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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정치와 약점, Uneducated (3) 2018/09/09 PM 11:57

정치와 약점, Uneducated

 

 

[Uneducated]

 

'Uneducated'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쓰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보통 자신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배우지 못했다고 내리깔아볼 때 쓰이죠. 그리고 누군가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그에 대한 설득도, 논리적 반박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못 배운 것 같으니 공부하세요.” 가 끝이에요. 이상하죠?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는데 그 구성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 이상할 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실 이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방식이에요. 이걸 설명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시작을 해보도록 할게요.

 

오래 전부터 격언처럼 내려오는 말이 하나 있어요. ‘목소리 큰 사람의 말을 따른다.’ 간단히 힘이 있는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된다는 거예요. 지위든, 권위든, 돈이든 말이죠. 이런 인식이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논쟁을 할 때 종종 논리와 관계없이 상대방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내가 더 높으니까, 또는 네가 더 낮으니까 내 주장이 옳은 것이 틀림없어.”

 

어쩐지 익숙하지 않나요? 논리는 상관없어요. 그냥 높은 사람이면 맞는 말이 되어버리죠. 다들 한번쯤 겪어보았을 때니 더 이상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요. 대신에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금 보면 이런 현상은 불합리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예전에는 말이 되었어요. 보통은 힘을 통해 강압적으로 억눌러 따르게끔 만들었지만, 자발적으로 따르기도 했어요. 평등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지식격차가 뚜렷했으니까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은 배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대게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안이 옳건 그르건 힘이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당연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결국 불평등한 과거의 잔재에 불과해요. 과거보다 평등해진 지금 시대에 고등교육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최소한의 지식은 갖춘 상태예요.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도 크게 어렵지가 않아요. 이렇게 평등과 지식의 상향평준화는 힘이 있는 사람이 저지르는 불합리함을 받아드리기 어려워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불만과 싸움이 끊이질 않는 거죠. 예전이라면 그냥 수긍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는 꼰대나 갑질이라는 말로 비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세상이 어느 정도 바뀌었지요.

 

그렇지만 사람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전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 때문에 논쟁을 할 때 상대방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거죠.

 

 

자,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Uneducated]를 바라보도록 하죠. 정치적 올바름이란, 불평등함을 평등하게 만드는 운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종 사회적 약자들과 평등할 수 있게 말이죠. 말만 들으면 취지는 좋아 보여요. 그런데 이것은 기존 질서를 바꾼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질서에 속해왔던 사회구성원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어요. 정치적 올바름에 동의하면 같은 편, 동의하지 않으면 적. 아주 간단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상한 일이지요. 평등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평등한 방식인 대등한 관계에서 설득하지 않아요. 오히려 상대방보고 못 배운 것 같으니 배우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죠.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을 떠올려보면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기존 방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거든요. 그들은 그들이 만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선점함으로써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아래 높은 위치에서 공부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간단히,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나는, 추구하지 않는 이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내 말은 반드시 옳고, 반대하는 이들의 말은 반드시 틀리다.”

 

이 전제가 그들 안에 깔려 있기 때문에 [Uneducated]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네가 공부해야 돼.” 힘이 있는, 그러니까 높은 사람의 말을 따르고, 따르라고 명령하던 시대의 방식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다는 사람들이 구시대적 방식을 답습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슬픔이기도 하겠네요.

 

 

예전에 약자의 이기주의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약자가 강자와 동등한 권리는 누리려면 강자가 지던 의무도 같이 져야 하는데,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가리켜 약자의 이기주의라고 했었어요. 대표적인 예시로 미성년, 난민, 성소수자, 그리고 여성이라고 지칭했었어요. 약자의 혜택(일방적으로 보호받는)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강자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정치적 올바름의 원인과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약자의 이기주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약자니까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니 난민 테러로 자국민이 불안에 떠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난민을 받아왔던 거죠.

 

그것이 절대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겼으니까요.

 

불평등했던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 이기주의는 변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대를 설득할 생각하지 않고 배우지 못했다며 역차별을 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정의는 그들만의 정의가 되어 버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네요. 간단히 독선이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앞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예시를 통해 불평등했던 과거의 잔재에 대해 알아봤어요. 보편적 평등이 자리잡은 이세상에서 불평등한 방식을 답습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 받지 못하고 있지요. 어떤 정의든 다른 이들을 설득할 자세가 없다면 독선에 불과해요. 하지만 이런 방식이 익숙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요. 동물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 여겨요. 그래서 닭 먹는 잔치에 가서 난리를 피웠던 거예요.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으니까. 슬픈 건 이런 독선적인 태도에 대항하기 위해 똑 같은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많이 안타깝죠.

