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ix✰s6
접속 : 3597   Lv. 74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604 명
  • 전체 : 3223276 명
  • Mypi Ver. 0.3.1 β
[국제 정치 경제 역사]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 (6) 2022/09/19 PM 02:43

img/22/09/19/1835444a9293915fe.png

 

바로 영연방 왕국

영연방 왕국은 영연방 54개국중 

영국의 왕인 찰스 3세를 똑같이 군주로 모시는

동군연합 상태의 14개국을 가르키는 말로

인구는 1억3500만명 

면적은 러시아보다 큰 1880만 제곱키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임

14개국중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미국의 핵심동맹국으로 파이브 아이즈 소속이기도 함

그래서 만년필 짜증으로 화제됐던

찰스3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의 왕이자

군주중에 가장 많은 국민을 거느린 사람임 ㅋㅋㅋ


 

근데 여왕 사망후 영연방 왕국 14개국에서

군주제 폐지 공화제 변경 여론이 커지고 있다함

여왕은 생전에 아주 인기가 많아서 

영연방 왕국의 결속을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찰스3세는 인기가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다....

ㅋㅋㅋ

 

 

신고

 

소근맨    친구신청

불륜남은 인기 없음 영연방 아줌마들 다 싷ㅎ어함 ㅋㅋ

Introutro    친구신청

아마 폐지보단 영연방 탈퇴가 더 현실성있을겁니다

땅콩으로버무린튀긴딜도    친구신청

원숭이같다

이연걸    친구신청

잘못된 소식이 퍼지네요.
현지에선 찰스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고 여왕시절 군주제 폐지에 찬성하던 호주마저 유지 여론이 높은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이상하게 안좋다는 소문이 퍼졌죠

RLFI    친구신청

영국 호주 뉴질랜드는 한 나라나 마찬가지니까요.

이 세나라 소속 국민들은 국경 넘을때 아무 제한이 없죠. 한 나라나 마찬가지로 생활 가능.

그외 연영방 왕국 소속 국가에선 군주제 폐지 여론이 예전보다 높아지긴 했습니다.

https://polinews.co.kr/news/article.html?no=513046

https://youtu.be/YOKn2RzMrIQ

[국제 정치 경제 역사] 근세 이란 제국 눈알.뽑기의 역사 (2) 2022/08/08 PM 06:33


이란에서는 부족의 대빵은 칸 이런 부족장 귀족 대빵들을 다스리는 왕을 샤 라고 부르는데.. 이런 칸이 왕이 되면 샤가 되는거. 예를 들어 이름이 모하메드인 부족장은 모하메드 칸 이라고 불리는거고 이사람이 이란전역을 제압하거나 통일해서 왕이 되면 모하메드 샤가 되는식. 가끔 샤한샤 라고 붙이기도 하는데 이건 왕중의 왕이라는 뜻.


아무튼 16세기에 등장해서 오늘날 이란의 원형이 되는 국가인 사파비왕조부터... 호타키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왕조로 이어지는 이란 역사를 보면 서로 왕족간 내전 권력투쟁이나 외부세력과 전쟁을 하면 의례 칸이나 샤 또는 왕족사이에서도 적의 대빵을 사로잡으면 눈을 뽑아서 실명 시키거나 남자 자식들은 후세를 못남기도록 ㄱㅓ세시켜버리는 경우가 유난히 많음.


물론 죽여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목숨을 살려줘도 실명시켜서 통치능력을 상실하게끔 샤로서 정통성을 못가지게 하는건데... 이러면 실명 된 샤를 따르는 세력이 와해되도록 하는식. 똑같이 동로마 제국에서 권력에서 배제된 황족이나 권력자들이 실명당하는 대신 목숨을 살려주는것과 비슷한거. 하지만 세계사를 봐도 이렇게 실명시키는 수많은 사례의 연속은 특히 더 이란에 많음.


사파비왕조 이후 차례로 이란을 통일하는 나디르샤. 카림 칸 잔드. 아가 모하메드 칸 이들이 이 시기 유명한 왕이 되는 샤들인데 이들이 이란 내전을 통일하는 과정을 보면 죄다 실명 실명 실명 눈알뽑기 간간히 ㄱㅓ세 ㄱㅓ세의 연속임.

 

이중 카림칸 잔드는 조조처럼 아프샤르조의 꼭두각시 샤를 옹립하고 지내다가 나중에 샤가 죽자 스스로 카림 샤가 되서 잔드왕조를 창건하는데 이사람은 이란 역사상 이례적으로 관대한 인물이었고 명군으로 이름이 높았음. 지금도 이란의 세종대왕 같은 인물로 치면 되는...


