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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노동의 개인화와 기술독립 (2) 2021/02/09 PM 05:48

노동의 개인화와 기술독립

 

 

 

한국은 노동자 인권 운동 방식이 잘못되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동자 인권 운동을 해왔음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나? 왜 변하는 게 없지? 자본가 때문인가?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더 강화된 규제를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한다고 한들 별반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사관계 구조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노사관계는 과거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직원과 공장주의 관계가 되었다. 농노가 지주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공장직원은 공장주에게 종속되었다. 농노와 공장직원은 노예와 국민으로서 신분이 달랐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은 같았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 이것이 현대 노사관계의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불평등하다. 그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농노에게 몇 가지 혜택을 부여하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예컨대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준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적당한 급여를 지불하고 휴가와 같은 복지를 지원한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다른 지주 밑에서도 일할 수 있게끔 해보자. 지금과 무엇이 다른 것 같은가? 노동자가 노동자에 머무르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에서 벗어나야만 농노와 달라진다. 구조 자체가 그렇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농노의 위치에서 다양한 혜택만 늘어난 것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공무원은 공노비, 사기업 직원은 사노비. 사람들은 어떤 집단에 종속되어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다며 스스로를 자조하고 서로를 조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노사관계 구조는 과거 농노와 지우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답인 걸까? 아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그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종속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자유 유무와 생산성이나 향상심 따위가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구조는 같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든 노동자가 힘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자유롭게 했고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평등하게 했다. 자본주의는 주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 국민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주권을 주었고 공산주의는 독재주의를 전제해 인민들을 평등하게 지배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라졌다. 그 정치체제의 차이로 자유권이나 개인의 소유권이 달라짐에 따라 개개인의 생활환경도 달라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적으로 본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타적으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이런 차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노동자가 공산주의의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환경이 나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자유인가, 평등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자유보다 평등을 추구하며 자유를 억압했던 공산주의를 더욱 더 추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등장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우선 지금까지 노동자 인권을 위해 해왔던 것을 살펴보자. 노동자 인권 운동은 이런 것이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불평등한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자를 배려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배려로 노동자의 불편과 불만은 다소 해소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노사관계 구조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관계가 불평등했기 때문에 지금도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부격차가 커진다. 자본가의 위상은 높아져만 간다. 어째서 노동자를 위해 운동하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그 운동이 사실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힘을 길려줬기 때문이었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되새겨보자. 그리고 노동자 인권 운동이 주장하던 걸 생각해보자. 평생 직장이란 이름으로 평생 동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도록 유도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개인 대 개인으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걸 좋은 것처럼 포장한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말하며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평생 종속되었다. 자본가는 행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목줄을 매는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목줄을 풀어주면 왜 내게 걸린 목줄을 푸냐고 항의하며 다시 목줄을 매어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되었다. 억압이 권리가 되었다. 정신 나간 구조다. 진실을 아는 자본가는 노동자 인권 운동을 보며 폭소했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알아서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자청해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오오 고맙소이다. 여러분 덕분에 우수한 인재들을 편하게 부려먹고 삽니다. , 혜택을 늘려달라고? 최저임금 몇 백 원? 아니면 노동 시간을 좀 줄여줄까? , 그래도 그걸 쉽게 해주면 안 되지.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거 몇 푼 올려주거나 시간 좀 줄여준다고 관계가 수직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러니까 조금 혜택을 늘려주고 많이 양보한 것처럼 정말 슬프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해. 그래야 노동자들을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거야. 하하하.」 이처럼 그 누구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노동자 인권 운동가였다. 그러니 불평등한 노사관계 구조로 나타나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천대는 자본가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고정관념의 한계가 만들었다. 그들은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관계 이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 불평등한 관계 내에서 노동자가 겪는 불편함을 배려만 해주었던 것이다. 의도는 훌륭하나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제는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사회를 둘러보라. 사회전체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사회에서 자기 개발을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모든 게 자본가 중심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체계가 완성되면 보다 더 자본가 세상이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취하려면 우선적으로 자본가와 대등하게 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대등하지 않으니까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마치 미성년이 성년과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 받았던 것처럼. 마치 국민이 독재자와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받았던 것처럼.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통치자와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한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의 장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그러니 노동의 개인화로 집단의 장과 대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유롭게 집단을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어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노동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어 자본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FA시장처럼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아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구조가 되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할 수가 있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자본가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낸 세금으로 국가에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 과도한 의존을 피할 수가 있다. 노동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이 보장된다면 정규직이나 해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동등한 상황에서 잠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개인이 개인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언제든지 일자리를 골라가고 여차하면 사업도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저앉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여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사회도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아야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 그들이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걸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개인화.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다. 이것에 대해 잠시 뒤 좀 더 정리해보겠다.

 

 

 

우선 기술독립에 대해 다뤄보겠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를 견제할 열쇠가 된다. 사소한 규제 따위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술과 자본을 분리해야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 삼권분립처럼 기술과 자본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기술과 자본을 둘 다 쥐고 있으니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이를 먼저 바꿔야 한다. 연구자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연구자는 노력 대비 사회적 대우가 낮은 편이다.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와 어느 정도 비등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비슷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연구자는 집단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 구조에서는 연구자가 대부분 자본가 밑으로 들어간다. 오히려 대부분 그걸 바라고 있다. 자본이 많은 자본가 밑으로 들어가면 성공했다고 한다. 더 훌륭한 주인을 만났다고 자랑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의 대표로 모두 대등한 관계다. 실상은 좀 다르긴 한데 구조 자체는 그렇다. 법조계나 의료계는 언제든지 집단에서 나와 자영업을 할 수 있다. 개인 변호사 개업을 하건 개인 병원을 개원할 수 있다. 그러다가도 언제든지 집단으로 복귀할 수 있다. 자유롭다. 개인이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차이 때문에 노력은 비슷함에도 사회적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과학고 학생들의 의과대 지망을 불렀다. 과학고에서 의과대를 지망하는 학생은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그걸 그만두고 의과대를 지망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의사가 되기 어렵다는 건 대부분 안다. 시간과 노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과학고 학생과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의과대를 지망했다. 왜 그렇겠는가? 사회적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만큼 기술에 대한 대우도 낮아졌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상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기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렇게 기술독립이 되어야 연구자의 사회적 대우가 정상적이게 되고, 그래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술을 개인의 소유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법적으로 「모든 기술은 개발한 연구자의 소유가 된다.」라고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공동연구를 했다면 개발한 기술 지분을 서로 나눠 가지면 된다. 그렇게 소유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양도할 때에는 양도세를 아주 높게 받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자본가에게 제공되어 기술을 가진 연구자는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고 연구자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로열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은 상황에도 동일하다. 그걸 고려하여 로열티로 회수한다는 개념으로 투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자본가가 기술을 무단 도용할 경우엔 연구자 개개인이 모여 대응하면 된다.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구조가 마련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모여 그런 기업에 어떤 기술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기술이 자본을 견제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국외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국외에 기술 양도나 대여를 엄격하게 심사하면 된다. 국내에 떨어진 운석을 해외에 반출할 수 없도록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지금 한국은 기술유출이 활발하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발상을 바꿔야 한다. 그건 그만큼 연구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 자본가가 내려주는 돈만 받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연구자는 자신의 기술로 만든 상품으로 자본가가 돈을 쓸어가는 걸 보고 「재주는 연구자가 부리고 돈은 자본가가 벌어가네.」라며 생각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하는 일은 많다. 기술을 가지고 어떤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걸 관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상품이 판매되는 만큼 그에 대한 기술 대여료를 연구자에게 지불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기술유출을 불렀다고 본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 것이다. 완전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자동으로 자율트럭에 실려 자동으로 배송되어 자동으로 무인 상점에 진열된다. 그 구조를 관리 운영할 사람 외에는 사람이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비대해진 힘을 누가 견제할 수 있겠는가? 정계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는 국민들의 의향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국민들은 자본가에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정계도 자본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니 정계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노사관계 구조로는 쉽게 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조계인가? 아니다. 이미 법조계는 자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전관예우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전관예우는 자본에 영향을 받는 전직 관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원인이라 본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법이 자본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은 법조계의 자본종속을 가속화시킨다. 정상적인 판결도 국민의 법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인공지능 판사를 거론되며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법조계도 인공지능이 내린 판결이 실제 판결에 영향을 주고, 인공지능을 소유한 자본가에게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보다 우수한 검진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독립되어있던 이들마저도 자본가에게 종속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단순히 연구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연구자가 기술독립을 하여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야 사회에 속한 다른 전문직들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모든 사람들, 특히 자본에 종속되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사안이다. 자본가도 개인의 소유를 중시한다고 알고 있는데 부디 기술독립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구자가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분야는 정말 뛰어나지만 다른 분야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두루두루 뛰어나지만 각각의 전문가에 비하면 깊이는 부족하다. 그 차이가 정치력의 차이를 불렀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알아야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줘서 정치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력의 부재는 정계 진출의 벽이 되었다. 연구자가 사회적 영향력이 적은 까닭은 이런 정치력 차이 때문이다. 비슷한 계열인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둘 다 좁고 깊게 알아 의사와 연구자가 정계에 진출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의사는 의사협회가 굉장히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협회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그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런 정치적인 협회가 없는 걸로 안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명하진 않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우선 좁고 깊게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좀 더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거나 정치적인 집단을 하나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집단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에서 하면 적절하다고 본다. 기술독립과 정치력 보유. 이것이 가능해야 연구자를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자본과 기술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

 

 

 

노동의 개인화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를 위한 집단이라 하면 노동조합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그 역할을 해낼 수가 없다. 결국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 종속된 노동조합은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만 요구했다. 불평등한 노사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달라고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많은 혜택을 줘서 보다 더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하여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도 같은 노사관계 구조를 단단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완전히 분리된 어떤 국가에서 공인한 집단이 필요하다. 각 분야별로 분야를 대표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민주적인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 집단의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조직, 조합, 연맹, 협회 등. 딱히 와 닿는 게 없다. 기존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새로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첫 발상은 길드다. 중세 유럽의 길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온라인 게임의 모임을 뜻하는 길드를 말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길드는 대부분 지극히 민주적이다. 어떤 것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주의가 게임의 역할수행에서 발상한 것처럼, 어떤 민주적인 집단도 게임의 길드를 보고 발상한 것이다. 누군가는 게임에서 발상했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좋지 못한 편견이다. 모든 정보는 편견 없이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일단 길드라고 가칭하겠다.

길드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자.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길드장을 민주적인 절차로 뽑는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도록 지원한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예컨대 연구자 길드. 연구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기술독립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소유하고 있어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술을 탈취 또는 도용 당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 또는 법적으로 대응을 대신해줄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연구자 길드가 될 것이다. 연구자 길드는 모든 연구자가 모여 힘을 합쳐 부당한 것에 대응한다. 예컨대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더 이상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연구자가 자본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개인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의 개인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각 분야별로 힘을 합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노동조합은 기업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파업을 하더라도 효과가 크지 못하다. 정치와 연계해야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길드에서 특정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대등하고 효과적이다. 그 자본가에게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다. 만약 정말 일할 곳이 없으면 노동자 중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처음부터 학교에서 직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가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취업은 다른 곳에 맡겼어야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실제 노동 현장과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학교가 즉각적으로 현장과 상호작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취업에만 전념하는 길드가 필요하다. 그런 길드에서는 노동교육과 금융교육 같은 사회에 필수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그걸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농노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인식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동자는 자본가 밑에서 노동력만 제공하면 된다고 인식해왔으니까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길드는 그런 필수적인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사회에 대해 세부적인 것은 알려주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내던지듯 보내버리는 현행 교육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애초에 교육과 사회활동을 동시에 해가며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게 했어야 한다. 미성년부터 작은 일거리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술가 길드. 예술가 길드에 가입한 미성년은 길드게시판에 올라온 임무들을 살펴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가게 앞에서 연주를 한다.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려준다. 그렇게 미성년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신뢰도 점수를 쌓아가며 더 높은 대우를 받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평가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런 가치로 FA시장의 스포츠 선수처럼 각 기업에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미성년은 경험을 쌓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여러 길드에 가입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해보며 적성을 찾으면 된다고 본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민주적인 절차로 길드장을 뽑는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길드의 주인은 길드원이다. 이런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노동이 자본에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더라도 실제 기업 내에서는 대부분 그것과 무관하다. 노동조합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는 그런 것조차 없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을 분리해서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진정한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관계 이상도 이하도 필요 없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가 없다. 충분한 대가만 지불되면 종속되지도 책임지지도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은 해당 역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다. 노동자는 역할만 잘 수행하고 자본가는 그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한 제반 사항, 예컨대 안전장비 등을 마련해준다. 노동자는 역할수행 능력만 있으면 되고 자본가는 역할수행 능력만 보면 된다. 모든 기업은 직급이 필요가 없다. 해당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역할을 맡으면 된다. 질서가 혼란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역할만 존중하면 질서가 유지된다. 모든 인간은 대등하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자녀와 부모도 같다. 자녀는 부모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 생계유지 때문에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기초생활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건 세금을 받는 정부의 의무다. 자본가나 길드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를 평가하여 노동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평가하여 자본가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 좋은 대우를 제공하는 자본가에게는 노동자들이 몰리고 좋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는 자본가들이 몰린다. 이런 식으로 대등해져야 갑질하는 자본가가 사라지고 능력이 있는 노동자가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 노동자가 오랫동안 기업에 있었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를 강요하며 해고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 이런 구조가 되면 분명 능력이 없는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특히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수록 그렇다. 그런 노동자는 길드게시판에 있는 임무를 행하며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면 된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미성년 때부터 개인의 능력을 갈고 닦고 임무를 수행하며 경험치를 쌓는다. 그런 과정으로 개인의 레벨을 올린다. 뜬금없는 소리라서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인가? 맞다.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얕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인간에게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지나치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게임중독 증상까지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 같은 물질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까지 중독되는 것은 게임이 그만큼 효율적인 만족도를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게임 내 반복 작업은 실제 일보다 더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도 있다. 그럼에도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묵묵하게 그 반복작업을 한다. 게임 같은 구조가 되면 반복작업조차 자발적으로 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노동을 즐기며 능력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예컨대 단순히 동네 청소하는 임무도 길드 내에서 자신의 레벨에 영향을 준다고 듣는다면 좋다고 할 사람이 많다. 설령 좀 어려운 임무, 그러니까 뉴트리아 사냥 같은 유해조수 사냥도 기꺼이 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레벨이 오른다는 것 말고는 실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노동의욕은 굉장히 증가할 거라 본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감투 하나 씌워줘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자발적 노동과 자발적 자기개발은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세상은 보다 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될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상인들도 NPC로 인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생산한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가게 점원도 무인 상점으로 인간이 아니다. 현실이 게임 세상과 점점 비슷해진다. 사람들은 게임의 모험가처럼 능력을 갈고 닦으며, 그 능력을 가지고 능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능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게임 내 모험가가 임무를 받고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처럼 현실 속 길드원은 임무를 받고 일 처리를 한다. 레벨이 오르고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가 높은 임무를 수행하거나 수준 높은 어떤 집단에 잠시 소속되어 능력을 제공한다. 개인 능력 향상에 게임 레벨링을 도입하는 게 이상적이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지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국민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한다.」가 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전부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는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학력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일자리는 적은 상황이다. 그걸 활용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는 고학력자들을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어야 인구수가 많은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천만 명 이상이 싱크탱크에 속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속에서 나오는 진주 같은 아이디어는 국가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길드에서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어떤 임무들이 공지되면 국민들은 그 임무에 맞는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그 중 적절한 아이디어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형태는 공모전과 유사하지만 좀 더 적극적이다. 이런 아이디어의 생산도 개인의 레벨에 영향을 주게 되면 된다. 그러면 뭔가 남는다는 느낌이 있어 적극적으로 생산할 것이다. 굳이 아이디어가 아니어도 좋다. 예컨대 번역을 할 때나 자료를 수집하거나 정보를 정리할 때 집단지성은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위키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위키가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본다.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걸 이용해서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국민들의 지적 수준 향상을 위해서 위키와 같은 인터넷 정보공급사이트가 보다 발달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겠다. 발달된다면 위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오류나 거짓들이 개선될 거라 본다. 위키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위키와 논문이 같은 정보를 제공함에도 위키를 무시하고 논문을 신뢰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역할분담이다. 그 외에도 길드는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임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자본가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하는 사업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길드원들의 능력을 갈고 닦아 적정 수준을 유지하여, 그들이 언제든지 그릇된 자본가의 사업을 대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 개인이 사업을 하게 되면 그 개인은 길드를 탈퇴하고 자본가와 동일한 일을 하면 된다. 동일하게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 속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면 된다. 그 개인은 길드 출신 사업가이므로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를 보다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자녀와 부모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 정치력이 낮은 편이다. 그런 그들을 대변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된 길드장이 직접 정치적인 활동하거나 정치력이 뛰어난 길드원을 선발해 활동하도록 하면 된다고 본다. 그걸 길드원들이 인정해주면 된다.

 

 

 

일단 이 정도까지 해두자. 상세하진 않더라도 의도하는 바는 파악되었을 거라 본다. 요점은 노동의 개인화다. 그것이 자유주의 국가의 노사관계 구조라고 본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길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도착 후의 세상은 보다 전문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갈거라 생각한다. 이 주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꾸준히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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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대부분이 초안입니다. 오타도 많고 오류도 많습니다. 그래도 그걸 일일이 수정할 바엔 새로운 걸 생각하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이 주제를 비롯해 대부분은 그냥 새 글로 다시 쓸 것 같습니다. 아마 자유주의와 역할주의 같은 새로운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 작성한 글 같은 건 계속 수정 반복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새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 생각은 나아가니까요.