 

아무튼 이런 독선적인 태도는 논리적으로 취약할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는 약점으로 자리잡게 돼요.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에 논리가 있을 수 있겠어요. 논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약점에 불과할 뿐이에요. 이런 독선적인 태도 외에 다양한 약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평등한 세상 속에서 정치적인 방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약점]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여기서부터예요. 익명의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죠. 그런데 이런 인터넷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도 불평등한 시대에서 쓰였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요. 그래서 당당하게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어요. 독선적인 태도, 다양한 논리적 오류, 허세 섞인 욕설 등 마치 ‘여길 공격해주세요-‘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이렇게 약점을 노출하는 사람들은 애당초 그것이 약점인 것조차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덕분에 통설에 반하는 이설을 주장할 때 조금은 수월하게 흐름을 주도할 수 있었죠. 그걸 이야기해볼게요.

 

우선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매우 익숙한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고, 높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가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허세 섞인 욕설을 쓰게 되는 거죠. 뭐 재미로 쓰는 경우도 많지만요. 어쨌든 이런 방식은 불평등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상대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해야 되기 때문에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선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어떻게 증명할건가요? 인증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데 그건 신상 노출이라는 커다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돼요. 그리고 증명한다고 해서 유리해지나요? 그건 아니에요. 어떤 수단방법을 쓰더라도 논리에 논리로 맞서지 않는다면 커다란 흐름을 주도할 수는 없어요. 그건 평등을 바라는 사람과 논리적인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기 때문이에요.

 

흐름, 흐름이라, 그래요. 1:1 대화가 아닌 이상에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합리한 행위는 전부 약점이 되곤 합니다. 각각의 논리들을 보았을 때, 명확하게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면 약점이 없는 쪽이 유리하게 되어 있어요. 익명의 평등한 장소, 일정 이상의 교양과 지식이 갖춰진 장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장소. 이 세가지가 충족된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흐름을 주도 하고 싶다면 어떤 경우에도 약점을 노출하면 안돼요. 적어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돼요.  

 

 

이제 약점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알아볼게요.

 

첫째, 약점 노출 금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약점은 노출하지 않는 것이 유리해요. 독선적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고, 욕설, 비아냥, 비꼼 등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하죠. 일단 이 기본을 갖춘 상태에서 시작해야 돼요. 실수로 약점을 노출했다고 하더라도 큰 약점이 아닌 이상, 바로 사과할 수 있으면 돼요.  

 

둘째, 약점 공격 금지

 

어떤 사건에 대한 의견을 작성했을 때, 그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 있어요. 그 반발이 때론 독선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욕설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약점이 보일 때 그걸 공격하는 게 유리할까요? 그건 아니에요. 분명 약점이 노출되면 유리해지지만, 그걸 공격하는 순간 그 유리함을 버리게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걸 찌르는 순간 찔린 상대는 찌른 상대를 적으로 여길 확률이 높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대화가 아닌 싸움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각각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제삼자의 입장에선 둘 다 똑같아 보이죠.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을 설득하기는커녕 제삼자조차도 설득할 수 없게 되어버려요. 그러므로 상대방의 약점이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찌르면 안돼요.

 

대부분 욕설이 이에 해당되겠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욕설을 섞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 것은 굳이 애써 지적하지 않아도 돼요. 제삼자가 보았을 때엔 대체로 욕설을 섞지 않는 쪽이 올바르게 보이거든요.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 때엔 점잖게 지적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셋째, 약점 또는 함정

 

때로는 약점이 아닌 함정일 때도 있어요. 일부로 약점인 것처럼 노출하여 공격하게끔 만들고, 반격하는 거죠. 마치 실수인 것 마냥 조롱하더라도 발끈해서는 안돼요. 조롱하는 것이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는 이상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치명적인 반격을 받고 불리해질 수 밖에 없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예시를 들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굳이 들고 싶지는 않아서… 음, 딱 봐도 보란 듯이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명분상으로는 그르지 않을 때라고 해야겠네요. 이럴 땐 참 골치 아파요. 보통은 그냥 넘어가는데,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격을 감수하고 함정에 빠지죠. 나의 약점 노출하지 않고, 상대방의 약점 섣불리 찌르지 않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괜찮은 흐름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평등한 곳에서는 자신과 상대방의 약점을 잘 다루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흐름을 유지하기 좋아요. 그리고 이런 방식은 비단 인터넷뿐만 아니라, 세가지, 평등, 지식, 제삼자가 갖춰진 장소라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정치]

 

현실에서 평등과 지식과 제삼자가 갖춰진 공간은 어디 있을까요? 저는 일단 모든 곳이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긴 해요. 역할에 따른 계급은 분명 존재해요. 하지만 사람으로는 평등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든 독선, 비논리, 욕설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긴 해요. 아직도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표적인 장소 몇 군대를 예시로 들어가며 설명하도록 할게요.

 

 

첫째, 외교

 

국가간의 외교는 매번 평등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평등할 때가 있긴 있어요. 그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보죠.

 

예민한 문제를 다뤄볼게요.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예요. 우리나라나 일본 입장에서는 독도 문제건, 욱일기 문제건, 위안부 문제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선 또 다르게 보여요. 솔직히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일거예요. 남의 나라 문제거든요. 그래서 어떤 해외회사 지도에서 독도를 일본 명으로 짓는다거나, 해외에선 욱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거나,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을 갖지 않지요. 이런 상황,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지 않겠어요? 평등, 지식, 제삼자가 갖춰진 공간이죠. 우리나라 입장에선 우리나라가 올바른 것이 맞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누가 올바른지 크게 관심이 없어 평등해지게 되어버려요.