아무튼 이 인물만은 적을 실명 시키는 경우가 적었고 목숨을 살려주고 용서하고 적의 자식도 등용하고 그랬음. 그래서 이 카림 샤가 적의 자식이지만 등용한 인물이 바로 아가 모하메드 칸이라는 인물.


하지만 이 아가 모하메드 칸은 나중에 아가 모하메드 샤가 되면서 카자르왕조를 창건하고 이란을 통일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카림 샤 잔드가 살려준 얘가 잔드왕조를 멸망시킨다는...


아무튼 이 아가 모하메드 칸 부터가 고작 5살 때 적에게 사로잡힌 후 목숨 살려주는 대가로 ㄱㅓ세당한 인물이고. 이사람은 나중에 카림 샤가 사망했을때 잔드왕조 궁정을 탈출한후 거병해서 이란을 통일할때 적들은 죄다 실명시켜버림.


특히 잔드왕조를 멸망시킬때 잔드의 마지막 샤인 로프트 알리 샤는 24살 젊은 나이에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걸로 유명하고 검술에 특히 능통한 용맹한 왕이었는데.


이 로프트 알리 샤를 사로잡았을때 눈알을 뽑고 갖은 고문을 하고 죽임... 카더라 썰에 의하면 여자보다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산채로 눈알을 뽑은 후에 병사들한테 강ㄱㅏㄴ하라고 던져줬다는 야사가 있음. 그리고 이후에도 말로 못할 갖은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목을 졸라 죽였다는...

 

또 이 로프트 알리 샤를 위해 끝까지 저항한 케르만 주민들 중 남성들은 모두 산채로 눈알을 뽑아서 전시했는데 그 숫자가 2만개였다고 함 ㅎㄷㄷㄷ 이외에도 그가 눈알 뽑은 사례는 수두룩 빽빽...


근세 이란 역사를 보다보면 눈알뽑기 ㄱㅓ세 그리고 하렘 이 세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을정도.



신고

 

plaline    친구신청

라우 르 크루제    친구신청

[국제 정치 경제 역사] 이란 고ㅈㅏ왕의 처절한 복수 (3) 2022/08/08 AM 02:22


img/22/08/08/182795105cf3915fe.jpeg


이란의 카자르 왕조 창건자 모하마드 칸은 이란을 통일한 영웅인데 이사람은 어릴때 그 유명한 전쟁기계 나디르샤가 창건한 아프샤르왕조의 아딜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거세됨. 이때가 고작 5살. ㅎㄷㄷ


이후 사파비 왕조 창건 세력인 여러 키질바시 중에 카자르족 수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와 세력이 잔드왕조에 몰락당하고 이때 잔드왕조 창건자인 카림칸 잔드의 왕궁에 들어간 이후 환관이자 정치조력자가 되지만 나중에 유폐됨.  


자기를 고ㅈㅏ로 만든 아프샤르 족도 사파비 왕조 창건세력인 여러 튀르크계 키질바시중에 한 세력이었는데 얘네들한테 당한.....


아무튼 이 고ㅈㅏ왕은 처절한 복수를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 그리고 드디어 세력을 키운후 잔드왕조에 반역하고 카자르족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킴. 그리고 잔드왕조와 아프샤르왕조에게 처절한 복수를 시작 하는데 이때 바로 고ㅈㅏ의 한이 폭발했다는 전설이 있음. 그게 바로 눈알 뽑기. ㅎㄷㄷㄷㄷ


사로잡은 적의 장군은 갖은 고문을 통해 장님을 만들고 죽임. 끝까지 잔드왕조에 충성한 군대 모두는 ㅈ ㅏ살시킴. 잔드의 샤도 사로잡은 후 눈알을 뽑고 장님 만듬. 또 항복한 성의 모든 남성들 장님 만듬. 여성 어린이는 모두 노예 만듬. 


자기를 고ㅈㅏ로 만든 아프샤르족은 끝까지 추적해 몰살시키고 아프샤르왕조의 샤는 사로잡았는데 이때 이미 샤는 장님이라 눈알 뽑는거 면제. 대신 고문후 목을 졸라 살해함. 그리고 드디어 이란 통일.


고ㅈㅏ의 복수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는... 근데 이 고ㅈㅏ왕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함.


