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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디라 간디,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다. (0) 2015/06/11 AM 10:23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도 초대 수상 네루가 집권 17년 만에 돌연 병사했다. 죽기 전 많은 사람들이 네루 다음에는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네루 스스로는 자신의 딸 인디라가 대권을 잡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고 일축했지만 오해를 살만한 일은 몇 가지 있긴 했다.

인디라는 독립 이전에 일찍이 죽은 자기 어머니를 대신해 오랫동안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해온 데다가, 네루가 죽기 몇 달 전 인디라는 네루의 후광을 적극 활용해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의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네루는 이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루 사후 치러진 선거에서 인도국민회의는 다시 여당이 되고, 수상직은 샤스뜨리(Lal Bahadur Shastri)라는 원로 정치인에게 돌아갔으나 그 또한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병으로 죽는다.

또 다시 비게 된 수상직을 잡기 위해 많은 집권 여당 정치인들이 심한 경쟁을 하였으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미봉적으로 만만한 애송이라 여겨진 인디라를 수상으로 앉힐 것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인디라가 자기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 활용한 바는 있었으나 네루가 인디라를 일찍이 후계자로 지명하거나 그에 관한 교시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볼 때 소위 말하는 네루 왕조라고 하는 것은 피상적인 해석이다.

비록 네루부터 시작해 인디라 간디 그리고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 그리고 다시 그의 아들인 라훌 간디가 차기 수상직 1순위에 오른 권력 세습의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지만, 엄밀하게는 네루 왕조가 아니고, 인디라 간디 왕조라 해야 옳을 것이다. 굳이 충실한 민주주의자 네루의 이름을 끄집어들여 그를 더럽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디라 간디는 수상이 되고 나서 아버지 네루가 세운 국가 건설의 몇 가지 원칙 특히 의회 민주주의와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하는 국가자본주의 그리고 세속주의의 가치를 국가의 기본 이념을 확고하게 지켜나갔다.

그런데 그 가운데 국가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경제 상황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식량 위기가 만연하고 외환위기까지 겹친 데다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발생한 물가 급등까지 겹쳐 인디라 간디와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회의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1967년이 되면서 서벵갈의 낙살바리에서 마오주의자 농민 반군이 엄청난 기세로 유혈 봉기를 하였고, 서벵갈과 께랄라에서는 공산당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우선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색혁명을 시작하여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고스란히 지주에게만 돌아가면서 농민 불만이 갈수록 고조된다. 여기에 네루가 시행했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계승하여 은행, 보험, 석탄 산업의 국유화와 외환규제법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결과로는 만연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를 맛보게 되고, 권력까지 내줄 상황까지 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반민주 독재 보수 정치를 시작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 시작은 1971년 총선부터 시작되었다. 인디라는 ‘빈곤 추방’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렇지만 빈곤의 대상이 되는 지주제 철폐나 부패 척결, 부자 탈세 방지와 같은 빈곤한 농민과 도시 빈민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마련하지 않았다.

오로지 구호만 앞세워 못 배우고 간한 인민들에게 지지를 확보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가동하여 승리를 거두고, 1971년 12월에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974년에는 암호명 ‘미소 짓는 붓다’ 아래 핵실험을 성공을 거두었다.

긴박한 경제난은 놔두고 전쟁과 핵무기 개발을 통해 강한 국가를 천명하고 파키스탄에 대한 적대적 구조를 세우면서 민심의 물꼬를 다른 데로 돌리는 전형적인 보수 세력의 전략을 구사하여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듬었다. 경제는 더욱 어려워짐에도 농촌과 도시의 빈민층은 국가주의와 반무슬림 전략에 파묻혀 그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다.

1973년에는 델리를 비롯한 북부 인도 전역에서 가중된 경제난과 부패의 심화 등에 대해 시민 저항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 6월 자신의 지역구에서 저지른 부정 선거에 대해 알라하바드(Allahabad) 고등법원에서 의원직 박탈 (즉 수상직 하야) 및 향후 6년 간 피선거권 박탈을 판결하자, 인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켜버렸다.

그 후 인디라 간디는 야당 정치인을 구속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독재 정치로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차남인 산자이 간디(Sanjay Gandhi)가 제2인자의 위치에서 권력을 남용해 민주주의의 구조가 크게 침탈당했다. 산자이는 도시 슬럼을 강압적으로 소개시켜버리고, 산아제한을 한다는 명분으로 빈민 남성을 강제로 잡아들여 불임 수술을 해버렸다.

그 뒤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1977년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야당 세력은 민주주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반(反)인디라 간디 연합을 이루어 이념을 떠나 제1야당인 국민당(Janata Party)으로 모였고 그 결과 야당은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해 일약 집권 여당의 위치에 올랐다. 더불어 인도공산당(M)은 서벵갈에서 처음으로 집권당이 된 공산당 집권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국민당은 집권을 하긴 했으나 전혀 이질적인 정파들로 연합을 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권력을 다시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에 내주게 된다.

상대방의 무능 때문에 다시 집권을 하게 된 인디라 간디가 권력 유지를 위해 꺼낸 카드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를 건설한 네루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면서 애를 쓴 세속주의의 포기였다. 국가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상황에서 의회 민주주의는 이미 포기했고, 세속주의마저 포기하면서 인디라 간디는 권력의 화신인 보수 정치인으로 변해 있었다.

인디라 간디의 세속주의 포기는 뻔잡에서부터 시작했다. 뻔잡은 독립과 동시에 분단이 될 때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자리 한 시크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주였다. 따라서 네루 때 각 언어에 따라 주를 지정할 때 뻔잡어와 시크교도의 독립된 주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네루가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주의 분리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966년에 하리야나(Haryana) 주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시크교도와 뻔잡어 중심의 뻔잡 주가 남게 되었다.