 

거기다 위안부에 관해서는 두 번이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졌어요. 피해자와 국민이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당시 정부가 돈을 받아버렸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을 바란다면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이겠지요. 받아놓고 또 바라나 싶을 거예요. 그걸 일일이 설명한다면 설득할 수야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겉에 드러난 사실만을 보려고 할거예요.

 

상당히 골치 아파졌어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목적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사죄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예요. 말뿐인 사죄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못한 것을 뉘우치길 바란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해요. 우선 이것을 목적으로 설정하고 바라보죠. 반성, 그것이 목적이라면 딱 하나만 요구하면 돼요. 큰 약점도 없고 상대방의 이익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죠.

 

중립적인 역사교과서 편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은 그 나라에 이익이 되는 행위예요. 피해자인 우리나라가 가해자인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는 것. 그것은 어떤 제삼자가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지요. 물론 내정간섭이란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약에 주장해도 괜찮다면, 깔끔하고 약점이 없이 일본의 반성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평등하고, 지식이 있으며, 제삼자가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약점이 없는 논리로 접근해야겠지요.

 

 

둘째, 언론

 

정보를 전달하는 의무를 지닌 대표적인 역할이 있다면, 교사와 언론이 있어요. 그리고 이 둘은 조금 달라요. 교사는 대체로 미성년을 상대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동시에 보호할 의무까지 있어요. 대등한 관계는 아니죠. 하지만 언론은 달라요. 정보를 전달할 대상이 불특정 다수기 때문에 언제나 평등하고, 지식이 있으며, 제삼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시민과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정보를 전달해야 될 거예요. 그래야 약점을 다루어 원하는 흐름을 만들 수 있겠죠. 가뜩이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다양한 정보를 접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이 시대, 언론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약점을 관리하길 권해볼게요.

 

그리고 사실 언론이 가짜뉴스나 선동뉴스로 욕을 많이 먹고 있지만, 정치적인 이슈, 사상, 언론사 손익을 제외하면 대체로 정확하기 때문에 진실을 확인할 때에 기대는 곳은 결국 언론이거든요. 언론은 국가의 중요한 정보매체니, 부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정치

 

정치에 있어서 평등한 순간은 많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내적인 부분에선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외부로 노출되는 공간이라면, 평등, 지식, 제삼자가 갖춰지게 됩니다. 어떤 정치인도 이 상황에서는 약점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 약점을 잘 다루는 정치인을 지지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득권은 약점이 많은 정치인이 위로 올라가야 다루기 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의 대표가 약점이 많으면, 외교적으로도 불리한 위치에 놓기에 될 수 밖에 없어요. 국내에서는 약점 많은 정치인 상대로 기득권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해외로 가면 정상적인 상황에선 반드시 손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어요.

 

단순히 눈앞의 이익만 살펴보고 약점이 많은 정치인을 지지하기보다는, 큰 그림에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약점을 다룰 줄 아는 정치인을 지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여기까지만 다뤄보도록 할게요. 저는 기본적으로 약자의 편을 들어주려고 해요. 대부분은 강자의 이기주의가 더 심각하거든요. 힘 있는 사람이 더 큰 횡포를 저지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자의 이기주의를 허용하고 싶지는 않아요.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약자라고 해서, 독선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욕설이나 비아냥을 할 권리는 없어요. 정녕 자신들의 정의로 세상의 질서를 바꾸고 싶다면 자신의 주장에 반대된다고 해서 바보 취급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계속 바뀌지 않는다면 제삼자 여러분,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는 것은 약점이 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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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글로 정리할 법한 주제긴 한데, 음, 뭐 어때요. 나중에 더 정리해보도록 하죠.

 

기본적으로는 사법부를 불신하지 않아요. 몇몇 사건들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제대로 판결한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취급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렇지만, 잘못된 판결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분명 불리해질 수 있겠지요. 법은 무서워서가 아닌 필요해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디, 사법부도 약점을 관리했으면 좋겠어요.

 

LCK 재미있게 봤어요.

 

그럼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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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코넬    친구신청

무지 열심히 쓰셨는뎅..
주술호응부터 너무 어긋나는데다가 전환어 쓰임이 작위적이고 어색해서 계속 읽힘이 안좋습니다.
그때그때 손에 닿는걸로 구도 잡고 문장을 이어붙일게 아니라
쓰고싶은 제재 단어만 늘어놓고 그 제재에 대한 느낌을 단문으로 짧게 짧게 풀어내는데부터 시작해보세여

템퍼필로우    친구신청

네 고마워요.

템퍼필로우    친구신청

아무래도 그냥 생각나는데로 쭉 늘리면서 쓰다보니 그런 것 같네요. 조금 바꿔볼게요.
[소식] 2018년 9월 2일 (0) 2018/09/02 PM 08:24

이번주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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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예전에 자아에 대해 썼어야 했는데 저번 주제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자아에 대해 쓰기 어려우면 잡담으로 '정치와 약점'에 대해 써보려고 했어요.

