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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갤럭시와 아이폰 (0) 2021/10/11 AM 08:29

갤럭시와 아이폰

 

 

 

원래 구글 경쟁상대에 대해 써보려고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그건 주관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 급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예상 밖에 상황으로 그건 보관하고 다른 걸 써보기로 했다. 마침 유튜브에 갤럭시와 아이폰 관련 영상이 있길래 그걸 주제 삼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갤럭시와 아이폰을 써본 적이 없다. 삼성 제품은 꽤 소유하고 있어도 애플 제품은 아예 없다. 스마트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해보겠다. 그냥 이건 내 능력 실험이다. 어디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른다. 시작해보겠다.

 

스마트폰은 혁신이 어렵다.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는 배터리에서 정체되어 큰 혁신을 이루기가 어렵다. 단순한 성능 강화는 사실상 물가상승률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쓰던 걸 굳이 교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갤럭시가 액정을 접는 개념을 도입했다. 신선했지만 부진했다.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 최신버전인 갤럭시 Z 플립3는 예상외의 많은 수요가 있다고 한다.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많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을 쓰던 이재용 딸도 이젠 플립을 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폰은 그런 것이 없어도 인기가 많다. 아이폰13은 변화가 적어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아이폰 교체시기가 겹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정리하면 접는 개념을 도입한 갤럭시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아이폰이 둘 다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아이폰의 변화가 시작될 때 갤럭시가 아이폰에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폰의 수익이 높은 상황이었다. 갤럭시가 더 많이 팔아도 아이폰은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갤럭시는 다양한 모델을 판 반면 아이폰은 고가의 모델만 팔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 대수조차 뒤쳐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갤럭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스토리.

 

보편적으로 아는 것부터 정리해보자. 아이폰은 명품화가 되었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이 명품화의 뿌리를 알아보면 잡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기, 카메라, 인터넷, 음악감상, 게임 등을 합치다라는 혁신을 주도하여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전파했다. 아이폰이 최초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것은 아이폰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합치다라는 개념은 분명 혁신이었다. 이 혁신이야말로 아이폰의 명품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혁신을 한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가 애플에 남아 애플사의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인물에는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인물 자체가 명품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이야기가 명품을 만든다. 현대미술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작가나 작품에 스토리가 붙으면 가치가 폭등하는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이들의 스토리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윈도우를 만든 빌 게이츠가 다방면에서 기부와 봉사 또는 핵융합이나 환경 등을 말하는 것으로,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가 스페이스 X로 화성에 가겠다는 목표를 실천 하는 것으로, 회사의 생산품에 부가가치를 불어넣었다. 아이폰은 이런 방식으로 명품화가 되었다. 갤럭시가 아이폰과 대결하는 것을 현대미술로 비유하면, 이야기가 없는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가 있는 아름다운 작품과 가치 대결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을 안다면 이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대결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갤럭시가 성능 강화하고 수익다각화를 시도하고 광고 하고 깎아 내리고 단가를 낮춰보고 해도 아이폰과의 대결에 힘겨운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신앙 수준에 다다른 아이폰의 감성에 이성으로 맞서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간단한 결론이 나온다. 이제 갤럭시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접다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혁신에 가까워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접다라는 개념은 이미 있었다. 액정을 접다라는 개념이 새로울 뿐이지, 접다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있었다. 그러니 신선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워도 아이폰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접다로는 합치다를 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혁신은 아직 구현하기 어렵다. 그러니 일단 다른 방식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아이폰하면 순백이 떠오른다.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다. 다양한 색이 있지만 기본 색은 그렇다. 애플 제품 하나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애플 제품의 색이 순백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아름답고 경건하다. 순수하고 신성하다. 단정하고 품위가 있다.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 고지식하고 엄격하다. 완결성, 완전성, 무결성. 이 이미지에 고유한 AP IOS. 완벽하다. 명품의 조건이 성립한다. 아이폰은 보고 먼저 떠오르는 퍼스트컬러만 봐도 충분히 굉장하다.

 

잠시 과거로 가보자. 원시부족의 제사장부터 시작해 대부분 국가가 과거 1신분이 성직자고 2신분이 귀족이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유학자가 최고의 위치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유학자의 공통점은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최고 지위를 누렸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질서가 담긴 도덕을 가지고 민중을 선동과 세뇌와 강압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 세상에는 수많은 힘이 있는데 도덕은 그 힘의 방향성을 결정하여 인류 최고의 권위에 있는 힘이다. 이런 배경으로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낡았다. 이제 도덕은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 인간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현재 정상적인 사상가는 평지에서 선행 후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면 도덕이 인간의 위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유교는 진리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도덕은 이제 인류의 위가 아닌 인류의 곁에 있어야 한다.

 

반면 갤럭시는 삼성의 파랑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푸른 하늘과 청아한 파란 바다가 떠오르는 파랑이다. 그런데 이걸 갤럭시의 색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애플의 순백은 아이폰의 순백이란 느낌으로 이어지는데(또는 반대로도) 삼성의 파랑은 갤럭시의 파랑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없다. 갤럭시로 떠오르는 색이 없으니까 삼성의 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은 퍼스트컬러부터 차이가 났다. 파랑 자체만 봐도 순백에 비하면 약간 격이 떨어진다. 파랑이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이 사상들에는 도덕성이 부족하다. 백의 민족, 올바른 느낌, 백인의 상징, 웨딩 결혼 등. 아무리 생각해도 순백이 파랑을 넘기가 어렵다. 백인을 언급했다고 특정 인종의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단지 일부 국가에서 백인의 이미지가 좋다는 현상은 확실히 있다는 걸 말해두겠다. 현상은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갤럭시는 우선 퍼스트컬러부터 확실히 인류에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퍼스트컬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적이 없다. 갤럭시와 아이폰 둘 다 없었는데 퍼스트컬러에 대한 인식 차이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 있었다면 제 역할을 못했다.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에 대해 생각해보자. 별빛이 담긴 검푸른색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밤하늘이다. 밤하늘이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은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한다. 갤럭시와 비슷한 느낌의 색,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동심,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인류의 꿈, 그걸 위해 발전하는 과학, 과학 속에 담긴 미래,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거대한 크기와 거리.

 

밤하늘이란 아이의 꿈을 자극하는 색이라 생각한다. 별빛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색상. 활발하면서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가 눈을 반짝일법한 색상. 언제나 밝고 명랑하며 활기찬 아이의 색상. , 모험, 호기심, 설렘 등. 거기에는 인류의 꿈이 있다.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했던 인류는 비행기를 통해 하늘을 날았고, 우주로 가고 싶어했던 인류는 우주선을 통해 우주로 날아갔다. 그러나 하늘에 비하면 아직 우주는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다. 우주는 아직 대부분 인류의 꿈이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초등학교 바나나 사건 전후쯤에 아마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밤하늘 별을 보며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우주는 아이의 동심을 자극한다. 나는 아직도 어린왕자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떤 이는 동화기 때문에 읽기 쉬워 가치를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거지 읽기 난이도 같은 걸로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신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이상이라 본다.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종교는 도덕이고 과학은 기술이기에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종교와 과학은 방향성이 같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대체된다.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 내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면 과학은 지구를 포함한 전 우주와 있는지도 모르는 다차원의 세계까지 고려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영역 자체가 다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춰 과거와 미래로 대칭을 맞춰야 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완성된 순백과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 Pure white color VS Night sky color 나름 괜찮은 대결이 될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이란 이미지는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는 삼성과 어울리는 느낌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을 감각 있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색의 경우에는 편하게 깔끔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별이 들어가면 별의 위치, 크기, 색상, 여백 등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밤하늘 색 바탕에 작은 별들이 입체감을 주며 살아 숨쉬듯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별의 배치가 감각이 있다면, 그 배치가 고유하다면, 분명 그 밤하늘은 갤럭시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어렵지만 우수한 디자이너라면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각국의 국기에 별이 붙을 걸 보면 밤하늘을 좋아하는 국가들도 많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도 밤하늘은 좋은 퍼스트컬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밤하늘 색을 퍼스트컬러로 정하고 나면 노선도 확실하게 된다. 미래와 과학이다. 가령 스마트폰 판매금 몇퍼센트를 우주개발에 쓰인다고 홍보할 수도 있다. 연구개발을 할 때 우주관련 소재를 연구개발 한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연구개발 하는 거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가 써먹은 상당히 쓸모 있는 방식이다. 당연하다 여기는 것조차 거기에 부가가치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 영업이나 수리도 밤하늘 색을 포인트로 잡은 옷을 입거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서리를 달면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색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색을 메인 컬러나 악센트 컬러로 쓰기만 하면 된다. 별빛을 수놓은 밤하늘이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강해 개인적으로 액세서리가 어울리다 생각한다.

 

잠시 좀더 진지하게 말하겠다. 내게 있어 갤럭시는 평범한 스마트폰이었다. 갤럭시는 다른 스마트폰 브랜드와 같은 선상에 놓여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브랜드 자체가 부가가치를 만드는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성능이나 가성비를 비교하여 적당한 스마트폰을 썼었다. 아이폰은 IOS가 불편할 것 같아서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폰은 앞서 말한 이미지 때문에 언젠가 한번쯤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말하고 싶다. 예쁜 색, 유행하는 디자인, 빅데이터로 뽑아낸 수요, 그런 것은 일시적인 판매율에 영향을 줄 수 있어도 근본적인 브랜드 성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기존 고객의 수요에만 맞추기 때문에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빅데이터에 과도한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참고자료다.) A가 유행하여 A한 느낌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면 A의 유행이 끝날 때엔 다시 브랜드 성장을 해야 한다. 브랜드 성장이 없으면 지금 당장 잘 팔리더라도 다음에 잘 팔릴 거란 보장이 없다. 브랜드와 유행은 명확하게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브랜드는 줄기로 삼고 유행을 가지로 삼아야 한다. 브랜드를 성장시켜 변화가 없거나 부진하더라도 잘 팔리는 명품처럼 되어야 한다. 애초에 같은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게 만드는 것이 잘못되었다. 같은 천을 쓴다고 명품 브랜드랑 일반 브랜드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이제 갤럭시도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독보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대상.

 

대상은 나이와 자산으로 나눠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모델을 단순히 성능으로 나누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본다. 나이는 편의성의 차이로 소프트웨어적으로 접근하면 되므로 굳이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고, 자산은 가치판단의 차이로 하드웨어적으로 접근하기에 모델을 나눌 필요가 있다.

 

나이부터 해보자.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외면을 받는다는 그런 느낌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아저씨 폰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 보통 스마트폰은 초기앱이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 있다. 갤럭시는 써본 적이 없어서 검색으로 알아봤는데 비슷한 것 같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저것 다 넣으면 안 된다. 특히 기술에 자신이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다 넣는 함정에 빠진다. 필요하다고 다 넣으면 멋이 없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낡고 고지식해 보인다. 기성세대용으로 보인다. 또한 과도한 정보는 인간에게 피로함을 준다. 꼭 필요한 기능만 있으면 된다. 전화, 카메라, 인터넷, 앱 플랫폼, 스마트폰 설정. 스마트폰은 이것만 설치되어 있으면 된다. 구글을 생각해보자. 구글은 검색기능을 중앙에 띄어놓고 세계를 제패했다. 구글의 기술이 발전해도 그걸 유지했다. 이것이 다양한 기능이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음을 증명한다. 드라마의 예도 같다. PPL을 넣는 드라마와 넣지 않는 드라마 중에서 보통 후자가 인기가 좋다. 부가기능이 없는 구글과 PPL이 없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각 역할의 본질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꼭 필요한 것만 초기에 있는 것이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도 필요한 앱이 있으면 그냥 플랫폼 들어가서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초기앱이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 과도한 초기앱은 젊은 세대에 그다지 호감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 본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앱을 설치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커스터마이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런 감각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초기앱을 전부 없애면 필요하던 이들은 당황할 수 있다. 그러니 멋과 편의를 둘 다 잡으려면 초기설정에서 초기앱의 설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나이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경향 별로 A, B, C 같이 나눠서 비슷한 경향의 앱 설치 루트를 안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갤럭시는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쓰는 기능을 높은 순으로 정리한 뒤, 그것에 충실히 하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이런 나이에 대한 구분은 소프트웨어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기성세대도 프리미엄 폰을 바라고 있었다고. 굳이 기성세대 전용 폰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들지는 못할 거라 본다. 지금 당장 나이로 구분 짓기는 했지만 이건 보편적인 구분일 뿐이다. 실제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할 수 있고, 기성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런 나이 구분은 굳이 겉으로 표출할 필요가 없다. 안에서는 나이로 구분 짓되 밖에서는 편의성으로 구분 지으면 될 것이다. 기성세대도 젊은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본다. 그러니 굳이 기성세대에 맞출 필요가 없다.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선택 받기 위해서는 기본을 젊은 세대에 맞추고 필요한 이들을 따로 기성세대에 맞추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스마트폰으로 가되 기술발전으로 등장하는 추가기능은 언론이나 매뉴얼 등으로 홍보하는 것이 좋다 본다. 그것이 갤럭시의 명품화에도 이롭다. 절제의 미가 명품화를 도울 것이다.

 

자산으로 가보자. 모델의 구분을 단순한 성능으로 하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생각한다. 간단히 접근해보겠다. 매우 예쁘지만 잘 깨지는 A, 덜 예쁘지만 튼튼한 B. 요컨대 부자는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여기게끔 하고, 빈자는 스마트폰을 전자제품으로 여기게끔 하면 된다. 명품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허세와 과시인데, 스마트폰은 그러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자제품이어서 가격차이가 극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한쪽은 소모품, 한쪽은 전자제품으로 여기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밖에서는 미관의 차이로 가지만 안에서는 자산의 차이로 간다. 이렇게 내구도의 차이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명품은 대놓고 명품이라 말하는 것보다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쳐 명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좋다 본다. ,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쓰는 사람은 부자구나. 미를 명목으로 명품의 인지를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 부자는 돈을 많이 써야 하므로 이런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본다. 물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전자제품의 소모품화는 분명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고장 난 것을 회수하여 재활용한다는 것을 공표할 필요가 있다. 최신폰일 경우 고장 난 것을 반납시 얼마를 되돌려주거나 다른 폰을 구매할 때 가격을 깎아준다는 방식으로 가면 된다.

 

스마트폰도 명품화를 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프리미엄 폰을 따로 몇 기종 비싸게 판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폰은 명품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명품을 구매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굳이 튼튼할 필요는 없다. 다시 사면 되니까. 가격 차이가 발생하기 어렵다면 구매 횟수로 차이를 벌려야 한다. 소모용으로 만든 것은 내구성, 품질, 기간 전부 짧게 제공되나 외견과 성능을 좀 더 올리면 된다. 외견은 아름답지만 잘 깨지는 소재로 쓰고, 성능은 오버클럭으로 대응한다. 무기를 한계까지 날카롭게 갈면 내구도가 저하된다. 그런 것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아름답지만 깨지기 쉽다는 인식도 이해는 어렵지 않을 거라 본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정해두면 방식은 무궁무진할거라 본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소모품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스마트폰 정보를 인터넷에 전송해둬야 새로운 폰을 구매할 때 바로 이어서 쓸 수 있다.

 

덜 예쁘지만 튼튼한 폰은 그냥 일반 폰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주선에 쓰이는 소재를 써도 가격이 맞는다면, 쓰고 나서 그에 관련된 홍보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는 우주인이 사용하는 것도 홍보가 될 것이다. 컨셉과 대상을 명확하게 정해두면 방향이 결정되어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방법도 계속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명품화는 의류 브랜드를 참고하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상품을 명품화하여 판매했다.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재료의 가격이다. 전자업계나 자동차업계도 명품화가 된 곳이 있지만, 보통 그런 곳은 재료가 비싸다. 반면 의류업계는 상대적으로 재료가 저렴하다. 현대미술과 같이 재료의 가격이 낮아도 명품화가 되고 있는 것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거의 브랜드 가치만으로 명품을 유지한다. 같은 명품이라도 다 같은 방식이 아니다.

 

 

하드웨어.

 

스마트폰의 혁신은 대부분 배터리에서 좌초된다. 무게도 모양도 배터리의 한계로 인해 바꾸기가 어렵다. 소재도 효율도 지금 당장은 정해져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면 실상 앞으로도 스마트폰은 하드웨어적 혁신이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아는 기술이 많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만약 다른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걸 조합하여 새로운 혁신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 배터리 기술 발전이 계속 된다 가정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 몇 가지 떠올려보겠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면 분리라는 형태로 혁신을 할 수 있다 본다. 지금 당장 이용자가 쓰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분리시키는 것이다. 액정과 나머지 하드웨어를 분리하여 무선으로 신호를 연결한다. 이러면 액정과 무선송수신기가 있으면 된다. 카메라는 액정 자체에 내장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배터리는 혁신을 통해 가볍게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충전한다. 액정은 들고 다니고 하드웨어는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는다. 하드웨어 분리가 가능하면 스마트폰의 기존 성능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 합치다 다음에 접다 다음에 분리하다. 분명 그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액정을 접어서 카드처럼 들고 다녀도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액정 분리형 스마트폰은 화면과 컨트롤러를 분리한 것이기에 무선송수신이 가능한 컴퓨터와도 연동이 가능할 것이다.

 

배터리 혁신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존 기술의 발전. 둘째, 생체 에너지. 셋째, 무선 충전의 발전. 첫째는 그냥 기존 배터리가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소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를 넘었다. 둘째는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굳이 충전하지 않고 액정을 손에 들고 다니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셋째는 무선 충전이 발전하면 된다. 점점 장거리 무선 충전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해지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무거울 필요가 없으므로 분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배터리 혁신이 가능하면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가벼운 스마트폰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나 굳이 분리하는 까닭은 더 얇고, 더 가벼운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리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얇은 액정과 수신기를 더한 두께 정도의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얇아서 불편할 것 같았는데, 직접 통장 들고 만지작거려본 결과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배터리 혁신이 되지 않는 이상 무게 측면에서 분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배터리 문제가 해결된다면 분리는 분명 새로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기술에 의존하는 혁신제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성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본다.

 

배터리 혁신이 되면 날다도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가볍기 때문에 공중에 띄우기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드론 방식보다는 전자석 공중부양 같이 다른 방식으로 띄우는 것이 미관에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 외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다. 안경형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없다. 홀로그래피로 입체영상을 띄우는 건 유명하니 넘어가겠다. 홀로그래피가 가능해지면 홀로그램의 3차원을 3차원 프린터로 바로 출력할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카멜레온이나 투명 소재를 생각해봤는데 그리 매력적이지는 못하나 재미는 있을 것 같다. 공공 자전거처럼 공공 스마트폰 같은 것이 있어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 모듈만 들고 다니는 것이 떠올랐으나 그다지 쓸만할 것 같지는 않다. 형상기억합금은 이미 필요한 곳에 적용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위성통신 기능은 이미 있을 것이다. 우월감에 초점을 맞춰 통신장악을 위한 통신영역을 통해 통신방해기능을 떠올려봤으나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병렬연결 방식이 떠올랐다. 소모임 같은 곳에서 스마트폰을 모아 하나의 어떤 영상이나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노는 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화질도 별로 좋지 않고 연결도 불안정하며 소프트웨어적으로 인터넷 연결이 될 것 같아 별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괜찮다. 어떤 걸 합심하여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액정 분리가 가능해진다면 자르거나 붙이는 것이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전기충격 기능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합치다라는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므로 거기에 전기충격 기능이 하나 더해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면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위험해서 조심스럽다. 촉각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만약 스마트폰 내부에서 어떤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신호를 촉각을 통해 뇌로 전달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을 들고 있기만 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킹을 생각해보았다. 보안에 예민해지는 만큼 블루스나핑 외의 모든 형태의 무선 재킹 방지대책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일부 모델은 가능하면 천문사진 촬영이 되도 재미있을 것이다. 뇌파 수신기능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대로 바로 메모되는 기능이 되면 좋을 것이다. 피를 넣어 유전자를 기억하게끔 할 수 있으면 완전한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드웨어는 발상의 제약이 많다. 바 형태에 맞춰진 소프트웨어도 그렇고 딱딱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자.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넣다, 빼다, 돌리다, 던지다, 밀다, 당기다, 사다, 팔다, 빌리다, 굵다, 얇다, 쉽다, 어렵다, 가깝다, 멀다, 높다, 낮다, 서다, 앉다, 기다, 뒤집다, 늘다, 줄다, 많다, 적다, 젊다, 늙다, 빠르다, 느리다, 가볍다, 무겁다, 켠다, 끈다, 맞다, 피하다, 추다, 누르다, 말다, 만지다, 비비다, 맡다, 쏘다, 자르다, 쪼개다, 같다, 틀리다, 다르다, 만들다, 부수다, 뭉개다, 부러지다, 막다, 참다, 버티다, 조용하다, 시끄럽다, 깨다, 자다, 꾸다, 개다, 일어나다, 깨우다, 원하다, 애타다, 아프다, 다치다, 터지다, 채우다, 비우다, 푸다, 떠나다, 남다, 비치다, 튕기다, 키우다, 물다, 보다, 하다, 핥다, 흘리다, 달리다, 느끼다, 마시다, 싸다, 놀다, 빨다, 뽑다, 듣다, 담다, 쏟다, 열다, 닫다, 덥다, 피다, 파다, 재다, 세다, 갈다, 섞다, 꿰매다, 뱉다, 묶다, 꼬다, 읽는다, 적는다, 닿다, 찢다, 베다, 매다, 흔든다, 더하다, 나누다, 잠그다, 풀다, 조이다, 벌리다, 심다, 고르다, 뜨겁다, 차다, 바꾸다, 새기다, 베끼다, 낳다, 뚫다, 찾다, 잃다, 안다, 대다, 굴리다, 찌르다, 휘두르다, 붙다, 때다, 옳다, 그르다, 튀기다, 찌다, 굽다, 볶다, 말리다, 비튼다, 아끼다, 소홀하다, 맡기다, 올리다, 내리다, 따르다, 걸치다, 애쓰다, 새롭다, 낡다, 예쁘다, 더럽다, 맑다, 귀엽다, 흉하다, 홀리다, 내치다, 털다, 잡다, 놓다, 바라다, 숨기다, 넘기다, 후비다, 훔치다, 체하다, 알다, 모르다, 고맙다, 미안하다, 맞추다, 걸리다, 늘리다, 줄이다, 다루다, 친하다, 젖히다, 바르다, 떼다, 붙이다, 부드럽다, 거칠다, 말랑하다, 사납다, 비웃다, 무섭다, 싸우다, 먹다, 생각하다, 기억하다, 부르다, 귀하다, 천하다, 배고프다, 배부르다, 취하다, 뻗대다, 불다, 쏠리다, 겹치다, 데었다, 묻다, 잔다, 주다, 뺐다, 미루다, 내밀다, 오므리다, 띄우다, 떨구다, 받다, 버리다, 휘다, 펴다, 가다, 오다, 멈추다, 웃다, 울다, 화내다, 속이다, 되돌리다, 데우다, 누리다, 찍다, 모으다, 뿌리다, 식다, 얼다, 녹다, 떨다, 살다, 죽다, 싣다, 달다, 맵다, 짜다, 쓰다, 시다, 떫다, 싱겁다, 뭉치다, 흩어지다, 졸이다, 입히다, 벗기다, 좋다, 나쁘다, 젖다, 놀리다, 뛰다, 박다, 그리다, 지우다, 찐다, 뺀다, 날다, 잇다, 끊다, 스며들다, 치다, 튄다, 부푼다, 타다, 썩다, 씻다, 씌우다, 닦다, 찌른다, 끼우다, 숨쉬다, 쭈그리다 등 다각도로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어렵다.

