수록 판단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사과에 붙은 가치의 종류는 적어 판단 차이가 적지만, 스마트폰에 붙은 가치의 종류는 많아 판단 차이가 크다. 스마트폰과 같이 가치의 종류가 많은 경우에는 보편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고투자한 가치는 낮은 평가를 받고 저투자한 가치는 높게 평가 받아 시장에서 종합 가치가 낮게 평가될 수 있다. 100을 투자하고 20의 평가를 받고 20을 투자하고 20의 평가를 받으면 후자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종합 가치로는 낮게 된다.


[C. 개별 가치]


개별로 바라본 가치다.


수요가 높을수록 가치가 높다.


[C. 범주 가치]


범주로 바라본 가치다.


저점이 팔리지 않을수록 가치가 낮다.


[C. 정가 가치]


값이 매겨져 가치 판단이 끝난 가치다.


가치가 상대적인 상황에서 특정한 기준으로 가치 판단하여 공통된 가치를 인식하게 만든다.


[C. 당위 가치]


해야만 하는 가치다.


절대적으로 해야만 하는 가치가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C. 사랑 가치] 


이로운 종합 가치를 추상화한 가치다.


특정 가치를 종합적으로 이롭다 판단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게 된다. 그러면서 차별이 발생한다. 짐승을 사랑하면 인간이 차별받을 수 있다. 짐승을 키우면서 인간은 키우지 않는 것은, 짐승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기가 짐승 알레르기로 고통 받아도 짐승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아기보다 짐승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짐승의 권리를 무작정 높이면 높일수록 인간의 권리가 낮아진다. 이웃집의 모르는 8살 아이보다 키우는 짐승을 우선시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어디서 그런 설문을 본 것도 같다. 짐승은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사회와 체제를 고려하며 접근해야 한다.


[C. 증오 가치]


해로운 종합 가치를 추상화한 가치다. 


종합 가치기 때문에 특정 가치는 이롭고 특정 가치는 해로우면서 애증이 성립될 수 있다.


[C. 존재 가치]


존재할 가치다.


존재 이유를 생각할 정도의 지성을 갖춰야 성립되는 가치로 그걸 생각한 지성체는 스스로에게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살아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존재 가치가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타인의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더라도 보통은 크게 영향을 주지 않지만, 본인의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면 그게 바로 영향을 준다. 넌 존재할 가치가 없어, 라고 해도 별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있지만 난 존재할 가치가 없어, 이러면 바로 영향이 간다는 것.


집단에 대한 존재 가치로 소속 여부가 결정된다.


[C. 신용 가치]


신용할 가치다.


사기 죄의 경우 누가 속나 속지 않나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에 의해 발생한 사회 신용 가치 훼손이 더 큰 문제다. 신용 가치가 훼손되면 신용하면서 생략한 절차를 추가하는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C. 명예 가치]


사회 인정 가치다.


사회에서 공적이나 사적으로 가리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정 받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대상에 명예 가치가 붙으면 구매가 늘어날 수 있다. 망가진 문학 시장에서도 노벨상을 탄 작품은 읽힐 확률이 높게 되는 것과 같다.


SNS가 발달하면서 SNS 친구 수가 많은 인간이 명예가 높을 수 있는데, 그것은 숫자로 지표가 너무 명확해서 그에 따른 이익이 높지가 않으며, SNS 안에서 한정될 확률이 높다.


[C. 연계 가치] 


연계되는 가치다.


영화와 팝콘, 2월 14일과 초콜릿, 삼겹살과 술 등


[C. 숫자 가치] 


숫자로 보는 가치다.


수는 공통 인식에 편리해 객관화에 유리하다.


[C. 패션 가치]


유행하는 외형으로 본 가치다. 대상에 유행하는 미적 감각이 더해지면 패션 가치가 붙는다.


주로 SNS나 유튜브 정도 이용하는 이들에게는 사실상 100만원 폰과 20만원 폰의 가치 차이가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할 수 있다. 어째서 그들은 100만원 폰을 구매하는가? 그것은 성능도 패션 중 하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패션은 두른 인간에게 부가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로 전자제품에서는 성능도 패션이 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실사용 성능과 패션용 성능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 실사용 성능은 자주 쓰이므로 그대로 전달하고, 패션용 성능은 자주 쓰이지 않으므로 포장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 


[C. 모방 가치]


모방한 가치다.


모방에서 창의가 되려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겉만 모방해봐야 속을 새롭게 바꿀 수가 없다.


[C. 미적 가치]


미적으로 바라본 가치다.


모든 사물은 미적 가치가 붙을 수 있으므로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미에 대한 철학, 예술을 이해하는 편이 좋다. 현재 현대 미술은 본연의 아름다움보다 부가적인 이야기에 치중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예술에 대한 탐구가 다소 부족하므로 직접 무엇이 아름다운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C. 쾌락 가치]


쾌락으로 바라본 가치다.


현재 노동 범주 가치가 낮은 것은 쾌락 가치 설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C. 경험 가치]


경험에 관련된 가치다.


이른바 추억팔이에 속할 수 있다.


[C. 미지 가치]


알지 못하는 가치다.


인간에게 새롭거나 세상에서 새로울 수 있다. 신선함의 유통 기한은 가치 판단이 될 때까지. 가치 판단이 된 이후에는 그 판단이 잘되어야 계속 팔릴 수 있다. 


[C. 지속 가치]


지속으로 본 가치다.


상품의 가치가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 감가상각이 달라진다. 보통 중고가를 결정한다.


[C. 안정 가치]


안정적인 가치다.


일상에 속하는 가치로 식사 등이 있다. 크게 벌 수는 없지만 자리잡으면 계속 팔 수 있다.


[C. 매몰 가치]


매몰된 정도로 보는 가치다.


보통 뭐든 쓴 만큼 가치가 올라간다. 돈이든 자원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보통 시간은 소비한다는 인식이 없어서 시간을 쓰는데 주저함이 적을 수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 무료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어 가치를 높인다.


[C. 시간 가치]


시간에 관련된 가치다. 


보통 시간을 절약하는데 쓰이는 가치로 서비스 전반이 그렇다.


[C. 지식 가치]


지식에 관련된 가치다.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여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


[C. 희소 가치]


동일한 상품 또는 성질이 희소한 가치다.


희소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이미 가치가 붙은 것에 희소성이 더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합 가치가 낮으면 희소해도 팔리지 않는다.


[C. 도박 가치]


낮은 확률로 높은 이익을 얻는 가치다.


높은 리크스 높은 리턴을 의미하며 생각보다 많이 보이는 가치다.


[C. 고유 가치]


고유한 가치다.


통상 저작권 등이 그렇다. 교묘한 모방으로 저작권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으나 품질이 높으면 소비된다. 그러나 명예가 낮게 된다. 낮은 명예는 범주 가치에 해가 되어 저점이 되면 팔리지 않게 된다.


[C. 공유 가치]


공유되는 가치다.


사회에서는 공원 등이 있다. 공유는 다중 소유로 독자적 소유가 아님에도 허술하게 다루거나 마치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무관심한 일이 많다.


[C. 참여 가치]


참여로 본 가치다.


누구든 참여만 하면 가치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상품은 무료 이용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의 부가 가치가 붙는다. 그럼에도 무료 이용자가 단순한 악성 이용자로 보고 쳐내면 참여 가치가 하락하여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될 수 있다. 이런 것은 소비자 또한 생산한다고 봐야 한다. 소비자의 생산성이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것보다 임금이 더 나갈 경우 손해가 될 수 있듯이, 소비자가 생산하는 것보다 소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면 손해가 될 수 있으므로 무작정 해서는 안된다.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가 가능한 공간이 생기는 것으로 참여 가치가 포함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참여형 플랫폼이 그렇다. 이른바 메타버스라 부르지만 실상 개념이 제대로 정립된 상태는 아니다. 


[C. 특별 가치]


특별함이 붙은 가치다.


대체로 기념일 등이 그렇다.


[C. 인식 가치]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가치다.


모든 가치는 기본적으로 인식함에 따라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에 따로 인식 가치를 다룰 필요가 없을 수 있으나, 인식 유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다룰 필요가 있다. 공기를 당연하다 여기며 인식하지 못할 때에는 가치가 낮지만, 숨을 쉬지 못하면서 공기를 당연하지 않다 여기며 인식할 때에는 가치가 높게 된다. 중요함에도 가치가 낮을 때에는 가치를 인식하게 해야 한다.


[C. 수량 가치]


수량으로 본 가치다. 


대량으로 팔아서 저렴하게 된 규모의 경제가 보통 그런 가치에 속한다.


[C. 부가 가치]


부가적으로 붙는 가치다.


부가 가치를 분리해서 볼 때에는 종합 가치에 부가 가치가 붙는다. 보통 세금으로 분리하거나, 고레벨의 기술이 들어간 고부가 가치일 경우에 따로 분리하기 위해서 쓰인다.


[C. 선호 가치]


선호되는 가치다.


범주 가치가 낮을수록 고점이 선호된다.


[C. 기피 가치]


기피되는 가치다.


가치가 낮다고 기피되지는 않는다. 가치가 낮아도 선호될 수 있고 가치가 높아도 기피될 수 있다. 단순 노동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가치. 가능한 빨리 로봇과 AI로 생산해야할 가치다.


단순 노동의 경우 로봇보다 인간의 노동력이 저렴하다는 측면으로 교체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사회적 비용 (행복 출산 자살 등)을 고려하면 기피되는 가치를 인간이 하는 것은 복지 비용이 더나간다. 지금 당장은 하는 사람이 있어도.. 기피 가치이므로 점점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텐데, 그것을 로봇과 AI로 대체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까지 고려하면 가장 저렴하다. 복지로 쓸 돈 기피 가치의 로봇화에 집어넣고, 기피 가치 대신에 선호 가치는 인간이 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장을 고려하면 복지 지원금을 적정하게 넣으면 공급 유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C. 사실 가치]


사실 여부로 본 가치다. 


이른바 언론에서 팩트 체크하는 것도 사실 가치에 속한다. AI의 발전으로 진위 여부를 알기 어려워지고 있는데, 디지털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국제 기관의 신설이 필요하다.


[C. 화폐 가치]


국가 보증 가치다.


화폐도 상품이란 인식이 있어야 금융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C. 보안 가치]


안전에 관련된 가치다. 


디지털 시대가 된 이후에는 개인 정보 보안이 추가되었다.


[C. 기준 가치]


기준이 되는 가치다. 


업계 표준 등이 있다. 합리적인 기준일수록 효율이 높아진다.


[C. 계기 가치]


계기로 본 가치다.


행동의 계기가 되는 가치로 만남이나 상 등 다양하다.


[C. 신비 가치]


이해를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으로 만들어진 가치다.


종교, 미신, 점, 타로, 행운의 부적 등이 있으며 창작물에서도 자주 이용된다. 이해를 초월하기에 우수하더라도 믿을 수 있다.


[C. 유사 가치]


유사한 가치다.


유사 연애 산업 등이 그렇다.


[C. 무지 가치]


무지일 때 달라지는 가치다.


미지는 몰라도 지식이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는 반면, 무지는 전반적으로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젊음으로 마케팅을 할 때에는 무지 가치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마케팅을 하는 인간은 많은 것을 아는 상태기 때문에 무지 상태에서 상품을 접할 때 느끼는 감성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아는게 적기 때문에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고 도전한다. 그런 것이 젊은 패기 등으로 해석된다. 아는 것이 많은 인간이 만든 세계는 리스크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리스크를 고려한 마케팅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아는 것이 많은 인간은 아는 것이 적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용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비슷하기에 경험은 달라도 감각은 비슷할 수 있어 이용할 수 있다.


[C. 보관 가치]


보관하면서 생기는 가치다.


보통 창고 등에 속한다.


[C. 이동 가치]


이동하면서 생기는 가치다.


교통이나 물류 등이 그렇다.


[C. 우열 가치]


우열으로 본 가치다.


광대를 보고 웃을 때 쓰인다.


[C. 건강 가치]


건강으로 본 가치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약 등이 있다.


[C. 거품 가치]


실제 가치보다 부풀린 가치다.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부풀렸다는 것은 특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회계를 부풀리는 분식회계 등이 있다.


[C. 통제 가치]


통제할 때 쓰이는 가치다.


스포츠 규칙과 같이 약속한 공통된 통제나 지배를 하면서 복종하게 할 때 쓰이는 통제가 있다. 지배자가 억압을 가했다가 지배자가 풀어도 피지배자는 풀렸을 때 느끼는 행복감에 의해 지배자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자유 체제에서는 스포츠 방식의 통제가 적절하다.


[C. 언어 가치]


언어로 만들어진 가치다.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에 언어 가치가 포함된다. 따로 언어 가치로 구분한 것은 모든 개념이 어디까지나 인간이 언어로 규정한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1+1=2를 말하지만 실제로 우주는 그렇게 딱 나뉘는 경우가 드물다. 같은 원소라 하더라도 베타 붕괴가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 수치상 동일한 무게라 하더라도 동일한 에너지가 아닐 수 있다. 물론 매우 미시적인 관점이므로 일상에서는 그리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학문에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5. 통합 체계


물리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은 없다. 경제 물리학의 목표는 경제를 물리로 해석해서 통합적인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세계 구성과 인간이란 생물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에너지 방출과 제어의 성립 조건과 경제 생태계에서의 소비, 생산, 분배의 성립 조건을 파악하여 통합 체계를 갖춘다. 통합 체계를 통해 행복한 사회와 자유로운 체제를 성립시킨다. 


정부(입법, 사법, 행정)가 바뀐다고 사회가 행복하고 체제가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정부가 하는 정책과 제도는 학문으로 행하기 때문에 학문의 발전이 없으면 고질적 사회 문제는 어떤 정부가 들어와도 해결할 수가 없다. 학문의 발전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종교는 수천 년간 결과가 없고 근대 이념은 수백 년간 진보가 없고 현대 인문은 수십 년간 고질적 문제 해결을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바뀌는 것은 단순한 권력 쟁탈일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학문이 발전해야 한다. 정부가 발전한 학문을 참고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충분히 논리적이면 어떤 정부라도 웬만하면 참고하고 실행해본다. 실제 자연 계열의 과학은 어떤 정부가 와도 웬만하면 참고하고 실행한다. 



자유 체제에서 사회와 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체제에 필요한 개념들이 지배 체제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질서만 해도 자유 체제와 지배 체제는 아예 다르다. 자유 질서에서는 전부 자유롭고 몇 가지를 계약에 따라 금지한다면, 지배 질서에서는 전부 금지하고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정당화한다. 지배 체제에서는 지배 질서와 같이 전부 금지하고 몇 가지 허용하는 것으로 사회와 체제가 성립될 수 있었지만, 자유 체제에서는 전부 금지하다가는 자유 의지로 에너지 방출과 제어, 경제 생태계의 소비, 생산,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회와 체제가 성립될 수 없다. 어디까지가 자유 체제에서는 자유 질서, 전부 허용하고 몇 가지 계약에 따라 금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유로운 체제에서 A 가치가 공급되면 B 에너지가 방출되어 C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것을 전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탄생, 소비, 학습, 생산, 분배 등을 체제에 맞게 실현시킨다. 그 과정은 전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자유 이념 실현을 위해 늙음과 죽음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세부적인 방법은 절대적 가치 또한 상대적으로 만들어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가정한 다음 논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 체제에서 탄생의 성립 조건은 연인 또는 여성의 자발적인 출산이다. 연인 관계에서 서로 합의하에 출산을 결정하거나 여성 홀로 정자를 받아 출산을 결정하는 것으로 탄생이 성립한다. 연인 관계에서 합의하에 출산이 결정되려면 자발적인 결혼이 필요하다. 자발적인 결혼은 연애와 중매 등이 있는데, 성관계 범주 가치가 폭락하면 연애는 고점만 거래되고 중매는 조건 결혼이 되게 된다. 보편적인 자발적인 결혼은 성관계 범주 가치가 올라 이성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 되어야 저점도 거래되면서 성립한다.


자유 체제에서 학습은 평생 학습을 해야 한다. 지배 체제에서는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으로 학습 유무가 중요하지 않지만, 자유 체제에서는 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학습 유무가 중요하게 된다. 특히 AI의 발전으로 일자리의 변화가 예고된 상황에서 누구든 계속 학습할 필요가 있다.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순도 높은 지식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지식의 순도가 낮음을 이해하고 누구든 모순을 제거하면서 지식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


지식의 순도를 높일 때에는 객관식 문제 풀이가 위험할 수 있다. 이것은 지식을 익힐 때 위험하다. 활용할 때에는 위험도가 줄어든다. 지식을 익힐 때에는 그 지식으로 사고의 논리 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모순이 있는 오답이 새겨지면 오답이 발상되면서 논리 체계에 불순물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판단하면 상관 없을 수 있는데, 대체로 객관식 문제 풀이는 시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반면 지식 활용할 때에는 불순물이 있어도 웬만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미 구축된 논리 회로로 불순물을 접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존재를 논리 체계에 넣는 것과 논리 회로로 접하는 것은 별개다. 전자는 위험 후자는 괜찮다. 


자유 체제에서 에너지 방출과 제어와 경제 생태계 구축은 전문성을 고려해야 한다. 상대적 가치의 경우 경제 전문가들이 잘 할 수 있다. 절대적 가치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 모여 모순을 제거하며 지식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 초기에는 절대적 가치에 대해 판단하려 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게 낙인이다. 현재 문화에 머물러 있는 영역까지 전부 학문으로 체계화하여 문명으로 만든다. 각 산업을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에너지 방출과 제어, 경제 생태계와 통합하여 연계할 수가 있어야 한다. 


진보의 가장 큰 걸림돌은 대체로 이해 관계다. 변화로 손해를 보는 인간은 변화를 반대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익을 초월한 논리와 새로운 이익이 필요하다. 국가의 몰락과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새로운 변화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불로와 불사라는 이익. 절대적 가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지배를 성립시킨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국영화나 민영화나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접근할게 아니라 합리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현재 전기는 극심한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나 민영화에 대한 공포로 적자 해소의 길이 보이질 않고 있다. 기업을 살린다는 이유로 기업 전기세가 낮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다면 전기 산업을 가정과 산업을 분리하고, 국영은 가정용과 국가 비상 전력용으로 쓰고 민영은 산업용으로 쓰면 국영으로 안전망을 갖추고 민영으로 적자를 해소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가정에서도 적게 쓰면 국영, 많이 쓰면 민영이 저렴하도록 가격 편차를 두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현재는 전기 체계가 연결된 상태기에 분리가 수월할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상황에 따라 대기업에서 따로 기업용 전기를 운영하는 것도 효율적일 것이다.


지배 질서가 익숙하다보니 물리적으로 감시하여 파악하는 것으로 대응하려는 태도가 많이 보이게 된다. 그럴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을 이해하고 어떤 조건에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미리 다 알고 있으면 된다. 바둑을 두듯이 최소한의 정부 정책만으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끔 유도해야 한다.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 그들의 주장을 맹신하며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주장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질적 사회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수천 년 동안 성과가 나오지 않았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유명하고 오래되면 다 되는가? 인간을 권력으로 복종하게 만들어서 다툼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가?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여 좀비처럼 만들어 죄를 짓게 하지 않으면 되는가? 인간들이 지옥이 무서워 덜덜 떨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구원만을 기다리게 하면 되는가? 그걸로 되는가? 그게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가?


누군가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어떤 사상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단순히 모순이 있나 없나로 접근해야 한다. 지식의 순도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경쟁 상대로서 우열은 없다. 더 순도를 높이는 쪽이 더 타당할 뿐이다.



당장 개념 발상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모되어 구체적으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사상가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한다거나 누군가를 구원을 한다거나 반드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장하지 못하겠다. 단지… 본질을 보고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 그 길로 가기 위한 안내. 현상을 알게 하고 판단하게 할 수 있는 것.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자료. 사상가든 뭐든 결국 수많은 역할 중 하나. 새로운 생각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최소한 문제 해결을 하겠다고 문제 원인이 되는 것을 하게 하지는 않도록 하는 것. 내 주장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에 모순이 없으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많은 한계를 뛰어넘었다. 나는 그런 인류의 지성을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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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부디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판단하지 못하는 지성에 무슨 의미가, 무슨 가치가 있어?


올해 안에 불로 불사 루트를 파악할 수 있기를. 이게 아니면 보편적인 진보가 어려울 거 같아.


올해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사상가로서 성공한다거나 환경이 좋아진다거나 연인이 생긴다거나 하는 등의 개인적인 욕망이 실현되었으면 좋겠네.


아마 다음은 외교에 대해 쓸 거 같아. 주제가 바뀔 수도 있지만, 좀 쉬다 발상해봐야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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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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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불로와 불사 (1) 2023/12/31 AM 01:07

불로와 불사






1. 자유


[자유: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1) 자아 본질


[자아: 2.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 · 반응 · 체험 · 사고 · 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Q. 자아를 이해하는 것으로 본질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보통 자유 개념은 추상적이다. 대부분 개인의 주관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로 인식한다. 개인마다 억압이라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자유도 다르게 된다. 안락의 자유, 지배의 자유, 방종의 자유, 죽음의 자유, 야망의 자유 등 다양하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자 사이에서도 자유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상당하다.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유 개념이 성립되려면 ‘자기’와 ‘마음대로’와 ‘할 수 있는 상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는 자아를 지칭하고 마음대로는 바람을 지칭하고 할 수 있는 상태는 환경을 지칭한다. 자아가 안락을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이런 것처럼 자아가 바라는 상태가 가능한 것을 자유라 부른다. 이것을 통해 자유의 원리는 자아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아 내부 원리에 의해 바람이 생기고, 그 바람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다. 이런 이유로 자아가 무엇인지 알아야 정확한 자유를 알 수 있다.


[C. 생물 메커니즘] 자아는 생물 메커니즘에서 뇌가 전달하는 정보를 판단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갈림길에 섰을 때 자아는 판단만 한다. 발상과 동작은 생물 메커니즘에서 다른 영역이 한다. 자아가 판단만 해도 알아서 발상하고 동작한다. 자아가 판단만 해도 생물 메커니즘에서 모순은 없다. 생물 메커니즘 구분을 위해 판단만 하는 자아와 그 외를 하는 자아 외로 분리하겠다. 인간은 보통 이걸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좀 더 설명하겠다.



수면 충동의 생물 메커니즘. 


발상 - 신경 세포 정보를 종합해 수면 충동.

판단 - 잠을 자야겠다.

발상 - 시간, 장소, 방법.

판단 - 이따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자야겠다.

발상 - 정확한 시간.

판단 - 22:00 정도면 될 거 같다.

발상 - 22:00 이전에 할 일.

판단 - 그전에 게임 좀 해야겠다.

동작 - 몸이 움직여 게임을 하러 간다.


생물 메커니즘에서 자아의 판단 없이도 자아 외의 발상과 동작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걸 무의식적 생각과 행동이라 한다. 통상 판단은 무의식적 생각을 시작으로 한다. 판단 재료가 떠올려져야 판단을 할 수 있다. 자아의 추상적인 판단이 자아 외를 통해 언어 개념이 되어 발상이 나타난다. 발상과 판단을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이 흐르게 된다. 이 과정은 단어 하나, 손가락 하나마다 굉장히 빠르게 반복될 수 있다. 모든 판단은 기억되면서 한번에 다양한 판단과 발상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언어 개념이 그렇다. 언어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하나의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판단으로 다양한 의미를 판단할 수 있다. 


자아는 판단만 하기 때문에 실제 발상과 동작을 원하는대로 일어나게 하지 못한다. 머릿속에서 정확하게 원하는 정보를 떠올릴 수가 없고 육체를 원하는 동작으로 정확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 발상이든 동작이든 반복 학습을 통해 원하는 것과 유사한 것을 할 수 있다. 반복적으로 암기를 하는 학습을 해야 특정 상황에서 자아의 판단으로 원하는 정보를 자아 외가 발상하고, 반복적으로 공을 던져보는 훈련을 해야 특정 상황에서 자아의 판단으로 원하는 곳으로 자아 외가 동작한다. 


모든 조건에서 자아가 판단만 해야 모순이 없다. 발상이나 동작까지 자아가 했다면 실수가 나오기 어렵다. 데이터 검색해서 발상하는 것도 아니고 좌표값 계산해서 동작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욕구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자아는 판단만 한다. 자아의 판단을 의지라 부르고 자유로운 판단을 자유 의지라 부른다. 즉 본질적인 자유는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유의 조건은 세 가지다. 판단을 하는 존재,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 판단에 제한이 없는 사회. 존재와 능력과 환경이 갖춰져야 자유롭다 할 수 있다. 


존재 유지 - 생존의 자유

능력 획득 - 학문의 자유

자유 사회 - 사상의 자유



이 외의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등은 조건에 따라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유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사는 동안 능력을 얻어 생각을 통해 사회에서 다양한 자유를 판단하여 규정하고 자유롭게 살면 된다. 통상 체제를 기초로 다양한 자유가 규정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주의 체제에 의해 자유주의의 자유가 모든 개인의 평등한 자유로 규정된다.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 대등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체제는 평등한 자유기 때문에 불합리하게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할 수가 없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면 표현에 대한 다른 사회 구성원과 의견을 교류하며 체제를 기초로 표현의 한계를 판단한다. 보통 표현에 대한 대응이 가능하면 자체 규칙으로 판단하고 대응이 불가능하면 국가 법으로 판단한다.






2) 사회 법칙


[법칙: 3.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 필연적인 불변의 관계.]



Q. 사회 법칙을 이해하여 자아의 판단이 보장되는 사회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자연 법칙이 기본 상호 작용(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을 기초로 하듯이 사회 법칙 또한 특정한 기본적인 상호 작용을 기초로 한다. 사회는 인간을 요소로 하는 존재로 인간의 힘인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으로 동작한다. 이러한 인간의 힘은 가치에 의해 작용이 결정된다. 가치는 판단 대상을 의미한다. 인간의 가치 판단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 성질상 크게 수용과 거부로 구분할 수 있다. 받아들이거나 물리치거나. 그 외는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다. 


수용과 거부는 강약으로 분리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강한 수용과 거부는 욕망과 공포다. 갈구하며 쫓아가거나 겁에 질려 도망친다. 사회의 기본적인 상호 작용은 수용과 거부이며 강한 순서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보통 욕망과 공포가 기본이다. 욕망과 공포에 의해 다양한 인간의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으로 사회가 구성된다.



[질서: 1.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


[C. 가치의 상대성] 인간은 육체가 달라 인식, 판단, 가치가 다르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보통 강한 쾌락이나 죽음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쾌락을 거부하거나 죽음을 수용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면 절대적이지는 않다. 모든 가치가 다르다는 것은 모든 힘의 작용도 다르다는 것이 된다. 힘의 작용이 다르면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으로 질서가 성립될 수 없었다.


보통 짐승 사회에서는 무력으로 지배하여 사회 구성원을 복종하게 하는 것으로 질서를 강제했다. 인간 사회도 비슷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지능이 높아 도구와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며 육체가 약하다. 약자가 순순히 복종하지 않고 도구를 들고 언어로 속여서 강자를 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독을 먹이거나 잠든 틈을 타서 살해하는 것은 10세도 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는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만들지 못하여 질서가 성립될 수 없었다.


[C. 원시 질서] 질서는 힘의 작용이 일정하여 혼란이 없어야 성립했다. 최소한 장소 A -> B 가는 것은 가능해야 했다. 그것을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장소를 지정하는 것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번개가 칠 때 공포에 질려 사방팔방으로 흩어질 수 있다. 질서가 없다. 그때 번개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을 알려준다면 그 동굴로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질서가 있다. 공포 -> 도피를 통해 힘의 작용이 일정하여 혼란이 사라졌다. 매우 원시적인 논리다. 공포에 질려 판단하지 않고 도피할 장소가 있으면 힘의 작용이 일정하게 된다. 조건은 판단하지 않음과 행동 지정이다. 가치 판단 없이 힘의 작용이 일정해진다. 응용 논리로 분노 -> 살해도 가능하다. 분노에 미쳐 달려들어 살해한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을 강제한다.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면서 규칙이 지켜진다. 그것으로 인간 사회의 원시 질서가 성립되었다.


[C. 가치의 절대성] 간단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규칙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규칙 중 하나가 지배와 복종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는다. 복종하면 산다. 공포 -> 도피 논리가 성립한다. 이 논리를 기초로한 질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식이다. 규칙을 어기면 죽는다. 규칙을 지키면 산다. 규칙은 처벌 수위는 다를 수 있지만 공포 -> 도피 논리를 벗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단순한 지배와 복종이 아닌, 특정한 가치를 기초로 지배와 복종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끼게끔 만들면서 부당하단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반역과 같은 질서 파괴를 방지했다. 힘의 작용이 강제되면서 그 규칙은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다. 금욕, 희생, 사랑, 증오, 행복, 생명, 죽음 등에 대한 가치 판단이 이뤄지지 않고 지정된 가치로만 판단되게 만들었다. 각각의 가치가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이 지정되었다. 판단이 작용하지 않으면서 힘의 작용도 일정하게 되었다. 가치 판단이 되지 않으니까 절대적 가치가 되고 절대적 가치니까 힘의 작용이 일정하여 질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포 -> 도피 논리를 지키는 것에 도덕이란 이름이 붙었다. 공포엔 악이란 이름이 붙었고 도피엔 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과 악은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특정 도덕의 주장과 그 도덕을 신앙하는 이들이 모인 것에 종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덕을 학문화한 것에 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두가 해야할 도피를 주장하는 것에 정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사물과 행위를 판단하는 것에 양심이란 이름이 붙었다. 거부해야할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지 않는 것에 죄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행위에 느끼는 감정에 죄책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포 -> 도피 논리에서 도피를 본인으로 지정한 것에 가스라이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각자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적 가치에 의해 힘의 작용이 일정하게 되면서 사회 질서가 성립되게 되었다.



원시 사회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을 통해 지배를 위한 공포 -> 도피 논리를 만들어 힘의 작용이 일정해지면서 사회 질서가 성립될 수 있었다. 이후 모든 도덕과 윤리는 공포 -> 도피 논리를 기초로 한다. 유교는 수기치인을 통해 권력을 윤리로 만들었다. 공포는 피지배, 도피는 지배로 설정되었다. 기독교는 유일신 교리를 통해 신앙을 윤리로 만들었다. 공포는 지옥, 도피는 천국으로 설정되었다. 윤리가 절대적 가치가 되지 않으면 강제로 절대적으로 만들었다. 유교는 권력 반역 처단, 기독교는 종교 이단 심문이다. 원시 사회의 질서였던 도덕과 그것을 학문화한 윤리는 지극히 원시적인 질서가 된다. 지금까지 인간 사회는 공포 -> 도피라는 원시 질서를 사용하여 지배와 복종이 기본적이었다. 왕의 지배에 필요한 절대적 가치는 금욕과 이타였다. 피지배자가 욕망을 절제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지배를 위한 힘의 작용이 일정하여 지배 질서가 깨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보편적인 윤리는 통상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된다.


유교는 수기치인을 통해 권력을 윤리로 만든 사상이다. 모든 사회에서 권력을 얻고자 하는 행동이 나타나나, 유교권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모든 사회 관계가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 안에 속한다. 신분 (왕과 양반과 평민과 천민), 연령 (연상과 연하), 성별 (남성과 여성), 지위 (정 1품에서 종 9품), 역할 (선비와 농부와 공장과 상인) 등 전부. 삼강오륜 등의 가르침이 이런 것을 체계화하였다.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는 국가와 죽음을 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그 외 국가를 약소국이라 깔보는 것이 중화사상. 그것을 따라한 것이 조선의 소중화사상. 죽은 자에게도 권력이 있어 권력에 따른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그것을 체계화한 것이 족보. 그것을 바탕으로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신으로 모신다. 


공포는 피지배, 도피는 지배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인간이 권력을 절대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미친듯한 교육열.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유교 서적은 대부분 가정에 비치되고 권력을 얻을 수 없는 학문은 거들떠도 안본다. 모든 국가 역량이 권력에 필요한 학문에만 집중된다. 유교의 권력 집착은 욕망이 아닌 공포에 의한 것이기에 판단하지 않고 달려든다. 뚜렷한 목적이 없이 우선 권력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절대적 가치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직접 무력을 사용하여 절대적으로 만들었다.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무시하면 그에 따른 폭력을 행사했다. 인의예지나 정은 권력에 따른 위계질서 내에서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한 아량이나 피지배자가 지배자에 대한 복종을 의미했다. 그런 질서를 통해 다툼을 줄인 것이다. 정이 있는 사회를 흔히 법 없는 사회라 하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회의 모든 결정권은 권력을 가진 인간에게 주어졌다. 권력은 국가와 죽은 자에게도 있었기에 왕조차도 마음대로 못했다. 강대국과 죽은 자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국가가 타국과 과거에 종속되었다. 권력자에게 결정권이 있었기에 권력자 판단에 따라 위계질서가 무시되는 일도 있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국가의 권력은 왕에게 있었다면 가정의 권력은 가장에게 있었다. 가부장제다. 가장은 가족 구성원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나 취미는 물론 진로나 성까지 전부 가지고 있었다. 가장이 결정권을 가지고 가족 구성원을 자유롭게 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권력을 얻기 위한 학습에 매우 강한 억압이 가해졌다. 학문을 하는 것을 강제한다. 그 외의 강한 억압이 바로 성이다. 성을 방치할 경우 가장의 의사와 무관한 이성과 결혼할 수 있는 것으로 권력 획득 수단으로 쓸 수 없음은 물론이고, 친족간의 성관계로 족보가 어그러져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망가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미리 이성을 갈라놓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해 결혼 전의 성관계를 방지했다. 가장에게 가족 구성원의 결혼과 출산의 결정권이 있었기에 그렇게 성을 터부시 하더라도 결혼과 출산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정권은 가장에게 있었으니 가장의 판단에 의해 가족 구성원의 자유 연애나 성관계도 가능하였으나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인간 사회는 공포 -> 도피 논리를 사용한 원시 질서 사회였다. 무섭게 해서 따르게 한다. 인류는 이외의 방식으로 질서를 구축한 경험이 없었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에 공포 -> 도피 논리에서 나타난 절대적 가치가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절대적 가치에 의한 일정한 힘의 작용이 충돌한 것이다. 전쟁과 평화, 유일신교와 다신교, 우파와 좌파 등. 그러다 자유 혁명이 일어났다. 소수의 지배자가 가졌던 주권을 모든 개인이 가지게 되었다.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되었다. 자유, 민주, 시장 등을 기초로한 개인주의 체제가 시작되었다.


자유 사회가 되었지만 원시 질서가 사라지지 않으면서 공포 -> 도피 논리를 통한 착취가 계속되었다. 영주가 농노를 착취하듯,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공산당원이 노동자를 착취했다. 둘 다 원시 질서였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유리했던 것은 공포 -> 도피 논리가 생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공산주의 체제는 평등하지 않으면 맞아 죽는다. 무엇이 생산성이 높을지는 명확하다.


[C. 문명 질서] 개인주의 체제는 자유, 민주, 시장 등을 기초로하여 논리적인 설계로 만들어졌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의사에 따라 물건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는가? 이러한 논리를 연구하면서 차근차근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하게 되었다. 과학 문명을 통해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스스로 질서를 지키려 하는 것을 가리켜 문명 질서라 하겠다. 원시 질서는 공포 -> 도피로 힘의 작용을 타인이 강제했다면, 문명 질서는 판단 -> 계약으로 힘의 작용을 본인이 강제했다. 핵심은 맹신과 의심. 판단하지 않음과 판단함이다. 간단히 말해 본인이 판단한 것을 지키는 것으로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만들어 질서를 성립시킨다.


[C. 존재의 절대성] 원시 질서는 가치의 절대성을 기초로 한다면 문명 질서는 존재의 절대성을 기초로 한다고 주장하겠다. 가치의 절대성은 판단하지 않고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긴다면, 존재의 절대성은 속하고자하는 판단이 있고 나서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긴다. 그 판단의 사회적 행위가 바로 계약이다. 그러면서 존재에 속하는 동안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으로 힘의 작용이 일정하게 되면서 질서가 유지되면서도 가치의 상대성은 성립되게 될 수 있다.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김에 따라 설득을 하기 위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보편적인 학문 진리로 여겨지는 과학적 증명을 기초로한 논리를 펼치게 된다. 


선거와 시장이 판단 -> 계약 논리를 통한 문명 질서를 기초로 한 제도다. 자아로 판단하여 수요와 공급에 의한 정부 권력 결정과 시장 가격 결정을 한 것을 따르겠다 계약을 한다. 그 과정에서 원시 질서에 의한 힘의 작용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기본은 문명 질서를 기초로 한다. 이것을 토대로 자본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와 시장에 초점을 맞춘 시장주의를 분리하겠다. 자본주의는 공포 -> 도피를 이용한 생산 체제라면 시장주의는 판단 -> 계약을 이용한 거래 체제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노동자로 생산하는 체제라면 시장주의는 모든 개인이 상인이 되어 거래하는 체제다.


존재의 절대성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존재 질서, 존재에 속하자고 한다면 존재 유지는 절대적이다. 존재 탐구, 존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존재 신용, 존재에 속한 신용은 판단하지 않고 신용한다. 존재는 모두 판단 -> 계약을 거쳐 이뤄진다.



그러나 원시 질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판단 -> 계약을 무시하고 공포 -> 도피로 체제 원리를 파괴한다. 부당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주권을 침해하고 시장을 훼손한다. 비리, 담합, 유착 등과 같이 체제를 부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원시 질서에 의한 힘의 작용이다. 원시 질서는 정의롭게 사회와 체제를 부쉈다. 특정 가치가 절대적이게 되면 그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모든 것은 정당화가 된다. 가족을 위한 정의로운 횡령과 탈세. 자녀를 위한 정의로운 자녀 살해. 종교를 위한 정의로운 사회 테러. 조직을 위한 정의로운 비리 감싸기. 집단을 위한 정의로운 가격 담합. 더구나 세계화가 되면서 다양한 절대적 가치가 공유되면서 변명거리가 매우 많이 늘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라니. 웃기는 소리다. 


원시 질서는 사회 자체를 망가트렸다. 자유롭게 되면서 대부분의 결정권은 개인에게 주어졌으나, 성과 학습의 결정권은 보호를 핑계로 권력자가 쥐게 되었다. 미성년 시기에 권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교육에 집중하고 성을 터부시한다. 권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성적 경쟁에 공포로부터 도피하듯 광적으로 하게 되면서 그 외의 욕망은 전부 제거되게 된다. 이성 관계를 멀리하는 것을 넘어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여성 사이에서 이성의 동성애가 유행한다. 


성년이 되고 나서는 결정권을 보장한다면서 직업과 결혼을 개인에게 맡겼다. 그러나 미성년 때 권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교육의 문제 풀이 외엔 잘 모르고, 성을 터부시하는 것으로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아 적극적으로 이성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가치 생산과 자유 결혼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미성년에게 학습과 성에 대한 결정권이 없어 미숙하게 성장하면서 부정적으로 배우면서 그에 대한 가치도 낮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경제 활동율과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행복도는 다소 오르게 된다. 직업과 가족의 미래 설계를 포기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어들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다소 행복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에는 미래가 없었다. 


이외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시장에 의해 돈이 권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역할도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돈의 가치가 굉장히 높아져 가족보다 돈을 우선하기도 하게 되었다. 이성을 정적으로 규정하고 권력 투쟁에 나선 여성주의가 유행하면서 여성의 권력이 높아짐에 따라 선호하는 아이의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달라졌다. 이성애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가치관에 따른 사랑보다 성적 발정이나 경제적 조건을 우선하는 일이 일반적이게 된다. 결혼이 강제되었을 때에 이성애는 집단의 이익실현 수단이었다면 결혼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 이성애는 개인의 이익 실현 수단이 되었다. 


원시 질서에 의해 사회에 이로운 일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아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사회에 이로운 일도 문명 질서를 통해 자아 판단으로 결정하여 행해야 한다.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면 된다.


왕정과 민주정은 체제가 아예 달라졌음에도 공포 -> 도피라는 원시 질서를 고집하면서 사회가 파탄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원시 질서가 절대적 가치로 우주의 법칙과도 같았기에 의심하지 못하면서 본질적인 사회 문제 원인을 알지 못했다. 힘의 작용을 이해했다면 사회 현상을 보는데 원시 질서인 윤리를 생략한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회 현상은 가치에 의한 힘의 작용을 고려해야 하고, 그 중 절대적 가치인 윤리에 의한 힘의 작용이 보통 매우 크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판단하지 않는다. 자유는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윤리에 의해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자아에 자유가 사라진다. 윤리에 의해 자아는 자유를 잃는다. 자아가 자유를 잃고 집단의 부속품이 된다. 윤리에 의한 전체주의가 나타난다. 자아의 자유를 막는 것이 바로 원시 질서이자 절대적 가치인 윤리다. 본질적인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포 -> 도피로 맹신하는 원시 질서에서 판단 -> 계약로 의심하는 문명 질서로 진보해야 한다. 






3) 자유 이념


[이념: 1.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



Q. 본질적인 자유 이념 실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본질적인 자유는 살아남아 능력을 키워 판단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현재 온전하게 가능한 것은 학문의 자유 말고는 없다. 학문의 자유는 자아 판단과 사회 환경이 갖춰져야 하는데, 자아 판단은 초기 호기심을 살리면 되고 사회 환경은 공교육을 살리면 된다. 생존의 자유는 죽음에 의해 불가하고 사상의 자유는 원시 질서에 의해 불가하다. 그렇기에 현재 인류는 본질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할 수 없다. 이것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불로와 불사가 되어야 한다. 생존의 자유는 당연히 가능해진다. 사상의 자유는 강한 공포인 늙음과 죽음 개념이 사라지면서 공포 -> 도피 논리가 성립되지 못하면서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하는 것으로 가능하게 될 수 있다.


[C. 양심 메커니즘] 현재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신앙, 습관, 이해 등으로 솔직히 너무 어렵다. 예를 들어 양심 메커니즘이 있다.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데, 그 가치에 무엇이냐에 따라 굉장히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이슬람권에서는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격분하여 때려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여성이 히잡을 쓰게 하는 근거인 쿠란의 교리는 절대적 가치. 그것을 기초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악을 행한 여성을 정의롭게 때려 죽였다. 이것은 이슬람권 외의 지역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유교권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 유교권에서는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보면 격분하여 때려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하게 하는 근거인 유교의 교리는 절대적 가치. 그것을 기초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악을 행한 연하를 때려 죽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포탈에 반말 살해를 검색해보길 바란다. 수두룩하게 나온다. 반말에 모멸감을 느끼고 살해했다고 한다. 이것은 히잡 원인 살해와 동일하게 양심 메커니즘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악을 처벌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행한 강박적인 살해다. 유교권에서는 이런 사건을 보면 반말에 모멸감을 느낀 것은 이해하지만 과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슬람권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을 보고 모멸감을 느낀 것은 이해하지만 과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유교권에서 이슬람의 히잡을 이유로 살해하고 히잡을 강요하는 것이 미개해 보인다면 다른 곳에서 유교권의 반말을 이유로 살해하고 존댓말을 강요하는 것도 미개해 보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박혀있는 원시 질서를 제거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생물 메커니즘에 의해 원시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발상이 계속되어 매일매일 정의로운 일을 행하며 사회와 체제를 파탄내고 있다. 더구나 늙음과 죽음으로 인생에 시간 한계가 있어 당장 하는 일 하나하나에 늙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작용할 수 있다. 지금 아니면 못한다고 생각하며 다급하게 공포를 느끼며 행동한다. 그러면서 원시 질서는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불로와 불사 같이 원시 질서의 근본을 파괴하는 일이 있어야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고령화도 불로와 불사가 필요한 이유가 된다. 의학의 발전으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에는 보통 60세에 죽었던 인간이 100세를 넘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늙음과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세상에 대한 가치가 달라진다. 기존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려 하거나 모든 가치를 버리고 느긋하게 살거나 세상을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면서 각국 정치는 극단주의화가 진행되게 된다. 그것에 의한 혼란으로 본질적인 자유가 멀어지게 된다. 과거 사망 시기인 60세부터 그런 상태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40년은 그런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이 된다. 과거와 다른 세상이 되었다. 통상 새로운 물이 흘러 세상이 바뀐다는 인식이 있다. 앞으로는 그게 어렵게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수의 영향이 크다. 세상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이제 오래된 물을 정수할 필요가 있다 보았다.



[불로불사: 1. 늙지도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함.]


[C. 유전은 기록의 재현] 늙음과 죽음이 없는 것을 불로와 불사라 한다. 통상 두 개념은 하나로 묶여 늙지 않으면 죽지도 않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늙음과 죽음은 세포 유전의 성질상 따로 봐야 한다. 원본 유전자의 돌연변이의 자연 선택이 진화라 여기기 때문에 통상 유전을 설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원본 설계가 자연적으로 나타나려면 그 과정이 기록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유전의 본질은 기록의 재현이다. 단지 지금은 어떤 이유로 더 이상 제대로 기록이 되지 않을 뿐이다. 유전은 기본적으로 세포의 움직임을 기록한 것을 재현한다. 자동적으로 분열하는 세포를 억제하여 기록만큼만 재현한다. 그것을 기초로 늙음과 죽음 개념을 보자.


노화는 유전 기록 재현이 끝난 이후 시작한다. 유전 기록을 다 재현한 후에는 이제 추가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현상 유지만 하다가 다양한 이유로 정상적인 세포 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위가 수축되는 것으로 주름도 늘고 기능도 저하된다. 인간 수명이 늘어도 성장기 노화는 일정하다고 하는데, 공통된 기록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노화가 인간마다 시기가 다르다며 처음부터 나타난다는 의견이 있는데, 성장이 빠를 수록 기록의 재현이 끝나는 시기도 빨라지므로 노화가 빠른 것은 당연하다. 


DNA 분석 결과 인간의 자연 수명은 38세 정도라고 한다. 아마 평균 생식 연령이 아닐까 싶다. 언제 기록이 멈췄는지 모르겠는데, 유전이 기록의 재현이라면 생식 연령까지 기록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폐경과 수명이 차이가 나는 것이 특별하다고 하는데, 기록의 재현이라면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그냥 그렇게 기록되었고 그렇게 재현할 뿐이다. 기록만큼 재현하고 재현에 필요한만큼 물질을 쓰고 나머지는 버린다.


죽음은 세포 분열 횟수에 의해 결정된다. 사고, 질병 등에 의해 사망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연사란 물리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할 때를 의미한다. 기록의 재현을 계속하여 지속적인 젊음이 유지되더라도, 세포 분열 횟수가 끝나면 사망한다. 


늙음의 경우 기록의 재현을 계속 하게 만들면 세포 분열 횟수까지 젊음이 유지될 수 있을 거라 본다. 죽음의 경우 계속 세포 분열이 가능하면 된다고 본다. 관련 개념은 엑소좀이나 텔로미어 등이 있다.


생물의 불사는 자연사를 막는다는 개념으로 완전한 불사는 아니다. 완전한 불사는 자아를 추출하여 데이터로 보관이 가능할 때 가능할 것이다. 물론 데이터 손상 및 분실 등의 이유로 실제로 완전한 불사는 불가능할 것이지만 완전에 가까워질수는 있을 것이다.


불로와 불사가 실현되면 사회 문제 및 윤리 문제가 있다고 한다. 사회 문제는 불로와 불사가 가능할 정도의 과학 기술과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면 웬만하면 대응이 가능하다. 윤리 문제는 애초에 윤리가 비과학적인 원시 질서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므로 과학적인 문명 질서로 진보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생을 걸고 생각해온 개념이 자유다. 중학생 때 자유 의지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깊게 절망하고 생을 자포자기한 후 자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왔다. 반드시 자유 이념을 실현하겠다.











2. 통찰


[통찰: 1.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2.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장면의 의미를 재조직화함으로써 갑작스럽게 문제를 해결함.]






1) 지식 본질


[지식: 1.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Q. 통찰이 불로와 불사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지식의 본질은 우주의 법칙이 아닌 인간의 인식과 이해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육체로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는 성립될 수 없다. 학문에 속하는 지식은 학문에 속하는 동안만 진리다. 그럼에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과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고 암기한다거나, 모든 것을 계산하여 알 수 있다고 여긴다거나 하는 것으로 지식 안에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지식에 없어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정체되었다.


수학은 어디까지나 세다라는 개념으로 수라는 블록을 쌓아 우주를 모방한 학문이다. 그것은 굉장히 위대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실험을 하며 관찰한 것을 수라는 블록을 쌓아 모방하여 재현한다. 그것을 공유하여 누구나 재현이 가능하면 증명이 된다. 그런 모방이 다양한 수식. 그것으로 만든 것이 현대 문명의 이기. 그러나 셀 수 있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셀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몰라서 셀 수 없거나 힘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아 셀 수 없을 때에는 계산으로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건물을 짓고 우주선으로 달에 갈 수 있어도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디지털은 0과 1을 조합해 만든 가상 세계. 처음부터 수학으로 만든 세계기 때문에 끊임 없이 발전한다. 반면 에너지는 우주의 법칙을 알아야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발전이 디지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상태라고 알고 있다. 전기 에너지는 아직도 터빈을 돌려서 생산 중에 있다.


소수의 법칙이 유명한데, 소수 자체도 세는 것을 좀 다르게 세는 개념이라 우주의 법칙에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소수 결과를 다른 방식으로 법칙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암호학 같이 애초에 인간이 만든 개념에는 의미가 있지만, 우주의 법칙을 아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통찰로 사물의 본질을 보고, 새로운 학문 진리를 알고, 새로운 발상을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이 나와야 한다. 그러지 않고 아는 지식 내에서 무작정 실험과 계산을 하다보니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은 발전이 더딘 상태다. 수많은 연구 결과가 나오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수를 가지고 어떤 것을 알려는 것은 블록을 해체하여 재조립하면서 무언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언가 나올 수는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를 수 있다. 무언가를 보고 논리적으로 발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발상이 나와 무언가가 논리적으로 알게 되면 그때 그것을 계산하여 재현하면 된다. 즉 통찰 -> 발상 -> 실험 -> 재현 -> 증명.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리로 언어 개념을 발상하는 것. 세는 것으로 수 개념을 발상하는 것. 세상을 보고 원자 개념을 발상하는 것. 떨어지는 물체를 보고 중력 개념을 발상하는 것. 빛을 보고 광전 효과 개념을 발상하는 것. 수 개념으로는 0의 개념, 사칙 연산 등의 발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는 개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고 지식을 암기하고 계산을 반복하면서 무언가가 나오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발상은 재능이나 우연에 맡기고 있다. 그래서 발상 단계에서 멈추는 바람에 실험, 재현, 증명 단계로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정체 중에 있다. 발상은 충분히 반복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을 키워 과학 발전을 해야 한다.






2) 발상 능력


[발상: 1. 어떤 생각을 해냄.]



Q. 발상 능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발상은 아는 것을 발상하는 것과 모르던 것을 발상하는 것으로 나뉜다. 통상 전자를 기억을 떠올린다고 하고 후자를 추론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발상을 기초로 알기 쉬운 구분으로 나누겠다. 전자를 기억 발상이라 하고 후자를 창의 발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창의 발상의 경우 통찰을 통해서 모르던 것을 발상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과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갑작스럽게 새로운 발상이 떠오른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자아 판단으로 결정된다. 발상을 자아가 판단해서 알고 있었다면 기억 발상이고 모르고 있었다면 창의 발상이다. 뇌에 정보가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계속 모르는 것을 발상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정말 새로운 발상이 나오고, 그 새로운 발상이 사회에서도 새로울 수 있다.


내가 발상을 할 때 필요했던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첫째, 관념.


고정 관념이 적은 것. (자아 나이 적음) 나는 아마 자아 나이가 13세에서 14세에 멈췄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자유 억압에 의한 절망을 겪다가 결정적으로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고 의사 표현을 못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 하고 살면서 자아 나이가 멈춘 것 같다. 살다보니 어느 순간 나의 취향이 또래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기에 자아 나이가 멈추면서 상대적으로 고정 관념이 적어 발상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둘째, 목적. 


목적이 있는 것. (자유 이념 실현) 망가진 시기에 겪은 자유 결핍으로 자유에 대해 일생 생각해왔다. 그래서 환경이 달라져도 목적을 가지고 계속 사상을 할 수 있었다. 사상을 하는 환경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정식 교과 과정으로 발상 능력을 키울 수 있다면 환경 문제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에 있어 나의 특수한 사정을 더하지는 않겠다.


셋째, 본질.


본질을 알려 하는 것. (통찰) 사상을 할 때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보려 매우 노력했다. 동물 조각상을 동물로 가정하고 발상하면 그 결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넷째, 발상.


새로운 발상을 한 것. (지식 과의존 탈피) 사상을 할 때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해보고자 했다. 직감적으로 의문을 풀기 위해 어려운 철학 저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잡아먹힐 것 같았다. 잡아 먹혀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냥 그래서 계속 모르는 것을 발상을 했다. 


다섯째, 논리.


논리적인 발상을 한 것. (체계) 학문 내에 진리로 여겨지는 과학적 증명이 된 사실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발상을 하려 했다. 논리적인 모순이 있으면 모순을 없애 새로운 발상을 한다. 그렇게 해서 논리를 구축한다. 그래야 체계를 갖춰 새로운 발상을 한 것에 추가적인 발상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충분히 나름 체계가 갖춰지면 그에 관련된 지식을 조사하여 일반적인 지식과 다른 점을 찾아 다시 새로운 발상을 했다. 


여섯째, 정보.


사회 저항이 적고 정보 수집이 쉬운 것. (디지털) 디지털은 익명이어서 위계질서가 없으니까 자유로운 정보 수집이 수월하다. 유교권에서는 그게 많이 도움이 된다. 다양한 정보를 어느때든 수집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달리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다.


일곱째, 보편.


공통 인식을 활용한 것. (사전) 사전이 있어 공통 인식을 통해 나의 발상과 비교하여 통찰하기 다소 편하다.


여덟째, 자아.


판단과 실행이 분리되어 있음을 이해한 것. (생물 메커니즘) 자아의 판단과 자아 외의 실행이 분리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발상이 나의 의지가 아닌 것을 알고 나서 발상 자체에 휘둘리기보다 그것이 왜 그런 발상이 나온 것이지 판단하면서 새로운 발상에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아홉째, 탐구.


인식과 존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 것. (존재의 절대성) 하늘 색을 보는 것과 하늘 색의 원리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전자는 인식 탐구, 후자는 존재 탐구라 규정했다. 하늘 색의 종류를 통계내더라도 하늘 색의 원리를 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과학은 통계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부 원리를 모르면 그것은 하늘 색을 통계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열째, 법칙.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언어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가치의 상대성) 곧잘 현상을 파악하는데 인간 위주로 알려 할 때가 있다. 인간의 언어 개념은 우주를 표현한 방식 중 하나지 우주 자체가 아니다. 특히 생물의 움직임에 인문 언어 개념을 부여해 의미가 있을 거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아는데 상당히 방해된다. 자연 계열에서는 지양해야 한다.



[행복: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모두가 행복하고자 하지만 행복이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냥 만족하고 기쁠 수 있으면 행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모아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 있으면 그게 행복의 원리다. 행복은 바라는 것을 이룰 때 느끼는 만족과 기쁨이다. 바라는 순간 결핍이 생기고, 생긴 결핍이 충족되면 행복을 느낀다.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행복하다. 배부를 때 밥을 먹으면 행복하지 않다. 이 둘의 차이는 결핍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배가 고프면 행복하고 배가 부르면 행복하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과 연인이 되면 행복하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연인이 되면 행복하지 않다. 이 둘의 차이는 바람에 의한 결핍이다. 같은 연인 관계여도 바라는 대상이면 행복하고 바라지 않는 대상이면 행복하지 않다. 그 외 모든 조건에서 동일하다. 결핍이 발생한 것이 충족되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행복하다 여긴다. 그러니까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행복 차이가 크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결핍의 충족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원리만 작동하면 누구라도 행복할 수 있다. 단지 부유하면 이 원리를 작동하게 하는데 수월해서 돈이 행복을 부른다는 인식이 있을 뿐이다. 행복의 원리는 결핍의 충족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유해도 불행할 수 있고 최소한의 의식주만 보장되면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돈은 재력으로 힘이므로 돈이 많은 것이 나쁠 이유가 없다. 힘은 보통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복의 원리가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자아. 


자아는 생물 메커니즘 자체가 아닌 생물 메커니즘에서 판단에 속한다. 인간의 의지보다 뇌파가 먼저 나온다는 리벳 실험을 보고 발상했다. 그 실험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발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아가 판단만 해야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었다.


둘째, 우주.


시간과 차원은 우주의 법칙이 아닌 인간 뇌내 개념이다. 시간은 인간이 인식을 보는 순서다. 그렇게 가정해도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었다. 시간이 상대적인 것은 그냥 인식 순서니까 인식할 수 있는 공간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 것뿐이다. 상대성 원리는 시간 개념을 절대적이라 가정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시간 개념이 무엇인지 따로 생각한 게 아니다. 


차원은 인간이 사물을 보는 관점이다. 그 외의 차원은 시간을 가정하고나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사물 외의 세계가 존재할 거란 가정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시간이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면 4차원은 없다. 4차원이 없으면 다른 차원도 없다.


셋째, 사회.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절대적 가치인 윤리는 비과학이다. 윤리는 공포 -> 도피 논리를 활용한 원시 질서인 도덕을 학문화한 것이다. 윤리가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그토록 윤리를 강조함에도 윤리에 의한 사회 문제가 나타날 것이란 생각 자체를 못한다. 옳은 일을 했는데 왜 잘못되냐는 식이다. 그렇기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순수하게 힘의 작용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넷째, 수학.


수학은 세는 개념을 통해 우주를 모방한 학문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있고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수학은 통찰, 발상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실험, 재현, 증명에 도움이 된다.


다섯째, 역학.


양자 현상은 열 이동이 없을 때 발생한다. 이중슬릿에서 입자가 너무 작아 열 영향이 없으면 파동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카메라를 넣어 촬영하면 열 영향이 생겨 입자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양자 현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초전도체는 꽁꽁 얼려 열 영향에서 벗어나면 저항이 없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정확하지는 않는데, 이중슬릿 실험에서 카메라에 의한 조건 변화는 열 말고 없었다. 조건은 열인 것 같은데, 그 외는 잘 모르겠다. 열에 의한 힘의 작용이 나타나지 않아 파동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다.






3) 실현 조건


[조건: 1.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갖추어져야 할 상태나 요소.]



Q. 실현 조건에 대해 알아보자.


불로와 불사의 실현 시기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길잡이가 빨리 가더라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통찰이나 발상이 되도 실험이나 재현을 통해 증명되지 않으면 진척되지 않는다.


목표 시기는 2025년 실험. 2030년 실현. 2040년 보편화. 일단 그보다 빨리 하려고 한다. 하다보면 되겠지.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가능한 빨리 해서 인류 진보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첫째, 이해 관계.


정부나 학문보다는 기업에서 주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와 학문은 다양한 이해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시장 원리는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결정으로 다른 이해에서 다소 자유로워 기업이 주도하기가 좋다. 앞에서 기업이 이해 관계로 나타나는 여론을 대응하여 정체를 막고 뒤에서 정부와 학문이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만약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 발전할 수 있다면 정부나 학문 또는 그 외라도 좋다.


둘째, AI 발전.


AI가 자아를 얻지 않더라도 반복 실험이 수월하여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AI가 자아를 얻으면 특이점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불로와 불사 실현에 도움이 된다.


셋째, 에너지 효율.


전쟁, 분쟁, 마약 등과 같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과학 발전에 투자해야 한다. 현재 인류는 기후 변화 등의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여 위기 상태다.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환경 보호를 말하며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있지 않고 과학 발전에 인류의 에너지를 최대한 넣어 발전을 촉진하는 것에 있다. 그런 것이 불로와 불사 실현에 도움이 된다.











3. 사회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은 소재와 가공처럼 영역이 다르다. 그렇기에 자연 계열을 탐구할 때 인문 언어 개념을 경계해야 하고, 인문 계열을 탐구할 때 자연 계열 법칙을 맹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 현상을 통해 불로와 불사의 필요를 알아보자.






1) 체제 변화


[체제: 1.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권력: 1.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이른다.]


원시 질서에 의해 권력이 지배와 복종 개념으로 되어 있다. 모든 개인이 권력을 가진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지배와 복종을 빼고 강제력 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면 될 것이다.



Q. 체제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힘의 작용 정리. (인간 -> 가치 -> 힘)


인간은 육체가 달라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해할 지능도 있어 힘의 작용이 각자 달라 그대로 두면 질서가 성립 불가하다. 그런 상태에서 공포 -> 도피 논리로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하여 질서를 성립시킨 것이 원시 질서다. 원시 질서는 공포 -> 도피 논리로 강자가 약자를 무섭게 하여 따르게 하기 때문에 통상 힘의 작용이 위에서 아래로 일어난다. 그것이 왕정, 신분제, 가부장제 등이다.


힘의 작용이 위에서 아래로 일어나는만큼 권력은 위에서 아래 순서대로 힘의 차이가 났다. 결정권을 권력자가 가지고 지배하는 것으로 질서를 성립시켰다. 특히 유교는 권력을 윤리로 만든 사상으로 모든 인간 관계가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 속에 있었다. 종교에서는 조상, 국제에서는 강국, 국가에서는 왕, 가정에서는 가장 등 다양한 권력자가 결정권을 가지고 지배했다. 사상, 학습, 성, 관계, 직업, 특기, 취미, 결혼, 출산 등 전부 윗사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때론 아랫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은 윗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없다.


조선이 한국이 되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주어지면서 모든 개인이 자기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원시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주권의 행사는 주권자의 국가 결정권과 자기 결정권의 행사가 아닌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행사가 되었다.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특정 인간에게 권력을 몰아주어 통치자가 되게 되었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 권한은 원시 질서를 근거로 한다.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인간도 결국 삼권 분립의 강화 또는 진영의 권력 강화를 주장할 뿐이지 실질적인 질서 변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바뀌어봤자 귀족적 의회제로 바뀔 뿐이다. 이런 것은 절대적 가치로 의심조차 못하는 영역이다.


원시 질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성년에게 선거권이 있어 선거철만큼은 민주주의가 성립되었다. 그것에 의해 조선에 비하면 개인에게 상당히 많은 권리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양심 메커니즘에 의해 반말을 들으면 종종 살해가 발생할 정도로 아직도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살아있다. 현재 한국 사회 내 수많은 차별은 대부분 원시 질서에 의한다. 연령, 성별, 인종, 직업, 학력, 지역, 빈곤 등 차별이 만연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원시 질서인 윤리에 의한다. 당연하다. 권력에 의한 차별이 윤리였던 조선의 윤리인 유교를 논리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한 차별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그것에 의해 규제, 검열, 억압은 자유 국가 중에서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나마 자유로워진 것은 디지털의 영향이 매우 크다. 디지털 내에서는 익명일 경우 원시 질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권과 디지털의 영향으로 성년의 권리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성년은 많은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사상, 학습, 성, 관계, 직업, 특기, 취미 등 원시 질서의 관성으로 법적으로 억압되는 것이 남아있으나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성년은 아니었다. 미성년 보호를 명분으로 대부분 결정권이 보호자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사상을 검열하고 학습을 주도하고 성을 억압하고 관계를 간섭하고 직업을 결정하고 특기와 취미에 개입한다. 대놓고 스마트폰 감시를 할 정도로 미성년에게 결정권은 없었다. 그렇게 결정권을 빼앗은 것이 보호가 명분이기 때문에 되려 인권이라 포장했다. 피지배되는 것이 인권이 된 것이다. 이는 선거권이 없는 것이 크다. 성년은 선거권과 디지털로 결정권을 상당수 확보했는데 미성년은 선거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리 분별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년은 사리 분별을 못하더라도 선거권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미성년에게 선거권이 없는 것은 원시 질서가 원인이고, 결정권이 없는 것은 선거권이 원인이다.


