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 전투 <이탈리아>
찰디란 전투<캅카스 남부>
16세기 초에 동서양에서 벌어진 파비아 전투와 찰디란 전투는 화약무기가 냉병기와 기병에 드디어 우위를 가져오는 최초의 전투로 유명한데
이중 파비아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와중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그 간에 벌어진거고 찰디란 전투는 오스만 셀림1세와 이란의 사파비 이스마일1세간에 아제르바이잔 캅카스에서 벌어진 전투.
먼저 파비아 전투는 화승총이 당시 주력이던 파이크창병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 전투로 이후 서양에서는 화약무기가 대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특히 이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이를 갈고 화약무기를 발전시키고 나중엔 30년 전쟁에서 구교국가임에도 복수를 위해 신교편에 가담하기까지 함.
찰디란 전투는 특히 더 역사적인 전투인데 여기서는 오스만의 총포와 화포가 사파비 키질바시의 주력 기병부대를 깨는데 큰 역할을 한 전투로 오스만이 힘겹게 이김.
이 전투의 결과로 사파비의 서진이 중단되고 메소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가 오스만 수중에 떨어짐. 또 일시적으로 사파비의 수도인 타브리스가 함락당하고 이스마일1세의 아내와 할렘의 첩들이 포로로 잡혀감.
이때 셀림1세는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사파비의 청야전술로 현지보급이 어렵자 예니체리와 그의 부하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어쩔 수 없이 퇴각명령을 내림.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 점령에 만족했던 것.
아무튼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동아나톨리아는 시아파 튀르크인들과 쿠르드족 시아파들이 살던곳인데 이 시아파세력이 순니파 오스만에 굴복하고 이 상당수의 인구가 시아파 사파비에서 떨어져나감으로 오히려 사파비는 오늘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게됨.
즉 찰디란 전투에서 패하면서 오늘날 이란이 페르시아인 중심의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는거...
또 이스마일 1세는 13세부터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 단기간에 이란을 통일하고 동쪽으로는 아프간 우즈벡까지 서쪽으로는 지금 터키 동부인 동아나톨리아 이라크 동부인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아제르바이잔 까지 정복한 유능한 왕이었는데.
찰디란 전투 패배의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정치를 등한시 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얼마안가 37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음.
이스마일은 소년의 나이에 아제르바이잔에서 거병해 강력한 백양왕조 티무르 왕조 동쪽의 우즈벡인들을 순식간에 멸하자 자신이 이슬람세계의 진정한 샤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이 강했는데 그는 이슬람세계를 다 정복해서 페르시아 대제국을 만드는게 목적이었음.
그래서 당시 오스만의 술탄만이 오직 자신에게 남은 이슬람 세계 마지막 적수라고 생각하고 오스만과 결전을 치루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진을 감행했던것. 하지만 찰디란 전투에 패배하고 필생의 꿈이 처절하게 무너지자 크게 상심하게 된거.
아무튼 찰디란 전투에서 패한 이후 사파비는 이란 고원 내륙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에선 우즈벡 서부에선 오스만과 계속 싸우면서 쇠락하기 시작함.
이후 아바스 1세때 이때의 패배를 교훈삼아 총포와 화포 부대를 대대적으로 만들어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될때까지 사파비는 굴욕을 맞보는 날이 지속되징..
뭐 여전히 오늘날 이란 전체 인구의 25%는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족이고 당시 사파비 왕조는 아제르바이잔계 시아파가 주권력층이었지만 아무튼 이 전투가 오늘날 이란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준 전투라는거임.
시아파 사파비왕조는 이전부터 순니파를 억업하고 시아파를 잔인하게 강요해왔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순니파 오스만에 이를 갈면서 순니파 탄압을 더 강화함.
즉 이란이 시아파 페르시아인 위주의 나라가 되는건 사파비가 찰디란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
그리고 이슬람이 아라비아반도에서 도래한 이후 오스만 제국과 이후 성립하는 이란계 제국은 계속 맞수였고 수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현대 두나라는 경제적으로 밀접하고 또 때로는 협력하기도 하면서 국민들 사이에도 서로 동일한 이슬람 문화권이라 친밀한 점도 있음.
하지만 현대 튀르키예와 이란의 사이에서도 앞서말한 오스만 대 이란계 제국의 오랜 갈등때문에 역사적인 원한이 깊다고 함.
그리고 오스만과 이란계 제국간 경쟁에서 늘 체급이 훨씬 컸던 오스만이 언제나 우위였지만 그래도 이란이 원사이드로 밀린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체급차가 났던건 바로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지중해 곡창지대와 인구밀집 지대를 보유한 오스만과 달리 이란은 그 본거지인 페르시아 고원부터 사막으로 땅이 분열된 척박한 지대라 생산력이 엄청 딸렸기 때문임.
그래서 오스만은 전성기 인구가 3000만에서 5000만에 이르지만 이란은 늘 천만명이 안되었고 적을때는 인구가 200만도 안될때도 있었음.
그래도 완전히 밀리지 않고 이란이 버틸수 있던건 유럽 오스만 인도 중국같은 거대시장 중간에 위치해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함....
아무튼 튀르키예 오스만과 이란계 제국은 역사적으로 항상 라이벌 관계였고 수많은 민족이 얽혀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언제나 충돌했기에 중동의 한일관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