뻔잡 주 여당인 국가 분리주의를 주창하는 아깔리 달(Akali Dal)은 원래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한 정당이었으나, 인디라 간디 정권 당시에는 그나마 세속주의에 기운 정파가 주도권을 잡은 상태였다. 온건 지도부에 반대하는 빈드란왈레(Bhindranwale)라는 종교 개혁 지도자가 이끄는 급진파 시크교 근본주의 세력이 내부에서 날로 성장해가는 중이긴 했지만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인디라 간디는 빈드란왈레가 이끄는 종교 근본주의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해 아깔리 달의 분열을 획책했다. 자신의 국정 실패에 대한 비판의 물꼬를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인도는 이미 종교 때문에 파키스탄과의 분단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재난을 겪었던 터라 국민 대부분은 또 다시 종교가 다르다고 국가를 분리하자는 움직임에 대해 큰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가는 아깔리 달의 급진주의자들에 대해 반대하였고, 그들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고 응징하며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의 국가를 지켜내겠다는 인디라 간디에게 환호하였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세력은 시크들의 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을 분리 독립하자는 주장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반정부 투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는 1982년 즈음부터는 인디라 간디 정부의 요인을 암살하는 등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사태는 인디라 간디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하게 진전되었다. 결국 1984년 6월 3일부터 8일까지 탱크 등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그들의 은신처인 시크교 성지인 아므리뜨사르의 황금사원에 투입해 그들을 무력으로 진입하면서 약 300명의 무장 반군을 소탕하고 성지를 피바다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4개 월 뒤인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관저를 지키던 초병인 시크교도 두 사람이 난사한 연발총에 의해 암살당한다.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 네루가 세워 놓은 국가 건설의 근간을 모조리 무너뜨린 정치인이었다. 우선 그는 권력 쟁취를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를 위배하는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당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의원과 당원들을 몰아내 분당을 했다. 다음으로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생존 투쟁을 외면하고 그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물꼬를 돌리는데 집착하였다. 민생은 외면하고 오로지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파키스탄에 대해 승리를 거둔 사실만 대대적으로 알렸다.

그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잘못은 뻔잡의 아깔리 달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파를 지원해 분열을 획책했는데, 하필 국가 건설의 가장 큰 근간인 종교 근본주의를 무덤에서 회생시켰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더러운 것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편도 용납될 것이다.

다만 그 하는 행태 가운데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진보 진영은 ‘내 어찌 차마…’일 것이고, 보수 진영은 ‘무슨 짓인들 못해’일 것이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의 그 권력욕 때문에 종교 공동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났고, 그 때문에 온 나라가 학살과 테러의 반복으로 피바다가 되고 있다. 보수 진영의 금도 없는 정치, 바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진보 진영은 진보 진영에 어울리는 방편을 택해 정치를 하는 것이고, 보수 진영은 보수 진영에 어울리는 방편을 택해 정치를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정치를 하더라도, 금도는 있어야 한다. 바로 전쟁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는 뭐니 뭐니 해도 한국전쟁과 그 전후 시기에 발생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상쟁의 비극이다. 그러다보니 부정선거와 국정 실패 때문에 발생한 정권의 위기를 북한과 연계시키는 북한 프레임 즉 전쟁 위기가 매우 유효하게 먹힌다. 그래서 수구 세력은 그 ‘전쟁 위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자 하는 유혹에 잘 빠진다.

인도가 파키스탄과의 분단에서 겪은 엄청난 동족상잔의 비극 때문에 국민들이 국가주의 프레임에 쉬 빠져들듯이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신의 부정선거 문제를 희석시키고자 다른 데로 물꼬를 돌릴 수는 있다. 그것은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런 비열한 행위를 허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정치의 판도라의 상자인 남북문제를 훼손시키는 차원으로 가서는 안 된다. 할 게 있고 해서는 안 될 게 있다. 남북문제를 훼손하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을 치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인디라 간디는 그나마 아버지 네루를 따라 민족운동도 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학습도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로 결심하기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박근혜씨는 다르다. 진보라는 것은 차치하고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오로지 하나, ‘짐이 곧 국가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궁지에 몰리면 남북문제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일 곧 전쟁 ? 설령 전면전은 아니리지라도 ? 카드를 꺼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인디라 간디나 박근혜씨나 모두 어머니가 안 계신 상태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정치를 위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거나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두 사람 다 인민의 목소리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절대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디라 간디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무너지든 자신의 아버지의 유훈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권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네루가 세운 국가 기틀 중에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를 짓밟고, 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을 사주하고 부추겼다. 그러다 결국, 자신이 무덤에서 꺼낸 그 카드 때문에 총 맞아 죽었다. 한국 땅에서 제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건전한 보수 우익이 없는, 수구 꼴통밖에 없는 한국의 정치판이 너무나 불안해서 드리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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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바즈랑 달의 반기독교 운동,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활동 (1) 2015/06/11 AM 10:06
오디샤 주는 인도 전역에서 나타나는 힌두 대 무슬림 대립구도와는 달리 힌두 대 기독교도의 대립이 문제 되는 지역이다. 전체 인구의 2.10%인 무슬림보다 기독교도가 조금 더 많아(2.40%)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가진 힌두 보수주의 단체인 바즈랑 달(Bajrang Dal)이 기독교도들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두 집단의 충돌이 격화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주 인구의 22.13%를 차지하는 부족민들을 놓고 힌두화 시키려는 바즈랑 달과 기독교를 고수하거나 전파시키려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바즈랑 달은 힌두교 극우 단체인 세계힌두협회(VHP, Vishwa Hindu Parishad)의 청년 단체로 알려져 있다. 바즈랑(Bajrang)은 힌두신의 하나인 하누만(Hanum?n)을 가리키고 달(Dal)은 모임을 의미한다.

이 단체의 슬로건은 “봉사, 안전 그리고 문화(sev? surak?? sansk?ti)”다. 구체적으로는 소 도살 반대, 종교적으로 분쟁이 있는 지역에 힌두교 사원 건설 발렌타인데이 반대 운동 등을 벌이는데 공산주의, 무슬림, 기독교 등의 위협으로부터 힌두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명분에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은 별로 가리지 않는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즈랑 달의 행동 강령에 힌두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을 반대하며 위협하는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즈랑 달이 주로 활동하는 대상은 기독교도들이다. 인도의 기독교도의 대다수는 지정부족민들이다. 식민지 시대 때부터 힌두 문화권 밖의 이질적인 집단을 기독교화 하려는 식민주의자들의 시도가 있었고 인도 독립 이후에는 부족민들이 힌두와 다른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정체성 운동 과정에서 기독교로의 대규모 집단 개종을 하기도 했다.

근래에도 지정부족민들을 주 선교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 선교사들과 바즈랑 달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 선교는 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바즈랑 달 측에서는 외국 문화가 힌두 문화의 순수성을 더럽힌다는 공격을 하는 것이다.