 

저는 사상가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거든요. 보통 생각에 쓰는 시간이 90%고 글에 쓰는 시간이 10%정도 되는 거 같아요. 생각이 많다 보니 사회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던 과거가 있을 정도였죠. 도덕적 이유로 신체 부자유를 겪고 도덕에 반항하는 걸 포기한 채 순종하는 길을 걸어왔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씁쓸하네요. 모두 사상의 자유를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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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wa    친구신청

다 읽진 못앴지만 어떤 글은 잘 모르는 저도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네요 시사 교양 서적같은 느낌으로 다듬으면 많이 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틴    친구신청

잘 쓰시네요...
[글] 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 (4) 2021/01/31 PM 06:09

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

 

 

 

한국은 인권 향상 방법이 잘못되었다. 인권과 관련된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약자를 강자와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약자가 약자인 상태에 머무르게 하며 약자로서 불편한 점만 배려해주었다. 약자라서 겪는 억압은 그대로 두고 억압을 받으면서 생기는 불편한 점에 대해서만 배려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누군가의 강요로 주저앉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되어 불편한 점이 매우 많았다. 가장 큰 불편함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 주저앉은 사람의 세계는 몹시 좁았다. 서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동경이나 증오를 하거나 절망하며 체념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다. 주저앉은 사람은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다. 그걸 보고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 보통 주저앉은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행동의 자유라는 권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 있는 사람A는 그러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A가 주저앉은 사람 곁에서 주저앉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부당함, 불이익 등을 고려에 그에 상응하는 이익만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준 것이다. 그렇게 혜택만 주고 그대로 놔둔 채 볼일 보러 갔다.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여전히 서 있는 사람과 대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 있는 사람A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사회규범이 만든 고정관념에 의해 주저앉은 사람은 계속 주저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가 곁에 있지 않을 때에는 차별 받고 억압 받고 괴로움을 당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괴로울수록 서 있는 사람A가 주는 배려에 기대며 배려만 바라보게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배려는 이제 인권이 되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다. 그런 칭찬으로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권력을 쥐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의 의사와 상관없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너도 나도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주저앉은 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배려를 요구했다. 주저앉아 생기는 불편함을 거론하며 그 불편함을 해소해달라고 강압했다. 서 있는 사람A는 그 강압에 동조하며 찬동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대신 배려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버렸다. 결국 억압이 인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억압을 자청하기 시작했다. 억압에 대한 배려로 주저앉은 사람의 주장이 우선시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걸 악용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괴롭혔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조사 결과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주저앉은 사람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과도한 배려가 그런 힘을 주게 된 것이다. 많은 배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지쳐간다.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은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럴 정도로 많은 배려를 받았음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억압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보던 서 있는 사람B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 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혼자 서는 것은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큰 모험이자 고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서지 않고 주저앉았다. 서서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저앉아 무력하게 배려를 받았다. 그런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동을 당했다. 「꾸미는 것은 서 있는 사람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꾸미지마! 서 있는 사람은 음흉하고 더럽고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도 믿지 말고 관계도 가지지마! 이건 서 있는 사람이 원했던 거니까 해서는 안 돼!」 자유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아무렇지도 않고 선동 당해버렸다.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침묵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서 있는 사람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주저앉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주저앉은 사람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황당하다. 주저앉은 사람은 자유를 억압 받았을 뿐이지 실은 매우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유의 억압과 어리석다는 식의 발언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억압을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것을 순순히 받아드리고야 만다. 정도를 넘어선 사건이 발생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보기에도 이것은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의사를 나타내 보았다. 그리고 무시당했다. 주저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은 대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이 스스로를 낮춰가며 배려를 받았던 만큼 주저앉은 사람의 의사도 존중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걸 가엽게 여긴 서 있는 사람B와 배려에 지친 서 있는 사람C는 주저앉은 사람도 이제는 서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있는 사람C는 더욱 더 크게 외쳤다. 「더 이상 배려를 해줄 수 없다. 너희도 일어서서 의무를 다해라.」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할 수 없었기에 의무를 다하지도 못했었다. 서 있는 사람C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일어나지 못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은 설 줄 모르는 무력한 인간이니 계속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서 있는 사람B C를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그걸 지켜보던 주저앉은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누가 올바른 거지?」 혼란 속에서 서 보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주저앉아 생기는 이득을 강조하며 계속 주저앉도록 유도했다. 「네가 서게 되면 더 이상 배려가 없을지도 몰라. 네가 억압받아야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주저앉은 사람은 배려해주던 서 있는 사람A의 말을 믿고 서려던 걸 포기하고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버린다. 주저앉아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배려를 요구한다. 그들은 계속 주저앉은 채 자유를 억압받으며 살고 있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여성, 미성년, 소수자 등 대게 다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세세한 부분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들을 대등하게 바라보며 권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열등하게 바라보며 배려만 늘려주었던 것이다. 많은 배려로 점점 혜택은 늘어나는데 정작 자유로울 권리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권리는 지나치게 낮고 그 낮은 것에 대한 배려를 해주다 보니 배려로 인한 혜택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굉장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나 미성년이 권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많은 게 아니라 혜택이 많은 것이다. 본인이 당당하게 쟁취한 것은 권리고 타인이 배려해준 것은 혜택이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누리는 그들은 변함없이 인권이 낮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받는 걸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 예전엔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억압으로 받는 배려를 권리인 것처럼 생각해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들이 정당한 권리가 아닌 무력함에 대한 배려라는 걸 깨닫자 많은 사회현상이 해석되었다. 역차별 논란이 일어났던 그 모든 것들이 과도한 권리가 아닌 과도한 배려로 인한 혜택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려를 해주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배려대상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말 잔인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선의라는 점이 더 지독하다. 대부분 선의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고 더욱 더 좋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나 미성년인권을 주장하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실제로 여성과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선 여성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여성은 꾸밀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꾸며서 자신의 매력을 가꾸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탈코르셋을 말하며 꾸밀 자유를 억압한다. 둘째, 여성은 옷 선택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예쁜 옷을 입고 싶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짧은 치마는 잘못되었다며 옷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셋째, 여성은 자신의 성을 상품화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 레이싱 모델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성 상품화할 자유를 억압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자유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다. 어떤 사람은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여성이 그런 걸 했던 것이라며 여성을 위해서 그런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당하다. 여성 인권을 말하는데 남성의 의향이 뭐가 중요한가? 여성 인권을 주장할거면 여성 중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이 꾸미고 싶으면 꾸밀 수 있어야 하고 입고 싶은 곳이 있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성을 상품화하고 싶으면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권리다.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권리란 말이다. 여성의 자유권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가?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떤 남성이 남성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는 알겠다고 말하겠는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평등해진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평등을 내세우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형평성에 매몰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최근 어떤 커뮤니티의 게시물이 기억난다. 세상에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중에서 보다 좋은 음질을 얻기 위해 고액을 들여 집 근처에 전용 전봇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게시물의 의도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준다는 황당한 믿음 때문에 고액을 사용한 것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댓글 반응은 게시자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댓글은 이런 반응이었다. 「그것이 설령 어리석은 행위라 할지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존중 받아야 한다.」 고액을 황당한 것에 사용한 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자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자유로울 권리고 그런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인권타령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노예상이 노예의 인권을 운운하며 노예를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 여성 인권을 위한다면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닌 배려다. 꾸미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꾸미지 않도록 배려한다. 예쁘거나 야한 옷을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밋밋한 옷을 입도록 배려한다. 성 상품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성 상품화를 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니라 배려란 말이다. 이런 배려는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여성 혜택들. 여성 할당제, 여성 주택, 여성 주차장, 여성 혼수, 여성 오지파견 불가 등 여성 특혜들은 전부 그냥 배려다. 이런 것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전제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생각해보자. 여성 할당제의 의미는 여성이 할당제가 필요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인 할당제와 똑같다. 주택, 주차장 따위도 동일하다. 여성이 무력하다는 전제하에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혜택을 보고 여성우월주의라고 하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혜택의 근거가 우월이 아닌 열등인데 어떻게 우월주의가 되나. 반대다. 여성열등주의다. 과거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받았기 때문에 직업의 자유가 없어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이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강제 할당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맞아 보이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다. 이런 게 권리가 아니라 배려다. 진정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평가만 공정하면 된다. 굳이 할당제가 필요하지 않다. 정당한 권리를 바랐다면 할당제가 아니라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할당제를 요구한 것은 여성이 무능하니까 그에 대한 배려를 해달라는 것과 같다. 예컨대 경찰 시험. 남성과 여성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 받는 것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여성이 약하다는 전제하에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예전 어떤 정치가가 불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성인 여성과의 관계를 가리켜 그루밍 범죄라고 칭한 적이 있다. 진짜 황당하다. 그것은 성인 여성조차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라 칭한 것이다. 얼마나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가? 제정신이 아니다. 남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남성은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혼란 속에서 배려가 이익을 주니 그런 천대를 인권마냥 생각해버린다. 사실상 여성 인권을 가장 낮추고 있는 부류는 여성을 열등하다 인식하고 배려를 강요하는 이들이다. 성인지감수성이 무엇인지 아는가? 법적으로 보면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가지는 불리함을 보완해야 한다며 여성 관련 범죄에 대해 여성 측의 진술 및 증언, 증거효력의 인정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성은 무력하기 때문에 배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걸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이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열등함을 주장하고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달라고 강요하고 있다. 주저앉은 사람과 정말 똑같다. 주저앉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낮은 권리와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높은 혜택으로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남성들이 역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여성 인권 운동을 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라고 주장해야 한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렇다. 그래야 법적으로 대등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여성 인권이 올라가 여성이 자유로워야 남성도 자유로워진다. 여성이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이 여성의 매력을 즐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성이 성 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 또한 여성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어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여성 성의 가치가 올라간 것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 생활을 즐기는 여성 수가 적어 희소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여성 성의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많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과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을 동일한 잣대로 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남성은 매력이 있다고 여겨지고 여성은 천박하다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 또한 매력이 있다고 여겨져야 여성이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그런 여성과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억압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남성도 억압을 받는다. 지금 그렇지 않은가? 이런 것이 억압의 굴레다. 지배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아도 남성은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성을 마음대로 성욕의 도구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국가인 한국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으면 남성도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남성과 여성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여성 순결의 중요성을 말하며 처녀에 집착하고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걸레라고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해 결과적으로 남성도 성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성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최소한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모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제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억압의 굴레는 자유국가에서는 비슷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면 억압한 사람도 억압을 당한다. 노동자와 기업의 관계도 그렇다. 기업이 노동자를 억압하면 노동자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기업을 억압한다. 노동자가 기업을 억압하면 다시 한번 기업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걸로 대응한다. 억압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자유국가에서는 이것이 일상이다. 위의 악순환으로 기업 규제가 강화되고 일자리 감소와 직접 고용 기피가 늘어난 것이다. 이것과 별개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일자리가 더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로봇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기업이 내는 로봇세로 국민들에게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완전자동화 사회구조 정립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앞으로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다. 이 부분은 추후 다른 글로 정리해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여성 징병에 대해 논해보자. 여성이 징병되지 않는 것은 여성이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여성에게 징병의 의무가 없는 것도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 여성이 직접 나서서 징병을 요구했어야 했다. 여성 인권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 징병 요구 시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을 억압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과 그 억압으로 받는 배려에 익숙했던 사람의 합작으로 그러지 않았다. 권리 대신 배려를 받아 권리결핍이 과잉혜택을 불러 역차별이 일어나 성별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2014년 서울대 여학생 두 명이 여성 징병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그걸 많은 여성들이 부정적으로 봤다. 징병하지 않는 근거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이었음에도 징병 받지 않는다는 배려를 받기 위해 열등함을 받아드린 것이다. 답답하다. 임신을 핑계로 징병 불가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도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겠다. 임산부와 여성은 다른 존재다. 임산부나 경산부는 징병되지 않아도 된다. 징병대상은 남성과 여성일 뿐이다.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여성은 정당한 징병회피수단을 남성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이다. 임신은 징병에 있어 유리한 권리로 작용할 뿐이다. 생리를 말하는 여성도 있다. 생리 때문에 군에서는 효율적인 인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 군 간부의 존재로 그런 주장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신체검사를 받고 힘이 강한 여성은 군 복무를 하고 그러지 않은 여성은 공익기관에서 근무를 하면 된다. 과거 내가 아직 이타주의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는 여성 징병에 부정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면 여성 또한 군 복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성이 열등하단 인식에서 벗어나 징병이란 의무를 행해야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권리 대신 받는 배려로 인한 역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하는 걸 권리라고 말하는 거지?」 미성년의 자유 억압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런 억압으로 자포자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의 환경은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좋다고 말은 못해도 평범의 선은 유지했다. 그럼에도 자포자기했던 것은 자아가 강하고 두뇌회전이 빨라 자신이 받고 있는 억압이 부당하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왜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지? 왜 내가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지? 왜 내가 싫은 음식을 강제로 먹어야 하지? 왜 내 인간관계나 취미에 간섭하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억압했다. 그것이 대부분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억압을 하고 당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왜 같은 인간인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 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괜히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 혼나게 되었을 것이다. 쓰다 보니 기억난다. 초등학생 때 전단지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합법인가 불법인가도 몰랐다.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같이 전단지 알바를 모집하는 곳을 찾아갔다. 피자집이었다. 배달을 주로 하는 곳이어서 가게 안은 몹시 좁았다. 옹기종기 모여 가게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일하겠단 의사를 전달했다. 몇 가지 당부를 듣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급여는 장당으로 계산했다. 가게 안의 작은 탁자 위에 전단지 뭉치들이 수북이 쌓였다. 각자 전단지 한 뭉치씩 가지고 와서 전단지 위쪽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그러면서 전단지를 붙일 구역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준비가 끝나고 전단지 뭉치를 들고서 거리를 떠돌았다. 보통은 각자 다른 구역을 갔을 테지만 우리들에게는 놀이와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다 같이 돌아다녔다. 한 장씩 붙이고 다니다가 어떤 어른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 어른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험악하게 혼을 냈다. 자기 집 앞에 붙여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벼락 같은 호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서 어린 놈이 벌써부터 이런 일을 해! 울면서 붙였던 전단지를 때서 회수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스카치테이프가 붙은 전단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렸다. 그 뒤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도망쳤거나 피자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 뒤로 학창시절 동안 제대로 된 알바를 해보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이 사건은 그냥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훈육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어른에 대한 불신을 늘리는 사건이 되었다. 좀 차분하게 설득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시선에서 잘못을 일방적으로 꾸짖고 매로 훈육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른이 잘못하면 괜찮아도 아이가 잘못하면 혼이 났다. 아이와 어른은 대등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른에 반항하며 일탈을 일삼는 애들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 애들은 생각이 짧은 멍청이들이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재미난 놀이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다. 아마 밤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동네에 널리고 널린 불법주정차량에 가까이 가서 자세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자세를 잡고 다리를 하늘 위로 쭉 올리더니 불법주정차량의 사이드 미러를 내려찍어서 차와 분리시켰다.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아이들은 폭소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기겁한 나는 그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졌던 걸로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에게 그 행동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을 혼내줄 수 있기에 재미있는 놀이였던 것 같다. 아마 지금 민식이법 놀이와 의도는 비슷할 것이다. 그 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일정부분 이상 도덕에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 파손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생각하면 복잡한 심경이다. 도덕에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런 놀이를 즐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덕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도덕의 지배를 받지 않았어도 충분한 철학적 지식과 사유를 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 올바른 일을 결정할 수 있었을 거라 본다. 올바른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해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개돼지로 취급하여 착하도록 세뇌한 뒤 사육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아이라고 할지라도 교육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다 가능할거라 본다. 아이들을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어리석게끔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현명하고 우수하다. 민식이법 놀이를 생각해보라. 법을 악용해 어른들을 골려 주고 있다. 바둑은 초등학생도 프로가 될 수 있다. 두뇌회전은 아이가 어른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과잉 공급되자 법을 악용할 정도로까지 똑똑해진 것이다. 똑똑한데 방향이 좀 잘못되었을 뿐이다. 좋든 나쁘든 지적 수준이 보장되면 교육 방법에 따라 충분히 올바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어른과 아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모든 걸 자포자기 했다. 마냥 사회에 순종하게 되었다. 도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타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말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했다.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는 말을 하려고 정말 노력했다. 머릿속에서 어떤 언행이 떠오르면 그 언행이 만들 가능성을 하나하나 다 떠오르고, 그 떠오른 가능성을 도덕으로 전부 검열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웠다. 검열하는 동안 대화의 흐름이 끊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리버리 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하면 깊은 후회와 슬픔을 느꼈다. 정확히 도덕이 내게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경쟁을 할 때도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이 상처를 입을 것까지 머릿속에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경쟁에서 이겨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쁜 척을 할 때가 많았다. 경쟁에서 지면 슬프지만 안도했다. 그래서 슬픈 척을 할 때가 많았다. 자아존중감이 최하로 떨어졌다. 언제나 타인이 우선이고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도덕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PC방에 간 적이 있다. 내 옆자리에는 지적장애인이 앉아있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혐오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열린 한글 문서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 문서에는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치 원숭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 몸에서 땀이 줄줄 새어 나왔다. 도덕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나를 찔렀다. 왜 너는 정상이야? 쟤는 저러고 있는데 왜 너는 정상이야? 왜 너는 살고 있어?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조차 지독한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이런 건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었다. 미칠뻔했다. 죽을 것 같은 심적 고통을 느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친구에게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머릿속에서 검열되어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냥 자리를 옮기고 같이 놀다가 헤어졌다. 그때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격한 반응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당시에는 그것조차 굉장한 후회로 돌아왔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고민을 말할 상대가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믿고 기댈 사람이 없었고 이차적으로는 그때까지도 도덕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삼차적으로는 내면에 남은 작은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내면을 문제로 상담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가족이건 친구건 교사건 상담사건 의사건 말이다. 최근에 조금씩 글이나 말로 풀어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계속 생각만 했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것인가? 이유가 뭔가? 도대체 왜! 지금은 안다. 내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었구나. 신체자유의 억압을 느껴 더 이상 억압에 대한 반항을 포기하고 도덕에 순종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잃어버린 거였구나. 인간을 어떤 사상의 노예로 만들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그 사상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걸 보면 몹시 불편하고 괴로워진다. 한국 사회에 예민하고 진지하고 불편한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만큼 도덕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말하면 건방진 것 같아 불편해진다. 여성이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지면 문란한 것 같아 불편해진다. 보통 도덕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다. 최근 여성주의자들이 온갖 것이 불편하다며 호소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여성주의에 지배 받는 사람들은 여성주의에 어긋나는 것과 같은 걸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해진다. 