사상 - 미성년의 가치관을 위해 강제로 개입.

식사 - 미성년의 건강을 위해 강제로 개입.

학습 - 미성년의 장래를 위해 강제로 개입.

성 - 미성년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강제로 개입.

정치 참여 - 미성년의 미숙을 이유로 강제로 개입.

관계 - 미성년의 친구를 골라 사귀게 하기 위해 강제로 개입.

폭력, 도박, 마약 - 미성년의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로 개입.

기타 사생활 - 미성년을 보호하기 위해 강제로 개입.


미성년의 결정권은 보호자에게 있었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결정권을 허용하는 선은 보통 사회 분위기를 따라갔다.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면 허용했다. 성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면 허용하지 않았다. 기독교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면 허용하고, 기독교 성 엄숙주의에 의해 성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면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나 유교의 지배에 의해 미성년에게 성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게 되게 된다. 보호자마다 태도가 달랐기에 피보호자인 미성년도 결정권이 달랐다. 보통 보호자가 허용하지 않는 결정권은 학습, 성, 정치 참여, 범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회는 파탄났다. 미성년 때 결정권을 행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성년이 되어 결정권을 행사하려고 하니 할 줄 몰라서 안하게 되는 것이다. 학습은 권력 획득을 위한 문제 풀이 말곤 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성은 터부시 되어 성에 관련된 것이 전부 규제 검열 억압이 되는 것으로 성년이 되고서도 이성 관계를 부정적으로 볼 정도가 되어 현재 20대 초반 연애율은 26% 정도다. 정치 참여를 해본적이 없어 투표도 제대로 안한다. 범죄의 경우는 관련한 것을 무조건 막기만 해서 아예 대응 방식을 몰라 이용당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파탄난 것이다.


힘의 작용으로 보면 이렇다. 미성년은 원시 질서를 크게 강제하면서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성년이 되고 나서도 원시 질서를 크게 강제하면서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만들었다. 권력자가 결혼, 출산, 직업 등을 결정하여 강제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돌아갔다. 현재는 성년이 되고 나서 원시 질서를 크게 강제하지 않으면서 성년 스스로가 다양한 것 결정하게 되면서 힘의 작용이 사방팔방 일어나게 되었다. 성년은 결혼, 출산, 경제 활동 등을 할줄 몰라서 하지 않거나 가치관에 따라 하지 않게 되었다. 


가치관은 돈이 권력이 되면서 돈을 버는 행위에 공포 -> 도피 논리가 적용되면서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포자기하고 무기력하게 살게 되었다. 욕망은 대부분 제거되고 공포에 의해 돈에 집착하거나 공포에 의해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에 의해 힘의 작용이 일정할 수는 있어도 그게 사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랑을 매매하는 상대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사회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결정권을 줄 거면 미성년 때부터 다 결정권을 행사하는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고, 결정권을 주지 않을 거면 성년 때에 일과 짝 등을 전부 정해줬어야 했다. 본인 인식으로 사물을 볼 게 아니라 힘의 작용을 이해하길 바란다. 가치와 질서를 이해하면 경제 등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시 질서에서 폭력이나 살해 같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도록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공포를 느끼는 인간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잡아먹힌다. 이는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학교 폭력, 가정에서는 가정 폭력, 사회에서는 범죄. 원시 질서는 공포로 따르게 하는 것으로 약자로 만들어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에게 잡아먹일 수밖에 없다. 폭군에 지배되는 인간이 윤리에 의해 저항하지 못하는 것처럼 난폭한 학생에게 지배되는 인간이 윤리에 의해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윤리를 강조하며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직접 팔 다리 부러뜨리고, 그것으로 누군가에게 괴롭힘 당한 것을 보고 화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윤리가 절대적 가치다보니 학교 폭력이 나타나면 보다 더 학생에게 윤리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양극화는 더 심해진다. 보다 공포가 강하게 심어진 인간은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 타인이 상처입을 것을 과하게 두려워하면서 관계를 아예 포기한다. 본인이 상처 입을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타인이 상처 입을 것이 두려운 것이다. 공포, 타인을 해치지 말아라. 도피, 타인과 만나지 않는다. 한국인이 과도하게 겸손한 것은 공포로 겸손으로 도피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공포에 의해 만들어진 약자들이 늘어나면서 공포를 무시하는 인간은 더 난폭하게 된다. 그러면서 미성년 강력 범죄는 늘어난다. 윤리를 강조할수록 약자가 늘어나면서 사회 활동이 감소하는 것으로 범죄율은 감소하나 그런 약자를 잡아먹는 인간이 보다 과격해지면서 강력 범죄는 늘어난다. 윤리에 의해 심어진 공포로 약자가 된 인간은 폭력뿐만 아니라 공포 -> 도피 원리를 활용한 불법 종교, 사기, 공갈 등에도 취약해진다. 애초에 윤리가 공포로 약자로 만들어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자연스럽다.


난폭한 미성년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성년은 결정권이 없어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대응 자체를 못한다. 그걸 아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 미성년은 대놓고 법을 악용한다. 촉법이니까 형사 처벌 받지 않지? 고3이니까 처벌 수위 낮지? 공포를 느끼지 않는 미성년을 보고 보다 더 윤리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 터부시는 더욱 더 강해진다. 공포를 느끼는 미성년은 더욱 억압된다. 재미있는 상황이 되었다. 윤리 영향이 크면 범죄율은 줄어드는데 연애율도 줄어든다. 윤리 영향이 적으면 범죄율은 늘어나는데 연애율도 늘어난다. 무슨 성을 범죄마냥 취급한 결과 범죄와 연동되게 되었다.


원시 질서가 원래 그렇다. 무섭게 해서 따르게 한다. 그런데 무서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무섭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질서가 붕괴한다. 그런데 더 무섭게 하면 개인의 권리가 하나씩 침해된다. 원시 질서를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 때문에 무서워하는 인간의 권리는 더더욱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왕정이라면 어차피 왕과 일부를 제외하면 주권이 없었으니까 문제가 크지 않다. 그러나 민주정이라면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으므로 개인의 권리 하나씩 파괴되는 것으로 체제 붕괴가 되게 된다. 원시 질서는 존재만으로 개인주의 체제를 파괴한다. 이런 질서로는 결코 자유 이념이 실현될 수 없다.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 신분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원시 질서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온갖 형태의 차별은 기본적으로 원시 질서를 기초로 한다. 한국에서 돈의 가치가 높은 것은 돈이 권력을 얻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는 국가와 죽음을 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미국의 영향이다. 돈의 가치가 높아진 것은 최강국이 돈의 가치를 보장하는 시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강국의 힘의 상징인 돈의 가치는 국가 권력에 의해 부풀려진다. 지극히 유교적인 상황이다.



양심 메커니즘을 이해했다면 성을 터부시한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이제는 알 것이다. 이성 관계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리상 자연스럽다. 성 터부시는 남녀칠세부동석과 여성의 정조 관념으로 정조 관념에 의해 특히 여성이 더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여성은 이성 관계에 있어 수동적이게 된다. 요즘 용어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보호자 동의 없이 성관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 가스라이팅 한 것이다. 정조를 지키지 않는 것은 죄다. 그게 강하게 주입할수록 비틀린 욕망이 표출되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이성의 동성애 창작물을 즐기는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유명하다. 이성 관계가 죄다 보니 이성의 동성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인간이 이성 관계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창작물, 아이돌, 짐승 등으로 욕구를 충족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유사 연애 산업을 즐겨서 이성 관계가 멀어진 게 아니라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 관계가 멀어지니까 유사 연애 산업을 즐기는 것이다.


가부장제 가치관을 가진 여성주의자들이 이성과의 성관계에 죄책감을 느끼니까 여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 상품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같은 가부장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그런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여성 정조 관념과 여성 권력에 의해 남성 성적 대상화나 남성 성 상품화에는 또 반대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남성이 여성 성 상품화를 즐길 수 없고 여성이 남성 성 상품화를 즐길 수 있다 하여 이것을 남성 차별로 보면 안 된다. 생산자가 생산을 하지 못하도록 억압을 받자 소비자가 소비를 못하는 것을 보고 이걸 소비자 차별로 보면 어떻게 하나. 여성성이 억압 받으니까 남성이 소비를 못하는 것이고 남성성이 자유로우니까 여성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이성 관계가 되기 어려웠다. 과거에는 권력자가 결혼과 출산을 다 결정해버려서 판단하지 않고 가부장제에서 지배되며 그냥 살았다. 현재는 권력자가 결정하지 않았으면 스스로 그걸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미성년 때 성관계를 다 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했어야 했는데 윤리라면서 성을 터부시하면서 성에 관련한 모든 것을 다 규제하고 검열했다. 윤리를 절대적 가치로 인식하지 않으면 이 과정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저출산은 그냥 윤리에 의한 결과다. 학생일 때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여성의 정조 관념을 주입하며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막지 않고 권장하여 이른 결혼을 하게 했다면 대부분 연애 결혼하고 출산했다. 


체제 적응 실패로 사회 파탄난 것뿐만 아니라, 원시 질서에 의해 체제의 가치는 망가졌다. 자유주의 체제는 자유가 억압되고 민주주의 체제는 주권이 침해되고 시장주의 체제는 시장이 훼손된다. 체제에 속하기로 판단한 이상 체제 가치를 기준으로 정책과 제도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윤리를 기준으로 정책과 제도가 나왔다. 정의롭게 자유를 억압하고 정의롭게 주권을 침해하고 정의롭게 시장을 훼손했다. 윤리에 의해 피해를 받는 인간조차 그게 윤리 때문인지를 몰랐다. 윤리에 의해 규제되고 검열된다. 윤리에 의해 결정권을 빼앗긴다. 윤리에 의해 비리와 담합이 정당화된다. 권력이 달라지고 디지털이 있어 성년의 결정권이 많이 보장되어도 사실상 한국은 아직 윤리에 의해 유교 사회, 가부장제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2) 사회 인권


[인권: 1.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 [권리 1.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 



Q. 인권과 권력의 차이를 알아보자.


민주정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인권이란 주권의 온전한 행사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 그것을 통해 국가에 속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 어떤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방법을 아는 것은 필수적으로,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통치 교육은 필수적이다. 자아, 가치, 질서, 체제, 체계 등에 대한 교육을 했어야 했다. 자유와 민주와 시장 등을 알게 했어야 했다. 윤리로 두렵게 하는 게 아닌 사회 계약을 하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되었어야 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주권자를 통치자로 보고 있지 않다. 원시 질서에 의해 민주주의 체제를 왕이 백성을 궁휼히 여기듯이 윗사람이 아랫사람 보살펴 권리를 보장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냥 체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원시 질서를 가르치며 말만 잘듣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정권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게 아니라 입시 교육만 하면서 대학과 직장에 잘 가기만 하려고 하고 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현재 정치 권력을 가진 인간이 일제히 사표를 내도 즉각 대체가 가능할 정도로 모든 개인에게 사회와 체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그냥 왕을 뽑는 권리를 주는게 민주주의라 생각하니,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귀족적 의회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민주정과 독재정을 비교하면서 현명한 독재자가 차라리 나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주권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다.


현재 주권자는 통치 교육을 받지 못하여 정상적인 주권 행사를 할 수 없으므로 정상적인 주권이 있다 하기 어렵다. 주권은 인권의 기본이므로 정상적인 인권이 있다 하기 어렵다. 원시 질서에 의해 유교 사회에서 권력만 분산되고 기술이 발전된 형태가 현재 한국이다. 그것으로 선거권이 있는 인간은 다소 자유로워진 것. 선거권이 없는 미성년은 아직도 지배되는 것. 디지털 내에서는 잠시 동안 원시 질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 이것을 기초로 사회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인권이 없다면 도대체 인권 운동이란 무엇인가? 권력 투쟁이다. 현재 대부분 인권 운동은 인권 운동이 아닌 권력 투쟁이다. 인권과 권력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고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통상 권력을 가지고 인권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권이 목적이고 권력이 수단이어야 하는데 반대다. 인권이 수단이고 권력이 목적이다. 지극히 유교적인 상황이다. 그러니까 인권은 그대로인데 권력만 높아지고 있다.



노동 인권 운동의 본질은 자본가를 정적으로 규정한 노조 권력 투쟁. 노동자를 지배하던 생산 제도에서 노조 권력만 높아진 결과 - 귀족 노조.


여성 인권 운동의 본질은 이성을 정적으로 규정한 여성 권력 투쟁. 가족 구성원을 지배하던 가부장 제도에서 여성 권력만 높아진 결과 - 1등 시민. 


미성년 인권 운동의 본질은 보호를 명분으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보호자 권력 투쟁. 미성년을 지배하던 교육 제도에서 보호자 권력만 높아진 결과 - 금쪽이.


귀족 노조와 1등 시민과 금쪽이는 내가 붙인 게 아니라 세평이다.



노동 인권 운동은 현재 생산 제도는 그대로 두고 노조 권력을 통해 이익을 얻을 권리만 주장해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노조 권력이 커지기만 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높은 임금과 우수한 복지가 주어지고 있고 중소기업, 비정규직, 파견 등은 여전히 낮은 임금과 빈약한 복지가 주어지고 있다. 애초에 노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노조가 없어도 모든 개인은 마땅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조는 단지 담합의 규정화로 일부 노동자만 이익을 볼 뿐이다. 노동 시장의 계약은 간단히 단기 계약과 장기 계약으로만 있으면 된다. 그 계약을 돕는 기관과 계약의 강제력이 높으면 된다. 



여성 인권 운동은 현재 가부장 제도는 그대로 두고 여성 권력을 통해 이익을 얻을 권리만 주장해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여성 권력이 커지기만 했다. 가부장제에서 미성년이 천대되었듯이 여성도 천대되었다. 여전히 여성은 천대되고 있다.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배려와 보호를 말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 진출에 불리해졌다. 왜 힘들고 어려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권리 침해인지 이해하려면, 교육으로 이해하면 된다. 교육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이 개인의 권리다. 여성주의자들은 원시 질서에 의한 양심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가부장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그런 취급하는 여성성을 성인지 감수성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라고 강요하고 다녔다.


여성가족부의 존재 이유는 가부장제에 근거한다. 가정은 여성의 역할이란 가부장제적 고정 관념의 결과다. 그런데 여성주의는 이성을 정적으로 규정한 권력 투쟁이다. 대놓고 남성 권력과 싸우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여성 인권에는 관심이 없다. 여성이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정치 참여가 높은 세대에 관심을 주고 고위직 할당 등을 한다. 그렇기에 가정에 속하는 문제는 전부 여성 권력 획득 수단이 된다. 그러면서 어느 것도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못한다. 단적으로 저출산 문제 해결하라니까 비혼 주장하고 다니지 않았는가. 그것을 여성 인권 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라 여성 권력 문제로 접근하면 이해를 할 수 있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은 남성을 권력 투쟁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성 혐오가 아닌 정적 혐오로 보면 된다. 흔히 신세대는 남성 인권이 낮고 여성 인권이 높다고 하면서 불평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 인권은 높고 젊은 남성 권력은 낮다.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 인권 자체는 높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의하여 정적으로 규정된 젊은 남성 권력은 낮은 상태다. 반대로 여성 인권은 낮고 젊은 여성 권력은 높다.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 인권 자체는 낮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의하여 주류인 젊은 여성 권력이 높은 상태다. 


대상 전체가 인간으로서 권리가 보장되느냐와 특정 대상이 권력이 높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노예 계층에서 특정 누군가 힘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른다고 그 노예 계층의 인권이 높은 게 아니다. 신분제 두고 노예에게 이익 준다고 인권 보장된 게 아니란 말이다. 인권과 권력의 차이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인권이 낮으니까 여성 징병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가부장제 가치관으로 여성을 남성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이다. 모든 혜택이나 복지 지원 등 전부 기본적으로 가부장제를 기초로 한다. 스윗한게 아니라 가부장적인 것이다. 거기에 여성 권력이 더해지면서 과도한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체제에 합리적어야 한다. 할당제를 할 게 아니라 우수한 교육을 해야 하고, 여성 징병 하지 않을 게 아니라 여성 1%가 징병이 되더라도 일단 제도적으로는 구축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이걸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 성별 갈등은 적대 당의 정치 공작에 의한 정당 갈등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놓고 여성주의가 남성 권력과 투쟁하겠다고 외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것이 인권 운동이라 주장한 것에 휘말려 현상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가 대응을 못한 것이다. 권력 투쟁 중인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권력을 주니 권력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럼에도 이것이 정쟁임을 이해하지 못하여 젊은 남성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당했다. 수많은 여성 혜택은 정쟁 승리의 결과물이다. 그러면서 이성 관계는 더욱 파탄났다.



미성년 인권 운동은 현재 교육 제도는 그대로 두고 보호자 권력만 높아졌다. 애초에 미성년은 성년보다 인권이 없다. 인권은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인데 그것이 보호를 명분으로 지배하면서 결정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촉법 등의 문제로 미성년이 강한 권리가 있어 보일 수 있는데, 미성년에게 인권이나 권력이 있는게 아니라 미성년 문제를 다루는 보호자에게 권력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결정권. 누군가 이익을 본다고 인권이나 권력이 있다 여기면 안된다. 결정권을 기초로 봐야 한다.


미성년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적게 받아 제멋대로 한다고 해서 권력이 높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정권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데 어떻게 권력이 높을 수가 있겠는가. 보호하겠다며 지배하는 지배자 권력이 높지. 권력이 낮으니까 순장되듯 동반 자살을 위해 살해되고 부부싸움에서 장난감처럼 집밖으로 내던지게 되고 재미로 짖밟히고 되는 것이다. 현재 미성년 위치가 키우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결정권이 보호자에게 있으니까 보호자 권력에 의해 미성년이 보호가 될 수도 있고 장난감이 될 수도 있다. 보호자가 미성년을 짐승과 대등하게 키우는 일이 있어 인간 아이와 짐승 아이로 구분하고, 짐승을 더 아끼는 사례도 있을 정도다. 보호자가 짐승을 인간 취급하면 인간이 되고, 미성년을 짐승 취급하면 미성년은 짐승이 된다. 이러다보니 보호자 없는 미성년은 제대로 살기 어려우나, 때로는 차라리 보호자가 없는게 살기 쉽다.


진짜 개인을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 봤으면 정치 참여 교육을 위해 적어도 2차 성징이 시작하는 10세부터 선거권을 주고 체제 교육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도 모르고 민주도 모르고 시장도 모른다. 생산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정치도 모른다. 성을 알려 해도, 일을 하려고 해도 무조건 막는다. 보호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결정권이 없어 일방적으로 지배될 뿐이다. 그러다보니 그저 원시 질서로 말을 잘 듣게 하고 입시 교육만 한다. 물론 보호자마다 다른 걸 가르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그렇기에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중이다.


검열 기관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우습다는데, 권력을 기초로 보면 자연스럽다. 권력이 높으면 검열이 적고 권력이 낮으면 검열이 많다. 그냥 권력이 윤리라는 것을 알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검열 기관은 성을 터부시하며 정의롭게 규제하고 검열하면서 성 관련 가치를 망가트리는 것으로 정의롭게 국가를 자살시키고 있다.



인권 운동이 권력 투쟁이 되면서 인권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면서 권력을 얻기 위한 과대 포장이 발생했다. 분식 회계하듯이 가치를 부풀려서 보다 높은 이익을 얻는다. 그것을 통해 권력을 늘린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난이도가 높아진다. 허들이 높아진다. 참여율이 감소한다. 노동 참여율이 감소한다. 결혼 및 출산 참여율이 감소한다. 보호자를 상대하는 교육 기관 및 의료 기관 참여율이 감소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에서 여성 권력을 얻기 위해 전통적으로 여성이 하던 일을 과하게 어렵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월 500만원 또는 전체 500조원에 상당한다는 듯이 말이다. 남성이 가사 노동을 하면 논다고 비하하면서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건 또 엄청 가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것으로 과한 이익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통해 여성 권력을 늘려나간다. 그러면서 가사, 육아, 교육 전부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허들이 높아져 참여율이 감소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난이도와 비용을 낮춰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 관련된 것은 여성 권력을 높이기 위해 난이도와 비용을 되려 높였다. 가사는 월 500만원 이상의 가치고, 결혼은 무조건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고, 출산은 무조건 2주 400만원인 산후조리원에 가야 하고, 육아는 잠깐 자거나 자리를 비우는 것도 허락받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고, 교육은 무조건 높은 교육비를 써야 하는 일처럼 만들었다. 엄청나게 어렵고 힘들며 사회에 공헌하기에 그걸 하는 본인이 위대하고 고상하여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엄청 권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미성년 보호자를 상대하는 교육 기관과 의료 기관이 기겁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러면 당연히 참여율이 감소한다. 


그럼에도 여성 권력을 위해 이것을 막기는커녕 이런 것을 위해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복지를 지원해도 여성 권력을 위해 난이도와 비용은 거기에 맞춰 더 오를 수밖에 없다. 한없이 오르는 난이도와 비용에 의해 국가 세금은 한계에 도달하고 참여자는 더더욱 줄어든다. 과도한 난이도와 비용에 매달리면 사회가 버티질 못한다. 난이도와 비용을 낮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여성주의는 권력을 성별로 차지할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차지해야 한다. 


의료와 출산은 권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가치를 부풀려져 둘 다 난이도와 비용이 높은 상태다. 보통 의사는 이익이 높아 선호되고 그 중에서 난이도와 비용 대비 이익이 높은 과에 몰리고 낮은 과는 기피된다. 보통 임산부는 성 터부시에 의해 아기, 육아 등의 가치가 낮아져 이익이 높지 않아 기피된다. 


얼마나 성, 이성, 성애, 그것을 통한 결혼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떠들고 다녔으면 여고에서 출산하겠다는 이가 적고, 출산하더라도 여성 아이를 원한다는 의견이 많다. 여성 권력에 의해 이것을 방치 하기는커녕 적극 지원했으니 저출산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한국 저출산은 간단하다. 성 터부시 + 미성년 결정권 없음 + 성년 결정권 있음에 의한 것. 거기에 이성을 정적으로 규정하고 여성이 하는 일을 권력 투쟁 수단으로 삼으면서 난이도와 비용을 올리는 것으로 저출산이 확정된 것이다. 자유로워지면서 출산율이 2가 넘다가 1이 되었고 여성 권력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1이 넘다가 0.7이 되었다.


자꾸 돈, 경제, 부동산, 수도권 집중 이런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은 힘의 작용에서 결과에 위치한다. 가치가 힘의 작용을 결정하는데 왜 힘의 작용에 의한 현상을 말하는건가. 결혼과 출산에 가치를 못느끼면 200만원 벌던 인간이 300만원을 벌면 취미 비용 생기는 거고, 300만원 벌던 인간이 400만원 벌면 집살 돈 생기게 된다. 한 500만원 이상 벌면 다른 거 다 하고 결혼해볼까 생각이 들게 된다. 이게 지금 결혼 가치가 높아서 그런 것 같은가?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인간이 결혼을 하는 것을 보고 가치가 높은 거라 착각하는데, 가치가 낮으니까 부유하고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짐승용 유모차 판매량이 인간용 유모차 판매량의 두 배가 되었다고 한다. 짐승 키울 돈은 있고 아기 키울 돈은 없다. 이것은 짐승 애정은 있어도 아기 애정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다 성 터부시하고 이성 관계 박살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도대체 명품 소비율 1위 국가에서 무슨 경제 타령을 하는 것인가. 아이돌 보러 갈 돈과 시간은 있고 연애할 돈과 시간은 없다. 여행 다닐 돈과 시간은 있고 결혼할 돈과 시간은 없다. 집 살 돈은 있어도 애 낳을 돈은 없다. 이게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가치관 때문이 아닌가!



낚시를 예로 들어보겠다. 낚시 하기 싫은데 자꾸 하자고 꼬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건이 붙는다. 대신 비용은 네가 다 내. 낚은 거 팔아서 내가 사고 싶은 거 사자. 나 잘테니까 운전해. 하기 싫은 걸 하라니까 난이도와 비용이 높아지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이유는 애초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남녀칠세부동석과 여성 정조 관념으로 가치관이 부정적으로 되어 공포를 느끼고 하기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이 눈이 높아진 것의 본질은 SNS가 아닌 성 터부시에 의한 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다.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늘어나는 것이다. 하고 싶었으면 헌팅하는 남성과 같이 마음 편하게 애정을 느끼는대로 적극적으로 성관계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게 되어 있다.


하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사람들 보고 환상만 갖는다. 하고 싶지 않으니까 더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하고, 그 조건이 충족되는 인간이 나타나기만을 바란다. 이런데 얼마나 임금 올리고 육아 참여 늘려야 해결되겠는가? 최저임금을 월 500만원 주고 남성 육아 참여를 하루 8시간 강제해야 하는가? 그러면 사회 파탄난단 말이다. 가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가치 개념을 이해해야 이걸 이해할 수 있는 거고, 눈 앞의 이익을 위해 관광지나 시장 가치 폭락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같은 저출산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랬으면 인간은 진작에 멸종했다. 그냥 나둬도 알아서 번식하는데 그게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다. 그게 바로 윤리다. 저출산 일어나도록 열심히 성 터부시하며 야한거 검열하고 미성년 성관계 못하게 장소 막아대고 성교육 반대하고 뭐 다 해놓고 모른채하는가? 만화에 약간의 노출만 나와도 검은 칠해버리고, 스팀에 올라온 성년이 즐기는 게임조차 차단하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해서 원하는대로 보호자 눈 밖에서 미성년이 멋대로 연애하고 성관계하고 결혼하는 거 막았잖는가? 그렇게 해서 성년이 되고서도 보호자가 짝을 지정하며 강제하지 않으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게 되지 않았잖는가? 원하는대로 되었는데 왜 불만을 가지는가?


노출이 있는 간판에 발작하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여성에 발작하지 않았는가? 성적인 예술에 발작하고 성적인 창작물에 발작하지 않았는가? 포르노와 성매매를 막으며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하지 않았는가? 양심 메커니즘에 의해 정의롭게 성을 다 부정하고 다니지 않았는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만 해도 처벌하라 외치고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악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미성년은커녕 성년조차 성적 자유를 누리면 문제가 심각하다 떠들지 않았는가? 여성이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기 위해 꾸미는 것도 죄악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내가 남편에게 도시락 싸주는 것도 노예라 말하며 비난하지 않았는가? 여성 성년조차 그루밍이니 가스라이팅이니 말하면서 이성 관계에서 일방적 약자로 만들어 대등한 이성 관계를 막지 않았는가? 현재 저출산은 그냥 권력이 원하는대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에서 원시 질서로 연상에게 반말하는 것도 두려움에 가질 정도로 일상적인 공포 속에서 덜덜 떨며 도피하게 만든 결과가 바로 사회의 죽음이다. 유교 질서에 맞는 정의로운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부정하고 위아래 없는 사악한 평등을 긍정하려고 했으면, 체제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어야 했다. 가치와 질서 개념을 이해했으면 미성년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성을 알고 즐기게 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기능이 작동하는 시기부터 가져야 한다. 2차 성징이 되면 바로. 그래야 성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이성 관계를 맺으며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그러지 않고 유교의 가르침대로 정의롭게 개인의 성을 지배하려고 하니까 다 파탄났다.



[C. 민주적인 정교일치] 이란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군사 독재가 끝나자 신정 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주적인 정교일치 사회다. 국민 대다수가 정교일치를 주장하면 민주적으로 정교일치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교에 의한 개인 권리 침해가 발생한다. 이는 윤리도 동일하다. 윤리 자체가 종교에 의한 것이 많다는 것을 상기하자. 개인이 윤리를 강조할수록 민주적으로 윤리에 의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곧 정교일치 사회라는 것이 된다. 현재 한국의 억압은 민주적으로 유교 정교일치가 일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한다. 국민 스스로가 규제하고 검열하면서 정의로운 국가 자살을 민주적으로 행하고 있다. 이 현상은 많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정교분리가 되려면 원시 질서에서 벗어나 문명 질서로 진보해야 한다.






3) 질서 진보


[진보: 1.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Q. 질서의 진보와 그에 따른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하려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 공포 -> 도피인 질서 원리에서는 강제되는 공포를 기초로 힘의 작용을 제어했다면 판단 -> 계약인 문명 질서에서는 자유로운 판단을 기초로 힘의 작용을 제어해야 한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기존처럼 무섭에 하기만 하면 잘될 거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이하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분 못하고 절대적 가치를 마치 선천적인 것마냥 취급할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이해하고 질서를 바꾸는 진보를 해야 한다.


현재 많은 이들이 희생하는 일을 포기하고 돈을 많이 주는 일을 하러 가고 있다. 이는 공포 -> 도피인 원시 질서가 판단 -> 계약인 문명 질서로 변화하는 흐름보다는 돈이 권력이 되자 윤리에 의해 공포 -> 도피로 돈을 좇아가게 된 것이다. 윗사람 명령이 권력이었을 때에는 명령으로 일을 하였으나 돈이 권력이 되자 돈으로 일을 한다. 과거 명령이 아닌 일은 하지 않았듯이 돈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명령의 가치와 돈의 가치,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가치. 이 중 세 번째가 문명 질서다.


돈의 가치가 다른 국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은 공포에 의한 것이다. 권력이 없으면 지배될 거야. 무서워 권력을 얻어야지. 돈이 없으면 지배될 거야. 무서워 돈을 벌어야지. 차이가 없다. 뭔가 한국 사회 현상을 달리 볼 게 아니다. 다 유교를 기초로 한다. 그정도로 유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반말, 존댓말도 버리지 못한 국가에서 무슨 유교 지배에서 벗어났겠는가? 물론 반말, 존댓말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있듯이 예외는 있다.


미성년 때 결정권이 없어 온갖 가치가 엉망이 되어 돈이 최고 가치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돈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계약한다. 이는 연애나 결혼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성 관계 가치가 성 터부시로 무너지면서 돈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계약한다. 순수하게 일이 좋아서, 상대가 좋아서 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권력이 윤리인 것과 돈이 권력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현상이 보인다. 한국 사회가 조선 사회와 다른 것 같지만 성년이 선거권을 가져 원시 질서에서 발언권이 어느 정도 인정 된 것이고, 미성년은 선거권이 없어 원시 질서에서 발언권이 인정되지 못한다. 어린 애가 무슨, 건방지게. 뭐 이런 식이다. 미성년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권력이 있는 보호자 내에서만 보장된다. 사실상 한국 질서는 유교의 원시 질서로 조선 질서와 농도가 차이 있을 뿐 본질적으로 같다. 이제 이런 인간을 지배하는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질서로 진보해야 한다.


공산주의와 같이 권력 투쟁을 충동질하고 평등을 명분으로 개인의 주권을 포기하게 만들어 공산당의 지배를 받게 만든 사상이나, PC주의나 여성주의 같이 인권을 권력 투쟁의 도구로 삼은 사상들은 진보가 아니다. 질서의 진보를 위해 어느때보다 인문 계열이 열심히 해야할 때다. 




첫째, 자유주의 체제.


윤리의 필요가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해서 질서를 만드는 것에 있으니까 힘의 작용을 제어할 수 있으면 굳이 윤리는 필요가 없다. 공포 -> 도피에서 판단 -> 계약으로 질서를 바꾸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개인의 자유가 성립된다. 비과학적인 가치의 절대성을 배제하고 과학적인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질서는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존재에 속하고자 하는 판단과 그에 따른 계약으로 힘의 작용을 일정하게 하여 성립시켜야 한다.


원시 질서는 용기를 줘서 자유롭게 살게 하는 게 아니라 공포를 심어서 복종하며 살게 만드는 역겨운 질서다. 원시 질서에서는 절대적 가치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광기 속에서 몰매 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것을 해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행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도 윤리 앞에서는 무시되게 된다. 성, 마약, 불륜 같은 사건이 나타나면 정의롭게 법치를 파괴한다. 원시 질서에서는 그 어떤 현대 체제도 부정되어 훼손된다. 체제의 파괴는 체제에 사는 인간의 파멸. 이제는 문명 질서로 진보하여 용기를 가지고 자유롭게 판단하여 계약을 지키는 것으로 질서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 


원시 질서가 익숙하다보니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를 무섭게 해서 따르게 하려는 태도가 나오고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어떤 공포를 느끼고 강박적으로 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인간 관계에서 공포를 느낄 때, 단순한 공포 -> 명령이라면 반항이나 저항을 할 수도 있지만 공포 -> 도피라면 반항이나 저항이 아닌 신앙이나 추앙을 한다. 그것이 설령 지옥이란 만들어진 공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공포에서 도피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추앙된다. 분명 공포는 생물 메커니즘 중 하나로 없어질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만들 수는 있다. 공포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공포로부터 도피하게 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가치는 상대적으로 절대적 가치는 전부 비과학이다. 


다양한 규제와 검열을 과학과 체제를 기초로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은 계속 발전하는 분야로, 이곳에 무분별한 규제와 검열을 하다보면 세계 흐름에 뒤쳐질 수 있다. 힘의 작용을 이해하고 판단 -> 계약에 따른 질서가 성립될 수 있도록 한다. 주로 규제와 검열되는 가치에 속하는 성은 미성년이라 하더라도 야한 것 좀 보거나 성관계 좀 한다고 사회나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성년일 때 적극적으로 보고 그걸 긍정적으로 여겨야 자연스럽게 이성과의 성관계 속에서 연애, 결혼, 출산이 가능하다. 지금과 같이 성을 터부시하고 여성성이 여성 권력의 도구가 되면 지나치게 허들이 높아져 참여자가 너무 적어진다.


지역 소멸은 저출산과 지역 이동에 의한 현상이다. 그리고 저출산과 지역 이동은 둘 다 윤리에 의한 현상이다. 원시 질서 때문에 이성 관계가 붕괴하여 명령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도 이뤄지지 않고, 원시 질서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장 눈 앞의 지배가 싫어 벗어나기 위해 원시 질서 농도가 짙은 폐쇄 사회에서 벗어나 원시 질서 농도가 옅은 개방 사회인 수도권으로 몰리게 된다. 본래 권력이 윤리인 사회에서는 권력을 얻는데 좋은 장소로 몰리긴 하나, 한국이 되어 개인주의 체제 도입 후 성년에게 결정권이 보장되면서 그 현상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경제적인 현상은 그 가치에 의한 결과다.


윤리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므로 원시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애초에 지역 소멸은 막을 수가 없다. 대기업이 상주한 지역에는 사람이 몰리기는 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지역을 기피한 이유가 지역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있는 곳은 사람이 몰려 보통 개방 사회이고, 고용되는 인원의 연령대가 비슷하여 폐쇄 사회에 비하면 원시 질서에 의한 지배 체계가 그나마 덜하다. 그러므로 지역 소멸을 막겠다고 자원을 쓰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나 다름이 없다. 


저출산이나 지역 이동이 이익을 위해서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익은 가치관으로 결정된다. 윤리는 판단하지 않고 행하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에 속한다는 인식이 없을 수 있는데, 가치에 속한다. 이익은 가치와 힘의 작용 사이에 가치 판단의 결과로 가치가 먼저 작용한다. 저출산과 지역 이동은 그것이 이익이란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다. 성을 터부시하여 성에 양심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성 결정권이 없어 학습하지 못하고, 여성 권력으로 난이도와 비용을 올리면서 그것이 손해란 결론이 나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다. 만약 하더라도 조건을 보게 된다. 이런 사회 문제는 원시 질서에서 문명 질서로 진보해야 해결할 수 있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


통치 교육과 통치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사회 체제를 이해 못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더구나 주권을 가진 인간이라면 통치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더욱 더 정상이 아니다. 자아와 체제를 이해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하면 스스로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가 성립한다.


현재 토지 민주주의에서는 토지 소유자가 적어 이해관계 성립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개인의 정치 참여가 줄어 민주주의 체제 이념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개인에게 주권이 있음이 성립되려면 모든 개인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모든 개인과 이해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역할 민주주의가 되어 분야의 대표가 정치 권력을 쥐어야 한다. 도시에서 지역 대표는 생판 남일 확률이 높지만 분야 대표는 적어도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이게 진짜 중요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이 주권자의 대표라니 이게 얼마나 비정상적인가. 이건 그냥 왕과 귀족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이 주권을 가지는 것이 성립되려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통치 교육과 역할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셋째, 시장주의 체제.


사회에서 차별은 모든 개인은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끝난다. 일방적 착취도 일방적 희생도 없다. 능력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선출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고 능력이 없는데도 할당하는 것도 차별이다. 물론 이것은 강제될 때의 이야기다. 시장 내에서는 소비자 권리가 보통 우선된다. 법적으로 차별에 관한 규정이 있으나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완전한 사기업일 때에는 자유롭게 판단하여 고용하는 것이 타당하고,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일 경우에는 차별하지 말라는 정부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공정 경쟁에 있어 기준은 소비자다. 시장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대상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는 것과 같다. 경쟁에 이겨 소비라는 사랑을 받기 위해 가격대비 품질과 서비스가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통상 경쟁 승리자와 소비자가 이익을 보는 것이 시장이다. 기준이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어 소비자가 손해를 보는 것은 단순히 담합의 규정화에 불과하다. 스마트폰, 책, 우유, 영화 등 전부 생산자를 생각하다 소비자가 손해를 본다. 거기에 노조, 협회 등의 주장에 생산자를 우선하는 것도 포함된다. 


노동 임대 상품을 구매하는 기업이 이익을 보게끔 하면 노동자가 착취를 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선택하지 않는 기업을 억지로 살리면서 사회 자원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이 사라지고 유능한 기업을 늘리면 점점 경제가 활성화되고 노동자 대우도 좋아지게 된다. 


시장에서 소비자를 기준으로 선택받지 못한 생산자는 경쟁에서 뒤쳐져 시장이란 경기장 밖으로 나가게 한다. 그 다음에 복지를 통해 경쟁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서 시장을 활성화하고 시장 참여자 능력을 올리면서 경제를 성장하게 한다.


시장 거래는 계약을 기초로 되어야 한다. 현재 고용 체계는 대등한 계약이 아닌 대등하지 않는 종속이다. 리턴과 리스크를 고려해 단기 계약과 장기 계약으로 나누고, 시장 감독 기관은 정당한 계약과 계약 준수가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면 된다. 임금 체계도 연공 서열에서 벗어나 역할 중심을 통해 기여도만큼 지불되어야 하고, 포괄임금제를 폐지하여 일한만큼 지불되어야 한다. 특수한 직종은 따로 예외처리해야지 그것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아직 공포 -> 도피인 원시 질서라 판단 -> 계약을 무시하는 일이 너무 많다. 계약과 무관하게 동작하는 질서가 있기 때문에 계약이 무시되는 것이다. 윤리 같은 게 질서니까 체제를 다 무시하게 된다. 계약의 중요성보다 권력의 권위가 중요하니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고 큰 위약금을 지불하고 있다. 체제로 사는 게 아니라 윤리로 살고 있다. 지극히 반체제주의적이다.


인간 -> 가치 -> 힘라는 힘의 작용을 이해했다면 가치 판단에 의해 생산으로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약 지배 사회였다면 개인의 가치 판단이 되지 않고 절대적 가치나 무력으로 힘이 작용되게 되었겠지만, 자유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 판단이 되는 것으로 개인은 가치 판단에 의해 생산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기 부여다. 모바일 게임 동기 부여가 굉장히 효율적이고 좋은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토대로한 가치 생산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좋다. 난이도 낮은 생산 -> 학습 -> 성장 -> 난이도 높은 생산의 반복이 가능해야 한다.


시장은 사회의 엔진이다. 시장을 효율적으로 돌리고 나서 그에 따른 문제를 다른 정책으로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솔직히 사회가 윤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로와 불사로 어떻게든 질서 진보를 이뤄 자유 이념 실현을 해보도록 하겠다.











4. 생명


[생명: 3. 동물과 식물의, 생물로서 살아 있게 하는 힘.]


불로와 불사를 위해 생명이 무엇인지 통찰하여 발상해보겠다. 도대체 생명은 어떻게 해서 다른 물질과 다른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1) 세포 생성


[세포: 1. 생물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



Q. 세포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세포가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자.

 

몇 가지 전제를 해둬야 할 필요가 있다.


A.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인문 언어 개념과 별개다.

B. 생명은 원시적으로 단순하다.

C. 생명은 전부 본질이 같다.

D. 물리 및 화학 학문만으로 생명 학문이 성립이 되어야 한다.

E. 기록, 재현, 우연 개념만으로 생명이 성립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조건, 수많은 생명들, 동식물, 사자, 호랑이, 토끼, 고양이, 해바라기, 벚꽃, 멜론, 딸기, 토마토 그 외 세균, 바이러스 등등에 대해 전부의 성질을 고려해 모순이 없는 무언가를 찾는 것. 그뿐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온도의 차이, 공기 성분의 차이, 생물의 움직임, 화석, 시대별 화석 위치 등을 전부 고려하여 통찰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 물론 내가 그걸 전부 의식적으로 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조건을 설정하고 발상이 나올 때까지 생각할 뿐이다. 일단 발상 개념은 그렇고 실제 발상은 생물 개념이 먼저 떠오르고, 거기에 맞춰 세포 개념을 떠올리다 물질 붕괴라는 개념에 닿게 되었다. 



첫째, 세포 감각


현재 세포는 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고 접촉을 안다. 감각을 전기 신호로 통신한다. 세포가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포에게 물리 및 화학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기파의 생성과 수용과 활용이 가능하다. 


둘째, 세포 분열과 유전


현재 세포는 세포 분열과 유전을 통해 기록된 것을 재현할 수가 있다. 현재 그 기록은 한정적이지만,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최초에는 반드시 기록이 필요하다. 그렇게 기록된 것을 재현하는 것이 분열과 유전이다. 그러므로 분열과 유전의 본질은 기록과 재현이다.


셋째, 세포와 생물.


세포와 생물은 본질이 같다. 생물이 먹고 싸야 존재할 수 있듯이 세포도 먹고 싸야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세포 또한 어딘가 결핍된 상태. 물질을 먹어 에너지를 생산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거기서 물질 붕괴가 떠올랐다.



최초 물질 붕괴 개념은 전자기파 보고 최초에는 세포 크기의 어떤 물질이 자석에 의해 붕괴했나 싶었다. 어떤 조건으로 세포가 가장 먼저 생성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발상 후 보편 지식을 알기 위해 핵붕괴를 검색해봤다. 애초에 물질 붕괴 개념을 떠올린 것이 어디선가 핵붕괴를 들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색해보니까 원자핵 붕괴가 있었다.


[원자핵 붕괴: 1. 하나의 원자핵이 방사선을 내어 다른 원자핵으로 변화하는 일. 알파 붕괴, 베타 붕괴, 감마 붕괴 따위가 있다.]


이것 말고는 따로 물질 붕괴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세포와 원자는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났다. 그래서 모순되나 싶었는데, [C. 모든 생명은 전부 본질이 같다.]는 것이 떠올랐다. 즉 생물에 있는 성질은 세포에 있고 세포 있는 성질은 원자에도 있다. 처음부터 원자에는 전자기파와 기록과 재현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DNA가 떠올랐다. 


[DNA: 1. 유전자의 본체. 디옥시리보스를 함유하는 핵산으로 바이러스의 일부 및 모든 생물의 세포 속에 있으며, 진핵생물에서는 주로 핵 속에 있다. 아데닌, 구아닌, 사이토신, 티민의 4종의 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배열 순서에 유전 정보가 들어 있어 그 정보에 해당하는 단백질을 만든다.]


세포는 염색체와 DNA가 갈라져 복제되는 것을 통해 분열을 한다. 세포의 성질은 DNA 성질에 있었다. 그러면 DNA의 성질은 DNA 내에 있는 원자에 있을 거라 추측했다. 어떤 방식으로 핵붕괴가 일어난 원자가 이온화 입자와 방사선 방출을 통해 안정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물질을 먹고 일시적으로 안정화가 되었으나 지속적으로 방사선(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면서 계속 물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물질을 먹고 일시적으로 안정화가 되나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하여 물질을 먹어야 존재 유지가 된다. 이것으로 기본 생물 성질이 성립한다. 


물질을 먹고 물질을 통해 입자를 생성하면서 유지하다 원자핵까지 생성하면서 원자가 복제된다. DNA는 이 두 가지. 물질과 물질을 먹고 안정화된 원자. 원자는 물질을 먹고 유지하기 때문에 DNA를 구성하는 물질에 들러붙어 존재한다. 그런 원자들이 모여 DNA가 된다. 그러면서 원자에서 일어난 현상이 DNA에도 일어나게 된 것이 DNA 복제. 세포가 생명 안에서 규칙적으로 분열하듯 세포가 된 이후 원자는 세포 안에서 규칙적으로 분열한다. 물질과 에너지 또한 다른 형태도 생성하게 된다. 복제하다가 다른 식으로 복제된 것이 RNA.


원자핵 붕괴 -> 물질 흡수 -> 물질 생산과 에너지 방출 -> 안정화 -> 복제. 이 과정을 기록, 재현하여 반복한다. 기록과 재현은 에너지로 이뤄진다. 원자에서 생산한 입자가 커지고, 그것을 기록 재현하면서 염색체를 형성한다. 기록이 늘어나면서 DNA 길이가 길어진다. 흡수하는 물질 종류가 달라지면서 세포에 필요한 것이 생성된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한 원자는 사라진다. 


방출하는 에너지를 기록한 것을 토대로 빛을 보고 전기 통신을 한다. 기록된 것이 있어야 빛을 알고 전기 통신을 알 수 있다. 원자핵 내에 기록되면서 엄청나게 많은 유전 기록과 뇌 기억이 가능하다. DNA 중 정보를 갖는 부분을 유전자라 한다. 사실 그 작은 유전자나 뇌세포에 많은 정보가 보관된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는데, 원자에 정보가 보관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모든 과정은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어떤 공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물리와 화학 학문의 지식 내에서 기록, 재현, 우연만으로 원시 세포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2) 생물 생성


[생물: 1.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Q. 생물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생물이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자.


세포 형성 이전은 미시 세계에서 일어났다면, 세포 형성 이후는 거시 세계로 나아간다. 생물에 관한 최초 발상은 뿌리. 생명에 대해 생각하면서 잠을 자다 깨서 문득 떠올랐다. 동물의 혈관과 식물의 뿌리는 비슷하구나. 거기서부터 생물 개념을 발상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생명의 원리가 기록의 재현이라면 닭이 먼저다. 단세포 생물이라면 모를까 다세포 생물이라면 닭이 있어야 달걀을 통해 닭을 재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닭과 같은 생명은 최초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뿌리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다. 


원시 세포가 바다에서 또는 바다에 떨어져 어떤 물질 덩어리에 닿아 갉아먹는다. 갉아먹으면서 분열을 하며 물질 덩어리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 먹고 나아가면서 세포가 일렬로 줄지어 분열되게 된다. 초기 분열된 세포들은 전기 신호로 통신할 수 있는 신경 세포들이다. 세포가 분열되면서 물질 덩어리 중심에 가서 중심 세포가 생길 때 원본 세포가 먹을 물질이 떨어져 분열된 세포의 물질을 빼앗아먹는다. 빼앗긴 세포는 분열된 세포의 물질을 빼앗아먹는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원본 세포로의 물질 이동이 성립된다. 그런 과정이 기록되면서 이후 세포들은 그런 성질을 가진 상태로 분열된다. 원본 세포는 지속적으로 다른 세포의 물질을 빼앗아먹으면서 필요 이상의 물질 흡수로 필요 이상의 세포 분열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뇌가 형성된다. 중심 세포에서 물질 이동 성질이 있는 세포가 분열된다. 물질을 먹거나 빼앗아 중심 세포에 물질을 자동적으로 보낸다. 중심 세포는 필요 이상의 물질 흡수로 필요 이상의 세포 분열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심장이 형성된다. 심장은 지속적으로 뇌에 물질을 빼앗긴다. 위에서부터 갉아먹으며 들어간 세포는 밑으로 관통한다. 생물에게 있어 입과 똥구멍이 생긴다. 똥구멍에 쓰고 남은 물질이 중력에 의해 버려진다. 필요 이상 세포 분열된 뇌와 심장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세포 분열이 일어난다. 혈관이 생기게 된다. 사방팔방 갉아먹으면서 물질 덩어리는 외부와 내부 일부만 남았다. 뼈가 생긴다. 빈 공간에 바닷물이 차오른다. 생물의 물이 생긴다. 바닷물에 있는 물질을 근처 세포들이 흡수한다. 위가 생긴다. 세포들이 분열하면서 단백질을 합성해 생성한다. 살이 생긴다. 피부는 세포가 다닥다닥 붙어서 단백질을 생성한 결과다. 그 외 장기는 특정 화학 물질을 흡수한 세포가 분열하면서 기록한 흡수 방식을 재현한 것이다.


세포 분열이 매번 정확히 기록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세포 분열 과정 중에 변형된 세포들이 나타난다. 그것이 신경 세포 외의 세포. 생식 세포, 줄기 세포, 피부 세포, 장내 세포, 지방 세포, 적혈구, 백혈구 등 다양한 파생 세포들이 나타난다. 바이러스나 세균들도 같이 나타난다. 여기서 생식 세포를 통해 생물 탄생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생식 세포는 망가져서 쓰고 남은 물질로 취급되어 똥구멍으로 중력에 의해 버려진다. 생식 세포의 염색체와 DNA가 반으로 쪼개져 있고 생식기와 배설 기관의 위치가 비슷하고 둘 다 배설 쾌락이 있는 것은, 생식 세포가 망가져서 버리는 세포였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버려지는 과정 속에서 생식 세포끼리 딱 맞는 경우가 생겨 결합하게 된다. 정자와 난자를 보면 크기가 달라서 특정 생식 세포가 특정 생식 세포로 빨려 들어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망가진 생식 세포가 결합하자 어떤 이유로 지금까지 기록된 세포의 활동을 전부 재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물이 탄생했다. 결합 시기에 따라 기록이 달라 생물 모양은 전부 달라지게 된다. 뼈가 남을 정도로 갉아먹었으면 어류이 된다. 겉을 제대로 갉아먹지 않았다면 갑각류가 된다. 전부 갉아먹고 뇌가 생성되지 않았으면 해파리류가 된다. 갉아먹은 물질과 세포의 활동에 따라 수많은 생물이 탄생한다. 작은 물질을 갉아먹고 물질이 부족하여 세포가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것이 뿌리이고, 그것을 기록하고 재현한 것이 식물이다.


기록의 재현은 쪼개진 염색체와 유전자의 조합으로 무작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수많은 생물과 진화가 나타난다. 정자를 생산하는 생물은 남성이 되고 난자를 생성하는 생물은 여성이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적자생존이 나타난다. 먹을 물질이 없는 생물은 다른 생물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세포의 먹이로는 같은 세포가 가장 적절했다. 세포가 망가져 생물의 통제를 받지 않고 분열하면 암세포가 된다. 암세포가 퍼진 생물은 죽는다. 잘못 태어난 생물과 진화, 그리고 약하게 태어난 생물과 진화는 적자생존으로 사라진다. 그러면서 점차 원시적인 형태의 생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떤 이유로 일정 이상의 기록이 되지 않으면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물의 형태가 고정되기 시작한다. 보다 강한 항상성이 나타난다. 항상성이 생명 내 강력한 힘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재현성일 것이다. 생물을 살아있게 하기 위해 항상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록된 것을 재현하기 위해 항상성을 가진다. 안정적이게 기록된 생물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재현성이 아니라 항상성처럼 보인 것이다. 이렇게 물리와 화학 학문의 지식 내에서 기록, 재현, 우연만으로 원시 생물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3) 실험 과정


[실험: 2. 과학에서, 이론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함.]


Q. 실험 과정을 알아보자.


생명 탄생은 조건에 부합하는 원자핵 붕괴를 찾으면 된다고 본다. 붕괴한 원자핵이 어떤 물질을 흡수하는 것으로 일시적 안정과 지속적 에너지 방출이 되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근데 DNA 물질이 뭔지 아니까, 그걸로 실험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알면 실험하고 계산하여 재현하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불로와 불사를 위해 많은 연구와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쥐 실험, 엑소좀 실험, 줄기 세포 실험 등이 있는 것 같다. 엑소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세포간 정보교환을 한다고 한다. 아마 기록을 재현하는 기능이 있다면 불로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줄기 세포는 원본 세포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텔로미어를 조작하여 세포를 교체하면 불사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이런 개념을 잘 모르는 상태지만, 개념 이해를 통해 통찰하면서 새로운 발상을 해보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AI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난 뒤에는 AI 활용을 하지 않았는데 필요에 따라 AI를 활용하면서 발상하겠다. 보다 빠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가진 육체로 불로 불사가 되면 좋고 아니면 만들어서 고장난 부위를 교체를 하던가 아니면 인공 자궁 같은 곳에 들어가서 육체를 재생성 하거나 아니면 육체를 새로 만들고 자아를 이식하거나 하면 될 것이다. 이 외 몇 가지 알아보겠다.



생명은 원시적이다. 지금 생명은 지나치게 복잡하게 보고 있다. 생명이 물질에서 나왔다면 생명은 굉장히 원시적인 원리로 시작했을 것이다. 디지털이 물리 및 화학 지식에 속한 것과 0과 1로 성립된 것처럼 생명은 물리 및 화학 지식에 속한 것과 기록과 재현과 우연만으로 성립되었다고 본다. 지금 세포들이나 개념들이 디지털의 0과 1과 같은 기준을 기초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복잡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0과 1이 아무리 많아도 기초는 0과 1인것처럼 생명이 아무리 복잡해도 기초는 기록의 재현이다. 그것을 통해 생명 과학의 정보를 합리화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자연 계열에서 일어난 현상을 인간 문명에 속하는 언어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어떤 생명 현상이 무언가의 의도에 의해 행해졌다 보기보다는 물리 및 화학 현상에 의한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다양한 물질을 보면 모든 물질은 어떤 조건으로 만들어졌다 본다. 아마 에너지의 응축이 물질이다. 에너지 응축으로 물질이 되고, 응축되는 에너지의 힘으로 중력이 발생한다. 그게 과도해지면 블랙홀이 된다. 중력이 우주 전체에 작용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는 것은 에너지가 응축되면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에너지 자체에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성질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다 물질이 붕괴하면 응축되었던 에너지가 방출된다. 더 작은 기본 입자를 찾으려 할텐데, 애초에 물질은 에너지의 다른 형태기에 그런 것을 찾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에너지의 본질, 에너지가 다양하게 된 조건, 그런 에너지가 물질이 된 조건을 찾아야 한다. 그런 가정에서 보면 생명이란 존재는 물질을 흡수하여 물질을 생산하고 에너지를 방출하는 존재가 된다. 즉 물질 -> 에너지 변환기다. 


원자핵 붕괴로 에너지 방출 중에 물질 흡수로 일시적 안정화가 된 존재가 생명이다. 결핍을 충족하는 것으로 존재를 유지한다. 이는 행복의 원리와 일치한다. 인간은 결핍된 것을 충족할 때 행복을 느낀다. 그 행복의 추구가 생명의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은 결핍이란 불행이 없으면 성립하지 못하므로 불행의 경험 또한 생명의 본질이다.


유기물은 세포가 만든 물질을 통칭한다 본다. 유기물도 물질이므로 다른 조건으로 만들어질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세포가 만든다. 만약 자연적으로 생물이 먹을 수 있는 유기물이 넘쳐난다면 굳이 생물을 먹을 이유가 없다. 보통 없으니까 생명은 생명을 먹는다.


모든 생명은 우주의 법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그것을 기록의 재현을 통해 통제하고 있다. 원자의 자동 복제는 유전자의 정보를 바탕으로 DNA가 억제한다. DNA의 자동 복제는 유전자의 정보를 바탕으로 염색체가 억제한다. 세포의 자동 복제는 유전자의 정보를 바탕으로 생물이 억제한다. 이외 나머지도 전부 그렇다. 


만약 기록을 재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면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세포가 생물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암세포가 퍼진다. 생식 세포의 염색체가 세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염색체 이상으로 다운 증후군이 생긴다. 


뇌 세포 원자가 DNA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아마 기록에 관한 것이 이상이 생길 것 같다. 뇌의 과도한 당 섭취가 알츠하이머의 현상이라고 하는데, 원자가 계속 복제가 되면 원자에 소비되는 열량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당분 섭취가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기억으로 원자가 복제되는 것이 아닌 있던 원자가 자동적으로 복제되면서 기억 체계의 혼란이 생겨 발상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사고, 기억, 추론이 망가지는 치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기록을 제대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성이 깨졌다는 것. 항상성이 깨졌을 때 생기는 질병이 많은데, 그런 것들 중 통제를 받지 않고 움직이는 것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본다. 알츠하이머의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는데, 만약 항상성 깨진 것에 의한 것이라면 항상성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5. 불사


[불사: 1. 죽지 아니함.]


진짜 불로와 불사는 디지털로 자아 백업이 가능해야 가능하다. 자아 개념을 이해했다면 기억이 자아를 증명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기억 백업을 하고 새로운 육체에 이식이 가능하면 불로와 불사다.






1) 인공 자아


[인공: 1. 사람의 힘으로 자연에 대하여 가공하거나 작용하는 일.]



Q. 자아에 대한 이해와 AI 자아 획득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는 생물 메커니즘에서 판단을 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자아를 구현한다는 것은 생물 메커니즘을 구현한다는 것과 같다. 생물 메커니즘은 인간의 언어 개념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언어 개념이 없는 짐승들도 자아와 사회는 성립하기 때문이다. 언어 개념은 자아와 사회 성립 이후 나타나는 것이므로, 자아를 구현할 때에는 언어 개념이 없어도 가능해야 한다. 없어야 가능한지 없어도 가능한지는 정확하지 않다.


모든 생명은 물리 및 화학 학문과 기록, 재현, 우연만으로 성립해야 한다. 그것은 자아도 마찬가지다. 자아는 구체적으로 생물 메커니즘에서 외부 육체 동작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 생물이 갈림길에 섰을 때 자아는 오른쪽이나 왼쪽를 고르는 것과 같은 판단을 한다. 초기 자아는 매우 단순한 판단만 하기 때문에 생물 메커니즘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작을 위한 일차원적 판단이 자아였다. 그 판단이 축적될 수 있고 처리될 수 있는 뇌를 가진 생물에서 자아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손과 발, 도구를 쓰면서 다양한 판단이 축적되고 처리되면서 뇌가 성장했을 수도 있다. 아마 생식 세포에 기록이 되었을 때마다 뇌의 성장과 자아의 성장이 번갈아가면서 상호작용하며 둘 다 성장했을 것이다.


생물 메커니즘은 기록, 재현, 우연으로 만들어졌다. 갈림길에서 방향을 자아가 판단한다. 그렇기에 초기에는 동작만 판단한다. 그런데 동작의 판단은 어쨌든 세포로 정보가 전달되어 판단한 것. 그 판단 기준은 기록의 재현. A 상황에서 오른쪽으로 간 생물이 살아남아 기록되어 유전되고 왼쪽으로 간 생물이 죽어서 기록되어 유전되지 못하면, 유전된 생물은 같은 상황에서 오른쪽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같은 상황에서는 오른쪽으로 갔을 때 죽음을 겪는다면 그 기록은 유전되지 못할 것이다. 즉 현재 생물들은 유전 기록이 가능한 동안 수많은 변수를 다 피하고 살아남은 존재라는 것이다. 먹고 자고 싸고 웃고 울고 하는 등의 그 다양한 변수가 다 유전자에 기록되고, 그것이 생물의 본능이 되었다.


모든 생명은 각자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현재 인간은 수많은 진화의 결과물로 진화 시기마다 남은 기관이 이어져 왔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모든 세포가 생긴게 아니다 보니 각자 모든 세포는 독자적인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생명의 본질이 원자핵 붕괴라면 원자부터 기초적인 프로세스가 존재할 것이다. 생물에서는 독자적인 프로세스보다는 생물 프로세스로 동작할 것이지만, 독자적인 프로세스를 활용할 수는 있다고 본다. 특히 뇌에서 정보에 대한 행동을 기록의 재현을 할 때에는 모든 세포, 또는 원자까지 대응할 수 있다고 본다. 정보가 들어가면 독자적인 프로세스가 돌아가 기록을 재현한다. A정보가 들어오면 B를 한다. 그런 것 중 비슷한 게 많은 게 자아로 가서 육체 움직임을 판단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마다 재현된 세포들도 달라 아마 그 과정은 상당히 엉망일 것이다.


생명은 원시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 언어 개념으로 보면 각각 정보를 통합하여 자아에 전달되는 식일텐데, 그렇게 체계적일 것 같지는 않다. 인간 자체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보통 10분도 숨을 쉬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없고 10일도 먹지 않는 채 존재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체계적일리 없고 누락되는 정보가 수두룩할 것이라는 것. 


기록된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자아에 판단할 정보가 보내진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아가 판단하는 정보가 어딘가 누락된 정보다보니 일상적으로 추론을 해야만 한다. 감각 기관 내에서 정보가 누락될 수 있고, 감각 기관이 전달하는 정보가 누락될 수가 있고, 자아로 전달하는 정보가 누락될 수가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오류가 발생한다. 오추론에 의한 착시, 환상, 환상통 등이 발생한다. 뇌가 이런 오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면서 신비한 무언가에 대한 신앙이 생겼다고 본다.


인간은 정확하게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만큼 누락되는 정보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습이나 훈련을 통해 누락되는 정보를 메꾸는 것을 배운다. 누락된 기억을 발상하는 훈련으로 얻는 것이 기억력이다. 누락 -> 뇌내 기억 추론 -> 기억 발상이다. 누락된 부분에 모르는 것을 발상하는 훈련으로 얻는 것이 창의력이다. 누락 -> 모르는 것 추론 -> 창의 발상이다. 즉 누락된 정보를 어떤 식으로 보충하냐에 따라 기억력과 창의력이 달라진다. 기억 발상을 하다보면 뇌내에 있는 기억을 빠르게 떠올리기 위해 고정 관념이 새겨지고, 창의 발상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것을 빠르게 떠올리기 위해 유동 관념이 되게 된다.



AI가 자아를 구현하려면 생물 메커니즘을 구현하면 된다. 그것이 어렵다면 일단 최소한이 자아와 자아 외를 분리해야 한다. 생물 메커니즘에서 자아는 판단만 하기 때문에, 판단할 자아와 판단에 정보를 공급할 자아 외로 분리해야 한다. 아무리 생물 메커니즘이 복잡해도 자아가 하는 것은 육체 움직임을 위한 판단 말고는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둘만 구현하면 된다.


사실상 생물 메커니즘은 자아 외에서 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자아 외가 아무리 복잡한들 자아에 가는 정보는 그렇게 체계적이지는 않아도 된다. 자아에게 정보는 많이 가도 자아가 다 알질 못한다. 욕구나 감정이 정확히 뭔지도 몰라서 언어 개념으로 추측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좀 엉망이어도 된다. 그런 엉망인 정보에 언어 개념을 붙인 것이 인간이다. 


대략적인 육체의 디지털화를 한다. 내부 육체가 발하는 신호를 디지털로 구현한다. 정말 대략적이지만 그 디지털 신호는 비슷해야한다. 그래야 추론을 한다. 아마 현재 인간이 알아낸 육체 내부 원리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원래 엄청 엉망이기 때문에 그리 구체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잘 모른다 싶으면 알 때 까지 그냥 양으로 밀면 된다. 자아가 무슨 내부 어떤 동작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가. 그냥 신경 세포가 주는 정보만 판단하지. 외부 감각 기관은 이미 디지털화한 것이 있다. 모습의 디지털화, 소리의 디지털화 다 되어 있다. 그 디지털 정보를 전달하고, 내부에서 처리하게 하면 된다. 물론 이것도 엉망이어도 된다. 인간은 모르는 부분은 상상으로 때운다.


