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개인화와 기술독립
한국은 노동자 인권 운동 방식이 잘못되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동자 인권 운동을 해왔음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나? 왜 변하는 게 없지? 자본가 때문인가?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더 강화된 규제를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한다고 한들 별반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사관계 구조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노사관계는 과거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직원과 공장주의 관계가 되었다. 농노가 지주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공장직원은 공장주에게 종속되었다. 농노와 공장직원은 노예와 국민으로서 신분이 달랐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은 같았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 이것이 현대 노사관계의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불평등하다. 그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농노에게 몇 가지 혜택을 부여하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예컨대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준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적당한 급여를 지불하고 휴가와 같은
복지를 지원한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다른 지주 밑에서도 일할 수 있게끔 해보자. 지금과 무엇이 다른 것 같은가? 노동자가 노동자에 머무르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에서 벗어나야만 농노와 달라진다. 구조 자체가 그렇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농노의 위치에서 다양한 혜택만
늘어난 것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공무원은 공노비, 사기업 직원은 사노비. 사람들은 어떤 집단에 종속되어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다며 스스로를 자조하고 서로를 조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노사관계 구조는 과거 농노와 지우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답인 걸까? 아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그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종속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자유 유무와 생산성이나 향상심 따위가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구조는 같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든 노동자가 힘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자유롭게 했고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평등하게 했다. 자본주의는 주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 국민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주권을 주었고 공산주의는 독재주의를 전제해 인민들을 평등하게 지배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라졌다. 그 정치체제의 차이로 자유권이나 개인의 소유권이
달라짐에 따라 개개인의 생활환경도 달라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적으로 본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타적으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이런 차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노동자가 공산주의의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환경이 나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자유인가, 평등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자유보다 평등을 추구하며 자유를 억압했던 공산주의를 더욱 더 추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등장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우선 지금까지 노동자 인권을 위해 해왔던 것을 살펴보자. 노동자 인권 운동은 이런 것이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불평등한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자를 배려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배려로 노동자의 불편과 불만은 다소 해소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노사관계 구조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관계가 불평등했기 때문에 지금도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부격차가 커진다. 자본가의 위상은 높아져만 간다. 어째서 노동자를 위해 운동하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그 운동이 사실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힘을 길려줬기
때문이었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되새겨보자. 그리고 노동자 인권 운동이 주장하던 걸 생각해보자. 평생 직장이란 이름으로 평생 동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도록 유도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개인 대 개인으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걸 좋은 것처럼 포장한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말하며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평생 종속되었다. 자본가는 행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목줄을 매는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목줄을 풀어주면 왜 내게 걸린 목줄을 푸냐고 항의하며 다시 목줄을 매어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되었다. 억압이 권리가 되었다. 정신 나간 구조다. 진실을 아는 자본가는 노동자 인권 운동을 보며 폭소했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알아서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자청해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오오 고맙소이다. 여러분 덕분에 우수한 인재들을 편하게 부려먹고 삽니다. 아, 혜택을 늘려달라고? 최저임금 몇 백 원? 아니면 노동 시간을 좀 줄여줄까? 아, 그래도 그걸 쉽게 해주면 안 되지.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거 몇 푼 올려주거나 시간 좀 줄여준다고 관계가 수직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러니까 조금 혜택을 늘려주고 많이 양보한 것처럼
정말 슬프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해. 그래야 노동자들을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거야. 하하하.」 이처럼 그 누구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노동자 인권 운동가였다. 그러니 불평등한 노사관계 구조로 나타나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천대는 자본가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고정관념의 한계가 만들었다. 그들은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관계 이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 불평등한 관계 내에서 노동자가 겪는 불편함을 배려만 해주었던 것이다. 의도는 훌륭하나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제는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사회를 둘러보라. 사회전체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사회에서 자기 개발을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모든 게 자본가 중심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체계가 완성되면 보다 더 자본가 세상이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취하려면 우선적으로 자본가와
대등하게 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대등하지 않으니까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마치 미성년이 성년과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 받았던 것처럼. 마치 국민이 독재자와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받았던
것처럼.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통치자와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한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의 장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그러니 노동의 개인화로 집단의 장과 대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유롭게 집단을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어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노동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어 자본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FA시장처럼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아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구조가 되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할 수가 있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자본가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낸 세금으로 국가에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 과도한 의존을 피할 수가 있다. 노동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이 보장된다면 정규직이나 해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동등한 상황에서 잠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개인이 개인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언제든지 일자리를
골라가고 여차하면 사업도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저앉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여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사회도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아야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 그들이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걸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개인화.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다. 이것에 대해 잠시 뒤 좀 더 정리해보겠다.