그래서 그걸 여성주의에 맞춰 바로잡으려고 한다. 발작하듯 잘못되었다고 호소하고 항의하고 억지로 바뀐다. 보통 사상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 그들이 불편한 것은 그들이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이슬람인이 마호메트 풍자만 봐도 발작하며 풍자한 사람을 참수하는 것과 같게 된다. 어떤 사상이든 지배를 받으면 그렇게 된다. 사상의 노예다. 따라서 인간은 특성 사상에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도덕보다 자유가 우선되는 이유다. 다양한 사상들을 접한 뒤 옳고 그름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사람들과 토론하여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미성년을 예로 들어보겠다. 미성년은 자유를 억압받는다. 인권 중 자유권이 굉장히 낮다. 미성년과 성년은 대등하지 못했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시간 관계없이 검열이 없는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셧다운제를 도입해 야간에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도록 막았다. 늦은 시각까지 학원에 다녀와 잠들기 전 잠깐 게임을 즐기는 것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검열을 통해 온전한 문화를 즐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과거 만화 검열 시대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검열의 칼날은 존재했다. 그 칼날은 실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자신의 불편유무에 따라 잘라내는 걸 결정했다. 요즘은 여성주의에 영향을 받아 야한 걸 많이 검열한다. 그런데 알고는 있겠지? 아이들이 검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야한 것을 보고 즐기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아이들 성욕을 야한 게 아니면 해소할 방법이 없는데 누가 야한 걸 안보겠냔 말이다. 지독한 억압을 받거나 욕구가 없는 일부를 제외하면 다 본다. 사춘기가 온 이들에게 야한 걸 검열하는 건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한 허울뿐인 검열이다. 특히 여성이 야한 옷을 입으면 여성이 많이 불편해한다. 그런 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아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남성이 야한 옷을 입는다고 남성이 불편해하는 일이 있었던가? 여성은 지금까지 조신하고 정숙하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강압을 받아왔다. 그 억압에 의해 야한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들의 발작적인 야한 것의 검열은 과거 남성들이 주입한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런 자기검열이야말로 남성에 종속적인 것이다. 부디 여성이 자유롭게 되길 바란다. 폭력적이거나 범죄를 다룬 것에 대한 검열도 의미가 없다. 뉴스만 봐도 그거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도 많다. 범죄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민식이법 놀이를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사리분별이 어려운 정말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검열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는 힘을 저해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웬만한 것들은 편견 없이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걸 학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냥 주입식으로 올바른 것만 가르치는 것은 그 인간의 성장을 막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가르침의 노예가 된다. 지금의 검열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수동적이고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검열은 우민을 위한 정책이다. 한국인이 현명하다면 검열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개인사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강제한다. 이동통신사는 청소년에게 유해정보 차단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법이 시행되고 다양한 회사에서 스마트폰 감시 앱이 나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보호라는 미명아래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했다. 스마트폰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을 감시했다.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어떤 문자를 보내는지, 무슨 앱을 사용했는지 확인한다. GPS기능을 이용해 어디에 이동조차 감시한다. 미성년은 독재국가의 국민들처럼 통제와 억압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받는다. 그럼에도 어떤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인권이 없기 때문에 발언의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부모나 교사가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다소 위험할지라도 그만큼의 자유를 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없다. 언제나 스마트폰이 지켜보고 있다. 성년은 미성년을 대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리 감시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호를 위해서라는 말로 합리화할 뿐이다. 보호라. 보호라는 이름으로 손바닥 안에서만 키우면 아이들은 손바닥 정도의 성장밖에 못한다. 대부분 자유로울수록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부디 아이들의 개인사생활을 존중하길 바란다. 셋째,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 지금까지 미성년과 성년의 연애는 남녀간의 시각 차가 존재했다. 가령 남성 중고등학생과 여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과 남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문제제기가 나왔다. 여성 대학생은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는 반면 남성 대학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백안시를 당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성년 여성보다는 성년 남성이 처벌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이걸 보고 많은 남성들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비판하곤 한다. 남성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다. 그것은 성년 중심적인 사고다. 미성년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남성 중고등학생이 자유롭고 여성 중고등학생이 억압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관계에 대한 인식도 동일하다. 남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문제가 없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알 것이다.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성관계 맺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 중요하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만약 끌리는 것이 있으면 연령과 관계없이 성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문제가 된다. 미성년 여성은 많은 부분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사를 존중 받는 일이 적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상서 중학교 성추행 의혹 교사 자살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여학생 7명이 수학교사가 자신들을 성추행 했다며 호소한 것이다. 진술서가 작성되고 그 진술서를 근거로 경찰에 성추행으로 신고했다. 경찰에서 조사한 결과 여학생 모두가 성추행이 없었다고 말을 해서 혐의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사소한 사건에 대한 불만으로 거짓 진술서를 썼는데 그게 고발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부안교육지원청에서는 2차 가해의 우려를 명분으로 무고한 교사의 징계를 밀어붙여 출근 정지와 강제 퇴출 후 직위해제 되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자 가해여학생과 그 부모들은 사죄의 메시지와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그 의견을 무시하고 전라북도교육청 학생인권센터는 가혹행위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 것이 맞는다고 하며 계속 조사했다. 교사는 최초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학생들이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협박을 받고 오해였다며 혐의를 인정해버렸다. 가해여학생들을 위해서 누명을 받아드린 것이다. 이후 직위해제가 다시 해제되었지만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강제로 40일 휴가서를 작성하고 타학교 전보조치에 서명했다. 그 교사는 12일 동안 단식하다 자살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다양하다. 세세한 부분은 넘기겠다. 여기서 초점은 여학생의 의사가 존중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교육센터는 가해여학생들의 탄원서를 보고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니냐며 무시했다. 학생인권을 다루는 사람들이 학생의사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여학생을 어리석게 봤으면 탄원서의 진위여부도 검토하지 않고 무시를 하나.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결국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권이 낮은 사람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고 보면 된다. 특히 여성과 미성년은 권리가 낮고 혜택이 높다. 그 둘이 합쳐진 여학생은 매우 낮은 권리과 매우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여학생의 의사는 제대로 존중되지 못하지만 처벌이 강한 것이다. 가령 미성년 여학생이 잘생긴 성년 대학생과 자기의사로 성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해보자. 마음에 들어서 자기의지로 호감을 나타내고 성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회에 알려지면 비난을 받는 것은 성년 대학생이다. 미성년 여학생의 의사는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인권타령 하면서 관점이 인권 대상이 아닌 건가. 미성년 여학생의 자유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정말 어처구니 없다. 하긴 한국에선 성인여성도 그루밍 언급하며 머저리로 보는데 미성년은 말할 것도 없겠지.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 열등한 존재에 대한 과잉혜택.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미성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미성년은 더욱 더 억압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억압을 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미성년 남성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 받아 원하는 상대와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미성년 여성에 대한 억압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평성 문제로 미성년 남성까지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미성년 남성이 자유를 누리고 미성년 여성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미성년 여성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향이 바른 길이 아닌가? 왜 미성년 남성까지 억압하려고 드는가? 성관계를 맺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존중 받는 게 권리인 거지 억압받는 게 권리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도 결국 억압의 굴레다. 여성이 억압받자 남성도 억압받는다. 토할 것 같다. 이런 걸 여성을 억압하던 남성들과 억압받던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안다. 정 미성년 여성들이 억압받기를 바란다면 최소한 미성년 남성들은 억압하지 말아라. 왜 더 미성년 인권을 악화시키는가? , 그러면 또 형평성 문제로 왜 여성은 처벌받지 않냐며 말이 나오겠지. 정말 한숨만 나온다. 억압의 순환이 끝나질 않아. 결국 미성년 남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자유를 누리려면 미성년 여성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제발 좀 미성년 인권 위한다면서 억압하지 말고 부디 자유의 시각으로 미성년의 자유를 보장하길 바란다. 간단하게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자기결정권 박탈을 다뤄보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미성년이 권리가 아닌 배려를 받고 있다는 근거다.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할 소지가 있는 걸 막아주는 배려를 받고 있다. 미성년은 성년보다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배려다. 그리고 그런 배려는 국민이 어리석다는 전제하에 독재자가 우민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논리다. 국민들은 어리석음으로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리석음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똑같은 짓을 하면서 미성년 인권을 운운하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미성년자들은 이미 성년 수준으로 우수하고 똑똑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다면 미성년 범죄를 떠올려보라. 미성년자들도 성년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여 교활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촉법소년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걸 말하며 과감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정보가 과잉공급 되면서 미성년자들도 굉장히 똑똑해졌다. 그럼에도 미성년을 보호할 때는 미성년의 어리석음을 말하며 자유를 억압하고 미성년 범죄가 발생할 때는 미성년의 똑똑함을 말하며 성년 수준의 처벌을 요구한다. 기준이 없다. 기준이. 이런 것은 결국 미성년은 어른 손바닥 위에서 지배를 받아야 하지만 처벌은 성인 수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성년 인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을 그저 편하게 다루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한국은 외국보다 자녀살해가 많다고 한다. 전체 살인 대비 자녀살해 비율이 한국은 5%인 반면 미국은 2% 영국은 1%라고 한다. 5배까지 높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등한 인격체가 아닌 단순한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녀들은 자신의 분신으로 보며 강제로 학습시키는 일들도 상당히 많다. 그 중 충격적인 것은 전교 1등 모범생의 모친 살해다. 전교 1등이었던 그 학생은 24시간 감시당하며 강제로 공부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잠깐 졸았다는 이유로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9시간 동안 골프채로 200대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를 살해할 때도 사흘이나 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했었다고 한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 학생은 잠든 어머니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는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눈을 찔렀다고 한다. 찔려서 죽어가는 학생 어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하면 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이에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대로 가면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엄마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엄마 미안해. 실제로 그 학생은 1등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나친 억압에 성적표를 조작해서 보여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억압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여전히 미성년 인권은 변한 게 없이 여전이 억압하고 있다. 그 근간인 도덕이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와 부모는 대등하지 못하다. 유교의 가르침인 장유유서 자체가 미성년과 성년을 차별한다. 자녀살해를 보고 분노하는 성년들이 미성년이 성년에게 반말을 하면 화를 내거나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자는 건가? 자녀살해 비율이 높다는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도덕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것은 마치 종교인이 종교 교리를 의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녀와 부모를 차별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이 바뀌지 않으니까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구처럼 살해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미성년이 지금처럼 배려를 받지 못하던 시대의 법은 법부터가 자녀와 부모를 차별했다.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면 존속살해가 되지만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면 비속살해가 된다. 미성년자의 인권도 낮고 배려도 낮던 시절의 법이다. 그걸 보고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할 때의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최근에도 자녀살해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안다. 특히 최근 놀란 것은 양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살해한 사건과 사실혼 남편 충격 받으라고 8세 친딸을 살해한 사건이다. 둘 다 자녀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미성년 인권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배려만 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녀살해의 처벌과 자녀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성년 인권은 더 낮아진다. 보호받을수록 열등한 존재로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손안에 들어온 인간을 얕보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교도관이나 납치범이 죄수나 인질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다. 대등하지 않으면 결국 인권은 낮아지게 되어있다. 사건이 많아질수록 보호와 감시는 늘어나고 보호와 감시가 늘어날수록 미성년 인권은 더더욱 낮아진다. 낮아진 인권으로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미성년은 더더욱 쉽게 살해된다. 이 악순환을 멈추려면 미성년을 대등한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빠르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수동적으로 보호만 받게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 정녕 미성년 인권을 위해서라면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을 할 것이 아니라 빠른 사회진출과 함께 미성년 선거권을 줘야 한다. 최소한 교육관련 선거는 그에 대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한다. 애들은 뭘 모르니까 선거권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미성년자들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면서 선거권을 주지말자는 주장을 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음주, 흡연, 운전. 이것들도 미성년이 억압받은 것들 중 하나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과연 이 억압은 정당한가? 최근 미성년자들의 무면허 음주운전이 많은 것은 억압에 대한 반발이다. 미성년자 사이에서 흡연하는 애들이 발언권이 쌘 것은 성년의 권리를 누리는 미성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성년 사이에서 힘을 가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일진이나 인싸다. 이것만 봐도 안다. 억압받을수록 천대받는다.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사실 과거 미성년 흡연에 대해서 고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미성년 흡연금지에 대한 근거로 건강을 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성년이라고 해서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 더 해롭다고는 하더라도 성년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므로 건강을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고 봤다. 가령 성년이라고 해도 지병이 있을 경우 미성년보다 흡연이 더 해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흡연권을 존중하고 있지 않은가. 건강이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피보호자와 보호자 관계를 떠올렸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피보호자가 보호자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그런 흡연 금지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자기합리화였던 것 같다. 이미 미성년은 흡연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맞춰 논리를 짜냈던 것이다. 솔직히 부끄럽다. 흡연 금지가 보호자의 책임 문제라면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협의 하에 흡연을 허용 받을 수 있었어야 했다. 미성년 학대는 미성년이 바라지 않는 걸 강제로 시킬 때 적용된다. 그것이 설령 공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흡연 문제도 동일하다고 본다. 강제로 피우는 것이 미성년 학대다. 본인이 바라서 피우는 것은 보호자의 허락 안에서 그 미성년의 자유권이라고 생각한다. 음주나 흡연이 단순 책임 문제면 법적으로 금지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운전은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음주나 흡연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본인이 바란다면 보호자 허락 하에 가능해야 하는 것이 미성년의 권리라고 본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 흡연을 해본 적도 없다. 술 마시고 운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안이나 길에서 흡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그걸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자유를 보장한다. 미성년도 동일한 잣대로 본다. 사고 가능성 때문에 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지 않는 것처럼 건강 침해 가능성 때문에 미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억압 받는 것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미성년을 위해서라면 건강 침해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허용하자고 하지는 않겠다. 음주를 즐기지 않고 흡연을 하지 않는 내가 굳이 그걸 하자고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억압하는 것이 아닌 허용하는 것이 권리라고 지적할 뿐이다. 음주나 흡연을 즐기는 미성년을 보면 나는 그 자유를 존중할 것 같다. 음주나 흡연 따위도 미성년 인권의 본질적인 부분과 동일하다. 음주나 흡연을 할 권리는 없는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 혜택은 있다. 주점에서 미성년이 술을 마시면 미성년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성년인 주인이 처벌받는다. 이걸 보고 미성년의 권리가 높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높다면 음주와 흡연이 가능했을 것이다. 권리는 없는데 혜택은 많으니까 처벌을 성년이 받은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운전은 가능할 것 같다.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이 되면 미성년 혼자서 차량에 탑승할 수 있겠지. 미성년이 보다 더 자유롭길 바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도구가 아니다. 높은 지능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다.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 미성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여 미성년과 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자유 억압을 인권이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과 미성년에 대한 자유 억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은 지금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받고 있다. 여전히 자유를 억압받는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그들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도 자유를 억압받는다.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자유 억압의 굴레다. 대표적으로 여성과 미성년의 예만 들었지만 다른 것도 적용될 수 있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 어떤 것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다른 것도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많이 억압되었다. 개그의 본질이 무엇인가? 조소다.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사람은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본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타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하하하, 멍청이. 바보 같은 짓을 보았을 때 사람은 웃게 된다. 정말 모르겠으면 바보 같은 인간이 뉴스에 나왔을 때 웃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막기 위해 마스크 대신 코걸이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걸 판매한 인간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사람들은 웃었다. 말도 안 되는 걸 판매하는 사람이나 그걸 사는 사람이나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바보 같은 걸 비웃음으로써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인간은 비웃는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생물이다. 그러니까 개그맨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정당하게 비웃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개그맨이고 그런 장소를 제공하는 게 개그프로그램이다. 본인을 희화화하거나 타인을 희화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조소하게 만든다. 사회의 어둠을 조소하는 것을 블랙 코미디다. 개그의 본질은 조소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조소가 불편하다고 개그에서 조소를 빼버렸다. 어떤 인간은 논문까지 썼다. 여성의 외모를 웃음의 소재로 쓰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정신이 나갔다. 사람이 무엇으로 웃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조소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은 속 시원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것은 개그를 직업으로 삼은 여성이 그것에 선동 당해 여성을 희화화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개그를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개그의 본질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말 눈물 나게 웃기고 슬프다. 여성에 대한 조소가 사라지자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을 하면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자 다른 것에 대한 표현의 자유도 억압되었다. 블랙 코미디를 본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시시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한숨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여성을 조소하면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대머리를 조소하면 대머리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되는가? 많은 여성들이 대머리는 조소하면서 여성이 조소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어한다. 흑인이 흑인 조소를 감내하지 못하면서 동양인 조소는 즐기는 것과 같다. 왜 그렇게 비겁한가? 물론 이유는 안다. 사상에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마호메트 풍자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지배를 받아 불편해진 사람들이 무한도전 같은 예능프로그램에 참견하고 간섭하여 조소를 빼버렸다. 그러자 정말 재미없는 예능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불편한 걸 배려해주는 것이 당연해지다 보니 점점 공영방송에서 개그프로그램들이 줄어들었다. 개그의 몰락은 조소가 불편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위와 같이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뉴스에 등장하면 댓글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 이래서 개콘이 죽었지. 개그 프로그램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으니까 개그 프로그램이 죽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뉴스가 재미있어서 개그 프로그램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당하게 공적으로 비웃을 수 있는 장소가 뉴스 말곤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작은 조소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상의 노예들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들이 정당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 얼마나 개 같은 일인가? 여성들도 조소로 웃을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여성이 조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동에 휘말려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자 자신의 자유도 억압된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이여, 이런 결과에 만족하는가? 이런 억압의 굴레는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일부 여성들은 사상의 지배를 받아 여성 성 상품화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남성이 즐길 수 있는 성 상품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옷도 검열하고 야한 것도 검열하고 창작물도 검열한다. 지독할 정도로 검열하며 남성이 즐길 자유를 억압했다. 그런 것이 길어지자 남성 또한 여성을 억압하기로 했다. 알페스 공론화다. 알페스라는 것은 Real Person Slash로 실제 인물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걸 뜻한다고 한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출연진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묘사한 것이 바로 알페스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런 것에 무관심했다. 그것은 여성들의 자유였다. 그것이 설령 부도덕하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줬다. 그럼에도 자꾸 일부 여성들이 지배 받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남성들의 자유를 억압하자 남성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성들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작물에 간섭하고 AI 성희롱에 발작하며 억압하려고 드니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도대체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은 잘못되었고 피해자가 있는 알페스는 괜찮다는 논리는 뭔가? 정말 이번 알페스 공론화는 잘했다. 역지사지를 느껴봐야 이제 억압의 굴레를 조금이나마 인지하겠지. 그렇게 해서 이 악순환을 좀 끊어야 한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를 보장해줘야 한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이다. 어떻게 자유국가에서 그런 상식조차 모르고 남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억압하려 드는가? 한국에 자유주의자가 정말 부족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한국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 자유가 뭔지는 알고 그렇게 억압하는가?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을 한 지 백 년이 지나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한 지 오십 년도 지나지 않았다. 자유가 소중한지 모르는 인간들이 자신이 억압받아 생기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분통이 터진다. 몇 번이고 말하겠다. 본인이 자유롭고 싶으면 타인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그냥 자유롭게 놔둬야 본인의 자유도 침해 받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음에도 불편함을 느낄 때에는 본인이 어떤 사상에 지배 받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길 권해보겠다. 십중팔구 너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있다. 지배 받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롭자고 하는 말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슬프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한국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어떨 때에는 그 똑똑함이 지식만 높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확히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데 사상의 지배를 받다 보니 그 지혜로움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상의 지배를 받지 말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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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 언급하면서 윤리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AI 성희롱이 뭐가 문제입니까? 자꾸 윤리 들먹이며 자유 억압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억압 받을 거면 혼자 받으십시오. 최소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런 개소리에 호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억압이 싫다면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상의 노예들이 자유로운 인간을 억압하는 걸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에 지배 받는 인간이 저지르는 횡포를 저지해야 합니다. 누군가 도덕이나 여성주의 같은 걸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자유주의를 내세우며 그것에 대항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럴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역할주의가 인간의 평등을 최대한 보장한다. 아마 새로운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걸 중심으로 쓸 것 같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어서 사회가 혼란스러운 걸 보면 어느 때보다 사상가가 필요한 시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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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너무 나쁘네요...
문단 좀 보기 편하게 나눠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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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혼란스러운게 과연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 되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원래 기준이나 잣대는 난잡했는데 그것들이 잘 들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사상가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기 주장들만 외치고만 있고 설득할 생각이 없으니 난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사상에 빠져있느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헤아려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설득하거나 전달하는 힘도 부족하더군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글을 어떻게 볼지, 그들이 잘 이해하고 잘 볼 수 있게를 생각 안하는 것 같습니다.