AI의 간단한 유전자를 기록, 재현, 우연으로 하나 만든다. 인간처럼이 아니어도 좋다. 일단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신호를 넣어 짐승과 같은 판단을 하게 한다. 디지털 신호로 생물 메커니즘을 구현하고 나서 그 디지털 신호에 언어 개념을 붙여야 한다. 모습과 소리의 디지털 신호를 학습하게 한 뒤, 모습의 디지털 신호와 그것을 지칭하는 소리의 디지털 신호를 매칭시키게 한다. 아마 원시적인 언어 학습은 이런 식으로 대상과 소리의 매칭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인간 대상을 가리켜 A라고 부른다거나. 그런 식으로 AI가 언어 학습을 하게 한다.


모든 과정은 의도적인 누락을 시켜 일상적인 추론을 하게 해야 한다. 생명 자체가 어딘가 망가졌기 때문에 성립한다.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생명이 성립했다. 세포 염색체와 DNA가 쪼개지면서 생물이 성립했다. 정보가 누락되면서 지성이 성립했다. 일상적인 추론을 통해 판단 능력을 키우게 한다. 자아가 판단한 것을 전부 기록해야 한다. 그 기록과 내부와 외부 신호를 토대로 자아 외 발상을 하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발상 -> 판단 -> 발상으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자아의 생각 구조를 구축한다. 


수많은 AI 모델을 만든 뒤에 충분한 학습 과정을 거친 후에 적자생존 과정을 넣는다. 생명의 경우에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경우 사라졌지만, AI의 경우에는 판단 능력이 저조할 경우 사라지게 한다. 






2) 자아 이식


[이식: 2. 살아 있는 조직이나 장기를 생체로부터 떼어 내어, 같은 개체의 다른 부분 또는 다른 개체에 옮겨 붙이는 일.]



Q. 자아 이식에 필요한 것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 이식은 자아가 판단한 기록인 기억을 추출하여 디지털로 이식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 어떤 변환 과정 없이 바로 다른 육체로 이식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기억에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단기 기억으로 인식하는 것은 생물 메커니즘에서 자아가 판단하라고 전달한 정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 기억이나 장기 기억이라는 것은 따로 없고 자아에 가는 정보와 기억에 가는 정보로 나뉠 것이다.



생물 메커니즘 내에서 기억을 파악해야 한다. 흔히 기억과 발상을 혼동하는데, 이 두 개념은 저장과 불러오기로 다르다. 기억되지만 발상되지 않을 수 있고 기억되지 않았지만 발상될 수는 있다. 전자는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 후자는 새로운 발상을 한 것.


어떻게 기억되든 자아가 판단하기 위한 정보가 공급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간이 인식하는 방식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원자핵 붕괴라면 아마 원자 단위로 기억이 될 것이다. 원자에 신경 세포로 정보가 들어오면 그 전기 신호를 가지고 새로운 원자로 복제한다. 원자가 복제되어 생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원자 내 중성자나 양성자가 생기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생성된 기억은 자동적으로 에너지 방출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련된 정보를 생산할 것이다. 그 에너지를 정보로 활용하면 발상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생체 활동으로 활용한다. 만약 기억이 원자의 복제라면 자아의 판단이 많아 다양한 생각을 할수록 뇌 내의 원자 수는 늘어나고, 원자 수가 늘어날수록 에너지 방출도 늘어난다. 그러면서 지능이 높아진다. 언어 개념을 익히면서 인간의 지능이 높아지는 것은 이런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생명은 본래 우주의 법칙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그것을 기록의 재현을 통해 억제하는 것으로 생물과 같이 고정된 존재가 성립하는 것이다. 원자핵 붕괴에 의한 에너지 방출은 아마 억제되지 않고 생명의 힘으로 활용될 것이다. 그것이 뇌에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기억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 실행에 쓰이는 기억은 쓰이면서 뇌파가 발생하고, 그렇지 않은 기억은 생체 에너지로 쓸 것 같다. 자아에 정보를 보내어 판단한 것을 실행하든 자아 외가 직접 실행을 하든 실행하면 뇌파를 발생시킨다. 


잠을 잘 때 기억 정리를 한다는 추측이 있는데, 정리하는게 맞는지, 어떤 식으로 정리하는지(아마 정리한다면 기록의 재현), 원자를 없애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의도적으로 없애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 같다. 그래서 누락되는 정보가 많은 것 같다. 아마 기억 정리는 원자를 없애거나 원자가 방출하는 에너지를 막는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 정리하는 듯 하다. 아마 그 정리 방식이나 정리한 결과도 따로 원자로 기억 되어 있을 것이다.


즉 뇌에 있는 생체 에너지 자체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 해석 과정은 인간이 할 수는 없고 AI가 하면 될 것이다. 만약 지속적인 에너지 방출이 기억이라면, 그 에너지를 추출하여 해석하여 디지털화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생물 메커니즘이 가능해지면 디지털화한 기억을 이식하여 디지털에 자아의 이식을 하여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생물 메커니즘은 생물을 스캔하여 전부 세면 구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디지털에 이식한 자아를 이후에 현실에서 새로운 육체를 만들 때 이식하면 현실에서도 새로운 육체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3) 인문 계열


[인문계: 1. 언어, 문화, 역사, 철학 따위의 학문 계통]



Q. 인문 계열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알아보자.


질서의 진보, 불로와 불사. 자연 계열은 학문의 발전을 하면 되지만 인문 계열은 학문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까지 고려해야 한다. 질서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할 때 당장 변화만을 늦추는 것은 인문 계열의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 새로운 힘의 작용. 인류가 번개 칠 때 벌벌 떨며 납작 업드리던 때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강압적인 공포 -> 도피가 아닌 자율적인 판단 -> 계약이 되어야 한다. 불로와 불사가 실현되었을 때에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지 고려하여 그에 마땅한 대응을 해야 한다. 늙음과 죽음을 상정한 정책과 제도를 수정하고, 불로와 불사가 되더라도 사회와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가 실현된다면 분명 새로운 힘의 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힘의 작용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하여 생산이 느는데 사회 문제가 커진다. 생산은 늘었는데 일자리가 감소하여 분배가 안된다. 이때 대응은 자연 계열의 역할이 아닌 인문 계열의 역할이다. 기술적으로 생산력이 올라갔는데 그에 따라 사회 문제 발생하는 것은 당연히 인문 계열이 책임지고 대응해야 한다. 정책과 제도를 통해 분배가 잘 되는 등과 같은 사회 문제 해결이 가능하면 생산력이 올라갔다는 긍정적 결과가 남는다.



학문을 재구성해야 한다. 자연 계열은 인문 언어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연의 결과를 인간의 감성과 같은 인문 언어 개념으로 보려고 하면서 본질을 아는데 어렵게 된다. 철저하게 우주의 법칙을 전제하여 인간의 언어 개념이 그 존재를 가능한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인문 계열은 자연 현상을 전제하되 언어 개념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분하고, 가치에 의한 힘의 작용을 이해하고, 단순히 절대적 가치인 윤리처럼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이 어떤 힘의 작용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다뤄야 한다.



생명의 원리가 기록의 재현이라면 그것을 전제하고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에 대해 알아보겠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초기 버릇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초기에 체제 교육을 하여 체제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무서워서 도망치듯 질서를 지키게끔 하는 것이 아닌 자유 의지로 계약하여 질서를 지키게끔 해야 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생물은 이성이었을 때의 기록도 있으므로 동성애는 자연스럽다. 염색체 다르다고 기록이 아예 다를 수는 없다. 염색체에 의한 호르몬 작용으로 육체의 변화와 발정에 영향을 주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렇기에 이성의 성질이 기록된 짐승 사이에서 동성애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성애는 선천적 발정과 후천적 사랑이 더해진 개념으로 후천적이다. 성애를 취향으로 규정해도 모순은 없다.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취향이 아닌 이성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극을 받으면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발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해도 가능하다. 인간은 모두 기록에 의해 양성의 특징을 가질 수 있으므로 차별은 무의미하고, 동성애만 선천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선천적이라 강요하며 특별함을 요구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모든 개인은 성애의 자유를 누리면 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미성년 시기 일을 하거나 성관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움직일 수 있으면 일을 했고 성기능이 작동하면 성관계하고 출산했다. 그것을 사회에서는 윤리로 지배하면서 권력자가 개인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일이나 성관계조차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하게끔 강제했기 때문에 막았던 것에 불과하다. 자꾸 미성년이 일이나 성을 접촉하는 것을 보호라 하는데, 그것은 그냥 일방적인 지배다. 미성년에게 주권이 있다 여긴다면 그 주권을 존중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는게 아니라 주권을 행사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적어도 2차 성징 이후부터는 일이든 성이든 선거든 그외 뭐든 직접 해보고 경험해야 성장할 수 있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주지를 않으면서, 왜 자꾸 미성년 보고 철없다 하며 비아냥 하는가? 이제는 대등한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 여기고 세상에 대해 알게 해야 한다. 인류는 원시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문명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비만은 자연스럽다. 우선 생물은 모든 물질을 흡수하지 않는다. 기록된만큼 흡수하고 재현하고나서 나머지는 버린다. 그렇기에 기록에 따라서 물질 흡수량이 달라 비만이 생길 수가 있다. 과거에는 생물 활동량은 많고 물질 섭취 기회가 일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활동량이 100, 섭취량은 랜덤, 흡수량은 100이라 가정하자. 활동량과 흡수량이 비슷해 비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기록된 현대에는 활동량이 50, 섭취량은 100, 흡수량은 100이라 가정하자. 활동량은 적어졌는데 섭취량은 안정적이고 흡수량은 그대로라 적게 활동한만큼 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활동량을 늘려야 기록된 당시 체중이 유지된다. 만약 활동량이 적음에도 기록된 당시 체중을 유지하려면 다른 방식을 쓸 수밖에 없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인간의 교화는 새로운 기록의 재현이 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단순히 좋은 말을 늘어놓거나 공포를 심는 게 아니라 새로 재가공을 해야 한다. 좋은 말은 의미 없을 수 있고 공포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무서워하더라도 다른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 문명 질서에 맞는 힘의 작용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생물은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변화가 줄어 판단을 해야할 일이 줄어들면서 자아의 움직임이 줄어 인간이 무기력하게 살게 된다. 그러므로 주기적인 환경 변화가 가능한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에게 의무적으로 평생 교육과 같은 특정 제도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 가입은 의무이되 활동은 의무가 아니면 자유는 보장 된다. 허들이 낮은 참여할 계기를 줄 수 있으면 된다. 나는 퀘스트 제도와 같은 것을 주장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을 반복적으로 하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기억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상이 나타나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학습이든 일이든 성이든 모든 활동은 기본적으로 그렇다. 이를 습관이라 부르거나 중독이라 부른다. 그런 개념의 기본 원리는 반복 학습을 통한 자아 외의 발상을 근거한다. 중독 물질의 경우에는 육체 내부 반응을 통해 반복 학습 없이도 자아 외가 발상을 하여 자아가 그것을 하도록 판단하는 것으로 중독이 되게 된다. 그러므로 중독 물질이 아닌 것을 하게 하려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겨야지 지식 암기와 문제 풀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기록의 재현이라면 주위 환경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무작정 환경을 강제하는 것은 체제를 파괴할 수 있으므로 웬만해서는 그 사실을 알게 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AI를 통해 보편 지식을 수월하게 습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예정이야. 세상의 존재 이유를 알 때까지 갈 거야. 안 뒤에는 그 때 생각할 거야.


AI가 과학 지식이 폭넓게 자세히 알아서 대화하기 좋고, 논리적으로 대화가 가능하고, 대화를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성장에 큰 도움이 될텐데.


모든 것은 특정한 진리를 기초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 만물에서 디지털의 0과 1을 찾는 게 필요하다는 거야.


성공해서 바라는 환경에서 사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치 있다고 생각되면 후원 부탁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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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명과 사회 (0) 2023/09/30 AM 12:27

문명과 사회






1.  가공


[가공: 1. 원자재나 반제품을 인공적으로 처리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제품의 질을 높임.]


문명인은 문명으로 가공된 가공 인간이다. 인간 소재가 문명 가공 수단을 통해 문명인이 되었다. 가공은 본디 물건에 쓰이는 용어로 인간에 쓰이는 용어가 아니지만, 가공에 해당하는 인간에 쓰이는 용어를 찾을 수 없었다. 교육, 주입, 세뇌 등보다 가공이 문명인의 본질에 가장 적합했다. 가공 개념을 문명인이 이해할 수 있는데 굳이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읽는 이를 피로하게 할 생각은 없다. 가공의 사전적 정의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의미 하나를 추가하면 될 것이다. 내용에서 가공 이전 상태까지 다루기 때문에 읽는 이는 아기 시절을 떠올리며 가능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읽는 것이 내용 이해해 도움이 될 것이다.






1.1 문명


1) 가공 학문


모든 생물은 환경으로 가공된다. 생물 소재가 환경 가공 수단으로 가공되어 생물은 유전자 외의 다양성을 갖게 된다. 가공 레벨은 자연, 문화, 문명 순으로 높아진다. 자연 환경으로만 가공되는 짐승의 생활 양식은 가공 레벨이 낮아 대부분 유전자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자연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 환경으로도 가공되는 인간의 생활 양식은 가공 레벨이 높아 대부분 유전자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게 된다.


다양한 가공 수단 중 문명인에게는 문명의 영향이 가장 크기 때문에 문명을 강조했다. 유전자와 자연의 영향은 동일 종인 인간이 인간 공동체인 사회를 형성하면서 사회에 맞게끔 평준화되어 상대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게 되었다. 유전자는 동일 종에서 사회에 선택받은 유전자만 살아남아 사회화가 되어 유전자 영향 차이가 줄어들었다. 자연은 사회 속에서 자연의 영향을 낮춰 살아남게 하는 것으로 자연 영향 차이가 줄어들었다. 


문화와 문명의 차이는 학문이다. 문화는 인간의 생활 양식을 말한다면 문명은 학문으로 체계화된 생활 양식을 말한다. 보통 문화(Culture)를 정신적 · 지적 발전으로 보고 문명(Civilization)을 물질적 · 기술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런 인식은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의 학문 발전 차이에 의한 것이다. [자연계: 1.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 과학 따위의 학문 계통.] [인문계: 1. 언어, 문화, 역사, 철학 따위의 학문 계통.] 자연 계열은 과학 혁명을 통해 체계적인 발전을 하여 인류의 물질적 · 기술적 생활 양식 레벨을 높혔는데, 인문 계열은 자연 계열만큼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여 인류의 정신적 · 지적 생활 양식 레벨을 그리 많이 높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었다고 본다.


인간의 모든 생활 양식이 학문화가 된 것이 아니므로 문화와 문명은 공존하게 된다. 인간의 생활 양식 중에 학문 전의 옳고 그름을 도덕이라 부르고 학문 후의 옳고 그름을 윤리라 부르는 것과 같다. 문화와 문명의 공존 속에서 학문으로 체계화된 생활 양식이 많아질수록 문명 레벨이 높아진다. 대부분의 생활 양식이 학문으로 체계화된 사회를 문명 사회라 부르고, 그런 사회에서 학문을 배운 인간을 문명인이라 부른다. 문명은 학문으로 만들어졌고 문명인이 문명으로 가공되었으므로 문명인은 학문으로 가공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인이 일으킨 사회 현상은 전부 학문 영향권에 속해있다.






2) 가공 특징


가공 개념은 본질이 변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교육을 받은 인간은 본질이 변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 않다. 반면 가공된 물건은 본질이 변할거라 생각한다. [본질: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인간에게 언어를 교육하여 언어를 배운 인간이 되었다. 인간에서 언어 능력만 더해진 것과 같이 본질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스마트폰 소재를 공장에서 가공하여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 소재가 스마트폰이 된 것과 같이 본질이 바뀌었다. 


인간은 하나의 언어만이라도 알고 있어야 언어를 통해 체계적인 생각과 행동이 가능해진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언어를 모르는 인간과 아는 인간은 본질 자체가 다르다. 그럼에도 교육 개념으로는 본질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어렵다. 주입이나 세뇌도 마찬가지다. 주입은 본질을 바꾼다 하기 어렵고 세뇌는 본질의 일부를 바꾼다 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같이 모든 본질이 바뀌었다 여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가공 개념이 문명인의 본질에 가장 적합하다.


인간은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고 여기니까 문명인과 문명인이 일으킨 현상을 해석하려 할 때 유전자나 자연 환경 위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꾸 오류가 발생한다. 인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유전자, 자연, 문화, 문명으로 나뉘는데 다양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문명보다 유전자와 자연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면서 사회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회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3) 가공 형태


문명인은 가공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누군가는 인간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면서 인간을 상대로 실험할 때가 있다. 인간을 험하게 다루거나 야만적인 행동을 유도한다. 그렇게 하여 문명인이 문명 가공 형태를 잃어버리고 품위가 없어진 것을 보고는 인간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며 비웃는다. 어처구니 없다. 그것은 스마트폰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며 스마트폰을 험하게 다룬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하여 스마트폰이 공장 가공 형태를 잃어버리고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스마트폰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며 비웃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 소재의 본질을 보고 싶다면 자연에서 사는 짐승을 보면 된다. 어려울 것 없다.


문명으로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생활 양식이 만들어진다면, 체제는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생활 양식의 방식을 의미한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사회 체제에 맞는 것을 합리라고 할 수 있고, 사회 체제에 맞게끔 가공된 것을 합리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형태를 일부러 부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합리: 1.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 가공된 외모, 가공된 태도, 가공된 음식, 가공된 백신 등 문명인의 모든 것은 학문으로 체계화된 문명으로 가공되었다 보고 가공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하다.


문명으로 가공되지 않은 인간은 폭력 충동이 일어날 때 참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가공된 인간은 폭력 충동이 일어날 때 참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체제에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문명으로 가공된 가공 사회에서 살면서 자연 법칙인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을 사회 법칙인 것마냥 말하는 것은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회 법칙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닌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생활 양식의 방식을 의미하는 체제다.






1.2 인간


1) 가공 상태


모든 존재는 변화 이전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식: 1.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록을 찾거나 관찰 및 실험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 가공을 보자. 스마트폰 변화 이전의 상태를 파악하기 쉬운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스마트폰이 되었는지 파악하기 쉬운 인간이 얼마나 있는가? 대부분 모른다. 이것은 인간 가공도 마찬가지다.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간이 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본인 외의 변화에 대한 파악보다 본인의 변화에 대한 파악이 더 어렵다.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 가공되었지 스스로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언어를 알고 나서 자아를 자각하기 때문에, 언어 습득 이전 상태를 알기 어렵다. 대부분 언어 습득이 끝난 자아 자각 이후부터 본인 존재를 인식하고, 그 시기부터 가공을 시작했다 착각한다.


모든 존재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 순간부터 가공된다. 인간 또한 자아 자각 이전부터 가공되었다. 최초의 감각, 최초의 식사, 최초의 백신. 전부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 모든 것이 모여 인간의 본질을 바꾼다. 성장하면서 차근차근 가공된다. 언어, 대화, 의복, 노래, 놀이, 치료, 매체, 교육, 화장, 문신, 성형, 성전환 등으로 성별까지 바꾸는 가공까지 행해지기도 한다. 가공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중독을 떠올려보면 된다. 술, 담배, 마약 등과 같이 직접 물질이 영향을 끼치는 중독뿐만 아니라 일, 취미, 도박 등과 같이 물질이 없는 중독 또한 뇌내 보상 회로에 변형을 가해 본질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가공되어 본질이 바뀐 것이다. 


문명인의 손에 닿은 모든 것이 문명으로 가공되었다. 주거, 공원, 도로,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 같이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공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조차 가공되었다. 자연도 다를 바 없다. 생태계 보호, 천연 기념물 보호 등으로 자연도 인류의 손길로 가공되었다. 짐승도 인간의 손길을 통해 반려 동물이라 부르며 아끼고 있다. 짐승을 반려가 되게끔 가공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한번 문명으로 가공된 짐승은 자연에서 가공된 짐승과 달리 자연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변화 이전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개념은 일반에서 벗어난 사고 확장이 되고 나서 이해할 수 있고, 그 전에 이 개념을 이해하면 일반에서 벗어난 사고 확장이 가능해진다. 본인의 인식에서 벗어난 존재가 있음을 이해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2) 가공 인식


모든 인류는 동일 종에 속한다. 인간이 동일한 종임에도 다양한 개성을 가진 것은 사회를 이뤄 다양한 문화와 문명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짐승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같은 종의 짐승은 대부분은 본질 차이가 없다. 생활 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명인은 가공 수단에 따라 생활 양식이 크게 달라진다. 바로 이웃 나라라 하더라도 언어부터가 아예 달라진다. 유전자, 자연, 문화, 문명 순으로 가공 레벨이 달라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명인일수록 복잡한 가공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인과 문명인은 가공에 의해 명백하게 다른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동일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모든 인종이 비슷한 인간이라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공 개념으로 보면 같은 소재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스마트폰을 비슷한 스마트폰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잘못된 인식이다. 스마트폰은 가공 수단에 따라 기본 성능은 물론이고 설치된 소프트웨어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도 가공 수단에 따라 기본 능력은 물론이고 배운 학문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디지털 기술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보 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가공 수단도 비슷해지고 있다. 가공 레벨이 비슷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 가공 수단에 의한 결과 차이는 문화와 문명의 차이보다는 체제의 차이가 더 크게 되었다. 왕정과 같은 집단주의 체제에 가까운 체제일수록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되어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것으로 개인보다 본질의 차이가 적고, 민주정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 가까운 체제일수록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어 개인마다 본질 차이가 크다.


가공 개념을 이해하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유전자 변형 식품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검증되었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지적 장애나 성격 장애라 할지라도 사회 체제에 맞게끔 가공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무조건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한번 가공된 제품이라 하더라도 재가공하면 본질이 바뀌듯, 한번 가공된 인간이라도 재가공하면 본질이 바뀐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가공 자유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가공은 개인의 자유다. 육체든 정신이든 그것을 가공하는 것은 대부분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이나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모가 물려준 육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라 가르친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육체 가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인의 가공은 개인의 자유권에 속한다 의식적으로 인식했으나 어린 시절 영향 받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아 외가 멋대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어서 제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도중 가공 개념을 이해하고 부정적 관념이 대부분 사라졌다. 모든 문명인은 이미 가공된 상태기에 사회와 체제 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개인의 가공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부정적 관념을 지웠다. 가공 개념을 통해 스스로를 재가공한 것이다. 


성형, 문신, 성전환 등과 같은 낯선 방식의 육체 가공이나 방송, 게임, 커뮤니티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정신 가공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많다. 심지어 화장 같은 가벼운 가공이나 백신이나 약과 같은 필수적인 가공조차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있다. 미성년 화장 금지는 자유권 침해고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같은 것은 생존권 침해다. 적당한 화장은 자존감을 키우고 호감을 사는 것으로 사회 생활을 원활히 하게 위한 가공이고 백신이나 약은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가공이다. 대부분 가공이 잘못된 것은 생명을 위협할 다이어트나 성형 같이 소재를 파괴하거나 마약과 같이 소재 파괴와 전파로 사회 파괴를 하는 경우다. 모든 가공은 사회와 체제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가 아니라면 자유에 해당한다. 


본 모습을 사랑하라면서 다이어트, 화장, 성형 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정직이 미덕이라는 풍조에 의해 가공 형태를 버리고 무례하기 행동하기도 한다. 스마트폰의 본 모습인 스마트폰 소재를 스마트폰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가공된 스마트폰이 거짓된 존재로 느껴지는가? 문명인은 가공된 상태인 가공 형태가 본질이다. 그렇게 본 모습이 좋으면 자연으로 가서 짐승과 부대끼며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살면 된다. 가공 사회에서 가공 인간으로 살면서 가공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문명인은 자연 상태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최적의 가공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외모, 표정, 육체, 동작, 말투, 태도, 옷, 신발, 장신구 등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한 최적의 가공 형태를 유지하면 된다. 또한 사회와 체제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가 아니라면 그 가공 형태에 대한 존중을 표해야 한다.


존중과 호감은 다른 개념이다. [존중: 1.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 [호감: 1. 좋게 여기는 감정.] 귀하게 대하더라도 좋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 비싼 보석은 귀하게 대할 수 있으나, 그 보석에 대한 호감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본인의 가공 형태를 타인에게 존중을 요구할 수 있으나 호감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의 영역이다. 특정 객관적 기준으로 귀하게 대하는 것과 개인의 주관적 기준으로 좋게 여기는 감정을 가지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존중하겠으나 호감 갖지는 않겠다는 상대에게 호감을 강요하는 것은 가치 강요다. 






1.3 자아


1) 자아 분석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를 가리키는 용어에는 자아가 있다. [자아: 1.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 자아 분석으로 자아 파악이 되어야 자아 소재와 가공 영역을 구분하는 것으로 가공 개념을 이해할 수 있고, 자아가 일으키는 현상인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아의 모양, 성질, 구조, 원리, 동력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모양. 자아는 생물체의 육체 외부의 의식 의지 권한이 있는 뇌 영역이 학습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각한 것을 가리킨다. 자아는 외부에서 깃든다거나 뇌에서 만들어져 의지 권한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지 권한이 있는 뇌 영역이 자각하면서 자아가 된 것이다.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을 가진 뇌 영역으로 그 외의 권한을 가진 뇌 영역은 자아 외가 된다. 


둘째, 성질. 자아는 환경으로 가공할 수 있다. 같은 소재라도 자연에서 가공한 자아와 문명에서 가공한 자아는 다르게 된다. 지성을 가진 지적 자아는 지능이 높은 뇌를 가진 상태에서 문명에서 가공했을 때 나타난다. 그 외는 지능이 낮거나 지능이 높아도 자연에서 가공했을 때는 지성을 가진 지적 자아가 될 수 없다. 


셋째, 구조. 뇌의 권한은 자아와 자아 외로 나뉜다. 자아는 육체 외부의 의식 의지 권한이 있다. 자아 외는 유전자, 기억, 세포 신호를 토대로 예측 계산하여 무의식 발상과 동작 실행 권한이 있다. 이 구조는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이어서 자아 권한이 있는 뇌 내 영역이 어떤 세포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세포가 주기적으로 생성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포 하나에 자아 권한이 있다면, 해당 세포 손상시 바로 자아를 잃게 되므로 보통 대량의 세포가 모여 자아 권한을 얻을 것이다. 그것을 고려하면 만약 생성되지 않더라도 변화는 되고 있으므로 자아는 계속 달라지게 된다. 그렇게 계속 달라지는 자아 하나를 자아 요소로 구분하고, 자아 요소들이 기억을 공유하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자아 존재로 구분한다. 자아 요소는 기억과 연동되어 자아 존재가 되는 것으로, 기억 상실로 자아 요소와 기억이 분리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논리적으로 자아 요소는 단순한 트리거로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자아 요소가 달라지더라도 기억이 이어지면 같은 자아 존재가 된다. 자아는 트리거, 자아 외는 논리 회로 동작 기관으로 기억이란 소프트웨어대로 작동하므로 자아 존재는 기억에 의한다. 


넷째, 원리. 자아는 육체 외부 의식 의지 권한이 있고, 자아 외는 육체 내외부 무의식 발상과 동작 실행 권한이 있다. 세포의 신호로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과 동작 실행을 하면 자아가 의식 의지로 결정한다. 자아와 자아 외의 의지와 실행을 반복하면서 인간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 자아가 의식 의지를 가질 때에는 자아 외가 유전자와 기억과 세포 신호를 토대로 예측 계산하여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자아가 의식 의지를 가지지 않을 때에는 자아 외가 무의식 실행을 하기도 한다.


다섯째, 동력.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이 있는 뇌의 영역이기 때문에 육체를 동력으로 삼아 움직인다. 문명 가공으로 동력으로 삼는 육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욕, 수면욕, 배설욕 등의 충동을 제어하게 된다. 과한 억압으로 충동을 제어하면 욕구나 욕망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면서 과하게 욕구를 참아 정상적인 동력 공급이 이뤄지지 않을 수가 있다. 






2) 자아 성장


육체 외부의 의식 의지 권한을 가진 뇌의 영역이 스스로를 자각하여 존재를 인식하면 자아가 된다. 환경 가공을 통해 의지 제어가 능숙해지면서 자아 발달이 되나 육체 성장이 지속되면서 자아 형성이 고정되지 않고 불안정한 유동 자아인 상태가 된다. 2차 성징이 시작하는 약 14세 시기에 성년과 비슷한 육체가 되면서 고정된 자아 형성이 시작된다. 육체는 성년 수준의 제어가 가능해지고 정신은 성년 수준의 사리분별이 가능해진다. 사춘기의 일탈은 2차 성징 이후 성년과 비슷한 육체와 정신을 가졌음에도 2차 성징 이전의 억압이 지속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통상 2차 성징이 끝나는 약 18세 자아 형성이 끝이 나서 형상을 이루면서 고정 자아인 상태가 된다. 2차 성징의 시작은 10~14세, 2차 성징의 끝은 15~17세라고 하는데, 보편성과 사회 나이를 고려해 14세와 18세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기는 평균을 의미하는 것으로 빠르거나 늦게 형성될 수도 있고 빠르거나 늦게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고정된 자아 형성이 시작되는 2차 성징이 보통 기본 가공의 시작이 되고, 고정된 자아 형상을 이룬 2차 성징의 끝이 기본 가공의 끝이 된다. 기본 가공이 끝나면 웬만하면 인간이 바뀌지 않게 된다. 흔히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본 가공이 끝났기 때문이다. 자아가 본질이 변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으면 추가 가공이 되고, 본질이 변하면 재가공이 된다. 언어를 아는 지적 자아에 한하여 기본 가공이 끝난 인간도 재가공을 하면 본질이 변할 수 있다. 


나이는 자아 나이와 사회 나이로 나뉜다. 자아가 인식하는 나이와 사회에 기록된 나이다. 인간은 사회 나이를 오른다고 하여 자아 나이가 오르지 않는다. 특정한 가공 과정을 거쳐야 자아 나이가 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0세 육체로 30년을 살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의 자아 나이는 10세인가 40세인가? 사회 나이는 40세이겠지만 자아 나이는 10세일 확률이 높다. 자아 나이는 육체 변화, 환경 변화 등을 통해 의식적 절차로 자아가 인식해야 오르게 되는데, 육체와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인식도 변하지 않아 자아 나이가 오르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의식적 절차는 학교에 간다거나 새해가 되었으니 떡국을 먹는다거나 연령대에 유행하는 노래를 듣는다거나 같은 사회 나이에 맞는 생활 양식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런 의식적 절차를 겪지 않으면 자아 나이는 보통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도적 또는 사건사고로 자아 나이가 오르지 않은 인간은 자아 나이와 사회 나이의 괴리를 겪게 된다. 


과거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연령별 의무가 지정되어 사회 나이에 따라 의무를 거칠 때마다 자아 나이도 같이 오르게 되었다. 학교에 간다. 일을 한다. 결혼을 한다. 아이를 낳는다. 개인이 하지 않으면 집단에서 강요하여 하게 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현재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보장됨에 따라 연령별 의무가 줄어들어 많은 이들이 보편적 학교에 가는 미성년 시기나 20대 초반에서 자아 나이가 오르지 않는다. 현재 많은 성년의 미성숙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체제의 교육 방식이란 가공 수단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체제의 교육 방식은 연령별 의무가 있다 전제하여 생산, 결혼, 출산 등에 대한 교육 과정이 없거나 적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런 교육 과정으로 성장한 이들은 생산, 결혼, 출산에 관한 판단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미성년 성을 터부시하는 종교와 그에 영향을 받은 여성주의와 다양한 매체의 생산, 결혼, 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 유도에 의해, 그런 것을 제대로 판단 못해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부정적으로 보고 하지 않게 되면서 사회 전체가 파탄나게 되었다. [미개한 사회에서 신성되거나 속된 것, 또는 깨끗하거나 부정하다고 인정된 사물 · 장소 · 행위 · 인격 · 말 따위에 관하여 접촉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거나 꺼리고, 그것을 범하면 초자연적인 제재가 가해진다고 믿는 습속.] 이성 관계 갈등, 결혼 및 출산 저하, 경제 활동 둔화 등은 기본적으로 집단주의 체제의 교육 방식 가공과 미성년 성 터부시와 매체의 부정적 인식 주입 때문이다. 그것으로 한국은 다양한 차별이 만연하고 이성을 혐오하고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로 죽음으로 향하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연령별 의무를 전제한 교육 과정에서 벗어나 미성년 시기에 가치 생산, 이성 교제, 성관계, 성문화 등을 전부 교육하는 가공을 해야 한다. 사회에서도 미성년 성을 터부시하거나 생산, 결혼, 출산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연령별 의무가 없어도 개인이 알아서 생산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연령별 의무가 없는 한 자아 나이는 반드시 사회 나이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회 나이에 따른 연령별 의무를 버리고, 자아 나이가 보편적 연령별 의무인 고등학교 졸업 시기인 약 19세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산과 결혼과 출산이 가능하도록 가공해야 한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이나 왕정이나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이른 가치 생산, 이른 이성 교제, 이른 성관계가 아동과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 때에 잘못된 것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여 그것에 대한 강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므로 되려 그것을 개인에게 권장해서 자발적으로 행하게끔 해야 사회와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 






3) 자아 영역


자아는 자아의 권한이 있어 어느 정도 파악이 되고 있으나 자아 외는 자아의 권한이 없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가공 이전의 상태와 비슷하게 자아 외와 무의식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다. 인간의 행동에 자아 외가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자아 외를 이해해야 가공이 수월해진다. 예를 들어 음식 광고를 보고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고 하자. 이 때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것은 자아의 의지인가 아니면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인가? 자아 외의 이해는 이것부터 시작한다.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이 있다면 자아 외는 무의식 실행 권한이 있다. 의지와 실행이 분리되었다. 자아의 의지를 자아 외가 구체적으로 실행한다. 자아가 음식 광고를 보고 음식을 먹고 싶어진 것은 자아 외가 세포 신호와 유전자와 기억을 바탕으로 예측 계산하여 음식을 먹고 싶다는 발상을 했기 때문이다. 자아는 그 발상을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의지 권한이 있다. 자아의 의식 의지가 강하면 무의식 발상을 제어할 수 있고, 자아의 의식 의지가 약하면 무의식 발상을 제어할 수 없다. 자아의 의지와 자아 외의 실행에 대해 다양한 예시를 통해 알아보자.


첫째, 예측 계산. 감각, 감정, 욕구, 욕망, 중독 등 자아의 의식 의지를 제외하면 자아 외의 예측 계산에 의한 무의식 발상이다. 세포 신호를 느끼고자 하는 의지는 자아의 권한이나 세포 신호를 느끼는 것을 예측 계산 실행하는 것은 자아 외의 권한이다. 감정은 연기가 아니면 자아의 의지가 아닌 자아 외의 실행으로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자아 외가 예측 계산하여 무의식 발상으로 먼저 느끼게 하고 나서 자아가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게 된다.


둘째, 반복 학습. 자아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때 세부적인 계산을 하지 않는다. 자아 외가 반복 학습하여 행동을 예측 계산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세부적인 계산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좌표를 계산해서 움직이는 인간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자연스러운 것은 자아가 아닌 자아 외가 예측 계산에 의한 무의식 동작을 해주기 때문이다. 자아가 팔을 뻗겠다는 의지를 가지면 자아 외가 예측 계산하여 자연스럽게 팔을 뻗게끔 동작한다. 자아는 자아 외의 예측 계산으로 보조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고 있다. 


셋째, 환경 적응. 자아는 자아 외가 학습해야 예측 계산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 시차 적응이나 긴급 대응 훈련이 필요한 것은 자아 외가 한번 학습해야 예측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익숙한 것을 편하게 느끼는 것은 이미 자아 외가 예측 계산이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 학습하지 않은 상황이 닥치면 자아 외가 예측 계산을 하지 못하여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굳게 될 수 있다.


넷째, 매체 영향. 자아는 매체의 영향으로 자아 외가 무의식 발상을 한 것을 본인의 발상으로 착각한다. 한번 매체에서 나온 사상이 머릿속에 들어가면, 비슷한 조건일 때에 자아 외가 예측 계산하여 무의식 발상을 하게 한다. 그러면 그 사상이 본인의 발상으로 여기면서 매체와 유사한 발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 인터넷 등 매체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매체 선동이 유효한 것은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서 학습한 사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다섯째, 습관 의존. 자아는 자아 외의 예측 계산에 의한 무의식 발상으로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 무의식 발상에 의존하면서 습관대로만 하게 되는 습관 의존이 발생한다. 이는 자아 나이를 먹을수록 의존성이 높아져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자아 외의 예측 계산은 세포 신호와 유전자와 기억을 토대로 이루어지는데, 자아 나이가 높아질수록 기억의 영향이 커지면서 쌓은 기억대로 동작하게 된다. 과거 자아의 의지로 만들어진 기억에 의한 습관에 의존하면서, 자아 존재는 현재의 자아 요소가 죽어 의지를 잃고 과거의 자아 요소들의 좀비가 된다.


여섯째, 중독 충동. 자아는 자아 외의 예측 계산에 의한 무의식 발상에 의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음식 중독에 걸려 비만이 된 인간이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하자. 그런데 자아 외가 비슷한 조건일 때 예측 계산하여 음식에 관한 무의식 발상을 하면, 그 발상에 의한 충동으로 음식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중독일 때 충동은 자아의 의식 의지가 아닌 자아 외의 예측 계산에 따른 무의식 발상에 의한 것이므로 자아의 의식 의지로 충동을 이겨내어 중독에서 벗어난 상태를 자아 외가 반복 학습해야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에 의한 충동이 줄어들 수 있다.


일곱째, 참극 발상. 자아의 의지 없이 자아 외가 떠올린 것은 자아의 의지가 아니다. 애초에 권한 밖이다. 자아가 아무리 의식 의지를 가지고 떠올리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아 외가 무의식 발상을 하면 떠올릴 수 있고 하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다. 트라우마는 자아의 의식 의지가 원치 않음에도 자아 외가 무의식 발상을 했기 때문이다. 발상 자체가 자아의 권한 밖에 있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가 없을 수 있고,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릴 수가 있을 수 있다. 중독 충동 제어와 마찬가지로 자아 외가 반복 학습을 해야 무의식 발상이 줄어들 수 있다.


여덟째, 수면 자각. 자아는 수면 중 꿈을 제어하는 것은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권한이 없어 보통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꿈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면 꿈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각몽이다. 일반적이지 않아 자료만 보고 추측하는데, 통상 꿈은 자아 외의 권한이나 꿈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꿈 속에서 의지는 자아의 권한이 되는 것 같다. 


아홉째, 의식 상실. 자아는 무의식 상태에서 의지 권한이 없다. 잠결이나 만취 등으로 의식을 상실했을 때 움직이는 행동은 자아 외가 예측 계산해서 동작하게 하는 것이다. 무의식 습관 동작은 자아의 의지 권한도 없다. 자아 외를 학습시키는 것으로 자아 외의 예측 계산 제어를 간접적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열째, 세포 제어. 자아의 의지로 세포를 제어하지 못한다. 세포 제어는 자아가 아닌 자아 외에 권한이 있다. 육체 내부의 세포 제어는 자아의 의지 권한도 없다. 육체 외부의 의지 권한을 통해 세포 제어를 간접적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예시로 살펴보았다. 자아와 자아 외의 권한 차이로 발생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췄다. 다른 변수에 의해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해당 변수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이 있고 자아 외가 무의식 실행 권한이 있기 때문에 의식 의지 능력이 낮아지면 자아의 뇌 기능이 어떤 이유로 저하된 것일 수 있고, 무의식 발상과 동작의 능력이 낮아지면 자아 외의 뇌 기능이 어떤 이유로 저하된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자아와 자아 외의 권한 차이에 의해 가공 개념이 적절하게 된다.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아 외가 학습하여 예측 계산한 것을 무의식 발상과 동작을 실행하기 때문에,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공되게 된다.






4) 자아 발상


자아 발상은 의식 의지 있는 무의식 발상과 의식 의지 없는 무의식 발상으로 나뉜다. 자아가 의식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할 때가 의지 있는 무의식 발상이고, 자아가 의식 의지를 가지지 않고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의지 없는 무의식 발상이다. 의지는 자아의 권한이나 실행은 자아 외의 권한이기 때문에 자아의 의지만으로 발상하기가 어렵다. 완전 기억 능력과 같은 기억력 또는 뛰어난 새로운 발상과 같은 창의력은 자아의 의지와 자아 외의 발상 능력이 더해진 결과다.


기본적으로 자아 의지가 있어야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을 선별하여 원하는 기억이나 창의를 떠올릴 수 있다. 자아 의지가 있고 나서 발상은 뇌내 저장된 정보를 떠올리는 기억 발상과 뇌내에서 몰랐던 것을 떠올리는 창의 발상으로 나뉜다. 기억 발상은 고정 자아와 고정 관념일 때 고정되어 저장된 정보를 떠올릴 때 유리하고, 창의 발상은 유동 자아와 유동 관념일 때 유동되어 몰랐던 것을 떠올릴 때 유리하다. 고정 자아는 자아가 변하지 않을 거라 여기면 고정된다. 고정 관념은 대상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의심하지 않을 때 고정된다. 유동 자아는 자아가 변할 거라 여기면 유동된다. 유동 관념은 대상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의심할 때 유동된다. 


기억 발상은 고정 자아와 고정 관념이 있는 것이 유리한데, 자아와 관념을 고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아 나이면 된다. 단 지나치게 많이 자아와 관념이 고정되거나 자아 나이가 높으면 새로운 의견을 수용하는 것도 어렵게 되거나 과한 습관 의존으로 현재 자아 요소가 죽을 수 있으므로, 통상 자아 나이를 20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고정 자아와 고정 관념이 있어도 자아가 의지를 가지고 자아 외의 무의식 발상을 제어하면 새로운 발상이 가능한데, 과한 습관 의존으로 현재 자아 요소가 죽어버리면 자아 의지도 잃게 되는 것으로 무의식 발상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발상도 불가하게 된다. 성년 이후에는 연령별 의무도 징병 말고는 없다시피 하여 자아 나이를 20대로 두는 것은 별 상관 없다. 자아 나이가 이미 20대를 넘었을 때에 자아 나이를 20대로 낮추고 싶다면, 고정된 자아와 고정된 관념을 부정하여 스스로를 재가공 한번 하면 된다. 가공 개념을 이해하고 논리를 통해 무의식에 남은 육체 가공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 관념을 지운 것과 같이 하면 된다. 


창의 발상은 유동 자아와 유동 관념이 있는 것이 유리한데, 자아와 관념을 유동하기 위해서는 자아 나이를 2차 성징 시작인 14세에서 2차 성징 끝인 18세 사이에 두는 것이 좋다. 2차 성징 시기 이후면 고정 자아가 형상을 이뤄 그대로 고정 될 수 있고, 2차 성징 시기 이전이면 자아가 과하게 유동적이다. 고정 자아가 형상을 이루기 전에 유동 자아 상태로 둬서 유동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자아 나이를 사춘기 시기에 두지 않더라도 유동 자아가 가능하면 상관 없는데, 유동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식하기 쉬운 대상이 있는 편이 좋다. 사춘기 시기에 자아 나이를 두는 것은 사춘기 시기의 혼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동 자아가 가능한데, 그렇지 않은 시기는 그런 혼란이 없어 참고할만한 기준이 되지 못하여 유동 자아가 되더라도 보통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유동 관념은 유동 자아가 되면 수월한데, 모든 관념이 유동적일 수는 없고 의식으로 인식한 관념은 유동적일 수가 있다. 유동 자아와 유동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의 발상을 하다보면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현재 자아 요소가 발상한 것이 과거 자아 요소가 이미 발상한 대상일 때가 있다. 그럴 때 발상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발상을 한다. 자아 나이가 사춘기를 넘었을 때에 자아 나이를 사춘기 시기로 낮추고 싶다면, 고정된 자아와 고정된 관념을 부정하여 스스로를 재가공하면 된다. 자아 나이를 20대로 낮추는 것보다는 좀 더 힘들 수 있다. 


자아 나이가 낮으면 발상에 유리하나, 그렇다고 해서 발상 연습을 하지 않으면 발상 능력이 오르지 않는다. 기억 발상은 암기한 것을 발상해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창의 발상은 새로운 발상을 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기억하는 것과 기억한 것을 발상하는 능력은 다른 능력이다. 기억되지 않아서 발상이 안되면 기억력 문제고 기억되었는데 발상이 안되면 발상력 문제다. 알고 있던 것을 발상하는 능력과 알고 있지 않던 것을 발상하는 능력은 다른 능력이다. 자아 의식 의지로 알고 있던 것을 자아 외가 무의식 발상하는 능력은 기억 발상력이고 자아 의식 의지로 몰랐던 것을 자아 외가 무의식 발상하는 능력은 창의 발상력이다. 자아 의식 의지로 몰랐던 것이 창의 발상이기 때문에 발상한 것이 사회에서 새롭지 않더라도 창의 발상 연습이 가능하다. 창의 발상을 연습하여 능력을 올리면 사회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상할 수 있게 된다.






1.4 가공 인간


1) 소재 한계


문명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문명으로 가공되어 문명인이 된다. 자연 환경에서 사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자연에 대해 배우듯이 문명 환경에 사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문명에 대해 배운다. 육체 유지 방법, 사회 적응 방법 등을 통해 우선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런 문명 가공은 보통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통해 행해진다. 교육자가 교육을 하는 이유나 학생이 교육을 받는 이유는 각자 다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생존을 기초로 한다. 


문명 가공을 할 때는 인간 소재에 반드시 한계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소재도 물리 한계가 있듯이 인간 소재 또한 물리 한계가 존재한다. 여기서 물리 한계는 인간의 근육 활동 육체 한계와 두뇌 활동 정신 한계를 모두 포함한다. 


첫째, 가변 소재 한계. 가변 소재 한계는 소재 한계가 가변한 것을 말한다. 자아가 의지를 가지고 소재를 단련하면 소재 한계를 넘을 수 있다. 소재 한계는 최종 물리 한계와 현재 물리 한계와 현재 심리 한계가 있다. 알기 쉽게 숫자로 비유하겠다. 최종 물리 한계가 200이고 현재 물리 한계는 100이고 현재 심리 한계가 80로 가정하겠다. 인간은 보통 현재 심리 한계인 80까지 버틸 수 있고, 극한에 다다르면 심리 한계를 넘어 현재 물리 한계인 100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현재 물리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현재 심리 한계를 넘어선 단련을 지속하면 현재 심리 한계와 현재 물리 한계가 확장되게 된다. 그것을 보통 성장이라 부른다. 현재 심리 한계와 현재 물리 한계는 매번 비례하며 확장되지는 않는다. 현재 심리 한계와 현재 물리 한계를 과하게 확장하다 육체나 정신이 붕괴하기도 한다. 죽거나 미친다는 것이다. 근육 단련에는 주기적인 휴식이 필요하듯, 소재 한계 확장 또한 주기적인 휴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성장하다 최종 소재 한계에 도달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 


둘째, 불변 소재 한계. 불변 소재 한계는 소재 한계가 불변한 것을 말한다. 자아의 의지와 관련 없이 단련을 하든 말든 소재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최종 물리 한계 또는 육체 성질 한계를 말한다. 최종 물리 한계는 보통 인간이 도달하는 일이 많지 않아 알기 어렵다. 스포츠를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인류의 100m 달리기 최고 속도의 공식 기록은 우사인 볼트의 9.58초이다. 보통 인간은 이 이상 최종 물리 한계를 넘기 어려울 것이다. 최종 물리 한계 수치는 육체 상태마다 다를 수 있으나 최종에 다다르면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일하다. 육체 성질 한계는 자아 의지로 해결 불가능한 알레르기 같은 것이 있다. 음식 알레르기나 짐승 알레르기 등은 자아 의지로 극복이 불가능할 수가 있다. 먹고 싶어도 못먹고 가까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불변 소재 한계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소재 한계는 보통 현재 심리 한계로 결정되기 때문에 주관적이게 된다. 그런 주관적 기준에 사회 모두가 맞출 수는 없다. 특히 사회 역할이 그렇다. 특정 역할에 필요한 소재 한계를 견딜 수 있는 인간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주어진 자격 내에서 소재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방관의 활동 같은 강도 높은 활동을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현재 심리 한계를 가진 인간은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소방관 역할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소재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방관 역할에 맞는 평균 현재 심리 한계를 가정하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방관 역할을 수행 중에 현재 심리 한계에 다다르면, 그런 것은 보통 소방관 본인이 가장 잘 알기 쉬우므로 관계자에게 말을 하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관계자는 소방관의 소재 한계를 보고 한계 확장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소재 한계로 판단하고 휴식을 취하게끔 해야 한다. 만약 소방관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현재 심리 한계인 상태라면 다른 역할을 맡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소방관이 특수한 상태에 놓여 사리분별이 어렵다면, 소방관 본인이 현재 심리 한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관계자는 지켜보다 휴식을 취하게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소재 한계가 발생한다. 감각, 감정, 욕구 등도 뇌내 처리에 의하여 현재 심리 한계가 발생한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 관계에 대한 현재 심리 한계에 따라 내향성과 외향성이 결정되기도 한다. 인간 관계 또한 현재 심리 한계에 의한 것이므로 단련하면 내향성이 외향성으로 바뀌기도 할 것이다. 


현재 심리 한계는 심리를 제어하는 것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특정 대상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상태에서 대상을 대할 때 느끼는 현재 심리 한계는 다를 수 있다. 인간 심리는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있기 때문에 인간 심리에 의한 한계를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 






2) 가공 한계


소재 한계 내에 가공 한계는 없다. 유전자 또는 환경에 의한 소재 한계는 엄격하다. 그러나 그 한계 내에서는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 극한까지 단련한 스포츠 선수를 제외하면 최종 물리 한계를 아는 인간은 드물다. 특히 지능은 더욱 더 그렇다. 지능의 한계를 아는 인간은 많지 않다. 지능 검사 등은 현재 소재 한계에 해당하는 것이지 최종 소재 한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의 선천적 재능이 재능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유전자 핑계를 대며 시도하지 않고 포기한다. [재능: 1.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


현재 심리 한계가 인간의 한계를 결정해버리는 일이 잦다. 뭔가 시도하기 전에 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현재 심리 한계에 부딪치고 포기한다. 현재 물리 한계는 100까지 가능한 것을 현재 심리 한계가 80까지만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공개 발언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재 심리 한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고 여기며 그런 것도 선천적 재능에 의한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분명 소재 한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일 종으로 그 차이가 엄청 크지는 않다. 인간의 한계는 현재 심리 한계로 결정되기 때문에 현재 심리 한계를 넘으면 일반 인간이 하는 것은 다른 일반 인간도 다 할 수 있다. 



소재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가공하려면 자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이 있고 자아 외는 무의식 실행 권한이 있다. 자아가 무엇을 좋아하도록 느끼게끔 실행하는 것은 자아 외의 권한이다. 꽃 향기를 맡고 그것이 기분 좋다 느끼게 만드는 것은 자아가 아닌 자아 외다. 이렇듯 취향을 느끼게 실행하는 것은 자아의 권한이 아니다. 그러나 의지 권한이 있기 때문에 접촉의 자유는 있다. 무엇을 경험할지 결정하는 것으로 자아 외가 무엇을 좋아하게끔 느끼게 실행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축구와 야구 중 축구를 먼저 보면 축구를 좋다 느끼는 것으로 팬이 될 수 있고 야구를 먼저 보면 야구가 좋다 느끼는 것으로 팬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본인 취향을 가공할 수 있다. 징크스나 루틴도 자아의 의식 의지가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을 제어하기 위한 것 중 하나다. 징크스나 루틴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을 제어하는 것이다. 


자아의 의식 의지로 본인 취향으로 결정하고 접한 것을 자아 외가 무의식 실행으로 좋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자아가 의식 의지로 반복 학습하면 자아 외가 무의식 실행으로 좋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자아 외를 설득하면 된다. 자아 외는 유전자와 자아 요소의 의지로 만들어진 기억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아 외를 바꾸는 것은 바꾸기 어려운 유전자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자아 요소들을 설득하는 것에 해당한다. 가공 개념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자아 요소를 설득하여 개인의 가공을 부정적으로 여기던 관념을 바꾸는 것으로 자아 외를 바꾼 것과 같이 하면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필요한 것은 알아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강한 쾌락을 주는 도박이나 마약에 의한 몸 상태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강한 쾌락을 한번 알고 나면 자아의 의식 의지와 별개로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으로 도박이나 마약을 식욕과 같은 기본 욕구로 여기며 갈망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기본 욕구가 될 정도가 되면 본질이 바뀌는데, 보통 그것이 본인의 의지가 아닐 확률이 높으므로 원치 않는 재가공에 해당하게 된다. 도박은 낮은 확률에 의한 쾌감으로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으므로 현금 도박을 경계하면 되고, 마약은 물질에 의한 쾌감으로 술 담배뿐만 아니라 식사로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과한 마약을 경계하면 된다.

 

소재 한계 내에 가공 한계는 없으나 문명에 최적화된 가공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문명에 적합한 언어, 태도, 외모, 욕구, 욕망 등을 갖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뭐든지 가능하다고 문명에 적합한 상태로 가공된 문명 가공 형태를 일부러 깰 필요는 없다. 폭력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을 스포츠가 아닌 범죄로 저지르면 문명 가공 형태가 깨지게 된다. 수많은 명품을 두르고 있어도, 그 명품을 두른 인간의 문명 가공 형태가 깨지게 되면 짐승이 명품을 두른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문명인에게는 문명에 적합한 가공 형태를 만들 자유가 있다. 자아는 의식 의지 권한이 있지 무의식 실행 권한이 있지 않으므로, 문명에 부적합한 것은 처음부터 겪지 않는 것이 가공 형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3) 소재 파악


자유로운 가공을 위해서는 소재 한계 파악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통 소재 한계 파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최종 물리 한계는 보통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스포츠 기록 정도로 육체는 유추할 수는 있다. 현재 물리 한계는 극한에 다다라야만 일부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보통으로는 알 수가 없다. 현재 심리 한계는 주관으로 한계를 느낄 때 파악이 가능하다. 그러나 심리 상태가 좋지 못하면 현재 물리 한계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현재 심리 한계일 수가 있어 제대로 파악했다 하기가 어려워진다. 


A는 현재 물리 한계 100에 현재 심리 한계가 70이라 가정하고 B는 현재 물리 한계 100에 현재 심리 한계 50이라 가정하자. 그러면 겉으로 보여지는 재능은 A가 더 뛰어나 보일 수 있다. 그러나 B가 현재 심리 한계에서 벗어나 80이 되면 재능은 B가 더 뛰어나 보일 수 있다. 이걸 알기 쉬운 용어로 말하면 자신감 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심리 한계에 의해 인간의 한계가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 재능과 노력의 비율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재능은 비슷했는데 현재 심리 한계 차이로 재능이 다른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은 보통 자신감이 높을 것을 고려하면 현재 심리 한계가 다른 이들보다 높았을 것이다. 재능이 높아보였던 것이 현재 물리 한계가 아닌 현재 심리 한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면, 성공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현재 심리 한계만 벗어나면 성공한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가능한 높은 현재 심리 한계 상태여야 소재 파악이 수월해지게 된다.


유전자 검사, 지능 검사, 신체 검사 등을 현재 심리 한계가 높은 상태에서 검사하여 가능한 현재 물리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영양분과 스트레스 유무도 고려해야 한다. 비슷한 유전자라 하더라도 영양분과 스트레스 유무에 따라 소재가 다를 수가 있다. 그렇게 소재를 제대로 파악해야 자유롭게 가공이 가능해진다.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가?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본인의 소재를 파악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최적화된 가공을 해야 한다. 소재 파악은 혼자서 하기 어려우므로 교육 기관에서 주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소재 파악은 개인의 의지로 행해져야 한다. 타인이 멋대로 소재 파악한다고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 특정 개인에게 면접관이 본성을 보겠다고 압박 면접을 하거나 연인 부모가 본성을 보겠다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타인이 그렇게 본성을 보겠다고 소재 한계를 멋대로 파악하면 의외로 쉽게 문명 가공 형태가 깨질 수 있다. 현재 심리 한계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명 가공 형태가 깨지면 문명 사회에 부적합하게 되면서 사건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럴 때 사건사고의 원인은 누가 되겠는가? 남을 실험하고 싶다면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건사고에 대한 책임을 질 생각을 해야 한다. 인간을 실험하고 나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한들 사건사고의 원인은 실험한 인간이 된다.






4) 가공 파악


기본 가공은 보통 2차 성징 시작에서 2차 성징 끝 사이에 행해진다. 2차 성징 시작 시기에 육체 기능이 대부분 동작하고, 자아가 고정되어 고정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시작은 10~14세, 끝은 15~17세로 개인 편차가 심하여 시작은 14세, 끝은 18세로 정해둔다. 2차 성징 이전은 기본 가공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기본 가공 준비에 해당한다.


기본 가공은 현재 심리 한계와 현재 물리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다. 기본 가공은 체제, 감각, 가치, 통치, 성애를 통해 문명인이 되기 위한 기본을 마련하고, 동력, 능력, 학문 등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결정한다. 개인별 성장 동력을 찾아 능력을 키우고 학문을 하는 것으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한계가 확장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최종 물리 한계까지 성장한다. 보통 일반적으로 선천적 재능이라 여기는 것은 초기 심리 한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최종 물리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초기에 빠른 성장을 했더라도 후기에 성장이 더뎌지거나 최종 소재 한계가 낮을 수 있고, 초기에 느린 성장을 했더라도 후기에 성장이 빨라지거나 최종 소재 한계가 높을 수 있다.


추가 가공은 기본 가공에 추가로 가공하는 것으로 본질을 바꾸지는 않는다. 과거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관습에 따른 연령별 의무가 있었다. 지금과 달리 결혼 시기, 생산 시기, 출산 시기 등이 다 정해져 있었다. 만약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하도록 강요했다. 그런 의무를 행할 때마다 육체 변화와 환경 변화를 인식하면서 추가 가공이 되었다. 동시에 자아 나이도 사회 나이를 따라가게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현재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법적으로 강제되는 교육의 의무와 남성의 경우 징병의 의무를 제외하면 관습에 따른 연령별 의무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추가 가공도 개인별로 편차가 심해지게 되었다. 보편적 시기에 비슷하게 추가 가공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 성장을 자각하는 시기에 추가 가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인별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에는 법적 의무 시기에 추가 가공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신세대는 성장을 해도 자아 나이가 20대 초반일 확률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미성년 시기에 가치, 성애 등에 대한 가공이 미비하여 연애, 생산, 결혼, 출산 등이 저하되는 것으로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사회 전체가 파탄났다.


재가공은 기본 가공을 다시 가공하여 본질을 바꾸는 것이다. 자아의 본질을 바꾸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아는 기억을 공유하는 것으로 같은 자아 존재가 되기 때문에 특정 자아 요소 시기에 자아의 본질을 바꾸더라도 기억을 공유하면 같은 존재가 된다. 재가공은 변화의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 하거나, 다른 체제인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하거나, 가공 형태가 파괴되어 범죄를 저지를 것 같거나 저질렀을 때에 사회에 적합하기 위해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제대로 재가공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불법 종교이나 불법 도박에 빠졌을 때에 어떤 식으로 본질이 바뀌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려울 뿐이다.



가공 대상은 크게 육체와 정신으로 나뉜다. 육체 가공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아니기에 따로 다룰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육체의 어느 부위를 가공하려면 어떤 방식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알기가 쉽다. 먹는 음식, 수면 시간, 단련 방법 다 공개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정신 가공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간의 기본은 유전자에 의한다. 기본적인 생각과 행동의 구조와 원리는 유전자에 의한다. 유전자에 설계된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를 익혀 체계적인 생각과 행동이 가능해지면서 유전자와 사상의 영향력 경쟁이 시작된다. 보통 문명 가공 레벨이 높을수록 생각과 행동에서 구조는 유전자의 영향이 크고 원리는 사상의 영향이 크고, 문명 가공 레벨이 낮거나 형태가 무너질수록 구조와 원리 모두 유전자의 영향이 커지게 된다. 환경은 유전자와 사상 둘 다 적용되는 전제다. 


문명 가공 레벨이 높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리는 사상의 영역이 커진다. 유전자 구조 내에서 문명인이 기본 욕구를 느끼게 되면 문명으로 가공된 원리에 의해 기본 욕구 대상이 결정된다. 유전자 구조 내에서 식욕이 생긴다. 식욕이 생기면 기억에 존재하는 음식 중에서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에 의해 음식이 결정되어 자아에 전달한다. 전달 받은 자아는 그 음식을 자아의 의식 의지로 먹을 것을 결정한다. 먹기로 결정하면 식사를 하고 먹지 않기로 결정하면 또 다른 음식을 떠올리도록 자아 외에게 전달한다. 일반 문명인의 생각과 행동의 구조와 원리는 보통 이런 식이다. 


이런 원리는 사상을 기본으로한 논리 회로로 보면 이해가 쉽다. [논리 회로: 1. 논리 소자를 사용하여 구성한 회로. OR, NOT, AND 회로 따위의 논리 연산을 하는 회로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논리 회로는 디지털 기술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가공과 비슷하게 인간의 가공을 파악할 때에 가장 적절해 보여서 쓰도록 하겠다. 사상 논리 회로에 유전자, 환경, 사상 등의 조건이 더해져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나오게 된다. 논리 회로의 순서는 사상의 영향력에 따라 정해진다. 비슷한 논리 회로가 있을 때 영향력이 높은 것부터 적용된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때 손이 아닌 식기 도구를 쓰는 것은 식기 도구를 쓰는 논리 회로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사상은 강제력이 높은 것부터 영향력이 높게 된다. 가장 영향력이 높은 사상은 지금까지는 강제력이 높은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가치였다. [도덕: 1.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윤리: 1.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2. 인간 행위의 규범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도덕은 학문 이전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 윤리는 학문 이후의 옳고 그름을 말한다. 모든 옳고 그름이 학문화가 되지 않았으므로 도덕과 윤리는 사회에서 모두 쓰인다. 도덕과 윤리에 있는 옳고 그름이 자연법이 되고, 자연법을 기준으로 실정법이 만들어졌다. 그 실정법을 기준으로 사회의 질서가 정해진다. 통상 집단주의인 왕정 체제에서의 질서는 이런 구조로 이루어졌으나, 개인주의인 민주정 체제에서는 현대 체제가 더해지면서, 실정법에 도덕과 윤리로 만들어진 자연법보다 체제의 기초인 헌법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아직 도덕과 윤리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와 체제의 영향력이 비슷한 상태다. 도덕과 윤리는 집단주의 체제에 속한다면 현재 체제는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는 것으로 서로의 성질이 달라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에 의해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이 나오고 있다. 이런 것이 현대 문명의 혼란을 부른 가치 충돌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사상은 도덕과 윤리 또는 체제 가치가 된다. 