1999년 오디샤 주(州)에서는 호주 선교사 가족이 탄 지프차에 불을 질러 선교사와 그의 어린 두 아들이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한 호주 선교사의 부인인 글래디스 스타인스Gladis Staines는 몇 년 전 “오디샤 주에서 23년간 나병환자를 돌보며 헌신적인 성녀의 사랑을 베푼” 공로를 인정받아 외국인의 신분으로는 이례적으로 인도 정부가 최고의 시민에게 주는 훈장인 ‘파드마 슈리’(최고의 시민이란 의미)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도 오디샤 주에서는 힌두 대 기독교도의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2002년에는 오디샤 주의회 건물을 공격할 정도로 대담하게 행동하고 있다. 힌두와 기독교도들의 분쟁 과정에서 2008년에는 당시 VHP의 지도자인 스와미 락스마난다 사라스와띠(Swami Laxmananda Saraswati)가 오디샤주에서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힌두협회, 바즈랑 달 등의 단체가 힌두교도들의 타종교로의 개종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회가 힌두교도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회유 혹은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살해된 사라스와티가 교회의 개종 강요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힌두교 측에서는 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기독교도들이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교회, 교회부설 고아원과 신자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공격을 가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즈랑 달의 폭력적인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바즈랑 달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오디샤 주정부는 물론 중앙 정부에서도 내각회의를 소집해서까지 이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실효성있는 구체적인 조치는 취해진 것이 없다. 이것은 결국 정치세력들이 입으로는 폭력을 비난하면서도 힌두 보수 성향의 표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6년에 자르칸드 주에서는 힌두교 단체 민족의용단이 힌두교 이외로의 종교로는 개종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제정하라고 인도국민당 주 정부에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회에서는 이런 어이없는 요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의사당에 가득 찼지만 바로 그날 오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이를 제재하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외에는 어떤 가치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물론 반기독교도 폭력 행위가 가장 심각한 오디샤 주에서는 바즈랑 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주지사를 세 번째 연임하고 있는 주지사인 나빈 빠뜨나익(Naveen Patnaik)이 힌두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고 그들과 정치적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것은 인도국민당과의 연합을 통해 힌두 보수주의자들의 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인도국민당과의 연합을 깨고 좌파정당과 손을 잡는 정치적 기민함을 보여주었지만 정치상황에 따라 언제든 합종연횡의 대상은 바뀔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지난 몇 년간 인도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과거와 달리 중산층, 상류층 신자도 늘어났으며 젊은 층의 기독교 개종도 두드러진다. 2001년 인도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 인구는 2천4백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국 조지아에 본부를 둔 국제선교단체 미션소사이어티(Mission Society)의 주장에 따르면 2013년 인도에는 7천1백만여 명의 기독교인이 있고 이는 나라별로 봤을 때 세계 8위에 해당한다. 즉 12년간 기독교도 수가 3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선교 활동도 활발해서 2013년 기준으로 65개의 가톨릭 단체와 50개의 개신교 단체가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성장과정에서 해외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이 힌두교도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기독교도의 공격에 대한 방어 혹은 반격이라는 명분을 바즈랑 달에게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즈랑 달은 “교회가 고아원이나 학교 등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하층민이나 낮은 계급에 접근해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며 농촌의 소녀들을 유인해 도시로 팔아넘긴다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 단체를 통해 일자리를 얻는 경우는 실제로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일자리는 대개 가사도우미로 형편없이 낮은 임금만을 받고 기독교 단체는 소개료를 받아 챙기는 일도 있다고 한다.

힌두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증거와 증인을 제시하니 무시할 수만도 없다. 또 인도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한 지역인 동북부 지역의 폭력사태 배후에 외국 기독교 선교단체의 개입이 있다는 의심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 (2013년) 7월 당시 인도 내무부 장관은 의회 답변과정에서 외국 선교사들이 인도 내에서의 선교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선교단체는 교육, 의료, 농촌지원 같은 구호 활동만을 해야 하며 공개적인 선교활동을 하거나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호활동이 선교활동으로 이어지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강제성이 개입하는가이다. 그러나 구호활동과 선교활동을 구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선의로 구호활동을 하고 거기에 감명 받아 진심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지 아니면 물질적 대가나 강압에 의해 마음에 없는 개종을 하는지를 어떻게 매번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인도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은 모두 선의와 자발적 개종을 주장하지만 다르게 볼 여지도 많다. 그 자신도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에 관여했던 Philip Goldberg (그가 쓴 종교서적이자 인도체험기인 American Veda로 미국에서 유명한 종교인이라고 한다.)는 자신이 인도에서 직접 목격한 사건들을 전해준다.

인도 기독교 선교
최근 인도 불교성지에서 한국청년들이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여 물의를 빚은 바 있다.(방송화면 캡처)

가장 흔한 경우는 의료 선교다. 인도의 가난한 농촌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둔 부모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무료치료를 제안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돈도, 믿을 만한 의료적 도움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부모에게 개종은 선택이라기보다 의무일 것이다. 또 임시직 일자리를 준 다음에 기독교로 개종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제안하는 경우도 많다. 고용 없는 성장 덕분에 실업문제가 심각한 인도 농촌의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이런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대가로 가족 친지로부터의 단절을 감수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청년층의 개종 증가가 일자리 문제와 관련된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인도 농촌의 만성적인 물 부족을 이용한 선교 방식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많은 우물 파주기를 악용한 것이다. 기독교 단체의 돈으로 뚫은 우물은 대개 교회가 관리한다. 그리고 먼 곳에서 걸어와 그 우물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개종을 권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물만 이용하고 개종은 않겠다고 답하기가 쉬울까?

개화기 이래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기독교 선교사들이 심어 놓은 의식, 실은 식민지배 정당화 논리로 오래 전에 개발된 논리가 인도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 인도 민중들의 비참한 삶은 그들이 힌두교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즉 시련을 통해 신에게로 이끌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얘기다.

제국주의 모국과 식민지의 군사적 물질적 격차를 문화적 종교적 다름과 연결시키는 이 논리는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도 뿌리 깊이 남아있지 않은가? 문창극 같은 이들이 바로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도 중산층, 상류층 중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은 그들이 가진 서구와의 끈(Western Connection)과 관련이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선교단체들은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다. 한국 교회들도 인도에서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지 궁금하다.

세상일이 단순치만은 않아서 힘센 다수집단에게 억압당하는 약한 소수집단이 항상 선하거나 옳은 집단이 아닌 경우도 많다. 인도에서 기독교도는 종교적 소수집단이고 힌두 중심 사회에서 많은 차별과 박해에 노출되어 있다. 또 지정부족민들이 기독교로의 집단적 개종을 통해 힌두사회와는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경우처럼 힌두 사회의 비주류 집단들을 대변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극단적인 행동방식으로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건의 배경에는 서구와 연결된 기독교계 NGO들의 영향력 확대 전략이 깔려 있기도 하다. 일부 기독교도들의 공격적 행태는 다시 힌두교도들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을 낳고 보수정치 세력은 갈등을 부추기며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가해 볼 것은 왜 하필 오디샤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오디샤의 불가촉천민, 지정부족민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사실은 마오주의 무장 반군인 낙살 반군이다. 2000년대 초에 오디샤 주의 30개 지역 가운데 10개 지역이 낙살 반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지금은 25개 지역에서 낙살 반군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이것은 오디샤 주의 가난한 농민들(이들은 신분상으로는 불가촉천민, 지정부족민인 경우가 많다.)이 여전히 억압적이고 과도하게 착취하는 지주 소작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면 곧바로 지주들이 운영하는 무장사병에 의해 잔인하게 탄압받는다. 이 억압받는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낙살 반군이 세력을 키운 것이다. 바즈랑 달이나 기독교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가난하고 불평등한 인도, 오디샤 주의 사회적 조전이 만든 빈틈을 노리고 세 집단이 민중들을 자신의 편으로 동원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경쟁하는 것이다.