 

말다는 액정말기, 씻다나 젖다는 방수기능, 떨다는 진동기능, 막다는 보안, 벗기다는 케이스를 주기적으로 벗겨서 깨끗한 표면을 유지하는 것, 사다와 팔다는 구매와 판매, 날다는 액정 날기, 겹치다는 액정필름, 놀다는 게임, 찾다는 GPS, 잃다는 원격잠금, 푼다는 계산기, 생각하다는 인공지능, 부르다는 음성인식, 듣다는 음성신호, 보다와 찍다는 카메라, 띄우다는 홀로그래피, 닿다는 촉각 감지, 만지다와 비비다는 지문인식, 밀다는 슬라이드폰, 맡다는 스마트폰 후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냄새인지, 아프다는 터치입력 강도에 따라 통각감지, 핥다다 빨다는 스마트폰 미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맛인지, 쏘다는 전기충격, 쓰다와 그리다는 필기입력. 이중에서 오감을 뇌가 인지하게 하거나 구현하는 것이 괜찮아 보인다. 감각인지 및 구현 폰이다.

 

합치다, 접다, 분리하다, 날다 그리고 느끼다. 이 감각을 느끼다가 가능해지면 확실히 합치다를 넘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앱 플랫폼의 존재로 하드웨어 제조사에서 주력으로 갈 필요는 없는 분야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만 쓰겠다.

 

인공비서. 인공지능이 평소의 패턴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데이터를 쌓은 뒤에,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패턴 또는 다른 답을 내놓으면 주인임을 의심한다. 평소와 다른데 A가 맞나요? 그것으로 인공지능은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인간성으로 넘어간다. 의심이야말로 지능 높은 동물인 인간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인식이 특별한 관계를 낳고, 특별한 관계가 특별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스마트폰을 특별하게 여기는 기제가 될 것이다.

 

자아에 대해 잠시 말하겠다. 인간은 유전자란 알고리즘과 내외부의 입출력을 통해 생각(연산)하고 행동하고, 그걸 통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반복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최초의 알고리즘이 의식을 담당하고 쌓인 기억이 무의식을 담당한다. 의식은 알고리즘에 연산이 있냐 없냐에 따라 생각의 유무가 달라지고, 무의식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 생각의 유무에 따라 의지가 달라진다. 의지에 따라 생각의 다양성이 달라진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여 각자 다른 생각이 나타나고, 전체주의에서는 집단의 의지를 중시하여 비슷한 생각이 나타난다. 여기서 통상 내외부 입출력인 육체와 환경이 없다면 인간 수준의 자아는 형성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처럼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자체 생성할 수 있다면 어쩌면 비슷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가상화. 요즘 메타버스나 버튜얼 유튜버가 유행하고 있는 것만큼 가상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에 맞춰 어떤 사물을 카메라로 스캔하여 가상의 비슷한 물건과 매칭 후 화면에 띄울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가령 공을 스캔하면 가상의 공이 스마트폰에 뜨고, 그걸 문자나 영상 등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된다. 단순하지만 포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현실의 물건을 가상의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스마트폰이 현실과 가상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차원전송기가 된다. 그걸로 보다 특별한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폰에 집어넣은 사물에 대한 상세정보지원을 하면 아동교육이나 언어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치기록.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에 위치기록이 되어 지도에 촬영한 위치가 뜨면 좋을 것 같다. 이것도 포장하면 재미있을 듯하다. 시공간을 기록하세요. 같이 말이다.

 

녹음. 법적 분쟁에 쓸 수 있도록 전문화된 녹음기능이 있으면 선호될 것이라 생각한다. 타사의 스마트폰보다 갤럭시의 녹음이 법적 증거로써 더 효력을 발휘한다면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변조할 수 없는 특별한 포맷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 각국의 법조계의 도움을 받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외 다양한 법적 증거에 최적화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견적. 어떤 목적에 필요한 금액을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예컨대 게임용 컴퓨터를 물어보면 자동으로 부품 검색을 통해 평균 가격을 더해 최소와 평균과 최대 금액이 출력된다. 특정 지역 여행을 물어보면 그에 필요한 금액이 출력된다. 구체적인 금액은 직접 조사를 해야 하겠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필요한 일반적인 금액을 알기에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완전삭제 또는 복구. 삭제한 파일도 복원되기에 그걸 이용해 사진을 유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완전삭제기능은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복구기능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밤하늘에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면 좋다. 방식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도 좋다. 중요한 점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제만 주고 알아서 만들게 해야 한다. 아니면 밤하늘과 연관된 작품과 연계하는 것도 좋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밤하늘의 이미지를 전부 장악하겠다는 감각으로 가면 된다. 순백하면 아이폰이 떠올랐던 것처럼 밤하늘 하면 갤럭시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시장의 수요 장악만이 장악이 아니다. 이미지 장악 또한 장악이다. 시장 장악은 당장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으나 이미지 장악은 오랫동안 수익을 보장할 확률이 높다. 미래나 과학 같은 것은 장악하기 어려워도 밤하늘 색 하나는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한다. 물론 가능하면 다 장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인데, 체급이 큰 브랜드는 어떤 특정한 색이나 이미지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놓고 제품을 등장시키는 PPL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본다. 대놓고 홍보하는 것은 거부감을 준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무의식에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에서 밤하늘색을 자주 사용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인지시킨 다음에 다양한 곳에서 밤하늘과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스마트폰이 이어지는 연출을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갤럭시하면 밤하늘이 떠오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역할.

 

대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역할을 얻는 것이 좋다. 구글이 최상의 검색능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검색의 역할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밤하늘 이미지를 장악하면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학적인 미래형 스마트폰의 역할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행.

 

옷의 유행 주기가 30년 정도 되듯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유행을 젊은 세대는 신선하게 느끼게 된다. 30년전 인간이 즐기던 것을 세련되게 바꾸기만 해도 충분히 통한다. 브랜드는 줄기고 유행은 가지. 이걸 명확하게 해둬야 유행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브랜드만 치중하면 가지가 죽고, 유행에만 치중하면 줄기가 죽는다. 유행에 따라 색이나 컨셉을 다양하게 내놓아도 브랜드는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유행을 아예 무시하면 시장에 외면 받을 가능성이 있다.

 

 

홍보.

 

아이폰과 라이벌이라는 것은 좋으나 유머나 위트가 없는 깎아 내림은 단순한 뒷담이나 괴롭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디스하고자 하면 반드시 유머나 위트를 넣어야 한다. 직접 또는 의류브랜드와 협업하여 밤하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사리를 만든 뒤, 그걸 갤럭시 관계자가 입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스마트폰과 같이 파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홍보에 쓰이는 만큼 이걸로 수익을 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밤하늘이 갤럭시의 대표색상이 되면 밤하늘 액세서리를 쓰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갤럭시를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름이 아닌 색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효과가 있다.

 

 

노조.

 

사실 노조랑 갤럭시는 큰 관계가 없다. 심각한 노동착취가 아닌 이상 고객의 수요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는 거시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방법이지, 미시적인 이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잠시 노조에 대한 의견을 내보자. 최근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높은 인상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임금협상에만 초점을 맞추자. 이건 기업이 기여도를 분석해서 적절하면 받아드리고 아니라면 거부하면 되는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어째서 노조의 요구는 매번 모든 직원이 동일한 임금 인상인가? 부서별로 기여도가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기여도가 다를 수 있다. 모든 노동자의 동등한 임금인상요구는 모든 노동자를 등에 업고 회사와 싸워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마인드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건 사회주의적 투쟁이다.  자본주의의 협상이라면 노조와 회사가 같이 토론하여 특정 부서의 임금을 높거나 낮게 인상하거나 동결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는 게 타당하지 않는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전직원 포상금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여도에 따라 임금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삼성이 처음으로 임금협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구식의 방식으로 임금협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임금을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노조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노사관계의 임금협상이 임금체계의 토론으로 나아가면 긍정적일 거라 본다.

 

사실 이런 대기업 노동자 협상은 대기업 직종에는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에는 영향을 주기 어렵다. 진정 모든 경제에 속한 인구의 인권을 위한다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국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강력히 주장하겠다. 대기업 노조가 모든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더 민주주의적이다. 지역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에게 가깝다고 보는가? 지역 대표는 부동산관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인데 분야 대표는 그나마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업계가 좁을수록 그럴 확률은 높을 것이다.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일단 지역 대표와 분야 대표 모두 입법권을 쥐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겠다. 이게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선동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동정치는 진정한 정치가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폰은 아마 갤럭시나 아이폰이 될 것 같다. 카메라가 툭 튀어나오지 않고 전면 카메라 숨김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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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운동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에 찬사를 보냅니다. 기자가 수상했다고 하더군요. . 생각해보면 기자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황당한 거였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도덕은 그냥 과거 종교가 만든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도덕은 어떤 과학적 증명도 되지 않았어요. 그냥 그 당시 필요한 규칙일 뿐입니다. 과거에 필요했던 규칙 모든 것이 현재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기초를 인식하지 못하면 이 기초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행동원리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나와버려요. 어떤 옳거나 그르다는 감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미신이나 토속신앙부터 오래된 종교나 사이비 종교까지 전부 비과학적인 것은 거의 다 거짓일 것입니다. 전능을 주장하는 이들이 전지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거짓일수밖에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솔직히 한국은 문제점이 많죠. 내가 봐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국가가 출산율이 저하하고 경제 양극화로 경쟁력도 악화하고 주입식 문제풀이로 문제해결능력도 저하해서 뭐 지금 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종교, 민족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 자유방임주의, 금전만능주의 같은 걸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자본가 루트를 타고, 경쟁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할만한 자본가를 양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봅니다. 지금 경쟁을 통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시를 보는 것처럼 경쟁을 통해 자본가로 성공하는 길을 일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정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능력의 상품화와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모두 갖추면 자본가 루트가 아니더라도 자본가 마인드로 기업에 협력하여 성장을 돕고 거기에 부가가치를 받은 후 자본이 모이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업유연화가 나타나 상품경쟁력이 높아져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우수한 기업들이 늘어나겠죠. 세계시장에 선택되는, 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랍니다.

 

정치를 보면 참. 슬프네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부당한 사리사욕 유무가 검증기준이라는 것이 절망적일 정도네요. 빨리 선동정치가 끝나야 될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주장하겠습니다.

 

내게 있어 자유주의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지요. 민주주의가 사회를 구성하기에 집단적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이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자본이 있었다면 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었다면 지역 영상 플랫폼 같은 걸로 창업 시도를 해봤을 텐데 아쉽군요. 개인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한 화면에 주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꽤 오래 살아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대체로 가던 길만 가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난 구역은 잘 모르죠. 유튜브가 한 화면에 취향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오는 것처럼 지역에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와서 필요한 서비스를 편하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풀이를 중시해서 시험을 잘 보면 능력이 높고 못 보면 낮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도 문제풀이능력이 낮으면 아무래도 선호되기가 쉽지 않네요.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업로드 속도가 저하될 것 같네요. 업로드 시기는 모르겠는데 다음 글은 문제해결능력 또는 역할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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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9) 2021/10/01 AM 07:32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열등주의다.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므로 여성주의(페미니즘) 찬반과 별개로 선입견 없이 바라보길 바라겠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 알기 쉽게 여성주의로 부르도록 하겠다. 한국 여성주의는 조선의 종교였던 유교와 서양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의 결합으로 여성열등주의가 되었다. 유교부터 알아보자. 유교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여 사회진출을 방해하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유교는 여성열등주의다. 여성주의를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부르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불렀다. 이 주관적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하다. 여성주의 자체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같이 다른 사상에서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손해를 보면 여성차별이라 말했다. 이러니 여성주의자마다 군복무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주관적으로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이익이면 남성혐오가 여성인권이 되고 그걸 막는 것이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어째서 여성주의자가 남성혐오를 옹호하는지 알겠는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된다. ,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와 여성주의의 여성인권을 합쳐보자. 유교에 세뇌된 여성은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만족시키는 걸 이익으로 여기기에 그걸 여성인권이라 말하여 여성을 열등하게 세뇌한 뒤에,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위해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사회에 강요하게 된다. 이 강요를 사회는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의지 약화와 성적 수치심 강화는 기성세대의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약화한 걸 여성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걸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세뇌된 노예가 자발적으로 주인의 가르침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꼴을 본 거나 다름이 없다. 끔찍하다. 이런 이유로 여성주의는 사회에 쉽게 흡수되었다. 여성주의자와 기성세대가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열등하니 배려해달라 강요했다.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배려하는 것에 동의했고,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배려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대별로 유교의 세뇌 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여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성별 평등으로 자라난 세대의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을 열등하다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일부 여성이 장애인 혜택과 같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로 받는 혜택을 여성의 이익으로 여겨 그 배려를 여성인권이라 말하게 되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남성은 그 배려를 이해하지 못해 여성우월주의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에 따라 그 남성은 여성우월주의 반대라며 반발하였다. 그 반발을 보고 일부 여성은 이런 장애인 혜택과도 같은 배려야말로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더욱 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다음 혜택 받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나타났다. 정조관념을 주입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해진 여성은 성관계를 터부시하고 성적 문화나 창작물도 검열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의 정조조차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마호메트를 신성시하라는 세뇌를 당한 이슬람이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마호메트 묘사에 몹시 불편해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성 상품화는 무시하고 여성 성 상품화에만 예민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어 강하게 세뇌된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며 이성애의 욕구를 해소했다.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 수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 수가 줄어들었다. 국가의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1인 가구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 본인이나 타인의 경험으로 볼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정조를 굳게 지키며 살다가 정말 잘생긴 남성과만 관계를 맺자, 그 여성과 관계를 맺어야 할 다수의 남성이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한 욕구를 충족 못한 남성은 포르노나 성매매도 금지 당해 이걸 막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은 여성대로 열등하게 세뇌 당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여성이 불행하다라고 세뇌 당하면 어떤 여성은 실제와 관계 없이 주관적으로 불행하다 여기게 된다. 그 불행함을 남성에게 쏟아내며 더욱더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단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현재 한국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인권이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라면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인권은 대부분 헛것이 된다. 그에 따라 반론을 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여성주의자는 유교의 세뇌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말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유교의 세뇌가 바로 연령차별이다. 장유유서를 통해 연상과 연하는 차별 되었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하의 반말을 들으면 몹시 불편해진다. 건방지고 예의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는 여성주의자가 성적 창작물을 불편해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세뇌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이 벗어났다 해도 다른 이들이 벗어났다 단언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인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유교의 세뇌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여자는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성적 수치심(성 과민이나 창작물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이 강하다는 감각이 있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강한 의지나 수치심이 적길 바라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로지 유교의 세뇌 때문이다. 원시 부족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건 철저하게 남성의 의도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대다수 한국인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유교에 세뇌되어있다는 것과, 여성주의자가 유교에 세뇌되어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다는 논리에 대한 반론은 불가능하다. 연령차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인간이 여성열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여성특혜고 둘째는 여성 성 과민이다.

 

첫째, 여성특혜

 

여성가족부, 여성할당제, 여성가산점, 여성창업지원, 여성대학존재, 여성징병의무 없음, 여성폭력방지법, 성매매여성 지원, 여성전용주거, 여성주차장 등 여성 전용 서비스는 전부 여성열등주의를 근거로 한다. 보자, 장애인가족부, 장애인할당제, 장애인가산점, 장애인창업지원, 장애인대학, 장애인징병의무 없음, 장애인폭력방지법, 성매매장애인여성 지원, 장애인전용주거, 장애인주차장 등 여성에 장애인을 넣으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지금 일부 여성은 장애인 혜택 받으면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는 인간 절반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긴 이들은 당연하니까 굳이 반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은 열등하지 않은데도 혜택을 받으니 장애인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꿔서 해보자.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지적 장애인 여성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은 장애인 수준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은 간단히 말해 약자인 여성의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일컫는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열등하니까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가령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여성에도 해야 한다는 게 성인지감수성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설령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의 이익이 되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을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해외에서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법과 큰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주의는 그걸 억지로 법과 연결 지어 여성의 열등함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징병의무가 없는 것은 간단한 논지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징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이 이런 논리가 나온다. 최근 여성징병에 대한 찬반조사 결과 40대 이상의 남성만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교에 세뇌된 농도가 높을수록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해진다. 여성주의가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여성징병에 회의적이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성징병에 찬성하게 되어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대부분 여성징병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의 가족폭력 비율을 보고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피해를 입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성이 비율이 높지만 성인 남녀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남성이 폭력적이고 여성이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의 차이로 인해 비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만약 여성이 힘이 더 쌨다면 남성이 폭력피해를 받는 비율이 높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여성폭력방지법을 추진한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가족폭력방지법이 차라리 낫다.

 

 

둘째, 여성 성 과민

 

여성 성 과민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 당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정조관념은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한 여성이다. 정조관념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소유물화하기 위해 만든 악의적인 관념이다.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주입하여 다른 남성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혼 전에는 관계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결혼 후에 과부가 되더라도 재가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을 앗아간 무거운 족쇄다. 그런데 이걸 유교적 여성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결혼 전 미성년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므로 최대한 야한 것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년 여성조차 야한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유교적 여성주의자에게 세뇌된 새로운 여성주의자들도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치마를 입는 여성에게 득달적으로 다가가 잘못되었다고 비난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적 대상화라던가 성적 착취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걸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나! 남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적 대상화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되려 이상하다. 이성이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야 사랑하고 출산하고 그럴 거 아닌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일부를 성적 대상화하였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평등해진 지금은 그저 서로의 매력을 사랑하는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라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등하다면 성적 대상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여성의 인권을 운운하는 이들이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부정하는가? 여성도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자유롭게 야한 옷을 입을 수 있다. 이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건 그냥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세뇌되어 불편한 감각이 발생하여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흔들다리 효과가 대표적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사랑인지도 분간 못해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불편해진 감각을 성적 대상화니 뭐니 말하며 가져다 붙인 것이 여성 성 과민의 본질이다. 이런 세뇌를 당한 여성은 성에 몹시 취약해져 남성 구조원이나 경찰관의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니 구조하는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정상인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멀쩡한 여성을 장애인으로 만든 다음 배려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은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나. 남성은 여성 알몸 본다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 여성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직접 보는 것 자체는 보통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알몸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 차이가 잘못되었음을 모르는가? 본다는 행위에 육체적인 체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니지 않나. 이건 오로지 의지와 지성의 영역이다. 세뇌 당하지 않았다면 남녀 모두 인간의 알몸을 본다고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

 

성 과민이 이성적이었다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할 수가 없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하는 것은 남성의 정조가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정조관념이 불편함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서양에서도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해한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받아 정조관념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했던가? 이성으로 만든 주장이 아니라 감성으로 불편해진 감각에 이유를 갖다 붙였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실제 여성의 정조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등장하는 가상 여성의 정조까지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창작물에 나오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있거나 노출이 되면 검열을 통해 가린다. 이것이 보통 2D인권부여라고 하는데, 2D남성에 대한 인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2D여성인권부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노출은 괜찮은데 여성의 노출은 안 되는가? 그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물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은 연하의 반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나 마호메트 세부묘사에 불편해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공통점은 세뇌되어 창작물에서조차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의 춘화를 보고 조선시대보다 한국이 더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유교의 탓이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면 해석이 된다. 과거 조선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춘화가 있더라도 과연 불편하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한국은 여성의 인권이 높다. 발언권이 많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나타나는 불편함을 대놓고 호소하며 마구잡이로 야한 것을 검열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주의의 본질이 더해진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주관적으로 불편한 것이 그들에게 차별과 혐오였기에 여성차별과 혐오를 막기 위해 창작물 검열에 힘을 쓴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창작물까지 간섭하며 검열하는 모습. 이 얼마나 웃기는 꼴인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되도 않는 검열은 자유와 여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수다.