예전에 이제는 '무결점의 시대'라고 말했던 것을 정리해보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컨디션이 좋지 못해 약간 우울하네요. 다음에 써볼게요.


혹시라도 기다렸다면 미안해요.

다음 주는 뭐라도 쓸게요.

 

그나저나 써보고 싶은 것만 많네요. 언어교육, 인성교육, 노동의 가치, 법과 필요, 자동화시대, 미성숙한 사회,부의 분배, 언론, 체면, 위선, 이기심 등등 생각나는 대로 써봤어요. 뭐 다들 한줄 요약이 가능한 상태에서 이것 저것 붙이는 것 뿐이죠. 언젠간 써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아시안게임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즐겁게 시청했어요.

 

그럼 모두 힘내요! 나도 힘내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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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8년 8월 26일 (0) 2018/08/26 PM 06:35

이번주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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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은 화합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보다 더 저렴하게 화합할 수 있는 eSports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전에, 한 2년전쯤 일거예요. ‘eSports가 올림픽 종목이 될 수 있다.’ 라고 다른 게임 커뮤니티에 글을 쓴 적이 있었죠. 그리고 아시안게임에서 퇴출된 바둑을 예시로 들면서 eSports는 기존 올림픽에 속하는 것이 아닌, 바둑같이 머리로 쓰는 스포츠와 결합하여 새롭게 마인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될 거라 이야기했었어요. 하계, 동계, 두뇌 같이 말이죠.

 

당시에는 게임이 무슨 올림픽이냐며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여겨졌었어요. 게임 따위가, 또는 게임은 공공재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죠.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는 올림픽의 본질은 '화합'에 있다고 봤었어요. 그 방식이 달리기건, 싸우는 거건, 잘 맞추는 거건, 어쨌든 경쟁을 통해 화합할 수만 있다면 별 상관 없어요. 그러니 게임으로 경쟁을 하여 화합을 하는 것도 별 상관 없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상관 없을 거예요.  아시안게임 시범종목도 되었으니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가면 올림픽도 가능할거라 생각해요. 문제는 게임만 포함되느냐, 아니면 바둑 같은 스포츠도 포함되느냐, 아니면 동계처럼 새롭게 올림픽이 개최될 것이냐, 겠지요.

 

제 생각엔,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는데, 하계에서 동계처럼 나뉜 것처럼 하계, 동계에서 벗어나 두뇌 올림픽으로 나뉘게 될 거예요. 그게 가장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니까요. 까놓고 얘기해서 몸으로 하는 것과 머리로 하는 걸 같이 두는 건 어색하니까요.

 

뭐 이건 지켜보면 알겠죠. 그건 그거고,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잘했으면 좋겠네요. 응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공중파에서 제가 좋아하는 게임을 중계하는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하네요. 변화를 느껴요. 여기까지.

 

다음주 가능하면 자아에 대해 써볼게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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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나요? (8) 2018/08/19 PM 03:53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나요?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좀 안타까운 게시물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어요.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해볼게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나요?”

 

그야 당연히 살 수 있죠. 그리고 당연히 살 수 없죠. 이상하지요? 그렇지만 기준을 잡으면 말이 된답니다.

 

우선 돈은 그냥 한 국가의 신용도에 따른 가치환산도구라는 것으로 시작하죠.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받거나, 물건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사고 있어요. 여기서 물어볼게요.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돈 자체인가요? 아니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무언가’ 인가요? 일부를 제외하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무언가’ 일거라 생각해요.

 

이제 정리 될 거라 생각해요.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어요.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돈으로 살 수 없으면, 그 사람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세상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거래하기 때문에 돈이면 대부분의 행복을 살 수 있긴 해요. 그래도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돈과 관계없이 미덕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독립운동가나 자원봉사자 등 많이 계시니까요.

 

 

그럼에도 사실은 대부분 살 수 있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은 왜 굳이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금전만능주의로 이끄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사실 재미있는 부분은 여기에요. 왜 이런 당연한 일을 유머 글을 통해 굳이 강조하면서 이야기 하는 걸까요? 의도가 대체 뭘까요?

 