정작 민중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까? 식민지 시대 때 기독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바즈랑 달의 권유로 힌두교로 재개종했고 이제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라는 선교사들의 회유에 시달리는 어느 농민은 이렇게 말한다. “개종을 해서 제일 나쁜 일은 우리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날은 기독교도고 다음 날은 힌두다. 이런 와중에 나 자신은 닳아 없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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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보면...바즈랑 달은 힌두교의 극우 단체이고....기독교쪽은..........그냥 단체?!(이름을언급하지도 않음)
(기독교 그냥 단체의 레벨 = 타종교 극우 단체의 레벨......)
[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 수구단체 의용단일가 (3) 2015/06/11 AM 09:51
의용단일가(義勇團一家 Sangh Parivar)는 민족의용단(RSS)과 뜻을 함께 하면서 하나의 가족이다, 혹은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이름부터가 전형적인 보수 개념인 것이 인도 전통 문화에서 가장 가치 있게 치는 것은 단연코 가족/일가 문화이다.

대가족 ? 그들은 joint family 즉 결합가족이라 부르는데, 큰 틀에서 우리 개념과 비슷하다 ? 중심에서 부계 사촌의 공동체인 가족은 농사와 생산을 같이 하는 경제 공동체이자 사회적으로 카스트 공동체이자 모든 의례를 함께 하는 공동체인 운명 공동체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빠리와르’ (가족 혹은 일가)라 하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우리들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상그 빠리와르 즉 의용단일가는 단순한 결사체 연합이 아니고 혈족 집단을 추구하는 공동체다.

그 일가를 이루는 각 집단은 모두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우익 집단들로서, 같은 계열의 운동 단체이긴 하나 조직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서 쉽게 이해하자면, 최근의 흐름에서 서정갑, 조갑제 등이 주도하는 국민행동본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13년 1월 2일, “다수결을 포기하고 좌익에 굴복, 국정원을 김정은에게 상납한 황우여 세력을 몰아내자”라는 광고를 조선일보 사설 지면 하단에 실은 국민행동본부는 인도의 의용단일가와 너무나도 닮았고, 그 정당 단위인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은 새누리당과 너무나도 닮았다. 인도의 의용단일가가 해 온 궤적을 살펴보면 한국의 수구 세력이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용단일가의 출발은 1960년대에 민족의용단 단원들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곳곳에 널리 퍼뜨리고자 각 부문에서 새로이 조직하거나 그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면서부터였다.

그들은 기존의 보수적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들과 노선이 전혀 다른 곳에도 진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암살한 간디의 추종자들이 주도하던 농촌 개혁 운동에까지도 가담할 정도였다.

인도노동자단(Bharatiya Mazdoor Sngh)이라는 노동조합도 만들고, 인도농민단(Bharatiya Kisan Sangh)이라는 농민 운동 단체도 만들었다. 학생 운동에도 손을 뻗쳐 전인도대학회의(Akhil Bharatya Vidyarthi Parishad)라는 대학생 운동 단체도 조직해냈다. 그들에게는 진보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 어떤 곳이든 들어가지 못할 곳도 없고 들어가지 않은 곳도 없었다.

의용단일가는 1949년 활동 금지가 해제되긴 했으나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네루가 추진한 세속주의와 국민 화합의 힘에 밀려 변변한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래서 민족의용단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진영은 정당을 만들기로 합의하여 인도국민단(Bharatiya Jana Sangh)을 창당한다.

힌두뜨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여 연계 단체들이 다양한 문제 제기를 하고 행동에 돌입하는 동시에 권력 쟁취를 목표로 구체적인 정책을 입안하는 정당을 만들어 양립 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인도국민단은 1977년 국민당(Janata Party)을 거쳐 짧지만 정권 교체를 이루었고, 1980년에는 인도국민당으로 다시 당을 바꿔 정권을 획득한 이후 다시 제1야당의 위치를 유지했다가 최근 진행된 5월 총선에서 집권당 국민회의를 역대 최악의 참패로 몰아넣으며 다시 집권당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각 분야에서 단체를 조직하여 세를 확장한 의용단일가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문화, 여성, 노동, 학생, 환경, 인권 등 걸치지 않는 분야기 없을 지경이고 소속 단체의 숫자는 거대 전국 규모만 볼 때 40개 정도에 달한다.

의용단일가에 속한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로 세계힌두협회(Vishva Hindu Parishad)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우선 다양하고 이질적인 힌두교를 단일적인 종교로 변형 왜곡하여 만든 신(新)힌두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사회 곳곳에서 암소 도살, 불가촉천민 기독교인 강제 재(再)개종 등 종교와 관련된 사회 문제를 부각시키는 단체로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다.바브리 모스크에 ‘라마 탄생지’를 기념하는 힌두 건립 운동에 불을 붙인 집단이 바로 세계힌두회의다.

또 다른 폭력 집단으로 바즈랑 달(Bajrang Dal)이라는 청년 전위 조직이 있다. 힌두교에서 하누만(Hanuman)이라는 원숭이 신이 자신이 모시는 주군인 비슈누를 위해 마왕을 제거하는 전투에 헌신하는 신화에서 따와 ‘하누만의 당’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단원들 수가 약 130만 명이고, 지부만 해도 2,500 개나 된다. 그들은 전국 각지의 주요 무슬림 모스크를 파괴하고 그곳에 힌두 사원을 건설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요디야의 바브리 모스크이다. 의용단일가는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 즉 총선을 앞둔 시기에 일부러 무슬림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종교 공동체 갈등을 자극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 쏟는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로 삼는 폭력은 조직에서 주도는 하지만 직접 폭력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동원된 자들이다. 동원된 폭력배들은 살인과 방화를 하지만 약탈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들은 인도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하층에 속하는 자들이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자기 의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직을 통해 돈을 받고 폭력에 가담하는데, 따로 물품을 약탈하면서 자기 수입을 올리기까지 한다. 이에 대한 도덕적 양심적 가책은 특별히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폭력을 권력이 묵인하면서 자발적으로 약탈에 가담하는 자들까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따라서 그들에게 특정 집단의 이념이나 정책은 별 의미 없다. 현실적 요구 즉 먹고사니즘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에게 폭력 참여는 하나의 생계수단이며, 생활 방식이다.