 

이제는 남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기능을 명확하게 알고 그 기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중시했으면 지금 성인들도 성교육 지식이 낮다 하나? 아직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면 학부모가 반발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있는 건가. 이러니까 터무니 없는 창작물 검열을 사회가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야한 그림을 까맣게 검열하는 걸 보면 속이 터진다. 이외 실제 여성인권과 거리가 먼 용어나 형태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세뇌의 결과물이다. 그게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했기 때문에 용어나 형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불편하다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 내에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잘못된 법에 대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입법부에 전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 사법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제정하면 그에 대한 견제작용이 필요하다 주장하겠다. 성별에 차등을 둬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악법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같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누가 되었건 강요가 없는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인지, 유교 국가인지, 여성주의 국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정해 판결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의 본질은 인류열등주의다. 유교는 상명하복 사상으로 윗사람은 우월하고 아랫사람은 열등하다 가르쳤다. 윗사람은 조상과 연상이 있고 아랫사람은 연하와 여성과 아동이 있다. 신분으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상명하복을 도덕으로 만들어 열등한 아랫사람은 우월한 윗사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이 사상이야말로 동북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상명하복과 민주주의는 수직과 수평으로 전혀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열등한 인간은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차이점은 기독교는 외향적이나 불교는 내향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해외를 떠돌며 선교하러 다니고 불교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쌓는다. 뭐 그거 말고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열등하단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주장하며 인간이 열등하다 말하는 거나, 인간의 선천적인 육식성이나 폭력성을 죄로 말하는 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종교가 그 원조다. 괜히 새로운 용어 써가며 새로운 것마냥 대하지 말고 그냥 종교식 세뇌라 말하면 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에 세뇌되지 않도록 온전한 자아를 갖추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뇌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걸 당할 우려로 과민반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열등하게 만들면 이용하기가 쉽다. 여성도 같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의지를 약하게 하여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것처럼, 부모나 교사가 아동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세뇌하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다뤘던 것이다. 그거에 세뇌되어 열등한 걸 여성의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있다는 게 참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체력이나 근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보편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은 체력이나 근력에 있는 게 아니다. 의지와 지성에 있다. 힘만 따지면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이 우열의 기준을 힘으로 하는 게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의지와 지성은 성별로 우열이 나눠지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동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처사가 된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상 따위가 없다. 그냥 주관적으로 이익이면 옳고 손해면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러니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따위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하면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로 바꿔보면 안다. 남성주의를 남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남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남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라 가정해보자. 미국 남성의 손익과 이슬람 남성의 손익은 다를 것이다. 미국 남성은 보통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주관적인 이익이 아닐 것이다. 하나 이슬람 남성은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때 남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남성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슬람 남성이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남성인권이 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사상인지 알겠는가? 이슬람적 남성주의자는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남성인권이라 주장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남성차별이나 혐오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자가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화를 내는 것도 같다. 정말 천박한 사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약 이슬람에 여성인권이 올라 여성주의가 퍼지면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히잡은 여성인권이라고요! 실제 한국이 그러고 있지 않나. 꾸미지 않는 게 여성 인권이라고요! 그러면서 아나운서한테 치마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자가 맨스플레인이나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바꾸고 싶다면 여성이 노력을 해서 바꿔야 하는데, 여성주의가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라고 말을 하면 차별이나 혐오라 되받아 치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할당제나 가산점을 요구하는 게 여성주의다. 이는 비만이어서 사람에게 사랑 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 말하면 차별이나 혐오로 되받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달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가 있다. 자유방임주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유로움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그냥 지 감각으로 자유로우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방종한 행동을 정당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조잡하다. 금전만능주의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이 있고, 패권을 무력으로 쥐고 있음에도, 독재자가 권력으로 뭐든지 하고 있음에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돈으로 뭐든지 하는 걸 합리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지성이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 마음에 불편하면 차별과 혐오라 인식한다. 이러니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이 지 심기가 불편하다고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천박하다. 천박하다의 뜻은 뒤섞여서 바르지 못하다. 또는, 순수하지 못하다. 아니면 얕고 얇다. 라는 뜻이다. 이 세 사상은 지극히 조잡하고 지성이 없으며 천박하다. 이 세 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자본과 여성을 천박하게 만든다. 자유방임주의는 자유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금전만능주의는 자본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여성주의는 여성인권을 천박하게 만든다. 이런 사상은 자유와 자본과 여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만 되므로 부디 가지지 않길 바라겠다. 그 외에는 중우정치가 있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위해 페미니즘적 첫 저서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었다. 메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당대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에 대해 여성의 본성 탓이 아니라 교육의 탓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 주장했다. 여성을 위해 여성이 충분한 지성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사람도 기독교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당대 환경이나 교육으로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나 자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황했다. 이미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천박한 여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인가? 당대 유럽이 환경이나 교육으로 인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놔두고 멋대로 한국적 여성주의를 추구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이 사람을 여성주의자라 불렀는가? 여성주의는 단순히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지 않나. 이 사람은 그냥 자유주의자다. 인간의 권리 옹호를 먼저 작성한 자유주의자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지, 실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부른 적도 없다. 여성주의의 시작은 1837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애초에 여성주의 자체가 없었다. 이런 고상한 자유주의자에게 천박한 여성주의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면 부디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라겠다.

 

 

한국 여성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은 여성주의자에게 열등하게 세뇌되어 불행하다. 생각해보자. 네 주관적인 이익은 전부 옳고 주관적인 손해는 전부 그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은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겠는가? 정당한 손해에 차별이나 혐오라 느끼고 부당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의지약화와 성적수치심 강화까지 더해지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차별과 혐오로 느끼게 된다. 이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나. 여성주의자는 한국 여성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남성이라던가 국가라던가 출산율이라던가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하겠다. 이건 여성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별 쓸데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마음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이 차별과 혐오로 가득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세뇌되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아, 돌아버리겠구나. 하루 종일 너는 불행하다고 세뇌 당한 사람이 행복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뭐든지 감사하라나 힘든 형편을 지닌 사람보다 낫다거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온전한 자유의지! 현명한 지성! 객관적인 시각! 통찰력! 사고력! 따위를 길러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은 어떠한가? 보호를 명목으로 여성의 의지를 꺾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옷차림의 자유를 막는다. 외모 꾸밈의 자유를 막는다. 인간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성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막는다. 여성 자유 억압이 일상이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정하고 행하면서 나온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걸 싹 다 막았으니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창작물 따위 여성인권이랑 아무 관련 없지 않나, 여성 아나운서가 치마를 입거나 여성 아이돌이 야한 옷을 입었다고 여성인권이 낮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왜 그거에 불편하도록 세뇌한 건가.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불행한 것처럼 유교적 여성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져서 불행하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이 불행하기에 불행하다. 원래 남녀는 그런 관계다. 남성이 불행하면 여성도 불행하고 여성이 불행하면 남성도 불행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적은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을 바꿔도 결과는 같다. 만약 남성이 성적 억압을 받았다면 여성이 성욕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었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로 불행한 것은 철저하게 여성이 열등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여성이 열등함에서 벗어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출산율 추락에 대해 알아보자.

 

출산율 추락은 이성애 결핍 따위로 인해 연애와 출산에 대한 욕구의 순위가 낮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본래 유교사상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애 결핍이 발생해 출산율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강요로 출산율을 올려 유지했다. 집안 어른의 강요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강요로 한 결혼은 자발적이지 못하기에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해 아이가 크고 나서 이혼하는 황혼이혼을 하곤 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 황혼이혼을 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황혼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1위로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성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에 대한 성에 대한 터부는 여전하여 다수의 미성년이 제대로 된 이성애를 배우지 못하며 자라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 순위가 낮아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 여기서 여성주의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의 주관적인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인권이 되었다. 보다 더 미성년에게 성적 억압을 강요한다. 보다 더 성적 문화를 검열하고 억압한다. 유교의 성 터부시나 성적 억압에 여성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리해보자. 처음부터 한국은 유교로 인해 자유로울수록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최근에 급격하게 떨어진 원인은 그 유교를 올바르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중용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유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부동산 따위가 원인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결코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그거 하나면 이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다. 다수가 애정결핍된 상태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보통 정말 사랑하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정말 아이를 낳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낳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취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있지 않는가? 취미의 욕구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후순위로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낮은 것은 단지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떤 욕구의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욕구 순위를 높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 등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고려해보면 인간의 저출산의 원인이 파악된다. 북한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시점에서 물질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된다. 2018년 한국이 0.98이고 북한이 1.90.

 

여기에 꾸밈노동을 죄악시하는 탈코르셋 따위가 원인의 일부로 더해진다. 꾸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한다. 그걸 죄악시하면 사람에게 사랑 받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 서로를 사랑할 확률도 줄어든다. 강요가 없는 이상 사랑이 줄면 연애도 줄고, 연애가 줄면 결혼도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도 준다. 당연히 출산율이 떨어진다. 이 천박한 사상은 인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밈노동거부에 대해 알아보자.

 

남성이 여성에게 꾸밀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꾸밈이란 타인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사랑 받기를 바라는가?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했다 하여 현재 꾸밈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타인이 아닌 본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공산주의적이다. 생산자를 먼저 생각하다 소비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공산주의처럼 본인을 먼저 생각하며 꾸미지 않다가 타인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나 가산점도 이런 같은 맥락으로 접근이 된다. 경찰이 할당제를 도입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경찰 역할을 맡으면 치안 서비스가 악화되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당제로 들어가는 경찰을 먼저 생각했기에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외면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외면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할당제로 들어가는 사람 생각하다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이 불행해지는 걸 생각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된다.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버리면 타인이 불행해진다.

 

 

성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은 상품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이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 둘 다 해당된다. 특정 성이 상품화 되었다고 그 성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 남성 성 상품화가 된다고 남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 성 상품화에 불편해하는 건 오로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가능한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욕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각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어느 때에도 올바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포르노와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고백하겠다. 과거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성매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뉴트리아 항문 봉합에 대해 아는가? 뉴트리아의 항문을 봉합한 후 풀어주면 배변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신적 공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린 새끼들을 없애 뉴트리아 멸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를 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해소불가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성 터부로 관계가 어렵고 성 상품화를 금지시켜 욕구해소를 막으면 그게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다고 보는가? 매우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물이면 원래 욕구가 막히면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성욕은 의지로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로 뭐든지 가능하면 전국민이 채식주의를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간의 의지가 강하면 금주령을 내렸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일시적으로 욕구를 참을 수는 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면 강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욕구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성으로 안내하는 것이 올바르다. 성범죄보다 성 창작물이나 성매매가 낫다. 왜 이걸 모르는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면 본격적으로 포르노와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등주의 전파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이익이라 생각하는 열등함인 약한 의지나 강한 수치심을 남성에게까지 세뇌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성년 남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성년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미성년 남성에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미성년 여성에게 주입하던 열등함을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충격 받은 일이 있다. 본래 남성은 성추행을 당하면 곧바로 반격을 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그런 것에 대한 자유의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남성이 기숙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반격하거나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 가까운 카페로 도망쳐 울면서 인터넷에 성추행을 당했다며 호소하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게 뭔가. 의지가 약한 남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하던 여성열등주의가 여성을 열등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성마저도 열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여성이 열등하게 되었다고 남성도 열등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바로 맞대응하고 신고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줘야지, 그러지 않고 남성의 의지를 약화하면 어떻게 하나. 억압받고 있던 여성과 억압받지 않는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남성처럼 억압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예 그냥 전국민 장애인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된다.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약자를 돌보나.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만들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약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벅차기 때문에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약자를 돌볼 수 없다. 정녕 약자를 위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도덕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는가?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교리를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유의지보다 타인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양성되었다. 모든 자유의지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고, 자유의지가 아닌 행동은 개인에게 있어 이익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여부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이타적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도 같은 형태를 띤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올바름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질서강요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선천적인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고, 후천적인 인간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춘다. 여성주의의 경우 후자다. 주관적인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인권여부를 결정하는 이 사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는 사상이 보통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동물보호주의 따위다. 이런 것들은 과거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불교가 보통 육식금지와 폭력금지와 살생금지 차원에서 원조 격에 해당할 것이다. 동물보호주의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인간 개인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어떤 인간이 고양이나 개를 다른 동물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우대하고 해로운 건 천대했다. 그러니 귀여운 동물만 좋아하며 보호하자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귀여운 동물 보호를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지 전통의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개를 먹을 필요는 없다 보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걸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본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상은 전부 과거 도덕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도 도덕적이라 포장하며 활개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이 잘못되었다며 고기 집에서 행패를 일삼는다거나 폭력이 잘못되었다며 병역회피를 한다거나 특정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유지에 침범하여 음식을 놓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올바른 걸 하는 것 같음에도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오는 것은 과거 종교의 도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 같으면서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좋지 못한 낡은 결과가 나온다. 이럼에도,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사상들이 도덕성을 갖춰 횡포를 부리고 있음에도,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 같은 천박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추지 못해 이런 낡은 사상들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부도덕하다며 공격받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도대체 좌파와 우파가 왜 나오는 건가? 현대 세계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니라, 과거 종교의 도덕과 거기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다. 여성주의는 이 대결에서 과거 종교의 도덕에 속한 일부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이런 작고 천박한 사상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상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과거 질서강요로 회귀하겠다는 사상이므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자유로운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주의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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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를 억압하는 것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든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셧다운제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을 통해 통과된 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대다수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세뇌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고 구분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진보, 자본주의 진보와 역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길 희망합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중국은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한국을 지배하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와 국가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유교는 중국에서 온 사상이고 내가 만든 건 한국에서 시작한 사상이 되겠죠. 뭐가 더 한국적인가요

 

변호사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정상. 시장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우수한 변호사는 높은 수익을 얻고 그러지 않은 변호사는 적은 수익을 얻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교육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교육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수준이 낮습니다. 인공지능에 비유하면 지금 교육은 알고리즘 설계가 아니라 데이터 입력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에요.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포장해도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어요. 참 안타깝죠.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문제풀이능력 키워놨더니 상품화 능력이 떨어져서 자본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감소하고 문제풀이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죠. 자본가 수 감소로 인한 취업자 수 감소나 공무원 쏠림 따위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기업의 경력자 선호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문제풀이능력을 갖춘 반면 경력자는 기업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력자를 신입대우로 써먹기 위해서 그런 걸 희망한 기업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그냥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자동화 시대가 오면 올수록 자본가의 필요성은 늘어난다 봅니다. 이제 교육도 학생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노동자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능한 자본가가 나타나면 무능한 기업도 세대교체 될 겁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노동자 착취를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기피도 줄어들 거라 봅니다.

 

다음 글은 구글 경쟁상대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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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ppraiser    친구신청

좋은글이네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직접 쓰신건가요??

루리웹-4810785279    친구신청

좋은 글이네요. 물론 읽었습니다. 나름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BeanPaul    친구신청

이번 오징어 게임 여혐 논란 일으키는거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적인 유교사상이라는걸 다시 상기시키더군요.
국내 작가들이 보수적인 지상파 규제로 부터 벗어나, 넷플릭스라는 해외 플렛폼에서 한국인만의 독창적인 표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무대에서 흥행했지만, 한국 페미들은 여성혐오 범벅이라고 선동 및 불매운동. 거기다가 어떻게든 더 신빙성을 얻어보려고 노인 혐오까지 끼워맞추더군요.

숲바라기    친구신청

여가부 폐지만이 답

카림무스타파    친구신청

유교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 보이는 글입니다.

pians    친구신청

너무 주관적이네요. 자기의 생각을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진행하니
좀 읽기가 힘들더군요

예를 들면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거..

🌠별바다🌊    친구신청

논리적비약과 확대해석이 많은것 같습니다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구요

Air Zonk    친구신청

길게 뇌피셜 사족을 붙여 놓은 흔한 안티 페미 주장.

기복왕    친구신청

3줄요약좀..
[글] 경제의 역할 (0) 2021/09/06 AM 10:12

경제의 역할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하고 매듭 져서 후대에 넘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시대의 세대가 과중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다소 여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한국은 전대가 물려준 산더미 같은 문제를 짊어져 불행하다. 몇 가지 알아보자. 노동자 착취 문제는 산업혁명 시대에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배려만 받고 있다.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배려만 받는 것은 상처를 치료 받지 못한 채 진통제만 먹는 것과 같다. 유교사상으로 인한 폐해는 광복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현대이념으로 넘어가질 못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외교, 역사, 교육, 여성, 아동, 세대, 갑을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문제는 아직 사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강요에서 자유로 사회가 바뀔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문민정부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출산율과 취업률이 박살이 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강요하는 수직사회에서 자유로운 수평사회로의 전환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나 자유가 이념인 이상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걸 그 시대에 해결했더라면 현 세대는 확실히 말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아쉽다.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교사상의 틀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유교 필터를 거치고 난 뒤에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니 더욱더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교 필터는 새로운 사상의 장벽이 되어 한국 사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한 나라다. 왜냐하면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와 본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드는 노동자 착취를 보고 질서를 강요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어떤 질서를 만들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춘다. 그 질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관계와 집단과 연대를 중시한다. 여기서 그 질서를 만드는 자만 달라졌다. 과거엔 왕과 귀족이었다면 현대엔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다. 아직 한국이 왕과 양반이 있던 시대에 쓰이던 유교사상에 머물러 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빠지고 자유를 외치는 이조차 사회주의식 억압과 강요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이해가 없으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제적으로 보수라 주장하는 정당이 권력을 쥐었었는가? 그 정당 구성원도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보수라 하더라도 다른 면면에서는 사회주의적 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의 계획경제도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나. 이후에는 그 시대의 향수와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 경제적으로 진보라 주장하는 정당도 열심히 선동해서 권력을 쥐었으니 한국정치는 선동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국정의 능력과 무관하게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다. 정책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던 국민이 얼마나 있었나. 애초에 정책만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상하다. 사상과 이념을 알면 정책의 방향성을 알게 된다. 그걸 먼저 알리는 게 우선 아니던가? 이런 선동정치의 근원은 역사적으로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의식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선동에 취약한 지역대표에 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유교의 틀 내에서 과거의 사상을 참고하여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자본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노동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도덕에 문제가 생기면 유교사상이나 다른 종교사상을 참고한다. 그리고 그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나 방향성을 결정하고 따른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결국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 못한 불완전한 사상이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다. 과거의 사상으로 현대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걸 안다. 과거 사상을 참고한 나로서도 그 사상의 위대함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 사상이라는 점은 달라질 수가 없다. 진실을 외면해서야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상들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해체주의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것 외의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PC주의는 과거 사상을 부정하며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불쌍하니까 배려하자를 강요하며 권력을 얻고자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걸 배제하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과거가 떠넘긴 문제와 현재 발생한 문제와 미래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답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실책은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빼앗긴 것에 있다. 경제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유지 및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본가가 그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착취 문제를 외면한 결과,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강탈당했다. 노동자 착취 문제는 부의 분배 문제다.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지 못한 결과가 노동자 착취다. 그렇다면 부의 분배는 누가 전문인가? 누구의 역할인가? 노동자인가? 정치가인가? 아니다. 자본가다. 경제 전문가인 자본가야말로 부의 분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가 문제를 방치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걸 방치했으니까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빼앗아간 이들은 고작 노동자를 배려 해주는 것에 머물렀다. 중국과 북한을 보면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공산주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을 모르니까 계속 배려만 해주고 있다.

 

더 이상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 놔둬서는 안 된다. 경제의 전문가인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와 정치가가 부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가 아닌 간호조무사나 영업사원이 수술을 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자 착취를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의사가 대리수술을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같다. 문제해결을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고 의사는 환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가는 경제 원칙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윤을 얻는 방법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방법도 알 것이다. 경제계에서 알뜰살뜰하게 절약한 돈으로 낸 세금을 정부에서 낭비하는 걸 보면 분통이 터질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걸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이제 경제도 진보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닌 진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역할을 맡는 이에게 정당한 부의 분배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자본주의의 진보를 해야 한다. 지금 보면 부의 분배 단계에서 별 필요가 없는 이들이 과도한 부를 얻고 있다. 그런 점을 개혁하고 개선하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경제의 진보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 빼앗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사상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를 생각하느냐였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라는 이름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에 몰두했고 공산주의는 생산자라는 이름의 노동자를 집단의 연대를 통해 배려하는 것에 몰두했다. 소비자를 생각하고 만든 상품과 생산자를 배려하며 만든 상품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이 전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품화 능력에서 승패가 갈렸다. 상품 가치 낮은 걸 무료로 나눠줘 봐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리 없다. 상품 가치 낮은 걸 해외에 팔아봐야 팔릴 리가 없다. 상품화 능력만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애초에 승부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자 착취를 방치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승리했기 때문에 그걸 방치하는 것이 옳다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게 잘못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도 진보해야 한다. 승패는 상품화 능력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품화 능력은 키우면서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착취는 하지 않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 역할을 경제의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경제는 경제에 속한 이들에게 올바른 부를 분배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경제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안전망을 통해 생존을 보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다.