자기 하인들이 잘못해서 처형시키려는데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처형을 미룸. 근데 하인들을 감옥에 보내지않고 자기 시중드는 일은 그대로 시킴. 그리고 잠자다가 하인들에게 암살당함. 


그리고 고ㅈㅏ왕은 당연하게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가 후계자가 됨.


이 고ㅈㅏ왕이 근세 이란역사에서 5대 정복군주중에 한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라는.... ㅎㄷㄷ



신고

 

케라케라412    친구신청

불꽃처럼 살았구먼...

뉴타입추종자    친구신청

와 진짜 한심하게 죽었다....

차라리 오늘 하는거 봐서 살렬수겠다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이또한 지나가리라    친구신청

5살부터 목표가 확실하네요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니
복수 복수 복수

[국제 정치 경제 역사] 화약무기가 이긴 최초의 전투와 오스만 이란의 갈등역사 (0) 2022/08/07 PM 11:13



img/22/08/07/18278a3ebbb3915fe.jpg


파비아 전투 <이탈리아>






img/22/08/07/18278a3fa693915fe.jpg


찰디란 전투<캅카스 남부>






16세기 초에 동서양에서 벌어진 파비아 전투와 찰디란 전투는 화약무기가 냉병기와 기병에 드디어 우위를 가져오는 최초의 전투로 유명한데


이중 파비아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와중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그 간에 벌어진거고 찰디란 전투는 오스만 셀림1세와 이란의 사파비 이스마일1세간에 아제르바이잔 캅카스에서 벌어진 전투.


먼저 파비아 전투는 화승총이 당시 주력이던 파이크창병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 전투로 이후 서양에서는 화약무기가 대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특히 이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이를 갈고 화약무기를 발전시키고 나중엔 30년 전쟁에서 구교국가임에도 복수를 위해 신교편에 가담하기까지 함.


찰디란 전투는 특히 더 역사적인 전투인데 여기서는 오스만의 총포와 화포가 사파비 키질바시의 주력 기병부대를 깨는데 큰 역할을 한 전투로 오스만이 힘겹게 이김.


이 전투의 결과로 사파비의 서진이 중단되고 메소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가 오스만 수중에 떨어짐. 또 일시적으로 사파비의 수도인 타브리스가 함락당하고 이스마일1세의 아내와 할렘의 첩들이 포로로 잡혀감.


이때 셀림1세는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사파비의 청야전술로 현지보급이 어렵자 예니체리와 그의 부하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어쩔 수 없이 퇴각명령을 내림.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 점령에 만족했던 것.


아무튼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는 시아파 튀르크인들과 쿠르드족 시아파들이 살던곳인데 이 시아파세력이 순니파 오스만에 굴복하고 이 상당수의 인구가 시아파 사파비에서 떨어져나감으로 오히려 사파비는 오늘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게됨.


즉 찰디란 전투에서 패하면서 오늘날 이란이 페르시아인 중심의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는거... 


또 이스마일 1세는 13세부터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 단기간에 이란을 통일하고 동쪽으로는 아프간 우즈벡까지 서쪽으로는 지금 터키 동부인 동아나톨리아 이라크 동부인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아제르바이잔 까지 정복한 유능한 왕이었는데.


찰디란 전투 패배의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정치를 등한시 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얼마안가 37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음.


이스마일은 소년의 나이에 아제르바이잔에서 거병해 강력한 백양왕조 티무르 왕조 동쪽의 우즈벡인들을 순식간에 멸하자 자신이 이슬람세계의 진정한 샤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이 강했는데 그는 이슬람세계를 다 정복해서 페르시아 대제국을 만드는게 목적이었음.


그래서 당시 오스만의 술탄만이 오직 자신에게 남은 이슬람 세계 마지막 적수라고 생각하고 오스만과 결전을 치루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진을 감행했던것. 하지만 찰디란 전투에 패배하고 필생의 꿈이 처절하게 무너지자 크게 상심하게 된거.



아무튼 찰디란 전투에서 패한 이후 사파비는 이란 고원 내륙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에선 우즈벡 서부에선 오스만과 계속 싸우면서 쇠락하기 시작함.


이후 아바스 1세때 이때의 패배를 교훈삼아 총포와 화포 부대를 대대적으로 만들어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될때까지 사파비는 굴욕을 맞보는 날이 지속되징..


뭐 여전히 오늘날 이란 전체 인구의 25%는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족이고 당시 사파비 왕조는 아제르바이잔계 시아파가 주권력층이었지만 아무튼 이 전투가 오늘날 이란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준 전투라는거임.