바즈랑 달과 같은 조직은 의용단일가가 타깃으로 삼는 모든 정치 사회 교육 문화 학문 예술 등의 모든 활동에 대해 협박하고 테러로 응징하는 일에서 전위를 담당한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던 디빠 메흐따(Deepa Mehta) 감독의 영화 <워터>(Water)가 갠지스 강을 모독했다 하여 의용단일가 단원들이 단체로 갠지스 강에 투신자살하겠다고 협박하여 영화 촬영을 저지한 것이 좋은 예다.

그들은 영화의 여주인공역을 맡은 여배우의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사실부터 힌두를 모욕하는 일이라는 논리를 폈고, 그러한 공세가 전혀 합당하지 않더라도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이 이미 쌓여 있는 많은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힌두 악습의 원인을 모두 무슬림에게 전가시키는 일을 전혀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집단이다.

2008년에는 인도의 저명한 화가 훗세인(M. F. Hussain)의 전시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후세인이 바라따 마따(어머니 인도 Bharata Mata) 여신을 누드로 그리는 등 힌두교를 모욕했기 때문에 공격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패션쇼나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 축하장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힌두 고유의 전통 문화를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들은 엄연한 정당인 사회주의당(Samajwadi Party)에 대해서까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회주의당은 불가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목표로 정치를 하는 불가촉천민의 정당이기 때문에 힌두 사회의 근간인 카스트 체계를 뒤흔드는 단체라고 주장한다.

2010년에는 영화배우 샤룩 칸(Shah Rukh Khan)이 인도 크리켓 프리미어리그에 파키스탄 선수를 영입한다는 결정을 지지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살해 협박을 한 것도 그들이었다.

의용단일가에는 이러한 폭력 단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비정치적이면서 일상 생활에 밀착한 일을 맡아하는 단체도 꽤 있다. 그 중 하나가 인도발전협회(Bharat Vikas Parishad)이다. 그들은 건강 교실을 열어 요가를 장려하고, 장애인의 사회 적응을 돕는 일을 많이 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라는 국가는 힌두교의 어머니로 인식되고,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정신과 혼은 힌두교에 두는 것임을 각인시키는 일을 한다.

1979년에 설립된 인도봉사단(Seva Bharati)은 무상 학교를 운영하고 무상 의료에 가까운 사회사업을 벌이면서 빈민가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 다른 단체로 인도의례(Sanskar Bharati)라는 단체가 있는데, 인도의 전통 예술을 보급하는 일을 하는데 신인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는 것도 그들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다.

의용단일가의 막강한 조직력은 심지어는 그들과 절대적으로 모순 관계에 있는 달리뜨(dalit)까지 포섭하여 조직하기도 한다. ‘달리뜨’는 전통 힌두교에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채 핍박을 가한 불가촉천민이 그들 종교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계급적 용어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적으로 민족의용단이나 의용단일가와 연대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도의 보수 집단은 그 세를 이곳에까지 뻗쳐 그들과 형제애를 나눈다. 진보 진영이 학생 운동을 직접 정치에 간여하는 이념형 투사를 양성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은 반면 보수 진영은 학생과 교수 사이의 인간적 관계 형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에게는 논리나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감성과 공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의용단일가의 공통 이데올로기는 힌두뜨와(Hindutva 힌두性) 라고 부르는 힌두 근본주의이고 그 위에 이슬람, 기독교, 현대 문명 등에 대한 적개심이 있다. 그들은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이슈를 제기하되, 이성적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회가 부패 타락해 있다고 규정하는데, 그 상태를 가져 온 세력은 무슬림, 기독교인, 세속주의자, 식민주의자, 파키스탄, 다국적 자본 등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피해는 힌두라는 ‘우리들’이라고 간주한다. 모든 불평등을 ‘우리’라는 종교 카테고리 하나에 집어넣음으로써 인민들의 판단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을 자극하고 판단을 흐리게 한 후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우선시 되지 않는다. 오로지 대중의 감정에 불을 붙이고자 나열되는 천박한 언어뿐이다. 자극, 일반화, 선동이 그들의 언어이고, 테러와 학살이 그들의 행동이다.

대중은 적개심에 환호하고, 자극과 선동의 언어에 화답한다. 수구 세력은 적개심 프레임 설정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반면, 진보 진영은 그 언어를 폄하하고 조롱하면서 담론의 유희에만 열중한다. 현실 정치에서 문제는 언어와 소통이지 논리가 아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을 파편화시키기를 좋아하고, 구호로 자기 합리화하기를 즐기는 반면 수구 세력은 비록 원칙이 없다 할지라도 화합하고 통합하여 무조건적인 세 확장에 열중한다. 그들은 기존의 좌파들이 독점하고 있던 노동이나 학생 운동과 같은 분야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자, 녹색주의자 등이 활동하던 분야에도 뚫고 들어가 세를 확보하였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의용단일가가 목표로 삼은 것은 사회를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출발하여 차츰 노동자 세력, 기독교인 그리고 유대인으로 확대하여 그 대상을 모두 몰살해버리는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간 나치의 행태와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을 살아 있는 히틀러, 나치 집단이라 부른다.

아직 이런 수준까지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궤적을 걷는 수구 세력은 한국에도 있다. 수구 난동 세력으로 규정하기에는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를 온통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가면서 사회의 모든 비판 세력에 대해 적개심을 심는 자는 그 세력에 속할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말 할 수 있겠다.

‘종북’이라고 하는 개념을 해석의 여지에 따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난 반대하지 않는다. 그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관계없이 누군가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 방안이나 남한의 미군 철수 그리고 북한의 3대 세습을 지지하면 그들은 종북주의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종북’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사퇴하라고 비판하는 가톨릭 신부도 종북주의자고, 일제 식민지와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교과서를 비판하는 시민운동가도 종북주의자며, 밀양 송전탑을 반대하는 시골 노인들도 종북주의자다. 정부를 비판하면 그것이 북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무조건 종북주의자다.