 

모든 인간은 보다 큰 욕망을 가져야 한다. 욕망이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것이라 한다. 선과 악이나 물질과 정신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무엇에 대한 강한 바람이 욕망이다. 이런 욕망이 나쁜 행동을 낳는다고 하여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득권이 잘못을 저지르면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욕망이 작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큰 욕망을 위해 작은 욕망이나 욕구를 참는다. 몸을 위해 식욕을 참거나 성적을 위해 수면욕을 참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기득권의 잘못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라는 큰 욕망보다 사리사욕이라는 작은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이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던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악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이들의 사상 때문이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규정하나. 사회를 구성하는 건 사회에 속한 인원이 다른 인원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밖에 없으면 애초에 사회구성 자체가 안 된다. 도덕이나 질서로 강요하지 않아도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야 사리사욕이란 작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큰 꿈을 추구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여 행복하게 되자는 사상이다. 인간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하고 욕망이나 꿈을 절제하게 만드는 건 유교 같은 종교나 사회주의다. 욕망을 줄인 결과가 조선 말기고, 종교의 부패다. 경제에 속한 인간도 더 큰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어째서 경제는 물질적인 욕망만 추구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감각이든 한계점이 있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지나치게 높은 슬픔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감각을 최고로 즐기기보다 다양한 감각을 복잡하게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보수에 머무르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는 자본주의를 추구하여 국가의 기초체력인 국민의 상품화 능력을 키우고 국민의 행복을 부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며 즐거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성장은 경제가 주역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발전 방식이나 이윤 추구는 분명 우수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그런 방식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사상이다. 시장원리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여기서 수요란 무엇인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일정한 가격으로 사려고 하는 욕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욕구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인간의 본성과 사상이다. 선천적인 욕구와 후천적으로 욕구의 방향을 정한 사상이다. 예컨대 선천적인 식욕과 그 식욕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 알려준 사상이 수요에 있는 욕구의 근거다. 그런데 지능이 높은 인간은 사상으로 본성을 제어하거나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본래 벌레를 역겹게 느끼지 않는 이도 교육을 통해 역겹게 느끼는 것처럼 사상에 의해 감각이 바뀌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실상 욕구의 근거는 사상일 확률이 높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한에 처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상에 의해 수요가 결정된다. 내가 다루는 영역은 경제의 원리보다는 수요에 영향을 끼치는 사상이다. 가치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사상이다.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가? 자본주의의 진보는 그런 걸 바꾸는 걸 의미한다. 시장원리는 그대로 둬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파악을 해야 한다. 현상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한국 경제의 상황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경제참여인구의 감소는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핵심을 보면 그렇다.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경제참여인구 수가 줄어들 수가 없다. 상품이란 사람에게 필요한 걸 의미하고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기업에 필요한 능력이 되어 취업이 가능할 터이고 사물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사회에 필요한 걸 만들 수 있어 창업이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상품화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건 과거에 그 능력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단순 노동의 수요가 높아 굳이 상품화 능력을 갖추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창업이 수월하고 적은 임금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교육이 발전하기 전에는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풀이능력의 필요성이 적었었다. 그래서 사회에 필요한 걸 찾아 파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이들이 창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시대가 달라졌다. 기술이 발전하자 단순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어 취업 풀이 좁아졌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기업에 필요로 되어야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창업이 어려워지고 적은 임금으로는 만족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중소기업을 가느니 취업을 포기한다. 이직의 어려움을 아는 부모도 중소기업에 가는 걸 만류하는 실정이다. 능력이든 사물이든 수준 높은 상품화가 가능해야 창업이든 취업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 발전하자 교육이 체계적이게 되었다. 시험을 풀 수 있는 문제풀이능력에 구애 받고 문제풀이능력을 키워 진학을 하고 취업으로 수익을 얻었다. 창업을 하는 것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더 중요시되었다.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이 뛰어난 취업자만 늘어난 것이다. 이는 집단에 종속되는 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상품화 능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음에도 상품화 능력에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는 바람에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취업 풀에서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기업에 필요한 능력자의 수가 줄어들고 사회에 필요한 상품을 팔 수 있는 사업자 수가 줄어들면서 결정적으로 경제참여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났다면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무능한 기업은 진작에 사라져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이 되려 경제 참여와 경제 선순환을 막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근간이 되는 사상이 낡으면 이런 현상도 일어나는 법이다.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정보의 확산이다. 이것이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성장공식이 노출되었다는 점이 크다. 경제성장은 일종의 공식이 있다. 경제 수준에 따라, 국가 환경에 따라, 국민 수준에 따라, 선진국들이 경제를 성장했던 공식이 있다. 한국 또한 그 공식을 차용하여 성장했다. 많은 한국인이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로 인해 제국주의와 그를 야기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이 그런 흐름의 막차를 탄 자유진영의 막내다. 지금 한국은 제국주의의 폐해를 줄인 자본주의 공식을 본받아 성장했다. 노동자 착취(군사독재 아래 가발 생산 따위)와 기술의 발전(중공업의 발전 등)과 다양한 상품화(다양한 산업 진출)와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중국이나 동남아 등)을 돕는 것으로 한국이 성장했다. 이런 것이 전부 공개되었다. 어느 나라나 이걸 본받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이후의 성장공식은 미지인 상태다. 개발도상국은 성장공식을 아는데 선진국은 성장공식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확률이 높다. 그토록 성장했던 일본이 오랫동안 정체된 까닭은 새로운 성장공식을 만들어낼 사상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양적완화를 한다고 다방면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로 갔다고 한다. 지금 금융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그건 올바른 길이 아니다. 금융으로 돈이 오가는 것은 기초적인 국가생산력과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금융 자본주의를 통해 다양한 자산을 늘려나가더라도 자본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으면 오래지 않아 도태되어버린다. 이건 양적완화와 비슷할 정도의 임시방편이다. 개발도상국과 격차를 벌리기 위해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정보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다. 정보공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중국에 노출하여 중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수많은 중국의 산업스파이가 미국에서 활동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빼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가 공개된 이상 기술 격차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중국은 한국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그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능한 많은 국민이 자본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장 같은 거대 자본재를 소유한 이들만 자본가가 되어 노동자를 착취하며 성장했다. 하나 현재는 다르다.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들의 시작은 컴퓨터다. 소프트웨어로 부를 창출하여 하드웨어로 나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다 능력만 있으면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사회에 필요한 것을 찾은 다음 그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소에서 찾은 후 협력하여 생산하면 새로운 상품화를 만들어 자산을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상품가치가 높으면 착취를 하지 않아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걸 전제하지 않았다. 상품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상품화가 되는 능력을 키웠다. 그런 까닭에 많은 학생들이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며 집단에 종속되기만을 희망하게 되었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다. 만약 한국에서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을 통해 상품화 능력을 키웠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순위에 많은 한국인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실무자가 많다. 그 실무자가 교육만 조금 다르게 받았어도 우수한 경영자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경영자 아래에서 취업자리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취업자리로 인력난에 시달려도 외국인이나 자동화 시설이 있으니 걱정이 덜하다. 능력만 있으면 마음껏 자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도 된다. 선진국에 도달한 한국의 앞길은 이제 본받을 대상이 없다. 이제 한국이 직접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국가의 기초체력은 생산능력에 달려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국가의 기초체력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기초체력 부실로 무너졌다. 그런데 경제 양극화가 발생하면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및 교육수준 저하로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단순 노동이 필요하던 시대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준 높은 지성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늘어야 선진국은 기초체력이 유지될 수 있다. 기초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가능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란 상품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부가 흘러가는 걸 말한다. 자본주의의 가치판단기준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도이고 미덕은 그런 필요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능력을 가진 능력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드는 사물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러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알아보자. 하나, 부동산.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자전거래나 정치적 수단 따위를 통한 부동산 가격 뻥튀기를 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실상 이런 부동산 부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능력에 관련된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은 사람이 바뀌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의 능력으로 기업을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보다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인력파견. 위험의 외주화를 명분으로 실제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원래 이런 회사가 없더라도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위험의 외주화로 좀 더 이익을 얻어보겠다고 하다가 잘못된 부의 분배를 해버렸다. 불필요한 인원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을 신체로 비유하면 피가 흘러가다 중간에서 줄줄 세어 나오는 것과 같다. 실제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무능한 기업.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본래 이런 기업은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자본가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그리고 경제도 그에 맞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투자를 하여 대체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착취를 하지 않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하고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유능한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몇 가지 한국 경제의 상황과 해결방법을 살펴보았다. 상품화 능력을 키워 자본가를 늘리고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면 당면의 경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상품이란 장사로 파는 물건이나 매매를 목적으로 한 재화라고 한다.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람이 구매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물건이나 재화라는 것이 된다. 필요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품화란 즉 사람에게 필요로 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그 능력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사물의 상품화는 그 사물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당장 주위의 상품을 보자. 이 상품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나온 것일 것 같은가?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필요를 느끼고 구매할까? 그야말로 엄청나게 생각해서 나온 것들이다. 상품화하는 사람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들이야말로 정말 많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어째서 노동자는 착취했을까? 그건 관습적으로 노동자가 농노의 위치에 있어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주로 생산은 노동자가 하고 소비는 기득권이 했다. 그러다 시대가 흘러가 평등해지면서 노동자의 소비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관습은 유지되어 노동자일 때에는 천대하고 소비자일 때에는 우대하게 되었다. 참 씁쓸한 상황이다. 상품화를 하는 이들처럼 사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만큼 노동자에게도 사랑 받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식만 살짝 바꿔도 자본가는 인본주의자가 된다.

 

노동자도 능력을 상품화하여 자본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능력자와 사물을 상품화는 능력자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일단 알기 쉽게 과거의 구분을 사용하겠다.) 상품화 능력의 개발은 어린 시기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애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처럼 상품화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취업하고 창업하며 생산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연애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포기하거나 조건으로 만나 결혼하고 있다. 조건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건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 중매와 비슷하다. 중매로 결혼한 다수가 황혼이혼을 바랄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조건 결혼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걸 알 것이다.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상품화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취업이나 창업을 포기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사람의 삶 중에 노동시간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만족스러운 일자리가 아니어서 행복한 노동이 불가능하면 삶 자체도 불행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다. 사회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 또한 행복하게 해야 한다. 한국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많은 국민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추면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품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화 능력은 어린 시기의 교육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다룬 글에서 따로 체계적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간단히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 평가부터 달라져야 한다. 학생 능력의 평가를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만든 상품을 점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교사가 소비자가 되고 학생이 생산자가 된다. 이런 개념을 초기부터 인식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소비자인 교사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들 수 있는가? 지식은 이런 연구에 필요할 때 각자 알아서 수집해야 한다. 이것으로 상품화 능력과 가치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과거 교육 체계가 정돈되지 못했을 때에는 수많은 창업자가 나타났다. 수준 높은 학력이 없더라도 상품은 생산할 수 있었다. 되려 고정된 지식이 자유로운 사고를 막아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방해가 된다. 간단한 지식의 상품화를 시작으로 복잡한 지식의 상품화로 나아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도 차근차근 키워 나가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보통 기업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걸 대신한다. 이제 그걸 교육 단계에서 해야 한다. 이후에는 조별과제를 통해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고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아 각자 사물의 상품화와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운다. 교사는 소비자가 되어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하고 조장은 판매한 과제로 받은 점수를 계약에 따라 조원에게 분배한다. 과제에 따라 역할을 바꾸며 모두가 능력과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익힌다. 이것으로 체계화된 상품화 능력과 계약을 통한 거래와 올바른 부의 분배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걸 키워나가면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연구 결과를 봐도 그것과 다른 것을 조합해 새로운 상품화를 순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는 선동정치를 바꾸기 위해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것에 필요한 분야의 모임인 모꼬지에 속하여 분야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실제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의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이렇게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춰 한국이 전세계에 필요로 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불필요한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과거 특권계층인 성직자와 귀족과 비슷한 계층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은 무엇인가에서 3신분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외의 특권계층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음을 역설했다.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필요로 되지 않는 이가 과도한 힘을 가지는 것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범죄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경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가 없음에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필요하던 걸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이제 점차 자취를 감춰야 한다. 부동산 자전거래나 주식 장난질 따위를 하는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보면 부도덕하다. 사람에게 필요 없는 걸로 부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부도덕한 이들에게 투자나 지원은 잘못된 일이다. 시장원리는 수요와 공급으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그런 이들에 대한 수요가 줄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들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위해 정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런 안전망에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 수 있는 상품화 능력을 키운 다음 다시 경제에 속하여 이익을 얻으면 된다. 그래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경제는 그런 이들에 쓰이는 복지 비용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직종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해 기술의 발전을 늦추는 것이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된다. 팍팍 발전하면서 뒤쳐지는 이들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이롭다.

 

경제는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할 것이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유능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가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리에 맞지 않는 능력자는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모든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이다.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무능한 노동자가 고위직에 있게 하는 것은 유능한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업의 유연화를 주장하겠다. 무능한 기업은 도태되고 유능한 기업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기업의 유연화에는 반대한다면 내로남불로 볼 수밖에 없다. 노동계가 유능한 노동자와 무능한 노동자를 구분 짓지 않는 것과 경제계가 유능한 자본가와 무능한 자본가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은 같다. 어째서 착취로 유지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같은 그룹에 묶이는가? 천 원짜리를 이천 원에 팔 경우 착취할 수 밖에 없다면 천 원짜리를 오천 원에 팔 수 있도록 상품 가치를 올리면 된다. 그런 기업만 살아남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업의 유연화다. 이런 식으로 기업의 유연화를 하면 착취하지 않고도 부를 분배할 수 있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하나 유능한 한국인이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인 상품화 능력을 갖춰 상품 가치를 올리는데 전력으로 도전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유연화에 속할 기업은 인력파견도 포함된다. 굳이 그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설령 프리랜서의 형태를 띠더라도 능력에 대한 대가가 온전히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걸 정리하면 기존의 수익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질 수 있을 거라 본다.

 

올바른 부의 분배가 미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익이다. 부의 분배에 대한 불만은 정치로 이어져 기업에 대한 규제와 억압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거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안다. 사회에 투자하고 환경에 투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면 된다. 당장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후에도 경제계에 속한 무능한 기업은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면 이익임을 강조하겠다. 상품화 능력과 올바른 부의 분배로 경쟁자를 늘리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한국인의 경쟁상대는 한국인이 아니다. 전세계인이다. 전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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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진실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가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의 직무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노상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 깃발은 기만적인 것이리라. 그와 반대로, 행정가의 의무는 문제점들의 성격에 따라 그 추진 방법을 연구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목적지에 있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행정가가 목적지를 보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마음에 들더군요.

 

이제 웬만한 현상은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걸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한가요. 평가 받기 위한 자격증을 위한 공부는 정말 불필요합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데이터수집을 위해 몇 가지 방법도 찾았지만 힘들더군요. 사상의 상품화는 선동과 세뇌입니다. 필요하게끔 만들어 파는 게 사상의 방식이죠. 종교나 공산주의가 대체로 그렇죠. 그런 걸 할 수는 없습니다.

 

역할주의 사상부터 글을 다듬고 사상가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상대하는 게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체계화된 사상들이라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생각에 초점을 맞춰 양식이 될 글까지 다듬지는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꽤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괴롭다.

 

다음 글은 아직 모르겠네요. 쓸 주제야 차고 넘치니까.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됩니다. 자유적응이 필요한 분야가 많으니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가 평가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직은 계획에 없네요. 하나만 말하자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전문가에게 지나치게 휘둘린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이 굳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을 지지한 까닭은 그런 구태정치를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일 텐데 말이죠. 할말은 더 많은데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독재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는 유교와 비슷한 사회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입니다. 자유주의는 유교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상대하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동해서 권력을 얻고 사리사욕을 추구하겠다는 생각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자 하는 야망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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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국가의 인간교육 (0) 2021/08/09 AM 07:55

자유국가의 인간교육

 

 

 