우선 기술독립에 대해 다뤄보겠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를 견제할 열쇠가 된다. 사소한 규제 따위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술과 자본을 분리해야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 삼권분립처럼 기술과 자본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기술과 자본을 둘 다 쥐고 있으니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이를 먼저 바꿔야 한다. 연구자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연구자는 노력 대비 사회적 대우가 낮은 편이다.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와 어느 정도 비등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비슷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연구자는 집단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 구조에서는 연구자가 대부분 자본가 밑으로 들어간다. 오히려 대부분 그걸 바라고 있다. 자본이 많은 자본가 밑으로 들어가면 성공했다고 한다. 더 훌륭한 주인을 만났다고 자랑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의 대표로 모두 대등한 관계다. 실상은 좀 다르긴 한데 구조 자체는 그렇다. 법조계나 의료계는 언제든지 집단에서 나와 자영업을
할 수 있다. 개인 변호사 개업을 하건 개인 병원을 개원할 수
있다. 그러다가도 언제든지 집단으로 복귀할 수 있다. 자유롭다. 개인이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차이 때문에 노력은 비슷함에도 사회적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과학고 학생들의 의과대 지망을
불렀다. 과학고에서 의과대를 지망하는 학생은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그걸 그만두고
의과대를 지망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의사가 되기 어렵다는 건 대부분 안다. 시간과 노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과학고 학생과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의과대를 지망했다. 왜 그렇겠는가? 사회적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만큼 기술에 대한 대우도 낮아졌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상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기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렇게 기술독립이 되어야 연구자의 사회적 대우가 정상적이게 되고, 그래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술을 개인의 소유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법적으로 「모든 기술은 개발한 연구자의 소유가 된다.」라고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공동연구를 했다면 개발한 기술 지분을 서로
나눠 가지면 된다. 그렇게 소유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양도할 때에는 양도세를 아주 높게 받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자본가에게 제공되어 기술을 가진 연구자는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고 연구자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로열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은 상황에도 동일하다. 그걸 고려하여 로열티로 회수한다는 개념으로 투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자본가가 기술을 무단 도용할 경우엔 연구자 개개인이 모여 대응하면 된다.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구조가
마련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모여 그런 기업에 어떤 기술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기술이 자본을 견제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국외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국외에 기술 양도나 대여를 엄격하게 심사하면 된다. 국내에 떨어진 운석을 해외에 반출할 수 없도록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지금 한국은 기술유출이 활발하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발상을 바꿔야 한다. 그건 그만큼 연구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 자본가가 내려주는 돈만 받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연구자는 자신의 기술로 만든 상품으로 자본가가
돈을 쓸어가는 걸 보고 「재주는 연구자가 부리고 돈은 자본가가 벌어가네.」라며 생각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하는 일은 많다. 기술을 가지고 어떤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걸 관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상품이 판매되는 만큼 그에 대한 기술 대여료를 연구자에게
지불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기술유출을 불렀다고 본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 것이다. 완전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자동으로 자율트럭에
실려 자동으로 배송되어 자동으로 무인 상점에 진열된다. 그 구조를 관리 운영할 사람 외에는 사람이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비대해진 힘을 누가 견제할 수 있겠는가? 정계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는 국민들의 의향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국민들은 자본가에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정계도 자본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니 정계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노사관계 구조로는 쉽게 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조계인가? 아니다. 이미 법조계는 자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전관예우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전관예우는 자본에 영향을 받는 전직 관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원인이라 본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법이 자본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은 법조계의 자본종속을 가속화시킨다. 정상적인 판결도 국민의 법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인공지능 판사를 거론되며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법조계도 인공지능이 내린 판결이 실제 판결에 영향을 주고, 인공지능을 소유한 자본가에게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보다 우수한 검진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독립되어있던 이들마저도 자본가에게 종속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단순히 연구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연구자가 기술독립을 하여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야 사회에 속한 다른 전문직들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모든 사람들, 특히 자본에 종속되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사안이다. 자본가도 개인의 소유를 중시한다고 알고 있는데 부디
기술독립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구자가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분야는 정말 뛰어나지만 다른 분야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두루두루 뛰어나지만 각각의 전문가에 비하면
깊이는 부족하다. 그 차이가 정치력의 차이를 불렀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알아야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줘서 정치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력의 부재는 정계 진출의 벽이 되었다. 연구자가 사회적 영향력이 적은 까닭은 이런 정치력 차이 때문이다. 비슷한 계열인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둘 다 좁고 깊게 알아 의사와 연구자가 정계에 진출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의사는 의사협회가 굉장히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협회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그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런 정치적인 협회가 없는 걸로 안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명하진 않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우선 좁고 깊게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좀 더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거나 정치적인 집단을 하나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집단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에서 하면
적절하다고 본다. 기술독립과 정치력 보유. 이것이 가능해야 연구자를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자본과 기술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
노동의 개인화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를 위한 집단이라 하면 노동조합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그 역할을 해낼 수가 없다. 결국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 종속된 노동조합은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만 요구했다. 불평등한 노사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달라고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많은 혜택을 줘서 보다 더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하여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도 같은 노사관계 구조를 단단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완전히 분리된 어떤 국가에서 공인한 집단이 필요하다. 각 분야별로 분야를 대표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민주적인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 집단의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조직, 조합, 연맹, 협회 등. 딱히 와 닿는 게 없다. 기존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새로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첫 발상은 길드다. 중세 유럽의 길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온라인 게임의 모임을 뜻하는 길드를 말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길드는 대부분 지극히 민주적이다. 어떤 것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주의가 게임의
역할수행에서 발상한 것처럼, 어떤 민주적인 집단도 게임의 길드를 보고 발상한 것이다. 누군가는 게임에서 발상했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좋지 못한 편견이다. 모든 정보는 편견 없이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일단 길드라고 가칭하겠다.