시아파 사파비왕조는 이전부터 순니파를 억업하고 시아파를 잔인하게 강요해왔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순니파 오스만에 이를 갈면서 순니파 탄압을 더 강화함.


즉 이란이 시아파 페르시아인 위주의 나라가 되는건 사파비가 찰디란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



그리고 이슬람이 아라비아반도에서 도래한 이후 오스만 제국과 이후 성립하는 이란계 제국은 계속 맞수였고 수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현대 두나라는 경제적으로 밀접하고 또 때로는 협력하기도 하면서 국민들 사이에도 서로 동일한 이슬람 문화권이라 친밀한 점도 있음.


하지만 현대 튀르키예와 이란의 사이에서도 앞서말한 오스만 대 이란계 제국의 오랜 갈등때문에 역사적인 원한이 깊다고 함. 


그리고 오스만과 이란계 제국간 경쟁에서 늘 체급이 훨씬 컸던 오스만이 언제나 우위였지만 그래도 이란이 원사이드로 밀린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체급차가 났던건 바로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지중해 곡창지대와 인구밀집 지대를 보유한 오스만과 달리 이란은 그 본거지인 페르시아 고원부터 사막으로 땅이 분열된 척박한 지대라 생산력이 엄청 딸렸기 때문임. 


그래서 오스만은 전성기 인구가 3000만에서 5000만에 이르지만 이란은 늘 천만명이 안되었고 적을때는 인구가 200만도 안될때도 있었음.


그래도 완전히 밀리지 않고 이란이 버틸수 있던건 유럽 오스만 인도 중국같은 거대시장 중간에 위치해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함....


아무튼 튀르키예 오스만과 이란계 제국은 역사적으로 항상 라이벌 관계였고 수많은 민족이 얽혀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언제나 충돌했기에 중동의 한일관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함.




신고

 
[국제 정치 경제 역사] 영국과 소련의 합동작전 페르시아 침공 (0) 2022/08/07 PM 11:06


img/22/08/07/18278a0874f3915fe.jpg
<이란 타브리즈에 진주한 소련군 전차 1941년>



한창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 2차세계대전 초기. 영국과 소련은 당시 이란을 함께 침공하기로 하는데....


당시 아랍과 페르시아에서는 반영정서가 강했는데 2차대전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친독 정권이 들어설 위기에 처함


특히 당시 이라크 왕국은 자진해서 친독정책을 취하고 반영에 선두인 나라였는데


북아프리카와 유럽전선에서 독일에게 연전연패 하고 있던 영국은 중동의 석유가 무조건 필요했기 때문에 반영국가 이라크를 침공해 무너뜨림


하지만 팔레비 왕조의 이란 역시 반영정서가 심한 나라였고 당시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영국이 독점했기 때문에 친독정책으로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었음


그래서 마침 이라크에 주둔한 영국군이 석유자원을 지키기 위해서 이란을 침공하기로 하는데


이 작전을 단독으로 하기엔 당시 이란군도 2개 기갑사단과 여러 보병사단이 있었기에 약간 부담감을 안고 있었음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소련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이란은 양쪽에서 영국군과 소련군의 침공을 당함.


당시 소련은 독일군에게 동부전선에서 계속 밀리자 산업시설을 죄다 뜯어내서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전하는등 고군분투 하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서방의 랜드리스 지원이 급박한 상황.


그런데 미국 대서양 노르웨이 북극해 무르만스크를 거쳐 소련으로 오는 랜드리스 루트가


당시 독일군의 동부 진격 대서양 유보트의 활약으로 끊길 위험에 처했고 그 다음 랜드리스 루트로 페르시아만과 이란을 통한 루트가 새롭게 떠오름


서방의 랜드리스가 급한 소련은 이로서 반영국가 이란 정권을 침공할 완벽한 명분이 생겼고 이에 영국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페르시아 침공을 감행.


침공이 시작된지 불과 얼마안되 테헤란에서 양군이 만나고 이란의 팔레비 왕은 쫒겨남.


그리고 2차대전 기간동안 이란은 연합군의 식민지가 되고 이 페르시아 침공은 전후 이란에 친미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됨


이때 연합군의 꼭두각시로 이란의 왕이된 레자 팔라비가 1979년 이란혁명으로 쫒겨나는 바로 그 팔레비 왕...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장 대립하는 양국이 바로 영국과 러시아인 현상황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신고

 
이전 6 7 현재페이지8 9 10 다음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