자유국가의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닌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다. 인공지능으로 비유하면 데이터의 입력이 아닌 알고리즘의 설계다.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을 설계해두면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와 비슷하다. 학생이 본인을 파악하고 설계할 수 있으면 타인의 간섭이 없어도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수집한다. 자발적으로 목적을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 교사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학생이 알아서 공부를 한다. 얼마나 이상적인 교육인가? 한국은 교육열은 높으나 학구열은 낮다. 그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나 인간의 특성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번쯤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습관이나 파블로프의 개나 루틴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인간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원리가 한번 정립되면 의식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이상 무의식적으로 정립된 것을 그대로 하게 되어 있다. 공부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도 이런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습관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습관을 들이는 교육은 자아의 파악과 설계가 아닌 단순한 행동반복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단순함은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아의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은 반복적인 학습으로 습관을 들여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 개인의 고유성이 말살된다. 제대로 된 자아의 형성이 끝나기 전에 교육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면 지식이 자아를 잡아먹어 지식 자체가 자아의 일부가 된다. 교육받은 대로 언행을 하는 인간. 사랑을 집어넣으면 사랑을 말하고 증오를 집어넣으면 증오를 말한다. 그 어떤 개성도 갖추지 못한 채 주입 받은 지식대로만 행동한다. 고정된 형식에 집착하며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고학력자가 쉽게 휘둘리고 선동되고 세뇌되는 것은 온전한 자아를 갖추기 전에 지식에 잡아 먹혔기 때문이다. 빼곡한 지식을 촘촘하게 주입 받은 학생은 문제에 대한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 줄 알게 되었다. 하나 지식의 활용방법인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갖추지 못했다. 시험용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래 놓고 창의력을 논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상태에서 사회에 내동댕이쳐졌다. 지식으로만 가득 찬 인간은 시장에 공급되어 지식의 활용방법을 아는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인간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학교에 학생이 운반되면 머리를 열어 지식을 주입하고 봉합한 뒤에 품질을 시험하고 상등품은 시장에 고가에 팔려나갔다. 도구 제조다. 지식 주입 평가 시험에 통과 못한 하등품은 다른 성능이 뛰어나도 평가 받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고가에 팔려나간 상등품도 다른 성능이 낮으면 빠르게 버려지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자아형성 전에 지식주입을 통한 선행학습과 월반조기졸업은 조기제조와 조기출하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어 쉴 틈도 없이 지식을 쑤셔 박히게 만드는 학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선행학습을 마치고 월반이나 조기졸업을 하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자아형성이 우선되지 않으면 그런 건 그냥 도구 제조에 불과하다. 얼마를 쏟아 붓든 그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교육은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되게끔 하는 교육이다. 다양한 힘을 체험하여 시야를 넓히고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춘 채 현명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되면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공부한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다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으면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어야 정당하게 그 능력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 소유권이 있어야 기업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교육이 학생에게 순수한 이타심을 요구하며 상품화를 가르치지 않은 결과 인간 자체가 상품화가 되어 팔려나가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능력의 상품화는 소유한 능력을 타인에게 필요로 할 정도의 매력을 갖추는 걸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상품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되는 것. 상품의 필요한 정도에 따라 대가를 달리 받는 것. 이것이 무엇이 나쁜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타인에게 필요한 매력적인 능력은 금전거래가 아니더라도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필요하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취업이 어려운 까닭은 능력은 뛰어나나 능력의 상품가치가 낮아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취업이 어려우면 창업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걸 상품화할 수 있게 되면 창업도 어려운 게 아니게 된다. 한국에서 창업할 곳이 없으면 해외로 나가도 된다. 그들이 그런 걸 못하는 까닭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인재가 취업에만 매달리며 창업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님을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은 공무원이 유망직종이다. 한국이 공무원에 집착하는 사회가 된 까닭에는 사상적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어 평생 안정적인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IMF 때문에 입법한 법에 의한 시장의 노동환경악화에 있고 경제적으로는 기술발달로 인한 노동력 필요감소와 후발주자 진입이 어려운 자본주의의 특성에 있고 교육적으로는 자아형성 전 맹목적인 지식주입으로 인한 인간 자체의 상품화에 있다. 능력의 상품화가 익숙했다면 공무원 열풍이 불 수가 없다. 그런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안정적인 공무원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앞으로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이제는 기초소득이나 아이디어뱅크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다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한 게임업계처럼 새로운 상품을 파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자리 감소로 인한 대책에 과한 의존을 하지 않을 수 있어 기술발달로 인한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제는 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게 상품화다. 지금 교육은 원석을 다듬지 않았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하다. 정리하겠다. 모든 인간이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추는 것. 자아를 갖춘 인간이 현명한 지성으로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뒤 대여의 형태로 거래를 하는 것. 이것이 인간교육이다. 이런 인간교육이 자유국가에서 교육이 맡은 역할이고 이걸 수행하는 것이 교육의 자유적응이다. 자유적응이 무엇인지 예시를 통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사회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걸 목적으로 한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출산율이나 학구열이나 취업률 따위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경제나 치안이나 복지 따위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고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하는 것. 이런 것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유롭게 했는데 잘 안되면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경제(재계, 기업 등)를 시장에 맡겼는데 부의 분배 문제로 국민이 불행하다면 경제는 자유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정부가 일일이 시장에 간섭하지 않아도 부가 온전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에서 비정규직이나 위험의 외주화 같은걸 하는 시점에서 제대로 된 분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국민들에게서 큰 정부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국민의 행복은 정부의 역할이라 항변할 수 있다. 그걸 위해 세금을 내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바로 큰 정부를 정당화한다. 큰 정부가 높은 세금을 받아 계획적으로 부를 분배한다. 그게 큰 정부가 아닌가? 경제는 규제와 억압이 적은 작은 정부를 바란다고 알고 있다. 작은 정부를 바라면서 국민의 행복은 전부 정부에게 떠넘기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작은 정부를 바란다면 정부와 경제가 같이 그런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그것은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경제에 포함되는 분야 또한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국민의 행복은 기존 같이 직원이 기업에 충성하고 기업이 직원을 책임지는 종속적인 관계 속에서 자본가의 이타심에 의존하는 것으로 얻는 게 아닌 경제시스템 자체가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게끔 하여 얻게 해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이 분야의 대표를 통해 직접 입법을 하여 본인들이 겪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해결하고 분야에 필요한 개혁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은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법안을 추진할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분야의 대표라 해도 몇 석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하면 나머지 대표들이 찬성해야만 법안이 통과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전체의 이익을 전제로 한 분야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역의 대표가 치적을 위해 부동산 개발에 앞장섰던 것처럼 분야의 대표는 치적을 위해 분야의 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국민의 의사표현도 시위를 할 것이 아니다. 국민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공적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것이 정 어려울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시위를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작은 정부와 큰 의회. 이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적합하다 본다. 경제를 예로 들어 자유적응을 알아보았다. 다른 분야도 다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해도 잘되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인간이 연관된 문제는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는 순간부터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몇 가지 생각해보자. 연령차별은 민족에게 부과된 장유유서라는 도덕적 의무로 발생했다. 차별의 의무였으니 연하를 지배하려는 꼰대의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성별갈등이나 이념갈등도 정조관념이나 민족통일 같은 도덕적 의무가 영향을 끼쳤다. 정치선동은 정치체제의 결함으로 발생했다. 한국인이 선동을 당했던 것은 직간접적으로 실제 겪은 피해 때문이었으나 애초에 지역중심의 정치체제 자체가 선동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관련이 없는 사람을 정치적 대표라고 뽑아야 되는 시점에서 정상적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가 없다. 내가 만약 인간에게 책임을 돌렸다면 나와 연관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과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잠시 나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인간의 생각은 경험에 영향을 받아 사상의 줄기가 될 때가 있어 어떤 주장을 펼칠 때에는 개인사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도덕적 의무로 망가졌다. 한국은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교육받는다.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한국은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른에게 공손히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으로 인해 수년간 어른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다가 자존심이 갈갈이 찢어지는 사건에서 어른에게 의사표현을 실패한 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과 불신으로 삶을 포기하고는 운명에 기대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보통은 그냥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많은 생각과 높은 자존심과 의지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 나를 고독한 고뇌로 몰아갔다. 당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까닭은 연상에게 복종하라는 도덕적 의무 때문이었지만 그때에는 그런 이유를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절망에 구렁텅이에 빠졌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은 모순이 너무 많았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나 인간평등과 연령차별의 모순이나 성을 중요시하면서 성을 터부시하는 모순 따위는 당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알게 된 독재반대를 하면서 독재자 찬양을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중 하나였다. 주위에는 그런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있어도 의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홀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할 괴상한 고통 속에서 답을 찾으며 모든 것을 증오했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났다. 눈이 따가워서 보통 밤에는 방 안의 불을 껐다. 귀가 아파서 소음을 지우는 비를 좋아했다. 도덕적 의무로 과도한 일탈이 허용되지 않자 그 짜증은 내적으로 파고들어갔다. 자학. 과도한 스트레스로 얼굴을 쥐어뜯고 벽을 펜으로 긁어대고 휴지를 뭉텅이로 뭉쳐 던지고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럼에도 특정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화내고 삐치고 울어도 책임을 묻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망가지게 한 과도한 도덕적 의무의 부과는 어떤 사건이 계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로 추정된다. 집 주변 백화점의 마켓에서 어떤 이벤트를 시작했다.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상품을 발견하면 마켓에서 고객에게 그 상품을 3배로 보상했다. 예컨대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라면 1개를 발견하면 마켓은 고객에게 발견한 라면의 3배로 보상했다. 마켓의 철저한 상품관리를 홍보하기 위해서 이벤트를 열었던 것 같다. 그걸 보고 어린 나는 잔꾀를 냈다. 유통기한이 지나기 쉬운 우유를 선반 아래에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다. 유통기한이 지난 후에 선반 아래에서 꺼내 계산대로 들고 가서 뻔뻔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아마 바나나 우유였던 것 같다. 그 우유에 빨대를 꽃아 마시며 놀았던 것 같다. 몇 차례 그걸 반복하다가 직원에게 붙잡혔다. 수상하다 여긴 어떤 직원이 CCTV를 확인한 듯 했다. 나는 직원용 사무실로 가서 CCTV가 촬영한 내가 우유를 숨기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그때 CCTV에 대한 지식이 없어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부모님이 소환되었다. 경찰서에 연락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작은 금액에 절도도 아니다. 단지 상품을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을 뿐이다. 그러니 마켓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엉엉 울 정도로 회초리를 맞은 기억 말고는 없다. 이 사건은 기억의 편린을 재구성한 것뿐으로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마켓과 유통기한과 회초리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활했다. 나는 내가 교육받은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절도는 나빠요. 훔치지 않았다. 거짓말은 나빠요. 속이지 않았다. 교육받은 정해진 룰 내에서 이익을 취했다. 그것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차라리 절도였으면 평범하게 해결했을 것이다. 절도가 나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사건 때문에 회초리를 맞으면서 왜 맞아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나쁜 짓이니까 맞았다. 여기서부터 비틀리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싶다. 아이는 혼난 이유를 정확히 몰라 불만을 품고 부모는 이상한 아이라 여겨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강요한다. 그러면서 능력을 가지치기 당했다. 어떤 능력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천 차단 한다. 성욕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욕망을 꺾어버린다. 어른에게 반항할 것 같으면 도덕을 명분으로 의지를 꺾어버린다. 성적 매력과 의지를 잃어버린다. 이런 게 바로 능력의 가지치기다. 이런 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해봤고 해봤기 때문이다. 아이를 쉽게 다루기 위해 순종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 가지치기 해버린다. 그러면서 다양한 능력이 개화될 수 있는 꽃망울도 제거된다. 다른 나무와 다툼이 없게끔 전부 가지치기하고 오로지 올곧게만 자라게 한 나무는 아무런 꽃도 피우지 못한다.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이때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훔치거나 속이지 않았지만 유통기한을 조사하는 직원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렇다면 아이가 직접 유통기한 조사하는 일을 며칠간 해보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했어야 했다. 그러면 아이는 불만을 품지 않고 부모는 맹목적인 도덕적 의무의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교활하고 요령 있게 처세를 잘하면서 나름 즐겁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나의 부모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뺨이나 종아리를 때리는 것도 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강요한 것도 성에 대한 억압도 그저 올바르다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친척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다음 돈을 받는 굴종을 경험한 것도 동네어른에게 전단지 돌릴 때 혼 난 것도 교사에게 김치를 강제로 먹여진 것도 이것도 저것도 나를 망가지게 한 대부분이 그저 그들이 배운 대로 한 것이었을 뿐이다. 대부분이 도덕적 의무였단 말이다!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셀 수도 없이 생각해봐도 그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었다. 화가 나는데 화를 풀 상대가 없다. 뜨거운 열기가 내부에서 속을 태운다. 도덕적 의무가 감성을 억제하고 지성이 찾은 결론이 이성을 억제한다. 순간 화가 치밀어 욕이 튀어나와도 그것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속이 뒤틀리게 되었다. 그 뒤틀린 상태에서 끊임없이 원인을 찾다가 불필요한 도덕적 의무가 내 망가짐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니라 사상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가르치는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 문제다. 인간을 도구로 제조하여 납품한 교육계를 탓할 생각도 없고 탓해서도 안 된다. 단지 알았다면 변화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에 사회를 맞추면 자유주의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사회주의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때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인간에 맞춰 사회를 바꾸는 게 자유주의고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사회에 맞춰 인간을 바꾸는 게 사회주의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가 있어 이 경계가 약간 애매한데 기본은 그렇다. 이 구분은 문제해결방식을 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므로 기억해주기 바란다. 자유국가는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해야 하는 거지 어떤 관습에 의해 정해진 부당한 규율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인간을 사회에 맞게끔 강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성욕이 있다. 그 성욕이 잘못을 낳는다. 그러면 잘못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반면 인간의 성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인간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성상품의 전면불법으로 대응하는 게 사회주의다. 한국은 후자다. 유교의 특성인 이타주의적 강요가 사회주의의 특성과 비슷하여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니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하단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이 성매매 합법화를 한 것을 보면 사실 사민주의보다 못하다. 한국은 포르노조차 금지한 것을 보았을 때 중동의 신정주의 수준이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정보는 전부 차단되어 있었다. 성교육이라는 것은 말만 그럴듯한 단순한 이미지와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런 건 어떤 정보가치도 없었다. 성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나타난 신체적 변화는 나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자위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그때 내게 성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당시의 고뇌의 일부를 덜었을 것이다. 왜 정상적인 행동을 부끄럽고 굴욕적이게 만들었나. 만약 다른 정보도 얻었다면 보다 빠르게 절망에 빠진 원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제멋대로 강요하니 제대로 성장할 리가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 연령제한.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단정짓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꼴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알고 있지 않나! 본인 과거를 떠올려봐라. 성년의 정보를 접했다 하여 무엇이 달라졌는가? 대다수는 어린 시절에 성년의 정보를 접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육체연령과 정신연령은 다르다! 일부 문제가 발생하는 아이 때문에 정보차단 당한 아이들은 온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며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쳐져버렸다. 소년범죄가 많다는 걸 안다. 그 때문에 정보차단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 인지도 못할 능력이 부족한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는가? 소수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를 구축하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추면 어떻게 하나. 왜 나머지 다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느냔 말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전부 희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지금 한국은 농가를 위해 모두 비싼 농작물을 먹어야 하고 유통업계를 위해 모두 비싼 물건을 써야 하고 중고자동차업계를 모두 전부 안심하고 중고자동차를 구매할 수 없어야 한다. 건설업계를 위해 쓰레기나 오물이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고 택시업계를 위해 저질 택시 서비스를 감내해야 하고 노점상을 위해 길거리 미관을 포기해야 한다. 눈 앞에 불쌍한 사람을 돕는데 치우쳐 전체를 볼 수 없는 이타주의는 이런 걸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일은 있어서 안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인터넷으로 정보차단도 제대로 못한다. 그러니 정보를 전부 공개하고 그 정보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 되게끔 교육해야 한다.

 