길드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자.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길드장을 민주적인
절차로 뽑는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도록 지원한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예컨대 연구자 길드. 연구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기술독립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소유하고 있어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술을 탈취 또는 도용 당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 또는 법적으로 대응을 대신해줄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연구자 길드가 될 것이다. 연구자 길드는 모든 연구자가 모여 힘을 합쳐 부당한
것에 대응한다. 예컨대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더 이상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연구자가 자본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개인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의 개인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각 분야별로 힘을 합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노동조합은 기업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파업을 하더라도 효과가 크지 못하다. 정치와 연계해야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길드에서 특정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대등하고 효과적이다. 그 자본가에게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다. 만약 정말 일할 곳이 없으면 노동자 중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처음부터 학교에서 직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가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취업은 다른 곳에 맡겼어야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실제 노동 현장과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학교가 즉각적으로 현장과 상호작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취업에만 전념하는 길드가 필요하다. 그런 길드에서는 노동교육과 금융교육 같은 사회에
필수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그걸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농노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인식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동자는 자본가 밑에서 노동력만 제공하면 된다고 인식해왔으니까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길드는 그런 필수적인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사회에 대해 세부적인 것은 알려주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내던지듯 보내버리는 현행 교육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애초에 교육과 사회활동을 동시에 해가며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게 했어야 한다. 미성년부터 작은 일거리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술가 길드. 예술가 길드에 가입한 미성년은 길드게시판에 올라온
임무들을 살펴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가게 앞에서 연주를 한다.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려준다. 그렇게 미성년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신뢰도 점수를 쌓아가며 더 높은 대우를 받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평가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런 가치로 FA시장의 스포츠 선수처럼 각 기업에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미성년은 경험을 쌓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여러 길드에 가입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해보며 적성을 찾으면 된다고 본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민주적인 절차로 길드장을 뽑는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길드의 주인은 길드원이다. 이런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노동이
자본에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더라도 실제 기업 내에서는 대부분 그것과 무관하다. 노동조합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는 그런 것조차 없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을 분리해서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진정한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관계 이상도 이하도 필요 없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가 없다. 충분한 대가만 지불되면 종속되지도 책임지지도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은 해당 역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다. 노동자는 역할만 잘 수행하고 자본가는 그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한 제반 사항, 예컨대 안전장비 등을 마련해준다. 노동자는 역할수행 능력만 있으면 되고 자본가는 역할수행 능력만 보면 된다. 모든 기업은 직급이 필요가 없다. 해당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역할을 맡으면 된다. 질서가 혼란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역할만 존중하면 질서가 유지된다. 모든 인간은 대등하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자녀와 부모도 같다. 자녀는 부모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 생계유지 때문에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기초생활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건 세금을 받는 정부의 의무다. 자본가나 길드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를 평가하여 노동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평가하여 자본가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 좋은 대우를 제공하는 자본가에게는 노동자들이 몰리고 좋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는 자본가들이
몰린다. 이런 식으로 대등해져야 갑질하는 자본가가 사라지고
능력이 있는 노동자가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 노동자가 오랫동안 기업에 있었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를 강요하며 해고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 이런 구조가 되면 분명 능력이 없는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특히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수록 그렇다. 그런 노동자는 길드게시판에 있는 임무를 행하며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면 된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미성년 때부터 개인의 능력을 갈고 닦고 임무를 수행하며