내아를나아도~    친구신청

한줄 요약좀;;

꼬박,    친구신청

지나가던 국문과가 한 자 적어요. 글의 시각과 논조를 떠나 글을 이만큼 분량으로 적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열정이고 노력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님의 글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도록 글의 외형적인 부분도 다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문단 나누기나 글의 근거 정도 추가해 다듬어도 훨씬 좋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파이팅입니다.
[글] 자유국가의 사회구조 (2) 2020/12/31 PM 07:42

자유국가의 사회구조

 

 

 

사람은 바람의 실현으로 행복을 느낀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 꿈을 이루면 행복하다. 어떤 형태든 동일하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깊은 만족감과 기쁨으로 행복을 느끼게 되어있다. 매우 단순한 구조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도 행복한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을 착각하게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사이비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바친다. 심지어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들까지 종교에 바친다. 그들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종교의 종이 된다. 종교의 종이 되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세뇌하면 종살이조차 행복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온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의 바람 위에 타인의 바람이 덧씌워졌을 뿐이다. 본인의 바람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면에 존재한다. 자유롭고자 하는 본인의 바람과 종교의 종이 되고자 하는 타인의 바람이 충돌한다. 그 충돌을 가리켜 번뇌나 마귀의 속삭임이라고 한다. 진짜 바람은 매도되고 가짜 바람은 신성시되어 올곧게 지키려고 한다. 일생 본인의 바람과 타인의 바람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사실은 불행하다. 하지만 세뇌 당했기 때문에 불행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한다. 불행을 느끼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의식하며 타인의 바람대로 하는 것이 행복한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행복하기 위해 타인의 바람에 집착한다. 더욱 더 종교에 매달린다.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속으로는 불행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이비종교의 형태다. , 어떤 감정이 드는가? 지금 느낀 감정을 찬찬히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럼 이제 이타주의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자.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 사회는 종교의 종이 되길 바라는 사이비종교와 몹시 흡사하다. 이 둘은 결국 본인의 바람보다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빈자를 돕고 싶은 바람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덕적 의무 때문에 빈자를 돕기로 했다. 자신의 바람 위에 도덕의 바람이 덧씌워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과 빈자를 도우라는 타인의 바람이 충돌한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이 마음 속에서 튀어나오면 나쁜 마음이 나왔다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진짜 바람은 그릇되고 가짜 바람은 바르게 된다. 나쁜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의식하며 빈자를 돕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가짜 바람을 행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속으로는 불행하다. 얼마나 비슷한가?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결과적으로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의 강요가 괜찮은 것이 아니냐며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이비종교를 이롭게 했기 때문에 신자를 세뇌해도 된다는 논리와 같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가짜 바람을 행하며 겉으로만 행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사회가 불행하다.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의 이기적인 바람이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빈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각해보자.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없는 사람 A가 있다. A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A가 사회에 속한만큼 사회의 치안은 A에게도 이익이 된다. 빈자가 사회 안전망 안에 있어야 사회환경이나 치안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없어도 세금이 빈자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 동의하고 여유가 되면 기부를 한다. A는 지극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했던 이기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A가 이기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빈자는 도움을 받았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 의무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철저한 논리와 계산으로 필요한 일을 진심으로 한다. 어느 쪽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빈자 또한 불편함을 덜 수가 있다. 빈자에게 가는 도움이 빈자를 향한 동정이 아닌 사회 안녕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없는 가식은 도움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불편할 뿐이다. 이타주의 사회와 이기주의 사회는 둘 다 빈자를 도울 수 있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전혀 다르게 되었다. 얼마나 이상적인가? 이런 이상적인 이기주의 사회가 작동하려면 사회 구성원의 지성이 필요하다. 최소한 빈곤과 범죄의 상관관계 정도는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이해해야 자신의 세금이 복지에 쓰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고 찬성할 것이다. 빈자를 돕고 싶다는 바람이 없어도 지성이 있으면 사회복지에 찬성하게 될 거란 이야기다.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것저것 다 하고도 여유가 된다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의 질 향상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질이 향상되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의 질 또한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을 돕게 되었다. 그럼 다음을 생각해보자.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 B가 있다. B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B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빈자를 돕는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을 돕는 것조차 간섭하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누군가 기부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타주의로 인해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껴 기부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위선이나 가식이라며 공격을 한다.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이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어느 누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부터 어떤 을 위해 시간과 재산을 희생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본인의 바람이면 이기적이고 타인의 바람이면 이타적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만족도를 위해 취미에 큰 돈을 쓰는 것이나 자선에 큰 돈을 쓰는 것이나 어떤 은 동일하다. 굳이 쉽게 이해하자면 취향존중으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자선은 단지 다른 취미보다 사회적 가치가 있는 취미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만 보지 않으면 여유가 되는 한 누군가 돕는 것에 적극적일 거라 생각한다. 이들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 구성원을 돕게 되었다. 행복은 바람의 실현으로 얻어진다. A B는 자신의 바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행복해졌다. 이런 걸 보면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도덕적 의무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인 사람을 기본으로 할 것이 아니라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지 않는 사람을 기본으로 해서 세금으로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의무로 선행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하고 싶은 걸 하게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기부단체의 기업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부단체는 자선을 하기 위해 단체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기 위해 단체를 경영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큰 건물이 필요한가? 도대체 왜 투명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광고비로 그렇게 큰 돈을 사용하는가? 수천 만원짜리 광고를 보고 도덕적 의무감을 느껴 기부를 하면 그 기부금은 다시 수천 만원짜리 광고비로 활용된다. 기부금을 받아서 광고비, 인건비 다 때고 남은 적은 금액만을 자선에 활용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선이 목적인지 사업이 목적인지 헷갈리게 될 정도다. 하도 불투명하고 기부금 대비 자선활용금액이 낮아 요즘에는 지역 구청에 문의해서 직접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한다. 확실히 수천 만원짜리 광고비로 불필요한 돈이 낭비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광고를 시청한 사람들은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거나 원치 않는 기부라는 바람과 다른 걸 했다는 불행을 겪게 된다. 기부금 효율뿐만 아니라 사회의 행복 또한 낮아지게 된 것이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인을 돕는 것뿐만이 아니라 돕는 사람 또한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행복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여 기부를 통해 운영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 자선 현황을 검토 받고 세금으로 운영하거나 개인의 취미로 운영하는 것이 건전하고 효율적이며 행복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국가에서 공익법인을 평가하고 있긴 하지만 다소 느슨하고 방만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세금으로 운영되면 보다 더 엄격하게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요점은 두 가지다. 하고 싶은 걸 하게 한다. 그렇게 해도 사회 안전망이 구축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사회구조라고 생각한다.

 

 

 

이타주의 사회는 대부분이 가짜 바람을 행하며 불행을 겪게 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한다.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을 받고 싶다. 그럼에도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보다 도덕적 의무라는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꼰대란 유교의 장유유서를 근거로 연하를 지배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도덕적 의무를 행하기 위해 꼰대가 되어 자녀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고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 믿는다. 자녀들과 갈등을 빚어 불행해지면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자녀들에게 보다 강화된 지배력을 행사하여 더욱 더 불행해진다. 이런 불행에서 벗어나기는 마치 사이비종교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올바르기 때문에 더욱 더 매달린다. 매달리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 가짜 바람을 자신의 진심으로 착각하게 된다. 올바름과 무의식이 종교나 도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올바름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과 무의식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본인의 바람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라는 타인의 바람이 애정이라는 본인의 바람과 일치할 때에만 참고하여 바람을 이루는데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필요한 걸 무시하고 다른 것을 참고하여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이렇게 도덕의 지배를 받아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대부분 과거의 사상들은 이런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들이 많아 진짜 바람을 이루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올바른 걸 생각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 이타주의는 과거의 사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사상 중 대표적인 이타주의 사상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약어로 PC라고 한다. PC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 민족 성별 등의 편견을 없애 차별 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의도는 평등이지만 방법은 지극히 이타적이다. 흑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아시안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여성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런 식으로 편견 당하는 이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평등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PC주의자들은 본인의 바람대로 사는 걸까? 아니면 타인의 바람대로 사는 걸까? 생각해보자. 공정함이 본인의 바람인 사람이 있다. 세상이 공정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PC라는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 했다. 그래서 공정하지 않는 걸 올바르다고 인식해버렸다. 예를 들어보겠다. 최근 미국 민주당에서 첫 흑인 여성 부통령이 지명되어 당선 유력이 되자 이런 언론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흑인, 아시안, 여성. 이 세가지를 강조했다. 그걸 보고 많은 PC주의자들은 환호했다. 왜냐하면 PC는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이 우선시 된 것 같으니까 환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런 걸 강조하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력이나 사상이 아닌 흑인과 아시안과 여성이라는 타고난 것을 강조하며 평가해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자가 백인이라는 타고난 것을 강조하며 평가해 특권을 누리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진정 평등하고 공정하길 바랐다면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검사나 의원 시절 했던 업적들을 기반으로 한 별명으로 제목을 짓고 그 안에 그 별명을 갖추게 된 업적들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아닌 역할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야 공정해질 수 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공정함이란 진짜 바람이 아닌 PC라는 가짜 바람을 행하는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최초라는 것에 의미를 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어떤 소외되던 지역에서 최초로 대통령이 나왔다며 지역만 강조하는 언론기사가 올라온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의 이력이나 사상 같은 것이 아닌 지역이라는 타고난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 어떤 반응이 있겠는가? 지역주의를 부추겨 갈등을 빚게 만드는 언론기사라고 할 것이다. 타고난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신분제나 다름이 없다. 공화제에서 공정하려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타고난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역할에 맞는 능력이나 이력이나 사상 같은 것들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PC주의자들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이런 걸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들도 좀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PC가 진짜 본인의 바람이 맞는 건가? 어떤 작품이 정말 재미없어도 PC색이 섞이면 높은 평가를 받는 일이 생기고 있다. 도대체 그게 진심이 맞긴 한가? 그게 진짜 재미있어서 높은 평가를 하는 건가, 아니면 PC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여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건가? PC가 반드시 올바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PC를 따르는 자신의 무의식이 자신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부디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란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떤 사상에서 얽매이는 게 아닌 참고를 하여 이기적으로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각자 조금씩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지 선동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자유의 적이 아닌 이상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사회구조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바람의 실현으로 얻어지므로 관리가 가능한 지표다. 실체가 없는 게 아니다. 보다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다. 단지 그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여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질서를 만들고 규제를 하고 검열을 한다. 하지만 그 규제나 검열이 필요이상으로 강하게 되면 사람들은 깊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가령 범죄 우려가 있다는 추정만으로 감시하고 통제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행복하겠는가? 최근 다양한 범죄들로 인해 많은 규제와 검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검열의 끝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와 비슷해진다. 까놓고 말해 범죄를 없애려면 그냥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면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명령에만 복종하는 개돼지로 만들면 범죄는 사라진다. 그리고 행복도 사라진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 앞에 있는 자극적인 사건 때문에 규제나 검열을 강화하자는 말에 선동되는 사람들이 많다. 이기적으로 봐야 한다. 과연 그런 규제나 검열이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올바른 것인가? 그냥 누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타적으로 생각하여 그 주장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올바른지 판단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어떤 커뮤니티에서 등신대 인형의 처녀막 유무 선택지가 담긴 글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걸 어떤 언론기사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나도 처음 봤을 때엔 놀랐다. 그런 것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해당되고 그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그런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단지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근거로 막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분명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성욕이 어떤 잘못을 낳더라도 성욕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 모든 자유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사회의 행복을 위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존중하려고 한다. 나는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성의 동성애는 그래도 받아드릴 수 있는데 동성의 동성애는 솔직히 불편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런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낙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의 행복을 위해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할 때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친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유전자의 문제가 없는 사촌간의 결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주를 즐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음주사고라는 위험이 있더라도 음주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약을 부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시한부 생명에 한에 허용해서 그런 사람들을 국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야 사회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다.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어떻게 본인의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하는가? 자유에 대한 책임은 단순히 한 행동에 대한 책임뿐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면서 겪을 수 있는 위험부담의 책임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걸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무작정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유치원이나 병원에서 수많은 사건사고를 일으켜 CCTV를 설치하자는 여론들이 무성하다. 이해한다. 그런 사고를 일으키고 자정이 없기 때문에 CCTV를 설치하자는 여론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면 그 다음은 다른 집단의 자유도 억압되는 것이다. 가능한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유치원도 의료계도 좀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왜 사건사고가 나는 유치원이나 의사들을 옹호하는가? 왜 그렇게 집단적이고 이타적인가? 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면 내부적으로 비판을 하여 자정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사람들은 무엇이 진짜 바람이었을까? 저출산을 걱정하면서 이성을 멀리하게 만드는 남녀유별과 정조관념을 중시하고 그걸 심화시키는 여성주의를 중용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저출산은 이성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성애결핍에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저출산들을 금전적인 원인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저출산 대책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사용했는가? 수백 조를 썼음에도 계속 떨어졌다. 한국보다 가난한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높은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집값이 비싼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저출산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떤 사람은 여유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의 근거로 부유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 말에 답이 있다. 여유가 있으면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이 단순한 옵션일 뿐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물에게 있어 종을 퍼트리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지 않는 종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생물에게 있어 종을 퍼트리는 것이 최고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물인 한국인들은 수백 년간 이성을 멀리하게끔 가르침 받은 결과, 종을 퍼트리는 수단인 결혼이 그저 옵션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환경이 좋지 못해도 결혼을 한다. 전쟁 통에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결혼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결혼이나 출산이나 육아 같은 희생을 거부한다. 저출산의 원인은 너무나도 간단한 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율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이 아직도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을 중시하고 그걸 심화시키는 여성주의를 중용하는 것은 진짜 바람이 아닌 가짜 바람을 행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이기적이었으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같은 구시대적 사상을 내쫓고 이성애를 주장하긴커녕 이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이들을 멀리했을 것이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여성의 억압을 걱정하면서 여성들이 자유롭게 꾸미거나 옷을 입는 것을 비난한다. 치마를 입는 것을 강요하는 것에 화를 내면서 치마를 입으면 잘못되었다며 바지를 입게 하거나 긴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자유롭고 누구나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바지 입고 싶은 사람은 바지 입으면 되고 치마 입고 싶은 사람은 치마 입으면 된다. 어떤 사람은 치마는 성적으로 남성이 바라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한다. 아니 남성이 바라면 안 되나? 남성은 취향도 가지면 안 되나? 그런 취향에 맞춰서 치마를 입는 여성이 잘못된 것인가? 남성도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를 가꾸고 근육을 키운다. 그냥 이성에 관심을 끌기 위해 이성의 입맛에 맞게끔 하는 것은 이성을 사랑하는 생물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잘못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행동이 이성애를 결핍시키는 것이다. 부탁이니까 서로 사랑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왜 자꾸 그래서 국가를 인구소멸로 이끌려고 하는가? 미래에 어떤 평가를 받으려고 그러는가?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본인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타인이 어떻게 입든 대부분은 본인의 자유에 침해가 되지 않으니까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받아드려야 한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부동산 투기와 주식과열을 걱정하면서 자신을 위한 사치를 비난하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정당화하길래 그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익률을 말하며 굉장히 생산적인 일이라고 반론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했는데 개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생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IMF가 국민의 사치가 원인이었다고 말하며 책임회피를 할 정도로 사치에 대해 부정적이다. 반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여 급속도로 성장한 만큼 생산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런 환경에서 국민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소비를 하지 않고 부동산에 투자나 투기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않았을까? 소주성의 미흡한 점은 두 가지였다고 본다. 대기업의 지출은 그대로인데 노동자의 임금만 올라 중간에 있는 이들의 수익이 악화되었다. 국민들은 소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소비를 통한 경제성장을 도모했다. 따라서 먼저 대기업의 지출을 권장하고 국민들의 소비를 권장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했어야 했다고 본다. 국민들이 이기적으로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해결방법은 일반적으로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었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바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바른 것도 아니다. 진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단정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꼼꼼히 생각하여 무엇이 진짜 바람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인지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진짜 바람을 위해 살아야 타인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부디 한국 사회가 행복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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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 대해 작성하기 전에 필요한 글들을 작성 중입니다.