미성년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자행하는 무리 중에 이들이 가장 안쓰럽다. 바로 여성주의자들이다. 여성은 도덕적 의무로 차별 받았다. 대표적으로 부위부강이 있다.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임을 이른다. 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었다. 그런 여성은 남성이 다루기 쉽게끔 입맛대로 세뇌되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 교육받았다. 이를 가리켜 약화교육이라 하자. 남성을 위해 정조관념을 강요 받았다. 정조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 영향으로 정조를 잃은 이는 결혼을 하기 어렵고 과부는 재가를 하지 못했다.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강요당한 여성은 의지가 약해지고 성에 취약해졌다. 의지약화로 관계의존도가 높아지고 자립심이 낮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감성적이게 되었다. 과거 여성의 사회진출이 낮았던 것은 환경 이전에 애초에 그렇게 되게끔 교육되었기 때문이다. 성 취약으로 성에 대한 수치심이 굉장히 강해졌다. 사소한 접촉이나 시선으로도 불편함을 느꼈다. 여성 성 상품화를 보면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그러진 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런 이들이 서양의 여성주의를 접한 뒤 그 자아가 여성의 본성이며 그걸 지키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수동적이며 성적 수치심이 높다 외쳤다. 그걸 빌미로 온갖 혜택을 주장했다. 사법도 흔드는 성인지감수성의 등장이나 여성할당제나 여성주차장 따위가 생겨났다. 평등을 말하면서도 여대폐지나 여성징병은 외면했다. 여성은 열등하기 때문에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여성열등주의다. 분명하게 말해두겠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이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할 거라면 현대 문명과 멀리 떨어진 원시 부족 여성을 보라. 그들이 문명인과 같은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던가? 그런 걸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그냥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된 본성까지 맞출 이유는 없다. 진지하게 묻겠다. 여성주의라는 서양에서 온 사상을 입맛에 맞게끔 바꿔 받아드리면 내면에 새겨진 유교사상이 지워질 거라 생각했나? 그럴 리가 없다.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여성을 열등하게 보던 그 교육이 그대로 남아있다. 연령차별이라는 도덕적 의무에서도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도덕적 의무는 어떻게 하지 못하면서 차별금지법을 운운하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다.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주입한 여성을 억압하는 내면의 코르셋은 건들기는커녕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외면에만 집중하며 외면의 코르셋만 벗자 주장했다. 그렇게나 차별 당하고 고통 받으며 절망 속에서 학력과 능력을 쌓은 인간이 내린 성별차별에 대한 해결방법이 고작 외적인 남성흉내라니. 탄식하게 된다. 남성을 흉내내면 평등해질 거라 생각했던 건가? 탈코르셋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단발과 밋밋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건 자유의 영역이지 여성인권의 영역이 아니다.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은 개인의 자유다. 그걸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여성주의자는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고 성적 억압을 하고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도덕적 의무를 행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와도 같다. 성적 억압을 받는 국가가 여성이 차별당하는 중동국가임을 안다면 여성의 성적 억압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야 했다. 여성이 성을 불편해하는 게 정상일 수가 없다. 여성이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과거 남성에게 정조관념을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성적 자유를 누리는 여성이 불편해진다. 이런 그릇된 도덕적 의무에 세뇌 당한 과거 여성주의자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들을 세뇌하여 똑같은 불편함을 새겨 넣었다. 과거 남성이 과거 여성을 세뇌하고 과거 여성이 현대 여성을 세뇌한다. 이게 바로 억압이 인권이 되는 과정이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남성이 여성을 성적 착취한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걸로 불편해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여성을 무시하는 거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착취당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을 단지 남성에게 착취당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불편해하는 거란 말이다. 과거 받은 약화교육이 대를 이어서 여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나타날 수가 없다. 남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 성 상품화가 불편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성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성 관념과 남성의 성 관념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성이 강한 성적 수치심을 가진 것은 그냥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분노는 여성에게 무례한 짓이다. 남녀 관계없이 성 상품화는 강요일 때에만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겠다. 누구보다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은 남성에 세뇌된 채로 말하는 것이었다니. 이런 건 정말 가엾은 광대를 보는 기분이다. 이런 짓을 혼자 하면 모르지만 사회가 수용해버려서 지금 사회혼란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기성세대와 여성주의자의 이해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혜택은 늘었어도 여성이 열등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인식은 같았다. 열등하니까 천대하자. 열등하니까 혜택주자. 근거는 똑같단 말이다. 왜 사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혜택과 억압과 통제를 수용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들이 여성과 아이를 위한답시고 열등함을 세뇌하고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은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고 사리분별이 불가능하여 성인지감수성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여성은 성 상품화나 꾸밈의 자유도 없게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아이는 정보 수용능력이나 성적자기결정권이나 선거 주권이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아이는 사생활이나 문화의 자유도 없게끔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하고 게임 셧다운제라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과 아이가 의지박약이나 성에 취약해진 걸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오랜 세뇌의 결과물인지는 모르겠는데 미성년이 그런 열등함이나 억압을 올바르다 주장하는 걸 보면 미칠 것 같다. 하긴 여성들도 본인들을 열등하다 주장하며 억압하는 걸 올바르다 받아드리고 있으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세뇌의 힘이란 진정 무시무시하다. 한국에는 이런 이들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안다. 이제는 여성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아동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그 따위 열등함이나 억압이 인권일 리가 없다. 여성과 아이는 열등하지 않단 말이다! 억압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제는 여성과 아이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나는 화가 난다. 세상을 평등하게 바꾸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되려 차별하던 과거로 역행 하는 걸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선동이나 세뇌 당한 이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저 지금부터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인간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어떤 범죄자가 있다 가정하자. 그 범죄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는 법을 통해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하나 사회는 그 범죄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고 범죄자가 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빈곤이면 빈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제도면 제도를 개선할 방법을 찾고 사상이면 사상을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죄율을 줄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려봐야 범죄 원인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커녕 증오의 확산만 부추길 뿐이다. 어떤 사이코패스가 있다 가정하자.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결핍되어 보통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사이코패스에게도 사회가 맞춰야 한다.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멸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개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온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감정결핍장애다. 사이코패스를 차별하는 것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과 같다. 사이코패스도 본인이 감정결핍장애를 겪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자신에게 맞춘 사회에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학생의 문제를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어떤 길이든 가야 할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헤매게 된다. 확실히 정해두고 가는 것이 좋다. 교육은 이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그럼 그 방향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의 의지.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대부분 그렇다. 아기를 생각해보자. 아기는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한다. 눈치보지 않고 큰 소리로 울어버린다. 이런 걸 보았을 때 인간의 의지박약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은 이런 인간의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우는 아기에 맞춰 교육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맞추라는 건 아니다. 아기가 젖을 달라 계속 운다고 하여 젖을 계속 주면 과체중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아기에게 필요할 때에만 젖을 먹도록 버릇을 들이는 것으로 아기의 의지와 필요한 교육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하여 아기의 의지를 꺾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 교육은 이 의지를 학생의 자아형성이 끝날 때까지 섬세하게 관리하며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아이의 의지가 꺾기는 일이 너무 잦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이의 의지가 어른의 사정에 의해 윽박지름을 당하며 꺾인 적이 얼마나 많았나. 아마 대부분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지박약이 된 아이들은 쉽게 악의에 노출되었다. 집단 괴롭힘이나 성적 노리개나 상습 체벌에 저항하지 못했다.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피해를 입은 시점에서 바로 신고를 통해 저항했을 것이다. 의지가 약하니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분개하면서 아이의 의지박약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다. 하지만 피해자를 약하게 한 자에게는 잘못이 있다. 그건 야생동물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버린 뒤에 야생에 던져놓은 잘못과 비슷하다. 자유는 강한 의지를 전제로 한다. 의지박약인 피해자의 의지를 믿지 못한다면 피해자가 동일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며 감시와 통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의지를 위해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라는 건 아니다. 어른에게 사정이 있으면 아이에게 설명을 하여 이해와 납득을 받으면 된다. 아이와 어른이 대등한 관계라는 걸 인지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어른의 사정으로 아이의 의지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아이의 의지가 꺾이지 않을 수 있다. 자아형성이 끝난 후에는 강한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알아서 해야 한다. 타고난 의지를 가진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둘째, 인간의 특성과 개성. 인간은 인간 본연의 특성과 고유한 개성이 있다. 우선 특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 본연의 특성은 욕구나 감정이다.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식욕.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고기와 채소에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런 인간에게 맞춰서 잡식으로 교육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채식이 옳다는 이유로 채식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유전적인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이 채식을 하는 것은 그릇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끔 약해졌기 때문이다. 못 먹는 음식이 있다 하여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아이의 미각은 예민하여 어른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쓴 음식이 그렇다. 어른 입장에서 먹을 수 있다고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커피를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간 지나면 알아서 쓴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으니 초조할 필요도 없다. 음식은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필수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 쓴 음식은 쓴 약을 먹게 하듯 필요하니 먹는 것이라 설득을 하거나 비타민 같은 걸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 수면욕.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면시간을 보장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려 든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인간은 충분한 수면시간이 있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인간에 맞춰서 수면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수면은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자는 동안 뇌가 알아서 기억을 정리하기 때문에 학습에 도움이 된다. , 성욕. 성욕에 대한 교육의 대처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포함된다. 식욕을 위해 먹는 방법을 배우고 먹는다. 수면욕을 위해 자는 방법을 배우고 잔다. 그런데 성욕은 그런 것이 없다. 명목상의 성교육 외에는 실제 성욕을 채우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욕은 사춘기 무렵부터 눈에 뜨는데 성욕 발산을 위한 성적 문화는 만19세 이후부터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다수의 사춘기 학생이 불법으로 성적 문화를 접한다. 불필요한 죄책감을 받으며 성욕을 해소한다. 다들 그걸 알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방치한다. 그러면서 표면상에서는 그 성적 문화에 한참 못 미치는 속옷만으로도 불건전하다며 규제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이보다 더 가식적이고 기만적인 것은 없다. 인간에 교육이 맞춘다면 당연히 사춘기부터 성적 문화를 개방해야 한다. 본인 몸에 있는 기능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인간으로 대우하는 게 아니다.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도구를 다루기 쉽게끔 기능 사용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며 성적 문화를 금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건 도구취급에 불과하다는 걸 꼭 좀 알았으면 좋겠다. 이제 인간은 인간다운 대우를 받아야 한다. 금지가 관습이기에 행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왕정도 관습이니 행해져도 된다는 말과 같다고 말하겠다. 백성을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이나 아이를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은 같다. 관습이 인간을 도구 취급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이제 개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의 개성은 특기나 적성이나 취미나 취향이나 지향이다. 학문으로 접근해보자. 인간의 개성에 맞춘 교육은 모든 학문을 고르게 잘하기 보다 잘하는 걸 확실하게 잘하게끔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개성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가 어느 정도 있다. 예컨대 운동이 그렇다. 운동은 체격적으로 한계가 분명하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높은 성장이 가능한 학문은 키우고 그렇지 못한 학문은 최저만 맞추면 된다. 각 역할에 맞는 능력만 확실히 갖추는 것이 이후 자동화 시대에 걸 맞는 인재다. 선진국은 단순한 물건이라도 거기에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보다 더 전문성을 키워야 해낼 수 있다. 물론 이는 학생의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취향으로 접근해보자. 외모지상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취향에 간섭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몰개성이 원인이다. 모두가 개성을 가지고 각자 다양한 취향을 가지게 되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고 억지로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는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성애가 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기에 긍정적이지 않지만 동성애의 자유는 인정한다. 특성 성적 지향을 지녔다면 거기에 맞춘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동성애를 부추기는 일이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성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 학생에게 동성애를 부추겨 동성애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온전하게 학생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본연의 특성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셋째, 대등한 역할. 교사는 만능이 아니다. 사회는 이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교사의 경험담이다. 학계에서도 모르는 걸 교사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가르쳤다. 그걸 학생이 부모에게 말하니 학부모가 항의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모르는 게 정상임에도 교사는 그걸 안다고 말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단적으로 교사를 만능으로 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교사를 의지를 넘어서 의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과거 교사는 체벌을 가해도 촌지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정도로 교사는 무한한 권리를 쥐고 있었다. 권리만큼 책임도 졌다. 그런 교사가 드물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로 교사는 학생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권리가 줄었다. 그런데 책임은 과거와도 같다. 권리는 낮은데 책임은 높으니 최근 교사는 힘든 것이다. 학생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내게도 교사는 만능이었다. 뭐든지 아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런 교사가 나의 의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세상 전체가 나의 의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능이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되려 나의 의문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차라리 교사가 만능이 아닌 줄 알았다면 스스로를 믿고 흔들리지 않으며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되돌려 교육에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이 말은 교사도 적용된다.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교사도 사람이다. 교사도 사람임을 명확하게 학생과 학부모가 인지해야 한다. 교사가 쉬는 날 유흥업소에 간 걸 사람들이 알게 되자 분노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그런 건전하지 못한 곳에 출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교사도 사람이다! 쉬는 날에는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유흥업소 출입조차도 막아버리면 교사는 어떻게 숨을 쉬나. 필요이상의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환상이 깨질 때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교사도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인간다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일부 학생이 교사를 막 대하는 것도 어떻게 하든 만능인 교사는 언제나 학생의 편이 되어 줄 거라는 의존적인 믿음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대등하다면 그럴 수가 없다. 교사도 학생도 그저 역할만 다르고 대등하다. 교사는 가르치는 역할이고 학생은 배우는 역할이다. 학생은 특별한 권위가 없는 교사도 역할을 존중해야 하고 교사는 개성적인 학생이라도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교사 또한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인간은 종종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한다. 노동자의 공노비와 사노비 농담이나 학생의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토로와 같이 말이다. 노동자를 노비에 비유하며 조소하듯 농담한 것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농노와 다를 바 없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이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토로한 것은 학교의 맹목적인 지식 주입이 도구 제조와 같다는 것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에서 교육받고 있으니 학생 자신을 위한 교육이라 느낄 수가 없었다. 도구로 제조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교사나 학부모도 모른다. 그러니 학생의 불만이 나오면 너를 위해서 또는 행복을 위해서라며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맹목적인 지식주입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지식을 주입 받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한다. 그래서 남들 못지 않게 성공한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기업에 충성해온 우수한 인재가 기업에 홀대 받자 버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 인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살았단 말인가! 정말 안타깝다. 인간은 자아형성이 끝난 뒤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얻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를 때 더 행복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의 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같은 환경이라도 결벽증에 걸린 인간은 작은 더러움에도 불행을 느낀다. 결벽증은 더러운 것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발생한다. 지식이 사람을 불행케 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하고 싶을 걸 할 때 행복해한다. 먹고 싶으면 먹을 때 행복하고 자고 싶으면 잘 때 행복하다. 그래서 자유로운 정도에 따라 객관적으로 행복한 정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을 불행하다 할 수 있는가? 반대로 미래의 사람들이 현대의 사람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지식은 행복을 위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식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면서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어째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힘이다.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야생에서 살기 위해서는 야생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지식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 중 하나다. 인간은 살기 위해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 살아야 할까? 그건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객관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알 수 없다. 모든 종은 생존과 번영이 기본적인 선이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은 종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자니 인류는 수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따지면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너무 미약한 이유다. 그렇다고 다른 기준을 찾자니 나머지는 전부 절대적이지 못하다. 흔히 타인을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주관적이다. 모두가 타인을 위해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걸 객관화한다면 누군가는 타인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본인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본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데 본인을 위해 사는 것은 객관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모두가 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종의 존속 외의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것이야 말로 종교나 전체주의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관적으로 각자 자유의지에 따라 찾아야 한다. 그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자유의지를 갖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인간을 교육하는 이유는 인간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고 인간이 교육받는 이유는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교육과 학생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 우선 교육의 입장에서 시작하겠다. 교육의 이념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교육의 목적은 이타주의도 아니고 학업성취도도 아니고 대학진학률도 아니고 취업률도 아니다. 자아형성과 상품화 능력이다. 온전한 자아를 형성하고 상품화 능력을 갖추게 도와주면 된다. 학생의 온전한 자아형성을 도우면 학생이 알아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공부로 얻은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게 도와주면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지금 교육은 자유로운 시대가 되면서 명확한 역할이 정해지지 않아 지나치게 많은 걸 짊어지려 하고 있다. 공부는 학생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것에 간섭하는 것은 학생의 역할에 대한 월권이다. 교육은 이제 그런 걸 내려놓고 학생의 자아형성을 위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가 가능토록 돕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선천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본성이나 본능을 파악한다는 것과 같다. 본래 인간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원리로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것이 학생에 맞추는 교육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겹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어째서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나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 따위나 희로애락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것을 배우고 인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모른다.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할 줄 모른다. 이 분리가 매우 중요하다. 다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본인이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이나 쾌락이나 고통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알고 있는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여럿이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리고 그 근거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모를뿐더러 알더라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야 선천적인 것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 탓에 이런 착각이 생긴다.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세뇌된 사람은 연하의 반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조관념에 세뇌된 이가 성 상품화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채식주의에 세뇌된 이가 육식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비폭력주의에 세뇌된 이가 폭력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그런 것들이 선천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세뇌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걸 온전한 자아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선천적인 성질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 후천적으로 세뇌된 성질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자아형성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분리하여 고유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타인에게 폐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벽을 치고 지나간다거나 가장거리를 걷는다거나 괴상을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감각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본인과 타인을 비교해보기 위해 타인의 고민을 상담해보기도 했다. 자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자아형성과정에 있는 인간을 상담했다. 나를 알기에 동성보다는 이성의 고민을 많이 보고 답변해봤다. 피드백을 바랐지만 익명으로 그건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관찰 중에 있는데 가능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본인의 감각을 파악하고 본인과 타인과 비교하며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연하에게 반말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적 도덕적 의무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도록 내부에 있는 인지를 수정했다. 이제는 연하의 반말이 불편하지 않는다. 예전에 고기를 먹을 때 갑작스럽게 맛이 없어지고 역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환경오염이나 채식주의를 다룬 영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기억해내고는 잡식이라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이라는 것과 후천적인 불편함이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며 계속 고기를 먹었다. 어느새 고기섭취가 불편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문틀 철봉으로 턱걸이를 하다가 철봉이 문틀에서 빠지는 바람에 머리에 혹이 나고 기절하는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그 사고로 나는 기억퇴행을 겪었다. 당시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5년 전으로 퇴행했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님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도 퇴행한 걸 내가 아니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 만에 나의 기억을 다시 되찾고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외 다양한 감각을 조정했다. 아마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할 수만 있어도 웬만해서는 자아형성이나 유지를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학생이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지가 약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 도중 무언가에 의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소심한 학생은 발표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게 정상일 수가 없다. 발표에 공포를 느껴? 무대에 오르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 말도 안 된다. 그것은 태생적인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잔혹하게도 그 사람의 의지를 꺾고 박탈하여 인간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도덕적 의무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부터 배운다. 연상에 의해 의지가 꺾이는 것이 올바르다. 복종부터 배우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복종을 당연시하는 것은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세배가 있다. 현재 세배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돈을 받는다. 보통 그런 행위는 복종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세배라는 관습을 통해 돈을 받고 연상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한국인이 연상과 돈에 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인척과 사이 좋은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사이가 좋아야 한다. 여성은 보다 더 심하다. 이걸 기본으로 여성은 여성주의자가 물려받은 여성용 약화교육을 추가로 받기 때문이다. 연상에 대한 복종에 약한 의지와 강한 성적 수치심이 더해진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떤 여성이 사고 발생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일부 여성의 행동력을 보고 의지가 약하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보통 그 여성의 의지가 아니다. 선동가의 의지다. 선동되어 한 행동에 자유의지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약화교육을 올바르다 여긴 이들이 요즘에는 남성에게도 주입하려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끔찍하다. 예전에 어떤 여성 아나운서가 남학생에게 은연중에 떠보듯이 농담조로 자위행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남학생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그리 큰 잘못이 아니었다. 남학생에게는 성적 주도권이나 자기결정권이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려 예전에는 자위행위를 남학생이 여교사에게 말해 논란이 일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사람들이 여성을 예로 들며 그걸 성희롱이라 규정하며 비판했다. 여성이 약화교육으로 약해진 것을 형평성 문제로 남성도 약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식사나 수면이나 자위는 비슷하다. 자위행위를 물어본 쪽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위행위를 부끄럽게 만든 쪽이 잘못했다.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것을 부끄럽지 않게끔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걸 배려하기만 한다. 성을 터부시하여 성에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과 같이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걸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수치심이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부끄럽다란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는 상태에 있거나, 숫기나 용기가 없어 거리낌을 느끼는 상태에 있다를 뜻한다. 어째서 성을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야 하는가! 성적 모욕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성 자체가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의사표현이 무시되면 수치심을 느끼나? 아니지 않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의사표현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성이 부끄럽지 않다면 수치심을 느낄 리가 없다. 수치심은 성을 부끄럽게끔 인지하도록 주입 당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인이 주입한 감정이다. 반면 자존심은 본인의 본성이다. 예컨대 비자발적 성적 접촉 같은 건 수치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 드높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야 한다. 수치심에 덜덜 떨 것이 아니라 자존심에 상처입고 분노해야 한다. 수치심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 결과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약하게 만들면 안 된다! 다음은 민족의 슬픔 강요다. 자본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침공을 둘 다 겪은 한국은 반자본-반공산 같은 이념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미반일-반중반북 같은 해당 이념을 가진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받았다. 이런 교육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뇌되듯 받기 때문에 감성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미국의 매카시즘이나 일본의 혐한과 비슷하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때에는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뇌되어 감성적으로 편하거나 불편하다고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없는 행동이다. 나는 반공반중이다. 현재 변질된 공산주의는 독재를 전제하고 중국은 그 체제에 있으면서 중화사상까지 가지고 있어 한국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반대하는 건 중국인 개개인의 성향이나 선악과 관계가 없다. 중국의 강함과 사상의 위험성에 위기를 느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감성적으로 불편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반대한다. 반미반일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일본과 갈등이 격해지고 있음을 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갈등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게까지 갈등을 겪고 있어도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을 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점을 유념하면서 갈등을 빚어야 한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싸움까지는 필요 없다. 그건 중국의 기세를 늘려줄 뿐이다. 보통 이런 민족의 슬픔을 강요 받은 이들이 주로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정당주의자가 된다. 연상에 대한 복종과 민족의 슬픔 강요가 한국인의 의지를 꺾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여성은 거기서 여성용 약화교육이 추가된다. 일부는 거기서 종교나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 따위가 추가되어 인간의 의지를 꺾는다. 채식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채식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채식주의를 하고 싶다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채식을 해야 한다. 만약 고기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먹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비폭력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비폭력을 하고 싶다면 폭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비폭력을 해야 한다. 만약 폭력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폭력에 연관된 곳에 있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의 경우 애초에 국가의 질서 자체가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에 있는 이상 사실 비폭력주의를 추구한다 하기는 어려워 다소 안타까운 기분이 들곤 한다. 민주적일수록 대부분의 공권력은 대화로 해결하지만 일부 강력 범죄자에게는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 국가 질서 내에 속한 이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초에 세뇌되어 인간의 본성인 잡식성과 폭력성을 부정하는 시점에서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성질을 잃게 되면 생존에 지나치게 취약하게 된다. 비폭력주의자는 남이 돌봐주지 않으면 타인이나 타동물의 폭력으로부터 본인을 보호조차 할 수 없다. 얼마나 가여운가?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한국인을 더 약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 대다수가 심각한 도덕적 강박증을 겪고 있다. 도덕에 어긋나는 걸 보면 강박증에 걸린다. 정말 슬프다. 종교는 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원래 자유의지가 있기 어렵다. 예컨대 신은 위대하다며 참수하고 테러 하는 이들에게 어떤 자유의지가 있을까? 씁쓸하다. 연상에 복종하게 하는 걸 피하고 여성용 약화교육을 피하고 민족의 슬픔을 강요하는 걸 피하고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사상을 피하고 종교를 피하면 일단 학생의 타고난 강한 의지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약해진 한국인을 가여워하며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알겠다. 하나 애초에 약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강해져야 한다. 세상에 약자만 남으면 도대체 누가 처음부터 약하게 태어난 사람을 돌보는가? 세상은 약자를 돌볼 수 있는 강자가 필요하다. 인간을 약하게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일부 어떤 사람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권력을 얻어 의도적으로 약자를 양산하려 한다. 멀쩡한 사람도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것이 정상이라며 세뇌한다. 멀쩡한 사람이 약해지면 이런 말을 외친다. 보라, 이렇게 약하지 않느냐! 배려해줘야 한다! 실제 그걸로 배려 받고 있다. 마음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다. A가 외친다. B가 아프잖아요! 배려해주세요! C가 대답한다. A님 진정하세요. B의 어디가 아프다는 겁니까? A가 외친다. 아니 안보이세요? 팔 다리가 아프잖아요! C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제 눈에는 아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때요? 모두 동의한다. 그러자 A는 눈을 희멀겋게 뜨더니 B의 팔 다리를 직접 분지른다. B는 고통 속에서 절규한다. 그 모습을 보며 A는 말한다. 봐봐요! B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이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몸을 떨며 그 광기를 바라본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배려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버린다. 이런 게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다음 배려해달라 외쳐 강제로 배려 받는 것과 같다. 이게 얼마나 잔혹한 일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하도 힘들고 어려운 걸로 배려 받는 일이 잦다 보니 기여도나 가치로 평가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움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내가 더 힘드니까 날 더 배려해줘. 이것이 잘못되었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학생이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하여 구분할 수 있다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학생은 본인의 본성을 파악하여 어떤 것을 어떤 것을 키우고 줄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용기는 키우고 폭력성은 줄인다. 자립심은 키우고 의존성은 줄인다. 이런 걸 타인이 조절하면 능력의 가치지기처럼 능력 자체가 지워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본인이 조절하면 그런 위험은 적은 편이다. 능력의 가지치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 인간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진화를 통해 야생의 동물이 가축화가 되었듯이 인간도 사회화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화가 필요하다. 사회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간이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다. 정원사가 나무를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 하듯이 보호자가 인간을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 아이의 의지가 너무 강하여 어른의 말에 반항하면 의지를 가지치기 해서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두뇌회전이 너무 빨라 어른의 말에 모순을 발견하여 지적하면 지능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인간관계가 너무 좋아 어른을 무시하면 관계를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호기심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면 호기심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애정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성가시게 굴면 애정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반대로 어른이 집착이 강해 아이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꺾는 등의 다양한 가지치기를 하는 일도 있다. 천재의 범재화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해로우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복종을 요구하면 의지가 꺾이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 상태에서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은 이들이 보통 의지가 약하고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다. 발표도 제대로 못한다. 아이를 부모가 망가트린 것이다. 대부분 부모는 그저 배운 대로 가르치지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을 잘 모른다. 부모도 그렇게 배웠고 조부모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그런 걸 알면서 개개인을 탓하기는 어렵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 교육에 있어 비전문가인 부모가 아이의 자아의 형성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나무처럼 일방적으로 가지치기 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키우고 줄일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본성을 파악하여 알맞게 조절한 상태에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은 뒤 도덕과 가치관을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된다. 예컨대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유주의와 역할주의를 도덕과 가치관으로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했다. 그걸 바탕으로 나온 게 바로 이 글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학생은 보통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올바르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일반적인 동물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 시야를 넓혀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강화교육이다. 선천적인 것은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도록 막고 후천적인 것은 강화교육을 통해 강해지도록 한다. 강화교육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시장경제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은 무엇이 있을까? 원시적인 것부터 가보자. 무력과 지력과 매력과 권력과 재력.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 재력교육은 돈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힘을 기초로 한 교육과정에서 필요한 과목을 정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교육이다.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은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이 어떤 것인지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다. 폭력이 나쁘다고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은 폭력의 제어방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폭력을 위해 무기가 발달했다. 인류가 최고포식자가 된 이후 무기는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달했다. 그런 무기가 반드시 악이라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상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방어하다 죽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무기는 어떤 행위의 수단일 뿐이다. 현대의 무기는 보통 총이다. 학생은 총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봐야 한다. 현재 인류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총이란 폭력을 안다면 주먹이란 폭력으로부터 다소 대담해질 수 있다. 총이란 큰 폭력을 안다면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도 그 괴롭힘이 작은 폭력임을 깨닫고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싸운다는 것은 물리적인 반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신고할 수 있는 의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대부분의 집단 괴롭힘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지속된다. 이 점을 유념하여 의지가 약해진 학생에게 다시 강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총을 체험한다고 해서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사격장에서 총이 어떤 것인지 한번 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교육은 학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은 총이 금지되어 물리적인 폭력이 약한 이들이 지나치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총이라는 큰 폭력을 체험하면서 이미지를 구축해 상대적으로 약한 폭력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사물을 보는 방법을 알아보자. 사물은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1+1=2와 같이 명확하고 논리적인 것만 파악하고 그 뒤에 인간관계나 도덕이나 가치관을 붙여 판단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세배는 풍습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 행위만 떠올려보자. 연상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다. 이 행위만 보면 옳지 않다. 거기에 세배는 풍습이라는 것을 붙이면 세배는 옳지는 않지만 풍습이라 허용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바로 본질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범죄를 저지른 종교인을 같은 종교인이 옹호하는 일이 있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다. 범죄자의 범죄행위만 바라본 뒤에 종교인을 붙여보자.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가정하자. 그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행동만 파악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음을 붙여보자. 그러면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노동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학력이나 경력을 배제하고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학력이나 경력이 낮아도 생산성이 다른 사람과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야근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생산성이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생산성을 보고 그 뒤에 이것저것 붙여서 판단하면 공정하게 대우해줄 수 있다. 지식의 활용방법을 알아보자. 지식의 활용방법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문제를 찾거나 만드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해결능력이 키워진다. 단순히 누군가 만든 문제를 푸는 것은 퀴즈풀이 능력일 뿐이다. 과학지식을 배웠다고 하자. 그 지식으로 어떤 문제를 찾고 만들 수 있는가? 찾거나 만든 문제의 풀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화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어떻게 꽃을 키울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만들고 화학비료를 제조하여 흙에 뿌리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각자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스스로 떠올리며 직접 실행해봐야 한다. 국어를 배우면 창작을 해봐야 한다. 영어를 배우면 실제 대화를 해봐야 한다. 수학을 배우면 문제를 만들어봐야 한다. 이런 지식활용방법에 사람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품가치가 있는 매력이 더해지면 상품화가 가능해진다.

 

,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체로 매력적인 인간은 어딜 가도 환영 받아 살아가기가 편하다. 그런 걸 배우게끔 해야 한다. 우선 자기자신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머리스타일과 패션스타일을 배우고 얼굴을 꾸미고 몸을 관리한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이 꾸미는 걸 금지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꾸미는 걸 막는 것은 학생을 도구 취급하는 것과 같다. 학생을 도구로 여기니까 인간에게 중요한 매력을 무시하고 얌전하게 지식만 주입 받으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방법과 행동요령과 품위를 배운다. 보통 이런걸 잘하는 사람이 사귐이 좋고 발표능력이 뛰어나다. 다양한 관계를 늘려나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행이나 아르바이트는 안전하다면 어렵지 않게 추천할 법 하다. 어떤 학생이 강한 의지가 꺾여 의지박약이 되어 인간관계가 어렵다면 강한 의지를 되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타입에게 다양한 관계 맺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에 노래나 춤이나 연주나 유머나 요리 등과 같이 사람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특기 몇 가지를 익히면 기본적인 매력교육이 끝이 난다. 매력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웬만해서는 어딜 가든 환영 받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약화교육을 받지 않고 매력교육만 잘 받아도 모두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 지금 연애비율이 낮은 것은 연상의 과도한 간섭과 매력교육을 미비로 이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매력만 키워도 대부분은 알아서 잘 연애할 거라 본다. 그 중 몇 연인이 결혼을 하고 그 중 몇 부부가 출산을 한다. 연애하는 인간의 풀이 넓어야 결과적으로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다. 자유국가인 이상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학생 90%이상이 자발적으로 연애를 하는 걸 목표로 교육해야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실상 정치적인 능력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교육은 학생이 모든 능력을 포괄적으로 사용하여 인간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얻을 수 있게끔 가르치면 된다.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하나 다른 힘이 작용하는 예가 많다. 예컨대 매력. 매력적인 사람의 주장은 같은 논리라 하더라도 대화상대자가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체계적으로 나아가면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은 관계의 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수가 적을수록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지고 수가 많을수록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진다. 앞이 일반정치라면 뒤는 대중정치다. 학교로 구분 지으면 앞이 소속된 반이고 뒤는 학교 전체다. 일반정치는 집단 구성원보다 뛰어나면 된다. 모든 능력이 고르게 뛰어나면 리더가 될 것이고 특정 능력이 특출 나게 뛰어나면 전문가가 될 것이다. 리더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과 전문가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을 익힌다. 리더는 집단 전체를 고려하여 언행을 하고 전문가는 전문 영역을 고려하여 언행을 한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으면 얕고 넓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깊고 좁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선택하여 어느 방향으로 주도권을 잡을 건지 계획하면 된다. 전체적인 주도권이든 국소적인 주도권이든 어느 영역이든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수 있어야 자기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 대중정치는 이를 기본으로 하되 대중에게 평가 받는 만큼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을 표출할 필요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대중의 이상이다. 그 이상에 맞춰야 대중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가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우위에 서려다 둘 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말해두겠다. 대중은 수가 많으므로 숫자로 판단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설문과 통계의 숫자에 기대게 된다. 그래서 곧잘 숫자에 휘둘린다. 하나 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비슷한 환경에 자라난 이들은 본질이 같은 경우가 많다. 비슷한 유형을 일반정치의 수가 될 때까지 묶어버리면 대중의 이상을 파악하기 쉬워 다소 편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잘못 파악해버리면 잘못 묶어 판단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으로 묶을지도 중요하다. 예컨대 특기로 묶을 것인지 취미로 묶을 것인지 같이 말이다. 한국정치를 예로 들어보겠다. 지금 한국정치는 지지 근거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에 근거한 트라우마인 경우가 많아 그걸로 묶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부분을 자극하여 선동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바람직하지는 않은 방법이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정치는 분야로 묶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수가 늘어날수록 관계가 옅어져 일일이 대화를 하기 어려워 알기 쉬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다. 대화를 나누기 어려우므로 오해를 사지 않는 언행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슬로건이 중요하듯 정치는 어떤 단어로 이미지가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걸 고려해야 한다. 네거티브. 비방이나 비난 따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맞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그걸 쓴다. 교육에서는 그걸 지양하더라도 언제든지 쓸 수는 있게끔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 재력교육은 자본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의 모든 생산 활동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야 한다. 적은 금액이라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법을 익혀야 돈의 가치를 인지하고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이타심을 길러주겠다고 봉사활동을 강요하며 노동의 대가를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학생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도구와 비슷한 취급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무실을 청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교무실을 청소하는 학생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지급한다면 부당하다 할 수 있었을까?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차이가 두드러질 수는 있다. 그러면 청소 자체는 똑같이 평등하게 하고 거기에 비용만 지불하는 형태가 되면 된다. 교육에 있어 불필요한 차등은 필요가 없다. 학생 때 어떤 활동을 하고 적은 돈이라도 받는 경험은 굉장히 귀중하다고 강조하겠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교사의 이름으로 주식투자를 시도해본다. 큰 금액이 아니기에 놀이와도 같다. 그런다고 해도 자본의 흐름에 예민해지는 편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가 좋다. 자본에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의 주인이 되어야지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자본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이런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까닭은 대부분 도구로 제조되어 인간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바라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그래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없이 이것저것 대답할 뿐이다. 확고한 목적이 없다.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건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된다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시야가 좁아지는 바람에 돈이란 단어를 다른 힘으로 교체해도 결과는 같다는 걸 모른다. 재력을 권력으로 바꾸나 무력으로 바꾸나 매력으로 바꾸나 높은 확률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낮은 확률로 무작정 쏟아 부어도 하고 싶은 걸 못할 수 있다. 재력은 이런 힘 중 하나일 뿐이다. 돈의 특성상 아무 능력이 없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보다 더 매달리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게 욕망이 작다는 걸 의미한다. 강한 욕망이 있다면 강한 힘을 바랐을 것이다. 돈을 바라는 욕망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게 아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저 사는 게 목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게 그건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학생이 인간다운 목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본을 다루는 법을 배워 자본의 주인이 되어 목적을 위해 자본을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인간이 되게끔 가르쳐야 한다.