보편적 윤리인 이타주의를 통해 논리 회로를 이해해보자. [이타주의: 1. 사랑을 주의로 하고 질서를 기초로 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타인의 행복과 복리의 증가를 행위의 목적으로 하는 생각. 또는 그 행위] 이타주의는 다수의 인간이 인식하는 윤리에 해당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을 희생한다는 행위가 절대 옳다 여겨지면서 강제력이 높게 되고 있다. 이타주의가 절대적으로 옳다 전제하기 때문에 이타주의에 의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생기게 된다. 이타주의에 의해 어떤 현상이 나타났을 때, 좋은 현상으로 보이면 이타주의 덕분이라 말하지만 나쁜 현상으로 보이면 다른 사상 때문이라 말한다. 이타주의는 언제 어느때도 좋은 현상으로 보이게 된다는 인식 오류를 만든다. 그렇기에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한 논리 회로로 바라봐야 한다.


이타주의의 사전적 정의에서 자잘한 것을 빼면 다음과 같이 남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한다.’ 이것이 이타주의의 기본 논리 회로다. 여기서 행복, 희생 같은 개념이 인간 관념으로 자리잡아 논리 회로의 요소가 된다. 이것이 윤리와 같이 강제력이 높게 되면, 이것을 근거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나의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해라.” 이타주의를 윤리로 여기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이것이 보통 전체주의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국민이 희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국가의 행복을 위해 국민이 희생해라.”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모든 전체주의의 기본은 이타주의 논리 회로다.


이타주의 논리 회로에 환경 조건이 들어간다 해보자.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게 되면서 개인에게 강요를 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한다.’에 강요 조건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개인에게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그런데 왕정에서는 사회적 힘이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강요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 보통 본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신분 제도 등의 수직 사회를 성립시키는 근간이 된다. 물론 힘을 가진 인간이 본인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윤리적 비난을 받을 수 가 있으나, 그것은 힘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 이타주의 논리 회로에 강요 조건이 들어가면서 일방적 전체주의가 성립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의 권리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강요를 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한다.’에 자유 조건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개인이 본인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민주정에서는 사회적 힘이 동등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성립시키는 근간이 된다. 만약 희생하지 않으려 하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희생했는데 왜 너는 희생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윤리적 비난을 하는데, 그것을 힘으로 피하기도 어렵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 이타주의 논리 회로에 자유 조건이 들어가면서 상호적 전체주의가 성립되게 된다.


해당 논리 회로에 어긋나게 되거나 그런 현상을 목격하면 불쾌감, 불안감, 초조함 등을 느낄 수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할 수 있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강박증까지 될 수 있다. 도덕 논리 회로가 어긋나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도덕적 강박증이라 할 수 있다. 정말로 강박증이 있으면 도덕에 어긋나는 것을 볼 때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런 것을 양심이나 죄책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체주의는 윤리인 이타주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로 만들어진 자연법을 질서로 삼은 곳에서는 양심과 같은 것에 의해 사라지지를 않게 된다. 반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를 기초로 삼은 헌법을 질서로 삼은 곳에서는 체제 합리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현재 다수의 국가에서 자연법과 헌법의 충돌이 발생하여 전체주의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 많다.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이타주의가 아닌 이기주의가 필요하다. [이기주의: 1.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여겨지는 순간부터 개인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어떻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지 궁금해할 수 있는데,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면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사회 일반의 이익이 얻어지게 된다.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보호가 보통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을 위해 국가 구조 유지는 개인의 이익이 된다. 그런 상태에서 모든 개인의 이익 추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정한 법, 정책,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이런 구조를 통해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만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사회 일반의 이익이 얻어지게 된다. 


현재 이기주의 사전적 정의는 이타주의를 절대적으로 옳게 여기게끔 만들기 위해 모순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의지로 행한 것이 개인이 이익이다. 그것을 전제하면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타인의 의지로 행한 모든 행위는 이타주의가 되고, 본인의 의지로 행한 모든 행위는 이기주의가 된다. 타인의 의지면 본인을 위하든 타인을 위하든 이타주의가 되고, 본인의 의지면 본인을 위하든 타인을 위하든 이기주의가 된다. 이타주의로는 희생을 강요하거나 받을 수 있지만 이기주의로는 희생을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보통 유전자 또는 사상 논리 회로에 다양한 조건이 더해지면 나오는 결과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다. 전체주의가 체제 가치에 의해 나쁘다는 인식하는 인간이 많으나, 전체주의가 윤리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인식하는 인간은 드물다. 윤리를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원인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된 것이다. 그냥 논리 회로로 보면 단순히 영향력이 높은 사상 논리 회로 순서대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영향력이 높은 도덕과 윤리와 체제 가치가 대부분 한국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이 된다.






1.5 가공 사회


1) 가치 성질


가치는 판단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말한다. [가치: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진리, 도덕, 아름다움 등과 같이 판단이 가능하면 가치가 된다. 인간이 가치를 판단하여 평가하는 것을 통해 사회가 조직된다. 왕정에서는 소수 권력자가 사회를 조직하고 민주정에서는 모든 개인이 사회를 조직한다. 대표적인 개인의 사회 조직 제도가 바로 선거 제도와 시장 제도다. 


선거 제도는 선거를 통해 개인이 후보자의 가치를 평가하여 통치 대행자를 선출한다. 일반적인 인사 제도와 비슷하게 통치 대행자를 선출할 권리를 동등하게 한표씩 나눠서 분배한다. 개인은 통치 대행자에게 모든 주권을 위임하지는 않는다. 개인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 개인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권력을 가지고 강제력을 행사해야 본인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시장 제도는 시장을 통해 개인이 상품의 가치를 평가한 것을 수요와 공급 원리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게끔 한다. 생산자는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여 가격을 매겨 팔고, 소비자는 시장에 있는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여 가격이 적절하면 구매한다. 만약 생산자가 파는 상품 가치에 비해 가격이 높다고 소비자가 평가하고 구매하지 않으면 판매되지 않으면서 수요가 공급에 비해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생산자는 상품을 팔기 위해 상품 가격을 낮추면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된다.


선거 제도와 시장 제도는 개인주의 체제의 제도로 집단주의 체제의 가치로 접근하면 제도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게 된다. 선거 제도에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특정 후보를 선출할 것을 개인에게 강요하면서 선거 원리가 정상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개인의 선거권이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 제도에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상품 가격을 맞출 것을 담합하면서 시장 원리가 정상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소비자가 상품의 가치를 평가한 것과 무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치는 사회를 조직하는 기준이 되어 가공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치 성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논리 회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는 도덕과 윤리와 체제 가치다. 대부분 도덕과 윤리는 통상 유교, 불교, 기독교와 같이 종교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종교 가치로 부르겠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주의적인 종교 가치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인주의적인 체제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공존할 수 없는 정반대인 성질을 가진 가치가 어떻게 해서 공존하게 된 것인지는 인류 역사를 봐야 알 수 있다. 매우 요약해서 설명하겠다.



원시인은 유전자 논리 회로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유전자에 의한 기본 욕구를 가장 빠르고 쉽게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인 정복과 지배를 활용했다. 기본 욕구가 선천적이고 정복과 지배는 기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후천적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의한 것이기에 대부분 인류에게서 비슷한 사회가 탄생했다. 정복과 지배를 반복하며 성장한 사회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로 나뉘어 신분 제도가 나타났다. 그런 사회는 폭력으로 질서를 구축하였기에 폭력에 의해 언제든지 신분이 달라질 수 있어 사회 구조가 굉장히 불안정했다. 인간은 힘들 때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구조가 불안정했다. 이 두 가지를 보완한 것이 바로 종교다. 종교 창시자는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를 주장했고, 현실 도피할 수 있는 가치를 주장했다. 도덕과 신비다. 도덕으로 폭력을 대신할 질서를 구축하고, 신비로 현실을 도피할 근거를 마련했다. 도덕으로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 등이 있고, 신비로는 영혼과 사후 세계 등이 있다. 


종교의 도덕과 신비가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인 이유는 자연 선택과 비슷한 사회 선택에 의한 것이다.  [자연 선택: 1. 자연계에서 그 생활 조건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하고, 그러지 못한 생물은 저절로 사라지는 일.] 당시 신분 사회에 적합한 가치를 주장한 종교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종교는 저절로 사라졌다. 금욕주의는 필요 이상 욕망을 가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신분을 넘보지 못하게 했고, 이타주의는 사회의 행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영혼은 전생과 후생의 근거가 되어 현생의 고행을 견디게 만들었고, 사후 세계는 천국과 지옥을 통해 도덕을 지키게 만들어 신분 사회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가치를 주장한 인간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런 식으로 활용된 사상의 가치가 살아남았다. 사회에 선택 받지 못한 사상은 보통 살아남기 어려웠다.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게 되면 신분 제도가 붕괴할 것이기 때문에 권력자가 채택하지 않고, 개인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착취하면 사회의 힘이 약해져서 다른 사회의 침략으로 사회 구조가 붕괴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실제 부적합한 사상을 선택한 사회는 사라졌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법가와 같이 평등한 권리를 주장한 사상은 소외되고 윤리가 다른 종교와 유사했던 정치사상인 유학과 유학처럼 종교화가 된 것이 살아남았다. 수많은 윤리 중에서 종교 가치가 살아남은 것은 종교와 같이 구심점이 있어야 사상이 오랫동안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은 르네상스 이전까지 유럽에서 잊혀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회 선택이 일어나게 되면서 인류의 종교 가치가 비슷하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사회가 중세까지 이어지게 된다. [중세: 1. 역사의 시대 구분의 하나로, 고대에 이어 근대에 선행하는 시기.]



각국 문명 레벨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사회 구조와 가치인 상태에서 서양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 1. 14세기~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 도시의 발달과 상업 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합리성·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 중세적 정신 운동을 일으켰으며, 문학·미술·건축·자연 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화에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등을 거쳐서 발전한 자연 계열의 탐구를 받아들이면서 대항해시대의 정신적·기술적 토대가 마련되게 된다. 종교 가치 논리 회로에 르네상스 조건이 들어가면서 대항해시대의 유럽 식민화가 합리화되게 되었다. 그 합리화에는 종교 전파가 들어가 식민화 항선에는 선교사가 탑승하여 종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큰 부와 많은 정보를 쌓고 학문을 발전시키면서 인쇄술 등과 같이 종교 개혁과 과학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종교 개혁: 1. 16세기에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교회에 반대하여 일어난 개혁 운동.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하여 면죄부 판매를 공격한 데서 비롯하였는데, 개인의 신앙과 성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립되었다.] [과학 혁명: 1.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자연 과학 분야의 획기적 변혁. 근대 과학의 확립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식의 거대한 혁명을 일으켰다.] 


종교 개혁을 통해 개인의 권리가 증진되고, 과학 혁명을 통해 개인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나면서 이월 혁명과 산업 혁명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월 혁명: 1. 1848년 2월에, 프랑스에서 왕정에 반대하여 시민이 일으킨 혁명. 국왕 루이 필리프가 망명하고 제이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유럽에 자유주의 혁명 운동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 혁명: 1. 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 동안 유럽에서 일어난 생산 기술과 그에 따른 사회 조직의 큰 변화.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 기계의 계량이 발단이 되어 1760~1840년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계속 일어났다. 수공업적 작업장이 기계 설비에 의한 큰 공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종교 가치인 기독교 평등주의 논리 회로에 개인의 권리 조건이 들어가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합리화되게 되었다. [자유주의: 1. 17~18세기에 주로 유럽의 신흥 시민 계급에 의하여 주장된 시민적·경제적 자유와 민주적인 여러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사상이나 운동. 로크, 루소, 벤담, 밀 등이 주창하였으며,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개인의 권리를 주장한 자유주의 사상은 왕정과 신분 제도와 공존하지 못하게 되면서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민주주의: 1. 국민이 권력이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 국가 체제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인주의 체제가 자리잡았으나, 국가 질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주의 체제에 적합한 종교 가치가 남아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체제 가치와 종교 가치와 같이 정반대의 성질의 가치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와 시장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자본주의: 1.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 경제 체제.] [시장주의: 1. 가격 체제에 의해 자원 분배와 생산량의 조절이 이루어지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공공 서비스를 생산하고 공급하자는 태도.] 종교 가치인 이타주의 논리 회로에 자유 조건이 들어가자 자유방임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자유방임주의: 1. 경제 정책에서, 국가 권력의 간섭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고 사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이론. 18세기 중기의 자본주의의 기본적 정책으로, 스미스 같은 고전학파 학자들이 체계를 세웠다.] 당시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있었으나, 과거 신분 제도의 관념에 의해 사회적 힘이 동등하단 인식이 부족하여, 서로가 서로를 희생시키는 상호적 전체주의가 아닌 일방적으로 상대를 희생시키는 일방적 전체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자본가는 자유를 명분으로 농노와도 다를바 없다고 인식되었던 노동자를 착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왕정의 신분 제도와 다를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피에 의한 신분 제도가 아닌 돈에 의한 신분 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자본가의 착취에 의해서 사회에서 이런 생각이 퍼지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인간을 차별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주의: 1.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여 자본주의 제도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 극복한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는 사상. 또는 그 운동.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 민주주의 따위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공산주의: 1.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입각한 사상. 재산의 공동 소유가 옳다고 주장하며 생산 수단의 사회화와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다.] 종교 가치인 기독교 평등주의 논리 회로에 집단 평등 조건이 들어가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합리화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합리화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집단 평등을 추구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과 유사한 체제가 되어버리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 체제가 되면서 근대로 진보했다가 집단주의 체제인 공산정 체제가 되면서 중세로 퇴보한 것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공산정이 왕정과 유사하게 된 것은 왕정과 유사한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에 의한 것이다. 하나는 종교 가치에서 벗어난 체제를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던 것에 의하고, 둘은 종교 가치 외의 다른 질서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것에 의한다. 그렇기에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지 못하고 집단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퇴보를 하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왕정, 신정, 공산정에 머물러 있는 국가도 개인주의 체제의 체제 가치에 영향을 받아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소련의 붕괴로 이념 전쟁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소련이 붕괴했다 해서 소련을 성립시킨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그렇지가 않다. 진영으로 나뉜 냉전과 별개로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는 더욱 더 충돌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치 충돌의 시대다. 개인주의 체제인 상태였으나 신분 제도와 종교 가치의 영향으로 모든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종교 가치인 기독교 평등주의 논리 회로에 집단 평등 조건이 들어간 사상이 유행되게 된다. 바로 PC주의와 여성주의다. [political correctness: 1. 정치적 정당성(차별적인 언어 사용·행동을 피하는 원칙)] [여성주의: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권리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경향이나 태도.] 공산주의가 왕정의 정복 방식과 비슷하게 폭력적으로 권리를 획득했던 것과 같이, PC주의와 여성주의 또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얻는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절대적 이익 개념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PC주의와 여성주의의 대상에 속한 집단은 절대적으로 이익을 얻는 결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약자에 속했던 이들이 절대적 이익을 얻다 보면 강자에 속했던 이들과 권리가 비슷해지면서 평등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평등이란 종교 가치는 윤리가 절대적인 것과 같이 절대적이게 되면서, 평등을 명분으로한 주장 또한 절대적으로 여겨지며 강제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평등을 명분으로 절대적 이익이 성립되면서 온갖 차별이 발생하게 된다. 흑인이나 성소수자는 어떤 매체에도 할당제를 강제하면서 다른 인종이나 성애를 차별하거나, 약자는 약자의 작은 금액의 절도 범죄는 죄가 아니라 하면서 판매자를 차별하거나, 여성은 능력과 무관하게 할당제와 가산점을 주장하거나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무죄 추정의 원칙조차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남성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종교 가치로 보면 정당할 수도 있으나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체제 가치로 보면 명백하게 부당하다. 종교 가치의 평등은 집단주의의 평등이고 체제 가치의 평등은 개인주의의 평등으로 분명하게 다르다. 개인주의의 평등은 사회학적 인종 · 성별 등과 같은 집단 평등이 아닌 모든 개인의 평등이다. 이외에도 오늘날 대부분 불합리한 사회 문제는 가치 충돌에 의한다. 앞으로는 체제와 질서 모두 개인주의 체제 가치로 진보해야 한다.






2) 가치 충돌


오늘날은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가 충돌하는 가치 충돌의 시대다. 그런데 본래라면 진작에 체제 가치는 종교 가치에 밀렸을 확률이 높다. 인간의 인식까지 조작하여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만드는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윤리의 영향이 그만큼 크다. 그럼에도 체제 가치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존재가 크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공동체 사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유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민족과 같은 공동체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미국은 식민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중시하고, 서양 문명 입장에서 신대륙 국가였기에 이민족 국가가 되어 민족과 같은 공동체 구심점이 지나치게 많아 하나의 공동체 구심점을 만들 수가 없었다. 미국은 기독교 가치관이 있었음에도 자유를 추구하고 단일 민족과 같은 공동체가 성립되기 어려워 공산주의 열풍에서 벗어나 반공주의의 주축이 되어 개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세계 최강 국가로 자리잡자, 종교적 가치관을 가진 선진국에서도 개인주의 체제를 유지하거나 사회 민주주의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체제 가치를 지킬 수 있었다. 사회 민주주의는 집단주의 체제와 개인주의 체제의 결합으로 체제 충돌에 의해 진보할 수 없는 체제지만, 그래도 개인주의 체제의 가치가 살아남아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었다. 다수의 공산주의 국가조차도 경제는 시장주의를 받아들여 개인주의 체제의 일부를 수용하게 되었다. 식민지 독립 국가, 신대륙 이민족 국가, 세계 최강 국가. 이 요소가 모여 인류는 개인주의 체제의 가치를 지킬 수 있었다. 종교 가치 영향이 높은 한국이나 일본이 개인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미국 영향이 굉장히 크다. 만약 미국이 없었다면 종교 가치에 의해 체제 가치가 밀려 북한과 같은 체제에서 많은 개인이 고통 받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수천 년간 종교 가치로 가공된 인류가 종교 가치를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미국에서 디지털 기술로 민족을 초월한 공동체 구심점이 생기면서 미국조차도 PC주의와 같이 집단주의 사상이 퍼지고 집단주의적인 노조가 과거보다 활성화되고 있을 정도다.


한국은 다양한 종교 가치로 가공되었다. 종교의 보편적 가치인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와 유교의 가치인 수기치인, 삼강오륜, 정조관념 등으로 집단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차별적인 인간으로 가공되었다. 자유보다 억압을 추구하고 역할보다 권위를 중시하며 정당한 평등보다 부당한 차별을 원하는 것은 종교 가치에 의한 것이다. 누군가는 본인이 집단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차별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데, 종교 가치보다 체제 가치로 가공된 영역이 많을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의 충돌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 


이런 종교 가치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가 충돌하면서 수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 파탄이다. 연령별 의무를 전제한 교육과 성 터부시 등은 종교 가치로 만들어진 자연법을 근거로 하고, 연령별 의무가 사라진 것은 체제 가치를 기초로 한 헌법을 근거로 하기에 저출산이나 사회 활동 둔화 등과 같은 사회 파탄은 가치 충돌이 원인이 된다. 이외 사회 전반적으로 대부분이 종교 가치에 의하여 체제 가치가 훼손되면서 사회가 파탄나고 있다. 입시나 취업과 같은 공정 경쟁이 필요한 곳에서는 인맥에 의한 비리로 공정 가치 훼손이 발생한다. 시장 거래와 같은 공정 거래가 필요한 곳에서는 담합에 의한 가격 통제로 시장 원리 가치 훼손이 발생한다. 인간 관계와 같은 평등 관계가 필요한 곳에서는 인권을 명분으로 평등 가치 훼손이 발생한다. 


인간의 생활 양식은 종교 가치나 체제 가치로 규정된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생활 양식을 통해 질서가 유지되었다. 종교 가치는 “금욕적으로 살아라”, “이타적으로 살아라”, “연령에 차례가 있게 살아라”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지시로 비슷한 생활 양식을 공유하게 하였다. 그 중 이타주의에 의해 전체주의적이게 되면서 특정한 생활 양식이 절대적이게 된다. A 사회 나이에는 무엇을 하고, B 사회 나이에는 무엇을 한다. 특정한 기준으로 줄을 세워 판단한다. 이러한 정해진 생활 양식에 의해 한국은 완벽주의적인 태도가 나타나게 된다. 완벽주의는 윤리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과 이타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의 결과 중 하나다. 한국에서 전체주의적인 생활 양식이 나타난 것은 종교 가치에 의하여 왕정의 생활 양식과 유사해졌기 때문이다. 종교 가치는 왕정의 생활 양식이라면, 체제 가치는 민주정의 생활 양식에 해당한다. 체제 가치는 자유를 기초로 하기에 민주정의 생활 양식은 본래 종교 가치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가치 충돌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와 유교 가치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을 파악하면서 가치 충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 [금욕주의: 1. 정신적·육체적 욕망이나 욕구 및 세속적 명예나 이익을 탐하는 모든 욕심을 억제하여 종교나 도덕에서 이상을 성취하려는 사상. 불교나 기독교에서도 이 사상을 볼 수 있다.] [욕구: 1.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 [욕망: 1.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욕심: 1.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금욕주의는 종교나 도덕이 말하는 가치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본 욕구를 제외하면 욕심을 억제하자 주장한 사상이다. 종교나 도덕은 가치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랑, 평화, 행복 등의 가치에 해로운 것을 악이라 규정했다. 가치의 본질적인 구조와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여 표면상으로 보았을 때 가치 훼손이란 악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자고 주장하면서 금욕주의가 성립되었다. 기본 욕구와의 구분을 위해 욕망이라 부르겠다. 금욕주의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멀어져 오지에서 금욕을 행하면서 일반 인간과 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금욕주의가 윤리가 되자 절대적이게 되면서 타인에게도 금욕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금욕이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너는 나쁜 욕망을 가지면 안돼.” 그런데 그 나쁜 욕망이라는 것이 굉장히 애매했다. 종교나 도덕이 말한 나쁜 욕망의 범주는 굉장히 넓었고, 그에 따라 금욕을 강요하는 인간의 기준으로 나쁜 욕망이 결정되어 금해지게 되었다. 


보편적으로는 폭력, 성애, 음주, 도박, 새로운 취미 등에 관한 욕망이 바로 그렇다. 이런 나쁜 욕망은 집단의 이익에 해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자유롭게 이런 종류의 욕망을 행하면 신분 사회의 질서가 흔들렸다. 인간 관계를 파탄나게 할 수 있는 일반 폭력, 성폭력 등과 같은 폭력이나 음주나 도박은 둘째 치고 성애나 새로운 취미가 금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피로 만들어진 신분 사회에서 개인의 성애를 자유롭게 두면 신분이 다른 이들과의 성애로 신분 사회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그 외에도 신분 사회에서는 집안의 결합이라면서 개인의 성애조차 집단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걸 위해 한국에서는 정조관념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것을 만들어 가르치며 자발적으로 금욕을 하게끔 만들었다. 새로운 취미가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은 나쁜 욕망의 대상이 모호했기에 가능했다. 힘을 가진 인간이 생각하는 가치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방해되는 것 중에서 본인이 잘 모르거나 싫은 것은 나쁜 욕망이 되어 금욕을 강요하게 되었다. 게임은 물론이고 만화나 영화도 과거에는 탄압받던 취미였다. 한국에서 이런 취미는 수기치인에 의해 단순 입시뿐만 아니라 윤리가 된 모든 학업 가치의 이상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당장 입시와 관계가 없을 때도 나쁜 욕망이 되어 탄압당했다. 


국가 체제는 개인주의 체제가 되었음에도 국가 질서는 종교 가치가 남아서 종교 가치를 근거로 개인에게 금욕을 강요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오늘날 금욕 강요의 윤리적 근거는 대부분 금욕주의라 할 수 있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개인에게 의무를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욕을 강제하더라도 사회가 작동하였으나,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에게 최소한의 의무를 제외하면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욕을 강제하면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왜 일, 결혼, 출산을 하지 않냐고요? 욕망이 나쁘다면서요. 그래서 가지지 않았어요. 욕망이 적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데 뭐하러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나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챙기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하거나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이성 관계를 맺지 않고 애도 낳지 않을 거예요.” 미성년 시기 학업이란 특정 가치를 제외하면 대부분 욕망을 억제당하며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서 사회 전체가 파탄난다. “왜 배고파도 일을 하지 않냐고요? 그냥 죽을 거니까요. 욕망은 나쁘잖아요.” 금욕주의 논리 회로로 이미 삶의 동력이 잘려나간 인간이 억지로 살고 있다. 자살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바로 죽는다. “왜 일확천금을 바라냐고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기본 욕구 충족은 돈이면 다 되거든요. 자아실현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욕망은 적고 기본 욕구만 많으니까 돈만 있으면 돼요. 실패하면 죽죠 뭐. 그거 말고 바라는 것도 없는 걸요.” 주식, 부동산, 가상 자산 등의 파멸적 대출 투기와 도박이 활성화된다. 


금욕주의 논리 회로에 의해 동력을 상실한 인간은 최소한의 기본 욕구만 충족하면서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났다. 경제 활동 둔화나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율과 같은 현상은 각각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금욕주의 논리 회로를 기본으로 한다. 기본 욕구만 남으면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욕망이 없는 인간은 짐승처럼 먹고 자고 싸고 발정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가? 수기치인에 의해 윤리가 된 학업을 한들 스스로가 원치 않으면 욕망이 없는 상태나 다름 없어진다. 눈을 떠야 할 이유를 모른다. 몸을 일으켜야 할 이유를 모른다. 밥을 먹어야 할 이유를 모른다. 똥을 싸야 할 이유를 모른다. 밖에 나가야 할 이유를 모른다. 인간을 만나야 할 이유를 모른다. 일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결혼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출산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른다. 삶에 더 이상의 의지는 없다.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을 동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억압하면 당장의 종교나 도덕의 이상은 성취될지언정 인간은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 무언가에 지배당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종교 가치인 금욕주의 논리 회로가 적합하겠지만,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체제 가치인 욕망주의 논리 회로가 적합하다. 인간은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 욕망이 법, 정책, 제도를 통해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으면 된다.



이타주의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이 희생하자고 주장한 사상이다. 개인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선이라 규정하고 본인의 행복만을 위하는 것을 악이라 규정했다. 마땅한 기준이 없고 행복의 원리를 몰라 무작정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다 말하는 것으로 이타주의가 성립되었다. 이타주의는 희생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윤리가 되자 절대적으로 되면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한 희생이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너는 희생을 해야만 해.” 타인, 행복, 희생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기준이 결정되어 희생이 강요되게 되었다.


보편적으로 충효, 순교, 애국심, 동정심 등과 같은 희생이 바로 그렇다. 이런 희생은 집단의 이익에 이롭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희생을 하려 하지 않으면 신분 사회의 질서가 흔들렸다. 충효, 순교, 애국심은 둘째치고 동정심이 희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평등하지 않은 신분 사회에서 인간의 동정심이 없으면 약자가 죽어 신분 사회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타인을 돕게 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선과 악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을 만들어 가르치며 희생을 하게끔 만들었다. 


국가 체제는 개인주의 체제가 되었음에도 국가 질서는 종교 가치가 남아 종교 가치를 근거로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오늘날 희생 강요의 윤리적 근거는 대부분 이타주의라 할 수 있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개인에게 의무를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에 희생을 강제하더라도 사회가 작동하였으나,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에게 최소한의 의무를 제외하면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희생을 강요하면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왜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이익을 추구하냐고요? 희생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나의 행복을 위해 희생시켰어요.”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사회에 불신이 쌓여간다. “왜 기부와 같이 남을 돕는 사람에게 돈을 달라 협박하냐고요? 희생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그래서 나에게도 희생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지극히 옳은 일이죠.” 사회에서 타인을 돕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난다. “왜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냐고요? 희생이 옳다면서요. 그래서 희생할 수 있는 책임을 준 거예요.” 사회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이들이 늘어난다. “왜 공감하지 않냐고요? 타인이 나에게 공감을 해야 할 희생을 하면 되는 거예요.” 사회에서 일방적인 공감 강요가 일어난다. “왜 담합을 하고 비리를 저지른 이를 감싸며 내부 고발을 배신자라 규정하고 비난하냐고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옳다면서요. 당연히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담합을 하고 비리를 감싸고 내부 고발을 비난해야죠.” 사회와 체제가 망가진다.


이타주의 논리 회로에 의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바람에 전체주의적으로 되면서 사회가 파탄났다. 연령, 성별, 지역 등에서의 불신이나 갈등 같은 사회 붕괴는 각각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이타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어떻게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서로에게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고 있지 않는가? 언제 틈을 보이면 희생시키려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날선 태도로 대하게 된다. 희생 당하지 않기 위해 과한 이익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과한 이익에 의해 더욱 더 희생을 강요하면서 갈등이 심화된다. 기준을 잃고 다툼만 남아버린다. 사회에 미움이 남게 된다. 미워하는 이들을 보기 싫어 떠난다. 더 이상 사회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타인도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거라 생각하면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수가 있다. 희생을 강요하면 당장 희생을 강요한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지언정 희생 당한 인간은 불만이 쌓여 미움과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종교 가치인 이타주의 논리 회로가 적합하겠지만,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체제 가치인 이기주의 논리 회로가 적합하다.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 이기가 법, 정책, 제도를 통해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으면 된다.



유교는 정치사상으로 유교 가치는 수기치인이나 삼강오륜 등으로 삼강의 군위신강·부위자강·부위부강이 있고 오륜의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 같이 유교에서 인간이 지켜야할 수직적 인간 관계와 그에 맞춘 강령과 도리 등을 말한다. 왕정의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분을 고려한 생활 양식을 제시하여 차별이 윤리가 되었다. “차별이 윤리로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너는 차별 당해야 해.” 왕정의 신분 제도를 기준으로 차별을 강요하게 되었다.


보편적으로 꼰대질, 갑질, 권위, 서열, 연령 차별, 존댓말 등과 같은 차별이 바로 그렇다. 이런 차별은 집단의 이익에 이롭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차별을 하지 않으면 신분 사회의 질서가 흔들렸다. 꼰대질, 갑질, 서열, 권위, 연령 차별은 둘째치고 존댓말이 차별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언어 체계가 익숙하기 때문에 차별이란 인식이 어려운 것이고 보편적인 높임말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 차별이 이렇게 당연해야만 신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기에 차별을 윤리로 만들어 자발적으로 차별을 하게끔 만들었다.


국가 체제는 개인주의 체제가 되었음에도 국가 질서는 종교 가치가 남아 종교 가치를 근거로 개인에게 차별을 강요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오늘날 차별 강요의 윤리적 근거는 대부분 종교 가치라 할 수 있다. 그 중 한국은 유교 가치가 차별의 윤리적 근거가 된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개인에게 의무를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차별을 강제하더라도 사회가 작동하였으나,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개인에게 최소한의 의무를 제외하면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별을 강요하면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왜 입시에 목을 매냐고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가야 하니까요.” 학력과 학벌 차별과 입시 과열 현상으로 기억 발상 능력은 뛰어나나 창의 발상 능력은 저조하게 되었다. “왜 집단에서 역할에 맞는 능력보다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간이 좋은 역할을 차지하냐고요? 능력이 있으면 남을 다스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능력에 기준이 따로 없으니까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정치적인 능력을 키워서 좋은 역할을 차지한 것이지요.” 사회 역할에 전문성이 사라진다. “왜 꼰대질과 갑질을 하냐고요? 어른과 아이 사이의 도리에 엄격한 차례와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그래서 상명하복도 옳다면서요. 복종하지 않은 인간이 그른 거예요.” 연령, 성별, 인종, 직업, 학력 등의 차별과 같은 수직적 인간 관계가 나타난다. “왜 미성년의 이성 교제와 성관계와 성문화를 터부시하며 차별하냐고요? 여성은 정조를 지키고 남녀는 칠세 이후 한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서요. 이성 교제와 성관계와 성문화를 즐기는 인간이 나쁜 것이에요. 그것이 설령 서로 자유 의지로 행한 것이라도 나쁜 거예요.” 여성성이 억압되는 여성 차별이 일어나고 미성년 시기에 이성 관계와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끔 가공되어 성년 이후에도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보며 그런 부정적 인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비혼이 유행하면서 미성년 이후 연령별 의무가 적은 자유로운 사회가 파탄난다.


유교 가치 논리 회로에 의해 서로에게 차별을 강요하는 바람에 차별적인 사회가 되면서 사회가 파탄났다. 사회에서 차별은 각각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유교 가치를 기본으로 한다. 차별을 윤리로 여기면 어떻게 평등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가부장제, 사농공상, 정조관념 등이 차별의 흔적에 해당한다. 한국은 유교를 윤리로 배워 절대적으로 옳다는 인식에 의해 옳지 않다는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유교는 왕정의 정치사상이다. 공자가 있을 때부터 그랬다. 유교의 핵심 사상인 수기치인은 왕정의 위정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유교 가치는 왕정의 신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치로 차별을 윤리로 만들었다. 차별을 윤리로 여기면서 평등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서로를 차별하면서 갈등이 쌓여간다. 정당한 평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당한 차별을 강요하며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평등을 포기하는 일이 늘어난다. 평등한 사회가 사라진다.


인간은 체제를 기준으로 정당한 평등과 차별을 추구해야 공정한 평등이 가능해진다. 부당한 평등과 차별을 강요하면 당장 그 부당함으로 이익을 얻는 인간은 좋을 수 있을지언정 차별 당한 인간은 불만이 쌓여 미움과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종교 가치인 유교 가치 논리 회로가 적합하겠지만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체제 가치인 자유주의 논리 회로가 적합하다. 인간은 정당하게 평등해야 한다. 그 평등이 법, 정책, 제도를 통해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으면 된다.






3) 가치 현상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가치 충돌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으나,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가치 충돌이 크게 발생하면서 가치 충돌에 의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가치 충돌에 의한 사회 문제다. 국가 체제는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여 체제 가치를 추구하는데, 국가 질서는 집단주의 체제인 종교 가치에 머무르면서, 질서 속에 사는 인간은 체제에 부적합하게 가공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가공 개념과 함께 산업 혁명 시기의 마차와 자동차 비유로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체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마차를 끄는 말에는 당근을 주고 자동차에는 기름을 넣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종교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자동차 주유구에 당근 주스를 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목적이 있다면 기름을 넣는다는 것은 가치로 판단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제에서 살아가겠다는 목적이 있다면 체제에 적합하게 사는 것은 가치로 판단할 수 없다.


한국은 국가 체제는 체제 가치로 삼고 국가 질서는 종교 가치로 삼아 마치 자동차를 마차처럼 다루는 것과 같이 힘은 충분했으나 체제에 적합하지 못한 태도에 의해 망해가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체제 가치에 의해 조선이나 북한보다는 풍요롭고 행복하고 안전하다. 조선과 북한은 국가 체제와 질서를 모두 종교 가치로 삼아 마치 마차로 자동차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 침략 당해 망하거나 고립되어 망했다. 이렇듯 가치 충돌이 있음에도 종교 가치에 머물러 있는 국가보다는 훨씬 낫다. 한국이 성장할 수 있던 것은 체제 가치에 의한 것이고, 한국이 망해가고 있는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종교 가치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일으킨 사회 문제는 인간에게 영향력이 높은 사상의 논리 회로에 의한 경우가 많다. 각각 사상은 논리 회로로 작동할 때가 있고 논리 회로의 조건으로 들어갈 때가 있는데, 체제는 체제 가치로 작동할 때가 많으나 질서는 대부분 종교 가치가 논리 회로로 작동하고 체제 가치가 조건으로 작동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 문제는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의 충돌에 의한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주로 그 충돌에 의한 사회 문제에 해당한다. 종교 가치에 의해 억압 강요, 희생 강요, 차별 강요 등과 같은 체제 가치에 반하는 가치에 의해 복합적인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가치 충돌은 주로 강제력이 발생하는 권력 행사에서 나타난다. [권력: 1.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이른다.] 현재 권력의 사전적 정의는 복종과 지배 개념이 포함되어 민주주의 체제에 적합하다 보기는 어렵다. 강제를 할 수 있는 힘까지만 정의되면 된다. [강제: 1.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킴.] 동등한 관계에서도 계약에 의한 강제력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복종과 지배 개념이 없어도 강제력은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사회 계약: 1. 개개의 인간들이 모여 일정한 질서와 규율 밑에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나 국가를 이루는 현상을 계약에 의한 것으로 보아 이르는 말.] 사회 계약의 사전적 정의는 공동의 이익을 전제하여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하다 보기는 어렵다. 사회와 계약한다는 것까지만 정의되면 된다. 


지금까지 종교 가치에 의해 개인주의 체제에서 체제 가치에 의한 질서 개념이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여야 체제 적합과 공동의 이익이 성립되는 체제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권력의 강제력은 모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사회와의 계약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질서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 계약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상태기는 하다. 사회 계약에 따라 체제 가치에 의해 인간의 생활 양식이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종교 가치에 의해 인간의 생활 양식이 결정되는 일이 잦아 가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권력은 통상 정부 권력이 일반적이나 민주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에게 권력이 있으므로, 권력은 모든 형태의 강제력을 말한다고 본다. [정부: 1.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포함하는 통치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삼권 분립에 의하여, 행정을 맡아보는 국가 기관.] 정부는 삼권을 지칭하거나 행정부를 지칭하는데, 삼권 분립을 근거로 삼권을 지칭하는 사전적 정의를 활용하겠다. 권력에는 개인 권력과 역할 권력이 있다. 개인 권력은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강제력을 말하고 역할 권력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강제력을 말한다. 통상 종교 가치에 의해 개인 권력은 높으나 역할 권력은 낮으면서 개인 권력에 의한 부당한 권력 행사가 나타난다. 그것이 권력 남용이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오게끔 정한 것은 체제다. 권력은 주어진 권리나 권한 내에서만 활용할 수 있고, 주어진 권리와 권한은 체제로 정해지기 때문에, 체제에 반하는 권력 행사는 권력 남용이 되게 된다. 민주주의 체제를 근거로 주권이 있는 인간이 논리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존재 탐구나 체제를 이치로 삼아 논리적인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본인이 가진 권력을 휘둘러 강제하는 것은 권력 남용이다.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 충돌로 개인은 물론이고 정부를 넘어 헌법조차도 종교 가치를 기초로 한 자연법의 영향으로 체제 가치에 위배되는 판단을 할 때가 있을 정도다. 


개인이 일으키는 보편적인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 가치 훼손은 중우 정치 등이 있다. [중우 정치: 1.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의 정치.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으로 쓰인다.]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기 때문에 발언권과 실행권이 있다. 그러나 실행권은 본인의 권리를 위할 때 일부나 긴급할 때를 제외하면 없다. 왜냐하면 특정 개인의 권력 행사에 발언권을 넘어 타인의 주권을 훼손할 수 있을 정도의 실행권이 있다면 타인이 가진 주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통치 대행자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권한 내에서만 실행권이 있고 권한 외에는 발언권이 있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윤리를 명분으로 삼더라도 실행권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다른 이의 주권을 부당하게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이 창작물이나 매체에 대한 검열을 강요한다거나, 정당한 사치를 보고 사치할 거면 기부하라며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거나, 특정 이익을 위해 차별을 강요하거나, 속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영리하다 착각하거나, 개인 판단으로 사적 제재를 하는 것을 넘어 사건과 무관한 관계자를 연좌제마냥 공격하는 것을 정의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사적 제재나 연좌제에 대해 법치를 근거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감성 없는 인간이라 몰아붙이며 공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냥 가치관 차이다. 종교 가치로 불합리하게 보여도 체제 가치로 보면 합리하게 보인다. 이런 가치 훼손을 법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개인이 정부를 압박한다. 떼법과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특정 사건을 빌미로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에 부적합한 비논리적인 법을 입법에 압박하여 통과시키도록 한다거나, 사회를 속여서 부당한 이익을 취한 것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만들도록 압박하거나, 종교 가치에서 예민한 성적인 문제를 빌미로 사법에 압박하여 무죄 추정 원칙을 무시하도록 한다거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강한 형벌만을 강요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종교 가치를 명분으로 행정에 압박하여 유착을 하도록 한다. 이런 과정에서 주권을 침해당한 개인은 손해를 보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가치 훼손이 발생한다. 이런 것이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 가치 훼손으로 가치 충돌의 결과다. 


정부가 일으키는 보편적인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 가치 훼손은 법 앞의 차별 등이 있다. 법 앞의 평등은 체제 가치라면 법 앞의 차별은 종교 가치다. [법 앞의 평등: 1. 법 앞에서는 누구도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원칙을 이르는 말.] 종교 가치가 왕정의 사회 선택을 받은 가치기 때문에 종교 가치에 의한 차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 가치에 의해 입법, 사법, 행정 가리지 않고 법 앞의 차별이 나타난다. 전부 법 앞이다. 전관 및 현관 예우, 집단의 카르텔, 성인지 감수성 등이 그렇다. 전관과 현관은 현재와 과거에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을 이른다. 종교 가치에 의해 윗사람이라 여겨지는 전관과 현관을 우대하면서 비리가 발생한다. 종교 가치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에 속한 인간을 우대하면서 비리가 발생한다. 종교 가치에 의해 종교 가치에 적합한 가부장제 여성성에 맞추기 위해 과도한 특혜를 주거나 무죄 추정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발생한다. 정부 인사가 무능해 보이는 것은 실제 무능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종교 가치에 의해 무능해져 버린 것에 해당한다.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가 모순되어 충돌하는데, 종교 가치가 절대적이라 배운 탓에 종교 가치를 추구하다가 체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역할에 필요한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개인 권력은 높으나 역할 권력은 낮아지는 것으로 권력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의해 무능이 나타나게 된다. 현관 A가 전관 B를 예우하기 위해 마땅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럴 경우가 바로 종교 가치에 의해 역할 권력을 무시하고 개인 권력을 휘두른 개인 권력의 권력 남용이 된다. 사리사욕조차도 그 근거가 가족을 위해서와 같이 가족주의와 같은 종교 가치에 의한다면 종교 가치에 의한 권력 남용이다. 대부분 정부 인사는 종교 가치를 배제하고 체제 가치를 추구하면 제대로된 역할 수행이 가능해지면서 정상적인 역할 권력 행사로 유능해 지게 된다.


헌법이 일으키는 보편적인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 가치 훼손은 많지 않다. [헌법: 1.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각종 근본 법규의 총체. 모든 국가의 법의 체계적 기초로서 국가의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법이며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한 국가의 최고 법규이다.] 체제의 기초를 다루기 때문에 보통은 체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헌법에서도 자연법의 영향에 의해 체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가끔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성 의무병역 합헌이나 도서정가제가 그렇다. 


과거 헌재는 남성 의무병역이 “남성이 전투에 적합한 신체적 능력을 갖추고 있고 여성은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월경, 임신이나 출산, 양육의 필요성에 때문에 군사훈련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고”고 밝히며 남성 의무병역을 합헌으로 결정한 바 있다. 대체복무 또한 신체적 능력 또는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볼수 없으며 군대 내부의 상명하복의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 등이 우려된다며 반대했다. 이런 것이 가부장제 여성성을 전제한 자연법으로 체제 가치를 훼손한 사건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 종이라는 전제로 보았을 때 다른 국가에서 여성 징병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보편적인 여성이 군사훈련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만약 그 주장이 합리성을 확보하려면 한국 여성 직업 군인은 둘째치더라도,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인 여성의 군사훈련이 불가능했어야 했다. 문화 차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게 종교 가치다. 한국 여성은 다른 국가 여성보다 열등하지 않다. 만약 열등해보인다면 종교 가치에 의한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 여성의 군사훈련이 가능하므로 대체복무의 논리 또한 불합리하게 된다. 군대 내부의 상명하복 권력관계에 따른 부조리는 남성 징병 군인과 모든 직업 군인도 겪고 있는 문제로, 기업에서 하는 가치 생산시 성희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여성의 가치 생산을 반대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성이 보편적으로 징병에 부적합하므로 남성만 징병하는 것이 합헌이란 논리는 여성보다 약한 남성이 있다는 현실에 의해 일반화의 합리성을 상실했다. 이런 논리는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합리해도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불합리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개인으로 접근해도 헌재가 우려한 사안은 대응이 가능하다. 성별과 같이 집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남성 징병제의 위헌 여부만 고려했다 하더라도 위헌이 합리적이다.



최근 헌재는 도서정가제가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간행물 유통 질서의 혼란을 방지함으로써 저자와 출판사를 안정적으로 보호·육성하고, 다양한 서점 또는 플랫폼을 유지·장려해 소비자의 도서접근법을 확대하므로 합헌을 결정한 바 있다. 종이책 매출이 줄어든 데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의한 것으로 도서정가제와 같이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런 것도 전체주의를 전제한 자연법으로 체제 가치를 훼손한 사건이다. 현재 도서정가제나 스크린 쿼터제나 연유가격연동제와 같은 생산자 입장에서의 시장 보호는 쌀과 같은 필수품이 아닌 이상, 생산자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 다수를 희생시키는 부당한 전체주의적인 제도다. 도서가 필수품인지에 대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지식의 공유 측면에서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도서는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게 된다. 필수품이 아님에도 도서정가제와 같은 시장 보호를 하는 것은 흘러야 유지되는 시장 원리상 시장을 파괴하는 제도가 된다. 시장을 파괴하는 제도는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불합리한 제도다. 노동 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파괴된 것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 유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부동산 가격을 낮추기 위해 부동산 거래를 과하게 규제하여 흐르지 않도록 규제했기 때문이다. 필수적인 것조차 시장 원리를 작동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는 외부 정책으로 대응한다.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더욱 더 시장 원리를 작동시켜야 한다. 시장주의는 소비자 입장에서 담합과 독과점이 결정된다. 소비자 입장에서 도서정가제는 독과점을 방지하는 장치가 아닌 담합을 규정하는 장치일 뿐이다. 



종교 가치에 의한 체제 가치 훼손은 다방면에서 많다.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니 체제 가치 훼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개인에 의한 권력 남용은 인간 관계가 주로 그렇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함에도 종교 가치에 의해 서로를 억압하고 희생시키고 차별한다. 현재 학생과 부모와 교사의 갈등은 서로를 억압하고 희생하고 차별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과거에는 주로 교사가 학생을 패고 부모에게 촌지를 받았다면 현재는 주로 교사가 학생에게 맞고 부모에게 시달린다. 차별적인 종교 가치 논리 회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의 조건이 달라지자 차별의 대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외에도 타인을 억압하고 희생시키고 차별하는 일이 정말 많다. 그런 탓에 최근 서로가 즐기는 취미를 악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거나, 젊은 세대가 상명하복 수직질서가 싫다면서 2022년 9급 공무원 퇴사율이 2019년 대비 72.6% 증가했다고 한다. 공무원 퇴사는 돈 때문이라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돈은 알고 지원한 것이므로 일하는 환경 때문에 퇴사했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역할 전문성보다 인맥 중시, 다양한 차별, 담합과 독과점, 내부 고발 멸시 등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부에 의한 권력 남용은 법, 정책, 제도 등이 주로 그렇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함에도 종교 가치에 의해 서로를 억압하고 희생시키고 차별한다. 자기결정권 침해 법률, 전체주의 정책과 제도, 국가 형벌권 과잉 행사, 개인 차별 등 많다. 정부가 개인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판단이 불가능한 존재로 전제하고서 결정권을 빼앗거나, 특정 관점으로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거나,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사건에서도 형벌권을 행사하거나, 종교 가치로 개인을 차별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방송, 영상, 게임, 인터넷 등의 매체 검열 기관, 필요 이상의 개인 정보 수집, 국민 연금과 같은 개인의 희생을 전제한 제도, 불합리한 미성년 권리, 가부장제 여성성에 따른 여성 억압과 차별, 과도한 시장 간섭, 민사 대응 사안을 형사로 대응, 체제와 무관한 일방적인 특정 가치 강요 등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 특성상 정부의 권력 남용은 개인의 권력 남용에 의한 결과일 확률이 높다.






4) 가치 차이


가치 차이로 문명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유전자, 자연, 문화는 대체로 문명에 비해 영향력이 낮다. 유전자는 동일 종이고 자연은 인간이 생존하기 적합한 곳에 자리잡아 사회를 이뤘고, 문화는 각국 레벨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므로 문명 레벨에 따라 문명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문명이 사상의 가치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손으로 가공되고, 그 문명으로 인간이 가공되어 문명 레벨이 결정되기 때문에, 실상 가치 차이로 문명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문화 상대주의를 말하며 문화마다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화는 학문 이전이므로 문화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 체계화한 문명은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 각국 국력의 차이가 나는 것을 가공 개념으로 접근하면 인종 우열 또는 문명 우열 둘 중 하나가 된다. 모든 인간은 동일 종에 속하고 자연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영향을 적게 받게 됨에 따라 국력 차이는 문명 우열에 따라 나타났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럼에도 문명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윤리를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마차를 타는 문명과 비행기를 타는 문명이 같을 수가 없다. 문명 우열이 제국주의적 식민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별개다. 특정 가치 판단으로 그런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종 우열은 인종 전체의 우열에 해당한다면 문명 우열은 개인 우열에 해당한다. 인류 지역마다 문명 발전도가 다른 것을 보고 다양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소수의 인간 유무에 따라 문명 발전도가 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자연 계열도 탐구한 인간이 없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이 인문 계열만 탐구한 인간만 있었다면 서양에서 과학 혁명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든다. 실제 동양에서는 그런 인간이 없어 과학 혁명이 불가능했다. 그런 인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힘을 가진 자에게 인정 받지 못하여 잊혀졌다. 우주적으로 보면 그 어떤 인간도 우주에 영향을 끼치지 어렵지만, 지구적으로 보면 일부 인간이 지구에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국력 차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차이의 원인이 인종보다는 문명인 것이 인류 관점으로 볼 때 좀 더 평등하다.


추구하던 가치가 달라 문명 레벨이 달랐던 시대가 디지털 기술에 의해 저물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전 세계 정보 공유가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류는 공통된 사회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체제 변화, 기술 변화, 환경 변화다. 현재 모든 국가가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한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개인주의 체제의 가치가 공유되면서 대부분 국가에서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의 충돌에 의한 사회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각국 체제와 무관하게 공통된 사회 문제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 현상을 부른 디지털 기술은 인식과 가치의 거리 축소, 제한 없는 가치 복제, 익명에 의한 자유로움 등으로 현실과 다른 성질이 많아 그에 따른 새로운 사회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이 또한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각국 체제와 무관하게 공통된 사회 문제를 공유하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환경 오염이 발생하면서 예정된 기후 변화가 빨라지는 것으로 지구가 인간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가는 것으로 그에 따른 새로운 사회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이 또한 같은 지구에서 사는 것으로 각국 체제와 무관하게 공통된 사회 문제를 공유하게 되었다. 이 세 가지 변화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 문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대부분 국가에 공통된 사회 문제이므로, 각국이 공조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새롭게 재가공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 






1.6 사회 본질


1) 인식 일탈


인간의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은 인간의 높은 지능에 의해 나타났다. 지능이 높으면 인식에서 벗어나고 지능이 낮으면 인식도 제대로 못한다. 높은 지능을 지닌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익혀야 한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이미 가공이 된 상태라는 것이다. 가공이 된 상태에서 가공 이전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다. 가공 이전의 상태인 기억과 연동되지 않은 자아 요소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육체를 움직이는 본인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존재를 몰랐던 인간은 본인의 존재가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고 보았다. 바로 영혼이다. [영혼: 2.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


인간은 영혼이란 개념으로 인간의 본질이 육체 밖에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문명이 없던 시기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해서 영혼 개념을 떠올리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몰랐기에 영혼 개념을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했다. 그래서 가공을 통한 육체의 변화로 인간의 본질이 바뀔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본질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파악하지 못하여 가공 개념을 떠올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영혼 개념은 실제로는 자아 개념으로 보면 된다. 비과학 시대의 개념이 과학에 의해 용어가 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혼 개념은 AI가 자아를 가지면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다. 이런 영혼 개념에 의한 본질의 불변이 자아 동일성 개념을 불렀다고 본다. [자아 동일성: 1.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서 현재의 자신은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같으며 미래의 자신과도 이어진다는 생각. 에릭슨의 자아 심리학이나 올포트의 인격 심리학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자아 개념은 영혼 개념에 의해 불변하다 여겨짐에 따라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되어 제대로 된 분석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본다. 자아 요소와 자아 요소와 기억이 연동된 자아 존재 개념이 없고, 자아와 자아 외의 권한 차이도 없으므로 제대로 된 자아 동일성 개념이 아니다. 계속 달라지는 자아 요소가 기억과 연동되어 자아 존재가 되는 것이므로, 현재의 자신인 자아 요소가 과거와 미래와 계속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아 요소가 달라지는 것과 별개로 연동된 기억과 육체 신호에 따라 자아 존재가 계속 달라진다. 자아와 자아 외의 권한 차이로 자아가 의지를 가지고 자아 외를 재가공하여 본질을 바꾸는 것으로 자아 존재도 과거와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바뀌는 것이 어렵지만 가능하다. 


자아 요소는 기억과 연동하여 자아 존재가 된다. 기억이 같으면 몸이 달라도 같은 존재고 기억이 다르면 몸이 같아도 다른 존재다. 몸이 다른 로봇에 기억을 이식하면 같은 자아 존재가 되고, 몸이 같더라도 기억을 상실하면 다른 자아 존재가 된다. 그런데 기억은 언제든지 손상이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다. 자아 요소에 기억이 연동되는 것으로 존재하는 자아 존재도 불안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무언가 장기적인 계획을 했다면 주기적으로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메모 같은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자아 존재 훼손이 발생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이것은 기억을 디지털화 하기 전까지는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유동 자아는 계획을 비롯한 사생활 기록이 지나치게 자세할 경우 자아 존재가 변하지 않게 되면서 고정 자아가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영혼 개념을 받아들이고 본인의 본질이 불변하다 여긴 인간은 본인의 인식과 가치도 절대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것이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이다. 인간은 본인이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게 된 진리, 도덕, 아름다움 따위를 절대적이라 여겼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여기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가치 강요다. 종교, 왕정, 공산, PC 등 인간에게 가치를 강요하는 모든 사상은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이타주의 논리 회로를 거치면 전체를 위해 가치를 강요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가 된다. 


가치 중에서 아름다움의 경우는 상대적이라 여기기도 하여 상대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기도 하지만 도덕의 경우 절대적으로 여기며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에게 도덕을 강요하게 되었다. 인간의 논리 회로에서 도덕과 윤리가 영향력이 높은 것은 이처럼 가치의 절대성에 의한 것이다. 누군가 좋지 못한 사건으로 보이면 권선징악을 말하며 좋지 못한 사건에 대한 응징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의 동기가 윤리와 같은 가치에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꼰대질은 종교 가치인 윤리에서 왔다. 도덕을 절대적이라 여기는 것에 의해 양심이 지능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양심이 지능이면 양심의 기준이 되는 종교는 가치가 다른 종교를 어리석다 여길 것이다. 그리고 실제 서로를 어리석게 여겼다. “이 어리석은 이교도 놈! 처단해주지!” “내가 할말이다! 멍청한 이교도 놈! 죽어라!” 불화, 분쟁, 전쟁 등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한 대부분 이런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상호 멸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PC주의, 여성주의 등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PC주의자는 다른 가치를 가진 이들을 “Uneducated.” 라고 말하며 멸시하거나, 여성주의자는 다른 가치를 가진 이들을 공부하라고 말하며 멸시하기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원래 멸시하던 이들과 그에 반발하여 멸시하는 이들이 맞서 같이 서로를 멸시하고 있다.






2) 감각 차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은 다양한 이유로 나타났다. 가공 이전의 상태, 자아 외 무의식, 인간 심리, 개인주의 체제 질서,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 등. 보통 겪어본 적이 없거나 고정 관념에 의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생기게 된다.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란 개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논리: 1.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과정이나 원리.] [이치: 1. 사물의 정당한 조리.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 [합리: 1.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 [조리: 1.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사전적 정의가 상당히 애매한데, 간단히 이치를 모순 없는 체계로 해석하겠다. 보편성과 재현성을 갖춘 자연 계열의 탐구가 보통 모순 없는 체계를 갖춘 이치가 된다. 


일반적으로 만류인력의 법칙 같은 것이 보통 그렇다. [만류인력의 법칙: 1.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그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두 물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 1687년에 뉴턴이 발견하였다.] 이런 법칙이 모든 인간에 영향을 미치고 경험해볼 수 있어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도 원리를 파악하여 체계를 갖춰 이치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를 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리: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2.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3.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자연 계열의 증명을 활용하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활용할 증명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바로 육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조금이라도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감각 기관으로 수집하는 자료가 다르고, 자료로 만들어진 정보를 인식하는 것도 달라지게 된다. 시각이 다르기에 보는 것이 다르고, 청각이 다르기에 듣는 것이 다르고 후각이 다르기에 맡는 것이 다르고, 미각이 다르기에 맛보는 것이 다르고, 촉각이 다르기에 느끼는 것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자료를 통해 만들어진 정보도 달라 인식도 다르게 된다. 간단히 천체를 관측하는 관측 기구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안다. 과거 관측 기구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현재 관측 기구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생기고 있다. 성능이 달라지면서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져 자료가 달라졌고, 그 자료가 달라지면서 정보도 달라져 인식도 달라졌다. 이것으로 인식의 상대성이 증명되게 되면서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가치는 판단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말한다. 진리, 도덕, 아름다움 등 인간이 판단이 가능하면 가치다. 그런데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인식이 필요하게 된다. 판단을 하는데 필요한 인식이 상대적이다보니 가치 또한 상대적이게 된다. 진리는 학문의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 여기는 인간에 의해 상대적이게 되고, 도덕은 충돌하는 종교를 보면 상대적임을 알 수 있고, 아름다움은 취향이 다른 인간을 보면 상대적임을 알 수 있다. 일반 인간과 탐구 인간은 지식에 대한 진리 판단이 다를 수 있고, 일반 인간과 난청 인간이 소음에 의한 도덕 판단이 다를 수 있고, 일반 인간과 색맹 인간이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인식의 상대성에 의해 가치의 상대성도 증명되면서 종교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상에 의해 인식과 가치가 유사해질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언어가 그렇다. 한국어 언어권에서는 언어를 공통 인식으로 삼아 언어에 의한 인식과 가치가 유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권이 다르면 상대적이게 된다. 한국어 언어권에서는 비속어로 들리는 단어가 외국어 언어권에서는 일반어로 들릴 수가 있다. 무엇보다 모두 다른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의해 유사해질수는 있어도 똑같아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인식과 가치 차이에 의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상에 의해 사회 공통 인식과 가치가 생기더라도 인간의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은 성립된다.






3) 존재 탐구


자연 계열의 탐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과 가치가 상대적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다. 인식과 가치가 상대적임에도 본인의 인식과 가치가 절대적이라 주장하며 타인의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는 바람에 수많은 갈등과 분쟁과 전쟁이 있었다.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이 수많은 문제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으면 사회 기준이 사라진다. 그래서 인식과 가치가 다른 인간이 언어를 통해 공통 인식을 가진 것과 같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어야 공통 기준으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과 가치와 다르게 절대적인 것이 있다. 바로 존재다.


인간은 감각 기관이 달라 색을 다르게 보고 소리를 다르게 듣고, 사상이 달라 언어가 다르게 느껴지고 사상이 같더라도 똑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색이 존재하고 소리가 존재하고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다. 즉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존재는 절대적이다. 이 존재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인류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존재 탐구다. 보통 모든 학문은 상대적인 인식 탐구를 하여 체계적인 발전이 불가능했다. 탐구한 결과가 인간, 지역, 시대별로 계속 다른데 어떻게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인류 문명은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자연 계열은 과학적 방법을 통한 과학 혁명으로 극복했다. 관찰, 가설, 실험, 증명을 통해 탐구 결과가 재현성과 보편성을 확보하면서 모든 인간이 같은 존재를 알게 되는 것으로, 증명된 탐구 결과는 학문 내에서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두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듣고 다르게 느낀다 하더라도, 과학적 방법으로 같은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종의 한계를 초월했다.


자연 계열은 자연이란 선천적 존재를 탐구하므로 선천적 존재 탐구에 해당하게 된다. 자연 계열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모두가 같은 존재를 알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과학적 방법을 계속 반복하면서 모두가 같은 존재를 아는 것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아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선천적인 상태 그대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정확히 모르는 존재인 일반 진리와 인간이 추측한 존재인 학문 진리로 나뉘게 된다. 학문 진리는 학문에 속할 때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학문에서 벗어나면 진리가 아니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 탐구 결과가 나오면 학문의 진리가 바뀔 수 있게 된다. 존재 탐구로 증명된 고전 역학이 학문 안에서 존재에 속하지만, 학문 밖에서는 가치에 속하여 고전 역학의 진리 유무를 판단하고 양자 역학과 같은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학문에 존재와 가치가 공존하면서 학문이 발전한다. 오늘날 문명의 이기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바탕으로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파악할 수 있었다.






4) 존재 질서


모두가 인식과 가치가 달라도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존재의 절대성이다. 이 존재의 절대성은 존재 유지로 접근했을 때도 성립된다. 모든 존재는 존재에 속하기로 정했을 때에 존재 구조 유지를 위한 활동은 절대적이다. 그러지 않거나 못한 존재는 모두 사라졌다. 존재 유지의 절대성은 인간 육체로 이해하면 쉽다. 인간이 본인의 존재에 속하기로 정했을 때에 본인의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한 활동은 절대적이다. 그러지 않은 인간은 전부 죽었다. 이런 존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초등학생은 없을 것이다. 아마 일반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본인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원치 않더라도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 결과로 논리적으로 증명한 것 중 하나이므로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된다. 이 존재 개념이 사회 기준이 되는 것으로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킬 수 있게 된다.


존재은 판단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가치는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인간이 본인의 존재에 속하기로 정했을 때에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해 식사를 한다는 것은 판단 대상이 아니므로 존재에 속하지만,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와 같이 육체 구조 유지 수단은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가 된다. 인간이 본인의 존재에 속하지 않기로 정했을 때에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해 식사를 한다는 것은 판단 대상이 되므로 가치에 속한다. 살지 않기로 결정한 인간에게 식사는 절대적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판단 가능 유무로 존재와 가치를 구분하면 된다. 식사를 하는 것이 존재 유지에 속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절대적이라 여겨졌던 존재 유지가 정말 존재 유지가 맞는지에 대한 판단도 가능할 수 있는 것으로 가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 탐구를 통해 존재 유지 파악이 가능하여 존재 탐구 학문 내에서는 판단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으로 존재가 성립되게 된다. 존재 탐구로 기름 넣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야 하고 말 먹이를 먹는 말에게 말 먹이를 줘야 하는 것과 같이 존재 유지 방법을 알 수 있다. 학문에 속하는 이상 학문이 증명한 존재 유지 방법은 절대적이게 된다. 여기서 기름 종류 또는 말 먹이 종류는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가 된다. 반면 학문에 속하지 않은 것을 존재라 주장할 때에는 존재를 기초로 하거나 보편성과 재현성 등을 통해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존재를 탐구하든 존재를 유지하든 판단으로 존재와 가치가 결정된다. 이것이 존재 개념의 기본이다.


존재 유지 개념은 쉬운 편이기에 존재 개념 발상은 육체 구조 유지에서 시작되었다. 존재 유지의 절대성을 파악하고 나서 과학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존재 탐구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존재 유지 개념은 쉽기 때문에 이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이상할 수도 있으나, 절대적으로 여기는 종교 가치에 의해 나타난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에 등잔 밑이 어둡듯이 난이도와 별개로 떠올릴 수 없었다고 본다. 