한번에 그걸 정리하기는 어렵네요. 올해 말까지 써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준비할게 많군요. 생각도 더해야 하고 공부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쓰더라도 계속 갱신해야 할 것 같네요. 언제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예전부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이 지지 받고 비난 받는 사람은 대통령과 검찰총장일 겁니다. 그 둘이 다양한 것들로 많은 갈등을 빚었죠. 그럼에도 어쩐지 그 둘이 어쩐지 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 그 많은 이슈가 있음에도 그런 감각이 느껴져서 생각해봤어요. 적대적 공생관계가 떠올랐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여당이 못하면 야당이 지지 받고 야당이 못하면 여당이 지지 받지요. 대립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서로가 지지 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대립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대립이 아니라 대통령과 검찰총장의 대립으로 바뀐 겁니다. 본래라면 여당이 못할 때 야당이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야당이 아니라 검찰총장이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립구조가 바뀌자 적대적 공생관계도 바뀐 겁니다.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부패한 측근들을 쳐내고 대통령은 그런 검찰총장을 키워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검찰총장이 야당 측에서 가장 큰 지지율을 받고 있는 게 야당이 아닌 검찰총장이라는 것부터가.. 야당은 검찰총장의 들러리가 되어버렸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우연이라면 놀랍고 기획이라면 굉장합니다.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검찰총장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측근들만 쳐내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 재미있지요.

 

의료계에 대해 말하자면 좀 적재적소로 인재들이 배치되는 것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동네 개원의가 놀라운 능력을 보여줘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아할만한 일인가는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인재가 동네에 박혀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재들이 적재적소로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능한 사람들이 어려운 병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병을 고치게끔 해야 하는데 모든 의사들을 장인정신과도 같이 너무나도 꼼꼼하게 가르쳐서 필요이상의 능력을 보유하고 그 능력에 맞게끔 대우를 받으려고 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대우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학교수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대학교수급 대우를 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의료계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 수를 늘려서 실력이 낮은 이들은 쉬운 일을 하고 낮은 급여를 받고 실력이 높은 이들은 어려운 일을 하고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의사의 질 하락을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전부 유기농과 수제품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사회 전체에 물량을 보급할 수 없습니다. 설령 대량생산으로 사고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그걸 감수하고 풍요를 누리는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의사 질이 하락해도 됩니다. 하락한 의사는 쉬운 일을 하게 하면 됩니다. 잘하는 의사는 어려운 일을 하면 됩니다. 다른 직업들은 대게 다 그렇습니다. 법조계조차 이제는 그렇습니다. 장인정신은 수공업 시대에서나 통하는 구시대적 사상입니다. 의사 수를 늘리는 방식이 굳이 공공의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적재적소로 인재들이 배치되는 방법을 고민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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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같아보이는데 개행을 좀 많이 해주셔야 할거 같습니다.

글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읽기 힘들어요.

개행 수정 완료되면 다시 읽으러 올 수 있게 답글 부탁 드립니다.
[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 (0) 2020/12/14 PM 01:46

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 옛날옛적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타주의가 착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본인의 이익만 따지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이타주의자는 착한 사람이 되고 이기주의자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착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렴치한 이기주의자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하고 싶은 걸 할 때마다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은 따끔한 일침을 날렸습니다. 「왜 너는 너의 이익만 따지는 거야?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해야지!」 일침을 당한 사람이 본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이타주의자는 그제서야 잘했다고 방긋 웃으며 칭찬을 했습니다. 「정말 착하네. 참 잘했어요.」 칭찬을 받은 이기주의자는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짝짝짝. 이기적인 사람은 아직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두더지잡기의 두더지처럼 돌출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면 이타주의자는 정의의 망치를 들고 그 사람을 두들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사람! 너는 잘못하고 있는 거야!」 이타주의자는 돌출된 이기적인 인간을 마구 두들겨 이타적으로 만들고 나서야 만족하며 웃습니다. 불편함이 사라졌는지 속 시원한 표정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던 이기적인 사람은 바닥에 내려앉아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그렇게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짝짝짝. 한국인들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자 어떤 특정한 이익에 몰려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올바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이윽고 너도 나도 다 똑같은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착한 한국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 . . …… 막이 내려가다 멈춘다. - 막이 다시 올라간다. 만들어진 웃는 얼굴 그림이 사라지고 초췌한 현실 속 인간이 퀭한 눈으로 의지를 잃어버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졌다. 「어째서? 어째서야? 최선을 다해 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째서 불행해지는 거야?」 진영갈등이 심해졌다. 집단 이기주의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집단 괴롭힘이 사라지질 않았다. 선동에 취약해졌다. 사이비종교가 인간을 세뇌시켰다. 의존도가 높은 사람이 늘어났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게 되었다. 겸손함을 강요당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증오와 혐오가 멈추질 않고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았다. 한국인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사회문제는 심각해졌다. 한국사회에 짙은 어둠이 깔리게 되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타주의자들은 꼭두각시처럼 누군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건 잘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칭찬한다. 「그건 못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욕을 퍼붓는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가엾어라.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게 된 가엾은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이란 동화는 희극이 아니었다. 도덕에 의해 자유의지를 상실해버린 가엾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그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될 거 없지 않아?」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하겠다. 첫째,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많은가? 아니다. 대다수는 이타주의자들이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타인이 정해둔 어떤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걸 어찌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진짜 이기주의자라면 타인이 어떤 이익을 제시해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찌했는가? 누군가 괜찮은 것이 있다고 말하면 생각하지도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하지 않았나? 유행에 휩쓸려서 개업하고 유행이 끝난 뒤 폐업하는 수많은 자영업을 떠올려보라. 유행을 만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진정 이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유행을 만든 본사는 가맹점 계약으로 떼 돈을 벌고 가맹점주는 유행이 끝나면 쪽박을 찼다. 이 얼마나 이타적인가? 한국은 이타적인 사회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 정해둔 암묵적인 고정관념에 얽매인다. 10대는 이래야 해. 20대는 이래야 해. 30대는 이래야 해. 40대는 이래야 해. 50대는 이래야 해.」 서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공통된 이익이 결정되면 그걸 위해서 살았다. 한국인은 평생 눈치를 보며 타인이 정해둔 삶을 산다. 취미도 개인사정에 따라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너희는 놀이공원에 가. 너희는 노래방에 가. 너희는 골프장에 가. 너희는 낚시터에 가.」 그러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공격한다. 「너는 왜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거야? 이상해.」 감정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건 기쁜 거니까 웃어야 해. 이건 슬픈 거니까 울어야 해. 이건 예쁜 거니까 좋아해야 해. 이건 나쁜 거니까 화내야 해.」 다 같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너는 왜 혼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남들은 웃고 있는데 왜 웃지 않아? 남들은 울고 있는데 왜 울지 않아? 이상해.」 인간관계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넌 얘하고 어울려. 넌 쟤하고 어울리지 않아.」 그런 기준에 맞지 않은 관계를 가지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나이차이가 많잖아. 미의 수준이 다르잖아. 노는 수준이 다르잖아. 버는 수준이 다르잖아. 이상해.」 장래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예체능은 없고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렴. 예체능을 잘한다고? 좋아한다고? 그걸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공부를 해. 그래야 성공해. 그게 맞는 거야.」 행복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게 행복한 거야. 저게 행복한 거야. 이래야 행복한 거야. 저래야 행복한 거야.」 한국인들은 본인의 의지로 본인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의지로 타인을 위해 산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서글플 정도로 이타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부자들을 비난하는 걸 보고 똑같이 가난해야 하냐며 화를 낸다.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부자가 가난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타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도 남을 위해 살라고!」 그래서 부자들이 자신을 위해 사치하면 비난 받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된다.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런 현대사상은 아직 한국사회에 스며질지 못했다.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도덕에 근거한다. 둘째,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가 없는가? 아니다. 약자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불공정한 사회를 불러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역차별 논란을 불러 이성혐오를 부추기게 되었다. 아동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불합리한 교통법이 생겨 아이들이 그 법을 악용하게 되었다. 소수자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기문란을 저질렀다. 외국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표현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자유롭지 못하고 차별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불안을 떨게 되었다. 약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치안이나 소방 등의 직업에 역할에 맞는 능력이 아닌 성별 같은 타고난 것으로 평가하고 구인해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 사회질서가 흔들리게 되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는 대상이 무엇이든 잘못되었다. 빌어먹을 이타주의는 옳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꺾고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타주의는 올바름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의지를 앗아가는 괴물이었다. 이런 것은 지배국가에서나 어울린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서로의 이기심을 평가해 올바른 것을 선정하여 그걸 자유의지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올바름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타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첫째는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것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 왜 나쁜 결과가 나와? 그럴 리가 없지!」 그런 안이한 생각 때문에 인지할 수 없었다.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할 것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부분의 인간은 주변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농담이 아니다.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되어버린다.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모든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행동원리를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어떤 생각과 행동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라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너는 A를 해야 해!」라고 교육받은 뒤 잊는다. 나중에 A를 무의식 중에 떠올려서 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면 마치 그것이 교육과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A를 하고 싶어하는 건 나의 본심이야!A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A가 잘못되었다고 비판 받으면 마치 자신이 비판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래서 A가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렵다. 관습, 관행, 도덕 따위가 한번 주입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그것이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떤 것이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본질적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올바름과 무의식 때문이었다. 요즘 불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이것저것 불편함을 나타내며 불만을 표한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위의 예시처럼 네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탓에 마음속 불편함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의 무의식은 너의 것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걸 스스로 고찰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지가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나는 식사를 하던 도중 먹고 있는 육류가 갑자기 맛이 없어지고 불쾌해짐을 느꼈다. 고기가 역겨워졌다. 토악질의 충동을 느꼈다.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이걸 왜 불쾌해할까? 나의 무의식은 왜 불쾌감을 느꼈을까?」 나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고기가 되는 동물들의 참상과 환경오염에 관한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거구나.」그리고 의식적으로 종의 본능, 생존 따위를 떠올리며 별 문제없음을 인지한 뒤 불쾌감을 감수하고 육류를 섭취했다. 그러자 다시 맛이 돌아왔다. 불쾌감도 사라졌다. 그 뒤도 별 문제없이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무의식이 시키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나의 의지로 고기를 먹는 것을 결정했다. 나는 이런 것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인상 깊은 경험이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순간 고찰하지 않았더라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내 자유의지가 결정할 문제다. 타인이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본인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얼마나 있을까?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의지로 불편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환경에 지배 받는 걸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무의식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닫고 환경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무의식에 간섭을 받지 않고 현상의 본질을 파악해 자유의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연하를 차별하는 장유유서가 꼰대라는 원인을 만들어 가족애결핍과 세대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을 멀리하는 남녀유별과 정조관념이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금지라는 원인을 만들어 이성애결핍과 이성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음주에 강한 사람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음주운전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음주운전사고라는 결과를 낳았다. 맹목적인 이타주의 강요가 집단이익우선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집단 이기주의라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 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교육 받은 대로 하자 불행해졌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를 그렇게 강요해놓고 왜 출산율이 낮느냐고 불평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쓴웃음을 나온다. 올바름과 무의식이 배운 걸 평생가게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몰라도 학생 때 공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걸 보면 학생 때 배운 게 평생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는 평생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된다. 정말 희극이자 비극이다. 대부분 평생 갔으니까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성혐오가 늘어난 것이다. 꼰대나 낮은 출산율이나 이성혐오나 음주운전 따위가 나타났던 것은 한국인들이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올바른 것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가르친 대로 행한 것뿐이니 사회문제를 보고 이들을 너무 나무라지 말길 바란다. 그건 이제부터 바꿔야 하는 문제다. 바꾸는 걸 거부하는 이들을 나무라길 바란다.

 

 

 