대체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식이라며 비웃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그럴지도 몰라요. 미리 말해둘게요. 실제 의도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효과는 알아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 즉 금전만능주의로 치닫게 되죠. 그리고 그건 자연스럽게, 매우 자연스럽게 유전무죄로 이어져요. 그리고 유전무죄는 대부분 부유한 이들이 이득을 보게 되죠. 재미있죠? 예전에 유머 글을 봤을 때 이야기예요. 어떤 여성이 뻐기듯이 말하더군요.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부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누가 이익이죠?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누가 이익이죠?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안타깝게도, 돈을 위해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왜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다면서요? 그런데 이걸 잘 모르는 분들이 있어요. 이건 머리 좋은 것과 관계가 없어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이익이 눈을 가리면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와요. 남들이 부도덕한 짓으로 돈을 벌 때엔 욕하면서, 자기자신이 부도덕한 짓으로 돈을 벌 때엔 ‘금전만능주의’ 나 ‘자본주의’ 핑계를 대며 합리화하죠. 그래서 슬픈 상황이 만들어져요. 서로를 욕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너는 안 그럴 것 같으냐’ 라고 몰아붙이면서 자기합리화를 해요. 안타까운 일이죠.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예요. 실제로 돈으로 법을 뛰어넘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면 안돼요. 그건 반드시 국가적 손해로 이어져요. 나라의 재산인 위성을 팔아먹은 까닭은 뭐였겠어요? 돈 벌려고 했겠지요. 부당한 이익이라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그걸 합리화했겠지요. 끔찍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유한 이들조차 나중을 생각하면 손해를 보게 되게 되어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을 위해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지게 되면, 나라 망하는 거 순식간이죠. 나라 팔아먹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매국노들이 아니라면 누구든 손해를 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런 사상은 매국노를 제외한 우리 모두를 절망케 만들 겁니다. 이건 단언할 수 있어요.

 

이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실 거예요. 돈은 중요해요. 행복 하기 위한 대부분을 얻는데 쓰일 수 있죠. 그렇지만 그걸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은 반드시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될 거예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건 손해예요.

 

이세상의 선, 도덕, 정의 같은 것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다수를 위하고 있어요. 그래서 대체로 공공의 이익을 가리켜 선이라고 부르죠. 돈을 위해 나라 팔아먹는 자들이 없어지면, 그 외의 사람들은 이익을 보겠지요. 그래서 절대 다수는 선을 추구하는 편이 좋아요. 그게 이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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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는 가능하면 자아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할게요.

 

인터넷 세상이 온 이상, 모든 이용자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저항감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의무가 아니에요. 직업적 의무는 대표적으로 교사나 언론이 있겠지요. 그래서 교사나 언론 같이 정보 전달이 의무인 직업은 좀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유머게시판에서 어느 언론사에서 대물을 물고 왔다는 식으로 글을 쓰며 잘했다고 하길래, 처음에는 그냥 그렇구나, 했어요. 그런데 계속 반복되니까 열심히 하는구나 싶어서 기쁘고 칭찬하고 싶었죠. 부디 모든 언론사가 칭찬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이 당연하게 되어 굳이 칭찬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볼게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에요. 대부분 잘하고 있지만, 이기심이 포함되면 그 유능함이 빛을 바래더군요. 요즘 사법부가 비판을 받고 있죠.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공정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어느 개인, 어느 집단이든 어디에서라도 부당한 이익을 포기하고 정당한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면 좀 더 밝은 내일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는 이기심이죠.

 

지금 조금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바꾸려고 시도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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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의 소생    친구신청

네 돈이 행복이죠 돈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에 사는데

Octa Fuzz    친구신청

행복을 돈으로 살수 없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건 아닌지 확인 해봅시다~

쓰럴    친구신청

"돈많다고 행복한건 아니고 돈이 없음으로 인한 불행을 막을수 있다"라고 누가 그랬습니다.

ParkMB_Go prison    친구신청

속물같은 답일 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국가에서는 돈이 행복입니다 ....

darkzihard    친구신청

돈으로 행복을 살수없는데 돈이 없으면 있던 행복도 없어지고 불행이 늘어나죠

一目瞭然    친구신청

돈이 없으면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없음.

고로 돈이 있으면 행복함으로 귀결 가능함.

ZEPA    친구신청

관련된 명언이 있죠

"돈으로 행복을 살수 없다. 하지만 돈으로 행복하게 살수는 있다."

템퍼필로우    친구신청

음, 행복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살 수 있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산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보면
돈을 위한 부도덕을 용서하게 되겠지요.
[글] 욕망의 한계, 양식 (0) 2018/08/12 PM 09:55

 

욕망의 한계, 양식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갔다. 모독의 자유, 강탈의 자유, 살육의 자유, 이외 모든 악덕의 자유는 평등의 등장으로 방종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자유라 부르지 못하리니, 자유와 방종을 착각하지 말지어다.

 

 

0. 의의

 

이 글은 제 사상인 역할존중을 위해 준비된 생각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역할존중은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자라는 주장이 담긴 사상이에요. 이 사상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본디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순간부터 완전한 평등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답니다. 간단한 예로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들어볼게요. 그 둘은 평등할 수가 없어요.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다른걸요. 그 외에도 수많은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계급, 사라질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회적 역할을 분리할 필요성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분리하고 나서 계급을 사람이 아닌 역할에 속하게 만들어야 사람 자체는 계급에서 해방되겠지요. 그래야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봐요. 이렇게 평등해진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회적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을 얻게 되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에 따라 인격적인 존중의 유무를 결정하고, 수행수준에 따른 기여도에 따라 금전적인 대우를 달리 하는 사상을 역할존중이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에도 문제가 있어요.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가 악덕의 자유들을 방종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로 욕하고 싶다거나, 질투로 빼앗고 싶다거나, 증오로 죽이고 싶다는 악덕을 부르는 감정의 충동을 억제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런 어두운 감정은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곳을 찾게 되었지요. 상대적으로 낮은 대상을 공격한다거나, 조금이라도 나빠 보이면 공격하는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바로 악덕과 악덕을 향한 악행이죠. 이건 어느 시대나 공통된 사항이죠.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글과 댓글이에요.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방법이나 장소를 마련해주지 않고 그냥 억제만 하라고 하니 사라지지 않는 그 어두운 감정은 익명성의 방패 속에서 마음껏 소비하게 되었지요. 아무에게나 악플을 달거나 자기 기준으로 나쁘다고 여겨지는 상대에게 악플을 단다거나 말이죠. 이런 현상을 가리켜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낸 무차별적인 악덕난사라고 불러 볼게요.