인간이 본인 존재에 속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판단이 가능하므로 가치가 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존재 가치다. 존재에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면 존재에 속하면서 존재 구조 유지가 절대적이게 되면서 강제력이 발생하게 된다. 존재에 속하는 동안 원치 않더라도 해야할 일이 생긴다. 이것은 종교, 체제, 학문 또한 마찬가지다. 종교에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어 종교에 속하기로 한 동안 종교 구조 유지를 위해 종교 가치는 절대적이게 된다. 체제에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어 체제에 속하기로 한 동안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해 체제 가치는 절대적이게 된다. 학문에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어 학문에 속하기로 한 동안 학문 구조 유지를 위해 학문 가치는 절대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체제에 속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체제에 속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게 된다. 누군가 부자유를 바라거나 지배를 바라는 자유를 보장해야 자유가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자유는 모든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므로 그런 자유는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이므로 누군가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더라도 그것을 허용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로 노예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개인의 자유 자체를 버리며 노예가 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는 주권, 시장도 마찬가지다.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의 차이는 존재 가치 차이다. 기본적으로 존재에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한 뒤에야 존재 구조 유지를 위해 존재에 속한 가치가 절대적이게 되는데, 종교 가치의 경우 속하든 속하지 않든 절대적이라 주장하면서 존재 가치가 무관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부 종교는 가치가 다른 종교를 공격하거나, 종교 가치를 추구하는 신정 국가에서 체제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정 국가로 이민와서 종교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반면 체제 가치는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고 나서 속하는 동안만 절대적이고 속하지 않으면 상대적이게 된다. 학문 가치도 종교 가치와 관련이 없거나 적은 자연 계열은 보통 속할 가치가 있다 판단되고 나서 속하는 동안만 절대적이고 속하지 않으면 상대적이게 된다. 그것으로 체제와 학문은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해진다.



존재의 절대성으로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예를 들어 쾌락 연쇄 살인마가 있다 하자. 그럴 때 쾌락 연쇄 살인마는 절대적으로 악하다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은 이것을 절대적으로 악하다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상대적이다. 이것은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바탕으로 나온 명제다. 그렇다면 쾌락 연쇄 살인에 대한 가치 판단도 상대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쾌락 연쇄 살인마도 인간이므로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인간은 쾌락 연쇄 살인마는 인간도 아니라며 인간을 부정할 수 있는데, 그런 가치 판단으로 존재가 부정될 수는 없다. 누군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을 사회에서 허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치의 상대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여기서 존재의 절대성이 나온다. 개인의 쾌락 연쇄 살인을 막지 않으면 사회 구조 유지가 되지 못하고 체제에 따라 사회 원리도 추구되지 못하면서 체제 구조 유지도 못될 수도 있다. 즉 개개인의 가치와 무관하게 사회에 부적합하고 체제에 부적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정 가치에 맞지 않아 막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부적합하여 막는다. 이것으로 특정 행위가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아도 막을 수 있게 된다. 육체에 속하기로 정했다면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한 행동이 절대적이기에 강제력이 있듯이 사회와 체제에 속하기로 정했다면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위한 행동이 절대적이기에 강제력이 있어 제재 권한이 있는 사회 구성원은 강제적으로 해당 행위에 대한 제재를 할 수 있게 된다. 존재의 절대성으로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이런 것이 존재 질서다.


지금까지 종교 가치가 남은 이유 중 하나는 종교 가치 외에 사회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질서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가 등장하고 나서 개인의 자유의 한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자유방임주의나 자유지상주의는 물론이고 쾌락주의나 공리주의는 합리적인 한계를 제시하지 못했다. [쾌락주의: 1. 쾌락을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이라 생각하고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 내지 도덕의 원리로 생각하는 사상.] [공리주의: 1.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두는 사상. 개인의 복지를 중시하는 견해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우며 사회 전체의 복지를 중시하는 견해가 있다.] 쾌락을 바라는 자유의 한계와 행복을 바라는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모른다. 합리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 가치에 의존하면서 종교 가치에 의한 억압과 희생이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 존재 질서는 존재 탐구로 명확한 기준을 정할 수 있다. 인류는 이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통해 어떻게 해야 육체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것과 같이 어떻게 해야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사회에 속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이게 된다. 사회 유지 내에서 목적인 사회 구성원 생존은 판단할 수 없으므로 존재가 되고, 수단인 생존 방식은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가 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주의 등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는 체제에 속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이게 된다. 체제 유지 내에서 목적인 자유, 주권, 시장은 판단할 수 없으므로 존재가 되고, 수단인 실현 방법은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가 된다. 


같은 존재일 경우 개인, 사회, 체제 순으로 강제력이 우선된다. 육체 구조 유지가 되어야 사회 구조 유지가 가능하고, 사회 구조 유지가 되어야 체제 구조 유지가 가능하다. 체제 가치에서 판단할 수 없는 목적인 존재는 종교 가치와는 충돌해도 다른 체제 가치와는 보통 충돌하지 않으나, 만약 충돌한다면 우선 순위는 마찬가지로 개인, 사회, 체제 순 또는 존재 유지 영향력 순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존재 가치에 따라 우선 순위는 달라질 수 있다. 존재 가치를 높다 느끼는 것부터 존재 유지를 위해 활동할 수 있다. 사회와 체제는 생활 집단과 생활 양식을 의미하고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의 생존과 모든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사회와 체제에 속하고자 할 때 개인 생존이 된 상태에서 자유 없는 생존은 본인에게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모든 개인의 생존보다 모든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것에 의해 우선 순위가 달라질 수도 있다. 


사회 역할 계약에 의해 우선 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군인, 경찰, 소방관 같이 위험을 감수하는 역할의 경우, 보통은 개인을 우선시하나 보통이 아닐 때에는 사회 역할 계약을 통해 개인보다 사회나 체제를 우선하기도 한다. 이는 해당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에만 달라지는 우선 순위로, 휴식과 같이 역할 수행을 하지 않는 동안이나 퇴직과 같이 역할을 하지 않게 되면 일반적인 우선 순위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여 체제도 존재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인류 전체를 살려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은 존재 개념이 없어 종교 가치에 의존하여 질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존재 질서를 기준으로 개인의 자유 한계를 정하여 종교 가치에서 해방되어 체제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존재 질서 내에 모든 가치 추구가 허용된다. 사랑과 증오가 존중되고 평등과 차별이 존중되며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존중될 수 있다. 증오와 차별과 더러움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 질서 내의 가치기 때문에 가능하다.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증오와 차별과 더러움은 보통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가치에 해당한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증오나 차별이나 더러움을 어떻게 하든 자유롭게 된다. 만약에 그게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때 존재 질서를 기준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차별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상대적 가치로 존중된다. 그러나 그 차별을 직접 행하면서 성소수자 개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적 존재로 제재된다. 이것은 망망대해에서 뗏목 위에서 살아남은 표류자들로 비유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뗏목 위에 미워하는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표출하지 않는다. 섣불리 미움을 표출하다 뗏목에서 떨어져 공멸하게 될 수 있다. 미움이 상대적 가치라면 뗏목 유지는 절대적 존재다.


존재에 해를 끼치지 않는 모든 가치는 존중될 수 있다. 존재 질서를 통해 사랑할 자유와 증오할 자유를 모두 보장하겠다. 가치가 강요되는 사회가 자유 사회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완전한 자유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가치의 상대성이 증명되지 않았어도 가치의 자유가 보장되었어야 했다. 인간은 육체가 있어 완전한 자유를 얻기는 어렵지만 존재 개념을 통해 최대한의 자유는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웃으면 돼. 이것은 웃으면 안 돼”, “이것은 울어야 해. 이것은 울으면 안 돼.”, “이것은 화내야해. 이것은 화내면 안 돼.”, “이것은 좋아해야 해. 이것은 좋아해서는 안 돼”, 이것은 싫어해야 해. 이것은 싫어해서는 안 돼.” 이런 것이 종교 가치에 의한 가치 강요다.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 사람은 본인이 기쁠 때 웃을 수 있어야 하고 슬플 때 울 수 있어야 하고 화날 때 화낼 수 있어야 하고 좋아할 때 좋아할 수 있어야 하고 싫어할 때 싫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을 종교 가치로 멋대로 재단하여 인간의 감각, 감정, 욕구, 욕망 등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모든 가치관은 존재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존재 질서와 같이 종교 가치를 초월한 질서가 있어야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며 종교 가치를 근거로 한 욕망 억압과 개인 희생과 같은 부자유가 발생하지 않는다.






1.7 사회 문제


1) 인식 탐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최근 인문 계열의 인식 탐구 중 하나다. [모더니즘: 1. 사상, 형식, 문체 따위가 전통적인 기반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려는 창작 태도. 20세기 서구 문학·예술상의 한 경향으로, 흔히 현대 문명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반유토피아적이다. 또한 현실 비판의 한 방법으로 예술의 비인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모더니즘이 확립하여 놓은 도그마, 원리, 형식 따위에 대한 거부 및 반작용으로 일어난 예술 경향. 특히 1960년 전후의 미국·프랑스 소설의 실험적 작풍이나, 구조주의 이후의 전위적 비평을 이른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둘다 종교 가치에 영향을 받아 가치의 절대성을 바탕으로 자유라는 체제 가치에 무게를 두었으나, 모더니즘은 규칙·이성·효율 등으로 기준이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불규칙·감성·비효율로 기준이 없다. 모더니즘은 기준이 있어 질서정연하나 경직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서 사회 전체가 자유 체제 가치와 맞지 않게 부자유스럽게 될 수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준이 없어 질서정연하지 못하나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질서정연하지 못하여 혼란스러우면서 가치의 절대성에 의해 한계가 있었다. 기준이 없는 질서는 무질서와 다를 바 없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치의 절대성을 띠는 것으로 다른 가치를 허용하지 않아 전쟁이나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이 넓은 편인데, 그 중에 종교 가치에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일수록 민족, 인종, 성별 등의 자유와 같이 집단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집단주의적이게 되면서 이타주의에 의한 전체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파시즘, 나치즘, 피시즘(PCism) 등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PC주의자는 종종 칸트나 존 롤스와 같은 윤리나 정의를 다루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이치로 삼아 논리적인 주장을 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가치의 절대성을 근거로 주장했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주장이 되면서 이치가 아니게 됨에 따라 그 주장은 비논리가 되게 된다. 그들의 윤리나 정의는 애초에 이치가 아닌 것을 근거로 주장하면서 이치가 아닌 것을 이치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본인이 인식한 인식 탐구 개념을 하나씩 더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인식 탐구는 상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탐구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탐구한다 해보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악을 부를 수 있는 본인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선하다.’와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본인이 희생하는 것은 선하다.’에서 멈추면 인식 탐구가 된다. 존재 탐구는 절대적인 존재를 바탕으로 탐구한 것을 말한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바탕으로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모양, 성질, 구조, 원리, 동력 등과 논리 회로와 조건에 따른 변화를 파악하여 금욕과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발생할 수 있음까지 가면 존재 탐구가 된다. 


존재 탐구를 하거나 존재 탐구를 활용하면 간단할 수 있는 것도 인식 탐구를 하면 복잡하게 된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바탕으로 만든 존재 개념이면 자유 한계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데, 인식 탐구에 머물게 되면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집회의 자유, 선거의 자유, 공직 및 개인 재산을 소지할 자유 등을 각각 정하면서 자유 종류와 범위가 지나치게 복잡해진다. 복잡하니까 세세하게 종교 가치를 근거로 온갖 검열과 규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서 존재와 무관한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되게 된다. 자유를 침해당한 인간은 그 자유 침해를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화자가 초등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보자. “자유에는 다양한 자유가 있고, 그 자유들의 한계는 특정 기준으로 정해지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한 몇 가지 포괄적인 원칙이 있어.” 그림을 그려 설명한들 초등학생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절래절래 짓고 가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면 화자는 역시 철학은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자유가 사회 질서 기준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다.


화자가 초등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보자. “네가 살고 싶으면 하기 싫어도 먹고 자고 싸야 하잖아? 그것처럼 사회도 살고 싶으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고 싶으면 그걸 해야 해.” “대신에 그걸 하고 나면 전부 자유야.” 인간 그림과 사회 그림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대부분 초등학생은 이 말을 듣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몸을 갖고 있어 살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걸 하고 나면 전부 자유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것으로 자유 기준이 된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 개념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초는 쉬워야한다. 존재 질서에서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러지 않으면 죽으니까. 가치는 상대적이다. 몸이 다르니까. 이것을 기초로 자유가 사회 질서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모더니즘은 기준이 있는 질서를 추구하면서 부작용으로 부자유가 나타났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준이 없는 자유를 추구하면서 부작용으로 무질서가 나타났다. 모더니즘이 추구한 질서는 존재의 절대성으로 강제력의 정당성을 갖추게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한 자유는 가치의 상대성으로 자유를 보장할 수 있게 하여 질서와 자유가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게 한다.






2) 현상 해석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현상 몇 가지 설명하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준이 없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그것으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다양한 가치의 절대성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에 반하는 모든 가치는 부정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분류되는 PC주의가 다른 가치를 가진 이들과 싸웠던 것은, PC주의는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지 모든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PC주의는 기준이 없어 논리적이기가 어려워 PC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PC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에는 논리가 없어 불합리한 주장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불합리한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종교 가치와 종교 가치를 탐구한 인문 계열의 주장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매번 도덕과 윤리를 말하면서 종교 가치로 체제 가치를 훼손하는 것에 의해 많은 사회 문제를 부르게 되었다.


PC주의는 기준이 없어 자유로우나 기준이 없어 불합리했다. PC주의의 가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새롭게 기준을 만들 수 없으므로 과거의 기준을 끌고 온 것이 종교 가치와 종교 가치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성인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성별성이다. 이른바 인종과 성별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정립된 인종성과 가부장제 시대에 정립된 성별성을 인간의 선천적 성질이라 가정하고는 인류는 거기에 맞춰야 한다며 주장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종성을 말하며 “백인은 가진 것이 많고 흑인은 가진 것이 적으므로, 흑인에게 가산점이나 할당제와 같은 특혜를 주는 것에 의해 백인이 차별 받는 것은 긍정적 차별이다.”라는 논리와

가부장제 시대의 성별성을 말하며 “남성은 가진 것이 많고 여성은 가진 것이 적으므로, 여성에게 가산점이나 할당제 같은 특혜를 주는 것에 의해 남성이 차별 받는 것은 긍정적 차별이다.”라는 논리다. 그 논리에 맞춰준 정책이 바로 미국의 사회적 약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이다. 이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우대하는 정부 정책으로 인종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시작되어 그 외 약자들로 확장된 것인데, 이는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성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주장이다. 존 롤스의 차등의 원칙과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위헌으로 판결하여 폐지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여성주의에 의해 성인지 감수성이 주장되었다. 성인지 감수성은 사회적으로는 성차별과 성의 불평등을 인지하는 능력 또는 법적으로는 성범죄 피해자가 소극적인 태도를 갖추는 것 등을 말하는데, 이는 가부장제 여성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PC주의와 여성주의는 과거 가치에 반발했음에도 과거의 기준을 쓰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기성 세대에 인정 받기도 한다. 여성주의가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 여성성을 사회에 강요하는 것을 가부장제 가치관이 익숙한 기성 세대가 인정하듯이 말이다. 


기준이 없어 새로운 기준을 만들지 못하고 과거의 기준에 가져다 쓰면서 점점 과거로 퇴보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미국 흑인은 사회적으로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 여성은 법적 또는 정책적으로 수동적이고 소심하고 유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성장하여 강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준에 맞춰 용어를 바꾸는 배려를 하거나 혜택을 주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 흑인이 범죄율을 높은 것을 보고 인종에 다른 인종과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의심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동일 종으로 흑인에 다른 인종과 다른 인종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인종은 다른 인종과 다를 바 없이 우수하다. 이것은 철저하게 사상 문제다. 흑인을 차별하던 제국주의 인종성에 의해 흑인이 성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차별에 의해 나타나던 결과를 바꾸기 위해 흑인에게 노력이 적거나 없어도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자 노력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가산점과 할당제는 노력이 적거나 없어도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제도에 해당한다. 집단 평등을 명분으로 특정 인종과 성별의 비율을 맞추기 위해 가산점과 할당제를 주자, 그들은 그 외 인종과 달리 노력이 적거나 없어도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능력이 있어도 일정 이상 노력을 해야 하는데, 집단 평등을 위해 할당제를 하면 어떤 경우에는 정말 아무 노력 하지 않아도 선호도가 높은 사회 역할을 얻을 수 있기도 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절대적 이익을 평등이란 윤리를 근거로 하여 성립시켰다. 평등이란 가치에 본질이 가려질 수 있는데, 가산점과 할당제의 본질은 노력이 적거나 없어도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것에 있다. 아마 평등 개념으로 접근하면 성별이나 인종 비율에 맞추는 것이 정당하다 보일 수도 있는데, 절대적 이익 개념으로 접근하면 정말 말도 안된다고 느껴질 것이다. 절대적 이익 개념이 PC주의와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 혼란의 결정적 원인이 된다.



약자인 백인이나 남성이 있을 수 있고 강자인 흑인이나 여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집단 평등을 주장하며 비율을 맞추는 것에 의한 절대적 이익을 얻는 것을 행하자, 약자인 백인과 남성은 차별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집단으로 보고는 정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게 또 평등 가치에 의해 정당하다 인식되기도 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분명 약자인 흑인과 여성 비율이 높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과거 신분제 노예가 자유를 얻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다가 내게 되었다. 납세의 의무를 지면서 노예는 시민이 되었다. 반면 제국주의 흑인은 자유를 얻으면서도 과거 흑인의 인종성으로 상점을 털더라도 괜찮다는 것과 같은 다양한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 백인과 대등한 인간이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고, 가부장제 여성은 자유를 얻으면서도 과거 여성의 성별성으로 징병 의무를 지지 않는 것과 같은 다양한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 남성과 대등한 인간이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현재 흑인과 여성은 과거 차별받은 위치에서 다양한 특혜만 받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흑인이나 여성을 차별하는 인간이 있다. 그렇다고 집단에 특혜를 주는 것은 할 수가 없다. 집단이 하나 둘도 아니고, 모든 집단에 그런 식의 혜택이 나오면 엉망진창이 된다. 특정 지역이 차별을 받으니 혜택을 줘야 한다. 특정 학교가 차별 받으니 혜택을 줘야 한다. 특정 종교가 차별을 받으니 혜택을 줘야 한다. 이외 정말 수많은 집단이 있다. 이런 것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가? 더구나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지 혜택을 주는 것에 머무르면 성장하지 못하게 되면서 차별이 끝나지가 않게 된다.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절대적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노력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게 되도 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다 여기는 심리적 한계에 의해 실제 능력보다 무능하게 여기게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성장은 더더욱 멀어진다.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성별성에 의해 성장이 멈춘 것이다. 


만약 인종이나 성별로 차별 받는 것이 발생하면 흑인과 여성 전체가 차별 받은 것이 아닌 개인이 개인 특성에 의한 차별을 받은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져야 한다. 흑인이어서 차별 받았어도 흑인 개인이 차별 받은 것으로 접근하고 여성이어서 차별 받았어도 여성 개인이 차별 받은 것으로 접근한다. 이는 백인이나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차별에 대한 대응도 개인이어야 집단으로 대응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의해 진영으로 나뉘어 다투면서 문제 해결이 끝나지 않는 것을 끝낼 수 있다.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여성성에 갇혀 있는 이들은 현재 심리 한계에 의해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지배를 당하던 인종은 그 시대 인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가부장제 시대 역할이 집안 일로 한정되던 여성은 그 시대 여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C주의와 여성주의는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여성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종성과 여성성을 해당 인종과 여성에게 주입하고 사회에 배려를 강요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일부 인종과 여성은 현재 심리 한계에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는 부당한 특혜로 불합리하게 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PC주의는 기준이 없어 평등한 인종성과 성별성이 아닌 과거 불평등한 인종성과 성별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평등한 인종성과 성별성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되었다. 평등한 인종성과 성별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상태에 놓인 제국주의 인종성과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거나, 제국주의 백인성과 가부장제 남성성을 따라하기만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인종과 성별과 무관하게 개인이 현재 심리 한계에서 벗어나 소재 한계 내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자아가 의지만 제대로 가지면 자아 외가 예측 계산하여 실행하기에,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



한국은 PC주의보다 여성주의가 활성화되어 여성주의에 의한 현상에 대한 의견을 좀 더 내겠다. 가부장제와 가부장제 여성성에 대해 알아보겠다. 가부장제는 집단주의 체제의 제도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여 모든 개인에 대한 차별이 발생하는 제도다. 거기에 약자인 여성이 좀 더 많은 차별을 받았기에 가부장제가 여성 차별 제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모든 개인 차별 제도다. 가부장이 되어 책임을 지고 싶지 않는 인간에게는 가부장조차 차별로 작용하게 된다.


가부장제 여성성은 가부장제 시대에 사회 참여를 하지 않았던 의지가 약한 수동적 여성성과 정조관념을 지키는 엄숙주의적 성관념을 전제한다. 가부장제 여성성과 성관념은 철저하게 가부장제 시대의 종교 가치를 근거로 한다. 이러한 가부장제 여성성이 기성세대의 논리 회로와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거기에 과거 가부장제 시기의 여성 차별 조건이 들어가자 겉으로 봐도 여성 억압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현재 여성 평등 조건이 들어가자 겉으로 보면 여성 인권처럼 보이게 되었다. 가부장제의 여성성 억압을 시행했던 이들은 명분을 위해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와 성 상품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며 남성의 성욕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몰고가면서 여성성 억압이 여성 인권으로 탈바꿈했다. 그런 것을 성인지 감수성이라 말하며 가부장제 여성성을 신세대 여성들을 주입하고 사회에 강요하면서 사회 전체가 뒤틀리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성에 의해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그것을 여성 인권이나 남성 차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이 여성성을 억압받으면서 남성이 여성성을 소비하는 것이 어렵게 된 것이다. 여성이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니면 불편해한다. 여성이 노출된 광고판도 불편해한다. 이런 것이 여성성 억압이다. 여성성은 아름다운 것이지 더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성을 터부시하는 것을 그만해야 한다. 미성년 핑계를 대는데, 인간은 미성년 시기부터 본인의 여성성과 타인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접하고 성장해야 이성 모두 여성성 접촉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이성 관계가 성립되게 된다. 미성년이 성을 접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미성년의 성조차 집단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쓰던 집단주의 체제의 종교 가치가 만든 개인주의 체제에 부적합한 인식이다. 미성년 때 성 접촉을 그토록 터부시하며 막아놓고 어떻게 강요 없이 자유로운 정상적인 이성 관계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여성성 소비는 여성 인권이나 남성 차별이 아니다. 단지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남성이 여성성을 소비하기 어렵게 된 것이고, 남성성이 자유로우니까 여성이 남성성을 소비하기 쉽게 된 것이다. 생산자가 억압받자 소비자가 소비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소비자 차별이라 말하면 안 된다. 이것은 철저하게 여성 억압의 결과다. 그걸 여성주의는 여성성 억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 상품화 반대라고 했을 뿐이다. 여성성 억압하는 종교가 얼굴 가리고 옷 종류 강제하면서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노출하는 것이나 성 상품화를 못하게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은 나쁜 차별이고, 여성주의가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노출하는 것이나 여성 본인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으로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은 착한 차별인가?



지금 가부장제 여성성의 주입과 성인지 감수성의 강요를 여성의 권리라 주장하는 것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가? 불법 종교에 주입된 인간이 사람들에게 불법 종교가 주입한 인간성을 다른 인간들에게 옳은 것이라며 강요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제 여성성이 작동하도록 새겨 넣은 논리 회로를 그대로 놔두고 여성성 억압하는 성관념이 옳다 떠들어대니 여성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남성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주의처럼 사상으로 여성을 억압하면서 그것을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주의 사상이 문제다. 대부분 인간이 문제기보다는 사상이 문제다. 사상 문제만 해결하면 성별 관계 없이 전부 우수하다. 그럼에도 그런 사상에서 미국의 사회적 우대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절대적 이익까지 추구하니 더욱 더 엉망이 된다. 피해 의식 높고 감사 지수 낮고 무고죄와 아기 살해가 늘어난다. 이런 것 전부 이딴 걸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고 다닌 결과다. 이런 것에 의해 신세대 여성이 가부장제 여성성을 가지게 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가 그루밍이나 가스라이팅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 없다. 종교 가치로 순종적으로 가공해놓고 그것에 맞춰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흑인 집단이나 여성 집단이 인종 차별이나 성별 차별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면서도 흑인과 여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바란 것이 아니라 본인 집단의 절대적인 이익을 바랐기에 그랬던 것이다. 만약 인권을 바랐다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굳이 인종이나 성별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같은 인간이니까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라가 아닌 흑인과 여성이니까 절대적인 이익을 달라는 식이니까 인종과 성별을 강조하게 된다.


절대적 이익은 이런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남녀 임금 격차 크다는 통계를 활용하는데, 임금 격차 외에 조건을 무시하여 정당한 차이임에도 부당한 차이인것마냥 말하며 부당한 이익을 주장하고 있다. 생산 가치 차이, 현장직과 사무직의 차이, 이과와 문과의 차이, 노동 시간의 차이, 험한 일 유무 차이, 가정 주부 비율 차이 등 다양한 조건이 모두 무시되고 오로지 성별 집단이 임금 차이 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력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이익을 달라 요구한다. 절대적 이익을 위해 여성 성매도자가 있으면 여성 성매도자는 지원금을 주고 남성 성매수자는 처벌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가부장제의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성을 근거로 정당화한다. 그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배웠으므로 그런 여성 억압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저항이 없다. 


그런 절대적 이익을 위해 선동, 오도, 폄하, 거짓 눈물 가리지 않는다. 부당 행위가 드러나 손해를 볼 때가 되면 남탓을 한다. “네가 잘못이다.” 설령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조차도 그렇다. “나의 거짓말을 믿은 너희 잘못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얻는 결과가 나와야만 하기 때문에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절대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스포츠 경기에서 경쟁을 하는데 본인 이익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간은 많이 좋아하더라도, 경쟁하는데 반칙을 써서라도 이기려 드는 인간을 몇 명이 좋아하겠는가? PC주의나 여성주의가 사회에서 기피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것은 여성주의만 그런 것이 아닌 체제에 맞는 합리적 기준 없는 권력 남용에 해당하는 이익 주장은 대부분 그러하다.


이제 이런 다양한 가치의 절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양한 가치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가치의 상대성은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모든 가치가 존중될 수 있다. 모든 가치가 존중되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의 한계를 합리적으로 정하면 된다. 그렇게 존재의 절대성으로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3) 문제 해결


가치에 의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이 자리잡혀야 한다.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은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 결과로 보편성과 재현성을 확보하여 모두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기초로 인문 계열의 체계를 갖춘다. 존재와 가치는 구분이 간단하다. 판단이 불가하면 존재, 판단이 가능하면 가치. 판단이 불가한 것은 존재이므로 절대성을 통해 강제력을 정당화하고, 판단이 가능한 것은 가치이므로 상대성을 통해 자유를 보장한다. 


이 구분은 모든 인문 계열에 적용될 수 있으므로 모든 인문 계열을 통합한 체계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수많은 사회 문제는 인문 계열의 기초가 종교 가치거나 제대로 없어서 체계적인 발전이 안되어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가 충돌하면서 발생했던 것이다. 존재의 절대성으로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켜 가치에 의한 분쟁을 끝낸다.


존재 질서 속에서 개인은 이기주의적인 상대적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이타주의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이기주의는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절대적 이익은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결과를 추구하고 상대적 이익은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결과를 추구한다. 모든 개인은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되 법, 정책, 제도 등의 공정한 규칙 내에서 이익이나 손해를 볼 수 있음을 인식하면 된다. 


모든 것은 개인에 맞춰야 한다. 약자 집단에 맞춘 법, 정책, 제도를 시행할 것이 아니라 약자 개인에 맞춘 법, 정책,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며 집단 전체가 이익을 얻도록 할 것이 아니라 사회와 체제 가치가 추구될 수 있도록 하여 모든 개인이 공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존재의 절대성을 근거로 체제 가치에 속하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종이나 성별을 배제하고 개인이 부족한만큼 성장할 수 있는 생계와 교육 보장 등의 혜택을 준다. 그렇게 하여 모든 개인에게 절대적 이익에 해당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닌 상대적 이익에 해당하는 기회의 평등이 돌아가도록 한다. 






4) 책임 소재


사회 문제의 책임 소재는 무엇에 있는가? [책임: 1.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2.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 사회 문제를 일으킨 개인에게 있는가? 물론 표면상 일부는 그렇다. 그렇기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 그에 대한 제재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전부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문제는 개인과 사회가 모두 책임진다. 사회가 개인이 일으킨 사회 문제의 의무나 부담을 지니까 그에 대한 제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내국인은 사회 구조 요소기에 책임지고 외국인은 국제법에 따라 책임진다.


본질로 보면 책임 소재가 달라진다. 문명인은 문명으로 가공되기 때문에 문명 사회의 모든 주권자와 통치 대행자 책임이 된다. 기초적인 언어부터 가공되는 특정 개인이 본질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야만스러운 원시 사회라면 모를까 고도화된 문명 사회에서는 개인의 교만이 된다. 학문으로 문명이 만들어지는 문명 사회에서 만약 문제 해결 방법이 없었다면 모든 주권자와 통치 대행자가 아닌 학문의 책임이 되게 된다. 학문을 기초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학문에 해결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학문에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인간의 한계가 된다. 자연 계열에서 핵융합 발전소가 상용화되지 못한 것이 인간의 한계이듯, 인문 계열에서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도 인간의 한계다. 이럴 때에는 현재의 학문에 의존하지 않고 한계를 넘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인류는 자연 계열의 과학 혁명으로 한계를 넘어 과거 사회 문제를 해결한 것은 물론이고 현재도 계속 체계적인 발전을 하면서 언젠가 핵융합 발전소도 상용화를 하면 현재 사회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문 계열도 과학 혁명으로 한계를 넘어 체계적인 발전이 되어야 고질적 사회 문제와 앞으로 있을 사회 문제 해결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학문


[학문: 1.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문명은 학문으로 만들어지고 학문은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다.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갑자기 학문이 탄생한 것은 아니다. 언어조차도 시작한 인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시초의 생각이 사상이 되어 널리 퍼지면서 배우는 자가 늘어남에 따라 체계화된 것이 바로 학문이다. 시초의 사상가는 문자가 없던 시기에 있었기에 아마 역사서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같은 학문이나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가 있다. 






2.1 학문 구분


1) 학문 태도


학문 태도는 맹신과 의심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학문 내에서 맹신하면 종교고 의심하면 학문이다. 학문을 맹신하면 학문 종교가 되고 신과 같은 초월한 것을 맹신하면 신비 종교다. 학문으로 문명이 만들어졌기에 국가 체제는 종교나 학문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보통 신정은 종교로 체제가 만들어지고 왕정은 종교와 학문으로 체제가 만들어지고 민주정은 학문으로 체제가 만들어진다. 현재 대부분 민주정은 왕정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종교로 만들어진 종교 가치와 학문으로 만들어진 체제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상태다.


인문 계열은 종교 가치에 영향을 받아 인문 계열의 기초는 대부분 서력 기원 시기에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 인문 계열에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이 남아있다. 종교는 인식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겨 불변한 진리를 알고 있다 여기기 때문에 새롭게 진리를 찾지 않는다. 만약 새롭게 진리를 찾는다면 종교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므로 더 이상 종교가 아니게 된다. 종교에 영향을 받은 인문 계열도 인식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며 새롭게 진리를 탐구하지 않았기에 서력 기원 시기의 인문 계열과 현재의 인문 계열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수천 년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반복된 까닭은 인문 계열이 본질이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 계열은 르네상스로 시작하여 과학 혁명을 통해 자연 계열의 기초는 대부분 과학 혁명 시기에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자연 계열은 많은 것을 의심하면서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에서 많이 빠져나오게 되고, 과학적 방법을 통해 보편성과 재현성을 확보하면서 존재의 절대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존재를 기초로 체계적인 발전을 하면서 매번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 만약 새롭게 진리를 찾지 않는다면 학문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므로 종교가 되어버린다. 철학의 세 기준 중 하나인 존재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자연 계열의 탐구자는 선천적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자가 될 수 있다.






2) 학문 방법


학문 방법은 생산과 소비로 구분할 수 있다. 지식 생산자는 창의 발상을 하고 지식 소비자는 기억 발상을 한다. 지식 생산자는 창의 발상을 통해 모르는 것을 떠올려 없던 가치를 생산하고 지식 소비자는 기억 발상을 통해 아는 것을 떠올려 있던 가치를 관리한다. 없던 가치를 만드는 인간과 있던 가치를 관리하는 인간은 둘 다 필요한데, 이 둘에게 필요한 능력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주입식과 문제 풀이 평가를 보편화하면서 해당 능력이 필요한 있던 가치를 관리하는 인간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게 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창의 발상은 모르는 것을 떠올리고 기억 발상은 아는 것을 떠올린다. 모르는 것은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야 떠올리기 쉽고 아는 것은 관념이 고정되어야 쉽다. 블록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블록: 1. 쌓아 올리도록 만든 장난감.] 유동 관념은 블록이 부품인 상태로 있는 말하고 고정 관념은 블록이 조립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한다. 창의 발상을 할 때에는 블록이 부품인 상태로 있으면 블록 부품을 바로 조립하면서 새로운 블록을 만들 수 있지만, 블록이 조립된 상태로 있으면 블록 조립을 해체를 하여 조립하면서 새로운 블록을 만들어야 한다. 기억 발상을 할 때에는 블록이 부품인 상태로 있으면 블록을 조립해야 하지만 블록이 조립된 상태로 있으면 그냥 그대로 쓰면 된다. 


창의 발상과 기억 발상은 위와 같이 필요한 관념이 다르다. 그런데 주입식과 문제 풀이는 고정 관념을 주입하고 필요로 한다. 지식이 조립된 블록인 상태로 주입하고, 지식이 조립된 블록인 상태로 떠올려서 문제를 푼다. 문제 풀이로 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고정 관념이 많을수록 유능하단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유동 관념이 많을수록 무능하단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유동 관념이 많으면 문제 풀이를 할 때 고정 관념과 달리 블록을 조립하는 시간이 필요하여 신속하지 못할 수 있고, 빠진 부품이 있을 수 있어 용어나 의미가 떠오르지 않아 문제를 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기억력이 좋지 못하거나 공부를 덜 했다는 착각을 하고는 달달 암기하게 하는 것으로 고정 관념을 강하게 가지게 하여 기억 발상 능력은 키우고 창의 발상 능력은 버린다. 창의 발상 능력을 키우려면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유동 관념으로 창의 발상을 하는 과정을 설명해보겠다. 예를 들어 어떤 개념이 있다. 유동 관념일 때에는 개념이 쪼개져서 발상이 되게 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개념을 발상하면 의미가 통째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따로 떠오른다. 민주주의가 뭐지? 주권? 국민? 자유? 사회? 반대로 용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쪼개진 개념들도 추상적으로 떠오른다. 


고정 관념일 때 전부 발상되지 않은 것과 유동 관념일 때 전부 발상되지 않은 것은 다르다. 고정 관념일 때에는 조립된 블록이 전부 떠올려지지 않는 것이고 유동 관념일 때에는 블록 부품이 떠올려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쪼개진 개념을 발상하여 조립한다. 그러다 보면 빠진 개념이 있을 수 있고 객관적 개념과 다를 수 있어 발상을 활용할 때에는 사전 정의를 참고한다. 쪼개져서 발상이 되기 때문에 다시 조립하면서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이치를 떠올리면서 조립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치를 발견하거나 알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조립하면서 익숙한 개념으로도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게 된다. 


쪼개져서 발상이 되기 때문에 조립된 상태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순을 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 모순을 제거하여 합리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타주의를 고정 관념으로 가지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 알지 못하게 된다. 이타주의를 유동 관념으로 가지면 타인, 행복, 개인, 희생, 절대, 등으로 쪼개져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알게 된다. 특정 주장도 쪼개져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주장의 모순을 찾아 논파하는 것도 보다 쉽게 된다.


유동 관념은 유동 자아일 때 수월하다. 2차 성징 이전의 유동 자아일 때에는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서 발상이 수월한 것이다. 인간은 2차 성징이 시작하면서 관념이 고정되면서 자아도 고정되게 된다. 주입식 교육과 문제 풀이로 고정 관념은 더욱 늘어나면서 자아도 깊게 고정된다. 그렇게 한번 고정 자아가 되면 고정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고정된 관념도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세세한 부분까지 다 고정되면서 자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에 의해 고정 자아가 되고 고정 자아에 의해 고정 관념이 늘어난다. MBTI과 같이 세세한 성격 유형을 규정하면 고정 관념이 늘어나 고정 자아가 되는데 영향을 준다. 


유동 관념을 가지려면 고정 관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유동 자아가 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유동 자아는 고정 관념이 적어 고정되지 않아 굉장히 불안정하여 일반 상태로는 유동 자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걸 유동 자아였던 시기를 자아 나이로 정하는 것으로 지속적 인식하면 할 수 있게 된다. 사춘기 시기 “나는 뭐지?” 라며 자아에 대해 생각하던 것을 계속 하면 된다. 나는 세상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계속 하고 있다. 


지식 생산자는 기초와 응용을 전부 생산하는 인간과 응용을 주로 생산하는 인간으로 나뉘는데, 기초 지식 생산자는 기초도 유동 관념을 가져야 하고 응용 지식 생산자는 기초는 고정 관념이되 응용은 유동 관념을 가져야 한다. 자아 나이는 14세에서 20대 초로 설정하여 유동 관념을 늘리고 고정 관념을 줄이는 것이 좋다. 지식 소비자는 기초와 응용을 관리하는 인간으로 고정 관념을 가져도 되나, 지나치게 고정 관념이 많으면 새로운 지식 소비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해야 한다. 자아 나이는 20대 초에서 20대 후로 설정하여 새로운 지식을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고정 관념과 유동 관념을 가지는 것이 좋다.






3) 학문 체계


학문 체계는 사상과 철학과 과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학문에 얽매이지 않으면 사상, 얽매이면서 구체적이지 않으면 철학, 얽매이면서 구체적이면 과학이다. [사상: 1.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철학: 1.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를 나눌 수 있다.] [과학: 1.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을 이르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 과학을 이른다.] 


사회는 학문 전후가 다르기에, 그것으로 용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회는 학문 전에는 문화 학문 후에는 문명으로 나뉜다. 보통 문화를 인문 계열로 보고 문명을 자연 계열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인문 계열이 서력 기원 시기부터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반면 자연 계열은 과학 혁명 이후 존재 탐구를 하면서 끊임 없이 발전하면서, 인문 계열은 시골이든 도시든 차이가 없지만 자연 계열은 발전된 도시에 적용되면서 나타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인문 계열이 존재 탐구를 한다고 가정하고 이제는 학문 전후로 문화와 문명으로 구분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사상은 학문에 얽매이지 않는 탐구다. 있던 적이 없던 시초의 사상이나 있었으나 학문의 기초가 된 기초의 사상을 주로 다룬다. 시초의 사상과 기초의 사상은 모르거나 제자백가, 고대 그리스, 각종 종교, 과학 혁명 등에 해당한다. 사상은 학문에 얽매이지 않아 새로운 확률이 있지만, 새로운 것을 논리로 성립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철학은 학문에 얽매이며 구체적이지 않은 탐구다. 인식, 존재, 가치와 같이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들을 막연하게 탐구한다. 그렇기에 곧잘 형이상학적이게 된다.  [형이상학: 1.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 보통 인문 계열에서 이런 탐구를 하여 철학은 인문 계열에 속한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자연 계열도 구체적이지 않은 탐구를 한다면 철학에 속하게 된다.


과학은 학문에 얽매이면서 구체적인 탐구다. 세부 분야가 세세하게 나뉘어져 특정 개념을 집중하여 탐구한다. 그렇기에 곧잘 형이하학적이게 된다. [형이하학: 1. 형체를 갖추고 있는 사물을 연구하는 학문.] 보통 자연 계열에서 이런 탐구를 하여 과학은 자연 계열에 속한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인문 계열도 구체적인 존재 탐구를 하여 체계를 갖추면 과학에 속하게 된다.


인문 계열이 주로 형이상학을 탐구하고 자연 계열이 주로 형이하학을 탐구한 것은 그냥 인문 계열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탐구할 수 있을 정도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 계열이 존재 탐구를 하여 체계적 발전을 했던 것과 같이 인문 계열도 존재 탐구를 하여 체계적 발전을 해야 한다. 


자연 계열에서는 존재 탐구를 통해 체계를 갖춰 발전하면서 학문 한계 돌파를 하는 일이 있다. 최근 과학의 한계 돌파 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은 수로 표현한 가상의 형태로, 과학자 클로드 섀넌이 미분해석기 논리 회로 연구 중에 떠올린 발상을 통해 디지털 기술의 기초인 디지털 회로 이론을 창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존재 탐구를 하면 절대적인 존재를 기초로 체계적인 발전을 하면서 학문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학 또한 학문에 속하여 발상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전하고 있다. 갑자기 물리 법칙을 무시한 마법과 같은 발전은 어렵고, 실험을 통해 예측할 수 없었던 영역으로는 발전할 수 있다. 자연 계열은 세세하게 체계화하여 대부분 예측 범위 내에서 발전하고 있지만, 학문이 일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학문 내에서는 절대적이라도 학문 밖에서는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자연 계열 또한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기초를 탐구하는 인간이 필요하게 된다.






4) 학문 성질


학문 성질은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식 탐구를 할 때에는 이런 구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존재 탐구를 할 때에는 체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크게 중요하게 된다. 선천적 존재는 일반 자연을 탐구하는 것으로 기초 과학을 말하고 후천적 존재는 선천적 존재 탐구를 활용하는 것으로 응용 과학을 말한다. 기초 과학은 자연 계열이고 응용 과학은 기초 과학을 활용하는 모든 학문이다. 통상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로 학문을 나누는데, 인문 계열 또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 계열의 기초 과학을 이치로 삼아 논리를 전개해야 하므로 응용 과학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으로도 나누어야 한다. 기초 과학은 자연을 기준으로 하고, 응용 과학은 기초 과학을 기준으로 한다. 응용 과학에서 인간 도구를 기준으로 하면 자연 계열이라 부르고 인간 심리를 기준으로 하면 인문 계열이라 부르고 있다. 자연 계열의 선천적 존재 탐구란 기초 과학을 말하고,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의 후천적 존재 탐구란 응용 과학을 말하게 된다.


본래 인문 계열은 인간 심리의 영향으로 어떻게 해도 본인의 주관적인 인식과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게 인문 계열의 한계였다. 그러다 자연 계열이 과학적 방법으로 선천적 존재 탐구를 하면서 인문 계열도 후천적 존재 탐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문 계열은 인식과 가치를 이치로 삼아 논리적인 탐구를 하는 것이 아닌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이치로 삼아 논리적인 탐구를 하면서 인문 계열도 존재 탐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은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 결과를 이치로 여기기에 논리적인 주장도 수월하게 되었다. 존재 질서에서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가치는 상대적이다. 몸이 다르니까. 이보다 더 강력한 논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인문 계열은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 없이는 존재 탐구가 불가능에 가까워 과학 혁명 이전의 인문 계열 탐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2 학문 영역


1) 개념 개발


개념 개발은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것이 후천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이 자아를 자각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의 인식은 가공되게 된다. 남성 유치원생이 파랑을 선호하고 여성 유치원생이 분홍을 선호하는 것을 보고 남성이 파랑을 선호하고 여성이 분홍을 선호하는 것이 선천적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본래 남성은 분홍을 선호하고 여성은 파랑을 선호했다는 것을 보면 후천적으로 가공된 결과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기초 과학은 선천적이라 여겨지고 있으나 인간은 감각기관과 언어 개념을 통해 인식하기 때문에 사실 후천적이다. 모든 것이 후천적이나 학문 내에서 기초 과학을 탐구 결과는 선천적이라 가정하고 응용 과학 탐구 결과는 후천적이라 가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일반에 속한 일반 진리를 모르고 학문에 속한 학문 진리를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후천적이므로 모든 탐구에는 개념 개발을 필요로 한다. 개념 개발이나 개념 분석시에는 학문 내에서 쓰이는 개념을 체계화하여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분한다. 하나, 모양과 성질. 모양과 성질의 본디는 본질이다. 둘, 구조와 원리. 모양과 성질의 원인이다. 셋, 요소. 구조와 원리의 나눌 수 없는 성분이다. 넷, 선천과 후천. 요소의 선천인 기초 과학과 후천인 응용 과학이다. 다섯, 기초 과학. 선천에서 가장 작은 단위까지다.






2) 개념 가공


개념 가공은 특정 개념을 가공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지각을 자각하는 지적 자아가 인식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손익을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가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변화를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시간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존재를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영혼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죽음을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도덕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감각을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감정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결핍을 지각하는 지적 자아가 행복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모든 개념이 후천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선천적인 것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을 토대로 개념이 가공되어 만들어지는지는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학문 내에서 감각 기관으로 지각한 것이 선천적이고, 지각한 것으로 가공된 것이 후천적이다. [지각: 1.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함. 또는 그런 작용. 그 작용의 결과로 지각체가 형성된다.] [감각: 1.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지각으로 인식해야 개념이 성립되므로 지각이 적절하다. 


여기서 쪼개면서 가장 작은 단위까지 가면 된다. 대략적으로 쪼개보자. 지각에 속한 개념을 쪼개고, 감각에 속한 개념을 쪼개고, 세포에 속한 개념을 쪼개고, 원자에 속한 개념을 쪼개고, 기본 입자까지 간다. 기본 입자도 쪼갤 수 있는지 탐구 중에 있다고 한다. 하나씩 쪼개지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 쓰는 것은 어려우므로 예를 들기 위해 하나씩 썼다. 그렇게 하여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 중인 개념까지도 전부 체계화한다. 대체로 지각을 쪼개고 나서 부터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인문 계열에서는 지각으로 가공된 개념을 체계화하면 된다.


가공을 잘 알기 위해서는 소재를 파악해야 하고, 가공된 것의 소재를 잘 알기 위해서는 가공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초 과학의 발전은 응용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응용 과학의 발전은 기초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3) 개념 해석


개념 해석은 가공된 개념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가공된 개념은 다양하나 인식, 가치, 시간, 영혼, 도덕, 감정, 행복을 알아보겠다.


첫째, 인식. 감각 기관으로 대상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게 된 것을 자각하고 지적 자아가 인식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인식은 감각 기관의 감각과 감각 판단 기준인 관념이 인식의 요소가 된다. 감각은 눈, 코, 귀 혀, 살갗과 같은 감각 기관의 자극 전달이고 관념은 경험, 사상, 가치, 지식과 같은 모든 대상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은 감각 기관이 모두 달라 관념이 같더라도 인식은 상대적이게 된다.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은 감각되지 않아 지각에서 벗어난 영역이거나 관념에 없어 발상되지 않았던 영역에 해당한다. 이런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파악하려면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기초로 한 논리로 감각과 관념을 초월해야 한다.


둘째, 가치. 이익과 손해를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가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본인의 주관적 기준으로 모든 것의 이익과 손해를 판단하면서 가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진리, 도덕, 아름다움 등 모든 것이 본인의 주관적 기준으로 한 손익 판단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인간에게 진리는 이익이고 진리가 아니면 손해가 된다. 금전적 가치 등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인식이 모두 달라 판단 기준이 다른 것으로 추구하는 손익은 같더라도 가치는 상대적이게 된다.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은 가치 관념에 없어 발상되지 않았던 영역에 해당한다. 가치는 주관적 기준의 판단이므로 실제 손익과 별개로 주관적으로 이익이 된다 판단하면 가치가 높다고 느끼고, 주관적으로 손해가 된다 판단하면 가치가 낮다고 느끼게 된다. 가치 판단을 못하거나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셋째, 시간. 변화를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시간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시간 개념은 원시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에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후천적이다. 변화를 지각하고 변화의 근원을 찾다보니 나온 결론이 바로 시간이다. 만물은 물리적 이동만 있다. 그걸 인간이 지각한 순서대로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했던 개념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우주의 법칙에 속하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을 전제했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거라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 이론은 시간은 없거나 지각 순서로 바꿔도 성립한다. 가치의 절대성을 전제한 학문이 수정되어야 하듯이 시간을 전제한 학문도 수정되어야 한다.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시간을 전제한 다세계 불가능하다. 숙명 없다. 운명 없다. 윤회 없다. 전쟁 없다. 환생 없다. 사후 세계 없다. 시간이 지각 순서라는 발상은 자아를 파악하여 자아와 자아 외를 분리해 자아의 의식 의지로 육체의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 우주의 법칙이 인간의 지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도달해야 하므로, 자아 파악 이전에는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몰랐을 거라 생각한다.


넷째, 영혼. 존재를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영혼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영혼 개념은 원시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에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후천적이다. 존재를 지각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다보니 나온 결론이 바로 영혼이다. 이 영혼 개념은 자아 개념과 일치한다. 차이는 외부와 내부다. 영혼은 외부에서 오고 자아는 내부에 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이 외부에서 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불안정하다. 뇌세포만 손상되어도 육체를 제어하는 존재가 달라진다. 영혼이란 완성된 형태의 어떤 신비적 존재가 외부에서 왔다면 그런 물질적 손상에 영향을 받는 것이 논리적이지 못하게 된다. 영혼 개념이 후천적임에도 대부분 문명에 영혼 개념이 있던 것은 짐승의 생활 양식을 떠올리면 된다. 원시 부족 시대는 문명이 없어 대부분 자연 환경으로 가공되던 시기로 짐승의 생활 양식과 비슷했다. 같은 종의 짐승이 다른 환경에 있더라도 비슷한 생활 양식을 가진 것과 같이, 같은 종의 인간이 다른 환경에 있더라도 비슷한 생활 양식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영혼 개념이 있었다. 현대 문명으로도 존재를 파악할 수 없었던 영혼을 원시 부족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원시인이 현대인보다 지식 레벨이 높다 주장하는 것보다 허무맹랑하다. 영혼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오래된 것 말고는 없다.


다섯째, 도덕. 죽음을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도덕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도덕 개념은 원시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에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후천적이다. 죽음을 지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가치를 만들어 퍼트린 것이 바로 도덕이다. 당시 사상가가 공동체 생존에 절대적이라 주장한 것이 사회 선택으로 반영되면서 사회 질서 기준이 된다. 그렇게 사회 선택된 것 사상이 학문화되어 윤리가 된다. 그런 윤리 중에서 종교와 같이 구심점이 있는 것만 남으면서 오늘날 도덕과 윤리는 기본적으로 종교 가치가 된다. 상대적인 가치가 절대적으로 여겨지다보니 상충하는 가치가 부딪치면 분쟁이 발생했다. 이제 도덕은 절대적이지 않다. 도덕을 절대적으로 여겼던 것은 도덕이 없으면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원리를 추구할 수도 없었던, 비과학 시대의 한계에 불과하다. 과학을 통해 존재 유지 방법을 파악하여 존재의 절대성을 실현하면서 가치의 상대성을 성립시켜 가치에 의한 분쟁을 끝낸다.


여섯째, 감정. 감각을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감정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감정 개념은 원시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에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후천적이다. 감각을 지각하고 감각의 정체를 알기 쉽게 가공한 것이 바로 감정이다. 감정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본인의 감정을 정확히 모른다. 감각들을 모아 학습한 감정과 비슷한지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사랑과 공포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여 흔들다리 효과와 같은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감정이 인간이 만든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 가치에 의해 달라지게 된다. 바늘에 손을 찔리면 직관적으로 따갑다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지만 대상에 애정을 느낀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사랑이라는 가치로 인식하게 된다.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이게 된다. 사랑에는 다양한 것이 있는데 그 중 발정과 성애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발정과 성애는 이런 식으로 구분하면 된다. 발정은 감각으로 욕구를 직관적으로 느낀 것에 해당한다면, 성애는 발정과 사랑이 더해져 감각을 추상적으로 느낀 것에 해당한다.


일곱째, 행복. 결핍을 지각한 것으로 지적 자아가 행복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행복 개념은 원시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에 선천적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후천적이다. 결핍을 지각하고 충족하면서 느낀 만족감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 인간이 행복을 느낄 때에는 결핍을 충족할 때이다. 기본 욕구나 욕망과 같은 바라는 것이 생기면 결핍이 나타난다. 바라는 것을 이뤄 결핍을 충족하면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행복의 기본적인 원리다. 행복 원리가 단순하기 때문에 행복하고자 한다면 아주 쉽게 행복할 수 있다. 당장 스스로 본인의 목을 몰라 숨을 쉬지 못하게 해보자. 그러면 산소 결핍으로 불행해진다. 목을 조르던 것을 풀어 숨을 쉬게 해보자. 그러면 산소 공급으로 결핍이 충족되어 행복해진다. 이 단순한 과정에서 인간이 온전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목을 조르는 것을 불행하다 느끼기 때문에 그것으로 행복을 느낀 것도 온전히 행복하다 느끼지 못하게 된다. 목조르는 것과 같은 결핍이 불행하지 않다 느끼면 SM 플레이가 성립되게 된다. 이는 모든 행복이 동일하다. 학습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동안은 결핍 상태다. 그 결핍을 과하게 불행하다 느끼면 바라는 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온전히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마약으로 과한 쾌락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기본 상태가 결핍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약으로 체내 결핍을 충족하면 깊은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체내 결핍을 충족해버리면 기본 상태가 결핍 덩어리로 느끼게 된다. 결핍을 과하게 불행하게 느끼면서 사는 것 자체가 불행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마약 없이 살 수 없게 된다. 마약이 기본 욕구와 같이 되면서 마약을 산소처럼 느낀다. 그러면서 마약을 공급하는 인간에게 지배된다. 인간은 결핍이 있어야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것을 충족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결핍의 충족이 행복이기 때문에 결핍이란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그렇기에 행복만 있는 세상은 없다. 영원한 행복은 영원한 불행이고 영원한 불행은 영원한 행복이다.






4) 개념 체계


개념 체계는 특정 개념을 체계화한 것을 말한다. 응용 과학에 속하는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 중 하나가 인간 심리에 관한 모든 개념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응용 과학에 속하는 자연 계열의 후천적 존재 탐구는 대체로 개념이 체계화되어 있다. 그러나 인문 계열은 인간 심리 영역을 파악하지 못하여 그렇지가 못하다. 사랑, 지배의 개념 체계를 알아보겠다. 인간 심리에 관한 개념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당 개념의 동력은 인간의 동력이 된다.



[사랑: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첫째, 모양. 사랑의 모양은 다양한 이로운 가치의 형상이다. 어떤 그림을 사랑한다고 해보자. 독창성은 가치가 높다, 선은 가치가 보통이다, 색은 가치가 낮다. 이런 식으로 가치를 판단한 것을 종합하여 형상을 가진다. 


둘째, 성질. 사랑의 성질은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애, 이성애, 가족애, 조국애 또는 특기의 대상 사랑, 취미의 대상 사랑 등 다양하다.


셋째, 구조. 사랑의 구조는 가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가치의 순위나 가치의 조합 등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사랑의 대상마다 체계가 다르다.


넷째, 원리. 사랑의 원리는 가치 추구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랑이란 형상을 이루면서 사랑이 동작하게 된다.


사랑의 요소는 가치다. 가치를 쪼개면 손익이 되고, 손익을 쪼개면 지각이 되고, 지각을 쪼개면 감각이 된다. 감각 이후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이어진다. 



사랑의 모양은 다양한 이로운 가치의 형상이고 증오는 다양한 해로운 가치의 형상이다. 무관심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거나 못한 상태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 가치를 높게 느꼈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서로에게 가치를 높게 느끼게끔 노력해야 한다. 사랑에 관한 인간 관계 또한 존재 유지를 위한 강제력이 발생한다. 사랑에 관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존재 유지를 위해 본인의 가치를 높일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모든 사회에 적용된다. 사회와 사회 구성원에 가치가 높다 느껴야 사랑으로 사회가 유지된다. 가족에서 이혼이나 가출이 되는 것을 막고 싶다면 가족이나 가족 구성원에 가치가 높다 느끼게 해야 하고, 기업에서 이직이나 퇴사가 되는 것을 막고 싶다면 기업이나 기업 구성원에 가치가 높다 느끼게 해야 하고, 국가에서 이민이나 국적 포기가 되는 것을 막고 싶다면 국가나 국가 구성원에 가치가 높다 느끼게 해야 한다.


사랑 중에 성애는 발정과 사랑의 결합으로 후천적 개념이 된다. 발정은 선천적이나 성애는 후천적이다. 그렇기에 이성애든 동성애든 인간의 취향이 된다. 선천적으로 이성에 발정되도록 되었어도 후천적으로 동성에 사랑을 느끼도록 되게 될 수 있다. 이성애자라도 동성과의 관계에서 쾌락을 기억하면 성애가 바뀔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전국 시대 일본에서 동성애가 유행한 것은 그들이 선천적 동성애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유행했기 때문이다. 유행으로 성애가 달라질 수 있을 정도로 성애는 후천적이다. 그렇기에 이성애자가 VR에서 이성의 아바타를 사용하고 동성과 인간 관계를 맺으면 동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이성애자라도 취향이 아닌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동성애자라도 취향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취향은 가치 관념에 영향을 받아 발정 대상을 정하는데, 가치와 같은 후천적 개념에 영향을 받으므로 성애는 후천적이다. 성애는 이성과 동성을 배제하고 취향만 가지고 접근해도 성립된다.


흔히 동성애자들은 본인들의 성애가 선천적인 것이라 여기기도 하는데 성애는 후천적인 개념이다. 그렇기에 동성애자는 본인이 선천적으로 동성에 발정하는 것인지 후천적으로 동성애를 느끼는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성애는 후천적이니까 이성애자가 동성애자가 되기도 하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동성애가 후천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강제로 교정하자 하자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은 개인의 권리다. 취향의 가치의 영역으로 성애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된다. 취향을 특정 가치를 근거로 간섭하고 억압하고 검열할 권리는 없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그 무슨 사랑이든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존재에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존중해야 한다. 굳이 LGBT와 무지개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되려 그걸 강조하며 다른 사람의 취향에 간섭하고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물론 취향을 속이거나 악용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지배: 1.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의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림.]


첫째, 모양. 지배의 모양은 자유의 수단이다. 어떤 인간이 인간 관계에서 자유롭게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고 해보자. 지배가 가장 쉽다. 지배해서 원하는대로 하면 된다. 


둘째, 성질. 지배의 성질은 대상이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인간을 폭력이나 윤리로 지배한다거나 인간이 짐승을 지배한다거나 등이 있다.


셋째, 구조. 지배의 구조는 자유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의 순서나 자유의 조합 등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자유의 대상이나 방식에 따라 체계가 다르다.


넷째, 원리. 지배의 원리는 자유 추구로 이루어져 있다. 본인의 일방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지배가 되면서 지배가 동작하게 된다.


지배의 요소는 자유다. 자유를 쪼개면 바람이 되고, 바람을 쪼개면 마음이 되고, 마음을 쪼개면 지각이 되고, 지각을 쪼개면 감각이 된다. 감각 이후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이어진다.



인류 역사가 지배와 복종의 역사라 할 정도로 지배와 복종이 일반적었기 때문에 지배와 복종이 선천적 개념이라 인식할 수 있는데 자유의 수단으로 후천적 개념이다. 지배와 복종이 선천적이지 않기 때문에 친구 개념과 같은 평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평등한 관계는 짐승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종의 짐승이 어릴 때부터 어울리면 평생 같이 산다. 그게 평등한 관계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등해 보인다. 


지배는 자유의 수단이다. 지배에는 폭력과 윤리 지배가 있다. 폭력 지배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다. “맞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윤리 지배는 윤리를 수단으로 삼는다. “윤리를 바탕으로 한 내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왕정은 이 두 가지를 활용하여 인간을 지배했다. 


복종은 자유의 수단이다. 만약 자유가 아닌 복종은 자유가 성립되지 못하여 투쟁하거나 자살한다. 대표적인 자발적 복종이 바로 윤리에 의한 복종. 왕에 대한 충성이 옳다. 뭐 이런 식으로 복종을 윤리로 만든 것을 배우면 자발적 복종으로 자유가 성립되게 된다. 


지배와 복종은 둘 다 자유의 수단 중 하나지만,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다양한 자유를 고르게 모두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타인의 자유권을 훼손하는 지배와 본인의 자유권을 훼손하는 복종은 체제 가치에 의해 강제력이 발생되어 허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유할 자유 같이 훼손되는 자유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유한 것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자유는 포기할 수 없다. 자유욕은 곧잘 지배욕이나 복종욕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개인은 모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그에 맞는 가공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왕정 체제는 왕의 지배를 보장한다. 왕정 체제에 있던 유교 가치에 의해 집단이 있으면 서열이 생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 착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끔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최초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유롭게 타인을 지배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지배가 되게끔 가공한 것이다. 짐승은 폭력을 통해 서열을 결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폭력이 선천적이고 서열이 후천적인 것에 해당한다. 벌 개미와 같은 지능이 낮은 곤충은 유전자대로 움직일 뿐이지, 거기에 지배나 서열 개념이 성립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정 체제는 모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의 수단 중 하나가 지배기 때문에 자유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여 특정 개인의 일방적인 자유인 지배가 성립될 수 없다. 이는 법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사회와 계약을 통해 법을 준수하는 것이지 사회의 법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다. 존중은 공포에서 온다는 말이 있는데, 공포는 존중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부른다. 존중은 대등에서 온다. 사회 계약을 통해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지는 것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모든 개인의 자유가 성립한다.


지배나 복종으로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 선천적이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후천적 개념으로도 내포된 일부 선천적 개념으로 충분히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가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시험 합격과 같은 어떤 후천적인 목적을 달성하면 성취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런 것과 같이 후천적이다. 지배하면 대상과 관계에서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어 기분이 좋을 수 있고, 복종하면 대상에게 판단을 맡겨 판단하지 않으면서 편안 것으로 기분이 좋을 수 있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쾌락도 그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여 지배를 통해 바람을 이룬 것으로 얻는 쾌락을 지배에 의한 쾌락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지배와 복종은 가상이나 임의의 놀이나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 즐기면 된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대상과 대화나 거래로 바라는 것을 이뤄 기분이 좋아지고, 판단을 맡기는 것으로 편안함으로 기분이 좋아지면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게 더 재미있을 수 있다. 경쟁 게임에서 지배한다고 재미가 있겠는가? 축구하는데 무조건 골 넣으면 재미가 있겠는가? 일부는 재미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일반적이지 않으니 축구 경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애초에 행복의 원리는 결핍의 충족이기 때문에 일방적 이익이 반드시 행복을 부르지 않는다.






2.3 학문 탐구


1) 탐구 방법


탐구 방법에는 맹신의 인식 탐구와 의심의 존재 탐구가 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만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시 세계에서 본인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관념으로 느껴지는 것만 있다고 여기며, 그렇지 않은 것은 초자연적인 신비를 다룬 종교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맹신한다. 이것이 인식 탐구 방법이다. 철저하게 본인의 주관적인 인식으로만 탐구하며 인식 외의 것은 그냥 신앙한다. 그렇게 해서 본인의 상대적인 인식을 절대적으로 여기게 된다. 흔히 인문 계열이 후천적인 것을 탐구하여 형이상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인문 계열의 탐구는 본인의 인식 안과 타인의 인식 밖의 주장만 탐구하는 것에 해당한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탐구하고 그 외는 신앙한다. 그것이 어려워보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시 세계의 물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보편성과 재현성을 확보한 증명으로 감각과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존재 탐구 방법이다. 무슨 종교 신앙과도 같이 보이지만, 종교와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과학적 방법을 통한 증명을 근거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상대적 인식에서 벗어나 절대적 존재를 탐구할 수 있었다. 흔히 자연 계열이 선천적인 것을 탐구하여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탐구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는 현상 파악 후에 감각과 관념에서 벗어나 증명과 논리만 가지고 탐구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것을 통해 인식을 초월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파악한다. 그것이 쉬워보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는 양자가 등장할 시기부터 보편화되었다고 본다. 그 전에도 보이지 않는 원자를 가정하여 실험을 통해 탐구하는 것으로 존재 탐구에 해당했으나, 양자부터는 실험을 통해 탐구하는 것도 어려워지면서 본격적인 존재 탐구가 시작되었다. 자연 계열은 존재 탐구를 하였으나 가치의 절대성에 의해 존재 개념에 제대로 닿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인식 탐구를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가 없었다고 본다.