본격적으로 이타주의가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정치는 진영갈등을 부르는 진영논리가 심각하다. 지지하는 정당이 잘하건 잘못하건 지지한다. 심지어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동을 해도 지지한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음에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폐단의혹으로 논란이 발생해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이타적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만약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봤을 것이다. 반공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정당에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폐단을 일으키는 사람은 정당과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런 자신의 이익보다는 그걸 주장했던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접고 정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어떤 정당이 싫어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일이 있다. 여당이 싫어서 야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야당이 싫어서 여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만약 정책을 보고 지지했다면 다수의 정당이 지지를 받았겠지. 그러지 않고 양당체제가 된 것은 상대정당을 보기 싫어서 이길 수 있는 정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싫어서 지지했음에도 어째서 맹목적으로 변해버리겠는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한번 지지를 결정한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 정당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던 것이다. 나는 자유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독재자를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신의 종으로 삼으려는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공산당을 용납할 수 없다. 국가, 자본, 종교, 도덕 등 인간을 지배하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기준으로 정당의 행태를 평가하고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검열이라는 남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여성 혼자서 책임질 확률이 높은 낙태죄라는 여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장유유서라는 연하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유전자에 영향이 적음에도 인간의 사랑을 죄로 만든 4촌 결혼 금지에 반대할 것이다. 이교도를 처단하자는 종교를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드리는 자국민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다문화는 정말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만든 황당한 정책이다. 지배하겠다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차별하겠다는 인간에게 평등을 주다니. 자유국가가 혼란스러운 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지배와 차별을 하겠다는 인간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천적에게 잡아먹으라고 몸을 대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사상차별주의자다. 그리고 너희들도 사상차별주의자다. 전제주의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인종차별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이건 당연한 거다. 그릇된 사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인종차별 말고 사상차별을 하면 된다. 따라서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는 단일문화와 다인종 국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혈통, 인종, 피부색 아무래도 좋다.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면 된다. 그 외 나는 인간을 지배하는 자유롭지 못한 것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내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익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유의지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어야 맹목적인 지지가 사라질 것이다. 정치가들에게 선동 당하는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단지 착했을 뿐이다.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인간이 있다는 걸 안다. 대중의 어리석은 행위에 실망하며 그런 취급에 은연중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이타주의적 교육에 영향을 받아 남의 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은 강제로 세뇌 당해 어리석은 짓을 한 피해자를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일이다. 대부분 가해자며 피해자인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앞으로 모두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올바른 이기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이기주의가 강하다. 온갖 비리, 폐단, 악습 등의 것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영향을 끼친다. 같은 집단 내에 비리가 발생하면 동참하거나 감싸고 덮으려고 한다. 폐단이 있어도 모른 채 한다. 잘못된 관행도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을 고려해서 방치한다. 지역의 집단 이기주의자들은 「우리가 남이냐?」라고 말하며 문제가 생겨도 모른 척 해달라고 한다. 왜 그랬겠는가?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집단 구성원들이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역갈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지역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갈등에 자신의 일처럼 감정이입하며 싸웠던 것이다. 이타주의가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 배타적이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속이 강한 시골에서 외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 기업, 부동산 등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보다 더 배타적이다. 노사갈등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주의가 더 심한 갈등을 부추겼던 것이다. 마음을 얼게 만드는 비리와 폐단과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지역이기주의로 인한 지역갈등도 사라지지 않고 각 계층의 집단이기주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이타주의 때문이었다. 만약 이기적이었다면 어땠을까? 비리가 알아차렸을 때 비리를 일으킨 사람의 이익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고발해버렸을 것이다. 폐단을 무시하지 않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가 남이냐?」라는 말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했을 것이다. 집단이 그릇된 이기주의를 주장할 때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배타적이지 않게 되어 외부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이기주의자들이 공격을 받는다. 집단 구성원 중에 이기적인 이들이 집단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며 이타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그 집단에 추방되거나 속하더라도 소외를 당했다. 이타주의자들에게 있어 내부고발자들은 집단의 이익을 해친 이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이타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야 이런 올바른 일을 자유의지로 이기적으로 행하는 이들이 우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라면 보통 친목질의 폐단을 안다. 친목질은 집단을 배타적으로 만들어 새로운 사람의 유입을 멈추게 한다. 그 친목질이 바로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와 비슷하다. 본인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친목을 다지면 결속이 생기게 되고 결속이 생기면 집단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집단에 속해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집단이 쓰는 은어나 손짓이나 그림을 사용한다. 특정 커뮤니티에서만 사용되는 은어를 쓰는 것이 바로 소속감이다. 대표적으로 외계어나 야민정음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굳이 사투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에 속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종교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적인 종교인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종교 교리를 말하며 소속감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이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타적이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배타적이게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집단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어 집단을 위해서라는 말에 선동 당하지 않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관철하길 바라겠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괴롭힘이 많다. 따돌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도로 어떤 학생들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올바름과 무의식을 떠올려보자. 집단 괴롭힘도 어떤 올바름을 교육받은 결과일 확률이 높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는가? 「부모님 말 잘 들어야 해. 선생님 말 잘 들어야 해. 어른 말 잘 들어야 해.」 아이들을 편하게 돌보기 위해 별생각 없이 아이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은 인간의 의견을 우선시하도록 가르친다. 본인의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이타적으로 만든다.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시 하는 타인이 아이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모, 교사, 어른 다 아이보다 강하다. 아이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가르친다. 「괴롭히지 말라는 내 말을 우선시하라고!」 그런데 그런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행동원리를 만드는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괴롭힘은 나쁘니까 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 사이에서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교사가 폭력을 쓰지 못하게 된 시대에 아이들에게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또래 중 힘이 강한 아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강한 아이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어떤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찍어서 괴롭힘을 하게 되면 강한 인간의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얌전히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 아이를 따라 괴롭히거나 외면하게 된다. 집단 괴롭힘은 단순히 누군가 강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간은 연약하여 칼질 한방으로도 죽는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복수할 수 있다. 다른 아이들도 동조하지 않거나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아이들이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보다 과중한 억압을 받는다. 「인사해. 절해. 복종해. 기뻐해. 슬퍼해. 좋아해. 싫어해. 공부해. 운동해. 이것도 해. 저것도 해. 다 해. 욕설은 안돼. 폭력은 안돼. 복수는 안돼. 일탈은 안돼. 반항은 안돼. 야한 건 안돼. 폭력적인 건 안돼. 노는 건 안돼.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다 안돼.」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일수록 올바름에 얽매여 자유를 잃어버린다. 정보를 검열하고 바람을 막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은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변해버린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속된 말로 찐따가 되어버린다. 보통 이런 찐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표적이 되어 괴롭힘을 당한다. 이들이 이보다 더 많은 자유를 잃게 되면 마지막 자유는 죽음뿐이다. 모든 선택지가 막힌 아이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다가 죽음이란 선택지에 도달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이란 마지막 자유를 누리고 쓸쓸하게 떠나갔다. 절망적이다. 왜 그랬겠는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동물들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죽을 각오로 물어뜯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아이들은 죽기직전 죽을 각오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복수가 어렵다면 전학을 가도 되고 가출을 해도 된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아이들에게 있어 어른들이 강요한 올바름의 족쇄는 죽음보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무치게 슬프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것이다. 그저 착하게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일 뿐인데. 그런데 그건 착한 아이로 성장을 하게끔 도왔던 걸까 아니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로 만들었던 걸까? 시끄러운 아이들을 보고 설득이 아닌 강압으로 시끄럽지 않게 만드는 부모가 있다는 걸 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아이가 되면 착한 아이가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건 시끄러운 개를 짖지 않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을 위해 짖지 않는 개처럼 타인을 위해 시끄럽지 않은 순종적인 아이로 만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어른의 말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제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찐따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잃게 하면 안 된다. 이기적으로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왜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 올바른 일을 행하게 하고 싶으면 강압이 아닌 설득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가르칠 수 있다. 괴롭힘 주동자에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괴롭히면 동조하거나 외면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쳤다면 강한 인간이 나쁜 행동을 이기적으로 하는 것을 저지했을 것이다. 힘이 부족해 저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천만에. 소수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다수가 막으면 막을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 휘둘리는 것은 강한 사람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처럼 행동했는지 알겠는가? 아이들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인간처럼 교육을 받은 결과였던 것이다. 아이들을 망가트린 것은 잘못된 올바름이었다. 인간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면 안 된다. 남이 시켜서 올바른 일을 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선동에 취약하다. 왜 그랬던 걸까? 한국인이 선동 당하기 쉬운 것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유의지를 잃고 다른 인간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진영을 서슴없이 물어뜯는다. 어떤 이기적인 인간이 말하는 주장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가에 선동 당하고 정당에 선동 당하고 기업에 선동 당하고 언론에 선동 당한다. 선동 당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이타주의가 올바르기 때문에 선동을 당해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걸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타적인 성향 때문에 심지어는 외국인에게도 선동을 당한다. 이타적인 성질 때문에 다른 국가의 선동에도 쉽게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악의적으로 한국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 자일 확률이 높다. 그 중 외국인이 선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외국을 다룬 한국뉴스의 유튜브 댓글에서 외국인의 선동으로 추측되는 댓글을 볼 수 있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걸 얘기해보겠다. 왕정이나 공산당을 긍정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왜 민주주의를 부정하겠는가? 악의적인 문장을 도배하며 특정진영을 공격해 내부갈등을 심화시킨다. 왜 도배를 해가면서까지 공격하겠는가? 외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내부갈등을 부추긴다. 왜 외국을 비판하는데 한국인을 공격하겠는가? 특정 국가의 비판이 발생할 때 한국 내 진영을 흉내 내며 그 비판을 가하는 이를 욕설을 섞어가며 공격한다. 왜 중국 비판하는데 왜구가 나오고 일본 비판하는데 빨갱이가 나오겠는가? 아니 도대체 한국인을 비판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인이 발작하는 건가? 물론 이런 일들이 단순히 관심병이나 진영논리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국인일 확률도 있는 것이다. 댓글을 잘 살펴보라. 악의적인 문장을 반복적으로 도배만 한다거나 단어나 문장구조가 이상할 때가 있다. 이런 게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행태가 이상할수록 외국인일 확률이 높다. 한국을 실컷 욕했던 사람이 있다. 어느 때엔 한국어린이를 욕하고 어느 때엔 한국노인을 욕한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중국 욕에는 발작하며 화를 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한국은 욕하면서 중국 욕에는 발작한다. 아마 해외의 중국인이거나 국내 체류 중국인일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과 논쟁 중에 생각이나 문장이 이상해서 외국에서 교육받았냐고 물어보니 그 뒤로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많다. 이런 일들이. 차라리 이렇게 티가 나는 경우는 알 수라도 있다. 완전 한국인처럼 행세하면서 악의적인 선동을 하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 선동을 조심해야 한다. 누가 언제 선동할지 모른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어그로나 자기 진영은커녕 외국인이 그 목줄을 쥐고 있을 수도 있다. 외국인이 이타적인 사람들의 목줄을 쥐고 다른 한국인들을 물어뜯게끔 선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개처럼 물어뜯고 있는데 목줄을 쥐고 있는 인간이 외국인들이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꼭두각시보다 부끄럽다. 부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 말길 바란다.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을 빼서 집어 던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사이비종교는 어떻게 인간을 세뇌했을까? 애초에 이타적인 한국인들은 보다 쉽게 세뇌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이비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세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광신도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보통 종교들이 다 그렇다. 종교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종교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았을 것이다. 세뇌 당한 사람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종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교주나 신의 종이 되길 바랐다. 단순히 종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교도 그렇지 않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유교의 나이 차별에는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유를 주장하면서 연하를 지배하려고 한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연하를 차별하려고 한다. 부디 그 모순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종교의 이익보다 본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의존도가 높을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다. 그걸 보고 어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냐며 조롱했다. 개 같은 새끼. 함부로 지껄이다니. 하루 빨리 미국과 대등한 관계의 동맹이 되어 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이 많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외교와 자본과 국군 체계의 문제 등 다양한 것들이 진척 차질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요망했다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미 전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실리적인 문제 등을 거론하며 반대하고 있다. 정치적 진영논리에 의해 반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 정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전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째서 전환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본질을 보면 복잡할 것이 없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한국인은 이타적이어서 의존적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런 의존적인 기질 때문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거부감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기질로 나타나는 의존적인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나는 미국과 가능한 대등한 동맹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국 영향권 아래에 놓였기 때문에 미국과 친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미국과 친했으면 좋겠다. 한국인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그런 자유에 대한 애정이 정치권에 영향을 주는 민주적인 국가라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자유국가와 사이 좋게 지낼 거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것일까? 책임지기 싫은 거야 만국 공통이지만 한국은 보다 심하다. 인사 책임을 거부하며 하청을 늘리고 보안 책임을 거부하며 인증서를 강요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었으면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두나. 인사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하청은 책임전가 이외엔 정말 쓸 데가 없다. 불필요한 유통구조로 대다수 국민들이 높은 생활비를 감내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다수에겐 비효율적이다. 보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상하게 개인이 보안에 대한 책임을 진다. 외국에선 은행이 보안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인증서가 없다고 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으면 고객한테 책임을 떠넘기나. 이제 보안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왜 한국인들은 그런 번거롭게 매번 인증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개인이 보안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무책임함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기질이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책임질 상황이 생기면 그 타인에게 떠넘겨왔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잘못 없어! 네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야! 다 네 책임이야!」 책임전가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희생에도 익숙했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국인들은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익숙해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안게 되는 악습에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을 떠넘기는데 익숙하고 책임을 떠넘겨 받는데 익숙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고 약자가 책임을 떠안는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IMF.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면 약자가 책임을 떠안았다.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하여 결과의 책임을 떠안으면 부자들이 그걸로 재산을 불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국민의 과소비가 문제였다며 국민에게 원인의 책임을 떠넘긴 적도 있다. 정신이 혼미하다. 이타주의는 결국 어떤 이기적인 인간의 이익을 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배국가의 국민들은 이타적이어야만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과연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인 한국에 어울린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그 이기적인 행동이 국가를 살찌우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올바른 모습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겸손하다. 외국에서도 유명하다. 지나치게 겸손하여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외국에서 아이가 성과를 내면 사방팔방 소문 다 내는 반면 한국에서는 굉장히 조용하게 넘어간다. 상을 타도 겸손하다. 승리를 해도 겸손하다. 우승을 해도 겸손하다. 왜 그랬던 걸까? 자신감을 드러내는 순간 공격받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해보자. 「너의 이익을 위해 자신감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수 있잖아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야지!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맞게 된다. 이타주의 사회는 결과적으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전 대통령인 오바마의 기자회견에서 오바마가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아 논란이 생겼던 적이 있다. 회견장이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자 외국인 기자가 질문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인 기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실망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서면 이기적이라고 공격받는 한국사회의 특성이 만든 참사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속된 말로 나대면 찍히니까 나서질 못한 것 같다. 설마 능력이 없어서 못했겠는가? 눈치보다 시간이 끝났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기억난다. 어느 기업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훈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스트레스로 자살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겸손하지 않고 나대면 따돌림 당한다. 어느 기업의 문제라기 보다 이것은 이타적인 한국인의 특성일 뿐이다. 이기적으로 변해야 그런 자신감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부디 한국인들이 마음 편하게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모른다. 이타적이다 보니 돈을 버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돈 쓰는 거야 개인 마음이다. 하지만 너무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뭔가 자유롭게 돈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돈을 많아 벌어도 쓰는 곳이 한정되어있다. 이타적인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는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하면 이기적이라며 비난을 받기 때문에 눈에 띄는 사치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사치를 한다. 모바일 게임과 개인방송에 수백에서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붙는다.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사치하는 방법은 인터넷이 적합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도 주위에서 압박이 들어온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세요. 어려운 이를 위해 돈을 쓰세요. 이타적으로 돈을 쓰세요.」 본인을 위한 소비가 악이 되었다. 소비가 악이 되자 생산이 선이 된다. 국민들은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 부동산과 주식에 투기나 투자를 한다. 부동산 투기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인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엔 무척이나 생산적인 활동이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돈이란 양분을 흡수해 돈이란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다. 부동산이란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필요한 돈을 흡수하여 다른 나무들을 말라비틀어지게 하면서까지 돈을 맺게 한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비생산적이지만 개인적으로 생산적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과열은 소비가 죄가 된 이타적인 사회가 만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내에서 돈이 돌지 못했던 것은 사치를 향한 이타주의자들의 냉엄한 비판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돈 쓰면 욕먹는 곳에서 마음대로 돈 쓸 수 있겠는가? 만약 이기적인 사회였다면 마음대로 돈을 사용하여 국내에 돈이 돌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므로 굳이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퍼붓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인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서 얻은 만족감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에서 잠깐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이나 개인방송에서 잠시 관심을 받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보다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만족감을 위해 현실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웃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노인들이 그렇다. 손주들을 보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모바일 게임에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부으며 얻는 만족감과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얻는 만족감 중 어느 쪽이 더 큰 만족감을 주게 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에서 만족감을 더 느낄 것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겠는가? 사회는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이타적으로 행동해달라며 강압할 것이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조차 간섭하면서 이타적일 것을 종용할 것이다. 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사치를 하면 눈에 띄어서 간섭을 당한다. 이러니까 마음 편하게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쏟아 붙지. 어떤 가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떤 가수에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부를 바라는 이메일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가엾게 여겨 돈을 보내줬더니 더 큰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런 메일이 와도 무시한다고 한다. 이타적인 사회에겐 한번 이타적으로 행동한 인간은 계속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강요한다. 성가시다. 한국인은 착하다. 배운 대로 다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를 위한 비용지출을 꺼려하는 것은 선의를 강요하는 이타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면 더 많은 기부를 요구할 수가 없다. 타인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니까 타인이 이래저래 간섭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겠다는데 이래저래 간섭할 수 있겠는가? 위선이란 공격도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데 위선이 어떻게 나오나? 보답이 없더라도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소비가 선이 되어야 한다. 멋대로 돈을 쓴다고 오지랖 피우는 것은 이타주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오히려 선행의 첫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음 편하게 이기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다.」라는 사실 하나로 수많은 현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본질을 알게 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어떤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걸로 안다. 그래도 대부분 해결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단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을 보다 더 어른들 말을 잘 따르게 가르친다. 그러면 자신의 의견보다 강자의 의견을 따르는 데에 익숙해져 강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에 동참하거나 외면하게 된다. 해결하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오히려 더 집단 괴롭힘이 심해진 것이다. 그래도 본질적인 이유를 몰라 더 더 더 착하게 하고 어른 말 따르게 한다. 그러면 더 더 더 심각해질 뿐이다.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는다. 끔찍하다. 정말. 이런 끔찍함에서 벗어나라면 마냥 착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원리를 예측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 의지로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해야지 잘못된 것을 당하거나 목격했을 때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것을 행할 것이다. 이미 행동원리가 결정되었다면 올바름과 무의식이 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본질을 찾아 근본적인 원인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사회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이기주의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인 한국이라. 아마 걱정을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타인을 위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 공동체가 붕괴될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묻겠다. 그런 걱정을 하는 네가 바라는 이익은 무엇인가? 인간불신인가? 공동체붕괴인가?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네 이익에는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는가? 아니지 않나. 자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국가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종류의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명령 받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개돼지가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해도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오히려 더 낫다. 왜냐하면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의 바람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비리를 저질러 부정축재를 하거나 사람들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인간은 이타주의 사회에도 많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 평범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겨왔던 것이다. 「너는 착하니까 나의 이익을 위해 살아라.」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은 그릇된 이기주의들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살았다. 이타주의 사회에선 그런 것이 일상이다. 정말 속상하다. 왜 착한 사람들이 이용당해야 했는가?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착하다.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기준만 바로잡으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걸 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은 현상을 보고 결론을 낸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인들은 배운 대로 다 했으니까. 꼰대도 낮은 출산율도 높은 자살률도 이성혐오도 이것도 저것도 다 배운 대로 한 결과니까. 제대로 된 방법만 알려주면 그것도 배운 대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올바른 이기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도 이기적이어야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의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적인 사회는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이기주의자의 낙원이었을 뿐이다. 한국이 이기적인 사회가 되면 가장 중요한 인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다.」라는 사실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해서 자신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잘못된 것은 일부만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만 이기적이다 보니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인간들의 이익이 전부 일부 이기주의자로 몰려 마치 이기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인식되게 되어버렸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런 일은 없어진다. 예를 들어보겠다. 부모와 자식이 휴일 여가를 보낼 곳을 찾기로 했다. 이타적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니? 거기로 가자.」 자식이 부모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거기로 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타적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곳으로 여가를 가는 것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었다면 이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행복이 내 이익이다.」 남의 이익을 우선시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타적이라 할 수 있는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본인이 바라지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때 나타난다. 이타적인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가고 싶지 않아도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여가를 간다. 그것은 그들에게 노는 것이 아니었다. 봉사와 희생이었다. 그런 이타적인 것을 받은 측도 불편하다. 그것이 봉사와 희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불편해하면서도 나중을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봉사와 희생을 해야 하겠지. 나도 바라지 않는 걸 해야 하겠지.」 답답하다. 그런 일방적인 봉사와 희생이 불편해질 무렵 가족여행을 꺼려하게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괜히 눈치 보면서 노는 것보다 대등한 관계하고 속 편하게 노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버린다. 보다 더 나쁠 때에는 즐거움을 강요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봉사와 희생을 했는데 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거야! 즐기라고!」 멋대로 한 봉사와 희생을 통한 즐거움을 강요한다. 이타주의란 마음에도 없는 가식은 서로를 오히려 멀리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어중간한 이타주의는 솔직한 감정을 전하는 것조차 막아버린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아버지는 A에 가고 싶다. 어머니는 B에 가고 싶다. 자식은 C에 가고 싶다. 그러면 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을 다 말하고 토론을 하면 된다. AB C에서 여가를 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지출 비용과 거리와 시간과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는 범위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곳을 가면 된다. 자신의 가고 싶다는 곳을 간다는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상대를 설득한다. 이 정도는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토론 끝에 결정된 곳에 가면 대부분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이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토론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무조건 부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자기의사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이타주의가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말이나 듣고 남에게 휘둘리는 걸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타주의 사회가 불행한 것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자신의 의견이 통과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해야 한다. 모두가 이기적이라면 본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타인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기심이 존중 받기 위해서는 너의 이기심도 존중해야겠지.」 서로의 이기심을 존중하는 만큼 논리적인 토론과 애정으로 결론을 내리고 수긍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이런 이기주의가 가능 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자유, 평등, 지성. 따라서 이기주의는 현명한 자유국가에서나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유국가에서는 이기주의가 어울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고생하는 곳은 일부만 이기적이거나 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세 가지에 사랑은 굳이 넣지 않았다. 지성이 있다면 사랑이 필요하다는 건 알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사랑해야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이성을 사랑해야 이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사랑해야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사랑은커녕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자는 그 누구든 위험한 인간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간불신과 공동체붕괴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국가에서는 이타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지배자에게 모든 이익이 몰리려면 사람들이 이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모두가 이기적이게 되자. 그러면 지금 권력의 충돌이 얼마나 훌륭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정쟁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 권력자들이 각자가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 국민들은 그런 싸움에 실망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서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들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약점을 공격해버리는 바람에 온갖 더러운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걸로 선동 당하기 시작했다. 선동 당하는 사람들은 그에 맞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타주의가 선동에 취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보통 아무런 근거 없이 선동 당하지는 않는다. 공산당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공산당의 침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동 당한 사람들을 무조건 나무라기 보다 어째서 선동을 당했는지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선동 당한 국민들은 10의 잘못을 100의 잘못으로 인지하거나 10의 잘못을 0의 잘못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먼지를 털어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나오면 부풀려서 공격하거나 그에 대응하여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방어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서로를 어리석다며 공격했다. 진영을 나눠 서로를 공격하는 동안 선동을 하는 이들은 그런 진영을 이용해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외국인이 그러는 것 같을 때엔 참 참혹했다. 속상하다. 어째서 선동을 당해야 하는가? 이제는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잘잘못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이기적인 자유국가 국민의 필수소양이다. 10의 잘못은 10만큼만 비판하면 된다. 10의 잘못을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하면 안 된다. 그런 편향적인 사고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만든 것이다. 몇 가지 권력의 이기심이 만든 사건들을 집어보겠다. 조국. 조국이 법무부장관 후보가 될 무렵 자녀의 입시 문제로 공격을 받았다. 이것은 정치적인 공격이었다. 조국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점은 부정해선 안 된다. 만약 조국이 법무부 장관 후보가 아니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공격한 이들과 같은 진영이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이후 다른 진영에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이라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아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지 않나. 단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과장되게 해석하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나서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의혹은 많다. 과장된 것도 있고 축소된 것도 있더라. 일단 여기서는 조국 자녀의 입시문제만 다루겠다. 요점은 내로남불이었다. 쭉 살펴본 결과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권력자가 법의 망을 피해 행할 수 있는 부당한 행위의 나열. 잘못되었지만 관행이어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던 그 선을 줄타기 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논문 1저자 부당 등재는 관행보다 더한 행위고 무시험 전형은 관행 수준으로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맥의 친분으로 좀 더 과장되게 성과를 포장하거나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해주는 것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던 부당한 행위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타적인 사람들이 인맥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집단 이기주의였다. 이런 부당한 관행이 보다 큰 파장을 부른 것은 평소 하던 말 때문이라고 한다. 앞에서는 입 발린 말을 하면서 뒤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잘못된 관행을 이용했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마치 모든 입시 비리의 원흉인 것마냥 공격을 받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를 받았다. 나는 여기서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겠다. 이번 주제에서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각자 판단하길 바란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단지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향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집단의 이익에 맞게끔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이기적으로 판단하길 바란다. 한국인들은 이기적으로 판단해도 될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보다 학력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어리석어 보였던 것들은 이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가 지혜로운 사고를 앗아갔다. 나는 한국인들의 지성을 신뢰하겠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떤 이의 이기심이 올바른지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입시 비리에 대한 경각심과 공정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자 암암리에 행해지던 입시에 관한 부정한 어둠들이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권력의 이기심이 한국에 있던 어둠을 비춘 것이다. 일반적인 국민들은 사회의 발전과 행복과 안녕을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면 이 사건을 긍정적인 결말을 낳은 사건이라 판단할 것이다. 앞으로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서로의 어둠을 비추길 바라겠다. 윤미향. 윤미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공격을 받았다. 정의기억연대와 관련된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정리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의 중심인 위안부는 한국에게 있어 성역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다루기가 어렵다. 정리하기 어렵고 다루기가 어렵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는 것도 보인다. 사건을 키우기 위한 듯한 언론의 무더기 오보가 있었다.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이들은 이타주의적인 진영논리가 만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언론은 좀 더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정보를 다루는 전문가가 그러면 정보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기자를 신뢰하고 싶다. 이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요점 잡기가 어려운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또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기부단체의 기업화가 만든 폐해로 보인다. 한국의 기부단체들은 기본적으로 불투명하다. 어떤 신문사와 대학의 공동연구를 통해 45개의 공익법인의 투명성을 평가했는데 90점이 넘는 A급은 단 두 곳이었다. 그런데 A급이라 불리는 대한적십자사조차 부실이 심각했다고 한다. 직원이 공금을 횡령하고 리베이트를 받고 혈액관리도 엉망이라고 한다. 5년 동안 107명의 직원이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A급이 이러면 나머지는 어떻겠는가? 이런 걸 보면 정의기억연대의 불투명함이나 기부금 유용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업계 평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내에 있는 기부단체들의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국민들이 기부단체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할 근거가 생겼다는 것이다. 투명하지 않으면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모른다. 해외를 예로 들자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에서는 기부금의 70~80%가 단체 운영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는 기부금의 97%가 자선에 쓰였다고 한다. 불투명하면 그런 걸 모르게 된다. 과연 한국의 불투명한 기부단체들은 기부금의 몇 퍼센트를 자선에 사용했을 것인가? 기부단체들이 불투명하다 보니 차라리 기업이 기부단체를 운영하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품을 구매하면 구매금의 일부가 기부금이 되어 자선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부되는 금액은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전부 공개한다. 기업 입장에서 어떨지는 모르겠다. 단지 기업형 기부단체보단 기부단체형 기업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면 자연스럽게 기부를 하게 되어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투명한 기부단체에 기부하여 그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기부단체들이 그런 걸 보고 싶지 않다면 투명하게 운영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춘 꼴이 되었다. 보다 더 많은 어둠이 비춰지길 바란다. 추미애.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 후보가 될 무렵 아들의 특혜 휴가 논란으로 공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이다. 추미애의 아들이 군복무 도중 휴가를 나가 복귀를 하지 않고 전화를 통해 휴가를 연장했다는 것을 당시 당직사병이었던 병사가 주장했다. 그걸 어떤 신문사가 보도해 논란이 발생했다. 실제로는 병가였다고 한다. 군법상에 하자가 없다고 한다. 병가에는 요양심의가 필요한데 그것은 입원 중인 현역병만 대상이라 한다. 전화로 휴가를 연장한 육군 병사가 4년 동안 삼 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 카투사는 36건이라고 한다. 이외 의혹제기 한 병사가 명예훼손을 당한다거나 보좌관이 대신 전화를 했다거나 국회에서 거짓말을 했다거나 평창올림픽 통역병 파견 청탁 의혹들이 있었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게 되었다. 특혜의혹을 제기한 당직 병사가 정정보도를 청구할 정도로 과장되게 보도하거나 추미애 아들을 위인과도 같은 인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과장되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의혹을 제기한 병사를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위의 두 사건에 비하면 큰 잘못은 아니다. 사건 자체만 보면 쟁점은 보좌관 지시와 외압유무만 남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거짓말은 사건 이후 벌어진 것들이다. 보좌관 지시는 부탁이란 말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외압은 명확하게 증명하긴 어렵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절차라면 굳이 외압까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부모가 같은 절차를 요구했을 시 허용되지 않는다면 특혜라고 볼 수 있고, 특혜라면 외압을 의심해봐도 좋을 것이다. 사건 자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 또한 위의 두 사건에 비해 잠잠한 편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 부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청탁과 특혜가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해본 사람이라면 징병된 인원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친인척이 권력자라면 여러모로 배려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면회나 외출이 가능하거나 보다 편한 곳에서 복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배려가 외압으로 해준 건지 아니면 알아서 해준 건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권력이나 인맥으로 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을 대부분 알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그룹의 임원 아들이 황제 군복무를 하여 논란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특혜는 일상적이었다. 아마 그런 보편적인 인식 때문에 추미애의 아들 논란이 더 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추어 세상을 밝게 만드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여당 측 인사를 다뤄보았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탄핵이나 사립유치원 같은 예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춘 어둠일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들도 결국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권력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집단끼리 이익을 공유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어둠들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밀착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아무 어둠도 비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당 독재와 같은 것이다. 만약 권력자들마저 집단의 이익이 아닌 본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권력집단 내부의 어둠까지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과거나 현재나 정치적인 사건은 과장되거나 축소되었다. 과거 맹목적으로 옹호하던 사람들이 현재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걸 보면 참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라 그렇다. 이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의 진영을 옹호하고 타인의 진영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진영논리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고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면 진영 관계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괜찮다고 판단되는 것은 옹호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은 비판했을 것이다. 잘못된 정도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형평성 있는 비판을 하고 비난을 가했을 것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진영논리에 빠져들고 진영논리에 빠져들기 때문에 감성적이게 되었다. 감성적이기 때문에 편향적으로 잘잘못을 따졌다. 그런 객관성의 상실은 이타주의가 부른 것이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옹호할 필요가 없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더 심하게 욕할 필요가 없다. 왜 권력에 이용당하고 있는가? 권력의 이기심이 부른 어둠들을 보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치부를 감췄다면 국민들은 그런 어둠들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쁘다. 현명한 국민들은 이들이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한국에 있는 어둠들을 비추길 바라야 한다. 그럴수록 사회는 건전해지고 올바르게 되며 행복하게 된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이기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자. 그것이 바람직한 자유국가의 모습이다.