인도의 의용단일가가 모든 비판 세력을 무슬림-파키스탄과 연계시키면서 모두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다만 다른 것은 인도의 수구 세력과는 달리 자부심도, 이론도, 기획도 없이 아무 데나 그 언어를 남발하여 이제 종북이라는 개념이 말장난 놀잇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과 오로지 아주 집회 뒤에 식사 대금을 떼먹으려는 등 아주 작은 사리사욕을 챙기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전력투구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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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powder06    친구신청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ㅂ-

엘사아렌델    친구신청

우리 수구세력은 일본은 싫어하면서 친일파는 좋아하죠 순수하게 자기들의 살궁리만 챙기는데 얼씨구나 같이 춤추는 애들만 불쌍

wizwiz    친구신청

암세포같은놈들일세.....
[인도 수구파의 생얼] 보수정치의 바로미터, 카시미르 (0) 2015/06/10 AM 11:39
카시미르는 분단된 지역이다. 인도가 독립될 당시에 독립된 하나의 인도에 대한 민족주의적 요구가 있었다. 그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진보적인 역사적 과제를 내세웠지만 동시에 힌두 중심주의라는 치명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치명성이 마하뜨마 간디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실제로 빼앗았고 지금도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1947년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은 카시미르에서 가장 강렬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카시미르에서 분단과 대립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힌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의 파키스탄 지배층은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내적 결속을 위한 대외적 갈등 조장이라는 오래된 지배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카시미르의 분단 상황이 종식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남북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것처럼 양국 정부는 인도령 카시미르와 파키스탄이 지배하는 카시미르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을 상봉시키기 위해 ‘평화의 버스’ 라는 것을 만들었다.

첫 번째 버스가 출발하는 행사장에는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가 직접 참석해서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이 평화의 버스를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2만여 명이 넘는 신청자 가운데 실제로 그 버스를 탄 주민은 400명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양국의 지배집단이 카시미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독립 이후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시미르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세 번의 전쟁을 치렀다. 카시미르는 한반도와 비슷한 22만여㎢ 넓이의 땅에 1,255만 명 (Census of India 2011 기준)의 인구가 사는데 이슬람교도가 다수고 힌두교 신자가 소수다.

1846년 힌두교도인 이 지역 토후국 왕이 관할권을 동인도회사에게서 매입해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면서 어디로 귀속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가 복잡해진 이유는 당시 카시미르는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이 회교도였지만 통치집단은 소수집단인 힌두교계(22%)였기 때문이다.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은 카슈미르가 지리적인 근거에서나 언어학적, 문화적, 종교적인 이유에서도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분쟁은 1947년 10월 힌두교도였던 마하라자 하라싱(Maharajah Harasingh)왕이 전격적으로 인도 편입을 결정하자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이슬람계 무장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르(Srinagar) 점령을 시도했고 인도군이 이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인도의 네루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시미르의 장래를 주민투표로 결정하기로 약속했고, 1948년 1월에는 카시미르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8년 8월 유엔의 중재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고1949년 7월의 카라치(Karachi) 협정에 따라 카시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각각 63%와 37%씩 분할되었다. 1963년 인도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을 독립된 주(州)로 승격시켰다.

이후 유엔의 정전 감시활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정전 경계선을 따라 수많은 무장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1964년 12월 양국간 전면전이 촉발되었다. 1965년 9월에는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파키스탄이 중국 신장지역에 접한 아자드 카시미르 서쪽지역 일부를 중국에 넘겨준 데 자극받은 인도가 잠무-카시미르에 대한 영유권 강화 조치에 나서자 이슬람 주민들의 폭동이 발생했다.

이전에도 인도와 국경 분쟁을 벌인 바 있는 중국이 파키스탄 측을 지지하고 중국-인도 접경지역에서 인도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인도 북동부의 시킴(Sikkim)과 중국의 티베트(Tibet) 접경에서 인도-중국간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9월 유엔의 제의로 정전협정이 발효되면서 대규모 지상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산발적인 교전은 계속되다가 1966년 1월 소련이 중재한 타슈켄트 선언(Tashkent Declaration)을 발표하면서 전쟁은 공식 종결되었고 양국은 1949년 설정된 정전 경계선으로 복귀했다.


2차 분쟁의 결과 인도는 소련과 가까워졌고, 파키스탄은 미국과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2차 분쟁은 카시미르 문제가 단순히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영토 분쟁에 그치지 않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바로 북쪽의 소련까지 관련된 국제문제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또 당시의 냉전 상황은 카시미르 분쟁을 미-소의 대리전의 성격까지 가지게 만들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이 양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한 측면이 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3차 분쟁이다.

1971년 12월 서파키스탄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어온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하자 인디라 간디 수상은 인도군을 파견해 동파키스탄을 지원한다. 인도가 적대국인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서파키스탄에 의해 홀대받고 있던 동파키스탄을 사주하여 독립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여기에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가 국내 정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적성국과의 전쟁을 결행한 것도 있다. 당연히 파키스탄군과 전면전이 발발했고 인도측의 승리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고 인디라 간디의 국내 지지율은 치솟게 된다.

이 전쟁에서도 카시미르 지역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72년 1월의 시믈라(Simla) 협정에서 설정한 정전 경계선이 오늘날의 통제선(LOC, Line of Control)이 되었다.

그 이후 더 이상의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 모두 카시미르 지역을 군사 요새로 만들며 긴장을 유지해왔다.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으면서도 두 나라는 긴장 상황을 빌미로 치열한 군비경쟁을 해왔고 인도가 1974에 핵실험을 감행한 이후 핵개발에 엄청난 자원을 동원해 두 나라 모두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었다.

물론 인도의 핵개발은 중국에 대한 압박을 염두에 둔 미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인도가 매년 지출하는100억불이 넘는 군사비의 상당 부분이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을 의식한 해군, 공군력 증강을 명분으로 다시 대규모 군비 확충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평균 30억 달러 즉 정부예산의 40% 정도의 돈을 군사비로 지출해 왔다. 외채문제가 심각한 파키스탄이 해마다 지불하는 원리금 상환액수와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부토 전 수상은 “풀을 뜯어먹고 살더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데 정작 본인들이 아니라 가난한 국민들만이 그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유엔의 정전 감시활동으로 인도-파키스탄 통제선에서의 분쟁은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잠무-카시미르 주 안에서는 회교도와 힌두교도간에 여전히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발생하고 있다.

1989년부터 잠무-카시미르해방전선(JKLF)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면서 인도 영토 안에서도 테러로 인한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들은 인도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이 아니라 카시미르의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89년 이래 7만 여명의 카시미르인이 사망했는데,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 인권단체가 주장하는 사망. 실종자 규모는 그 2배가 훨씬 넘는다. 투옥된 사람은 4만 명 이상, 난민도 17만 5천명 이상 발생했는데 더 문제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민간단체의 실태조사 외에는 제대로 된 공식 통계도 없다는 것이다.

카시미르 문제의 해법으로 인도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은 대중적 지지를 잃었다. 남은 대안은 분리독립론과 자치론이다. 현지의 여론은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한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두 나라 모두 허용할 생각도 없고 분리 독립된 카시미르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자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인도연방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립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치론은 ‘카슈미르의 전폭적인 자치를 허용한 인도 헌법 제370조’라는 법적 근거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무력분쟁을 빌미로 인도의 지배집단은 그 시행을 무기한 연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치를 허용하지 않아 갈등이 고조되고 그 갈등을 핑계로 다시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세 번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남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인도의 국내정치적 맥락도 카시미르 분쟁의 중요 원인이다.