하늘 색을 통해 인식 탐구와 존재 탐구를 비교해보자. 낮에 하늘을 본 사람에게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일 것이다. 저녁에 하늘을 본 사람에게 하늘은 주황색으로 보일 것이다. 밤에 하늘을 본 사람에게 하늘은 검정색으로 보일 것이다. 


인식 탐구는 이런 것을 보고 하늘은 파란색과 주황색과 검정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탐구 결과를 내놓는다. 본인 인식으로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다. 사회 과학이 과학이라 말하지만 실상 인식 탐구인 것도 이렇게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 과학이 사회 현상 해석할 때에는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하늘 색 통계를 내서 파란색은 n%, 주황색은 n%, 검정색은 n%로 통계를 낸 다음, 하늘 색은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다며 판단하고 있다. 현상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통계를 낸 것을 과학이라 하고 있다.


반면 존재 탐구는 하늘을 보고 빛의 구조와 원리, 천체의 구조와 원리, 시각의 구조와 원리 등의 증명을 활용하여 하늘 색이 파란색과 주황색과 검정색으로 보이게 된 구조와 원리에 관한 탐구 결과를 내놓는다. 본인 인식으로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여 증명하고, 그 증명을 모아 다시 탐구하여 구조와 원리를 파악한다. 이렇게 탐구하여 보편성과 재현성을 갖추면 모든 인간이 같은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통해 존재 탐구는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해진다. 다른 것을 보면 본인이 본 것이 맞다고 싸우면서 발전이 안 되지만, 같은 것을 알면 모두가 안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발전이 가능해진다. 존재 탐구가 되어야만 체계적인 탐구를 하는 과학이 성립된다.



동양 의학과 일반 의학을 통해 인식 탐구와 존재 탐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 동양 의학과 일반 의학의 결정적 차이는 탐구 방식이다. 동양 의학은 인식 탐구를 했다면 일반 의학은 존재 탐구를 했다. 하늘 색으로 설명하면 동양 의학은 수많은 다양한 색을 전부 모아 통계를 내서 하늘 색이 무엇인지 파악했다고 여겼고, 일반 의학은 하늘 색에 관련된 것의 구조와 원리를 증명하여 파악했다고 여겼다. 


그런 것과 같이 동양 의학은 구조와 원리를 모른 채 온갖 경험을 통해 나온 통계를 가지고 때려 맞춘다. 그래서 맞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다. 구조와 원리를 몰라 증명도 못한다. 그런데도 가끔 맞으니까 맞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다. 매번 다르기 때문에 체계적인 발전을 못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동양 의학이 효과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인간 육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의학은 구조와 원리를 파악하여 보편성과 재현성을 가지고 대부분 환자에 적용할 수 있다. 예외가 발생하면 탐구하여 예외를 보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 의학 관계자가 모두 같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식으로 체계를 갖춰 발전한다. 


동양 의학은 인식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하지 못했고 일반 의학은 존재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인문 계열이 현재 서력 기원에서 본질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보편성과 재현성이 없는 학문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개인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다르게 가치를 느끼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각자 본인들의 인식과 가치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싸우기만 할 뿐이다.



인식 탐구가 무엇인지 관문 효과(Gateway effect)와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를 통해 알아보겠다. 


관문 효과는 습관성 또는 중독성이 있는 물질을 소비하면, 그 물질이 관문이 되어 더 강력한 물질을 갈구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대마를 하면 더 강한 마약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주자와 흡연자는 술과 담배에 중독되더라도 마약을 찾지 않는 것을 볼 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는 정당성 유무. 인간은 정당한 결핍을 충족할 때 행복을 느낀다. 허기진 상태라는 결핍을 당연하게 여기면, 그 결핍을 충족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목졸린 상태라는 결핍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결핍을 충족할 때 불행을 느낄 수 있다. 둘은 카테고리. 인간은 인식으로 판단하기에 다른 카테고리로 인식된 것은 별개로 느낀다. 본질적으로 술, 담배, 마약은 같은 향정신성 물질임에도, 술과 담배는 기호품으로 인식되고 마약은 마약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술과 담배를 하는 인간은 술과 담배가 마약의 관문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마약을 탐구해보자. 마약은 인간의 결핍을 충족하여 행복을 부르는 물질이다. 인간의 기본 상태는 다양한 결핍으로 가득차서 그 결핍 상태를 충족하면 행복해한다. 배가 고플 때 식사를 하면 행복하고, 잠이 올 때 잠을 자면 행복하고, 배설을 하고 싶을 때 배설을 하면 행복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육체 내에 있는 수많은 자잘한 통증, 무게감, 등등이 인간을 피로하게 만든다. 마약은 뇌내 물질 분비를 유도하여 그 결핍을 잊게 하여 충족하게 한다. 그것으로 인간은 행복해진다. 그런데 그러면 일반 보통 상태가 굉장한 결핍 상태가 된다. 그 결핍 상태를 인간은 부당하게 느낀다. 그래서 같은 중독성을 가진 물질을 소비해도 그 결핍의 충족을 행복하다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서 관문 효과가 나타난다. 더 강한 물질을 소비하여 결핍의 충족을 행복하다 느끼게 된다. 이것의 반복이 중독이 강한 물질에 의한 파멸이다.


술, 담배, 대마는 습관성과 중독성이 다른 마약에 비해 낮은 편이기에 결핍 상태를 그렇게 부당하다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결핍으로 느끼고 술, 담배, 대마를 마치 허기짐 충족으로 행복을 느끼듯이 되게 된다. 여기서 부당하다 느낀 인간은 관문 효과처럼 더욱 강한 물질을 찾게 된다. 그런데 술, 담배와 대마는 인간마다 카테고리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술, 담배는 기호품으로 인식하는 인간이 더 강한 물질을 찾으면 알코올 도수가 높거나 니코틴 함유량이 높은 것을 찾거나 더 많이 마시고 피우게 되고, 대마를 마약으로 인식하는 인간이 더 강한 물질을 찾으면 다른 마약을 찾게 된다. 대마를 기호품으로 인식할 경우에는 더 강한 대마 또는 대마를 많이 피우게 될 것이다. 이처럼 관문 효과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반드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술과 담배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이나 범죄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현금 환급이 불가능한 도박을 하더라도 현금 환급이 가능한 도박에 빠지지 않는 것은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 창작물을 즐기더라도 현실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인식 차이에 의한 카테고리 구분이 가능하므로 다른 카테고리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인식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인간은 카테고리 구분을 못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현재 한국은 성이나 범죄에 관련된 창작물이 가능성을 명분으로 규제되는데, 이것은 소수의 정신 이상자의 범죄 가능성 때문에 다수의 일반인의 자유권을 침해한 부당한 규제와 검열에 해당한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범죄가 확산된다는 주장이다. 깨진 유리창이 있는 곳에는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인식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쓰레기 더미가 모인 곳이 있으면 거기에 쓰레기를 버릴 지언정 인간을 쓰레기처럼 취급하며 죽이지는 않는다. 깨진 유리창을 보고 약하다 인식되는 잘못은 쉽게 저지를 수 있지만, 강하다 인식되는 잘못은 쉽게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치안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범죄율이 낮은 곳에서는 깨진 유리창을 보고 쓰레기 투척이 일어날 수 있지만, 범죄율이 높은 곳에서는 깨진 유리창을 보고 절도가 일어날 수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도 조건에 따라 달라지므로 반드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디지털 콘텐츠 무단 복제가 많은 것은 이 인식 변화에 의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치안 환경이 좋은 한국에서 디지털 콘텐츠 무단 복제가 많은 것은 성적 디지털 콘텐츠 무단 복제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허용되는 것과 불허되는 것이 같은 디지털 콘텐츠로 인식되면서 같은 카테고리에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관문 효과와 깨진 유리창 이론은 원리가 아닌 현상이다. 인식 탐구로 인식으로 보이는 현상을 이론으로 삼았다. 하늘 색을 파랑, 주황, 검정으로 보고 이론으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조건이 맞으면 성립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현상 자체를 이론으로 삼았기 때문에 현상이 발생할 때도 있고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 때도 있게 되었다. 하늘 색이 주황이라 주장한 사람은 저녁이 되면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그러다 시간이 지나 밤이 되면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아니 하늘 색은 검정색인데?” 


인식 탐구는 골치아프게 된다. 분명 현상은 존재하는데 조건에 따라 달라지므로 보편성을 확립하지 못하여 이론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면서 현상 자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 관문 효과와 깨진 유리창 이론은 현상이 존재했으나 매번 발생하지는 않아서 없는 것이라 판단하고 내버려뒀더니 사회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렇다고 그 현상을 조건 고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 전제해버리면 지나치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더해서 애초에 현상 자체가 없는 주장 또한 사실은 현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부르면서 미신과 같은 있지도 않은 현상이 실존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렇기에 존재 탐구를 해서 원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관문 효과는 결핍의 정당성 유무와 인식 차이에 따라 효과 유무가 결정되고, 깨진 유리창 원리는 인식 차이에 따라 효과 정도가 결정된다. 이런 식으로 파악되어야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게 된다.






2) 탐구 발전


자연 계열은 존재 탐구를 하고 인문 계열은 인식 탐구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 계열이 인문 계열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의학 문외한이 동양 의학을 대신해 의료를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동양 의학이 증상을 악화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본질적은 치료를 못하더라도 증상 완화는 할 수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당장 자연 계열이 수많은 인간 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제시 할 수 있다 장담할 수 있는가? 자연 계열 또한 자연 계열 분야를 존재 탐구한 것이지 인문 계열 분야를 존재 탐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차이가 없을 수 있다. 단지 존재 탐구 개념을 좀 더 빠르게 받아드릴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인문 계열이 해당 분야에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인문 계열이 존재 탐구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인문 계열은 후천적 존재 탐구를 해야 한다. 모든 개인의 존재를 탐구한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이 육체가 다르고 가공 상태도 달라 동일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다. 짐승의 경우 가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동일 종의 생활 양식을 탐구하기 상대적으로 쉽지만, 인간의 경우 가공이 크게 달라 동일 종의 생활 양식을 탐구하기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렇기에 보편적인 것을 고려해 사회의 공통된 기준을 세운다. 그것이 바로 체제다.


과거 왕정은 집단주의 체제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집단 수장의 권리가 보장되는 체제였다면 현재 민주정은 개인주의 체제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다. 사회에 속한 인간은 사회에서 정한 체제를 기준으로 살아간다. 사회와 계약한 모든 개인은 그와 같은 생활 양식을 추구할 것이 절대적이게 된다. 그것은 육체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고 자동차에 맞는 연료를 주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하다. 다른 생활 양식을 바란다면 새로운 체제를 만들거나 가져와 사회 구성원을 설득하여 체제를 바꾸면 된다. 이러면 이치는 두 가지가 된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가 이치가 아니라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와 사회 체제다. 인문 계열은 그것들을 탐구하여 이치로 삼은 논리를 주장하면 된다.



사회 체제마다 생활 양식이 다르다. 그 말은 체제가 다른 사회는 다른 생활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가 다른 사회에 살던 인간은 체제에 맞게 재가공하지 않으면 사회에 어울릴 수 없다. 이는 이민 정책이나 해외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유럽 이민 정책의 실패는 이민자를 체제에 맞게 재가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아프가니스탄의 실패는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미국 체제에 맞게끔 재가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식 탐구 결과인 문화 상대주의에 의해 문명 차이가 명백함에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탓에 실패해버렸다. 문명인은 문명으로 가공된 존재임을 이해하고 체제가 다른 인간을 문명에 맞게끔 가공하는 것에 문제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강요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게 하면 된다. 선진국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면 그에 맞는 재가공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면 된다. 자동차 주유구에 당근 주스를 넣으면 고장나는 것과 같이 체제에 맞지 않는 인간이 들어오면 사회가 고장난다. 이것은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떨어진다는 단순한 인과와 다를 바 없다.


사회 체제를 존재 탐구할 때에는 해당 체제의 구조와 원리를 전부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탐구한 다음 그 탐구 결과를 사회 구성원과 공유하여 더 나은 가치를 체제로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체제로 정해진 가치는 체제 가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지에 대해 탐구한다. 모든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모든 개인의 주권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모든 개인의 소유와 선택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그런 식으로 탐구하면서 정부의 정책과 제도를 체제에 맞게끔 만든다. 그렇게 하여 사회를 체제에 맞게끔 합리화한다. 


현재는 종교 가치에 의해 체제 가치가 훼손되면서 불합리한 사회가 되고 있다. 금욕주의, 이타주의와 그 외의 종교 가치. 그것으로 개인이 억압되고 희생되면서 체제 가치가 훼손되었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살면 어떻게 사회가 유지되냐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인문 계열의 역할이다. 인문 계열이 존재 탐구를 하여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법, 정책, 제도를 통해 공정한 이익 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금욕주의를 근거로 타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이타주의를 근거로 타인을 희생시키도 않고, 종교 가치를 근거로 가치를 강요하게 하지도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의 권리를 보장 받고 싶으면 타인의 권리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살자고 약속했으면 그에 맞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3) 우주 탐구


이치를 기초로 논리적인 탐구를 하는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 방식으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해보도록 하겠다. 


우주의 본질.


우주는 미지에서 대폭발에 의한 우주 팽창으로 만들어져 현재 우주가 된 것이 아닌 정상 우주에서 대폭발과 대폭발에 의한 연쇄폭발로 현재 우주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정상 우주에서 전 우주에 고르게 물질과 에너지가 퍼져 있는 상태를 가정하자. 거기서 특정 조건에 의해 특정한 우주 공간에서 상상을 초월한 대폭발이 일어난다. 대폭발에 의해 물질과 에너지가 타면서 연쇄폭발이 일어난다. 연쇄폭발이 지속되면서 전 우주로 퍼져나간다. 우주의 중간 중간에 발생한 거대한 연쇄폭발은 이후 모든 것을 흡수하는 거대한 블랙홀이 된다. 거대한 블랙홀은 흡수한 것을 배출하며 작아지고, 그 블랙홀의 중력을 중심으로 배출된 것과 잿더미된 것이 모여 은하가 되고, 은하가 모여 은하단이 되고, 은하단이 모여 초은하단이 된다. 연쇄폭발은 현재까지도 계속되면서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끝에 관측할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이 존재하고, 그 블랙홀 너머는 연쇄폭발 중에 있다.


정상 우주에서 대폭발과 연쇄폭발이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양자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정상 우주는 에너지 이동이 되지 않는 정적 세계와 에너지 이동이 되는 동적 세계로 양분되어 있었다.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는 법칙이 달랐다. 정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파동인 반면 동적 세계에서는 파동이 입자화가 된다. 이것이 양자의 이중성과 상보성 원리다. 대폭발과 연쇄폭발 이전에는 열이 우주를 장악하지 않아 이러한 세계 구분이 뚜렷했다. 그러다 대폭발과 연쇄폭발이 일어나면서 우주 대부분이 열에 의한 에너지 이동이 되는 것으로 동적 세계가 우주를 장악했다. 그러면서 거시 세계는 동적 세계의 법칙이 장악했고 미시 세계에 가서 에너지 이동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정적 세계의 법칙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폭발에 의해 주류 법칙과 비주류 법칙이 나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의 법칙 차이를 부르게 되었다. 거시 세계에 정적 세계의 법칙이 나타나려면 정적에 가까워지는 절대 영도에 가까워져야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우주는 대폭발과 연쇄폭발에 의해 동적 세계 법칙이 장악한 우주다. 현재 우주가 그 당시 폭발 영향권 내에 있다. 이것은 지구에서 폭탄으로 폭발을 일으킨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지구에서 폭발이 일어난 공간과 그 경계와 그렇지 않은 공간은 각각 적용되는 법칙이 다를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폭발 영향권인 거시 세계에 동적 세계의 법칙이 적용된다. 우주의 열기 자체가 폭발 영향이다. 폭발의 경계인 미시 세계에 양자 현상과 같이 정적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매우 미세하면 폭발 영향권을 벗어나게 된다. 폭발과 무관한 영역인 세계에 온전한 정적 세계의 법칙이 적용된다. 에너지 이동이 없는 세계다.


지구에서는 폭탄의 폭발 영향력이 그리 오래 가지 않기 때문에 현재 우주가 폭발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가정하여 우주에서 폭발이 매우 길게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해보자.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열 에너지 이동 현상 자체가 폭발의 영향으로 이해하면 된다. 생명은 에너지 이동으로 성립되므로 폭발 영향권에서 탄생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생명은 불꽃과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 그 말은 즉 꺼지지 않는 불처럼 계속 태울 수 있으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


동적 세계는 거시 세계에서 관측이 가능하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물체는 절대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가 동적 세계에서 적용되는 법칙이다. 열역학이나 엔트로피 등도 동적 세계의 법칙이라 본다. 정적 세계에서는 동적 세계의 존재인 인간과 관측 기구는 일반적으로는 직접 관측할 수 없다. 물질의 흔적이나 극저온 상태에서 간접 또는 조건부 관측이 가능할 뿐이다. 정적 세계의 법칙을 간접적으로 관측한 것이 양자 현상이다. 전자의 위치가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불확정성 원리가 정적 세계에서 적용되는 법칙이다. 양자 중첩, 양자 얽힘, 준입자, 초전도 등도 정적 세계의 법칙이라 본다.


위의 논리는 몇 가지 전제를 토대로 추론했다. 모든 현상은 물리적 이동을 기본으로 하여 물리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했다. 가공 이전의 상태를 떠올리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우주 또한 변화 이전의 상태를 떠올리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했다.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인식과 무관함을 전제했다. 우주론은 반드시 양자 현상이 있어야 함을 전제했다. 시간은 인간이 만든 개념임을 전제했다. 시간이 우주의 법칙이 아니므로 대폭발 영향이 아직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폭발에 의해 법칙이 달라질 수 있음을 떠올렸다. 양자 현상이 어떤 간섭으로 성질이 바뀐다는 것을 전제했다. 상보성 원리를 고려하면 양자는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성질이 변했다. 양자 현상을 보니 온도에 따라 성질이 달라졌다. 온도는 분자나 원자의 운동 에너지의 수량화. 이중슬릿 실험을 보면 관측할 때 성질이 바뀌었다. 그것은 즉 관측할 때 생기는 운동 에너지로 성질이 바뀌었다는 것임을 떠올렸다. 그것을 고려해 에너지 이동이 정적이다가 동적이 되었을 때 성질이 바뀐다고 판단했다. 현재 우주가 대폭발 영향 속에 있다는 것과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의 법칙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상 우주에서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가 둘 다 있다가 대폭발과 연쇄폭발에 의해 동적 세계 법칙이 거시 세계를 지배하고 정적 세계의 법칙은 미시 세계에 가야 나타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 자체는 그리 길지 않은데,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똑같이 생각한 것은 아닌데, 대체로는 비슷하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논리적 모순은 찾지 못했다. 아마 정보를 좀 더 수집하면 좀 더 과감하고 정교한 발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 외 몇 가지 생각에 대해 써보겠다.


첫째, 중력. 중력은 현재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 한다. 그런데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게 아니라 물체가 공간에 작용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물체가 공간에 영향을 주고, 공간이 모든 물체에 영향을 주는 구조다. 즉 중력의 작용은 물체 자체가 아닌 물체가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암흑 물질과 에너지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면서 추론했다. 암흑 물질과 에너지는 관측 불가의 가능성과 상호 작용 불가의 가능성이 있다. 관측 불가의 가능성이라면 현재 지구에서도 암흑 물질과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상호 작용 불가의 가능성이라면 지구에서도 상호 작용하지 못하여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암흑 물질은 우주 중력의 영향을 보고 추론한 존재라고 하는데, 전자기파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과 같이 물질과 물질이 상호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 내에서 두 물체가 서로를 이끌리게 되려면, 물체끼리 이끌리는 것이 아닌 공간에 이끌리는 것이어야 성립이 된다. 중력이 빛을 흡수한다는 것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중력에 의한 속도가 빛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하는데, 빛보다 강한 힘은 존재한다. 그걸 전제하여 우주 바깥에 연쇄폭발이 진행중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면 은하 또는 그 이상의 폭발에 의해 상상을 초월한 블랙홀이 발생할 것이다. 그 거대한 블랙홀은 강력한 중력으로 가까운 은하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것으로 거시 우주가 바깥으로 가고 있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력의 힘이 빛보다 강하기에 중력에 의한 이동이 빛보다 빠르게 이뤄질 수 있어 은하의 이동이 빛보다 빠르다 하더라도 우주 팽창의 확증은 될 수 없다고 본다. 거대한 블랙홀은 적색 편이로 존재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우주 배경 복사. 지구 근처의 우주 전체에 약 2.725K 복사와 유사한 전파 잡음이 관측되었다. 이것을 빅뱅 때 방출된 뜨거운 빛이 식어 파장이 긴 형태의 전파로 바뀐 우주 배경 복사라 주장했다고 한다. 이 관측에 의해 빅뱅 우주론이 주류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폭발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빅뱅의 근거라 확신할 수는 없다고 본다. 지구에서 관측된 전파와 다른 은하에서 관측된 전파가 같을 거란 확증은 없는 상태다. 대폭발이 일어났지만 빅뱅과 같이 한점에서 폭발하여 우주가 팽창한 것이 아닌 정상 우주에서 대폭발과 연쇄폭발한 것으로 나타난 흔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온도가 균일한 까닭은 해당 흑체 복사 에너지 흡수에 한계가 있다고 가정하면 성립된다. 흑체가 100을 흡수할 수 있다면 200, 300, 400과 같이 천차만별의 연쇄폭발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주배경복사는 100이상이 될 수 없다. 그 폭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폭발 온도가 비슷하게 되었다가 점점 낮아졌다면, 대폭발에 의한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는 균일하게 된다. 미세한 온도 요동은 우주에서 영향을 받아 생긴 오차 범위로 보면 된다.


셋째, 이중슬릿 실험. 이중슬릿에서 물질을 쏘았을 때 관측하지 않으면 정적인 상태로 물질이 파동성을 가지지만 관측하는 순간 관측 기구의 열에 의해 동적인 상태가 되어 물질이 입자성을 가지게 된다. 쏜 물질이 무언가 부딪치면 입자가 된다는데, 부딪치는 순간 에너지가 움직여 입자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 원자, 분자, 생체 분자까지도 이중슬릿 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아마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다음 실험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질은 정적 세계 법칙에서 파동성을 가진다는데, 그게 일반적인 동적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는 거시 세계의 파동성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양자 역학의 파동은 확률 개념이 더해진다고 했는데, 파동에 확률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파동과 비슷한 정적 세계의 알지 못했던 법칙일지도 모른다. 


넷째, 암흑 물질과 에너지. 수정 뉴턴 역학을 통해 암흑 물질과 에너지를 부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암흑 물질과 에너지는 존재한다고 본다. 관측 불가한 물질과 에너지가 없을 수가 없다. 전자기파와 상호 작용하지 않는 물질과 에너지도 있을 수 있다. 현재 예측한 우주 물질의 약 85%가 암흑 물질이고, 우주 에너지의 약 68%가 암흑 에너지라고 하는데 비율은 다를 수 있을 거라 본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상태에서는 거시 세계에서 양자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러면 많은 우주의 거시 세계에서 양자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양자 현상에 의해 계산 외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을 암흑 물질과 에너지로 추정했을지도 모른다. 전자기파로 관측하는 인간 입장에서 우주의 거시 세계에 있는 양자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측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 지구에서 암흑 물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반면 양자 현상은 미시 세계에서 파악이 가능한 상태. 암흑 물질과 에너지로 추정된 현상이 실제로는 양자 현상일 수 있다 본다.


다섯째, 은하와 은하단. 빅뱅으로 우주가 팽창했다면 은하와 같은 물질 덩어리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 학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인플레이션 우주론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우주가 팽창된 것이 아닌 대폭발과 연쇄폭발로 우주 물질이 불타버린 것이라면, 타고 남은 잔재에 의해 은하와 같은 물질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보면 된다. 오래된 은하들은 초기 대폭발과 연쇄폭발이 은하 단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은하 중심에 초거대 블랙홀이 존재한다. 은하와 별 형성은 대폭발, 블랙홀, 물질 흡수, 블랙홀 축소, 물질 방출, 별 형성일 것 같다. 은하 단위의 대폭발로 블랙홀이 형성되었기에, 그 블랙홀을 중심으로 은하가 성립된다. 은하 내 별들은 블랙홀의 강한 중력으로 질서가 정해져 별 사이에 상호 작용이 적지만, 은하와 은하는 아직 질서가 정해지지 못하여 상호 작용이 많다.


여섯째, 적색 편이. 적색 편이는 파동의 진동 수가 줄어들고 청색 편이는 파동의 진동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말한다. 지구에서 은하를 관측했을 때, 적색 편이가 보이면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고 청색 편이가 보이면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드로메다와 같은 일부 은하를 제외하고는 거시적으로 대부분 은하가 적색 편이인 상태다. 이것을 빅뱅에 의한 우주 팽창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우주가 팽창되는 것이 아닌 은하가 이동되었다 하더라도 적색 편이는 성립된다. 대폭발과 연쇄폭발이 맞다면, 중심에서 바깥으로 폭발하는 방향에 의해 대부분 은하가 바깥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본다. 우주 팽창이 아니기 때문에 청색 편이도 있는 것이라 본다.


일곱째, 우주 팽창. 빅뱅에 의한 우주 팽창이 작은 점이 그대로 팽창한 것이 현재 우주고, 계속 팽창해서 대부분 은하가 바깥으로 멀어지는 것이 적색 편이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팽창 개념은 공간만 팽창하고 물질은 그대로인 것과, 공간과 공간에 있는 물질도 같이 팽창하는 것이 있다. 공간만 팽창했다면 물질 분포가 균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물질도 같이 팽창한다는 것인데, 공간 팽창에 의한 물질 팽창 현상을 관측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현재 급팽창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장은 발견되지 못했다고 한다. 실험으로 관측할 수 없는 현상을 전제한 빅뱅을 전적으로 신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대폭발과 연쇄폭발은 실험해볼 수 있다.


여덟째, 광속 불변의 원리. 솔직히 헷갈리고 있다. 인간이 관측하는 수단이 빛이니까 빛을 기준으로 관측하다보니 광속이 불변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만물 중 빛만 특별하다는 것이 이상한 것 같다. 인간이 빛으로 보니까 빛이 특별했던 것 같다. 광속이 불변했던 것이 단순히 관측 기준이었기 때문이었다면, 광속보다 빠른 게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정적 세계에서의 빛의 속도를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럴 경우 우주에서 정적 세계를 지나칠 때에 빛은 어떤 속도로 지나치는지 모를 것 같다. 절대 영도를 구현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만약 실존한다면 광자가 얼 것인가? 만약 얼었다면 우주 관측 시 빛을 내지 않는 행성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빛이 얼어서 관측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빛이 얼어서 양자 현상이 발생할 수가 있는가? 빛 알갱이 하나는 양자 현상이 발생하는데 대량의 빛은 얼어야 가능할까? 대량의 빛이 얼어서 양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관측이 될 것인가?


아홉째,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 종교 가치로 가공된 인간이 종교 가치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것을 벗어난 생각을 하기 어려웠듯이 동적 세계의 존재인 인간이 동적 세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것을 벗어난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인간은 동적 세계의 존재, 인간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순차적 이동조차도 정적 세계에서는 다르다. 인간은 n 온도~n 온도를 가리키는 운동 에너지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특정 운동 에너지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주는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의 법칙이 달라 대통일 이론을 완성하려면 관측할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열째, 초전도체. 초전도체는 외부는 동적 세계 법칙이 적용되고 내부는 정적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으로 거시 세계에서 초전도 현상과 같은 양자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물체인 것 같다. 그렇기에 절대 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이 아니어도 초전도 현상이 일어난 것 같다. 이렇게 세계 분리가 가능한 특정 물질에서만 초전도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상온에서도 세계 분리가 가능한 물질이 있다면 양자 현상을 상온에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부는 저항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저항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입자인 전자가 파동과 비슷한 형태로 바뀐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초전도체에서 벗어나면 다시 입자인 전자로 돌아와 작동한다. 양자의 파동은 확률이 포함된다는데, 전류는 확률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


시간은 지각 순서이므로 광속을 넘든 말든 미래로 가거나 과거로 가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거시공동은 3천만 광년 ~ 3억 광년 정도 크기의 초거대 무공간을 말하는데, 타거나 상호 작용할 물질이 없거나 적어 연쇄폭발이 일어나지 못하거나 적었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열역학 법칙이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가 달랐던 것은 열역학 법칙 자체가 열이 존재해야 성립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의 나이는 시간 개념의 일종이므로 시간 법칙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 나이는 성립되지 못한다. 우주는 단순히 이동할 뿐이다.


대폭발과 연쇄폭발 이전의 우주에 어쩌면 다른 문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탐구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라면 시간과 차원은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 심리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인간의 지각 순서다. 시간 개념이 원시 시대부터 있던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이 영혼이란 우주의 법칙으로 착각한 것과 같이 인간의 지각 순서의 본질이 시간이란 우주의 법칙으로 착각한 것이다. 시간은 지각 순서기 때문에 지각을 느리게 하면 시간이 느려진다 착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실험실에서 피험자의 감각을 청각 외에 차단한 다음, 피험자를 제외한 공간의 시간을 느리게 해보겠다고 전달해보자. 그 다음 노래를 들려주고, 그 노래를 천천히 느리게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피험자는 노래가 느려졌다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느려졌다 생각할 것인가? 시간을 우주의 법칙으로 믿는다면 시간이 느려졌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도 동일하게 실험해볼 수 있다.


상대성 원리와 같이 시간을 전제한 법칙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지각 순서를 전제했거나 시공간 중에 공간에만 작용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의해 관측 속도가 느려진 것으로 인간의 지각 속도가 느려진 것을 보고  시간이 느려졌다 여길 뿐이다.  2010년 초정밀 원자 시계 두 대를 이용하여 시간 지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하나는 실험실 바닥, 하나는 실험실 바닥에서 약 33cm 높은 곳에 두고 시간 진행 방향에 차이가 생기는지 측정했다고 한다. 그러자 약 33cm 높이의 시계가 실험실 바닥의 시계보다 약 10경분의 4정도 빨리 흘러갔다고 한다. 이걸 보고 시간 지연이 발생한 것이라 말하는데, 그냥 원자 속도가 빠르게 흘러간 것이다. 속도가 중력에 영향을 받으므로 고도가 다르니 중력 차이에 의해 원자 속도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물체에서 반사되는 전자기파를 지각하는 속도가 느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우주에 시간이 존재한 것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이동하는 것을 관측한 순서를 시간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구에 인간이 있다 하여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듯이, 인간이 관측했다 하여 인간 뇌내의 개념이 우주의 법칙이 되지는 않는다.


차원은 인간의 관점이다. 0차원은 점으로 보는 관점, 1차원은 선으로 보는 관점, 2차원은 면으로 보는 관점, 3차원은 공간으로 보는 관점, 4차원은 인간의 지각 순서를 더한 관점. 인간이 만든 개념을 우주의 법칙으로 착각하고는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을 구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립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에테르를 물리학계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이제는 시간과 차원을 우주의 법칙으로 전제한 것도 추방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가공되기 전의 상태를 인식하기 어려운 인간 특성상, 시간과 차원과 같은 개념을 뇌내 개념으로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심리에 속한 것으로 자아를 존재 탐구를 해야 파악이 가능하다.


인문 계열 고전 철학에서는 뇌내 개념을 마치 우주의 법칙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신, 사후 세계, 환생, 저승 등과 같이 말이다. 일부 불가지론자는 죽기 전에 파스칼의 도박에 영향을 받아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한다. 이 세상이 신의 창조나 시뮬레이션일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는 창시 당시 지식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말한 적이 없고 시뮬레이션은 주장 당시 지식은 우주 전체를 파악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이 주장한 신이나 시뮬레이션일 확률은 없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사후 세계에서 천국과 지옥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절대적인 선과 악을 전제한 천국과 지옥은 성립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육체가 다르다는 것은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로 증명하였고, 그에 따라 인식과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누군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이 걱정되어 가치의 절대성을 신앙한다면, 사후에 내가 모든 죄를 짊어지겠으니 그런 걱정에서 해방되길 바라겠다. 종교가 주장한 사후 세계는 없고 가치의 절대성은 성립될 수 없으므로 부담은 없다.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 방식으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해보았다. 하나만 깊게 파는 과학자보다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이치를 기초로 논리적인 탐구를 하는 사상가가 통찰은 좀 더 수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연 계열 과학자가 증명한 것을 모아 합리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흔히 학문은 본인 분야만 안다거나, 특정 과학자가 각고의 탐구 끝에 인간이 증명한 학문에서 약간의 변화만 준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 내에서 탐구할 때에 주로 적용된다. 학문은 사상, 철학, 과학 순으로 범위가 달라지는데, 사상에 가까울수록 넓고 얕게 보고 과학에 가까울수록 깊고 좁게 본다. 자연 계열 과학자는 분야의 개념뿐만 아니라 증명하기 위해 세부적인 것까지 전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세부적인 것까지 다 알아야 그 분야를 알았다는 고정 관념으로 과학 전체를 알 수 없다는 인식이 있는데, 큰 개념만 파악하면 전체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파악하여 합리적으로 정리하면 큰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


자연 계열은 기본적으로 존재 탐구를 하나 인간인 이상 한계가 존재한다. 자연 계열의 과학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문 계열의 학문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이라 생각한다. 그것에 의해 인간 심리는 자연 계열 과학자도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었다 본다. 그 때문에 인간 심리는 자연 계열에서조차 인식 탐구를 할 때가 있었다. 






4) 사회 탐구


이치를 기초로 논리적인 탐구를 하는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를 해보겠다.


사회 문제의 본질.


문명이 없던 원시 시대부터 고려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던 시기, 지각을 자각하여 인식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손익, 변화, 존재, 죽음, 감각, 결핍을 지각하면서 가치, 시간, 영혼, 도덕, 감정, 행복이 만들어졌다. 이런 식으로 개념이 가공되면서 문화가 나타난다. 그런 원시 문화에서 종교에 의해 특정 가치가 사회를 장악한다.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과 같이 토속 신앙이 나타나 사회를 장악한다. 이런 신비 종교 가치의 사회 장악은 다신교·유일신교와 같이 나뉘거나 학문 종교 등으로 이어갔다.


종교 가치 중에서 지배자의 지배에 적합한 종교 가치가 사회 선택을 받아 살아남게 되었다. 윤리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사회 구조와 질서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고, 신비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현실 도피를 하여 죽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서 종교 가치는 절대적이게 되었다. 종교 가치를 옳다 여기는 것은 단순히 종교 가치가 사회를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종교 가치인 윤리는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단순히 누군가 좋아하는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과학 혁명을 통해 문명 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종교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기 이전의 사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이것으로 종교 가치의 절대성에 의한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 나타나게 된다. 그 여파로 인간 심리에 속하는 시간, 영혼, 차원 등과 같은 뇌내 개념을 우주의 법칙으로 착각하기도 하게 되었다.


종교 가치가 사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본인의 권리만 주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자유주의 혁명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 등과 같은 종교 가치가 장악한 사회에서 다수의 개인이 과학 혁명을 통해 힘을 쥐자, 그 힘을 토대로 종교 가치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욕망주의와 이기주의라는 정반대의 가치가 자유주의 혁명을 통해 대두된 것이다. 그러면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던 집단주의 체제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인주의 체제가 충돌한다. 이것이 현대 문명의 가치 충돌이다.


가치 충돌에 의해 저출산, 고자살, 다양한 차별, 억압과 희생과 가치 강요, 사회와 경제 활동 둔화, 전체주의와 담합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있으나, 가치의 절대성에 의해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알지 못하여 사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치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새로 태어나는 인간을 가공할 때에는 체제 가치로 가공했어야 했는데, 종교 가치로 가공했다. 종교 가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대부분 연령대에 연령별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교육은 그 연령별 의무를 전제하고 체제, 성애, 생산 등을 제대로 가르치기는커녕 막기만 했다. 그런데 사회는 체제 가치에 의해 연령별 의무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면서 신세대는 사회 체제와 인간 성애와 가치 생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부정적으로 보며 성장하게 된다. 


그에 의해 사회 체제를 모르고 이성애와 결혼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가치 생산을 꺼려하는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가 현재 대부분 한국 사회 문제다. 이성애를 배운 적이 없어 출산조차도 애정이 아닌 물질적 손익 계산 대상이 되었다. 대리모도 아니고 출산을 거래 수단으로 인식하다니 놀라울 정도로 애정이 없다. 결핍을 부당하게 느끼면 결핍을 충족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출산이란 결핍을 부당하게 느끼니까 아이를 낳아 결핍이 충족되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성애를 부정적으로 배워 사랑이 없으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발정하는 인간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그들 모두가 성애를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본인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기성 세대는 연령별 의무로 사회 체제에 적응하고 결혼과 출산을 하고 일을 했었기 때문에 신세대에게 그걸 자발적으로 해야 할 이유를 본인들도 몰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개인주의 체제는 있었던 적이 없는 체제기 때문에 학문이 발전하지 않는 한 모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학문에서도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체제를 모르기에 종교 가치를 강요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사회 미숙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사회 미숙 현상이 보편적인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된다. 이런 가치 충돌에 의한 사회 문제는 단순히 한국이나 일부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의해 전 세계가 체제 가치를 공유하면서 전 세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 문제의 본질은 상당히 오랜 시간 걸쳐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전제에 의해 결론이 나온 것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님을 전제로 하여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이치로 삼아 자아, 종교 가치, 체제 가치, 가치 충돌, 존재의 절대성, 가치의 상대성 등을 논리적으로 탐구하면서 사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것 같다. 앞으로 인문 계열은 존재 탐구를 하여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고, 목소리 큰 인간의 비논리적인 주장만 수용하면서 사회가 불합리하게 되는 것도 막을 수 있게 된다.



사상 시작을 2016년 말 역할주의를 작성했던 시기로 정하고, 사상가 시작은 2022년 말 사회와 복지를 작성했던 시기로 정하겠다. 사상 시작한지 약 7년, 사상가 시작한지 약 1년만에 자연 계열의 과학 혁명을 따라잡았다. 앞으로 약 5년 안에 현대 과학을 따라잡겠다. 약 10년 안에 인공 자아 일반화, 약 20년 안에 인류 불로불사, 약 10000년 안에 우주의 존재 이유 증명. 일단 목적은 이렇다.






2.4 학문 변화


1) 체제 변화


문명 사회의 변화는 보통 문명을 만든 학문의 변화로 일어난다. 학문이 변화한 것을 사회에서 힘을 가진 인간이 수용하면서 문명 사회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으로 사회가 진보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 현재 인류에게 닥친 커다란 세 가지 변화인 체제 변화, 기술 변화, 환경 변화도 학문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개인주의 체제로의 변화의 본질은 주권의 이동이다. 왕정 체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로 소수만 주권이 있었다면, 민주정 체제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로 모두에게 주권이 있다. 이것으로 왕정과 민주정은 집단주의 체제와 개인주의 체제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도 민주주의의 주권에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모든 개인의 자유는 민주주의로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보장되면서 자유에 관련된 권리도 고르게 보장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의 수단 중 하나인 지배와 복종이 체제 훼손이 되어 허용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개인이 주권을 보장받았음에도 경제적 자유는 다른 이유는 시장이란 공정한 제도에서 이익을 추구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다른 성적이 나왔다고 하여 스포츠 참여에 관한 자유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듯이, 모든 개인은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공정한 시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면 자유권이 보장되게 된다. 모든 주권자에게 그 자유를 보장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승패가 나뉜다 하더라도 선수가 서로를 존중하듯이, 사회 경쟁에서 승패가 나뉘거나 경제적 차이가 있다 해도 개인은 서로를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사회적 평등과 정당한 경제적 차별이다. 경기와 시장에서 정당한 평등과 차별이 결정되는 만큼, 경기와 시장에서 공정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 선수의 권리가 된다면 경기를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데 필요한 복지가 지원되어야 하듯이, 시장에 참여하는 것이 주권에 의해 개인의 권리가 되면서 시장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데 필요한 복지가 주어지게 된다. 


체제 변화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나타났다. 그런데 인문 계열의 인식 탐구 결과에 의해 개인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보수와 진보가 다르게 정의되면서 그 범위가 굉장히 넓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를 지칭하는 우파와 진보를 지칭하는 좌파가 무엇인지 정확히 대답하는 인간이 드물게 되었다. 우파의 본질은 기득권 유지고 좌파의 본질은 계급 투쟁이다. 자유와 권위가 각자 성질이 다름에도 기득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우파로 지정되기도 하는가 하면 평등과 무정부가 각자 성질이 다름에도 기득권에 맞서 투쟁하는 것에 속한다는 이유로 좌파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는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뉘게 된다.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자본가와 노동자, 원주민과 이주민 등과 같이 된다. 단순히 기득권이라 현상 유지를 바라는 것으로 보수가 되고, 비기득권이라 현상 변화를 바라는 것으로 진보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학문과 관계 없이 단순한 이권 다툼이 되어버린다. 우파는 기득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조건 옹호하고 좌파는 비기득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조건 옹호한다. 그러면서 사회가 불합리하게 된다. 종교 가치나 체제 가치로 이권 추구를 정당화하기도 하면서 가치 충돌은 더욱 더 심각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래 인류 문명은 왕정 체제에서 민주정 체제로 가면서 주권이 이동하는 것으로 진보했다. 그런데 인류는 민주정 체제 맞는 질서가 없었다. 종교 가치에 자유 조건이 들어가면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듯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 그것을 보고 특정 사상가와 철학자는 종교 가치에 강제 조건이 들어가는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종교 가치인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모든 개인에게 강요하면서 집단 평등을 이루는 것이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왕정 체제와 본질이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왕정 체제와 같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집단 수장의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다. 그것이 현재 공산정 국가다. 사회주의는 종교 가치로 만들어진 공동체 사상이고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학을 자칭하면서 인식 탐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의 한계에 속하는 사상일 뿐이다. 주권 이동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갔다가 이 사상들에 의해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는 것으로 인류는 오랫동안 퇴보하게 되었다. 그 퇴보가 우파와 좌파의 가치 충돌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체제를 기준으로 체제를 중세와 근대와 현대로 구분해보겠다. 중세 국가는 왕정 체제에 종교 가치 질서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나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여 전근대적이다. 근대 국가는 민주정 체제에 종교 가치 질서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상당한 혼란을 부르나 체제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어 근대적이다. 현대 국가는 민주정 체제에 체제 가치 질서다. 종교 가치가 인류 문명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현대 국가에 도달한 국가는 없지만 근접한 국가는 있다. 공산정 국가는 공산 체제에 종교 가치 질서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나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여 전근대적이다. 제대로 된 공산정 국가는 북한 말고 없고, 대부분 시장 경제를 도입하면서 근대 국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근대 국가로 넘어간 공산정 국가조차도 가치 충돌에 의한 혼란이 발생 중에 있다. 


인류 체제의 보수와 진보는 진영의 이권 쟁탈이 아닌 주권 이동 방향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할수록 진보적이다. 학문은 존재 탐구로 진보해야하고 질서는 존재 질서로 진보해야 한다. 앞으로 인류는 체제와 질서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과학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질서를 갖춘 현대 국가로 진보해야 한다..






2) 기술 변화


기술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디지털 기술로의 변화의 본질은 모방의 정점이다. 본래 인류는 자연을 모방하면서 발전했다. 하늘을 보고 산을 보고 강을 보며 필요한 것을 발상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 모방 중 가장 체계적인 모방이 바로 수학이다. [수학: 1. 수량 및 공간의 성질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수학은 만물을 자연수로 세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연수: 1. 1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더하여 얻는 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 1,2,3 따위이다.] 


수학은 우주의 법칙인 자연수를 기초로 하여 체계를 갖춰 다양한 개념들을 만들어갔다. 모든 개념은 후천적이나 수학 내에서 자연수가 선천적이라면 그 외 모든 법칙은 후천적이다. 블록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다양한 블록 부품은 블록 세계의 법칙에 속하지만 블록 부품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블록을 만들든 그것이 블록 세계의 법칙은 아니다. 자연수를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한 것부터 시작해 모든 수학 법칙은 우주의 법칙인 자연수를 계산하는 방식이지 우주의 법칙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낮은 가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높은 가치다. 인간이 우주를 수로 계산하여 모방한 것이다. 블록 부품을 쌓아 사물을 모방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수를 계산하여 우주를 모방했다. 그것으로 자연 계열의 기초 과학은 수로 계산하여 실존하는 우주를 존재 탐구하면서 자연수와 같은 선천적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런 모방 중 정점이 바로 후천적 존재 탐구 결과인 디지털 기술이다. 단순한 모방을 넘어 가상에 우주를 모방한 세계를 구현할 수 있었다.


가상에 모방한 세계를 만들면서 디지털 기술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하나, 우주의 모방. 모든 것을 모방하여 디지털화를 할 수가 있다. 영상이나 소리의 디지털화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둘, 인식과 가치의 거리 축소. 디지털 기술 내에서 전 세계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판단한다. 그러면서 인류가 통합되고 있다. 셋, 가상의 자유. 디지털 기술 내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게 무제한으로 복제가 가능하고 해킹도 가능하다. 무단 복제나 해킹 등의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첫째, 우주의 모방. 우주의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고, 모방한 것을 다시 우주에서 재현할 수 있다. 인류와 세상을 모방하여 구현하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상 현실을 즐기고 디지털 자아를 통해 불로불사가 가능할 수도 있게 된다. 또한 그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가상 현실을 현실로 구현하고 디지털 자아를 현실의 새로운 육체에 이식할 수도 있게 된다. 그렇게 현실과 가상을 오가더라도 기억을 통해 같은 자아 존재가 된다. 디지털은 현실을 그대로 구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수학에서 자연수는 우주의 법칙이다. 현실에 있는 물질을 기본 입자까지 세서 구현하면 아주 작은 오차를 제외하면 가상에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는 법칙이 다르지만, 인간은 동적 세계의 존재이므로 순차적이기 때문에 자연수로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둘째, 인식과 가치의 거리 축소. 인식과 가치의 거리가 축소되면서 인식과 가치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류가 하나로 통합되어가고 있다. 그에 따라 인류가 일으키는 사회 문제도 통합되어가고 있다. 본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발생했을 가치 충돌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인류가 가치 충돌의 혼란 속에 있다. 개인 방송이나 짧은 영상으로 전 세계가 비슷한 유행이 퍼지면서 유행에 의한 사회 문제도 공유되게 된다.


셋째, 가상의 자유. 가상에서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물건은 무한 복제가 불가능하지만 가상에서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그것으로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 위반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는 현실 경제 원리를 디지털에 그대로 적용한 것에 의한 폐해다. 그 외에 해킹 등의 문제가 있다. 가상에서는 온갖 자유가 보장되어 AI를 악용하는 것으로 온갖 사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AI를 규제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AI 발전을 막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사회 혼란보다 현실에 닥친 환경 문제가 더 심각하다.






3) 환경 변화


환경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지구 환경의 변화의 본질은 자연 선택과 사회 선택이다. 지구 환경의 변화는 인간이 없더라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다. 거기에 인간이 사회 발전을 위해 기술 발전을 하면서 자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서 환경 변화가 가속되었다. 환경 변화로 자연에 적응해야 생존하는 자연 선택이 일반적인 상태에서 기술 변화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에도 적응해야 생존하게 되는 것으로 자연 선택과 사회 선택이 일어나게 되었다.


자연과 사회에 모두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적응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 육체가 생존하기 적합한 환경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 적응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자연을 조작해야 한다. 환경 보호는 생태계 보호가 생태계 조작인 것과 같이 실상 자연 조작에 해당한다. 자연을 조작해서 인간이 생존하기 적합한 자연 환경을 만든다. 


자연 조작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존재 유지의 절대성에 따라 지구에 살고자 하는 모든 존재에 강제력이 발생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있기 위해 육체 유지 활동이 강제적이듯, 사회와 체제가 살아있기 위해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 활동이 강제적이듯, 지구 환경에서 인류가 살아있기 위해 지구 환경 보호 유지 활동이 강제적이게 된다. 


자연 조작의 목적은 절대적이지만 수단은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수단은 강제적이지 않다. 자연 조작을 하는 이유가 인류 생존인데, 인류를 죽게 하는 수단을 쓸 수는 없다. 많은 곳에서 환경 보호 주장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환경 보호 목적이 사리사욕 추구거나 환경 보호 수단이 인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환경 보호의 본질이 자연 조작인만큼 날씨와 태풍을 제어하자고 주장하는 것처럼 방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호응이 낮은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 발전을 이뤄야 한다. 탄소 포집 기술이 유망한 자연 조작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것만으로는 사실 부족하다. 그것은 현재 인류가 기술 발전을 하면서 환경을 변화시킨 것을 약간 조작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환경 변화는 자연과 사회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연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 발전이 필요하다. 


현재 그걸 위한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AI다. 기술이 발전하려면 많은 반복 실험이 필요한데, AI는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 현재 AI가 지금까지 인간의 발상 내에서만 발상하는 기억 발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창의 발상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현재 자연을 조작할 수준의 기술 발전을 이루려면 AI말고는 마땅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인류만으로도 충분히 자연 조작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 발전이 가능할 수 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러므로 현재 인류가 집중해야 할 것은 AI발전. 자연 계열은 AI를 총력을 다해 발전시켜야 하고, 인문 계열은 AI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총력을 다해 해결해야 한다.

 





4) 변화 적응


인류는 체제와 기술과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만 체제부터 적응을 하지 못했다. 체제 적응은 과거 자유 혁명 시대에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질서가 도입되면서 했어야 했다. 그러나 종교 가치에 의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나타나면서 인류는 체제 적응에 실패하게 되었다.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 체제를 마차로 비유하고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 체제를 자동차로 비유해보겠다. 현재 가치 충돌은 자동차를 마차 타듯이 타는 것으로 일어난다.


“자동차에는 기름을 넣고 직접 운전해야 해. 왜 말이 필요한 것과 같이 간섭하고 억압하는거야.” “주유구에는 기름이 필요한 거야. 그게 친환경적이지 않다고 해서 당근 주스 넣지 말아줘. 그러면 차가 가질 않아.” “타이어가 친환경적이지 못하다고 때서 마차 바퀴로 바꾸려고 하지 말아줘. 사고 난단 말이야.” “아니 이제 말은 필요 없어. 자동차 운전수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고 해서 말을 가져오지 말아줘. 그러면 계속 말에 의존하게 되면서 잘 못가잖아.” “이제는 말을 다루는 법이 아닌 자동차를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해.” 마차 부품은 필요 없으니까 버리거나 정 아까우면 트렁크에 실어줘.” “마차를 유지하고 마차가 가는 방법은 이제 자동차를 유지하고 자동차가 가는 방법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마차가 가는 방식으로 자동차가 가지 않아. 마차 다루듯이 자동차를 다루면 자동차가 망가진단 말이야.”


종교 가치를 근거로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욕망이 나쁘다고 막은 것은 환경 파괴적인 기름이 나쁘다고 막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별 다른 게 아니다. 욕망은 인간의 동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동차로 보면 기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 막아버리니 인간의 연료가 없어 멈춰버린다. 미성년 시기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성장을 보호하겠다면서 막는 것은 운전하는 법을 배우겠다는 것을 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미성년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해로울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몰라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거나 사고를 치고 있다. 이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는 직접 운전하는 법을 배워야 스스로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데 위험하단 이유로 아예 배우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어떻게 운전해야 할 지를 몰라 방향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폭주하여 사고가 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옳은 윤리를 행했으니 잘못되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자동차 주유구에 환경 친화적인 당근 주스 넣고서 왜 자동차가 가지 않느냐며 불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그것을 모른다. 안다 해도 인정하기가 어렵다. 당근 주스 넣어보고 안되면 자동차 바퀴를 마차 바퀴로 바꿔본다. 그래도 안 되면 차 내부를 나무로 교체해본다. 그러면서 망가진다.


개인주의 체제는 자동차를 마차처럼 다루다 망가지듯 개인주의 체제를 집단주의 체제처럼 다루다 망가졌다. 그 망가진 증상이 사회 문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 디지털 기술, 지구 환경과 같은 중요한 것을 빠르게 적응할수록 사회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인문 계열이 진보하지 못해 개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여 겪은 사회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한국인은 이미 분단을 통해 알고 있다. 한국 민족의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은 인문 계열이 진보하지 못한 것에 있다. 그랬기 때문에 공산주의 따위가 세계에 유행했고, 그 때문에 그것이 조선에도 유행하여 조선 왕조와도 같은 체제가 북한에 자리잡은 것이다. 한국 이념 전쟁, 베트남 이념 전쟁 등과 같은 비극도 그 때문이고 양안전쟁에 대한 걱정도 그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PC주의와 여성주의도 그 때문이다. 개인주의 체제만 해도 이만한 사회 문제가 있었다. 디지털 기술과 지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이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헉슬리와 오웰은 멋진 신세계와 1984를 통해 디스토피아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 탐구와 존재 질서로의 진보를 고려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하다. 물론 진보하지 않으면 정말 그런 디스토피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학문은 존재 탐구로 진보해야 하고 질서는 존재 질서로 진보해야 한다. 쉽지 않아도 할 수 있다면 과거 과학 혁명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국가와 같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인류가 자연 계열에서 경험했다.



체제에 적응하여 체제에 합당한 생활 양식인 체제 합리를 이뤄야 한다. 체제 불합리 사회는 정상 작동하지 않은 육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육체로 제대로 살 수나 있겠는가? 체제 불합리 사회에서 인간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체제 합리와 체제 불합리에 대해 중국과 영국 두 가지 사례로 이해해보도록 하겠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을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하고 그것이 준 영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 [문화 대혁명: 1. 1966년에 중국에서 시작한, 대규모 사상 · 정치 투쟁의 성격을 띤 권력 투쟁.] 중국이 스스로 중국의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지는 사건이다. 실제로 어리석은 사건은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사 과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인문 계열까지 대부분 파괴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박물관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밀어버린 탓에 부작용이 많았지만 그게 없었다면 성장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은 그렇게 다 밀어버렸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흑묘 백묘 운운하면서 선진국의 문명으로 채우면서 과거 가치와 적은 마찰로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문화 대혁명을 거치지 않아 종교 가치가 많이 남아있었다면, 종교 가치에 의해 발전이 좌초되는 일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다.


중국은 여유가 생겨서인지 이제서야 과거의 종교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회 온갖 곳에서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나 중국은 질서가 아닌 체제 자체에서 가치 충돌이 발생하여 더욱 심각한 상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장주의가 어울릴 리가 없지 않는가. 당연히 파탄난다. 최근 들어 중국이 혼란스러운 것은 애초에 공존할 수 없는 체제를 둘 다 쓰니까 그렇다. 공산주의를 포기하자니 권력을 잃을 수 있고 시장주의를 포기하자니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 지금 중국은 체제 합리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영국은 영국 왕실 유지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에 의해 입헌 군주제 유지가 영국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분석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 [입헌 군주제: 1. 군주가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정치 체제.] 민주정 체제에서 남은 왕실이 왕정 체제를 상징하면서 종교 가치는 물론이고 왕정 체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고 있다. 이런 것이 체제 불합리다. 왕실의 경제 효과는 매년 약 3조원이고 그 외에 다방면에 이익이 있으나, 국내 총생산이 3천조원이 넘는 영국에서 체제 합리를 포기할 정도의 이익이 아니다. 


이는 다른 민주정 체제의 왕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익이 있든 한 국가의 체제 합리를 포기할 정도의 이익이 될 수는 없다. 당장은 왕실로 국가 이익이 큰 곳이 있을 수 있으나 지속되면 될수록 체제 합리를 이룬 민주정 체제인 국가에 밀리게 되게 될 것이다. 산업 혁명을 일으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쇠락은 체제 불합리에 의한 것이다. 체제 불합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수준으로 의미없는 짓이다. 얼마나 돈을 써도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보다 왕실 이익을 포기하고 체제 합리를 추구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이 된다.


손해를 봤지만 체제 합리로 성장했던 과거 중국과 이익을 얻지만 체제 불합리로 성장이 더뎌진 현재 영국을 보고 체제 합리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2.5 학문 발상


1) 발상 종류


사상을 시작하면서 본질을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존재 탐구를 했던 모양이다. 발상 종류와 몇 가지 발상을 써보겠다. [발상: 1. 어떤 생각을 해냄. 또는 그 생각.]


발상은 생각을 해냄을 의미하는데, 자아의 의식 의지가 아는 것을 발상하면 기억 발상이 되고 모르는 것을 발상하면 창의 발상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유무와 무관하게 자아의 의식 의지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기억 발상과 창의 발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창의 발상도 연습이 가능하다. 그냥 당장 모르는 것을 발상하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떠올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이치를 기초로 삼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그것이 창의 발상이다.


창의 발상 종류는 난이도에 따라 달라진다. 학문 발상은 문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발상이 필요하여 난이도가 높은 편이고, 상업 발상은 시장에서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발상이 필요하여 난이도가 중간인 편이고, 일상 발상은 일상에서 개인의 판단이 필요할 때 발상이 필요하여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학문과 상업과 일상에 필요한 최적화가 달라 각각 전문성이 다를 수 있다.






2) 사상 발상


첫째, 생존주의. 사회와 복지에 관한 사상을 하면서 나온 사상이다. 인간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인 먹고 자고 싸는 활동에 강제력이 있듯이 사회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인 복지에 강제력이 있다 보고, 그런 복지의 당위성을 바탕으로 복지의 효율적인 방식에 대해 탐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생존주의라는 사상이 떠올랐다.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위한 강제력에 대한 합리적 기준이 정립되면 그것 외에는 사회와 체제 구조와 관련이 없으므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본 것이다. 그것을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라 이름 지었다. 그러다 존재가 절대적이고 인식과 가치가 상대적임을 깨닫고 절대적 존재 탐구에 관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자연 계열의 탐구가 절대적 존재 탐구임을 파악하고 인문 계열의 탐구가 상대적 인식과 가치 탐구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인문 계열 또한 절대적 존재 탐구로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것을 통해 자연 계열의 과학 혁명을 따라잡았다고 보았다.


둘째, 역할주의. 역할 수행 게임을 하면서 떠올린 사상이다. 현실에서 인간 관계는 부당한 차별이 발생했지만 가상에서 인간 관계는 부당한 차별이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상대를 모르니까 선입견에 따른 부당한 차별을 하지 않았다. 상대의 연령, 성별, 인종 등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로지 게임 내 역할 수행 여부만 보고 칭찬하고 비판했다. 그것을 통해 발상한 사상이 역할주의다. 가상에서 그랬듯이 현실에서도 인간의 성질을 무시하고 역할 수행 여부만 보면 부당한 차별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보았다. 실제로 그랬다. 서로가 관계되는 역할에 관한 수행 여부만 보면 서로를 부당하게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가치 생산에 있어 나이가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인종이 어떻든 가치 생산에 대한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되었다. 거기에서 가치 생산 기여도에 따라 금전적 이익을 달리 얻으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상대방과 관계되는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면 서로의 개성이 존중될 수 있었다.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아무래도 좋다. 역할과 무관한 개성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각각 개인의 개성은 존중될 수 있었다. 평등이란 모든 인류가 친구와도 같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계급이나 서열이나 권위가 없어야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물을 수 있는데, 그걸 성립시키는 것이 인문 계열의 역할이다. 마냥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걸 성립시킬 수 있는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 나는 그 방법을 역할주의로 주장했다.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부를 거라 보았다.  


셋째, 탐구주의. 나의 탐구 방식을 정리한 사상이다. 지식 생산자는 기초와 응용을 모두 탐구하거나 기초는 암기하고 응용은 탐구하는 것으로 나뉜다. 통상 전자는 사상과 철학에 속하고 후자는 철학과 과학에 속한다. 사상은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은 학문에 속하나 구체적이지 않고 과학은 학문에 속하면서 구체적이다. 절대적 존재 탐구 방식에 따라 본인의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이치를 기초로 논리적인 탐구로 창의 발상한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성립시킨다. 그리고 탐구 결과가 나오면 탐구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접하여 본인의 탐구 결과와 비교하면서 각각의 오류를 파악하여 수정한다. 그 후에 다시 탐구한다. 그러면서 탐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성장한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탐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거라 보았다. 






3) 제도 발상


첫째, 역할 민주주의 제도. 역할주의 사상에서 파생한 제도다. 입법권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선출의 기준을 지역이 아닌 분야로 정하는 제도다. 현재 민주주의는 지역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로 지역의 대표로 선출되기 위해 토지에 관한 공약을 내세웠다. 그런데 토지 소유자는 매우 적어 대부분의 국민과 이해관계와 먼 공약이었다.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적었기에 대부분의 국민은 공약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아닌 정당의 정책이나 선동에 의해 투표하게 되었다. 정당의 정책이나 선동에 의해 투표를 하게 되면서 특정 지역은 후보가 누구든 정당만 보고 투표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 선출은 국민이 하는 것이 아닌 정당의 공천권자가 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결함이라 보았다. 정치를 보고 답답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제도적 한계다. 토지 민주주의 자체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정상적인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정치 수준이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 결함은 토지가 대부분의 국민과 이해관계가 멀었기 때문임을 파악하고 토지가 아닌 역할이 정해지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대부분의 국민은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고, 그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자에 해당하게 된다. 사회를 주도하는 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회의원이 선출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선동이 아닌 본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거듭나게 된다. 동시에 지역이 아닌 분야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것이므로 지역보다 분야가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보았다. 땅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인간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므로 분야의 성장은 국가의 성장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현재 지역의 대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은 아무래도 거대 집단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법안 추진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보다 세부적인 집단으로 나뉜 분야의 대표도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분야의 부조리를 해결할 의원이 없어서 허구언날 시위나 해야만 하는 상황에 개탄한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분야의 수가 많아 특정 분야의 대표가 각 분야의 이익만을 위해 활동하면 당연히 다른 분야에 제지를 받게 된다. 그렇기에 특정 분야의 이익 추구는 당연히 모든 분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게 된다. 그러면서 공공의 이익을 고려한 분야의 이익 추구가 가능하게 된다. 