경험치를 쌓는다. 그런 과정으로 개인의 레벨을 올린다. 뜬금없는 소리라서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인가? 맞다.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얕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인간에게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지나치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게임중독 증상까지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 같은 물질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까지 중독되는 것은 게임이 그만큼 효율적인 만족도를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게임 내 반복 작업은 실제 일보다 더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도 있다. 그럼에도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묵묵하게 그 반복작업을
한다. 게임 같은 구조가 되면 반복작업조차 자발적으로 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노동을 즐기며 능력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예컨대 단순히 동네 청소하는 임무도 길드 내에서
자신의 레벨에 영향을 준다고 듣는다면 좋다고 할 사람이 많다. 설령 좀 어려운 임무, 그러니까 뉴트리아 사냥 같은 유해조수 사냥도 기꺼이 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레벨이 오른다는 것 말고는 실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노동의욕은 굉장히 증가할 거라 본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감투 하나 씌워줘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자발적 노동과 자발적 자기개발은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세상은 보다 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될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상인들도 NPC로 인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생산한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가게 점원도 무인 상점으로 인간이 아니다. 현실이 게임 세상과 점점 비슷해진다. 사람들은 게임의 모험가처럼 능력을 갈고 닦으며, 그 능력을 가지고 능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능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게임 내 모험가가 임무를 받고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처럼 현실 속 길드원은 임무를 받고 일 처리를 한다. 레벨이 오르고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가 높은 임무를 수행하거나 수준 높은 어떤 집단에 잠시 소속되어 능력을 제공한다. 개인 능력 향상에 게임 레벨링을 도입하는 게 이상적이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지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국민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한다.」가 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전부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는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학력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일자리는 적은 상황이다. 그걸 활용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는 고학력자들을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어야 인구수가 많은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천만 명 이상이 싱크탱크에 속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속에서 나오는 진주 같은 아이디어는 국가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길드에서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어떤 임무들이
공지되면 국민들은 그 임무에 맞는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그 중 적절한 아이디어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형태는 공모전과 유사하지만 좀 더 적극적이다. 이런 아이디어의 생산도 개인의 레벨에 영향을 주게
되면 된다. 그러면 뭔가 남는다는 느낌이 있어 적극적으로 생산할
것이다. 굳이 아이디어가 아니어도 좋다. 예컨대 번역을 할 때나 자료를 수집하거나 정보를
정리할 때 집단지성은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위키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위키가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본다.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걸 이용해서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국민들의 지적 수준 향상을
위해서 위키와 같은 인터넷 정보공급사이트가 보다 발달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겠다. 발달된다면 위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오류나 거짓들이 개선될 거라 본다. 위키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위키와 논문이 같은 정보를 제공함에도 위키를
무시하고 논문을 신뢰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역할분담이다. 그 외에도 길드는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임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자본가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하는 사업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길드원들의 능력을 갈고 닦아 적정 수준을 유지하여, 그들이 언제든지 그릇된 자본가의 사업을 대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 개인이 사업을 하게 되면 그 개인은 길드를 탈퇴하고 자본가와 동일한 일을 하면 된다. 동일하게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 속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면 된다. 그 개인은 길드 출신 사업가이므로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를 보다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자녀와 부모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 정치력이 낮은 편이다. 그런 그들을 대변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된 길드장이 직접 정치적인 활동하거나 정치력이 뛰어난 길드원을 선발해
활동하도록 하면 된다고 본다. 그걸 길드원들이 인정해주면 된다.
일단 이 정도까지 해두자. 상세하진 않더라도 의도하는 바는 파악되었을 거라
본다. 요점은 노동의 개인화다. 그것이 자유주의 국가의 노사관계 구조라고 본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길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도착 후의 세상은 보다
전문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갈거라 생각한다. 이 주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꾸준히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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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대부분이 초안입니다. 오타도 많고 오류도 많습니다. 그래도 그걸 일일이 수정할 바엔 새로운 걸 생각하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이 주제를 비롯해 대부분은 그냥 새 글로 다시 쓸 것 같습니다. 아마 자유주의와 역할주의 같은 새로운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 작성한 글 같은 건 계속 수정 반복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새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 생각은 나아가니까요.
저는 사상가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거든요. 보통 생각에 쓰는 시간이 90%고 글에 쓰는 시간이 10%정도 되는 거 같아요. 생각이 많다 보니 사회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던
과거가 있을 정도였죠. 도덕적 이유로 신체 부자유를 겪고 도덕에 반항하는 걸 포기한 채 순종하는 길을 걸어왔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씁쓸하네요. 모두 사상의 자유를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