 

이번 글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구상하게 되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통해 보편적인 행복이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1.

 

우선 인간의 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무엇이 죄인지 명확하게 정리해놔야 앞으로의 전개가 가능해지니까요. 저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욕구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도요. 세상의 모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생기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게요. 대부분의 인간은 악덕을 부르는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즉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그게 죄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없애려고 한다면, 그 인간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게 돼요. 사이코패스가 선천적 공감능력결핍인 것처럼 어두운 감정이 없는 것 또한 감정결핍일 뿐이니까요. 망가지고 말 테죠. 불쌍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무엇이 죄가 되는지 명확하게 구분해야 돼요. 그리고 이 구분이야말로 이번 글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죄가 생긴다는 전제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하게끔 유도해야 한다.’가 가능해지니까요.

 

기초를 마련했으니 그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인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2. 악덕

 

처음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덕의 불운을 읽었을 때예요.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의 저서죠. 그러니 미덕의 불운을 이야기해볼게요. 아무래도 글 내용을 인용하게 될 예정이니 내용 누설이 있어요.

 

미덕의 불운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가난한 소녀가 미덕을 추구하여 겪게 되는 불운들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사드 후작이 왜 사디즘이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던 작품이죠. 좀 변태적일 정도로 작품 내내 주인공을 괴롭혀요. 그 시대의 어린 고아소녀가 겪을 수 있는 불운이란 불운은 대부분 겪게 만들거든요. 그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할 때마다 불운을 겪게 되는데 그 중 하나, 의문이 생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악덕을 향한 악행도 미덕이라 말하더군요.

 

 

[맹세를 어김도 미덕이니, 그것은 죄악을 벌할 때이니라.]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내가 너에게 베푼 후의를 나 스스로 후회하게 만들 일을 네가 저지를 경우, 너를 다시 비끄러매겠다고 했던 이 나무를 기억하겠지! 내 어머니를 해하려고 너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네가 나를 배신할 뜻을 가졌다면 왜 내 청을 수락했어?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죄악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하더라도, 무슨 이유로 더 추악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느냐 말이야? 내가 너에게 요청하는 것을 거절했으면 그만이었어. 나를 배신할 의향이었다면 아예 수락하지 말아야 했어.]

 

그럼 이 사건까지의 줄거리를 이야기해볼게요.

 

작중의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14살의 어린 고아임에도 미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고결한 소녀예요. 그런데 쥐스띤느가 사는 곳은 미덕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성실하게 일을 하며 꼿꼿하게 미덕을 추구했지만, 그 미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의 거짓된 절도신고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부당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죠. 그 소녀는 매우 비참했어요. 그런데 마침 수많은 죄를 짓고 정당하게 사형선고를 받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탈옥 하게 되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미덕은 불운을 불렀지만, 죄악은 행운을 부르게 되었죠. 쥐스띤느의 불행한 사연을 듣게 된 그 여인은 탈옥 후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아가씨가 직접 보았듯이, 아무 성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미덕의 실천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이에요 어울리지 않는 미덕이 아가씨를 단두대로 인도한 반면, 끔찍한 범행이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 중략 아가씨는 젊고 아듬다우니, 원한다면 브뤅셀로 함께 가서 내가 책임지고 아가씨의 행운을 찾아주겠어요.]

 

그럼에도 이 고결한 소녀는 달콤한 죄악의 제안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으면 하늘의 벌을 받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고 여인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헤어지려고 했지만, 여인의 패거리들은 쥐스띤느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탈옥 후 마신 술은 한줌도 채 남지 않았던 그들의 도덕심을 녹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에요. 쥐스띤느를 덮쳐 성욕을 충족하기로 패거리들끼리 합의를 한 그들은 덮치는 순서를 정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돼요. 그들이 싸우는 틈을 타서 쥐스띤느는 도망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도망치다가 어떤 한 남자에게 구원받게 되는데, 그 시점이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예요.