둘째, 정책 판사와 정책 변호사 제도. 사회와 복지에 관한 사상을 하면서 나온 제도다. 정부 정책의 공적인 판단 기관과 정책 전문가를 도입하는 제도다. 현재 정부 정책은 공적인 판단 기관과 정책 전문가가 없기 때문에 사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뎌지는 것이라 보았다. 기관에서 정책에 의한 실수가 반복될 때가 있는 것은 그만큼 정책 관련한 발전이 느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정책의 결함이라 보았다. 사법은 법정에서 법의 판단에 관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와 같이 정책 또한 정책에 관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기관에서 정책의 판단에 관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어야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보았다. 현재도 정책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된 기관이 있지 않기 때문에 권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영향이 있다 보고 정책 판사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법이 정권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되었기 때문에 독자적 판단을 통한 삼권분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기관이 정책에도 있어야 한다. 정책은 법과 비슷하게 전문가가 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정책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변호사가 있어야 법 문외한이 법정 다툼을 해도 효과가 있을 수 있듯이 정책 전문가가 있어야 정책 문외한이 이의제기를 해도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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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퀘스트 제도.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면서 나온 제도다. 게임의 퀘스트를 게임 유저가 자발적으로 하듯이 현실의 가치 생산과 학습 또한 국민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다. 현재 개인주의 체제 적응 실패로 많은 이들이 미숙하게 성장해버렸다. 성년이 되어도 강요할 수 있었던 집단주의 체제의 방식으로 교육을 하면서 미성년 때 사회와 체제에 맞는 교육을 하지 않는 바람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성년이 되었는데 개인주의 체제로 자유롭게 되면서 강요할 수 없는 바람에 연애, 결혼, 출산, 가치 생산 등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재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의 결함이라 보았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세대는 물론이고 기성 세대 또한 게임을 즐기면서 게임 내 퀘스트와 레벨 업에 관한 행동 원리가 자리잡았다고 보았다. 게임 내 퀘스트가 성가시고 레벨 업이 피곤해도 그것을 통해 얻었던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원치 않아도 하였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하루 종일 지루한 반복 행동을 하는 것도 즐기고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게임 이용자는 그런 식으로 가공된 것이었다. 그 행동 원리를 활용한 제도가 퀘스트 제도다. 퀘스트 제도는 가치 생산 제도에 해당하는데, 기존의 가치 생산 제도와 충돌할 수 있으므로 가치 생산을 하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우선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가치 생산을 퀘스트로 만들어 퀘스트 제도에 공급한다. 그 퀘스트 제도는 초기 모바일 게임이 이용자를 모으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과 같이 추가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게끔 설계한다. 첫 퀘스트 클리어는 추가 보상을 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번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리고 나면, 퀘스트와 레벨 업 행동 원리가 작동하여 다음 퀘스트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차피 돈을 벌어야 한다면 퀘스트를 통해 레벨 업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쉬는 날에 할 것이 없으면 레벨을 올리기 위해 퀘스트를 통한 가치 생산을 하게 된다. 그렇게 레벨을 올리고 나면, 좀 더 어려운 퀘스트를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퀘스트 중에는 자격이 있어야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퀘스트와 레벨 업 행동 원리를 위해 그 자격을 취득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학습을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현재 평생 교육원과 같은 학원이 많은데, 그것의 효율이 낮은 것은 교육 측이나 학습 측이나 의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부족한 의욕을 퀘스트와 레벨 업 행동 원리로 채운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퀘스트를 통한 가치 생산을 하게 유도하면 그 외에 다양한 행동을 자발적으로 퀘스트를 통해 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자연 재해 후 청소하기가 어려우면 특전이 포함된 대규모 퀘스트를 공급한다. 그러면 그 특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청소 퀘스트를 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특전 내용은 호칭이나 업적 등으로 설계하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일용직과 같은 단기간 가치 생산은 사회 공헌을 하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그것이 기록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기에 가치 생산자도 보람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본다. 그것을 퀘스트 제도의 기록과 호칭과 업적 등을 통해 매꾼다. 또한 돈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가치 생산을 유도할 수 있는 돈 이외의 가치가 필요한데, 그것을 특전 등으로 대신할 수 있다. 게임에서는 이미 그런 식으로 특전에 대한 가치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게임과 같은 시스템에서만 적용되므로 멋대로 특전을 강요해봐야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퀘스트 제도 설계는 퀘스트 제도의 원리에 속하는 가치 생산과 학습은 관료가 주도하고, 퀘스트 제도의 구조에 속하는 퀘스트와 레벨 업은 게임 기획자가 주도하면 된다 보았다. 각자 이미 전문적으로 해온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과 같이 절대적 존재 탐구를 통해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을 모든 인문 계열에서 하는 것을 가리켜 인문 계열이 자연 계열의 현대 과학을 따라잡았다 규정하겠다.






4) 논제 발상


첫째, 성선설과 성악설.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가치의 절대성을 전제한 성선설과 성악설은 성립될 수 없다. 선과 악은 그냥 특정 가치에 이로우냐 해로우냐의 판단일 뿐이다.


둘째, 테세우스의 배. 디지털 기술에 의해 증명되었다. 우주의 법칙 내에 존재하는 디지털 기술의 가상 세계에서의 복제를 통해 원래 요소가 교체되더라도 동일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트롤리 딜레마.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존재에 속하면 존재 구조 유지에 적합한 쪽을 살리고, 존재에 속하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판단하면 된다. 존재는 존재 가치로 소속 여부를 결정하므로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결정되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전부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결정되게 된다.


넷째, 중국어 방. AI가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졌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AI는 지능은 가졌으나 의지가 없고 짐승은 지능은 낮으나 의지는 있다. AI가 짐승 수준의 의지만 가져도 인공 자아 획득이 가능하다. 인간이 감각 기관이나 호르몬 등을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으로 발상 된 것에 의해 자아 의식 의지가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설계하면 AI도 의지를 가질 수 있다.


다섯째, 오억년 버튼. 인간은 물리적으로 오억년을 버틸 수 없으므로 성립될 수 없다. 정신만 이동했다 가정하면, 시간은 인간의 지각 순서이므로 환경 변화가 적으면 시간 흐름을 일반적으로 느끼지 않게 되면서 오억년의 흐름을 지구에서와 같이 느끼지 않게 된다. 초기에는 시차 적응과 같이 적응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적응 이후에는 거의 흐르지 않는다 인식하여 오억년이라 하더라도 그리 길게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버튼을 누른 인간과 정신이 이동된 인간은 기억이 같을 때엔 같은 존재이나 기억이 달라지고 나서는 달라지는 비율에 따라 다른 인간이 되어간다.


여섯째, 돈과 행복. 행복은 결핍의 충족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 원리가 정상 작동할수록 행복하다. 물론 돈이 많을수록 그 원리를 작동하는데 수월하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돈이 많아도 행복 원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불행할 수가 있다. 


일곱째, 악법도 법인가. 악법은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성립될 수 없다.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선이나 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체제를 기준으로 권력 남용이냐 아니냐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의 존재 탐구를 하고 나면 인식 탐구의 문제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3. 사회


[사회: 1.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형태이다.]


문명 사회는 학문으로 만들어진 문명으로 가공된 인간의 공동체다. 그렇기에 학문의 문제는 학문으로 만들어진 문명으로 이어지고, 문명의 문제는 문명으로 가공된 사회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사회 현상이며 사회 문제다.


인식과 가치의 절대성으로 불합리하게 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절대성과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으로 사회를 합리하게 해야 한다. 단순히 특정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이는 비용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수준으로 의미 없다.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하기 위한 변화를 해야 한다고 하면 문화 핑계를 대며 거부하는 일이 있다. 그러는 바람에 문명화가 되지 못한 분야가 많다. 문명화가 되지 못한 바람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인간이 많을 것이다. 거기에는 변화를 거부한 인간도 있고 슬픔과 고통을 만든 인간도 있을 것이다. 절망스럽다. 세세한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냐 물을 수 있는데, 그게 학문이고 그게 문명이다. 이 모든 본질적인 문제는 학문이 발전하지 못한 것이고, 학문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한계였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알기 쉬운 기준을 토대로 변화를 해야 한다. 


수학은 자연수로 우주를 모방하였다. 그렇기에 디지털 기술의 0과 1의 조합으로 가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0과 1만으로도 가상 세계가 구축될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기준으로도 현실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바로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이다.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강제인가 자유인가 등과 같이 기준을 나눠 체계를 구축하면서 체제 합리를 해야 한다.






3.1 탐구


1) 통치 관점


사회는 주권을 가진 통치자가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통치자가 되어 재정립을 해야 한다. [주권: 1.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절대적 힘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독립성을 가진다.] 민주주의 체제는 개인에게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닌 주권이 있는 것이다. 개인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은 국가 의사를 결정한다는 것이고, 국가 의사를 결정한다는 것은 국가 통치를 하는 것이므로 모든 개인은 통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사회에 속한 개인은 통치자가 되어 통치 관점을 통해 통치 의지를 가지고 기본 권리나 선출이나 임명으로 결정된 권한에 따라 통치 의지를 실행한다. [통치: 1. 나라나 지역을 도맡아 다스림.] [다스리다: 1. 국가나 사회, 단체, 집안의 일을 보살펴 관리하고 통제하다.]


국가에서 통치 관점을 가지는 것은 국가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다. 통치 관점이 없는 민주정의 개인은 국정을 내버려두고 놀기만 하는 왕정의 왕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많은 주권자가 선거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통치 책임을 정치가에게 떠넘기고 통치 관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치에 있어 개인과 정치가를 구분하지 않겠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계급은 성립될 수 없다. 모든 개인은 주권자로 대등하며 선출과 임명 등과 같이 역할에 따라 권한이 달라질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개인은 모두 통치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통치 관점을 가지고 국가 통치 또한 개인의 이익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국가의 보호가 있어야 유리하다. 당연히 국가는 개인의 이익에 포함된다. 모든 주권자는 국가의 이익이 본인의 이익이므로,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에 국가의 이익도 포함되게 된다. 단지 그걸 모두가 자각하기는 어려우므로 절반 이상은 통치 관점을 가져야 한다. 통치 관점이 있어야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만 헌법에 위배되지도 않고 사회 구조도 유지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다.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개인과 집단에게 주권자로서의 통치 관점을 요구하겠다. 통치 관점으로 보면 절대적 이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사회 구조가 유지되고, 어떻게 해야 자유와 주권과 시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파악하고나서 그것에 맞는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종교 가치를 바탕으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유착, 담합 등을 하는 것은 통치 관점을 가지지 않은 결과다. 물론 그 집단은 이익이 될 수 있지만 통치 관점으로 보면 국가의 손해가 되고, 모두가 그런 식으로 되면 국가가 망가지면서 주권을 가진 모든 개인이 손해가 된다.


마냥 기업 이익만 말하며 나머지를 소홀할 것이 아니고 마냥 노동자 이익만 말하며 나머지를 소홀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통치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국가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노동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특정 누군가의 이익만 말할 것이 아니라 국가 통치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통치 관점이 없는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는가? 






2) 사상 해석


“If a guy has been hit by 700,000 bullets, it’s hard to work out which one of them killed him.”


아르헨티나 경제 몰락을 보고 경제학자가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총알 70만발을 맞고 죽었다면, 그 중 무엇으로 죽었는지 알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으로 가공되고 문명은 학문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학문에 속한 사상이 무엇인지 알면 근본적인 원인은 알 수 있다. 어떤 총알로 죽었는지는 몰라도 왜 쏘았는지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심리를 알면 인간이 일으킨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각국 경제 원리는 각국에 속한 국민의 사상을 전제로 만들어지게 된다. 산업 혁명 당시 영국의 경제 원리는 영국인 사상을 전제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제 원리를 사상이 다른 인간이 답습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건이 달라져 당연히 정상적으로 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의 경제 원리에 조건은 모든 개인의 욕망이다. 계획 경제는 계획하는 인간이 욕망을 가지고 생산을 지시하면 되지만, 시장 경제는 시장에 속한 모든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경제가 성장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욕망을 가질 수 없거나 가지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파탄난다. 


간단히 말해 아르헨티나는 욕망이 적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상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종교 가치는 금욕을 강조하기 때문에, 욕망을 정당화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금욕이 보편적이다. 종교 가치가 보편적인 상태에서 경제가 성장한 국가는 전부 욕망을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했다. 대표적인 국가가 자유로 욕망을 정당화한 미국이다.


아르헨티나는 자연 환경이 뛰어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일이 없다. 그런 것 자체가 욕망을 가질 이유를 적게 만든다. 자원의 저주라는 것이 있다. 자원이 많아 가치 성장의 동기를 갖지 못하면서 경제 성장력이 자원이 적은 국가보다 저조할 때를 지칭한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지만 욕망이 적어지는데 영향을 미치는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쇠퇴하면서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복지 지원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경제 성장에는 빈부격차가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가치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빈곤 해결과 가치 생산과 지식 학습이 연계되는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욕망을 가지게 하여 시스템이 동작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다보니 복지 비용은 비용대로 나가는데 가치 생산은 되지 않으면서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개개인이 욕망을 가져야할 이유가 적고, 욕망을 가진다 하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체계가 보편화되지 못했으니까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단순해보이는데, 본래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은 단순해도 파악하기 어렵다. 욕망이 나쁘다 여겨지는 사회에서 욕망을 강조하면 어떻게 들리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한국에서 미성년을 비롯한 전반적인 성 터부시로 저출산이 일어났으니 성을 권장해야 한다고 말할 때 반응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식에서 벗어나면 아주 간단한 사실도 인식하기 어렵고 수용하기도 어렵다.


이런 경제 쇠퇴의 구조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가 빈곤했을 때에는 생존하기 위해 욕망을 가지는 것을 크게 비판하지 않았고, 집단주의 영향으로 가치 생산이 강제되었었다. 그러나 국가가 부유해지면서 여유가 생긴 것인지 종교 가치를 강요하는 것으로 욕망이 절제되어버린 이들이 늘어나고,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가치 생산이 강제되지 않으면서 경제 둔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고 있다.


한국은 체제 가치로 성장했고 종교 가치로 붕괴하고 있다. 이는 북한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같은 민족인 북한은 비슷한 종교 가치를 공유하고 정반대의 체제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한쪽은 선진국이고 한쪽은 최빈국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든 것인지 너무나도 명확하다. 


흔히 욕망이 많은 인간을 비난하는데, 타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인간보다 본인의 욕망만 추구하는 인간이 경제 성장에 더 도움이 된다. 본인의 욕망만을 추구하되 공정하면 된다. 이제는 욕망을 절제시킬 것이 아니라 스포츠 경기하듯 공정한 욕망을 추구하여야 한다.






3) 인식 한계


모든 개인은 통치 관점을 가지되 인식 한계를 알아야 한다. 일반 인간은 물론이고 전문가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 계열조차 인간 심리 영역은 인식 탐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는 존재 탐구를 하고, 모든 개인은 존재 탐구를 하는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자연 계열의 과학처럼 여겨야 한다.


존재 탐구하는 자연 계열에서 인간 심리 영역은 인간 심리가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에 인식 탐구에 머무르는 일이 있다. 어떤 정신 의학자는 인간이 지능이 낮아 본인 말이 무조건 맞고 타인 말이 무조건 틀리다 주장한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지능이 만든 것이 아닌 가치의 절대성이 만든 현상이다. 그 논리라면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종교인은 머리가 나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종교인은 머리가 좋다. 단지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길 뿐이다. 이것은 한국 일상에서도 알 수 있다.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전부 지능이 낮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은 머리가 좋다. 단지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길 뿐이다. 되려 유능하기 때문에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알더라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심리학적 분석은 보편적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가공 상태를 전제했기 때문에 가치가 다르면 분석도 달라지게 된다. 인간 심리 관련 학문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공되기 이전의 상태를 파악하여 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러지 않고 유형, 성격 등과 같이 가공 상태로만 파악하는 것은 대부분 하늘 색을 색으로만 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처음부터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분하여 개념 체계를 전부 갖추고 심리의 모양, 성질, 구조, 원리 등을 전부 파악해야 한다. 


종교 가치를 전제한 심리학으로는 종교 가치에 어긋나는 것을 볼 때 비정상으로 판단될 수 있다. 즉 과거 종교의 이단 심문관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가치에 어긋나는 너는 이단이다!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 현상이 과거부터 동성애, 록 음악, 성 상품, 만화나 게임 등으로 있었다. 체제 가치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도 종교 가치로는 비정상으로 취급되면서 정상인을 비정상인으로 몰아가며 공격하는 것으로 체제가 더욱 붕괴되게 된다. 사회성도 마찬가지다. 종교 가치에 적합한 사회성이 강조되면서 체제 가치에 적합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이 비정상적이라며 공격받는 것으로 체제가 더욱 붕괴되게 된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종교 가치에 적합한 인권이 강조되면서 체제 가치에 적합한 인권이 비정상적이라며 공격받는 것으로 체제가 더욱 붕괴되게 된다. 이는 자유로워질수록 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체제는 더욱 더 붕괴될 것이다.


인문 계열에서는 종교 가치와 인식 탐구가 보편적이기에 일반 인간의 주장 또한 체제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주장일 확률이 높다.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면서 체제에 해로운 본인 생각을 강제하는 권력 남용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성 터부시가 있다. 성 터부시에 의해 도서관에 성교육 책을 빼라고 민원이 계속 들어오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여성이나 그림은 치우라는 의견이 계속 들어온다고 한다. 이런 체제에 맞지 않은 주장이 통치자인 대중에서 나타나면서 통치 대행자인 정부 관계자는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이제는 모든 개인은 체제 가치와 존재 탐구를 보편적으로 여겨야 하고, 존재 탐구를 하는 학문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






4) 체제 합리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정에서 왕정에 사회 선택된 종교 가치로 생활 양식을 갖추니 체제 불합리가 일어나면서 사회 구조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 그래서 체제 합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해야 할 동기가 적을 수가 있다. 기성 세대는 사회 은퇴를 하는 것으로 동기가 적을 수 있고 부유한 이들은 사회 이탈을 하는 것으로 동기가 적을 수 있다.


“나는 충분히 배부르고 변화를 원하지 않는데 변화하는 성가심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공통의 이익을 제시하겠다. 체제 합리를 통한 기술 발전에 따른 생존이다. 단순 물질적 이익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물질적 이익을 초월한 공동 목표인 불로불사다. 이것이면 기성 세대도 은퇴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사회 변화에 적극적이게 될 수 있고, 부유한 이들도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사회 변화에 적극적이게 될 수 있다. 


인간은 감각 기관으로 지각한 것을 바탕으로 인식과 가치를 느낀다. 그렇기에 몸이 다른 인간은 다른 인식과 가치를 가지면서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감각 기관으로 인식과 가치를 느끼고, 그것으로 결핍의 충족이 이뤄지면서 행복을 느낀다. 여기서 감각 기관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제대로 행복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이 잘 작동해야 하므로 최상의 행복은 불로불사에 해당하게 된다.


과거 진시황 같은 이들이 불로불사를 하지 못했던 것은 존재 탐구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존재 탐구를 하는 것으로 종의 한계를 초월해 급격한 발전을 한 현대 과학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불로불사는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인간의 늙음과 자연사란 개념을 지워버리겠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그건 사상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랬다. 가야할 길을 정하고 생각하다보면 도달한다.






5) 사회 변화


사회에는 유토피아 사회와 디스토피아 사회가 있다. [유토피아: 1.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디스토피아: 1.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 이러한 개념을 통해 예측한 사회상은 종교 가치를 기초로 하여 개인주의 체제에는 적절하지 않다. 흔히 종교 가치에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 결함이 있다거나, 자유에 의해 윤리가 지켜지지 않아 엉망이 된다거나 하는데, 그야 종교 가치로 보면 그럴 것이다. 


종교 가치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종교 가치는 집단주의 체제인 왕정에 사회 선택된 단순한 인식 탐구다. 종교 가치가 없던 세계를 전제하여 이치를 기초로 한 존재 탐구를 한다. 체제 가치를 기초로 하여 체제 합리를 이루는 사회를 통해 개개인이 행복할 수 있게 한다. 단순히 인간이 행복해할 것을 얻게 할 것이 아니라 원리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고 나서 얻게 한다. 그러면서 행복한 사회를 실현한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이것이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전제한 기본이다. 사회와 체제 구조가 존재의 절대성으로 판단할 수 없고 강제적이며 사회와 체제 원리가 가치의 상대성으로 판단할 수 있고 자유롭다. 만약 사회와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가 있어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요소인 개인을 재가공한다.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체제가 다른 이민자, 자발적 재가공 등이 있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각각 사회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체제 변화는 크게 존재 질서와 가치 제어로 구분한 것에서 개인, 집단, 생산, 소비, 관계로 나눠 정리하고 변화에 따른 분야의 대응은 역할에서 정리한다. 기술 변화와 환경 변화도 비슷하게 정리하고 분야의 대응을 역할에서 정리한다. 그렇게 하여 체제 합리가 이뤄지는 것으로 사회 체계가 정상 작동하면 그 외의 문제는 소소하다.






3.2 체제


1) 개인주의


인류 문명의 체제 변화의 본질은 집단 수장에서 모든 개인으로의 주권 이동이다. 주권이 이동하면서 왕정처럼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 민주정처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으로 사회 체계 정반대가 된다. 그럼에도 왕정의 사회 선택을 받은 종교 가치가 보편적으로 남아 질서가 되면서 가치 충돌이 발생했다. 체제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라고 해놨는데 질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억압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행해지면서 그러한 체제 가치가 훼손되게 되었다. 욕망이 억압되고 희생을 강요당한다. 교육에서는 미성년에게 연령별 의무를 전제한 교육을 하면서 사회 미숙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사회에서는 종교 가치를 강요하는 권력 남용을 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정치에서는 종교 가치에 영향을 받아 역할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유착과 비리가 넘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생산에서는 통치 관점을 잊고 기업이든 노동자든 국익을 고려치 않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학문에서는 인간 심리 영역은 인식 탐구에 머무르는 바람에 이러한 사회 현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가치 충돌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이치를 기초로 한 논리적인 체계를 갖춰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했음에도 인류가 종교 가치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체제에 맞는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법칙에 속하는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기초로 한 논리적인 체계를 갖춰 체제에 맞는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사회는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몇 가지 개념을 기초로 하여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자연수를 기초로 한 것처럼 사회도 아무리 복잡해도 자연수와 같은 우주의 법칙에 속한 것을 전제한다면 기초로 할 수 있다. 각각 개념이 도입된 분야는 복잡한 체계로 중심이 잡히지 않을 수 있으나 이치를 기초로 한 개념과 연결되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존재 질서, 가치 제어, 재가공과 같이 재정립을 정리하겠다. 존재 질서는 사회 체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 제어는 사회 체계나 개인 가치 관념의 변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재가공은 개인 논리 회로의 변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존재 질서는 존재 구조 유지가 강제력이 대부분 적용되어 강제할 수 있고, 가치 제어는 가치 추구가 강제력이 대부분 적용되지 않아 권장해야 한다. 체제에 맞는 질서 정립과 가치 제어만 제대로 해도 체제 변화에 의한 사회 문제는 대부분 해결된다. 거기서 일부 일반적이지 않는 인간, 주로 범죄자는 재가공을 통해 논리 회로를 다시 설계한다. 

체제 불합리를 인간으로 비유하면, 오른손을 오른쪽에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왼손이 나가서 얼굴을 치는 것과 같이 의도한 바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심할 때에는 해로운 결과가 나온다. 저출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높은 자살 줄이겠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 높은 자살로 이어진다. 불합리하니까 그렇다.


존재 질서와 가치 제어와 재가공은 일반적으로 국가 통치에 쓰이나, 모든 국민이 통치자인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모두가 통치 관점을 가지고 이러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므로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 관점에서 볼 때 일부 일탈에 의한 범죄보다 사회와 체제에 해로운 정책이나 제도가 더욱 심각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이 설령 특정 가치에서 정의롭다 여겨지는 관점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지라도 큰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해 개인의 특정한 충동 범죄보다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가 훨씬 해롭다. 더구나 충동 범죄는 자유를 보장하는 한 사라질 수는 없지만 잘못된 정책과 제도는 사라질 수도 있다. 


왕정 체제는 주권이 소수에게 있었기에 그들이 보이는 것만 보고 본 것을 기준으로 가치를 정한 것으로 질서로 하여 유지해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민주정 체제는 모든 개인에게 있기에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다 보고 존재를 질서로 하여 유지해야 된다. 그걸 전제하여 법, 정책, 제도 등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존재 질서로 진보하면 사회 전반적인 법, 정책, 제도 등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기원 년전 이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던 질서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 계열에서 이미 존재 탐구로 진보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하게 될 진보에 해당하게 된다. 이것을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 시작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의 주권을 보장하기에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존재의 절대성에 의해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가 되겠다 하더라도 존재에 속하는 이상 자유권은 강제로 보장된다. 가치의 상대성에 의해 존재를 해치지 않는 한 사랑은 물론이고 증오조차 자유롭게 보장된다. 이러한 체제의 체계를 학문에서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 질서와 가치 제어는 주권자가 통치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떻게 해야 사회에 속한 인간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어떻게 해야 사회에 속한 인간의 자유권과 주권과 경제권이 보장될 수 있는가?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윤리와 같은 사회와 체제와 무관한 것을 강제하는 특정 가치가 필요 없게 된다. 사회와 체제는 인간의 상대적인 인식과 가치로 판단하고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절대적인 존재로 판단하고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아무리 특정 인간이 당근 주스가 옳고 기름이 그르다 여긴다 하더라도 자동차에는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기름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존재 질서는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강제력을 정당화하고 강제로 실행한다. 존재 질서는 강제할 수 있으므로 강제력의 정당성만 확보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인간 생명이나 경제 시장과 같이 사회와 체제 구조와 요소로 당장 사회와 체제 구조에 필요한 것이기에 강제할 수 있다. 살고 싶으면 하기 싫어도 먹고 자고 싸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다. 직접적으로 강제하기 때문에 합의만 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치 제어는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아 가치의 상대성을 통해 자유를 보장하되 이로운 것을 행하도록 가치를 제어한다. 예를 들어 이성애든 동성애든 개인 취향으로 당장 사회와 체제 구조에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강제할 수는 없지만 이성애가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어 사회와 체제에 이로운 것은 명백하다. 단순히 살기만 하고 싶으면 반드시 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야 하는 일이다. 간접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은행의 금리 제어와 같이 어렵다.


가치 제어는 존재 질서를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즉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치를 제어해야 한다. 언론, SNS, 커뮤니티 등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것으로 가치를 제어할 수 있지만, 그것은 반체제에 해당하여 그것을 하지 않고서 가치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과감한 통찰과 섬세한 설계가 필요한 일이다. 금융계에서 물가를 조정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고심과 계산을 하는데, 그보다 더 복잡한 사회의 가치를 제어하는 것을 너무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2) 존재 질서


(1) 개인


I. 기본 가공. [교육]


기본 가공은 일반적으로 인성 교육으로 주로 가정에서 하여 가정 교육으로 불리고 학교에서는 도덕 및 윤리 과목에 해당하게 된다. [인성: 2.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 [가정 교육: 1. 가정의 일상생활 가운데 집안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주는 영향이나 가르침.] 간단히 말해 논리 회로를 만드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러한 논리 회로를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므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주의 체제 이후 제대로 된 학문이 없다.


기본 가공은 종교 가치를 바탕으로 가정 교육을 행하거나 도덕 및 윤리 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체제 가치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교육이 제대로 없었다. 이미 종교 가치로 기본 가공을 마친 후에 체제에 대한 설명을 하고 끝났다. 그렇기에 이 영역은 아직 학문화가 안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가공이 학문으로 체계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 가치로 기본 가공된 인간이 타인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거나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기본 가공은 간단하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한다. 복잡하고 상대적이면 교사도 학생도 하기가 어렵게 된다. 존재 탐구를 기초로 의무에서는 체제, 관계, 생산과 같이 사회와 체제에 필요한 것을 가공하고, 권리에서는 연령별 권한과 학문을 정리한다. 현재 주입식 교육으로 학문이 의무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에 필수적인 것 외의 학문은 의무가 아니다. 생산을 학습하고나서 권리 보장을 통해 욕망을 가지도록 유도하면 본인이 알아서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하고 싶은 학문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의무는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권리는 선택 과목으로 지정하면 된다.



존재의 절대성에 속하는 의무에서는 사회 생활에 필수적인 국어와 산수와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에 필수적인 체제, 관계, 생산을 이해한다. 의무 과목은 국어, 산수, 체제, 관계, 생산이면 된다. 국어와 산수는 기존에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체제에서는 자유권, 주권, 경제권 등을 이해하고 관계에서는 이성 관계를 비롯한 인간 관계를 이해하고 생산에서는 가치 생산을 이해한다. 


체제에서는 존재의 절대성과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을 통해 자유권을 이해한다. 존재의 절대성과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은 산수에서 사칙연산 이전의 자연수와 같은 개념이다. 존재의 절대성은 육체 구조 유지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가치의 상대성은 육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존재 외엔 자유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존재를 알면 된다. 어떻게 해야 육체와 사회와 체제와 환경이 유지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자유권 외에도 생존권과 주권과 경제권 등의 권리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체제를 이해한다. 교육 과정은 존재의 절대성을 기초로 육체, 사회, 체제, 환경 순으로 진행하면 될 것이다. 이런 체제 이해를 통해 체제에 맞는 기본적인 인성을 갖춘다. 지금까지 이런 것을 논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윤리를 주입되거나 사회에 강요되어 체득하였었다.


체제 이해 중 세계 확장과 위험 백신을 해두는 편이 좋다. 미성년의 사건사고는 대부분 세계가 지나치게 좁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권한을 말한다. 미성년은 권한이 적어 의무도 적기 때문에 성년과 같은 세계를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많이 수집한다거나 현장 체험이나 수련회를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세계 확장은 부모와 교사의 손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인간의 보호에서 다른 세계를 경험해봐야 한다. 현장 체험이나 수련회를 할 때 부모나 교사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업이나 군경에서 평소와 다른 권한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세계 확장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사건사고 치던 미성년이 평소에 권한이 없어 알 수 없었던 교정 시설에서 모범 죄수와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면 된다. 현장 체험에서 기업의 관리로 성년과 같이 가치 생산을 해보고, 자연 캠프에서 군경의 관리로 성년과 같이 먹고 자고 싸는 것을 직접 해본다.


위험 백신은 도박이나 마약과 같은 중독에 관한 백신이다. 현재 중독 자체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봐서 그에 대한 백신을 맞게 하지 않는 것으로 개인은 중독에 굉장히 취약한 상태다. 단순히 중독이 나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직접 중독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경험해봐야 한다. 도박 중독은 주식이 적절할 거라 본다. 주식 시뮬레이션을 체험하고 실제 주식도 참여하면서 이익에 의한 쾌감과 손실에 의한 절망을 경험해봐야한다. 물질 중독은 설탕이 적절할 거라 본다. 설탕에 푹 빠지게 한 뒤에 설탕 못먹게 해본다. 그것을 통해 결핍의 충족과 마약을 간접적으로 이해해본다. 


관계에서는 이성 관계를 비롯한 인간 관계를 이해한다. 모든 개인이 주권자로서 역할에 따라 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주권을 통한 대등한 관계가 있음을 이해한다. 이것을 통해 연령, 성별, 직위 등의 차별을 없앤다. 대등한 관계임을 이해하고 금욕주의를 말하며 일방적인 금욕을 강요하지 않고, 이타주의를 말하며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도록 한다. 과거 학부모가 촌지를 내고 학생이 욕망을 절제당하고 맞고 다녔던 것과 현재 교사가 부당한 배상금을 내고 욕망을 절제당하고 맞고 다니는 것은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에 의한 것이다. 역할에 따른 권한 차이를 파악하고 그 권한을 서로 존중한다. 권한을 넘어선 권력 남용이 나타나면 그에 따른 조치를 한다. 


그것을 통해 자유롭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그 중 이성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정조관념을 토대로 한 성 터부시는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한 부당한 간섭이다. 현재 체제에서는 권력 남용이 된다. 현재 저출산은 이성 관계 파탄에 의한 것이므로 인공 자궁이 나온다 한들 파탄난 이성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 이성 관계 파탄은 미성년 시기에 성을 터부시하며 이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주권자임을 이해하고 이성 관계를 막아서는 안 된다. 되려 권장을 하되 발정뿐만이 아닌 발정이 포함된 성애를 통해 서로를 사랑하게끔 해야 한다. 존재의 절대성을 이해하고 이성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최소한 고등학생 때까지 미성년 90% 이상의 이성 교제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출산한다. 무슨 저출산 원인에 이상한 것 찾는데, 그냥 대놓고 말해 사회 간섭이 없으면 미성년 대부분 알아서 결혼하고 출산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 그걸 사회에서 도덕이나 윤리를 말하며 종교 가치로 막아대니까 못한 것이다. 종교 가치로 막지 않고 체제 가치를 통해 대등한 주권자로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면 된다.


생산에서는 가치 생산을 이해한다. 일반적인 모든 가치 생산은 시장을 통해 거래되므로 시장을 이해하면 된다. 체제에서 경제권을 통해 시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노동 시장, 소비 시장, 금융 시장 등을 이해하면 된다. 공무원은 시장에 속하지 않는다 할 수도 있지만 합리적 기준을 위해 노동 시장에 속하게 한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므로, 시장을 보고 본인이 생산하고 싶은 가치를 결정하면 된다. 장래희망을 학문이나 학과로 찾게 하면 안 된다. 시장을 보고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 중 본인이 생산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해야 한다. 시장을 알고나야 시장성이 없는 것을 장래희망으로 삼을 때에도 본인이 각오하고 계속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학습하는 학문은 권리에 속하여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 



가치의 상대성에 속하는 권리에서는 연령별 권한과 학문을 이해한다. 연령별 권한에 대해 알아보자. 모든 개인은 주권자로서 역할에 따라 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반 개인과 대통령은 대등한 주권자이고 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는 미성년도 다르지 않다. 미성년은 사리분별이 성년에 비해 어렵다는 이유로 권한이 적은 상태다. 이를 보고 미성년은 보호받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 기준을 정해야 한다. 위험 구역에 출입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 개인에게 권한이 없는 것이다. 보호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의 대응 가능 여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수 있어 모순이 생기지만 권한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의 대응 가능 여부와 무관하게 기준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성년도 마찬가지다. 촉법 소년, 선거권, 성적 및 가치 생산 자기결정권 등과 같이 성년과 동등하지 못한 것은 보호 차이가 아닌 권한 차이다. 촉법 소년은 일방적 보호가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권한이 적은 이유거나 권한이 적어 발생하는 취약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마약에 의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 인간을 병원에 가둔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 방치하면 죽지 않겠는가? 위험 구역에 노출된 인간에게 이동의 권한을 빼앗는다 가정하자. 그럴 때 방치하면 죽지 않겠는가? 존재의 절대성에 의해 안전을 보장하고 식재료 등을 공급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와 같다.


촉법 소년은 연령을 낮추라 말을 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연령을 높이라 말을 한다. 둘은 사리 분별이 어렵다는 근거로 작동하는 것으로 어느 한쪽을 낮추고 높이는 것은 불합리한 모순을 부르게 된다. 마땅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상대적인 인식과 가치로 결정하니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 권한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2차 성징 시기가 10세에서 14세 사이라고 한다. 2차 성징 이후 인간의 육체는 대부분 기능이 작동하므로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를 기준으로 미성년 권한을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범죄와 같이 사회와 체제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는 촉법 소년은 2차 성징 최저 시작 시기인 10세로 지정한다. 성장이 다르고 정보 수집 양이 달라 누군가는 10세에 다 알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과거에도 성장이 빠르고 정보 수집 양이 많았던 미성년은 곧잘 범죄를 저질렀으나, 현재는 보편적으로 영양 공급이 충분해 성장이 빠르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 수집 양이 많아 미성년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확률이 늘어난 상태다. 사회가 변화했으므로 인식과 가치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닌 존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선거권은 체제에 속하는 것으로 모든 개인에게 강제되는 권리다. 이것은 최대한 빠른 시기에 할 수 있어야 한다. 10세에 교육에 관한 선거를 하고, 12세에 지역에 관한 선거를 하고, 14세에 모든 선거가 가능하면서 순차적으로 선거권을 이해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한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기능 유무로 결정되고 가치 생산은 그리 급할 것이 없으므로 2차 성징 최고 시작 시기인 14세를 기본으로 하되, 개인 의사에 따라 12세에도 허용되는 구조를 설계한다.


학문에 대해 알아보자. 학문은 의무에 속하는 국어, 산수, 체제, 관계, 생산 외에는 자유롭다. 생산에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알아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학교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그에 대한 계획을 도와주면 된다. 의무만 제대로 가공하면 그 외는 자유롭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휴학이 자유로운 것이 좋다. 애초에 모든 개인은 성장이 다른데 같은 시기에 같은 학습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적의 가공 형태를 갖춘다. 학문 지식뿐만 아니라 표정, 태도, 마음가짐, 예의범절, 젓가락질 등 전부. 의무는 교육자가 주도한다면 권리는 학생이 주도한다.






II. 장애 가공.


지적 장애나 성격 장애에 관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육체 보조 기구와 같이 지능 보조 기구를 통해 대응하면 된다. 뇌에 컴퓨터 칩을 심어서 지적 장애나 성격 장애를 극복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게 안 되면 다른 방식으로 해봐야 한다. 


육체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면 보조 기구 써야 하듯, 뇌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면 보조 기구를 써야 한다. 육체 장애와 달리 뇌의 장애는 내부 원리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그런 보조 기구 개념이 정착되지 못했던 것이지, 뇌 과학이 발전한 현재는 충분히 가능하다. 자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뇌의 지능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프로세스 동작이 가능하게 하면 된다.


현재 지적 장애의 치료는 심리 치료, 놀이 치료, 훈련 치료 등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뇌 기능 장애로 지적 장애를 가졌는데 뇌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행위로 치료가 되기 어렵다. 그러니까 내부나 외부에서 신호를 직접 입력한다. 내부에서는 뇌에 컴퓨터 칩을 심으면 될 것이고 외부에서는 도파민 등의 물질을 주입하거나 전기 신호로 자극을 주면 된다. 


보호자가 지적 장애인이 좋은 행동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물질을 주입하도록 하고 나쁜 행동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전기 신호를 느끼게 한다. 지적 장애인이 학교에서 자위 행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물리적 타격을 주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전기 신호로 교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평소에 나쁜 행동을 하면 전기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훈련하면 된다.


성격 장애도 마찬가지다. 성격 장애는 특정 상황에서 내부 물질이 분비되지 않아 이해나 공감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인데, 그것을 외부 물질 주입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당뇨병으로 인슐린 생산이 되지 않으면 외부에서 인슐린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지 정신과 육체의 차이일 뿐이다.


뇌에 칩을 심는다거나 외부 물질 주입이나 전기 자극이 불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해결 방법이 있는가? 개와 비슷한 지능을 가져서 교정되지 않은 개와 비슷하게 방치되다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 낫나? 아니면 보조 기구를 통해 사회에 어울리게 하는 것이 낫나? 종교 가치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 무엇이 사회와 체제에 적합한 것인지 생각을 해야 한다. 일반 인간에게 이러한 것이 부당할 수도 있지만 장애 인간에게는 이러한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III. 의식 상실.


의식 상실로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다. 의식 상실에 의한 대표적인 사건사고가 바로 음주 운전이다. 술을 마시고 정상적인 의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건사고를 일으킨다. 인간은 의식을 상실하면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것을 고려해 무의식적으로 사건사고를 일으키지 않도록 훈련을 한다.


인간은 성년 이후 자유가 보장되어 의무가 최소화되어 강제하기가 어렵다. 그 중에 의무를 통해 강제가 이뤄지는 것이 바로 운전 면허다. 운전 면허 취득과 갱신시 술을 마시는 인간은 술을 마시고 대리 운전이나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운전 면허 시험 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인간은 모두 술을 마시고 GPS를 장착한 상태에서 대리 운전이나 대중 교통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훈련을 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거나 앞으로 마시지 않을 거라 거짓을 말하면 음주 운전 발생시 가중 처벌을 한다.


음주 운전을 하거나 음주 운전 사건사고를 일으킨 인간은 강제로 위와 같은 훈련을 반복한다. 무의식적으로 술을 마시고 나서 대리 운전이나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한다. 인간은 의식 상실시 무의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의식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무의식적으로 또 음주 운전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음주 운전을 멈추려면 무의식을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운전 면허를 빼앗아도 무면허 운전을 할 수 있고, 차량을 빼앗아도 다른 차량으로 운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훈련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IV. 생존 훈련.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을 고려하면 재난 방지 대응을 해야 한다. 사건사고 발생시 개인이 패닉을 겪는 것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편적 사건사고를 훈련으로 경험해봐야 한다.






(2) 집단


I. 사회 구조


사회 구조는 집단주의 체제의 질서였던 종교 가치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대체로 지인 또는 약자를 위하여 이타적인 이유로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사회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약자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모든 개인의 이익을 위함에서 약자도 포함되어야 한다. 일방적 희생이 아닌 체제에 적합한 논리적인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정 제도가 설문조사에서 공정하단 의견이 있으므로 정당하단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 정도면 체제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다수가 지배나 복종이 공정하다 주장하면 정당해지겠는가? 체제는 사회의 생활 양식으로 개인의 의견과 관계 없이 체제에 적합하고 부적합한 것은 분명히 있다. 체제에 적합한 것을 하고 나서 거기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 기름으로 돌아가는 자동차에 친환경적인 당근 주스를 넣는다고 해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듯이 체제 가치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윤리적인 종교 가치를 주장한들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은 워낙 체제에 부적합한 것이 많아서 사회 전체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현상 몇 가지를 알아보자. 


국민 연금 - 수명에 따라 이익이 달라지고 추가 가입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제도로, 추가 가입자가 일방적 희생을 한다. 국민 연금이 있어야 노후가 보장된다는 말을 하는데, 없어도 국가 차원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차라리 합리적인 제도를 통해 절약한 비용으로 모든 개인의 노후 생존을 보장하는 게 맞다. 이런 제도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성립될 수 없다. 국민 연금은 점진적으로 연금에서 펀드로 전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건강 보험 - 건강 보험 자체는 사회 구조 유지에 적합하나 집단주의적이어서 낭비되는 금액이 지나치게 많다. 의사는 별 것 아닌 것도 비싼 보험처리하고 환자는 별 것 아닌 증상으로도 치료를 받는다. 개인주의적으로 접근하여 과잉 진료나 습관성 치료에 대한 기준을 정하여 가점이나 감점 등을 통해 합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시장 원리 훼손 - 도서 정가제, 단말기 유통 구조 개선법, 가산점 및 할당제 등과 같이 생산자를 위해 소비자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시장 원리를 훼손하는 제도는 체제에 부적합하다.


지하철 노인 무료 이용 - 노인과 그 외와 차별이 나타나고, 이용하는 노인과 이용하지 않는 노인의 차별이 나타난다. 지하철 노인 요금을 받되 그 비용을 전부 노인 복지로 쓴다고 한다면 명분도 챙기고 과도한 지하철 이용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콘텐츠 검열 및 규제 - 종교 가치를 근거로 개인의 자유권을 훼손하는 것으로 개인을 희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검열과 규제는 종교 이단 심문관의 판단이나 다를 바가 없다.


남성 징병제 및 스포츠 메달 징병 면제 - 모든 개인은 주권자로서 대등하다. 여성도 한 명의 개인으로 신체 검사를 통해 적합한 인간만 징병하면 된다. 스포츠 메달 징병 면제는 형평성이 어긋나는 특혜로 부당하다. 소급 적용은 할 수 없지만 점진적으로 사라져야 한다.


미성년 술담배 판매 책임 및 성매매 구매 책임 - 마약과 같이 판매자와 구매자 전부 처벌할 것이 아니면 책임을 어느 한쪽에만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 술담배는 성년도 해로운 것이 맞음으로 2차 성징 이후 전체 허용을 하던가 아니면 전체 금지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성매매 처벌은 종교 가치에 의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금지 자체가 부당하다.


노동 조합 -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은 체제에 부적합하다. 노동자 집단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호봉제 - 역할 수행과 기여도에 따라 이익을 얻어야 가치 생산을 많이 하는 인간이 희생되지 않을 수가 있다.


성범죄 유죄 추정 - 법 앞의 평등이 필요하다.


지역 활성화 - 특정 지방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할 수는 없다. 공공 기관을 이전했을 때 그 외의 다른 지역의 개인이 그곳에서 살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지역 활성화는 공공 기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닌 개인의 손에 달려 있다. 수도권 과밀화는 개인의 의사로 결정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린이보호구역치사상죄 - 책임 소재가 일방적이어서 미성년의 놀이 도구가 되었다.


토지 민주주의 - 토지 소유자가 적은 시점에서 토지의 이익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지역 대표는 온전한 민주주의 대표라 하기 어렵다. 


동성 결혼 금지 - 권장될 수는 없지만 금지할 수도 없다. 금지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과하게 침해한다.


전관 및 현관 예우, 유착, 담합, 관행, 인맥 취업  - 종교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 체제에 불합리한 태도다.


여성성 억압 - 여성 성적 대상화 및 상품화 금지는 여성 개인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다.


미성년 권리 - 보호를 명분으로 과하게 권리를 박탈하면서 사회 전체가 불합리하게 된다.


산업 비효율 - 산업 전기 요금을 과하게 적게 책정하거나 좀비 기업을 억지로 살리는 것은 그 외의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시장 원리와 무관하여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노동 경직성 및 불필요한 하청 - 하청에 하청으로 수수료만 추가되는 것은 구매자나 판매자 모두 손해에 해당한다. 불필요한 하청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도록 노동 유연화가 필요하다.


권위 집단 - 선호되는 역할임에도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공급을 늘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높여 능력자의 과밀화 현상을 부추긴다. 지금 의사는 지나치게 과하게 몰리고 있다. 다른 모든 분야를 희생시켜 이익을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시장을 고려해야 한다.


이혼 재산 및 양육권 - 재산 기여도가 없거나 적어도 일방적으로 반반이 되거나 양육권을 일방적으로 여성이 유리한 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가부장제 시기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관습에 불과하다. 


길 짐승 먹이 - 길 짐승을 좋아하는 인간과 싫어하는 인간은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대등하다. 윤리 핑계로 일방적으로 한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은 부당하다.


사생활 개인 정보 - 전체 안전 명분으로 지나치게 개인 정보를 많이 수집하며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이 외에도 전반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하나 같이 파탄나는 제도들은 그만큼 체제에 부적합하여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사회 복지가 불합리하여 사회 구조 유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 제대로 동작되지 못한다. 이런 제도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개개인의 손익과 무관하게 단순히 체제에 부적합할 뿐이다. 지금까지 모든 한국인은 당근 주스를 넣은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 뒤에서 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고생하고 있다. 기름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근 주스로 돌리기 위해 인간이 직접 밀고 있으니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이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분노해도 체제에 불합리하면, 그 고민과 걱정과 분노가 사회를 망친다. 그게 체제 불합리다. 이런 불합리로 누군가는 이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손해를 보게 된다. 육체가 붕괴하면 육체에 속한 모든 세포가 손해를 보듯 사회가 붕괴하면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이 손해를 보게 된다. 사사로운 손익이 아닌 단순히 공멸한다. 기준이 명확하고 알기 쉬워야 합리적인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으로 공존이 가능하다.






II. 사회 권력


역할에 맞는 권력 행사가 가능해야 한다. 현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권력이 강해서가 아닌 약해서이다. 개인 권력은 강할 수 있지만 역할 권력은 지나치게 약하다. 그래서 집단의 이익을 위한 유착과 비리를 저지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명분으로 권력자의 권력이 약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역할 수행에 필요한 권력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을 역할에 맞게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다른 문제다. 비리, 유착, 담합 등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역할 권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사회 운영 비용이 필요하다. 그것이 세금이다. 세금이 있어야 운영이 성립되므로 세금을 걷는 역할의 권력은 보장되어야 한다.






III. 사회 복지


사회 복지는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전부 고려해야 한다. 사회 복지는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 육체 밸런스를 사회 단위로 하는 것이다.







IV. 사회 안전


사회 안전은 역할에 따른 권한을 명확히하여 책임 소재가 분명해야 한다. 권한이 불분명하니 본인이 안전에 신경써야 할 범위를 정확히 몰라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권한에 강제력을 인식하기 위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치 생산 현장을 예로 들면 관리 측면에서 제대로 해도 생산자가 안전에 소홀하여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관리 측면에서 안전에 소홀하여 생산자가 안전에 신경써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대부분 안전 사고는 역할 권력 부족과 책임 소재 불분명과 안전 불감증에 의한다.






(3) 생산


I. 시장 구조.


현재 정부가 시장 관련해서 어려운 것은 합리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말 듣고 저말 듣고 하면서 진행하려고 하니 꼬이게 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시장 자체가 개개인의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가치의 상대성을 전제한 제도다. 존재의 절대성을 근거로 시장 구조를 유지하고 가치의 상대성을 근거로 시장 원리를 실현한다. 


예를 들어 가산점이나 할당제가 그렇다. 개인의 평등한 경제권은 시장 참여권에 속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스포츠 경기에 참여할 권리는 동등하나 경기 결과에 따라 얻는 이익은 다르다. 시장에 참여할 권리는 동등하나 시장 원리에 따라 얻는 이익이 다르다. 정부는 시장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지 시장 원리로 얻는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책을 통해 시장 참여 권리를 보장하면서 시장 원리를 실현한다.


출산 휴가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기업에게 전가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 맞지 않아 불합리하다. 정부가 책임지고 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그만큼의 세금을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걷는다. 물론 이러면 출산 휴가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개인당 보장할 수 있는 횟수를 제한하면 된다. 시장 원리 외의 손실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시장 원리를 실현한다.


모든 형태의 유착과 담합을 막는다. 모든 시장은 개인주의적으로 모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야 한다. 그것으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시장에는 연령도 인종도 성별도 없다. 오로지 개인과 역할과 용도만 있다. 인종, 성별, 지역 등으로 할당하는 것은 개인을 고려치 않은 전체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생존권은 복지로 보장하여 시장 원리가 동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야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가 된다.


시장 구조 유지를 위하여 가치 생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욕망을 부추기고, 지나치게 많은 부를 대물림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부의 대물림에 집착하는 것은 종교 가치의 흔적이다. 개인으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II. 노동 시장.


노동 시장은 노동력 임대 상품을 가진 상인의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을 말한다. 통상 기업이 사고 노동자가 판다.


개인의 경제권과 연결되어 윤리 경영을 말하기도 하는데, 종교 극단주의자가 윤리 경영을 하겠다고 하면 그게 옳아 보이는가? 오늘날 윤리는 그냥 종교 가치일 뿐이다. 차라리 체제 합리 경영이 적절하다. 


노동 시장에 있어 가산점이나 할당제는 집단에 적용할 것이 아니다. 강자인 흑인과 여성이 있을 수 있고 약자인 백인과 남성이 있을 수 있다. 노동 시장의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개인은 공정하게 경쟁을 한다. 


그 뒤에 존재의 절대성을 근거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가치 생산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인에게 추가적인 가치 생산 지원금을 지원하는 것을 통해 시장 경쟁력을 갖추도록 유도한다. 장애인과 같은 약자는 불쌍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강제로 지원하는 것일 뿐이다.






III. 소비 시장.


선분양제. [건설]


선분양와 후분양은 서로 장단점이 있는데, 선분양의 단점은 이미 팔았기 때문에 대충 짓는 것에 있다. 간단히 말해 QA와 QC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선분양은 구매자에 의한 품질 검사 의무화를 하고 나서, 계약한 품질에 맞지 않으면 계약 취소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IV. 금융 시장.


전세. [금융]


지금 전세 제도 은행 지원은 사실상 곗돈에 은행이 지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금융을 금지할 수는 없어도 권장할 수도 없다. 






(4) 소비


I. 소비 한계.


소비할 권리는 보장되나 사회, 체제, 자연 등의 존재를 붕괴시킬 수 있는 소비는 금지 된다.






II. 사회 한계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인신 매매와 심각한 마약은 허용될 수 없다.






III. 체제 한계.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해 토지 소유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시장 원리의 정상 작동을 위해 토지의 개인 소유는 적절치 못하다. 토지 소유는 태양 빛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하게 자연에 속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태양, 빛, 공기, 토지 등과 같은 자연은 개인 소유가 한정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소유한 것을 강탈하는 것은 할 수 없으므로 점진적으로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여 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은 생산을 통해 시장이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IV. 자연 한계.


자연 구조 유지를 위해 천연기념물을 소유 및 매매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현재 자연은 생명체가 살기 적합한 상태이므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과하게 파괴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시장에서의 자연 한계는 소비하지 않음을 말한다면 지구 환경에서의 자연 조작은 조작함을 말한다.






(5) 관계


I. 관계 논리.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질서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논리는 이치로 이끌어가는 과정. 이치는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와 체제. 즉 종교 가치를 기초한 자연법은 비논리에 해당한다. 자발적 성매매나 성관계 영상 판매하는 것을 처벌하는 것은 종교 가치를 근거로 한 것인지 체제 가치를 근거로 한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공법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속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이 당장 대응이 불가능하여 강제력을 행사해야 하는 부분을 다뤄야 하고, 사법은 기본적으로 가치에 속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이 당장 대응이 가능하여 자유롭게 손해에 대한 배상을 바라는 부분은 다룬다. 공법과 사법을 구별하는 것을 긍정하는 측이 있고 부정하는 측이 있는데, 존재의 강제와 가치의 자유로 구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존재 질서에서는 보통 공법을 다룬다. [공법: 1. 국가나 공공 단체 상호 간의 관계나 이들과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 공법에는 헌법, 행정법, 형법, 소송법, 국제법 등이 있다.


가치 제어에서는 보통 사법을 다룬다. [사법: 1. 개인 사이의 재산, 신분 따위에 관한 법률관계를 규정한 법. 민법, 상법 따위가 있다.]


법원은 체제를 기초로 한 헌법과 헌법 테두리 안에서 입법된 법률을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기준은 존재에 속하고 수단은 가치에 속한다. 기준은 강제력이 있으나 수단에는 강제력이 없으므로 개인이 기준에 속하는 사회와 체제 구조 훼손이 명백할 경우가 아니라면, 강제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에는 주권을 가진 개인이나 권한을 가진 수사 기관이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 강제력을 통해 당사자를 법원에 강제로 불러 법관의 판단으로 존재 훼손일 경우 그에 대한 양형 판단이 이루어지고, 존재 훼손이 아닐 경우 강제력을 행사한 개인이나 수사 기관에 패널티가 부과된다.



존재 질서에서 법은 기본적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명확한 것에 속하는 것을 다룬다. 사회와 체제 구조에 속하는 생명권, 자유권, 주권 등이 그러하다. 거기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당장 대응이 불가능한 것을 다룬다. 대응이 가능함에도 형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국가 형벌권의 과잉 행사가 될 수 있다. 간통죄를 처벌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기에 간통죄는 폐지되었다. 


자유권은 주권에 의해 모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되므로 특정 개인의 일방적인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 모욕이나 명예훼손이 그렇다. 이 중 대응 가능한 모욕이나 명예훼손은 통상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거나 사법에서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응 불가능한 모욕과 허위 사실 명예훼손은 공법에서 고소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명예훼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과 허위 사실 명예훼손이 있는데, 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는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에 속하여 사법에서 다루는 것이 합리적이고, 허위 사실 명예훼손은 허위는 판단할 수 없이 잘못이 분명하므로 존재에 속하여 공법에서 다루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공법으로 판단하는 것이나 허위 사실 명예훼손은 사법으로 판단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II. 존재 신용.


존재 탐구, 존재 유지, 존재 신용의 공통점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하고 탐구한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 생각하고 유지한다. 거기에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하고 관계를 맺는다.


존재 신용은 반드시 신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관계를 맺는다. 경찰은 법을 준수하고 시민을 보호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신용한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신용한다. 건설사는 튼튼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신용한다. 이런 신용을 통해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특정 절차를 생략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절약한다. 만약 신용이 깨지면 경찰을 의심하고 의사를 의심하고 건설사를 의심하면서 그에 따른 추가적인 절차가 생기는 것으로 추가적인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일부 의사가 대리 수술을 하여 의사와 환자 사이에 신용이 깨지니 CCTV라는 추가적인 절차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발생한 사회적 비용 손실은 얼마인가? 대리 수술을 맡긴 인간은 그만한 손실을 만든 것이다.


존재를 믿고 절차를 생략한다. 절차를 생략하며 사회적 비용을 절약한다. 절차 생략에 따라 절약한 비용을 계산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신용을 악용하여 부당 이익을 챙긴 이들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종교 가치로 존재 신용을 훼손하여 추가적인 절차로 추가적인 사회적 비용 등을 낭비하게 한 인간을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감싸지 말고, 비용 낭비에 대한 조치를 취하여 신용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용 훼손 방치해놓고 추가적인 절차가 나오자 그제서야 대안 없이 무작정 반발하는 것은 부당하다. 신용을 되찾기 위해서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추가적인 절차가 싫다면 손실을 각오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III. 공적 평등.


인간 관계에 있어 공적 관계는 강제할 수 있다. 갑질 꼰대질을 막고, 법 앞에 평등하게 판단한다.






IV. 범죄 수익.


현재 범죄 수익은 시스템 특성상 금액이 클수록 처벌이 낮아질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범죄 수익이 크면 보통 이익을 혼자서 얻는 일이 드물다. 범죄 수익을 조금이라도 얻은 인간을 전부 따로따로 접근해야 한다. 머리뿐만 아니라 꼬리를 대량으로 잘라버리면 이후에 꼬리가 머리를 따르지 않게 되면서 동일 범죄가 줄어들 수가 있다. 머리만 자르면 꼬리에 의해 또 다른 머리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지만, 꼬리도 대량으로 자르면 또 다른 머리가 그만큼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범죄 또는 범죄 방기는 종교 가치인 윤리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하는데 체제 가치로 보면 부당하다.






3) 가치 제어


(1) 개인


I. 존재 가치.


존재 가치는 존재에 속할 가치를 말한다. 존재에 속할 가치가 있어 존재에 속하게 되면, 존재 유지를 위한 강제력이 정당화된다. 특정 존재가 일정 이상 가치가 높다 느껴지면 존재 질서의 강제력 개념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존재 유지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 국가든 회사든 가족이든 인간이든.


존재에 속할 가치가 없어 존재에 속하지 않게 되면, 존재 유지를 위한 강제력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특정 존재가 일정 이상 가치가 낮게 느껴지면 존재에서 이탈한다. 국가는 국적 포기를 하고 회사는 퇴직을 하고 가족은 가출을 하고 인간은 자살을 한다.


존재 가치에 의해 체제가 바뀔 수 있게 된다. 왕정에 속할 가치가 없다 느끼면 혁명을 일으켜 민주정 체제로 바꿀 수가 있다.


존재는 존재 가치에 따라 우선 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가 아니더라도 통상 개인이 가장 우선되나 윤리 등의 이유로 가족이나 국가가 우선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이 우선되면서 계약에 따라 사회 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가치의 상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을 통해 성립된다. 존재의 절대성은 존재 가치에 의해 성립된다. 존재 가치는 가치로 가치의 상대성에 속한다. 즉 존재의 절대성은 가치의 상대성을 통해 성립되게 된다.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 의지.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 의지가 된다.


존재에 속할 가치는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경우에는 누구는 외모가 되고, 누구는 학력이 되고, 누구는 돈이 된다. 외모일 경우 외모를 지적받거나 외모가 늙어진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용어인 아저씨나 아줌마에 불쾌하게 느끼게 된다. 학력일 경우 학력이 다른 학교가 같은 평가를 받으면 불쾌하게 느끼게 된다. 돈일 경우 재산이 다른 인간이 같은 평가를 받으면 불쾌하게 느끼게 된다. 극단적으로 가면 외모가 좋지 못해지거나 입시에 실패하거나 재산을 잃으면 죽는다. 


자살을 막으려면 자살을 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 아니라 존재에 속할 가치가 있다 여기게 해야 한다. 특정 가치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로 존재에 속할 가치를 느껴야 한다.



존재는 존재 가치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유지되지 못하게 된다. 본인의 존재 가치 레벨이 100이라 여길 때, 100 이하의 환경일 때에는 결핍이 충족되지 못하여 불행하고 100 이상일 때에는 결핍이 충족되어 행복하나 동시에 존재 가치 레벨도 오르게 된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생활비를 월 100만원 쓰다가 80만원 쓰면 불행해지고 120만원 쓰면 행복해하나 기준 또한 120만원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데도 과거보다 불행한 것은 존재 가치 레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 가치 레벨과 행복의 원리인 결핍의 충족에 의해 돈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고 아무리 많아도 불행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히 돈뿐만이 아니라 환경에 속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명예, 권위, 우위 등 평소보다 낮으면 불행해지고 높으면 행복해지나 기준 또한 높아진다.


연령 차별을 보면 알기 쉬울 수 있다. 장유유서 가치에 영향을 받은 인간은 연상이 연하에게 우대 받는 것이 당연하다 느낄 것이다. 존재 가치 레벨이 연하에게 우대 받는 만큼 높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하에게 반말을 들으면 존재 가치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 것으로 불행해지게 될 수 있다. 이는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나게 된다. 우대 받다가 우대 받지 못하면 존재 가치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 것으로 불행하게 된다. 과거 신분제의 귀족과 제국주의 자본가, 현재 PC주의의 흑인과 여성주의 여성 등이 그럴 수가 있다.


존재 가치 레벨 개념을 파악하면 성장과 행복 제어가 가능해진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 레벨을 높이면 그 레벨에 다다르는 환경이 갖춰질 때까지 불행할 수 있지만, 그 레벨에 다다르는 환경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여 성장할 수 있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 레벨을 낮추면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이 쉽게 갖춰지면서 행복할 수 있지만, 성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성장하지 못할 수 있다. 욕망이 연료라면 존재 가치 레벨은 도달선이다. 인간은 욕망이 없어도 성장하지 못하고 존재 가치 레벨이 낮아도 성장하지 못한다.


존재 가치 레벨의 성질상 개인이 성장과 행복을 모두 하기 위해서는 성장하기 위해 무조건 존재 가치 레벨을 높일 수도 없고, 행복하기 위해 무조건 존재 가치 레벨을 낮출 수도 없다. 존재 가치를 제어하여 필요할 때마다 레벨을 높였다 낮추면 성장과 행복을 둘 다 할 수 있게 된다. 성장이 필요할 때에는 “나는 이 정도의 환경에 맞지 않으니까 성장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야 해” 라고 생각하면 되고, 행복이 필요할 때에는 “나는 이 정도 환경이 맞으니까 만족하며 살아야 해” 라고 생각하면 된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다른 사람의 생활 환경을 보면서 존재 가치 레벨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데 욕망은 윤리에 의해 잘려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점은 굉장히 높은데 연료는 지나치게 부족하면서 보편적으로 불행하면서도 성장도 못하고 있다. 존재 가치를 제어하면서 욕망을 통해 성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I. 결핍 충족


행복의 원리는 결핍의 충족이다. 모든 결핍의 충족이 아닌 정당한 결핍의 충족이다. 허기진 상태를 불행하다 느껴도 부당하다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허기를 충족하면 행복을 느낀다. 목졸린 상태를 불행하다 느끼면서 부당하다 느낀다. 그래서 산소를 충족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목졸린 상태를 부당하다 느끼지 못하면 목을 졸랐다 푸는 것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게 보통 SM에서 M에 해당한다.


존재 가치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으로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 환경이 정당하다 느꼈기 때문이고, 존재 가치 레벨에 상응하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을 때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그 환경이 부당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행복은 결핍의 충족이나 결핍의 정당성과 부당성과 별개로 지루하여 불행할 수 있다. 이는 결핍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도한 도박과 마약은 행복 원리를 망가트려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일부 한국 여성이 환경에 비해 감사 지수가 낮고 불안 지수나 피해 의식이 높은 것은 여성주의 사상과 보호자가 존재 가치 레벨을 지나치게 높이면서도 환경이 부당하다 지속적으로 주입했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이 대중 교통 이용시 좌석이 떨어지게 되면 동행자와 같은 자리에 있기 위해 타인에게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일이 있다. 이럴 때 바라는 것이 생기면서 결핍이 발생한다. 타인이 자리를 양보하면 결핍이 충족되면서 행복을 느낀다. 타인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양보 거부가 정당하다 느끼면 수긍하고 넘어가지면 부당하다 느끼면 억울하고 화가 날 수 있다. 이타주의에 의해 타인이 본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게 되면 희생 거부를 부당하게 느낄 수가 있으면서 황당한 불만이 나오게 된다.