 

다양한 힘을 배운 상태에서 다양한 도덕과 가치관을 접한 다음 현재 사회의 도덕과 가치관이 타당한지 검토해본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하자. 우선 보편적인 도덕과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그 뒤 주관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도덕과 가치관을 구축하다 보면 큰 틀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있어도 작은 틀은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이 담길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각각의 사건에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의지를 가진 이가 고유한 개성을 갖춘 다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온전한 자아를 형성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이나 세뇌가 간섭하더라도 온전한 자아가 있다면 크게 휘둘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명확한 방식과 원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아를 바탕으로 현명한 지성을 갖춰야 비로소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고 한다.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것. 알파벳 A에서 Z까지 어떤 지식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거기에서 누구는 AFZ를 조합하여 새로운 걸 만들고 누구는 BCN을 조합하여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이런 것이 보통 새로운 인식이다. 현명의 의미는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다라고 한다. 현명한 지성이란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명함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명함은 뒤에 붙어야 한다. 먼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는지 판별해서 결정해야 한다. 사람은 생각을 할 때 제한을 두면 한계에 봉착한다. 생각에는 어떤 제한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예를 들어보겠다. 소설을 파악할 때 보통 작자의 의도를 알아보는 식으로 교육한다. 그럴 때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답과 자신이 생각해서 결론 내린 답을 둘 다 생각해야 한다. 평가를 할 때에도 객관적인 답과 주관적인 답을 둘 다 적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어야 객관과 주관을 비교하여 명확한 주관을 파악할 수 있다. 파악할 수 있어야 학생의 주관이 살아남을 수 있다. 객관을 모르는 인간이 주관을 분리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주관을 모르는 인간이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다. ,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주관을 유지한 학생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이 볼품없거나 미약하거나 중복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를 통해 완성을 하는 걸 목표로 하게끔 해야 한다. 인류는 역사가 오래되어 지식을 매우 많이 쌓여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생각이 과거와 겹칠 확률이 높다. 겹치는 게 시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 교육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그 생각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다음 새로운 생각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행착오 없는 새로운 길은 드물다. 성패와 관계없이 일단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 과정 속에서 현명함을 덧붙여야 한다. ,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주관으로 만든 새로운 것을 타인이 알기 쉽게 설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듬어서 공개한 뒤 그걸 많은 사람들이 받아드리게 되면 객관화가 된다. 정리해보자. 학생이 강한 의지와 현명한 지성을 갖춘 온전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인간교육이다. 그 다음 능력을 상품화하여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어야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인간교육까지는 교사가 주도적이고 능력의 상품화부터는 학생이 주도적이다. 이제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능력은 상품화가 되어야 소유권이 생긴다. 인간은 능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능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능력의 주인이 되어야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능력의 상품화야말로 인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열쇠였다. 지금까지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같았다. 농노에서 배려를 늘린 것이 노동자다. 자본가는 노동자 자체를 구매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한계까지 착취했다. 이것이 가여웠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에게 불쌍한 노동자를 배려해달라 요구했다. 사회는 가엾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괄적 근무시간이나 고정된 최저임금 등과 같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런 배려를 받는다고 본질적으로 농노의 위치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배려만 늘어났을 뿐이다.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자며 노동자를 선동을 했다. 선동 끝에 나라가 세워지자 공산당원이 자본가의 위치를 대신했다. 자본가가 공산당원으로 바뀐 것일 뿐이기에 노동자는 여전히 고통 받았다. 중국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다. 그러자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원이 자본가와 노동자를 착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 실상 노동자의 나라가 아니라 공산당원의 나라가 되었다. 농노와 노동자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계속 착취당했다. 농노가 지주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자본가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공산당원이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은 모두 같다. 씁쓸한 일이다. 노동자가 불쌍해 배려해주는 것으로 끝나버리니 근본적인 구조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것은 환자가 불쌍해 진통제를 먹이고 끝나버리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는 치료를 해야 한다. 이제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능력의 상품화다.

 

상품은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모든 걸 지칭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능력을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일정시간 동안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한 노동부터 복잡한 노동까지 전부 적용될 수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전문직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되려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래야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거래했기 때문에 대여의 형태로 구매한 능력 외의 것을 노동자에게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계약위반으로 인한 계약파기 및 위약금 지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얼마나 대등하고 공정한가? 물론 인식의 차이로 정착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릴 수 있으나 이 길이 모두 대등해질 수 있는 길임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품화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할까? 그건 능력에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매력을 더하면 된다. 그 매력에 이끌려 능력을 빌리고자 하는 이가 나타나면 거래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은 뛰어나다. 평균 학력도 높고 국민성도 나쁘지 않다. 한국보다 안전한 국가가 드물다. 애초에 한국인은 과중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기본적으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험한 말을 하는 이조차 사회에서는 보통 얌전한 편이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의무는 자유적응이 필요하다. 종종 한국인이 한국인을 평가절하하는데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우수한 편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상품화 능력은 낮은 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실업률이 높을 수가 없다. 애초에 대부분 상품화 능력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낮을 수밖에 없다. 능력의 상품화나 사물의 상품화가 단순히 포장이나 꾸밈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유창한 자기소개나 포트폴리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능력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게끔 만드는 걸 말하는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것에 추가로 포장을 할 수 있는 거지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에 포장해봐야 의미가 없다. 필요한 정도에 따라 상품가치가 달라진다. 상품화를 한다고 해서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필요가 되는 걸 목적으로 한다. 상품이 필요 되면 알아서 수요가 올라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직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어렴풋이 익히고 있다. 하나 그래서야 제대로 익힐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익혀야 된다. 자아형성시기에 사고방식과 행동원리가 굳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상품화 능력을 키워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렵다.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힘들다. 어릴 때 이성애를 배워둬야 나중에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여 출산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듯 어릴 때 상품화 능력을 익혀둬야 나중에도 취업하고 사업하여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상품화 능력이 몸에 배면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상품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생이 상품화를 하는 능력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건 학생들이 직접 상품화를 해봐야 한다. 조별과제를 예로 들어보자.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고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는다. 조장은 교사에게 과제를 팔아 점수를 벌고 조원은 조장에게 능력을 빌려주고 점수를 번다. 조장은 교사가 구매하고 싶어할 새로운 주제를 다룬 과제를 만든다. 조장은 과제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조원을 찾는다. 조원은 조장에게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빌려준다. 조장은 시장에 나온 능력을 면밀하게 판단하여 필요한 능력을 빌리는 계약을 맺는다. 계약서에 미리 점수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 조장과 조원의 협력으로 과제가 완성되면 그 과제를 교사에게 판다. 교사는 과제의 가치를 고려하여 적절한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한다. 조장은 지불 받은 점수를 계약서에 명시된 분배 방식에 따라 조원에게 나눠준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교사에게 100점을 지불 받으면 조장은 계약에 따라 A에게 23점을 분배하고 B에게 24점을 분배하고 C에게 25점을 분배한다. 조장은 나머지 28점을 받아간다. 과제에 대한 기여도나 판매 결과에 따라 계약위반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조원에게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점수를 분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점수 수익이 낮아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300점에 팔기로 하고 분배를 결정했는데 100점에 팔리면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분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퍼센트로 분배하기로 해두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점수로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계약에 간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야 교육이 되지 못한다. 이런 계약문제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의미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공정한 점수를 분배하는 것도 공정한 부를 분배하는 것을 경험하여 부의 분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교육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유사경제구조를 만든 다음 조원인 학생이 직접 조장인 학생에게 능력을 빌려주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조장이 능력을 빌리려 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조장인 학생은 직접 교사에게 과제를 파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교사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조장과 조원을 번갈아 하면 다양한 입장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능력의 상품화는 학생의 능력을 보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키우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학생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인간 자체가 팔려나가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책임지는데 다소 소홀했다고 본다. 자신의 소유도 아닌 능력을 굳이 더 키워야 할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소유하여 키워나가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런 유사경제구조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운 다음 실제 경제구조에서 상품을 파는 것을 경험해봐야 한다. 상품화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웠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사업자에게 능력을 팔아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여 온라인 마켓에 사물을 팔아 수익을 얻어본다. 이외 나머지도 비슷하다. 학문을 상품화하여 논문을 제출해보거나 예술(미술 음악 등)을 상품화하여 개인방송이나 사이트에 올려본다. 기술(IT)을 상품화하여 앱을 제작해 어플리케이션 플랫폼에 올려보거나 문화(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를 상품화하여 사이트에 올려본다. 자신의 능력이나 사물에 매력을 더해 사람에게 필요로 해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새로운 상품화도 할 수 있다. 게임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듯이 새로운 걸 상품화하여 팔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상품화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어떤 상품을 바라는 본질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그 본질을 공유하는 다른 영역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애정결핍에 걸려있는 국가다. 한국은 애정결핍을 대중문화로 해소했고 일본은 애정결핍을 창작물로 해소했다. 그래서 한국은 주로 아이돌문화가 발달하고 일본은 주로 오타쿠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애정결핍이란 본질을 파악한 뒤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상품화다. 이렇게 팔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그런 것을 본질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익혀두면 앞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상품화는 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교육은 명확한 목적을 제시하고 공정한 평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상품에 매력을 더해 상품가치를 키울 것인지는 학생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교사가 그걸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주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육이 되지 못한다.

 

상품화 교육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마침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어디서든 지식을 참고할 수 있다. 이제 요점만 암기하면 된다. 요점만 기억하면 인터넷에 검색하여 나머지를 보충할 수 있다. 전문분야는 많은 걸 암기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야에 종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암기가 될 것이다. 전문 외의 분야는 요점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평가도 요점만 평가해야 한다.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보자. 어느 쪽이 더 수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상품화 능력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 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니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학생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로 팔려나갔으니까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데 소홀했던 것이다. 상품화 능력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자. 암기는 평가하기가 쉽기 때문에 공정하기도 쉽다. 양궁의 표적 점수와 같다. 하나 상품화 능력은 객관적인 수치를 도출하기 다소 어렵다. 피겨스케이팅의 예술 점수와 같다. 기업이라면 상품이 팔린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나 교육은 능력의 종류가 다양하여 모든 상품이 자본을 대가로 받지 않고 과정도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다. 그래서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상품화 능력은 학생이 주도한다 했다. 학생은 교사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의 상품을 팔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면 대학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보여주고 판단하게 한다. 대학은 최저수능점수를 통해 최저한의 지식을 평가하고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한다. 대학은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기에 상품화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나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학문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학문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의 지향점과 무엇이 다른가? 오로지 개인의 욕망에 따라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이 학문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것이 학문에 부적합할 수가 없다. 기업이면 기업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준다. 기업은 결과를 중시하기에 결과 중심으로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상품화의 결과를 토대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얼마나 팔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는지를 어필한다. 이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학생이 상품화를 통해 능력의 가치를 증명하는 식으로 진학과 취업을 해야 한다. 사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면 굳이 대학이나 기업에 가지 않아도 된다. 홀로 또는 여럿이 사업을 하면 된다. 대학은 진정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면 된다. 기업은 잠시 사업비용을 얻기 위해서 가거나 특별히 가고 싶었던 기업에 가면 된다. 이렇게 학생이 주도적으로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기업에 어필할 수 있으면 교사의 평가는 오로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객관적인 평가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교사의 학생 평가라는 주관적인 정보에 신뢰도를 더하기 위해 학생이 교사를 평가한 것도 참고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이다. 강한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본성을 파악하고 온전한 자아를 형성한 뒤 현명한 지성을 갖추어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국가의 인간교육이다.

 

인간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쉴새 없이 빠르게 달려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나치게 빨리 달려서 인문학이 쇠퇴할 정도로 경제와 기술 위주로 발달했던 것 같다. 한국은 그러다 자유적응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제는 자유국가에 맞춰 사상과 구조를 재정립해야 하여 자유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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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써봐야지 하고서 일단 주제부터 던져놓고 쓰는데 상상 이상으로 생각할 게 많았네요. , 인간교육도 이 정도 걸리는데 역할주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할지 예상하기 어려워요.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경험도 쌓아야 하고. 까놓고 말해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서 경험이 부족한 게 꽤 많거든요. 어쨌든 그러면 일반 사상서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요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연기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연기자가 불현듯 현실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현실에서 정치가를 연기해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모든걸 버리고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기자는 맑은 이상을 가진 사상과 완벽한 정합성을 띈 논리와 끝없는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채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섭니다. 연기자는 관객들을 속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 속임수에 사회 전체가 속았습니다. 속은 것은 연기자 본인도 마찬가지. 진심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개혁과 혁신이 담긴 정치를 합니다. 사이가 좋고 업신여겨지지 않는 외교를 합니다. 모두가 납득하는 부패를 청산하는 경제를 만듭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상으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낡은 부조리를 지우는 문화를 만듭니다. 다양한 모순을 바로잡습니다. 국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그 연기자는 모두를 속인, 자기자신조차 속인 위대한 연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정치는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그리고 국민은 무엇을 원할까요? 정치가의 역할은 다른 사람 대신 싸워주는 겁니다.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그들을 위해 대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정치가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사로운 사리사욕 정도의 작은 욕망을 지닌 사람은 정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발전과 수많은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순수하고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인간이 정치에 적합합니다. 정말 욕망에 미친 인간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진심으로 말하건대 정치가를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만두지 않겠다면 연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을 연기해주세요. 이상을 연기하다 보면 그 이상이 자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떨 때에는 차라리 내가 보좌관을 하는 게 더 잘할 거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대중정치는 잘할 것 같은데. 대중정치는 소용돌이죠.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직선으로 가는 것보다 돌아서 가는 게 보통 더 빠릅니다. 뭔가 임팩트를 줄 때에는 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소용돌이를 돌되 속도감을 줘야 하는 거죠. 모두 고려하면서 빠르게 진행하면 됩니다. 작은 시작점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점점 커집니다. 소용돌이가 커짐과 동시에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런 식이 영향력을 키우면서 주도권을 강화하는 게 대중정치라 생각합니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언행을 하고자 한다면 하기 전에 한번쯤은 소용돌이를 떠올려보길 권합니다.

 

맞춤법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질답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하나 말하자면 국어학자가 한국어 문법을 정리해서 불규칙을 없애거나 줄였으면 좋겠네요. 한국 국어학자는 우수하다 봅니다. 분명 연구하면 보다 효율적인 문법이 탄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단어변경에 힘을 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유익할 겁니다.

 

소음 스트레스 이사 가고 싶다 의자 바꾸고 싶다

 

왤케왤케 단어가 왤케왤케 귀엽나요 빵모자도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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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게임의 사회정착실패 (0) 2021/07/11 PM 04:54

게임의 사회정착실패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2020년 하반기 모바일 게임 사용자 수만 해도 2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민 절반 이상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만큼 어떤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자명했다. 실제 게임회사와 고객 사이에서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 분쟁으로 고객들이 돈을 모아 회사 앞으로 트럭을 보내는 일명 트럭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시위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른 분야를 생각해보자. 보통 분쟁이 발생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분쟁을 해결했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했다. 그런데 왜 게임은 그러지 못했을까? 그건 분쟁사유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준에 온라인게임서비스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기준의 항목을 살펴보자. 미성년자계약, 서비스 중지와 장애, 청약철회, 계속적 이용관계와 이용관계 거부, 허위 및 과장 광고. 이것 외에는 없다. 이 기준은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분쟁은 고유의 특수성에서 일어난다. 특수성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으니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통째로 판매했다. 폴란드에서 외교 관례 선물로 선택한 위쳐나 발매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와우가 바로 그러하다. 오프라인 게임인 위쳐는 게임 자체를 팔았고 온라인 게임인 와우는 매월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월정액 방식으로 서비스했다. 이 둘은 보통의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게임 자체만 팔았다. 게임회사는 고객에게 가상의 세상을 체험하게 해주는 이야기꾼이었다. 지금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이것을 기초로 했다. 만약 모든 게임이 이런 형태였다면 지금의 기준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 누군가 굉장한 생각을 해냈다. 여기서부터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 시작된다. 어떤 게임회사들이 이야기 내에 있는 요소에 금전적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가상의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상품화하였다. 가상의 세상의 재화로만 얻을 수 있었던 장비나 치료제를 뿐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에게조차 금전적 가치를 매겨 현금으로 팔기 시작했다. 게임회사가 직접 이야기 속의 상인이 되었던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심정이었을까? 자본주의는 누군가 지역이든 분야든 선점하여 장악하면 후발주자가 추월하기 어렵다. 세계화가 된 지금 대부분의 영역이 선점되어 있다. 대다수 신생 기업은 후발주자에 머물렀으나 어떤 게임기업은 가상의 대륙을 만들어 그 대륙을 선점하여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다. 기가 막힌 상품화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품을 팔기 위해 가상의 대륙에 가상의 전쟁터를 마련했다. 고객은 그 전쟁터에서 싸워 승리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기기 위해 게임 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쯤 되어 고객은 가상의 세상에 방문한 이세계인이 되었다. 현금만 지불하면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이 게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세계물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게임에 빠지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가상의 전쟁터에 무기를 공급하는 게임회사는 어느 순간 이야기꾼에서 무기를 파는 죽음의 상인이 되었다. 전쟁터 내의 경쟁 속에서 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죽음의 상인이 된 게임회사는 실적이 나날이 올라갔다. 이야기꾼이었던 게임회사들도 그 흐름에 동참하여 이야기 속의 요소들을 팔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모바일 게임 매출 10위권은 전부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BM(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게 되었다.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다.

 

이런 특수성이 있음에도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회사는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원 단위부터 억 단위의 상품을 팔아버렸다. 게임 내 시스템 미비로 거래에 문제가 발생해도 거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현금으로 판 게임 내 상품의 품질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새로운 상품의 가치를 하루 아침에 폭락시켜도 될 정도로 가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심지어 상품에 대한 상세내역을 거짓으로 고지해도 책임지지 않았다. 오로지 자본논리에 따른 시장경제의 흐름에만 맡겼을 뿐이다. 이런 건 요즘 시대 일반 기업에서는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이래도 된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과거 질서가 없었을 시대의 기업처럼 성장할 수 있다. 게임회사는 지금 무질서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게임회사는 죄책감이 없었다. 잘못된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없는 폭거에 많은 고객이 분노했다. 시장경제에만 맡겼기 대문에 고객은 불만이 생기면 신규 고객 유입을 방해하는 별점테러로 대응하게 되었다. 별점테러란 모바일 게임의 평점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걸 의미한다. 그 테러가 부당하다 여긴 게임회사도 분노했다. 명확한 잘잘못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사소한 불만으로도 평점을 낮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로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트럭시위는 온라인 게임 내의 상품 확률을 거짓고지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건 지금까지 쌓인 분노가 거짓고지로 터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트럭시위는 이런 흐름의 끝에서 발생한 것이다.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중재하는 기준은 소비자보호에 있어 기초 중에 기초다. 이런 기초적인 기준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한국에서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공적 논의가 거의 없다. 일부 국회의원이 트럭시위를 보고 이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태도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게임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런 일부의 움직임은 너무 미흡한 처사다. 누군가는 게임의 중요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게임은 천대받았기 때문에 그런 선입견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중요도는 그런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한국은 국민 절반이 게임으로 여가를 보낸다. 중요도가 낮을 수가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게임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게임업계는 이제 인간의 여가를 책임지고 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게임이란 편견에서 벗어나 인구수와 시간과 영향력만 생각하면 게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공적 논의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정치권은 게임의 중요도가 낮다 생각했을 거라 본다. 그게 바로 새로움을 거부하는 타성에 해당한다. 시간이 흘러도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다. 그게 바로 낡은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이것에 대해 정치권만 타박하고 싶지 않다. 사회전반적으로 타성에 젖어 자유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사상과 구조는 강요로 둔 채, 개인에게 자유를 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렇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다가 자유롭게 놔두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유롭게 놔둬도 결혼과 출산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사상과 구조를 자유로 바꿔야 한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을 버리고 이른 시기에 빠르게 연애하고 성관계하고 결혼하는 풍조와 그에 맞는 사회구조가 형성되어야 저출산이라는 국가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러하였으니 이런 타성은 모두의 책임이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새로운 길을 안내하지 않은 사상가의 책임이다.