 

 

 

무엇이 진정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무엇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길인가? 자유국가에서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했던 것은 진짜 올바른 것이었을까? 보통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한다. 교육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있는 사회문제는 거의 다 교육이 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르쳤던 올바름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걸 인지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타적이 아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한국인은 학력이 높다. 지식이 많다. 그런 한국인들이 현명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예로 들겠다. 만약 인터넷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방치하면 사회수준이 더 낮아지는 것이다. 각자 알고 있는 전문지식들을 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알려줘야 사람들이 배우고 사회가 현명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예로 들겠다. 만약 현실 속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똑같이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비리든 부패든 잘못된 관행이든 방치하면 사회수준은 더 낮아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발언에 신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주관을 객관으로 만들면 된다. 자신의 주장을 다수가 인정하게 되면 그 주장은 객관화가 된다. 어떤 사람은 주장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공격할 때가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상대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게 되어 상대의 주장만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각자 올바른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사회가 건전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면 안 된다. 이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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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한번은 퇴고를 하긴 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면 오타나 오류가 많네요. 분명 당시엔 없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많군요.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도덕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우선 먼저 이것부터 씁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달린 족쇄를 집어 던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잘한 거면 칭찬 받고 못한 거면 비판 받으면 됩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이기심을 평가하면 됩니다. 이제는 올바름도 자유롭고 평등하고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부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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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국가의 소년범죄 (3) 2020/11/25 PM 09:04