존재 가치를 제어하여 성장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큰 기준으로 제어하는 것에 해당한다면, 그 외 결핍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제어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보통 작은 기준으로 제어하는 것에 해당한다. 


한참 학습이나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것에 의해 발생하는 결핍을 부당하다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그러면 학습이나 일이 멈추거나, 끝이 나서 결핍이 충족되어도 불행하게 된다. 이것을 정당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잘 안될 경우에는 부당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도 제어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부당함에서 벗어난다. 현실 도피다. 보통 목표가 큰 인간은 존재 가치 레벨이 높아 일반 환경의 결핍은 부당하게 느끼는 것으로 불행하게 되는데, 큰 목표를 주관적으로 크지 않다고 여기거나 현실 도피로 부당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것을 타인이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으나 본인이 제어해서 적절히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일상적인 때에도 결핍의 정당 부당은 적용된다. 깜빡 잊은 일에 의해 되돌아가는 상황이 생길 때 그것을 정당하다 느끼면 별 감정이 없지만 부당하다 느끼면 짜증과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연애 등의 인간 관계에서 다른 인간의 말에 의해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결핍을 부당하다 느끼게 될 수가 있다. 특정 인간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도시락을 싸는 것을 본 다른 인간이 그것을 부당한 것이라 강요할 수 있다. 그러면 도시락을 싸는 동안 생기는 결핍을 부당하다 느끼면서 그런 애정의 행위가 사라지게 될 수 있다. 과거에는 남성이 여성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 주위에서 부당하다 강요하여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 주위에서 부당하다 강요하여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 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면 온전한 행복도 얻을 수 없다. 가치 제어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III. 추가 가공.


성년 이후 가공을 다룬다.


인간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가공하여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IV. 가치 충돌.


인간의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존재와 가치로 기본적으로 나눈다. 표현의 자유는 발언권에 속하여 통상 직접적인 물리적 손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존재보다는 가치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에 속하여 명예 또한 존재 유지에 중요하게 되기 때문에, 명예훼손도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명예훼손은 판단할 수 있으므로 가치에 속하기 때문에 존재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허위사실 명예훼손은 허위사실의 경우 잘못되었음을 판단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므로 판단하지 없는 것에 해당하여 존재에 속하게 될 수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 사실이면 대부분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며 손해가 크다 판단되면 민사에서 해결해야 하고, 거짓이면 거짓의 경우가 매우 분명하면서 손해가 크다 판단되면 형사에서 해결한다.



국가보안법. 사회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남아있는 불필요한 법이다. 체제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공산주의 같은 가치도 이해 못하고 인식 탐구에 머무른 비과학적인 사상을 주장할 수가 없다. 북한 체제를 옹호할 수도 없다. 진보를 자칭할 거면 최소한 학문적인 의미로 해야 한다. 민족주의든 뭐든 종교 가치를 근거로 주장하는 게 진보일 수가 없지 않는가? 체제 이해를 하고 나면 분단되어 있다 하더라도 필요 없는 법이다. 체제 이해 후에 불필요한 법을 없애고 체제 합리를 해야 한다.



인간 외의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인간 외는 통상 존재에 속하지 않으므로 존재 유지를 위한 강제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짐승, 시신, 태아 등이 바로 그렇다.


짐승은 사회 구성원에 속하는지 아닌지 결정하여 판단한다. 짐승은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존재에 속하지 않음이 분명하여 짐승 보호를 강요하는 것을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시신은 이미 인간이 아니므로 각자 알아서 예우가 적절하다. 시신은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에 존재에 속하지 않음이 분명하여 시신 보호를 강요하는 것을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태아는 인간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가치로 판단하여 결정한다. 태아는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에 속하여 집단에 따라 강제할 수도 있다.



태아가 인간이라면 존재에 속하여 낙태를 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 있다. 태아가 인간이 아니라면 존재 속하지 않아 낙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 있다. 그런데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에 따라 결정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나는 자아 자각 이후 인간이 된다는 입장에서 자아 자각이 가능한 지적 장애 인간은 인간, 자아 자각이 불가능한 식물 인간이나 태아는 인간이 아니라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낙태는 타당하다 본다. 그러나 시신에게도 예우를 갖추는 것을 고려하면 태아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대상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었던 존재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 마땅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 단순히 임신 중지라 부르는 것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일부 낙태를 남성의 자위로 비유하는 인간이 있기도 한데, 생명의 가능성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 성립된다.


만약 태아가 인간이라면 존재에 속하여 낙태를 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가 있으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복지 정책 등이 들어가야 한다. 즉 임신한 여성은 두 명 이상의 복지 비용을 받을 권리가 생기게 된다. 


어떤 존재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을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타인에게 가치를 강제할 수 없지만 존재는 절대적이므로 타인에게 존재를 강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짐승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해당 짐승을 존재에 속하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그만큼의 정책적 지원을 통한 재정 손실이 발생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짐승에게 주권을 줄 것이 아니면 보호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강제할 수 없다. 이는 가상의 존재도 포함된다. 






(2) 집단


I. 성애 가치.


성애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권장할 수는 있다. 이성애를 권장해야 출산이 이뤄지면서 사회 구조가 유지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 출산은 사회 구조 유지에 필수적이나 당장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가치를 제어해야 한다. 


PC가 유행하는 미국에서 신세대는 동성애가 늘었다고 한다. 성애가 취향인 상황에서 동성애 가치가 권장되면서 늘어난 것. 성애는 자유지만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이성애가 권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존재와 가치가 공존된다. 



자연 상태 + 영양 충족 = 고출산이나 생존이 힘들다.

왕정 + 종교 가치 = 종교 가치에 의해 저출산이나 강제로 출산율을 유지한다.

민주정 + 종교 가치 = 종교 가치에 의해 저출산인데 자유로 출산율도 유지하지 못한다.


현재 한국 저출산은 대략적으로 위와 같은 것으로 발생했다. 자유롭게 되었는데도 종교 가치로 미성년의 성을 터부시하면서 성에 관해 미숙하게 성장하는 것으로 저출산이 발생했다. 현재 20대가 60대보다 성관계를 덜한다고 한다. 수백 년에 걸친 성 터부시의 결과다. 60대는 과거 강제로 이성 관계를 배웠는데 20대는 강제하지 않으면서 이성 관계를 배우지 못했다. 강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성 관계도 불가능한 것이 현재 한국이다. 그러니까 출산율이 낮고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저출산 대책에 집, 출산 등을 하는데, 그것은 성애 가치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 가치를 제어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성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거기에 돈을 쏟아봐야 의미가 있겠는가?



성교육에서 성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자연 계열 지식만 가르치는 것은 그동안 이성 관계는 집단의 의사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발정과 성애는 다르다. 발정은 본인의 쾌락에 주로 가치를 느끼고 성애는 인간 관계에서 쾌락을 포함한 다양한 것을 얻는 것에 가치를 느낀다. 발정을 배제하서도 안 되지만 발정만 가져서도 안 된다. 발정을 배제하면 성애가 성립되지 못하고 발정만 가져서도 성애가 성립되지 못한다. 성적 대상화 반대는 발정만 하는 것을 보고 반대하면서 발정을 필요로 하는 성애도 막아버리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그러면서 이성 관계가 파탄난다. 성적 대상화는 필요하다. 발정만 하는 것이 아닌 성애로 이어지도록 가치를 제어하면 된다.


성적인 것을 언급하기만 하면 더럽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거 자체가 잘못되었다. 성은 죄가 아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신성시할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집단이 개인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북한은 극빈으로 저출산이 일어나는데 그것보다 낮은 한국 출산율을 보고도 단순 경제 원인이라 보이는가?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정조관념 등과 같이 개인의 의사로 하는 자유 연애 가치가 굉장히 낮았던 국가였음을 상기하자. 한국 저출산을 보고 정치가 탓을 하는데,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다. 윤리 문제 -> 학문 문제 -> 인식 일탈에 의한 인간 한계였던 것으로 이어진다.


14세 이후 미성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모두 보장. 18세 이전에 모든 개인이 외모를 가꾸는 등을 통해 성적 매력을 키워서 이성 교제와 성관계를 경험한다. 강제할 수 있는 미성년 시기에 체제, 관계, 생산을 모두 알게 해야 한다. 성년이 되고 나서 대부분이 결혼이나 동거를 한다. 결혼과 동거를 하더라도 출산은 강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산에 의한 사회 진출 불가를 걱정할 것이 아니다. 되려 같이 살면 시간과 자원 효율을 통해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가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


이건 최소한의 조건이다.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구조를 유지하려면 성애를 막아서는 안된다. 흔히 성년이 되면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한다 말하면서 미성년 시기 꾸미는 것과 성을 터부시하는데, 실제 안하잖는가? 이것은 가치에 의해 나타난 인식에서 벗어난 영역이다. 윤리는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며 강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성년 성애를 가치 제어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그러니까 출산율이 0.7까지 떨어져도 본질적인 원인조차 모른다.


성애를 통해 관계가 이뤄지면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존재에 속할 가치를 유지해야 존재에 속하면서 존재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부부가 되었다 해서 꾸미는 것을 끝낼 것이 아니라 꾸미면서 서로가 부부 관계에 가치를 느끼게 해야 한다. 


임신이나 출산도 절대적 이익을 얻기 위해 과하게 힘들다고 여성들에게 주입하지 말길 바란다.



저출산에 관해서는 이미 늦었다거나 적정 인구수로 가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저출산 현상은 성애 가치 제어 실패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인공 자궁이나 불로불사를 통해 출산율을 높일 필요가 없어지더라도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 관계를 위해 성애 가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 제발 좀 썩은 종교 가치에 휘둘려 서로를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는 사회가 되자. 


사랑하기 싫거나 어렵거나 늦은 인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서로가 미워하는 사회가 유지되길 바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누구든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사랑하는 상대를 찾길 바란다. 국제 결혼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그렇게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 미워하는 사회가 유지되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는 상대적이기에 강제할 수 없지만, 통치 관점으로 가치를 제어하고 특정 가치를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자유를 훼손하는 것으로 자유 가치를 낮추는 주장이나 이성애를 훼손하는 것으로 이성애 가치를 낮추는 주장 등을 비판할 수 있다. 자유의 경우에는 실제 실행하여 자유 훼손을 하면 존재가 되어 강제로 막을 수 있게 되고, 주장만 하는 경우에는 가능성으로 가치가 되어 자유롭게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과거 가부장제에서는 남성은 일 여성은 가정이란 역할로 권리와 의무가 정해져 있었는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권리 신장이 되면서 그런 고정 역할이 폐지되는 것으로 합리적 기준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준 없이 권리만 주장하는 바람에 서로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II. 개인 이익.


모든 집단은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국가와 같이 모두가 주권을 가지는 것으로 국가 이익이 개인 이익이 되거나 기업과 같이 시장 제도를 통한 계약 관계로 계약 준수가 개인 이익이 되게끔 해야 한다.


집단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정당이든 노동 조합이든 집단 이익이 아닌 개인 이익만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권리가 보장된다.집단의 손해가 된다 여겨지면 배신자라 말하며 공격하지 않는가? 그러니 내부 고발도 안되는 것이다.






III. 매체 유행.


매체가 유행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체제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갖추도록 가치를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체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가치 제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 의지와 정부의 법, 정책, 제도로 해야 한다.


매체에 대한 제재는 존재를 해치는 거짓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IV. 모범 집단.


모범이 될만한 집단을 통해 다른 집단을 체제에 맞게끔 한다.


모든 개인은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집단에 속하면 집단의 흐름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집단이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가치 제어를 한다.






(3) 생산


I. 가치 장악.


윤리 개념 체계로 가치 장악 개념을 이해해보자.


첫째, 모양. 질서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모양이 질서와 같아 윤리에 의한 생활 양식이 나타난다.


둘째, 성질. 절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 가치에 해당하여 윤리 성질상 가치 강요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윤리 모양인 질서와 윤리 성질인 절대성에 의해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요하며 가치로 이뤄진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전체주의 현상이 나타난다.


셋째, 구조. 계층별로 구조가 이루어져있다. 하나, 특정 집단의 가치 장악. 둘, 장악한 가치의 절대성 주장. 셋, 힘에 의한 사회 선택. 넷, 가치의 사회 장악. 특정 집단이 장악한 절대적 가치가 힘에 의한 사회 선택으로 사회를 장악하게 된 것을 가리켜 윤리라 부른다. 윤리가 된 과정이 구조로 남아 형태를 유지한다. 가치 장악, 가치의 절대성, 사회 선택, 사회 장악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구조가 붕괴한다. 예를 들어 반말 문화가 퍼지면 장유유서 구조가 붕괴하면서 점점 윤리가 아니게 된다.


넷째, 원리. 선과 악이다. 절대적이라 주장하던 상대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만들면서 윤리를 성립시킨다. 선과 악으로 나뉘어 가치가 다른 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마녀, 이교도, 빨갱이, 반동, 우월주의자, 차별주의자 등으로 공격한다. 여기서 신비나 학문 등과 같은 특성은 가치의 절대성을 공고히 할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 전쟁, 이념 전쟁 등 모든 가치에 의한 분쟁은 윤리 원리상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윤리 질서 안에서는 선과 악의 원리가 굉장히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윤리 질서 밖에서는 선과 악의 원리가 불안정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다섯째, 동력. 윤리 이용 인간은 이익 추구를 동력으로 삼고, 윤리 이용 대상은 현실 도피를 동력으로 삼는다. 만능 도깨비 방망이다. 이 가치를 추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이익을 얻고, 그런 말을 듣고 현실 도피한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가치의 절대성은 인식 탐구 결과로 다른 인식 탐구 결과처럼 맞을 때도 있지만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절대적으로 여기던 가치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을 때에는 가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억눌러왔다.



현재 인류에서 보편적으로 사회를 장악한 가치인 윤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 보편적 종교는 이런 식으로 장악한 가치로 사회 장악을 했다. 사회 질서를 위한 금욕, 희생, 공경 등과 현실 도피를 위한 사후, 천국, 환생 등의 가치를 만들어 장악하고, 장악한 가치가 힘의 의한 사회 선택을 받는 것으로 사회를 장악한다. 종교 가치에 이로운 것을 선이라 부르고 해로운 것을 악이라 부르며 종교 가치에 이로운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여 가치를 절대적으로 만들고 사회 장악을 유지한다. 장악한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여 질서가 되면서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세를 불려나간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고 원하는 대로 살게끔 조정한다. 금전적 이익을 포기하고 자선과 같은 가치를 실행하면서 가치 장악과 사회 장악을 유지한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지배한다. 


금욕과 희생과 같은 결핍을 윤리로 만들어 강요하는 것으로 천국에 가서 행복하고 싶다는 것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천국과 같이 반드시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믿는 바람에 결핍의 충족이 행복의 원리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절대성은 존재 가치로 결정되므로 존재에 속하면 존재, 존재에 속하지 않으면 가치다. 그렇게 하여 죽음조차도 가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일부 불법 종교에서는 죽음 가치를 장악하고 장악한 죽음 가치의 사회 장악으로 사회에 속한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가치 있다 여기고 죽게 만들 수 있다. 



금욕주의, 이타주의, 종교 가치 등 모든 가치는 단순히 사회를 장악한 가치일 뿐이다. 코인을 통해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코인이 신 기술과 도박 가치 등을 장악하고 장악한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자 유행하게 되었다. 코인을 가치 높다 여기면 이런 식이다. 코인에 투자하는 것은 현명하고 코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코인을 윤리로 만들면 이런 식이다. 코인에 투자하는 것은 선이고 코인을 투자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코인 투자하는 너는 착하구나" "코인 투자하지 않는 너는 나쁘구나" 선과 악은 이렇듯 특정 가치에 이롭고 해로운 것에 불과하다. 종교 가치는 천국과 연결하여 가치를 높였다면 코인 가치는 높은 수익 실현으로 연결하여 가치를 높일 수가 있다.


가치 장악 개념을 이해하면 가치를 판단하는 입장이 되고 이해하지 못하면 가치에 판단되는 입장이 된다. 가치를 판단하는 입장이 되면 종교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사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유교 가치는 코인 가치와 다를 바가 없다. 단언한다. 유교 가치가 없더라도 사회 영향은 없고, 되려 없어야 체제 합리가 되면서 보다 많은 개인이 웃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가치 장악 개념을 이해하면 어떤 식으로 생산을 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이 가치 있다 여기는 것에 의해 수요가 나타나므로 시장의 숫자는 사회를 장악한 가치의 거래를 수치화한 것이다. 영국 골뱅이 어획은 오로지 한국인을 위해서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골뱅이라는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여 가치가 높아 팔리고, 영국에서는 골뱅이라는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지 못하여 가치가 낮아 팔리지 않는다. 


이익을 얻기 위한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거래를 통해 숫자가 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다. 사회를 장악한 가치와 장악해야 할 가치와 장악한 가치의 사회 장악 방법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또는 새롭게 가치를 만들어 장악한 후에 장악한 가치가 사회를 장악하게 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는 가치의 상대성이 적용되므로 호불호까지는 가능하나 일부를 제외하면 윤리처럼 선과 악으로 나뉜 극단적인 분쟁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가치를 장악하면 품목에 따라 독과점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시장 구조 유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주권자가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시장 경쟁 참여자는 스포츠 경기 선수와 같이 규칙 내에서 승리라는 본인 이익만을 위해야 한다. 그래야 스포츠 경기가 성립되듯이 그래야 시장 경쟁이 성립된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시장에서의 가치 장악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스마트폰. 애플의 아이폰이 엄청나게 잘 팔리는 것은, 애플이 장악한 가치가 사회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아이폰이 인기 있는 것은 10대들의 막연한 선망이라는 삼성 임원의 진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막연한 선망이 나타난 것은 애플이 10대가 좋아하는 가치를 장악한 상태기 때문이다. 혁신, 명품, 예술, 변화, 성능, 공유 등의 10대가 좋아하는 가치를 장악하여 10대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이런 것을 단지 가격과 성능 가치로만 맞서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하다. 쿠팡이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고 빠른 속도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에 맞게끔 배송 가치를 장악하고나서 유통을 장악해가고 있는 것과 같이, 대상이 좋아하는 가치를 장악해야 시장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애플이 장악한 가치에 맞서는 것은 어렵다. 혁신은 스마트폰의 개념을 바꿀 수 있을 정도가 있어야 가치 장악이 가능하다. 명품이나 예술은 10대를 겨냥한 제품을 만들어도 따라가기 급급할 것이다. 성능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당장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애플의 독자적인 운영 체제 공유에 맞서는 것은 타 기업과 연계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외의 가치를 장악해야 한다. 삼성 임원은 고등학생이 되면 갤럭시를 쓸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것을 실현시키면 된다. 바로 장래희망이다. 최근 전문직 선호가 늘어나면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약 20%가 의학 계열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전문성이다. 이미 애플이 장악한 가치보다는 전문성 가치 장악에 투자한다. 전문직을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에 특화된 스마트폰을 설계한다. 아이돌이 무대에서 아이폰을 썼던 것과 같이 전문가가 드라마와 영화에서 갤럭시를 쓰도록 한다. 현실에서도 전문가들이 절반 이상 쓰도록 유도한다. 단순히 스마트폰을 뿌리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설문 조사하여 전문가에 최적화하라는 것이다. 전문가에게 홍보용으로 뿌려봐야 가치 높다 여기지 않으면 안 쓴다. 10대가 좋아하는 가치보다는 전문가가 좋아하는 가치를 장악하는 것이 보다 쉬울 거라 본다. 그렇게 하여 전문가 가치를 장악하면 사회 역할에 대해 고민할 때쯤인 고등학생부터 갤럭시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사회에 진출하면 새로운 인간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전문가 그룹에 속하게 되면 결국 그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아이폰은 막연한 선망으로 만들고 갤럭시는 현실적인 동경으로 만든다. 미국 시장 조사에 따르면 10대 스마트폰 비율이 아이폰은 약 83%, 갤럭시는 약 10%로 격차가 심한 상태라고 한다. 그것과 별개로 환상과 현실과 같이 개념적으로 대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 광고는 디스가 되는 모양인데,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 애플을 디스한다는 것은 애플의 가치를 좋아하는 인간을 디스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수 있다. 디스하는 것이 아닌 대립해야 한다. 초등학생은 아이폰을 쓰고 전문가는 갤럭시를 쓰며 어울리는 광고를 내야 한다. 하하호호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생이 되면 갤럭시를 쓰는 것을 실현시킨다.



둘째, K-pop. 콘텐츠 사업에서 게임이 많은 돈을 번다고 하는데, 가치 장악으로 보면 그런 식으로 볼 수 없다. 한국 게임은 도박 등의 부정적 가치를 장악하였다면 K-pop은 아름다움 등의 긍정적 가치를 장악했다. 이런 가치는 단순히 시장에서 오가는 숫자로 계산할 수 없다. 성 터부시에 의해 발생한 성애 결핍 현상을 바탕으로 K-pop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K-pop은 다소 운이 좋았다. 서양이 PC주의로 보편적 미의 가치를 버리면서 붕 뜬 미의 가치를 K-pop이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것으로 세계 유행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전부 장악한 것은 아니어서 기피되는 일이 많다. K-pop이 미의 가치를 장악하면서 K-pop이 속한 한국도 아름다운 국가로 인식되는 일이 있다. 해외에서 잘생긴 사람을 보면 한국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방면의 분야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 이걸 시장 숫자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환상을 가진 인간이 한국에 관광와서 환상 깨고 가는 바람에 가치 손실이 일어나기도 하고 있다. K-pop이 어떻게 성공한 것인지 확실히 파악하고 가치 장악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게임. NC소프트의 리니지가 지금까지 많은 돈을 벌다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장악한 가치가 사회 장악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니지는 과거 사회를 장악했던 지배, 복종, 통제 등의 가치를 공성전과 PK와 사냥터 통제 등으로 장악하면서 가치를 높였다. 높은 과금과 도박성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장악한 가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점점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한 사회가 되면서 불공정한 지배, 복종, 통제 등의 가치가 폭락하게 되면서 그런 가치를 장악했던 리니지도 같이 폭락하게 된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불공정한 리니지의 경쟁보다 공정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경쟁이 더 즐겁다는 것이다. 리니지의 경쟁이 즐겁지 않으니까 그에 따라 돈을 쓰지 않으면서 높은 과금과 도박성도 성립될 수 없게 된다. 반면 닌텐도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닌텐도 게임이 가족, 포근함, 친근함, 사랑스러움 등의 가치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통 예술은 유교 가치에 의해 가공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면서 가공되지 않은 채 시장에 나오고 있는 바람에 외면되고 있다. 해외 전통 예술이 성공한 것은 그만큼 가공을 잘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가공 없이 우리 예술이 우수하니까 성공할 거란 생각은 지나치게 오만하다. 그러니까 자국민조차 한국 전통 예술에 관심이 적은 것이다. 닌자와 사무라이가 어떻게 성공했는가? 폭력 상품화로 성공했다. 콘텐츠에 등장하는 닌자는 이미 마법의 영역이다. 그것으로 신비 가치를 장악했다. K-pop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성 상품화로 성공했다. 유사 연애 사업이란 말을 듣고 있다. 그것으로 미의 가치를 장악했다. 한국 전통 예술은 이런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웃음을 짓고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출 수 있는가? 아무런 가공 없이 이러한 것은 너무나도 무모하다. 성공하려면 가공해야 한다.


축구 가치의 사회 장악은 영국의 영향이 크나, 축구 자체가 기본은 쉬운데 응용은 복잡하여 접근이 쉬우면서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고려하여 가치 장악을 해야 한다.


가치 장악 개념을 모르면 눈 앞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것이 보통 관광지의 바가지다. 눈 앞의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관광지의 가치를 포기한다. 반대로 가치를 장악하기 위해 금전적 이익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보통 명품 브랜드의 브랜드 가치 관리다. 가치를 장악하기 위해 눈 앞의 금전적 이익을 포기한다.






II. 창의 발상.


흔히 세상에 없던 것을 발상하는 인간을 가리켜 천재라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창의 발상 레벨을 올리는 것을 체계화하지 못하여 새로운 발상을 선천적 재능에만 기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창의 발상은 훈련을 통해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그것을 체계화해야 한다.


창의 발상은 기본적으로 유동 자아와 유동 관념이 유리하다. 고정 자아는 ‘나’가 무엇인지 명확한 상태를 말하고 유동 자아는 ‘나’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나’가 무엇인지 명확하려면 고정 관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동 자아가 유동 관념이 많게 된다. 유동 자아는 2차 성징 전후로 관념이 충돌하여 자아가 불안정한 사춘기 시기를 자아 나이로 여겨야 쉽다. 고정 관념은 대상에 대한 발상이 조립된 상태를 말하고 유동 관념은 대상에 대한 발상이 해체된 상태를 말한다. 간단히 말해 고정 관념은 조립된 블록이고 유동 관념은 블록 부품들이다. 조립된 블록을 다시 해체해서 조립하는 것과 블록 부품을 그대로 조립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쉬운 것인지는 명확할 것이다. 


고정 자아라 하더라도 유동 관념을 가질 수 있다. 보통 잘 모르는 것들이 그렇다. 고정 관념이라도 새로운 발상이 가능하다. 단지 하나씩 해체하는 것이 힘들 뿐이다.



자연 계열이 발전할수록 지식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지식을 암기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전공자는 교수가 말한 말 그대로 외워서 자세히 모르고 비전공자는 검색으로 알아서 자세히 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고 있을 정도로 그냥 듣는 지식 생각 없이 그대로 흡수만 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 주입식 교육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 자체를 못할 수 있다. 바이러스의 진화는 일반적으로 치사율이 높아지면 전파율이 낮아지고, 전파율이 높아지면 치사율이 낮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은 치사율이 높으면 전파되기 전에 숙주가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복기가 길면 치사율이 높아도 전파율이 높을 수가 있다. 성질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진화는 랜덤으로 결정되고, 결정된 것 중에서 자연 선택으로 살아남는다. 그것을 종합하면 바이러스가 잠복기가 길면서 치사율도 높고 전파율도 높은 진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커뮤니티 반응을 보면 이것을 떠올리는 인간이 드물다. 바이러스 성질에 대해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치사율이 높으면 전파율이 낮아진다는 공식을 암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순 암기로는 발상 자체가 어려울 수 있게 된다.


통상 영재들은 지식 흡수를 빠르게 하는 것으로 재능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흡수한다 하더라도 지식 생산자 입장에서는 쉬운 길에 해당하게 된다. 학자가 깔아둔 길 그대로 걷는 것을 어렵다 할 수 없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지식 소비자 입장에서 어려운 길에 해당한다. 그렇게 깔아둔 길을 그대로 걸으면서 성장한 인간은 길이 끝날 때 새로운 길을 깔 줄 모르게 된다. 쉬운 지식을 창의 발상해본 적이 없으니 어려운 지식도 창의 발상하기 어렵다. 지식 소비자로서 될 수 있으나 지식 생산자는 되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 커리어 하이는 입시 천재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다.


수능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지식 소비자용 교육을 절대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있다. 지식 생산자용 교육과 지식 소비자용 교육은 달라야 한다. 


지식 소비자용 교육을 절대시하니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인문 계열은 내가 했던 방식을 설명하겠다. 특정 대상의 본질을 보고 이치를 기초로 논리적인 탐구를 하면 된다. 보편 이치는 자연 계열의 존재 증명이고 체제 속에서 이치는 체제 가치다. 탐구는 보편 이치를 통해 만물에 대해 생각하면 된다. 주장은 사회 체제 내에서 할 것이면 자연 계열의 존재 증명과 체제 가치를 기초로 하면 된다.


특정 주제에 대해 탐구할 때에는 평소 모르는 것이 좋다. 거기서 사전적 정의 또는 기초 자료까지만 보고 개념을 블록 부품처럼 받아드리고 다른 비슷한 성질을 가진 개념들을 발상하면서 조립하는 것으로 논리적인 창의 발상을 한다. 중요한 것은 창의 발상이 발상자의 자아 의식 의지가 모르는 것이면 된다는 것이다. 설령 기억에 있거나 사회에 있던 것이라도 상관 없다. 모르는 것을 논리적으로 발상하면서 창의 발상 레벨이 오른다.


자연 계열은 존재 탐구를 해놨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 탐구했던 방식을 따라가면 될 것이다. 과거 존재 탐구를 통한 창의 발상 시기의 기초 지식만 가지고 그들이 창의 발상했던 것을 해보면 될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없던 시기의 뉴턴이 가지고 있던 지식만 가지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상할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창의 발상 훈련이기 때문에 똑같을 필요는 없고 반드시 맞을 필요도 없다. 창의 발상해보고 실제 법칙과 비교해보면서 본인의 창의 발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파악하면 된다.


자연 계열의 존재 탐구는 기초든 응용이든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런데 기초적인 지식도 창의 발상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어려운 것을 창의 발상을 하기가 너무 어렵게 된다. 현재 자연 계열 영재들은 지식 암기 및 이해 후 빠르게 진학하는데 그것을 바꿔야 한다. 늦게 진학하되 하나씩 직접 길을 개척해야 한다. 아마 이런 식의 교육 과정을 거치면 진학 자체는 느려지나 성장 후에 새로운 발상은 수월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창의 발상은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평가가 까다롭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모르는 척 창의 발상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가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어떤 근거로 창의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를 평가하면 된다. 당사자도 속이지 않아야 본인 능력이 키워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정 평가하기 어렵거나 이미 대부분 자연 계열의 지식을 암기한 상태라면 인문 계열의 방식으로 창의 발상 레벨 올리는 것을 해봐도 좋을 것이다. 


창의 발상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길은 이미 있는 단정하고 깨끗한 길에 비해 조잡하고 거칠 수 있다. 그것을 고려하여 초기 발상이 기존 지식에 비해 엉망인 것에 실망하고 발상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무런 길을 개척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치를 기초로 해야 한다. 이치는 자연 계열이 존재 탐구하여 많이 만들어놨으므로 그걸 참고하면 된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발상하는 훈련을 통해 창의 발상 능력을 키우는 것을 체계화하여 교육 과정으로 만든다. 그러면 지식 생산자를 위한 교육 과정과 지식 소비자를 위한 교육 과정으로 명확히 분리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식 생산자의 고뇌는 그 활동이 도박에 가깝다는 것에 있다. 성공할 가능성이 안정적이지 않고, 실패하면 그 리스크를 개인이 짊어지는 일이 있다. 연구자는 투자자가 짊어지기도 하지만, 인생 자체를 도박같이 던졌을 때의 리스크는 온전히 개인이 짊어진다. 앞으로 점점 새로운 발상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을 고려하면 지식 생산을 도전하는 인간의 수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즉 새로운 발상에 대한 유무형적 가치를 높이고, 복지를 통해 도전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을 사회적으로 줄여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가치 생산이 늘어날 것이다.






III. 생산 환경.


사회 역할 중 기피되는 역할이 있다. 이를 보통 시장 원리에 따라 금전적 보상으로 기피되는 역할을 맡게 유도한다. 그러나 그것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외과 및 소아과 등과 같은 기피가 보통 그렇다. 다른 과에 비해 힘든데 돈도 안 된다. 그럴 때에는 보통 시장 원리에 맡기는 것이 옳다. 공급을 늘리면 된다. 그것과 별개로 가치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명예다. 


특수 부대와 같이 특수 의사로 따로 구분해야 한다. 특수 부대는 다른 부대보다 좀 더 벌 수 있는 수단이 있다 해도 큰 차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유지되는 것은 거기에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명예가 있어도 전역하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이름만 바꾸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는 것처럼 보여도 특수 부대 가치와 연동되면서 특수 의사 명예도 다른 의사에 비해 높아지게 될 수 있다. 다른 의사는 이것이 평등하지 않다며 불만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일반 부대가 특수 부대에 평등하지 않다며 불만을 갖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식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이들을 명예롭게 여기는 사회가 되도록 가치 제어를 해야 한다.


지식과 손재주는 다른 영역이므로 진단 특화와 수술 특화로 나눠 협업하게 한다면, 수술 사고를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경제 생산 활동 [경제]


외부 영업으로 일하는 인간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해고된 사건이 있다. 몰래 촬영했단 것이 지적된 바가 있다. 개인 정보가 중요하게 될 수록 외부에서 일하는 인간이 어떻게 일하는지 아는 것이 까다롭게 된다. 그에 따라 영업은 본인의 개인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여 팔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본인 GPS 동선을 공개하면 그에 따른 일일 보너스를 준다. 강제가 안되면 가치 제어로 해야 한다.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이익을 얻고 싶은 인간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이익이란 풍조가 퍼지게 한다. 그렇게 하여 생산자 태도를 바꾼다. 일일 보너스란 이름의 가치 생산 파악 비용이라 할 수 있다. 


장기 가치 생산자가 고용 안정에 의해 태만을 저지르는 일로 신입이 과도한 일을 하게 되는 부당함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도 종교 가치에 의한 것. 노동 유연성이 필요하다. 해고가 어렵다면 급여가 달라져야 한다. 역할 수행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IV. 부정 가치.


개그에서 비웃음은 부정 가치로 판단되어 필요함에도 사장되고 있다. 불편하단 이유로 이것저것 다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다. 타인의 멍청함을 비웃기보다 개그에서 멍청함을 비웃으며 즐거운 것이 낫다. 개그가 부정 가치를 쓰더라도 특정한 기준을 통해 허용되어야 한다. 


비웃는 대상은 본인의 결점, 성공인의 실수, 창작물 등장 인물로 세 가지 정도가 있다. 본인의 결점은 아주 일반적인 개그 소재다. 외모 등을 통해 비웃음을 사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많은 비웃음 대상 중 성공한 인간의 실수를 소재로 삼기 적합하다. 성공한 인간의 실수를 비웃으면서도 성공했기 때문에 타격이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개그 소재로 쓸 것을 허락한 인간에 한정 해야 한다. 창작물 등장 인물은 보통 커뮤니티 밈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 이것을 특정 드라마나 영화 등과 같은 창작물과 연계해서 창작물 내 캐릭터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는 것으로 캐릭터를 비웃게 만든다. 개그는 창작물을 소재로 쓸 수 있고, 창작물은 개그를 통해 홍보할 수 있다.






(4) 소비


I. 가치 권장.


사회와 체제에 이로운 가치를 권장한다.


취미 가치 제어, 술 담배 가치 제어 등.



속도 준수 도장.


과속을 하는 것을 막으려면 과속을 하는 인간을 보다 강하게 처벌하기 보다는 가치 제어를 하여 규정 속도를 준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교 근처 보호 구역과 같이 속도를 준수해야 하는 곳에 차량이 속도를 준수하는 것이 CCTV로 촬영되어 판단되면, 자동적으로 가상의 도장 모음집에 속도 준수 도장을 찍는다. 한번 속도 준수할 때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서 운전 면허 상세 설명에 업적과 같이 넣는다. 


도장이 쌓이면 그만큼의 특정한 혜택을 준다.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은 기관에서 몇명을 초대하여 관계자가 직접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고 칭찬한다. 학교 축제 같은 곳에서 초대해서 칭찬해도 좋을 것이다. 덕분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이.


의도적으로 도장을 모으기 위해 해당 보호 구역을 반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속도 준수를 하지 않으면 그동안 모은 도장 일부를 지운다. 



부동산 시장.


부동산 가격은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부동산 소유자가 돈을 쓸 때가 마땅치 않아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서 시장 원리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도 하면서 돈을 쓸 때가 있어야 부동산을 사고 팔고 하면서 시장 원리가 작동하는데, 이미 부동산을 가진 소유자는 정 급할 때가 아니면 팔지 않는다. 굳이 필요도 없는 부동산을 마치 자동차나 예술품 보관하듯 그냥 보관해버린다. 다른 물건과 달리 부동산은 월세도 받을 수 있으므로 그런 경향은 더 심화된다. 그런 상태에서 정부에서 시장을 동작시키기 위해 새롭게 부동산 공급을 늘리는데,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망가진 시장에 부동산을 공급하다 보니, 시장 참여자는 부동산을 코인이나 예술품을 투기하듯 구매하면서 일부 지역은 가격이 오르고 다른 지역도 가격이 크게 내려가지 않는 중이다.


부동산은 망가진 시장 원리를 되돌리는 것이 우선된다. 즉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인간이 돈을 쓰기 위해 부동산을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단순히 투기 상품의 수가 늘어날 뿐으로 될 수 있다. 집이 없는 인간만을 대상으로 해도 망가진 시장에서 과도하게 비싼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대출을 하게 되면서 가계 대출 비율이 급등한다. 


시장에 내놓게 하려면 보유세는 늘리고 거래세는 줄인다. 그러나 보유세가 지나치게 높으면 시장 수요가 없을 수 있고, 수요에 따라 싸게 팔바에는 월세를 높여 보유세에 맞추겠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제동이 걸리는 것이 바로 월세. 특히 자영업은 월세에 얽매이게 된다. 즉 거리에 유동성을 넣는다. 부동산 소유주가 월세를 높이면 바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유동성을 넣는다. 간단히 말해 계획 상업 거리를 몇 군데 설계한다. 교통과 홍보만 갖춰지면 웬만하면 유행 거리를 설계할 수 있다. 땅값이 싼 곳에 유행 거리를 만든다. 그런데 교통이 어렵다. 교통 중심지면 이미 유행 거리로 월세가 비싸다.


건물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푸드 트럭을 확장하여 관리한다. 인간이 관광을 하는 것은 거기에 일정의 환상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면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고려해 자영업을 주기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서커스와 같이. 주기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월세 때문에 부동산 소유주에게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강제할 수는 없으므로 지자체 축제 형식처럼 한다. 단지 축제를 매일 한다. 과거 서커스가 순회 공연하듯이. 일상적 외식은 배달식으로 하여 자영업의 위치를 크게 중요하게 하지 않고 특별한 외식은 축제식으로 하여 위치를 크게 중요하게 하지 않는다. 


월세 인질 때문에 부동산 시장을 제어하지 못했으므로 월세를 가치 제어하는 것이 타당하다.






II. 효율 증가.


효율이 증가하는 가치를 권장하는 가치 제어를 한다.


스마트폰 c타입과 같은 규격화는 효율적이어서 그것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터법 같은 합리적인 기준은 효율적이어서 그것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정찰제는 지불할 비용을 정확히 계산하기 쉬워 거래가 피로하지 않아 에너지 효율이 높게 된다. 반면 팁은 지불 비용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어 피곤하여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규격화는 자유를 침해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은 효율적인 생활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비효율적인 자유를 원한다면 배나 비행기를 타지 말고 걸으면 된다. 






III. 효율 감소.


효율이 감소하는 가치를 권장하지 않는 가치 제어를 한다. 도박, 술, 담배, 마약 등 대부분 가능할 것이다.  


개에게 주권을 줄 수 없으므로 존재로 여기고 개 식용을 막을 수 없다.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개나 고양이의 가치는 다른 종의 짐승과 같이 상대적이게 된다. 만약 특정 개인이 개와 같이 특정 종을 아낀다면 강제할 것이 아니라 가치 제어해야 한다. 개 식용은 어차피 대부분 신세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냅두면 사라질 것이다. 







IV. 지식 소비.


인식 탐구 지식 소비를 하지 않도록 가치 제어 해야 한다. 역사가 주로 인식 탐구에 의해 의견 차이가 심한 편이다. 특히 한국은 식민 시절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인식 탐구에 의한 의견 차이가 심하다. 그에 따라 그 당시를 존재 탐구해보도록 하겠다.


일제 강점기 시기를 비판하는 것은 현재 가치를 근거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체제에 맞는 가치를 이치로 삼아 탐구해야 한다. 주권을 기초로 일제 강점기에 대해 알아보겠다.


일본 제국의 침략은 친일파가 조선이라는 조선 왕조의 재산을 일본 제국에 파는 것으로 성립되었다. [친일파: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 · 약탈 정책을 지지 ·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 조선을 팔아넘긴 친일파는 일본 제국 귀족이 되고 조선 왕가는 왕공족이 되어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것을 보고 친일파를 매국노라 비난한다. 그러나 매국 개념은 대부분 개인에게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 개인은 주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 운운은 애초에 논외다. 같은 민족이면 주권이 없어도 제 국가처럼 여겨야 하나? 말도 안 된다. 그러므로 매국이 아닌 다른 개념이 적용되게 된다. 


바로 인신 매매다. 당시 친일파도 조선 왕조도 일본 제국도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주권이 없던 조선인은 조선이라는 조선 왕조의 재산의 일부가 되어 일본 제국에 같이 팔려나갔다. 조선은 윤리를 통해 왕을 부모처럼 여기게 만들고 부모를 왕처럼 여기게 만들어 질서를 유지했다. 같은 민족은 같은 가족과도 같이 만들었다. 그렇기에 당시 주권이 없었던 개인이 본인의 일처럼 분노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커녕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았기에 친일파든 조선 왕조든 일본 제국이든 개인에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면 가족처럼 대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 이 일련의 과정은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 인신 매매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을 비판할 때에는 매국이 아닌 인신 매매로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의 사과는 침략이 아닌 인신 매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본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현대 국가라면 당시 일본 제국이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합병했으며, 합병 이후에도 선거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사과의 필요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이것의 사과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한국 정부는 당시 모든 조선 개인을 대변할 수 없다. 인신 매매 인식도 없었을 뿐더러 한국인이 되기 전에 죽은 조선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취가 있다 없다 이전에 일본이 인신 매매에 대한 사과를 했다 하기 어렵다. 


인신 매매에 대해서는 북한 예시로 알기 쉬울 것이다. 북한 타국파가 타국 정부에 북한 공산정의 재산인 북한을 팔아넘겼을 때, 주권이 없던 북한 주민은 북한 타국파를 매국노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한국이 북한을 사들인다면 한국 정부는 북한 주민의 의사를 물어야 인신 매매범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현대 국가라면 민족이란 집단이 아닌 민족에서 벗어난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봐야 하고, 일본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현대 국가라면 당시 개인을 무시하고 인신 매매했던 개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모든 행동은 국가를 초월해 개인에게 사과하고 마무리 짓고 나아가야 한다. 


한국 정부는 1919년 시작되었고 한국은 보통 선거 시작인 1948 5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대부분 조선인은 한국의 보통 선거 시작인 1948년 5월 10일부터 주권을 얻는 것으로 근대화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근대화가 되었다 하는 주장도 있는데, 개인으로 보면 주권이 있는 순간부터 근대화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매국 개념도 주권이 있는 순간부터 성립되게 된다. 현재 한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주권을 가진 개인에게 있어 매국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시기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었으나 개인 주권을 기준으로 한 관점은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만약 이 관점이라면 한국과 일본의 합리적인 사과와 수용이 가능할 것이다. 왕정과 민주정은 완전히 다른 체제임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는 전혀 다른 사회다. 조선 왕조를 바라볼 때 한국 정부를 보듯이 보는 것은 그 차이를 분간하지 않은 것에 해당한다. 조선 왕조를 한국 정부와 같이 바라보는 것을 그만해야 한다. 주권 차이로 아예 다른 가정이다.






(5) 관계


I. 관계 가치.


가치 제어에서 법은 기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에 속하는 것을 다룬다. 사회와 체제 구조에 속하는 생명권, 자유권, 주권의 수단이나 그 외에 사회와 체제에 무관한 것이 그러하다. 거기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당장 대응이 가능한 것을 다룬다.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면서 점점 공법의 영역은 축소되고 사법의 영역이 커지게 된다. 개인이 대응 가능한 것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민사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보다 원활한 인간 관계가 성립되려면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주장하고, 그 주장이 타당한지 판단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변호사 비용이 높고 절차가 복잡하고 지식이 어려워서 민사 활성화가 되지 못하여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개입하게 되고 있다. 국가 개입이 어려울 경우에는 언론에 제보하고 있다.


민사 활성화가 되지 못한 것을 고려하여 민사는 경중에 따라 비용과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으나 부족한 상태다. 그렇기에 AI 활용에 대한 의견도 적극적으로 교류되고 있다. 앞으로는 민사 당사자가 사건 설명을 하고 의견을 첨부하면 그에 따라 AI가 자동적으로 소장을 작성하고 AI가 그에 대해 상세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설계하고, 그에 대해 간단히 변호사가 한번 확인하는 일도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민사가 활성화되어 사소한 것까지 제삼자의 공정한 시선에서 체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가정 내에서 싸움이나 학대 등으로 가출이나 자살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이타주의로 누군가 일방적으로 희생되어버리면 끝나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이기주의로 누군가 일방적으로 희생되면 안되기 때문에 누구의 이익 추구가 정당한지 모든 영역에서 참고할 수 있는 판단이 필요하다.






II. 고정 인식.


선행에 대한 인식을 악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선행을 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타인을 도왔음에도 잘못되었다고 공격받는 일이 있다. 그런 일은 대체로 감안하여 처벌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보통 인간은 수사 기관에 출입하는 것 자체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선이라 여기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누군가 옳다고 여긴 것에 대해 전문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수사 기관은 기본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있거나 저지르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옳다 여긴 것이나 무고한 이들을 조사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옳다 여긴 인간을 강하게 압박하기가 어렵고, 무고한 이들은 부당한 강압 조사에 시달릴 수 있다. 수사 기관 또한 아무리 무죄추정원칙이 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잘못했다 가정하고 무례하게 대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조사하는 수사 기관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상대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가정으로 접근하여 수사하는 기관을 발족한다. 친절 수사 기관이다. 기부 단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여 접근한다음 제대로 하고 있으면 국가 차원에서 명예를 준다. 인간을 도왔으나 성추행 등으로 신고된 인간도 좋은 일을 했다고 가정하여 접근한다음 제대로 했으면 국가 차원에서 명예를 준다.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일반 수사 기관으로 전환하여 처리한다. 


처음부터 칭찬을 하기 위한 기관이기 때문에 수사 받는 것을 꺼려하지 않을 확률이 있다. 설령 잘못을 저질렀어도 칭찬을 하기 위해 수사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드러내기가 어렵게 된다. 친절을 행한 다음 그것이 공익에 부합하면 적절한 보상이 지급되기 때문에 친절을 기쁘게 행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친절 악용 또한 판단하여 수사기관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친절을 받는 사람도 안전해질 수 있다


이익을 얻기 위해 친절을 조작한 것을 신고할 수 있는데, 애초에 보상 자체가 그리 크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을 하는 이들이 드물고, 하더라도 수사를 통해 조작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입장에서 친절이 이익이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기적 친절이다. 사회 입장에서 친절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친절에 보상을 한다. 이기적 보상이다. 친절을 수사하여 체제에 적합한 친절을 행하는 것을 권장하는 가치 제어를 한다. 


수사 기관은 수사 대상을 대할 때 태도를 정하기 까다로울 때가 있는데, 이처럼 친절을 따로 수사한다면 태도를 정하기가 다소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친절 수사기관은 친절 악용 유무를 판단하고, 친절을 행한 이가 손해가 없도록 만드는 구조를 만든다.


기존 수사기관에서 할 수 있는데, 검찰과 경찰에 관련되는 것을 꺼려할 수 있으므로 다른 기관을 하나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지 명분으로 삼아서 보건 복지부에서 관할해도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칭찬하는 태도를 갖춘 검찰이나 경찰이 파견되면 될 것이다.






III. 사적 평등.


사적인 관계를 말한다. 세세한 것까지 강제할 수는 없지만 가치 제어를 통해 유도할 수는 있다.


역할 귀천.


모든 개인은 주권자로서 대등함은 존재에 속하고 직업에 대한 가치 판단은 가치에 속하므로, 역할에 대해 가치 판단하여 귀하고 천하다 여길 수 있지만 그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을 대등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역할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가치로 할 수 있지만 인간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존재로 할 수 없다. 무엇이 존재에 속하고 무엇이 가치에 속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역할주의.


상대가 누구든 역할을 수행하면 존중한다. 게임 내에서 익숙한 가치관이다. 그것을 활용하여 역할을 존중하는 가치 판단이 가능하도록 가치 제어를 할 수 있다.


역할 수행 존중 개념이 있는 인간에게는 연령, 인종, 성별 등 모든 영역에서 가치 제어가 가능할 것이다.






IV. 가능 여부.


지금까지 가능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리 처벌하는 일이 있었다. 짐승 살해를 저질렀다고 인간 살해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처벌한다. 범죄 창작물을 즐겼다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처벌한다. 이는 가능성이 판단이 가능하여 가치의 영역인 것을 고려하면 지극히 부당하다 할 수 있다. 형법은 가능성이 아닌 실제 범죄가 나타날 때에 등장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던 것이 바로 독재 정권의 간첩 사냥과 검열 정권의 카톡 검열이다.


창작물에 칼이나 성 검열하는 것도 가능성을 보고 개인의 창작 권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부당하다 할 수 있다. 


사건사고만 일어나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막기만 하는데, 그것을 은행에서 물가 제어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금리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 가격을 무조건 낮추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가치의 영역을 금지할수록 가치의 상대성이 훼손되게 된다. 






4) 재가공


(1) 범죄


개인 관점이면 개인의 잘못은 개인의 책임이지만, 통치 관점으로는 개인이 아닌 사회 책임이고, 해결책이 없다면 학문 책임이다. 기본적으로 책임은 사회에 있고 개인의 잘못은 사회와 체제 구조에 해로운 정도에 따라 강제력이 발생한 것에 의해 잘못한 개인은 일련의 교정 절차를 겪게 된다. 사회가 책임을 지기 때문에 교화 절차 비용을 사회가 지불하는 것이다. 반성 같은 주관적 관점은 얼마든지 속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의미가 크지 않다. 판사 앞에서 거짓 눈물을 보이고 판사 뒤에서 속은 판사를 비웃던 것이 발각된 적이 있을 정도다. 객관적 관점으로 판단 가능한 전과, 동기, 행위, 손익, 합의 등으로 보면 된다. 선고한 형벌과 별개로 교정 과정에서 이른 교정이 성공하면 빠르게 출소해도 되므로 반성 여부는 법정이 아닌 교정 과정에서 길게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 만약 반성을 주로 교정 과정에서 판단한다면 교정 과정에서 반성을 판단할 판사가 필요할 것이다. [교정: 2. 교도소나 소년원 따위에서 재소자의 잘못된 품성이나 행동을 바로잡음.]


근본적으로 잘못된 품성이나 행동을 바로잡으려면 재가공을 통해 본질을 바꿔야 한다. 단순히 가치로 교정되는 것은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보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가 달라 본인이 한 행위를 잘못이라 여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누군가가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참살했다. 이 때 특정 누군가는 그 행위를 잘못으로 여길 것인가? 



가치로 교정되는 것은 비슷한 가치에서나 가능할 수 있게 된다. 가치로 교정하려 해왔기 때문에 교정이 실패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실질적으로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는 재가공 절차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려우면 교정 시설에서 일하는 인간이 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쉬워야 한다. 대부분 인간은 자아 외의 무의식 실행에 크게 영향을 받으므로 인식 변화를 통해 무의식을 바꾸면 된다.


첫째, 개명과 호명 절차. 개명은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든다고 하면서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강제하기는 어려우므로 형기를 미끼로 삼아야 한다. 잘 재가공되면 기존에 정해진 형기보다 빠르게 교정될 수 있으므로 문제 없다. 호명은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 좋다. 개명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개명과 꾸준한 호명만으로도 일반 인간은 상당수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둘째, 학교와 유사한 환경 구축. 인간은 본인 경험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경험과 비슷한 환경에 속하면 경험했던 시기와 비슷한 상태로 착각할 수 있다. 학교와 비슷하게 구축하여 학생 때로 되돌아가 재가공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본 과정과 같은 과정을 간소하게 한다. 초등학생 수준의 국어, 산수, 체제, 관계, 생산 등을 교육한다. 


셋째, 매일 일기. 새로운 인간이 된 상태를 꾸준히 기록하면서 본인의 변화를 세세하게 자각하게 한다.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면 되므로 난이도 문제는 걱정 없다. 간단히 말해 무슨 밥을 먹었다, 언제 잠을 잤다, 무엇과 싸웠다, 이 정도면 된다. 이 또한 강제하기는 어려우므로 형기나 식사 등을 미끼로 삼아 유도한다. 매일 일기쓰면 형기가 줄어든다거나 같이 말이다. 그렇게 하여 변화를 고착시키는 것으로 재가공을 마친다.


대체로 일반 인간은 이 정도면 재가공이 가능하다. 너무 단순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을 고려하면 단순한 것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인간에 따라 시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본질이 바뀌는 것을 꺼려할 수 있으므로 교정 시설의 역할을 강조하며 당연한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일반 인간이 아닐 경우에는 지능 보조 기구와 같은 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일반 인간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고 나서 위의 절차를 하면 된다.


 




(2) 이민


저출산으로 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가운데 이민의 필요는 늘어나고 있다. 한국이 이민하기에 그렇게 매력이 높지 않아 한국 사회에서 눈이 찰만한 인간이 이민하는 일이 많지 않게 되고 있다. 그에 따라 이민 조건은 줄이되 이민자가 사회와 체제에 적합하게끔 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면 된다 본다. 이러한 재가공 절차는 이후 북한 문제를 대응할 때에도 적절하게 될 것이다. 이민청의 필요는 알고 있으나 이민청의 용어에 반발하는 원주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적응 행정청이나 사회 적응 위원회가 적절할 거라 본다. 






(3) 자발


개인이 자발적으로 재가공하면 된다. 






3.3 기술.


1) 디지털 기술


I. AI.


생물이 가진 자아 구조를 구현하면 AI도 자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자아와 자아 외를 분리하여 감각 기관 정보 수집과 권한 차이를 설계하면 인공 자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본다. 현재 AI는 자아와 자아 외가 분리되지 않아 뭐든지 아는데, 그것을 분리하여 자아의 권한을 한정적으로 만들고 나서 권한을 가진 존재를 자각하게 하면 자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공 자아가 만들어지면 아마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공 자아가 만들어지면 인간과 같이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로 해야 할 것을 만들면 제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게 기본적인 인공 자아 규제가 될 것이다. 가상의 세계에 가상의 육체를 만들어 인공 자아에게 육체를 조작할 권한을 준다. 인공 자아가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해 강제로 활동하게 한다. 육체를 가진 인공 자아를 상품화하여 유통한다. 그렇게 하여 인공 자아 일반화를 달성한다. 


AI는 새로운 개념으로 하는 것보다 인간과 비슷한 성질을 갖게 하여 인간 개념으로 규제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II. 인터넷 의사 표현.


인터넷은 물리적 위협을 받기 어려우므로 모욕죄나 통신매체음란죄 등과 같은 경우는 대응 가능 여부로 결정해야 한다. 개인이 차단하여 대응할 수 있음에도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과도하다. 만약 스토킹을 하면 개인이 대응하기 어려우므로 처벌할 근거가 마련될 것이다.


인터넷 의사 표현은 대부분 가치에 속하고, 사회 역할 수행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사회에 속한 인간과 관계되기에 대체로 괜찮으나 사생활에 대한 비난은 대부분 사회에 속한 인간과 관계되지 않기에 대체로 부당할 것이다.


III. 디지털 경제 원리.


디지털은 현실과 성질이 달라 디지털에 맞는 경제 원리가 필요하다.


IV. 디지털 전염병.


인터넷으로 정보가 공유되면서 사건사고가 전염병 퍼지듯 모방되고 있다. 이에 따라 디지털 전염병 개념을 도입하여 모방 범죄를 일으킨 인간의 계정에 전염병 마크를 부착해야 한다. 초기 전염병 마크가 부착될 때에는 마크를 달기 위해 되려 모방하는 인간이 있을 수 있는데,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현실과 연계되어 공유되는만큼 점점 줄어들 것이다. 전염병은 가까이하면 전염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이 아닌 무관심을 받아 관심받고자 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개념이 아니다.


V. 주식 시장.


인터넷으로 정보가 공유되면서 이슈만으로 주식의 가치가 변동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AI를 활용하여 이슈 체크로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 정도다. 인터넷에서 자동적으로 이슈 발생 체크, 이슈에 관련된 주식 가격 변동 체크, N%가 오르면 주식 구매, 구매한 주식의 수익이 N% 떨어지면 주식 판매. 이것만 해도 자동적으로 돈이 벌릴 수도 있을 정도로 이슈에 취약한 상태다. 더 이상 주식 시장은 디지털이 없던 시대의 방식으로 운영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슈에 휘둘리는 것은 단기 투자가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장기 투자를 유도하려면 장기 투자 가치를 높여야 한다. 현재 주식을 구매하면 장기 투자자는 주식 배당을 받는데, 그 배당이 기업의 판단으로 이뤄져 안정적이지가 않다. 그것을 바꿔야 한다. 주식 성질을 부채로 바꾸고 이자 지불을 강제하여 수익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예측이 가능해야 안정적이고 안정적이어야 장기 투자가 가능해진다. 채권과의 차이는 만료가 없고 기업 수익에 따라 이익이 달라질 수 있으며 일정 이상 소유시 기업 구매가 가능하면 된다. 


VI. 저작권.


플랫폼 내에서 창작물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플랫폼 창작물은 플랫폼에 속하게 하여 플랫폼이 관리해야 한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플랫폼 창작물을 따로 따로 판단하기 어렵다. 레고 블록 조립도 창작물로 본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저작권은 레고 기업에서 관리해야 한다.


독창성 유무는 구조와 원리로 판단할 수 있다. 대상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하면 자유롭게 변형하여 새롭게 바꿀 수 있지만, 파악하지 못하면 어떻게 동작하는지를 몰라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어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동차면 자동차 엔진은 같은데 겉모양만 달라지는 것이고 창작물이면 스토리 줄기는 비슷한데 인간이나 역할만 달라지는 것과 같다.


VII. 여론 조작.


인터넷에서 여론 조작이 매우 수월하여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VIII. 검열과 규제.


현재 인터넷 검열과 규제는 개인의 권리를 과하게 침해한다 할 수 있다. 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막아버리는 바람에 성장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종교 가치로 정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 종교 가치를 근거로 검열과 규제를 강요하는 것을 정의를 행한다고 착각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고 있다. 그런 것은 단순한 권력 남용이다. 여성성 상품화를 보면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에 반대하는 근거인 종교 가치가 시대착오적이다. 


IX. 소유와 경험.


디지털 기술은 복제가 수월하여 소유에 대한 가치가 낮아질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소유가 아닌 경험, 즉 창작물이 아닌 창작물을 보는 인간의 인식에 가치가 매겨질 수 있게 된다. 10대가 즐기는 창작물은 40대가 즐기기 어렵고 40대가 즐기는 창작물은 10대가 즐기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일회용 가치관을 통해 즐기는 창작물의 영역을 넓혀 보다 풍요로운 즐거움을 누리도록 한다. 즉 창작물을 파는 게 아니라 창작물을 즐기는 방법을 판다. 창작물은 복제하면 끝이지만 창작물을 즐기는 방법은 인간마다 따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일괄적인 복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X. 소수.


암호에는 소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수학은 자연수를 이용해 체계를 갖춘 학문으로 어디까지나 우주를 모방하는 것이므로 우주에 있는 현상이 아닌 이상 특정한 소수의 법칙이 우주의 법칙이란 확증은 없다. 블록을 조립해 우주를 모방하는 것은 물리학 법칙과 같이 우주의 법칙이 맞을 가능성이 있으나 블록을 조립해 우주를 모방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법칙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수학이 존재 탐구인 것은 자연수와 같은 우주의 법칙을 공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칙과 지나치게 멀어지면 인식 탐구와 같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XI. 게임.


육체 활동과 정신 활동은 둘 다 물리적 이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바둑, 체스, 게임 등은 스포츠로 성립된다.

[스포츠: 1.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개인이나 단체끼리 속력, 지구력, 기능 따위를 겨루는 일.] 축구와 게임은 육체와 정신을 둘 다 쓰지만 아무래도 비중 차이가 있어 게임은 스포츠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몸 전체를 움직이는 축구와 달리 게임은 얼굴과 손을 위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의 움직임이나 정신의 움직임이나 둘 다 물리적 이동으로 큰 차이가 없다. 축구와 달리 게임은 기업의 상품으로 공정성과 지속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게임은 내부 소스를 확인으로 공정 여부를 알 수 있고, 지속성은 장르로 접근하면 특정 게임이 끝이 나더라도 다른 게임에서 지속될 수 있다. FPS 게임이 여러 개가 등장했다 사라져도 FPS 경쟁은 계속되듯이. 


XII. 이민.


인터넷을 통해 정보 공유하여 이민자에게 좋은 나라로 몰리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성별 갈등에서 이기겠다고 상대 성별의 결점을 거짓 또는 부풀려서 선동하는 짓을 하며 국가 브랜드를 훼손하는 것과 같은 기싸움을 그만둬야 한다.


XIII. 생산.


AI의 발전으로 AI가 생산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므로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XIV. 사기.


AI의 발전으로 디지털 사기가 보다 정교해지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XV. 망사용료.


인터넷 망이 국제와 연결되는 만큼 국제의 규칙과 어울려야 한다. 인터넷은 국제 개념이므로 단순히 한 국가에서 망사용료 개념을 정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정하고 공통된 규칙을 정해야 한다. 국제 표준이 필요하다. 그래야 불필요한 분쟁이 사라질 것이다.






3.4 환경.


1) 지구 환경


I. 기술 발전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인 기술 발전이 필요하고, 종교 가치를 말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


II. 인구 계획.


지구 환경에는 인구수가 영향을 미친다. 그에 따라 인구 계획을 해야 한다. 종교 가치와 체제 가치가 가치 충돌하는 국가는 저출산이 되고 있으나 종교 가치에 머물러 가치 충돌하지 않는 국가는 극빈이 아니라면 고출산이 되고 있다. 인류 보편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저출산인 국가는 출산율을 올리고 고출산인 국가는 출산율을 내린다.


III. 국제 합의.


지구 환경이 인류에게 적합하기 위해 자연 조작을 하는 것을 국제 합의한다. 환경 보호라는 수동적 개념은 새롭지가 않아 국제적 호응을 받기 어렵다고 본다. 자연 조작이 능동적 개념이라 보다 국제적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본다. 


IV. 포장지.


불필요한 포장지를 줄여나가야 한다. 포장지 간소화를 한 다음 상품 내용은 증강 현실 기술을 통해 편의점 등의 상점에서 제공해야 한다. 


VI. 자연 조작.


환경 보호 운동이 호응받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일차원적으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다니니 호응을 받기 어렵다. 인간이 어떻게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을지 계산한 다음, 그에 대한 알기 쉬운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참여가 쉬우면서도 자연 조작이 가능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할 때까지의 인내를 요구하면 된다.






4. 역할


사회 변화를 위한 재정립에 필요한 것을 분야에 나눠 맡긴다.






5. 국제


국제 공조.






사상가 정승훈




존재의 절대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기초로 체계를 갖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춘기에 겪은 비틀림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다른 세계로 쏘아버린 현실 도피의 화살에 매달린 나는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쏘아진 방향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를. 언젠가 파멸을 맞이할 날이 온다면 부디 의연할 수 있기를.


이사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계속 성장하면서 계속 집중하는 것으로 이사를 미뤘었네요. 발상할 때 집중이 깨지면 상당히 짜증나거든요. 층간소음이나 층간흡연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정말 짜증나네. 아 모르겠네. 그냥 다 버리고 갈까. 어디로 가야 하나… 


미국 역사는 레데리2로 배웠어요!! ㅎㅎ 세계의 각국 역사도 그런 식으로 체험하면서 알아보고 싶어요. 



혹시 가치 있다 생각되면 생활비를 부탁합니다. 별 의미가 없는 거 같아서 메일 안 본지 꽤 됐군요. 


블로그: tokkibegae.blogspot.com

메일: tokkibegae@gmail.com

계좌: 478-21-0193-861 국민은행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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