 

 

수많은 불운 끝에 구원을 받았으나, 이 남자도 정상이 아니었어요. 이 남자의 이름은 브레삭이라고 하는데, 쾌락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미친놈이죠. 그러다가 끝내는 패륜까지 저질렀어요.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도 해요. 정말 미친놈이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스띤느를 구원해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뒤 먹고 살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도와주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돈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돕지 않겠다고 말하면 다양한 지원을 끊었을 뿐이라고 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쥐스띤느는 미덕을 위해 패륜을 돕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배신했어요. 주인마님에게 달려가 패륜에 대한 것을 모든걸 고백했죠. 주인마님은 분노에 가득 차서 브레삭의 자유를 억압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교활하고 사악한 브레삭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어요. 기어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 미친놈. 그리고 나서 배신당한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쥐스띤느를 몰아붙이죠. 그게 위에서 인용한 긴 문장이에요.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미친놈의 말이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어요. 과연 죄악을 벌할 때엔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사색을 가져다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지만, 과연 이런 생각이 올바른지에 대해 고민을 좀 하게 되었네요. 그에 대해 써볼게요. , 간단한 이야기예요. 죄악은 죄악이고 미덕은 미덕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배신은 죄악이 맞아요. 단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건을 예로 들자면, 쥐스띤느의 행동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죄악이라고 봐요. 죄는 죄죠. 그걸 잊고 미덕인 양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미덕에 취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이걸 가리켜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말과 비슷하겠네요.

 

그렇다면 왜 쥐스띤느는 그것을 미덕이라 여겼을까요? 그건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이 전부 하늘의 뜻이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앞뒤사정 고려도 하지 않고 미덕을 추구했던 것이겠지요.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했기 때문에 불운을 겪은 것 같지만, 이 사건에서는 미덕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의 실수는 미덕과 죄악의 정의, 그리고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은 하늘이 아닌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몰랐던 거예요.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자신의 미덕을 위해 좀 더 똑똑하게 처신했어야 했겠지요. 물론 뭐, 그 시대에서 14살의 고아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겠지만요.

 

 

이런 상황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어요. 악덕을 향해 저지르는 악행은 미덕이 아니에요. 정당할 뿐이에요. 예를 들어 범죄자를 대할 때 미덕은 무엇이고 악덕은 무엇일까요? 미덕은 관련기관에 신고하여 사회적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고, 악덕은 개인판단으로 처벌을 하는 것이겠지요. 단지 정당방위면 정당한 악행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정당한 악행은 다양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죠. 쉽게 알 수 있는 정당한 악행은 내부고발이라고 생각해요. 내부고발은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배신할 확률이 매우 높지요. 그렇지만 그건 더 큰 집단인 사회에 이익이 되는 행위에요. 매우 정당한 악행이죠. 하지만 미덕은 아니에요. 미덕은 아니기 때문에 비리를 저지른 악당에게 보복 당할 확률이 매우 높아요. 실제로 내부고발자들은 대체로 불운한 인생을 살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미덕이 아니라 정당한 악행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그런 사람들을 사회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부의 비리를 고발한 정의로운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밖에 없어요.

 

여기까지 악덕(죄악)을 향한 악행에 대해 알아봤어요. 제 생각으로는 악덕을 향한 악행은 결코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어요. 정당하냐, 부당하냐 로 구분될 뿐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규모와 관계가 없어요. 작은 규모로 예를 들자면, 아이들 장난이라도 못된 짓에 못된 짓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정당할 뿐이죠. 큰 규모로 예를 들자면, 전쟁에서 침략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미덕은 아니에요. 단지 정당한 것이죠.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은 승자든 패자든 심각한 PTSD를 겪을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전쟁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해요. 그러니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돼요. 그것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초 선이라 여기는 제게 있어 매우 커다란 죄예요.

 

 

 

3. 정당

 

악덕을 향한 악행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악행임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무엇이 정당한 걸까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 걸까요? 이걸 알아야 사람들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때에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이것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어요. 그런데도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는 악덕을 향했을 때 정당한 악행이 돼요. 그런데 악덕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무엇이 정당한지 의문이 생기게 돼요. , 세상에는 명예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지도 의문이 생기죠. 욕 한번 들었다고 때려죽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대로 돌려주는 것 또한 매번 정당한 것은 아니에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정당한지를 명확하기 구분 짓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이야기해볼게요.

 

 

세계화가 됨에 따라 각 나라의 질서를 최고선이라 부르기 어렵죠. 반드시 선이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그래서 모든 종의 기초 선인 종의 생존과 번영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잡아 그걸 기본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각 나라의 질서를 기준으로 잡아야겠지요. 이런 기준의 토대가 마련된 상황 속에서 상대가 명백한 공공의 적일 때엔 악덕을 향한 악행이 대부분 정당해진다고 봐요. 세가지 집어볼게요.

 

첫째, 인류의 적, 침략국

 

정당하기 때문에 현대의 침략국은 전 인류의 적이 되어 말살되겠죠.

 

둘째, 나라의 적, 비리 등.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여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비리는 내부 고발로 배신당해도 싸요.

 

셋째, 개인의 적, 정당방위.

 

개인의 폭력에 살아남기 위해 자기방어수단으로 반격하는 것을 가리켜 정당방위라고 하죠. 이걸 얼핏 보면 개인의 적일 때 정당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폭력을 써서 종의 생존과 번영에 해를 끼친 쪽이 공공의 적이 되겠지요. 그런데 정당방위가 법을 기준으로 하면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기는 해요. 