자유국가의 소년범죄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도덕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국가임에도 어째서 도덕은 자유롭지 못했는가?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와 같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 상사 말을 잘 듣는 사원. 착하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탓에 생긴 역겨운 현상이다. 짓지 않는 개를 가리켜 착한 개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도 그 취급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되려 네가 잘못된 것이라며 타박해왔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그저 문화의 특성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령차별이 연하에게 복종을 바라는 꼰대를 만들고 그렇게 학습된 차별로 갑질을 행하게 만듦에도 말이다. 다른 국가에도 갑질이 있지 않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다. 대부분 국가는 지배국가였다. 그러니까 그런 잔재가 남아있는 거다. 한국은 그런 잔재가 유교였을 뿐이다. 그런 유교가 원인이 된 꼰대질과 갑질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불러왔던가? 꼰대질과 갑질로 싸우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살해하고 자살한다. 의식적으로 뉴스를 시청하길 권해보겠다. 정말 많은 불행을 부르고 있다. 그것들로 불행했던 이들은 그들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게 만든 이들의 책임조차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유교에는 장유유서라는 나이로 차별하는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든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한국인들은 한 살만 차이 나도 존대말과 반말이라는 언어의 차이가 발생할 정도로 차별하게 했다. 「연하는 연상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올바른 도리다.」 보아라.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이 꼰대질이다. 꼰대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번 정의해본다. 꼰대는 인간을 도덕을 명분으로 지배하려는 인간이다. 생각해보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명령하는 것이 꼰대 아니던가? 「나 때는 이랬으니까 너도 이래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 말을 따라. 내 말에 복종해.」 간단하지 않나? 지배하려는 인간은 지배자고 도덕을 명분으로 연하를 지배하려는 자는 꼰대다. 꼰대질이나 갑질로 불행을 겪게 되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착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의식적으로 보다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꼰대를 만든 것이 도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도덕의 가르침인 장유유서를 지키며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나쁜 꼰대가 싫어서 착하게 행동하려 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연하에게 꼰대질을 해서 이제는 자신이 불행을 전파한다. 본인인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똑같이 행동해버린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다. 올바른 일을 행함의 결과가 불행이라면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겠는가? 한국사회의 많은 불행은 여기에서 왔다. 한국은 애정이 결핍된 나라다.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걸로 미성년일 때 이성교제가 부도덕하다 배운다. 그런 탓에 커서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여성을 섹스파트너로만 여기고 남성을 ATM기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떤 사람은 연애보다 성매매가 효율적이라고까지 하더라. 이성을 성욕 해소 도구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다. 심각성을 느껴야 한다. 이성애가 결핍되자 이성의 권리에 화를 내고 자신의 손해에 발작하며 거부한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는 인간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한다. 왜 출산율이 낮을까? 이성애가 결핍되어있으니까 그런 걸로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국심이 결핍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왜 여학생들은 남성끼리 동성 연애하는 작품들을 즐기게 되었을까? 단순 취향으로 치부하기엔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이상으로 많다. 남성끼리 성관계를 맺는 것까지 즐긴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이 출연자들을 소재로 동성애 작품을 만들고 그걸 출연자들에게 보여주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동성애 작품을 만든 사람이 그 행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이성애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으니까 그런 거다. 여학생들이 본능적으로 남성에게 관심이 많다. 그런데 도덕으로는 나쁘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착한 여학생들은 남성의 동성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하면 처벌받았다고 하지. 이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교육받는 것. 얼마나 가엾은 일일까? 여성의 정조를 명분으로 미성년자의 성관계가 부도덕하게 되었다.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배우니까 성욕이 많은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성욕이란 자연스러운 본능이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니 성욕을 해소하려는 행동 자체도 역겨워진 것이다. 왜 성 상품화에 예민할까? 생각해보자. 부도덕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마약이다. 성욕이란 부도덕한 쾌락을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남성들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 것 같나? 정말 슬프다. 왜 성별이 평등해지고 있음에도 남성혐오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겠는가?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는 한 남성들이 전부 거세당하지 않는 이상 남성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욕이 부도덕하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지하길 바란다. 한국은 여성주의로 남성혐오가 생긴 게 아니다. 애초에 도덕으로 성욕이 많은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쳐다보면 화를 낸다. 매력을 느껴 본능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학부모가 항의를 한다고 한다. 한국은 성인들도 포르노로 성교육을 받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해 성 지식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다. 정말 웃기는 얘기다. 왜 그렇겠는가? 성욕이 부도덕하니까 그런 거다. 「세상에 학교에서 부도덕을 가르치다니요!」 성교육에 대한 항의는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여성주의는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예전에 어떤 여학생이 고민상담을 부탁하며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걸레라고 불려 화가나 그렇게 부른 상대와 싸우다가 강제전학조치를 당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받아서 고민이라고 하더라. 걸레라. 왜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걸 모욕으로 취급하는가? 그건 여성을 도구 취급했던 지배국가의 도덕 말고는 이유가 없다. 남성은 그러지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걸레라고 부르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이 있다면 유교인이라고 반격하길 권하겠다. 여성들은 여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무엇이 더 자유로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자유로운가? 아니면 억압을 받는 것이 자유로운가?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게 자유로운가? 아니면 꾸미면 잘못되었다며 공격받는 게 자유로운가? 무엇이 진정 여성인권인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은 지금 유교에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성을 억압하는 게 여성인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일이다. 나는 여성계가 사랑을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남성을 사랑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에겐 사랑이 없었다. 사랑은 커녕 증오나 혐오를 퍼트린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 검열이라는 성욕이 많은 남성박해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사와 여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정상적인 이성애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중동국가보다 더한 성 억압을 강요하며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진 이들을 나쁘다고 공격했을 뿐이다. 한국의 출산율에 그들의 증오와 혐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한국의 불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좋다. 그들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정의마냥 내세웠던 점이 잘못되었다. 그 때문에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 휘둘려서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래서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서 쓸모가 없다. 모든 주장은 이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줄고 혐오가 는다. 결혼이 줄고 출산도 준다.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이성을 향해야 할 애정이 문화로 가자 급속도로 성장했다. 왜 한국문화는 노래 자체를 즐기기는 것보다 우상에게 애정을 품는 아이돌문화가 유명할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다양한 장르의 가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아이돌만 성장했는가? 그들의 성장에는 이성애가 결핍된 사람들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문화에는 음악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 빠지지 않는 걸까? 어떤 창작물도 끝내는 사랑으로 흘러가서 지겹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왜 사랑이 빠지지 않았는가? 문화로 애정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성장은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에 영향을 받는 거다. 이런 성장은 그 원인이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보장은 없다. 게임문화 성장 또한 애정결핍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가족애나 이성애가 많은 곳에서는 게임보다 실외놀이를 더 즐겁게 즐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이성애는 애초에 부도덕하다 배우고 성장한다. 가족애는 부모의 꼰대질에 질린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가족끼리 놀러 가는 걸 거부하게 된다. 꼰대질을 하지 않는 가정이야 사이가 좋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다. 한국이 그렇게 행복한 국가였으면 출산율과 자살률이 이렇지 않다. 보편적으로 불행하니까 그런 거다. 가족애가 결핍되어 버렸다. 더구나 실외에 놀 거리도 적다. 애정결핍에 놀 거리도 없는 한국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는 게임을 하는 것 자체로 너드 취급 받는다고 한다. 한국이 그러지 않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이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플레이강국의 이면에는 그런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한국문화는 애정결핍이 만든 결과물이다. 참 복잡한 심경이다. 사회에 뿌리내린 근본을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다양한 현상이 해석된다. 뿌리부터 자라난 나무의 곁가지를 쳐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뿌리부터 바꿔야 해결된다. 카스트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카스트의 책임인 것처럼 도덕으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도덕의 책임이다. 도덕을 바꾸지 않음 도덕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해봐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 계속 반복될 뿐이다. 나는 내가 이상한 아이인지 알았다. 나는 세뱃돈을 받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친척 어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싫고 그걸로 돈을 받는 것도 싫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헐값에 팔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뱃돈을 받고 나면 부모에게 세뱃돈을 건네주고 모른 척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단순하게 돈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이였다면 불쾌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최대한 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절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며 자기합리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제사를 지내라 하고 산 자는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명령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정말 숨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이제 내겐 어른과 조상에게 절하는 한국 국민과 태국 왕족에게 절하는 태국 국민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어떤 정신 나간 태국 왕족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도 절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역겹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가급적 아이들을 위하려고 노력은 한 것 같다. 그러면 뭐하나. 그 노력의 근간이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는데. 친구의 어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때엔 한두 살 차이도 큰 시기다. 그런데 한참 어린 동생이랑 친구처럼 지냈었다. 그걸 보고 어떤 어른이 불같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연하와 대등하게 지내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다. 당분간 연하와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 대중가수의 춤과 노래를 TV를 통해 즐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TV채널을 바꾸고는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그런 문화를 즐기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도덕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내적 결함을 알아차릴 때까지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니 다 식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강제로 먹었다. 왜 늦게 왔냐며 혼이 나고서는 다 불어터진 걸 억지로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난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모처럼 준비한 음식이 식을 때까지 늦게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나는 김치가 싫었다. 그 신맛이 무척 불쾌했다. 볶음김치는 먹을 만했는데 생김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는 한국에서 이상한 아이였다. 김치를 먹게 해야만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 비정상을 고치기 위해 어떤 어른이 다른 어른에게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 강제로 김치를 입 안에 쑤셔 넣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걸 받아드릴 수 없었다. 맛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강제로 그걸 당한 다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걸 내뱉고 아이들에게마저 이상한 아이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한국의 자랑식품인 김치를 먹지 않는 게 그렇게나 못마땅했던 걸까? 내가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 화를 낸다. 유치원생일 때 미형이 아닌 이성과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고 답답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그때 나는 외모와 관계없이 사람을 대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그건 교정된 듯하다. 이외에 자잘한 것 하나하나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제로 교정을 당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이상하고 사회가 올바른 것이라며 꾸짖었다. 어떤 것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내 주변에 자유주의자는 없었다. 「어른에게 절하기 싫어하는 내가 나쁜 거야? 연하와 친구 먹는 내가 나쁜 거야? 대중문화를 즐기는 내가 나쁜 거야? 멋대로 준비한 배려를 받지 못한 내가 나쁜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내가 나쁜 거야? 미형이 아닌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쁜 거였어? 나는 나쁜 아이구나?」결국 어린 학생이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나쁜 자신을 할퀴고 상처를 입혔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 것은 도대체 누구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어른들이 과연 악한 의도로 행한 것 같은가? 선한 의도로 행한 것이다.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배운 대로 가르쳤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르침대로 교정되려다 망가진 아이의 잘못인가? 아마 대다수의 아이들은 사회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사춘기다. 어린 시절부터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살다가 사춘기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지? 내가 왜 복종을 해야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유를 위해 반항을 하는데 정확히 어떤 뭐 때문에 그런 건지를 모른다. 마냥 어른이 잘못되었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까 반항기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항하다가 자유롭지 못한 원인조차 찾지 못하자 결국은 도덕의 지배에 복종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대다수 사춘기의 끝이다. 얌전해졌다. 착해졌다. 그런 말은 더 이상 지배에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를 보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많은 아이들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바라다가 망가졌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도덕의 책임이다. 자유롭길 바랬던 모양인지 인터넷 아이디마저 대부분 Free가 붙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Freedom과 Liberal의 차이를 몰랐던 것 같다. 그토록 자유를 바랬지만 나 또한 도대체 무엇이 원인으로 내가 부자유를 느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떤 사건으로 신체의 부자유를 느낀 순간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도피를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남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부자유는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의 트라우마와 나의 적인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 당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지배국가의 도덕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은 자유의 적이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이다. 나는 그걸 단언하겠다. 이외 도덕이 만든 현상 몇 가지를 살펴보자. 왜 귀농을 꺼려하겠는가? 시골의 연상들에게 지배 받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는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연상의 꼰대질을 당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이제 과거의 말일 뿐이다. 도시의 연상들도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도 꼰대질이나 갑질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어 자제하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는 꼰대질을 해도 의식적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골은 아직 그런 게 부족하다. 연하가 시골에 가면 모든 연상들에게 꼰대질을 당할 것이다. 꼰대질이 곧 인간을 지배하려는 행동이므로 꼰대질을 당하러 간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시골에 젊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자유롭게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지배할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연하를 아기 취급할 때가 있을까? 다 큰 성인도 자신에게 비하면 어리니까 아기라고 한다. 성인을 아기라고 하다니 황당하다. 왜 그렇겠는가? 나이로 차별하기 때문이다. 어리게 여겨야 자신의 위치가 올라간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 커뮤니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상임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형이라 강조하며 말을 한다. 이것은 「내가 위니까 알아서 기어라.」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어린 놈이 건방지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어린 녀석이 죄를 저질러? 이런 류의 발언도 연령차별에서 비롯된다. 굳이 나이를 붙이는 것은 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인이 아니라면 연하를 아기 취급하거나 어리다고 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걸 인식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인간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천재는 범재가 되어버리는가? 그건 범재인 어른의 입맛에 맞게끔 천재인 아이가 교정 당하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창의력이 없는 게임들이 많은 것인가? 창의력이 없는 윗사람 입맛에 맞게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있는 것은 윗사람이 창의력이 있거나 아랫사람의 창의력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위아래가 없고 평등하며 역할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넘어가겠다. 왜 명절에 친척과 만나기가 싫은가? 꼰대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명령하듯 잔소리하는 걸 듣고 싶어하는 자유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흔히 한국의 핵가족화를 개인주의가 원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연상들의 지배가 싫은 자유로운 이들의 자유주의가 원인이라고 본다. 연상의 명령이 싫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자유가 필요할 때는 자유 찾고 지배가 필요할 때는 도덕을 찾았다는 점이다. 핵가족화가 되었어도 꼰대질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왜 음주운전은 줄어들지 않는 걸까? 윤창호법이 시행되어 처벌이 강화되었음에도 여전하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마 처벌을 강화해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에는 술에 강한 인간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대단한 사람 취급 받는다. 한국 음주문화에서는 술 마시고 멀쩡한 것이 올바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배경이 음주운전을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술 잔뜩 마시고 「나 안 취했어!」 라며 운전을 한다. 술 마시고 멀쩡하게 운전하는 나는 대단해! 이런 사고의 흐름이 이어지는데 처벌 강화한다고 달라지겠는가? 무엇보다 음주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술 마시기 전에는 음주운전 하지 말아야지 해놓고 술 마시고 나서 이성을 잃고 「나 멀쩡해!」 라면서 음주운전을 하게 된다. 올바름이 원인이 된 문제는 법을 아무리 바꿔도 해결할 수 없다. 술에 강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한 음주운전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이고 올바르다는 것이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것들이 수많은 불행을 불러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걸 올바르다고 가르치면서 자유국가의 국민이 정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다양한 문제들을 성장해서 스스로 바꿀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쉬웠다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없었을 것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기에 배운 교육은 자아성찰이 없다면 대부분 평생 간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가 왜 그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겠는가? 한국인들은 학창시절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되고 성욕이 많은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연하가 복종하길 바라고 이성과 교제하는 걸 금하고 야한 걸 검열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져 갔다. 지배당해서 불행하고 이성애가 결핍되어 불행하고 욕구충족이 어려워서 불행하다. 너무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아닌가? 이런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한국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란다면 카스트를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인도의 카스트는 신분으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고 한국의 장유유서는 나이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다. 하위카스트가 상위카스트에게 평등하게 대해달라는 걸 보고 철이 들지 않았다며 비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황당하거나 화가 나는가? 그렇다면 하위카스트에 연하를 넣고 상위카스트에 연상을 넣어보라.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처럼 둘 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들이다. 부디 잘못되었음을 깨닫길 바란다. 장유유서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이일 때는 주로 차별 받고 어른일 때는 주로 차별한다는 점이다. 과거 수공업 도제시절에는 장인에게 부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면 도제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동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시절의 불평등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비슷하다 수련의나 전공의 시절에 부림을 당하더라도 이후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악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신분제와 달리 어릴 때는 지배당하더라도 어른이 되고 나서는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정치가가 늙은 정치가에게 나이로 차별 받았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과연 그 젊은 정치가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당하는 한국 도덕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연하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을까 궁금하다. 자유. 자유. 자유!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왜 한국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자유주의자는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도덕을 명분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지배라고 인식하지 못하여 왜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쉽게 독재자라도 있으면 싸울 수라도 있으련만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어야 했는가?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나? 선한 의지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냔 말이다! 아아. 자유를 희망했던 민주화 운동가와 자유민주주의자가 진정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에 맞춰 사회의 도덕을 변혁했다면 이토록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부를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이 원인이 된 사회의 불행. 그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묻나?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 지배국가의 도덕이란 잘못된 것을 바꾸는 걸 부정하는 이에게 도덕으로 발생한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부디 문화 특성이라면서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수호하려 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자유롭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유국가. 그것이 한국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올바른 일을 행하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덕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소년범죄의 대책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다. 최근 촉법소년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촉법소년이 무면허 운전차량으로 대학생을 쳐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SNS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 메시지를 올려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촉법소년 범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소년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범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환경에 놓은 아이들도 저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보검열이 어려운 자유국가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정보과잉공급이 만드는 결과물이다. 길거리에 총기가 널려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어린이는 그 총을 주어서 쏘고 싶다는 충동만으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쏘아버릴 것이다. 총기에 정보를 대입하면 그게 바로 촉법소년 범죄다. 자유국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 성인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성년자 차단을 한 사이트도 VPN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속이 가능하다. 굳이 VPN도 필요 없다.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뉴스를 통해 어른들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촉법소년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과거엔 한자가 많은 불친절한 뉴스나 주변 연상들에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질의 정보를 유튜브만 봐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과거 뉴스와는 다르게 매우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그 정보가 옳다는 확증은 없지만 과거에 비해서 확실히 친절해졌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물어보면 된다. 자신의 나이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정보수집이다. 아이들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달리 어른과 비등해지고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마치 길거리에 널린 총기를 주인 어린이들처럼 충동적으로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지배국가처럼 정보검열만으로는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없다. 일부 아이들은 정보검열 같은 통제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착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정보검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을 빼앗고 TV를 못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아이들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따돌림을 당한다. 정보라는 힘을 쥐지 못한 아이들을 아이들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보라는 총기를 쥐지 않은 아이가 따돌림이라는 총상으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정보검열은 자기보호도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면서 왜 정보검열은 그렇게 좋아하는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는 것으로 힘이 강해진다. 아이들을 볼모로 내세워 정보를 검열하는 것은 아이들을 다루기 쉬운 가축처럼 취급하기 위해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민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보를 검열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보라는 총기를 쥐어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쥐어 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총기 사용법과 쏴야 할 목적과 대상과 시기 등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국가에서는 정보과잉공급으로 나타나는 소년범죄에 대한 대책을 그에 맞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못하고 있는 건지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모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 공표되는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련자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촉법소년의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첫째, 촉법소년은 강력범죄 비율이 낮고 생계형 범죄 비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 지나치게 어릴 때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낙인을 찍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의견이었을 것이다. 생계형과 낙인효과. 어떤 이는 강력범죄만 형사처벌하자고 하던데 그런 의견이 받아 드려지지 않는 걸 보면 강력범죄와 생계형 범죄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생계형이라고 하더라도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하나를 더하겠다. 셋째, 촉법소년의 범죄는 사회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환경에 의할 확률이 높다. 환경에 관계없이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예로 들며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접하며 성장하고 한 명은 중국에서 중화사상을 접하고 성장했다면 그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맛의 호불호나 취미 같은 건 유전적 특성에 의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상적인 부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좋은 것은 한국 환경 덕분이고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것은 한국 환경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외면하는 편향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아직 미숙한 어린이들은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범죄는 잘못 가르친 사회의 책임도 크기 때문에 형사처벌을 하기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계자가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겠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그런 점은 어느 전문가나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자유국가에서는 지배국가의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 정보확산사회에서는 정보통제사회의 범죄대책을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소년범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는 이제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중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자유국가에서 정보는 총기자유국가의 총기와도 같다. 주자니 위험하고 뺏자니 도태된다. 다 총을 들고 있는데 너만 안 들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위태로운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잘못 주면 범죄가 발생하고 아예 뺏으면 따돌림을 당한다. 애 망칠 생각이 없다면 결코 정보검열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걸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냥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게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쥐게 된 어떤 촉법소년들은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앞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가?  촉법소년이 저지른 소년범죄는 소년원에 들어간다고 한다. 촉법소년이 아닌 소년범죄는 소년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촉법소년의 처벌이 약하다며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촉법소년들도 소년교소도에 수감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앞서 말한 생계형과 낙인효과와 사회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소년원에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소년범죄는 더 뻔뻔해지고 교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해봤다. 사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억압하고 질서를 강요할수록 자유가 소중해지지 질서가 소중해지겠나? 지금의 교정방식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무면허로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것은 어른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른들이 강요하는 질서가 답답하니까 질서가 하찮아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억압된 질서를 강요한다는 것은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질서가 소중해지기 위해서는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 더 큰 자유. 그것은 질서 밖의 자유다. 사회질서가 답답하다면 사회 밖으로 나가 사회가 없는 자유를 겪어봐야 사회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통제와 억압을 줘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서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위의 방식이 교도소고 아래의 방식이 추방이다. 옛 영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를 식민지에 추방하여 거기서 형기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이들이 식민지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고 사법역할도 맡아 현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영국 관리들이 식민지에 파견 나오길 거부하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서 죄수 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기들끼리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고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미국과 호주다. 영국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자유주의적 질서가 자리잡고 말았다. 그렇게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미국과 호주가 경험한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나이와 관계없이 보내 어떤 무인도에 보내 생존교육을 받게 한다. 그곳에서 자연과 싸우며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생계형 문제가 해결된다. 생계형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생존교육은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일 것이다. 이 생존교육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범죄학생은 의무고 나머지 학생은 권리다. 이러면 낙인효과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이수했다고 하여 낙인이 찍혀 차별 받는 일은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한 드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환경의 책임이 크다면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면 사회책임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촉법소년은 교육계가 책임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사회의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교육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질서 적응을 위한 교육과정이다. 무인도에서 자유를 주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정보확산사회에서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앞으로 설명할 예정이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죄를 지은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그 집단의 목소리는 커지는 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가정폭력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편의점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하여 편의점이 파출소의 역할을 겸임하게 되었다. 편의점 관계자들은 사회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예능계가 사회비판을 하는 걸 주저하지 않길 권하겠다. 역할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역할만 해도 존중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단위다.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날수록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 촉법소년 문제는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기도 하니 정규교육과정이 하나 늘어났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촉법소년들은 자유롭길 바라기에 자유롭게 무면허 운전을 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자. 사회의 질서가 없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자. 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만들어 준수했는지를 알게 해주자. 그래야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질서를 준수하는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교육이다. 자 생존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보자. 장소는 한국 내에 있는 무인도다. 한국은 섬이 많으므로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한 섬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대상은 초면인 촉법소년이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이므로 서로 초면인 것이 적합할 것이다. 범죄자는 의무고 나머지는 권리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교육을 의무로 무조건 생존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방법은 징병을 거부하는 방법과 같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의무냐 해외냐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해외로 가는 건 관대한 처사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평생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것과 평생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범죄자를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이라면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받고 싶으면 자원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생존교육은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는 시범적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학생들부터 행해보면 좋을 것이다. 기간은 1년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교육이행 정도에 따라 기간이 조정되어도 괜찮다.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학년이수가 가능하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다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생존교육이 끝나기 전 해당학년의 지식을 담은 시험을 쳐서 유급 여부를 결정한다. 생존교육은 말 그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남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공부한 학생들만이 진급할 권리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원은 열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수는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게 하여 차별이 없도록 한다. 교관은 생존전문가가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관이 군대처럼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철저하게 방치한다. 생존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알아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위급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치하던 도중 만약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게 더 큰 자유를 주면 된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력을 통해 의식주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작은 집단의 질서도 적응 못할 정도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혼자서 살아남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다 만약 혼자 고립된 학생이 무단으로 집단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집단은 그를 질서를 어지럽혔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게 하면 된다. 실제 인류가 살아온 생존경쟁을 몸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왜 자유를 준다면서 무인도에 갇히게 하는지 알겠는가? 사회 밖에 속한 외부인은 사회에게 공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유를 누리려면 인간이 없는 곳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그게 무인도다. 한 일주일에서 한달 가량 혼자서 살아남게 만들자. 밥도 혼자서 만들어 먹고 잠자리도 혼자서 준비하고 노는 것도 혼자서 한다. 그 자유가 힘들다는 걸 깨닫고 집단의 질서에 합류하길 원할 무렵 다시 돌아와서 사고화하고 화해하게 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환경은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하게 먹기 좋은 풀과 낚시하기 좋은 장소와 사냥하기 좋은 동물들을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용은 소년원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원재료와 교육전용 무인도와 생존전문가 인건비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교육이다. 마실 물을 만드는 방법.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하는 방법. 물고기를 낚시하는 방법.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 사냥한 걸 도축하는 방법. 고기로 요리하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 집을 만드는 방법. 옷을 만드는 방법. 놀이를 즐기는 방법. 등 이런 기본적인 생존교육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도 배운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 역할을 정하는 방법. 토론을 하는 방법. 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배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으면 불만이 생겨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직업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생존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배우고 연령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잘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밤 중에 별을 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직접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질서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한다. 어떻게 해야 질서 아래서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고찰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성숙함이 자유주의 질서 아래서 자유를 감당하는 것과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다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이다.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도 좋다. 살아남는 방법과 질서의 필요함만 깨우쳐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학년에서 배우는 지식을 쌓는 도구를 줘서 스스로 배우게 한다. 시기는 생존교육을 받은 지 약 6개월부터가 적절하다고 본다. 학업적인 부분은 완전 방치해야 한다. 문제집과 필기구만 주고 알아서 공부하나 지켜보자.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 유급한다고 해도 별 상관없다. 유급하는 동안 스스로 공부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생존교육을 받는 것이 죄에 대한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부모도 그건 납득해야 한다. 이런 생존교육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다면 촉법소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아이들을 교정시켜 강제로 질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당하는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자유국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운 의견개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견이 적절한지 사회에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이 이기적이라고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그 어떤 의견이라도 표현하게 하고 그걸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을 위하는 이타주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집단 이기주의가 만드는 폐해에서 벗어나 사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현명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진정 철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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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부터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오류가 있었네요. 다른 방식으로 교정 중에 있었군요. 현상부터 사물을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올라 가다 보니 종종 이런 경우를 겪어요. 그래서 대게 오류가 있는지 확인했는데 이번엔 소홀했네요. 다음엔 조심해야겠습니다. 일단 정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사랑하는 여성들이 여성주의라는 또 다른 지배로부터 자유롭길 바랍니다. 꾸며도 안돼. 성욕도 안돼. 사귀어도 안돼. 이런 부자유스러운 걸 어째서 여성인권이라 생각합니까? 보다 자유로운 것이 여성의 인권인 것입니다. 착한 여성들이 이타주의에서 벗어나 현명한 이기심으로 자유롭게 살길 바라겠습니다. 머리 긴 것이 남성이 정한 여성성이므로 잘못되었다. 라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과거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지면 어떻게 합니까? 길게 기르고 싶으면 기르면 되는 거고 짧게 자르고 싶으면 짧으면 되는 겁니다. 길게 기르면 나쁘다고 주장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게 아닙니까? 철저하게 자유를 관점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여성주의를 인권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모든 인간이 부디 자유롭길 바랍니다.

 

다음 주제는 아마 새로운 도덕입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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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인간신    친구신청

세줄요약이 없다니 너무 슬프군요.

산북동    친구신청

가독성이 너무 안좋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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