첫 번째 전쟁은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 둘 다에게 필요했던 신생 독립국가의 안정과 결속력 강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인도의 1964~6년은 초대수상이자 독립의 아버지였던 네루가 사망하고(1964년 5월) 그의 뒤를 이은 샤스뜨리의 급사 그리고 인디라 간디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급변의 시기였고 1965~6년의 대기근과 1966년의 외환위기로 국민들의 경제적 삶이 큰 곤경에 처한 시기이기도 했다.

1966년의 외환 위기로 인도 경제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의 계획경제가 중단되고 세계은행이 개입하게 된다. 1991년의 외환위기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되는 것과 동시에 종교공동체주의(Communalism)가 기승을 부리게 된 상황과도 유사하다.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는 과정에서 인도 정부가 군사적으로 개입한 세 번째 전쟁을 계기로 인디라 간디는 떨어진 대중적 지지를 일시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고 그 기세를 몰아 인디라 통치(Indira Raj)라고 불리는 권위주의적 통치시대를 열었다.

1971년의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딸이라는 후광과 집권당으로서의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에 의존해야만 할 정도로 인기가 바닥인 상태였다. 그 선거는 지리한 재판 끝에 1974년 부정선거라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게 되고 인디라 간디는 비상사태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정치적 곤경을 돌파하려 했다. 또 인도 정치의 가장 암적인 요소인 종교공동체주의가 기승을 부릴 명분을 준 것도 카시미르 분쟁이 인도 국내정치에 미친 영향이다.

인도 보수 정치인에게 카시미르 라는 존재는 언제든 정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쓸모 있는 화약 창고인 셈이다. 여기에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내전 문제까지 겹치면서 그곳은 인도 정국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테러와 국지전을 가져다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있다.

이 점에서는 파키스탄 또한 마찬가지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파키스탄이 카시미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끌어내어 향후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2008년 뭄바이 테러이다. 세 번의 전쟁 모두 인도의 지배층에게 대내적으로는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두 나라 민중들은 갈등, 증오, 폭력으로 가득 찬 삶을 강요당했고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경제적 자원조차도 핵무기 개발 따위에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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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민족의용단, 현대 인도 수구 난동세력의 모태 (0) 2015/06/10 AM 10:29
이광수 선생은 레디앙에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를 이미 연재한 바 있다. 주로 인도 진보세력 혹은 좌파들의 역사와 경험들을 중심으로 다뤘다. 인도는 선거가 치러지는 국가 중에서 세계 최대 인구의 나라이다. 이번에는 인도의 우파들, ‘수구보수파들의 난동사’를 중심으로 연재글을 다시 시작한다. 이번 인도 연재 시즌2에는 이광수 선생과 함께 한형식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이 함께 글을 주신다. 필자들의 사정이 있어서 연재 시즌2의 첫 글을 올리고 상당 기간이 지났다. 죄송한 마음이다. 오늘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가 시작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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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은 단연 1992년 12월 6일이다.

1947년 국가 건설 이후 한 번도 권력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야당의 보수세력 가운데 극우 힌두 종교공동체주의자들이 북인도 아요디야(Ayodhya)에 있는 무갈제국의 시조 바부르가 세운 모스크를 망치, 도끼, 쇠파이프 등으로 완전히 파괴해서 잿더미로 만든 날이다.

그들은 인도 내 무슬림을 같은 민족이 아닌 침략자의 후손인 적으로 규정하고 처단하여 순식간에 500명이 넘는 무슬림이 학살을 당했다.

이후 과격파 무슬림은 힌두 대중을 적으로 규정하고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테러는 다시 학살을 낳고 학살 뒤엔 또 다시 테러가 일어나고 하면서 인도는 이후 20년 넘게 학살과 테러의 광기가 순환 반복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학살과 테러의 악순환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는 동안 그들은 꿈에 그리던 권력을 처음으로 쥐었다.

이 비극의 시작, ‘아요디야 사태’를 기획하고 저지른 집단이 민족의용단(RSS. Rashtiya Swayamsevak Sangh)이다. 민족의용단은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식민 지배를 한 지 150년 정도가 지난 1925년,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우파 민족주의 단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인도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종교 감정을 조장해 힌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로 나누어 이간질시켰다. 그 후 10년 넘게 진행되는 동안 힌두 민족 감정은 고취되고, 그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갈수록 커져갔다.

급기야 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이 되어 갈 무렵 무슬림 공격과 테러에 앞장섰고 결국 1948년 화합을 주장하면서 분단 반대를 외친 간디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네루 정부에 의해 바로 활동 금지령을 받았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복권되고 차츰 세력을 결집하여 지금은 인도 국내외에 3만 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명실상부한 인도 최대 최고의 극우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었을까?


인도 극우파의 성장 배경

민족의용단이 세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인도-파키스탄 분단 시 발생한 거대한 재해에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파키스탄 쪽에서 건너 온 힌두에 대해서만 인도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이지 반대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파키스탄 분단은, 1947년 8월을 전후로 한 몇 개월 사이에 1,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새로 만들어진 국민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이동시킨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다.

인도로 내려온 난민들은 살육의 아비규환 속에서 부모형제를 잃거나 고향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자연히 무슬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사무칠 수밖에 없었고, 평생 파키스탄은 불구대천의 원수의 나라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도착한 낯선 땅, 물 선 곳에서 그들을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민지를 갓 벗어난 상태에 놓인 인도 정부는 그들을 챙길만한 여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고, 아직도 가난에 찌들어 있던 국민들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들던 상황이었다. 이 때 나선 사람들이 민족의용단이었다.

민족의용단은 우선 난민촌에서 구호와 의료 지원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난민들을 돌보는 일은 민족의용단만 한 게 아니었고, 기독교 선교사들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사들은 난민 보호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도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분단 과정에서 종교와 개종을 둘러싸고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힌두 난민들에게 기독교 선교사의 호의는 심금을 울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들을 같은 민족인 힌두 품 안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만 열중하는 민족의용단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난민들은 서서히 ‘우리’ 민족은 ‘인도’ 민족이 아니고, ‘힌두’ 민족이고, 파키스탄과 무슬림은 원수라는 민족의용단의 사고 프레임에 동조하게 되었다. 결국 세는 이념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불리는 것이다.