 

 

 

이 타성이 일으킨 현상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우선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의 형태가 어떠한지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에 비유해보겠다.

 

어떤 명당 낚시터가 있다고 가정하자. 고객은 그 낚시터에서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 낚시터는 출입 자체는 무료지만 낚시터 주인이 제공하는 낚시물품만 빌릴 수 있다. (부분유료화) 고객은 만족감을 위해 낚시터 주인에게 낚시물품을 빌린다. (이야기 내 요소를 대여의 형태로 판매) 그러다 낚시터 주인이 특정 낚시터에서 좋은 물고기를 낚으면 좋은 낚시물품을 준다는 명목으로 고객들을 경쟁시킨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보다 좋은 낚시물품을 빌리게 된다. (경쟁을 부추겨 고가의 물품을 판매) 그때 낚시터 주인은 판매하는 낚시물품에 뽑기에 변동확률을 집어넣어서 좋은 낚시물품을 도박의 형태로 대여한다. (도박과 거짓고지) 낚시터 주인이 고객들을 출입시키기 위해 매일 일정한 낚시물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출석)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고가의 낚시물품을 매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구독경제) 고객들은 좋은 낚시물품을 대여하여 고객들과 경쟁하는 걸 즐기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낚은 물고기는 기록으로 남아 우수한 낚시꾼의 증표가 된다. 이 증표는 실제 물건이 공급되는 것으로 표창이나 트로피 또는 낚시협회의 공인된 낚시꾼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낚시터에서의 기억과 기록이 애정이 된다. (매몰비용) 그러다가 낚시터 주인이 갑작스럽게 낚시물품의 가격을 올린다. 한창 낚시터에 비용을 지불하던 고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갑작스런 가격변동에 불만을 가지고 낚시터를 떠나려고 해도 매몰비용이 아까워 갈등하게 된다. 그렇다고 남자니 낚시물품의 대여비가 부담된다. 더군다나 이번 변동이 계속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안정성 부재) 갈등 속에 결국 남게 된다. 낚은 물고기와 낚시물품은 낚시터 주인의 높은 수수료를 받는 중개로만 거래가 가능하다. 수수료 부담으로 다른 방식을 통해 거래를 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보상은 일절 없다. (거래보증 부재) 고객이 낚은 물고기나 낚시물품의 품질이 손상되어도 보상은 없다. (품질보증 부재) 고객이 낚시물품을 대여한 다음 날 그보다 품질이 높은 낚시물품을 판매한다. (가치보증 부재) 고객이 이런 것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려고 해도 그 어떤 기준도 없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부재)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고객은 다른 낚시꾼이 이 낚시터에 오지 못하도록 나쁜 소문을 퍼트린다. (별점테러) 끝내 낚시터 앞에서 트럭을 가져와 시위한다. (트럭시위) 어느 날 고객이 낚시터에 가보니 낚시터 시설과 주인이 없다. (게임종료) 그 동안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이나 낚시기록이 사라졌다. (게임 내 아이템이 대여인 이유) 최근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 비용은 통장으로 환불되었다. (일반적인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객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는다. (슬퍼하는 고객)

 

지금 모바일 게임은 대강 이것과 같다. 구매와 환불까지만 기준이 있고 나머지는 아예 없다.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게임업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은 전자업계가 전자제품의 보증기간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우선 최소한 세 가지 보증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 거래보증. 둘, 품질보증. 셋, 가치보증.

 

하나, 거래보증. 게임 내 자유롭고 안전한 거래를 보증한다. 모바일 게임A에서 거래보증이 되지 않아 고객a가 현금 1억 9천만원의 손실을 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 모바일 게임A는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하고 5%의 수수료를 받는 경매장 거래만 가능했다. 고객a는 현금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거래하고자 했다. 경매장을 거쳐서 거래하면 수수료는 1천만 원이 필요했다. 상당히 비쌌다. 이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1천만 원으로 경매장에 올렸다. 이러면 수수료가 50만 원으로 낮아져 9천 500만 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판매는 구매자가 아이템을 1천만 원에 구매하고 나머지 잔금은 다른 방식으로 지불하면 된다. 그런데 경매장에 아이템을 올리자마자 예약한 구매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사 가버리고 말았다. 경매장에 고가의 아이템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오면 자동으로 구매하도록 설정된 매크로(컴퓨터 프로그램)로 구매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이러면 단순히 2억 원의 아이템을 1천만 원에 팔아버린 것이 된다. 고객a는 현금 1억 9천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 게임회사는 이것이 정상거래라며 어떤 보상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편법을 이용하다 손해를 본 것이 맞다. 그냥 경매장에 2억에 올리고 팔았다면 수수료는 비싸도 정상적인 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 애초에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한 것이 잘못되었다. 게임회사가 게임 내 상인이 되어 고객에게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았다. 일종의 디지털 자산을 판매한 격이다. 게임이 종료되면 아이템이 사라지기에 임시 대여의 형태긴 하지만 게임이 존재하는 이상, 그 자산을 소유한 사람은 게임회사에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소유물에 대한 정상적인 사용과 수익과 처분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아예 거래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면 몰라도 경매장을 통한 거래가 가능한 이상 개인 간 거래도 가능했어야 했다. 이용약관을 변명으로 내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전자기업이 판매한 전자물품의 중고거래를 회사 내 경매장에서만 가능하다 정해두는 것이 타당하다 여겨지는가? 말도 안 되는 폭거다. 물론 보호구역 부동산이나 천연기념물이나 운석 같이 소유권 해석이 달라지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게임 내 상품을 그런 식으로 특별히 대해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냥 게임회사만 유리한 불공정한 규칙을 약관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가상의 세상이니 현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이 있는데 가상이니 예외라 한다면 그걸 법치가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야 법치라 할 수 있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일일이 법치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적용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암묵적인 합의하에 그냥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세세한 것까지 전부 법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의 세상에서도 법치는 적용되어야 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디지털 자산에 대한 거래보증을 하지 않는 것은 게임회사의 귀책사유가 된다고 본다.

 

둘, 품질보증.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가치를 매겨 판매했다 하였다. 그때에 게임 내의 상품은 게임 내의 재화로만 거래할 수 있었다. 그 아이템에 금전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품질을 보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관행이 되었다.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판매하게 되었음에도 품질을 보증하지 않았다. 금전적 가치가 매겨진 것에 대한 품질을 보증하지 않자 수백, 수천만의 돈을 지불해도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게임 이용 고객들이 분노했다. 게임회사는 관행상 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 운영에 있어 게임 내 상품의 가치 변동은 언제나 게임사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가 없을 때 해당되는 얘기다. 이를 용인하는 지금의 게임이용약관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인지해야 갈등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게임에서 아이템의 품질이 훼손되는 일은 보통 다음과 같다. 밸런스 패치, 버그, 에러 등. 밸런스 패치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게임은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서바이벌 게임은 제공되는 무기의 성능의 균형이 맞아야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다. 완전히 같은 성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바이벌 게임의 무기 종류에 검, 창, 활, 총이 있다고 해보자. 이 중 총이 다른 무기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다. 총을 든 사람이 너무 유리하여 게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이 총을 빼거나 약하게끔 만들어야 밸런스가 맞게 되어 재미있는 게임이 된다. 이렇게 무기 성능의 균형을 맞추는 것 같은 걸 밸런스 패치라고 한다. 게임회사에서 검, 창, 활, 총에 해당하는 무기를 팔았다고 해보자. 그 중 총의 성능이 지나치게 강하여 약하게 만드는 밸런스 패치를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게임회사가 판매한 총의 성능이 낮아지게 된다. 밸런스 패치로 아이템 품질이 훼손된 것이다. 그럼에도 게임회사는 관행에 따라 아이템의 품질을 보증하지 않는다. 어떤 보상을 할 의무가 없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게임회사 자체적으로 작은 보상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품질 보증에 따른 보상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버그나 에러도 마찬가지다. 아이템 품질이 훼손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모든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라 하지는 않겠다. 그건 게임운영을 지나치게 어렵게 한다. 그래도 최소한 일정 금액 이상의 상품은 품질을 보증해야 한다. 어떤 캐릭터나 아이템의 뽑기에 쓰인 비용이 일정금액 이상이 되면 그 상품은 품질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기간은 약 1년 정도는 보증하고, 그 기간 내에 품질이 훼손될 경우 그에 해당하는 게임 내 상품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한다. 게임 내 요소들을 현금으로 팔아버리다 보니 세부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보증 기준은 상품이 아닌 금액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상품을 구매하는데 쓰인 비용을 기준으로 보상해야 한다. 금액보증기간제도다. 금액보증기간제도라면 뽑기 상품을 실제 뽑지 못하더라도 그 뽑기에 지불한 금액을 보증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품질보증이 없다면 소비자는 안심하고 구매할 수 없다. 게임회사가 현금으로 판매하는 상품에는 게임회사가 보증하는 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과금(유료이용고객)과 무과금(무료이용고객)은 앞으로 보증서의 차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건 어떨까? 과금 상품에는 기본적으로 보증서가 붙고 그 보증서를 누르면 상품에 쓰인 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금액만큼 보상한다.

 

셋, 가치보증. 판매한 상품의 가치를 보증한다.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은 경쟁이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상품의 가치를 보증하지 않으면 아예 쓸모 없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검, 창, 활로 경쟁하고 있는 곳에서 총이 발매된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총이 없으면 경쟁 자체가 어려워져 검과 창과 활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최근 검과 창과 활을 구매한 고객은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전자제품은 개인의 주관적인 절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어도 어느 정도 가치는 유지된다. 반면 게임의 상품은 객관적인 상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면 가치가 폭락한다. 그 차이로 게인 내 상품은 가치가 보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성능이 같기는 어렵다. 그러면 게임업계가 돈을 벌기 어려워진다. 이는 마치 전자업계가 고성능의 신상품을 발매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최소한의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야 한다. 시즌제의 도입이다. 일정기간 지날 때마다 게임 내 상품의 성능이 고르게 성장한다. 예컨대 1990년대 무기와 2000년대 무기와 같이 연도별로 나눈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6개월 정도 시즌을 나눈다면 그 6개월 안에 발매하는 상품의 성능은 균형이 맞아야 한다. 이렇게 시즌이 있어야 고객이 상품 가치가 언제까지 보증되는지 인지할 수 있다. BM 또한 시즌제로 나눠 일정기간이 지나지 않으면 새로운 BM을 추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게임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예외로 둔다 쳐도 이후에는 지켜야 하는 규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시즌제로 게임 내 상품의 가치가 안정적이게 되어야 고객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동차나 스마트폰에 결함이 생기면 전량 리콜하는 걸 보았을 것이다. 시즌이 지켜지지 않아 가치보증이 되지 않았을 경우 게임회사가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그다지 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보증이 게임회사 입장에서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 소비자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비로소 게임이 사회에 정착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가상의 세상에서 거래하는 이들에 맞는 다양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갈등이 중재되어 감정적인 별점테러도 줄어들거라 본다. 기준이 없기에 고객 또한 게임 자체의 상품화와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했다. 게임 자체의 상품화는 게임 내 요소가 무료다. 무료라는 인식이 모든 게임에서 BM에 대한 이해 없이 게임재화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 고객의 태도에 게임회사 또한 진절머리 치게 되었다. 이는 서로의 몰이해가 만든 갈등이다. 만약 분명한 기준이 정립되면 이런 몰이해는 줄어들거라 본다. 무질서는 고객과 회사 간의 불필요한 분쟁의 야기했다. 이런 현상은 게임회사 혼자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게임회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시행착오로 여기고 앞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질서가 험악한 관계를 화합으로 이끌 것이다.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게임은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다. 이보다 덜한 효율에는 소설과 만화와 영화가 있고, 더한 효율에는 도박과 마약이 있다. 현실을 기준으로 쾌락을 얻는데 필요한 노력이 줄어들수록 효율적이다. 정리해보자. 현실을 경험하기 보다 소설을 읽는 것이 효율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세상을 상상하기 보다 형상화된 만화나 영화를 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형상화된 가상의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에 풀기보다 게임 내에서 바로 체험하여 욕구를 충족해버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게임이 인기가 많은 것은 굉장히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효율적이게 되면 반사회적이게 된다. 도박과 마약이다. 도박은 단순한 놀이로 큰 돈이 오가는 것으로 큰 쾌락을 얻고 마약은 체내 물질 주입으로 큰 쾌락을 얻는다. 노력 대비 얻는 쾌락의 수치가 굉장히 높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이 피폐해진다. 도박은 인간의 가치관을 망가트린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긴 것보다 도박의 승리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 마약은 인간의 삶을 망가트린다. 마약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은 사이비종교와 같이 초법적인 집단을 탄생시킬 우려가 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실 마약은 중독성이나 의존성보다 효율이 더 위험하다.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뇌에 컴퓨터를 연결하여 굉장한 쾌락을 경험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보자. 기억이 주입된 순간부터 그 기억이 재생되면서 실제 경험하는 것과 같게 된다. 그 기억을 주입 받은 사람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 쾌락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약과 쾌락 기억 중에 무엇이 더 인기 있겠는가? 별다른 부작용이 없고 복잡하고 재미있는 쾌락 기억이 더 인기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경험도 하지 않고 기억 주입만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극히 반사회적이다. 기억 주입이 부작용은 없더라도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줄 확률이 높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이 형성한 기억을 기초로 한다. 그 기억을 주입 받는다는 것은 기억의 주인의 자아의 일부를 이식 받는 것과 같다. 자아의 복제다. 기억의 추출과 주입이 가능해지면 기억의 상품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인기 있는 기억이 몇 종류 나뉘게 될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다수의 사람이 고유성을 잃고 같은 자아가 되어 간다. 썩 좋은 결말은 아니다. 소설과 만화와 영화와 게임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즐기는 문화는 점점 더 효율적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 주입도 기술이 발달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류는 효율을 좇다 자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효율의 끝은 파멸밖에 없다. 따라서 인류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게임은 스펙트럼이 넓다.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정신연령이 높은 사람도 위험한 게임이 있다. 이는 다른 문화와 다를 바 없지만 직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위험도의 정도가 다르다. 위험도는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쾌락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렵고 복잡할수록 건전하고 쉽고 간단할수록 불건전하다. 이런 노력이 불필요한 불건전한 게임이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 된다. 게임 내에서 지나치게 낮은 확률로 높은 재화(현금교환이 가능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도박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 내에서 노력이 필요한 모든 걸 현금으로 구매해 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단숨에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마약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이 마지노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낮은 확률과 높은 대가를 지양하고 목적(예컨대 경쟁에서 승리)을 일정 부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게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앞서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파는 걸 구매하는 이들을 가리켜 치트 능력을 현금으로 사는 이세계인이라 비유하였다. 이세계물은 현실의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갈 때 쉽게 능력을 얻어 타인보다 우월하게 되는 걸 감정이입하며 즐긴다.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게임 또한 쉽게 능력을 사서 타인보다 우월한 것을 체험하는 걸 즐긴다. 이 자체를 나쁘다 말하지 않겠다. 자칫하다가는 마지노선을 넘을 우려는 있으나 그 선을 지킨다면 충분히 즐겨도 된다. 하나 그런 게임이 깊이 있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치트 능력으로 우월감을 뽐내는 이세계물이 그리 수준 높다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픽 수준이 높고 오가는 돈이 많아도 쉽게 산 능력으로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세계물과 다르지 않다. 게임은 쉬우면 재미없다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해 게임은 쉬우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붙이겠다.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되지 않기 위해서 게임회사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분명 한국에 기회는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별다른 고찰 없이 단편적인 생각으로 게임을 악으로 몰지만 않았다면 게임 자체를 상품화하여 팔던 시기에 게임의 사회정착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효율적인 쾌락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도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포함했을 것이다. 게임이 사회정착에 성공했더라면 지금 같이 게임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한국게임보다 나은 외국게임이 수두룩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은 게임강국이 아니라 게임플레이강국이라는 미묘한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모른다고 무조건 악으로 몰지 말고 충분한 고찰로 현명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게임을 홀대하며 악으로 몰아가던 이들이 셧다운제를 만들고 각종 제약과 억압을 주도하여 한국의 게임산업을 쇠퇴시킨 것은 물론이고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지게 되었다. 셧다운제는 한국 자유의 수치다. 만화의 성장동력은 만화를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면 게임의 성장동력은 게임을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 너무나도 명백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치다. 지금부터라도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생각해보자. 소설과 만화와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필시 게임의 시대가 올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란 문화를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한국문화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미 치트 능력의 구매가 가능한 이세계물 게임의 범람으로 한국 게임의 미래는 밝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오래가는 것이 드물어 게임 브랜드가 성장하질 못한다.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게임이 줄줄이 나와서 한철 장사하듯 서비스해봐야 한국게임은 성장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내부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여 그래픽 같은 외적인 요소만 발전할 수밖에 없다. 내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다. 창의력이 전무한 게임에 어떤 새로운 가치가 있고 어떤 예술적 가치고 있고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런 종류의 게임을 양분 삼아 나오는 다음 게임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똑같은 게임만 계속 양산될 뿐이다. 이런 게임의 범람은 가상의 세상에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상에서 장사하는 게임업계는 상품에 대한 아무 보증 없이 장사하는 전자업계와 같이 비정상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능력을 고가에 팔아 높은 수익을 챙기는 이세계물이 유행했던 것이다. 이 유행을 끝내려면 하루빨리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에 대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서야 한다. 옛날 한국 게임은 분명 어렵고 복잡하여 노력이 필요했다. 어렵고 복잡하여 몰입도도 강했지만 쾌락의 위험성에서는 다소 안전했다. 인간이 어떤 쾌락을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라는 인식을 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충분히 문화예술이 될 수 있다. 하나 이런 게임은 이세계물에 비해 수익이 좋지 못하다. 이세계물의 비정상적인 수익이 끝이 나야 문화예술이 될 수 있는 게임과 수익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질 수 있다. 그래야 이세계물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게임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전이 미래산업이 될 게임산업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지금 정치체제로는 급변하는 시대흐름을 쫓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있다면 분야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법안을 즉각적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게임업계가 이런 일그러진 성장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법치국가라면 일일이 시위할 것이 아니라 입법으로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된다. 게임 이용 고객이 트럭을 보내는 시위를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입법권 대표인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이런 분쟁에 대한 공적 논의를 요구했을 것이다. 게임 이용 고객은 전국에 있다. 각 지역의 게임 이용 고객이 각 지역의 국회의원에게 이런 사항을 전달했다면 어쩌면 진작에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 섰을지도 모른다. 이런 게 안 되는 까닭은 국민과 정치가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정치가 국민과 관련이 없다 생각하니까 트럭 시위는 하면서 이런 건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선거 자체도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이 나와 관련이 있던 적이 많지 않다. 그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게 비정상적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야의 좁음이나 지성의 부족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충분한 현명함을 갖추고 있으면 이기적이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각자의 역할수행이 각자의 이익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모두가 이기적일 경우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문화가 모두가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만 해도 기본적인 행복요건은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모든 국민이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집단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은 그 공약을 보고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입법에 반영하는 걸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선거에 대한 책임의식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의사반영과 책임의식은 분명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그 성장이 한국 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정치의 성장이 한국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의 성장이 한국인을 행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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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쉬어가는 글이었는데 생각보다 생각할 게 많았네요. 다음 글은 인간교육입니다. 그 다음은 어쩌면 역할주의입니다. 역할주의를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다양한 주제를 정리하면서 필요한 생각과 지식을 쌓아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추행과 구조도 분간 못할 정도로 성에 취약한 여성이 정상적인 구조를 성추행으로 신고, 그 신고를 믿고 구조하려던 남성을 처벌, 그 처벌로 위험한 여성을 구조하려는 남성 수의 격감, 남녀갈등의 고조화, 분열, 붕괴, 이것을 초래한 사람은? 여성이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한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성주의자. 간단합니다. 성상품화가 불편한 까닭도 그걸 불편하게끔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했기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인간이 성을 보고 불편한 게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정조관념을 어떤 여성들이 그걸 여성의 본성인 마냥 취급해서 성에 취약한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여성이 그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두고 보기 어렵네요. 여성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의지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타고납니다. 대부분의 아기가 의사표현 할 것이 있으면 울고 봅니다. 거의 모두가 강한 의지는 타고나는 겁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환경에 의해 의지가 꺾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지금부터라도 인간을 약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A당이 잘못하면 B당이 권력을 쥐고 B당이 잘못하면 A당이 권력을 쥐는, 실상 양당이 정치를 독점하는 구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정치가 개개인이 아니라 이런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저출산 문제는 나한테 대책 비용의 절반만 줬어도 해결했을 겁니다.

 

생활능력은 꽝이라 사는 게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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