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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해빙 (0) 2024/11/11 PM 05:24

해빙(解氷)



눈사람 같은 사람.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기꺼이 봄을 기다린다면

나는 당신에게 모자를 씌워드리겠어요.

눈썹도 그리고, 코도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찾아와

둥그런 미소를 붙여드리겠어요.

기꺼이 녹아 샘물이 된다면

연두빛 풀잎이 되어

분홍빛 꽃잎이 되어

하얗던 봄을 칠해 보이겠어요.


눈사람 같은 사람.

추워야만 살 수 있는 사람.

당신이 겨울을 붙잡으려 든다면

나는 당신의 모자를 빼앗겠어요.

눈썹도 떼고, 코도 떼고

지푸라기라도 뽑아내

꽁꽁 언 아이 손부터 녹여보겠어요.

기어이 얼어붙은 동상이 된다면

붉은빛 횃불이 되어

노란빛 물결이 되어

기나긴 겨울을 몰아내겠어요.


눈사람 같은 사람이여.

겨울에 머무르는 사람이여.

당신은 기꺼이 샘물이 되어줄 건가요.

나는 당신을 이른 봄이었다 적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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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겨울 나기 (0) 2024/11/07 PM 05:40

겨울 나기



냉혹한 밤이 와도

너무 슬퍼하진 말아요.

태양의 시체를 끌어안고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요.

봄을 기다리는 씨앗처럼

그 위를 덮은 한 줌 흙처럼.


차디찬 눈보라 속에서도

우리는 흩어지지 말아요.

녹지 않는 걱정 가득 짊고 살아도

마음은 여전히 타올라야 하니까요.

둥글게 무리 짓는 펭귄처럼

반푼이라 놀림받는 펭귄처럼.


달궈진 난로 곁에 모여

보글보글 끓어오른 농담을

가득 담아 서로에게 건넨다면

잔뜩 굳었던 표정도

후후 부는 입김처럼 풀리겠지요.


유난히 긴 겨울이 와도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저도, 그리고 당신도.

겨울은 누구에게나 추운 법이니까요.



-


올겨울은 어쩌면 더 혹독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로를 너무 미워하진 맙시다.

안을수록 따뜻해지는 겨울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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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태양의 시체 (0) 2024/10/29 PM 07:43

태양의 시체



모두가 입 모아 말하니

으레 그렇겠구나 여기다가

곰곰 생각해 보니

나는 이제껏

태양의 시체를 본 적이 없었다.


저어기 꺼먼 것은

태양의 자취이지, 시체는 아닐 터.

저어기 허연 것은

태양의 반광이지, 시체는 아닐 터.

어디에서도 나는

태양의 시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입 모아 말한다 한들

그의 죽음을 선고할 수 없다.

그의 부재를 증명할 수 없다.

나는 단정할 수 없다.


기나긴 침묵에도

나는 내일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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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덧셈 공식 (0) 2024/10/17 PM 04:36

덧셈 공식



절뚝이는 아이야

너는 나의 팔이 되어주렴.

나는 너의 다리가 될 테니.

너는 나의 눈이 되어주렴.

나는 너의 귀가 될 테니.

부러움을 화르르 태우면서도

세상은 걸어볼 만하다니까.


아이야, 손을 내밀어

짐승의 감촉을 느껴보아라.

고동치는 심장이 뿜어내는 환희를 느껴보아라.

아이야, 눈을 떠

들녘의 빛깔을 바라보아라.

새벽을 젖히며 햇살에 물드는 황홀을 바라보아라.

부산스럽게 자랑할만하더냐.


아이야, 고개를 들어라.

돌부리만 찾다, 별똥별을 놓치겠다.

바람은 소란스레, 귓가를 간질이지만

뜬구름 내뱉어, 애써 흐려질 일 없이

콧노래만 흥얼거리자꾸나.

나는 참 궁금하다, 너와 걸을 세상이.

퍽 아름다웠다 적을 만 하더냐.


아이야, 갈기갈기 찢어져도

엉금엉금 기어 오렴.

데구루루 굴러갈 테니.

온전치 않은들 어떠할까.

둘이어 보고, 셋이어 보고

그래도 안되면 넷이면 되지.

떠들썩할수록 더 사람답지 않더냐.

너는 어느 때고 오라.

눈과 귀와 팔과 다리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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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걸음마 (0) 2024/10/11 PM 06:20

걸음마



훨훨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날 수 있나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어찌하여 날지 못하나요?"


당연한 대답을 꺼내려다 멈칫,

고개 들어 하늘 보니

많은 이들이 날고 있었다.

'날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


자꾸만 고개 숙이는 물음표처럼

잔뜩 초라해진 의문을 꺼내 보이자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하늘 걷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나는 나를 믿진 못 하지만

그 미소가 자꾸 걸려

당신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첫 발을 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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