난민들을 임시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아직 기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전국적으로 상당한 조직을 갖춘 민족의용단에게 난민 정착의 일을 맡기다시피 하였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해 간 이주민들과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의 집과 재산 현황을 조사하여 그 규모가 서로 비슷한 것을 골라 배분해주는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그 집행을 맡은 민족의용단의 입김은 매우 세졌고, 난민들은 그들에게 기대어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이념과는 관계없이 민족의용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로소 보수 집단의 본질인 권력과의 유착 그리고 부패 위에서 군림과 세 확보라는 메커니즘의 싹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을 근본주의자와 극단세력으로 변해시키는 과정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해 왔다 할지라도 그들이 민족의용단이 가지고 있던 힌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피난을 온 동기는 민족의용단이 크게 홍보하였던 것처럼 힌두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들은 힌두와 무슬림 간의 종교공동체 폭력 사태를 잠깐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여 민족의용단에 가입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반(反)무슬림주의자도 힌두 근본주의자도 아니었고, 다만 뻔잡의 소산인 민족의용단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네루 정부의 세속주의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난민들은 점차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며 극우 힌두 민족주의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난민 캠프에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폭력 충돌과 난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난동을 주도하고 조직한 세력은 바로 민족의용단이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난동을 부인하면서 자작극을 비롯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난동을 사주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낮에는 인도주의요 밤에는 테러 집단이었다.

민족의용단은 마하뜨마 간디 암살 후 1948년 2월 조직의 대표들이 대거 체포되고, 조직 전체는 활동이 금지되었다. 조직 입장에서는 더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를 걷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민족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간디를 암살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국민의 비난을 받았고 종교공동체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무슬림에 대한 저항자로서 보이지 않는 지지를 받았고, 이미 더욱 굳어진 힌두라는 동류 의식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넓은 동정심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곳곳에서 무슬림과의 종교공동체 분쟁이 빈발하고 이윽고 카시미르 분쟁이 발발하면서 파키스탄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고 그 속에서 힌두 민족주의는 쉽게 성장하였다.

분단 후 인도의 정치 문화는 네루(Jawaharlal Nehru)가 이끄는 의회 연방제와 세속주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분단과 그로 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도처에서 겪은 인도인들은 더 이상 민족 분규 혹은 공동체 갈등이 심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네루가 수립한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 중심의 정책이 새로이 건설된 국가의 통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종교, 카스트, 계층, 지역, 언어 등을 초월하는 국민 단합의 정치가 뿌리내리면서 정치 행위자 간 협력과 합의의 정치 문화가 널리 조성되었다.

하지만 민족의용단과 같은 계열의 정치 조직인 국민단(國民團 Jana Sangh. 현재 제1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전신)은 이러한 근대성 국가 운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힌두 쇼비니즘적 정치에만 과도하게 의존하였고, 그 결과 의회 민주주의 체제의 정책 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의용단을 비롯한 힌두 민족주의 정치는 자연스럽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족의용단은 지치지 않고 수구 이데올로기 확산에 열중하였다. 집권 여당에 속해 있는 자신들과 비슷한 민족 우파 계열의 정치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그 인사들은 민족의용단이 폭력적이고 종교 공동체 갈등에 너무 의존하는 데 동의하지 못해서 그들과 한 배를 타지는 않고 네루와 함께 하는 것일뿐, 본래 그 뿌리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 농촌 각지로 들어가 자신들의 민족 우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교육하고, 봉사하면서, 조직을 재건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 압력은 먹혀들어가 정부가 활동 금지를 해제하고자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에 그들은 앞으로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국가를 전복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결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철저한 거짓이었다. 순수한 정치적 언술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수구 세력의 철저한 거짓 언술은 국민들에게 쉽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국민은 그들을 용서하였고, 그러면서 그들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 안에 폭력이 배태된 것은 두 말 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폭력은 그들의 신앙이요 전술의 핵이기 때문이다.

수구 정치세력에게 ‘양심’이나 ‘신의’와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잡는데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지를 계산할 뿐. 결과가 중요할 뿐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거짓이다.

‘거짓의 일상성’이라는 것

한국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당시 숱한 거짓말을 하였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숱한 거짓말을 하였다. 그것은 박근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양자의 거짓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촛불집회 때 본인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을 부르면 반성을 했다며 국민을 세 치 혀로 속였고, 4대강은 운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며 또 다시 국민을 속였다. 제 스스로 선거를 앞 둔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할 게 뭐 있겠냐는 말을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박근혜 씨는 이와 경우가 다르다. 그는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을 거의 대부분 파기했고, 국정원 부정선거에 대해 적극적으로 국민을 속이고, 거짓 종북 프레임을 설정해 국민을 속였다. 그 압권은 그가 2014년 1월 한국의 대통령으로 인도에 가서 마하뜨마 간디 추념비에 적혀 있는 7대 사회악에 관한 글에 대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라는 술회를 읊었다는 사실이다.

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지만, 박근혜씨의 경우 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간디의 말씀대로 가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명박이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장사치라면, 박근혜씨는 거짓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는 수구 세력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라 말한 것에 빗댄다면, 난 박근혜를 ‘거짓의 일상성’이라 말하고자 한다. 난, 어떤 행동이 죄인 줄 알고도 죄를 저지른 자보다 그것이 죄 인줄 모르고 죄를 저지른 자의 죄가 더 무겁다는 말에 동의한다. 수구 세력은 그들의 행동이 죄가 되는 줄 모르고 저지르고 다니는 자다. 그래서 그들이 무섭고, 그들의 행동이 소름끼치는 것이다.

민족의용단은 얼핏 보면 한국의 분단 과정에서 활동한 우익 단체 서북청년단과 닮았다.

이념 근본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 우선 같다. 인도의 경우 힌두교라는 종교가 한국의 경우는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기반이 되었지만 결국 반공주의나 힌두주의나 똑같이 이데올로기의 한 방편이라는 점을 본다면 둘은 결국 이데올로기가 낳은 일란성 쌍생아다.

분단의 시기에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강제 피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라 할 만하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모두 인도주의적 구호와 테러 난동을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매우 다르다. 우선 인도의 민족의용단은 반영 민족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지만 서북청년단은 그러한 역사성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민족의용단은 여당에 줄을 대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했으나 서북청년단은 처음부터 친일파와 이승만 독재 정권에 줄을 댐으로써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민족의용단이 독립 후 40년 정도가 지난 후에 폭력과 테러를 행하는 난동을 주도하면서 새로이 정권을 창출하는 전위대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서북청년단은 한 때의 테러 집단으로만 있다가 사라져버렸다.

인도의 수구 세력은 이론적 틀이라도 갖추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나마도 없다. 역사적 자부심이나 이론적 틀 없는 양아치 세력이 그것들을 갖춘 수구 난동 세력보다 덜 위험한 것은 분명하지만, 수준 안 되는 양아치 세력이 국가를 농단하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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