 

그 외에도 인류의 갈등을 초래하는 잘못된 사상은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해요.

 

이제 어느 정도는 기준이 잡혔을 거라 생각해요.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대체로 정당하죠. 그리고 악덕의 수준에 맞게 악행을 저질러도 대체로 정당해져요. 물론 그 수준 이상은 부당해질 가능성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긴 할거예요.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이외에는 정당하기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선수들이 부진 하다고 욕하는 건 정당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공공의 적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것은 부당해요. 논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약점이 되게 되어있어요.

 

 

어느 정도 기준은 잡혔어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였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줄 때 생겨나요.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공공의 적일 때 주로 정당해져요. 이걸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4. 소비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데 쓰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고 봐요. 악덕을 부르는 감정과 욕구를 소비할 때엔 양식으로 소비하고, 악덕을 향한 악행일 때엔 공공의 적을 상대로 소비해야 정당하겠지요. 우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양식 [물고기나 해조, 버섯 따위를 인공적으로 길러서 번식하게 함.]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양식이란 단어를 쓰도록 할게요.

 

사실 이미 어느 정도는 다들 양식으로 감정이나 욕망을 소비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예술이죠. 사람이 만든 인공물에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끔 했어요. 그건 밝은 감정뿐만 아니라 어두운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첫째, 조롱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다, 조롱하고 싶다, 그런 감정과 욕구는 사실 본성에 가까워요. 그것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니까 악덕이라 부르며 참게 만드는 거죠. 그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게 희극이라고 생각해요. 광대들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서 사람들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둘째, 성욕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에게 이런 성욕은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악덕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이런 본능을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할 수 없는 게 나쁜 거죠.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외설이라고 생각해요. 외설제작자들은 사람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셋째, 폭력

 

폭력은 서로를 상하게 만들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죠. 그래서 악덕이라 불러요. 하지만 이것조차 원래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를 못할 때 나쁜 거죠. 이런 어두운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격투 스포츠 또는 게임 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이처럼 사실 우리 인간은 이미 감정과 욕구를 양식으로 소비하고 있어요. 인공적인 것을 통해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하는 거죠.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감정과 욕구는 무조건 막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통해 소비할 수 있게끔 해야 돼요. 앞서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공물에 대해서는 뭐든지 가능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거죠.

 

사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파헤쳐보면 장난 아니에요. 나이나 지위 관계없이 대부분 더러운 욕망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걸 표출하면 죄가 되니까 참는 것뿐이죠. 그렇지만 이런 더러운 욕망 또한 충족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스스로를 갉아먹게 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겠어요. 그게 본성인데.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욕망도 충족할 수 있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사람들의 이상성욕을 보고 불쾌해 할 수 있지만, 그걸 양식으로 해결한다고 하면 오히려 권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욕망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으니까요. 대놓고 말해서, 실존인물이 아닌 대상으로 욕망을 배출하여 충족하겠다고 하면 서로 이해를 하는 쪽이 인류를 위해 이롭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공연하게 드러낼 때엔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해야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즐길 때엔 내버려 둬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과연 인간의 욕망은 양식만으로 충족이 가능한 걸까요? 흔히 이런 양식으로 더러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보고 불안에 떠는 것은 그런 모습이 현실로 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던 아이가 폭력적이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다고 봐야겠지요. 보통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이기 때문에 가상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시키기만 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족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대리 만족하면서 참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양식만으로 충족은 안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미래에는 조금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현실과 매우 유사하게 지낼 수 있는 가상현실기술이 발달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시점에 도달한다면 그때에 비로소 양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된다고 봐요.

 

 

그럼 이제는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요즘은 보통 인터넷에서 욕설을 쓰는 것도 제재를 받기 때문에 쉽사리 하기가 어렵지요. 악덕은 배제 당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악덕을 향한 악행은 어느 정도 정당화되고 있는 현실이에요. 나쁜 놈을 상대로 욕하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거죠. 그런데 그 나쁜 놈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공공의 적이죠.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비난을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범을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할게요. 정리가 더 필요하네요. 현실의 문제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예민해서요.

 

 

 

5. 행복

 

행복이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제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것이 밝든 어둡든 소비해야 행복해지는 거겠죠. 그런데 평등해진만큼 어두운 감정은, 정확히 어둡다고 사람들에게 평가 받는 감정은 악덕을 부르기 때문에 소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자위만 해도 더러운 것이라며 타박하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죠)

 

그러니까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해야 평등을 유지하면서 행복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좀! 실존인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나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막 무조건 막기만 한다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라 폭발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즐기게끔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정당한지를 분명하게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감정과 욕망을 소비하여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겠지요.

 

일단 여기까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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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도 일단은 여기까지 정리할게요. 언젠가 다시 한번 더 써보고 싶어요. 인간의 욕망을 양식으로 충족하자는 것은 감정이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가짜뉴스, 선동뉴스들이 많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괜찮은 언론인도 있는 걸 보면 매우 기쁘네요. 아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이 교사라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은 언론이겠죠. 명예로운 일이니까 부디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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