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퍼필로우 MYPI

템퍼필로우
접속 : 2247   Lv. 52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142 명
  • 전체 : 130374 명
  • Mypi Ver. 0.3.1 β
[잡담] 인간의 약함, 사회적 갈등의 근원 (0) 2019/05/12 PM 10:39

인간의 약함, 갈등의 근원

 

 

 

오늘은 우리나라의 갈등들을 살펴보고 해결방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약함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합니다. 약함에는 타고난 약함과 만들어진 약함이 있습니다. 타고난 약함은 [감정과 욕구와 욕망] [신체적 또는 정신적 불편]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약함은 [편의][이용][사고]가 있습니다. 이걸 일일이 설명하면 글이 늘어질 것 같아 하나의 예시만 소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이전에 쓴 글 또는 이후에 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잔반 줄이기]는 분명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 여러모로 올바릅니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이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편의]를 위해서 잔반을 줄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줄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육하는 사람은 편할지 몰라도 교육받는 사람은 생각과 행동의 우선순위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몰라 [사람의 건강]보다 [잔반 줄이기]를 우선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 걸 알면서도 잔반을 줄이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꾸역꾸역 먹습니다. 그러다 결국 배탈이 납니다. 좀 더 심해지면 다른 사람이 남겨도 괴로움을 느껴 그 사람에게 간섭하여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합리하게 배탈이나 갈등이 일어나면 잔반 줄이기는 올바른 거니까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 예시가 만들어진 약함 중 [편의]에 해당하겠습니다. 사실 이 예시는 약함으로 발생하는 문제 중 매우 약한 것에 속합니다. 하지만 본질은 크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앞으로 설명할 다양한 갈등은 이 예시를 참고하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체성 혼란

 

간결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도덕 [편의]

 

군사독재정부와 맞서 싸운 민주주의자들을 이념으로 바라보면 생각과 행동이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도덕입니다. 도덕적인 것은 전부 추구합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성평등, 원전폐기, 소득주도성장 등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것은 전부 추구합니다. 이 중 몇 가지는 주입식 교육으로 도덕에 약해져서 우선순위에 혼란을 겪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의 독재자와 맞서 싸웠고, [민족주의]를 위해 북한의 독재자와 교류했습니다. 독재자와 맞서 싸우고 독재자와 교류하는 모순은 이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도덕으로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였습니다. 도덕에 약해진 이들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화합을 위한 북한과의 교류를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했더라면 한국전쟁으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다수의 국민들을 먼저 돌봤어야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지도층의 역할은 국민을 우선시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성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젊은 시절에는 여성의 인권이 취약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인권을 향상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평등이란 도덕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평등이란 도덕에 약해지다 보니 역차별을 낳을 때도 있었습니다. 신입의 성비율이 비슷함에도 고위직을 핑계로 여성가산점을 주기도 했습니다. 고위직은 성차별이 남아있던 시대에서 진급한 인원들이기 때문에 남성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 신입들이 진급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임에도, 신입이 아닌 전체 성비율을 맞추기 위해 역차별을 낳는 여성가산점을 주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전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차례의 원전사고나 핵폐기물 처리기술을 생각해보면 원전폐기는 올바른 일입니다. 저도 폐기하는 쪽이 안전하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약간은 달라집니다. 몇 가지 이유, 경제적 효율성, 환경적 효율성(화력발전으로 발생하는 미세먼지), 이웃국가의 원전건설로 원전사고방지의 무의미를 생각해보면 무조건 중지할 것이 아니라, 원전사고방지와 핵폐기물처리기술이 발전된다면 재개하겠다고 하는 편이 원전찬성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폐기하는 것도 아니니 유연하게 대처해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득주도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저임금 상승은 올바른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올바름에 약해지다 보니 제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했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성에 맞춰 최저임금을 지급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이번 최저임금 상승은 부의 분배 정상화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의 분배 정상화는 곧 [낙수효과]와 마찬가지로 부자가 자신의 자본을 분배해야 됩니다. 결국 힘이 책임을 져야 가능한 정책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으로 추진하기보다 힘이 책임을 지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풍토 개선방안을 고려했어야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도덕적이기 때문에 정책들은 도덕을 중심으로 추진됩니다. 또한 문제들도 도덕을 지키다가 발생합니다. 도덕적이라 상호모순이 발생하는 올바름도 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약간의 도덕적 흠집만 있어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생명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도덕에 약해지면 안됩니다.

 

군사독재는 도덕적 결함이었고 이들과 맞서 싸운 민주주의자들은 도덕적 약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반복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도덕적 결함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도덕적 약함에서 벗어나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민족을 넘어 체제의 시대로 진화합시다.

 

 

 

트라우마 [사건]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자들을 이념으로 바라보면 생각과 행동이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트라우마입니다. 한국전쟁에 의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다수의 국민들은 그 누구라도 반북을 주장하면 지지했습니다. 트라우마로 반북에 약해져 우선순위에 혼란을 겪은 바람에 모순되는 행동도 하게 됩니다. [반북]을 위해 북한의 일당독재자를 비난하면서 [반북]을 위해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했습니다. 독재자를 비난하고 독재자를 지지했던 모순은 이념이 아니라, 트라우마로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였습니다. 트라우마에 약해진 이들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화합을 위해 북한과의 교류를 시도했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덕적 결함을 가진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지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들은 반북이지 반민족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라를 팔아먹지도 않았습니다. 일부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수많은 지지자들이 전부 나라를 팔아먹기엔 우리나라가 그렇게 크진 않습니다. 그러니 대다수는 오로지 반북 말곤 없습니다. 그런데 반북을 위한 진영논리에 갇혀 지지하는 사람의 성향 또한 지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독재정부의 도덕적 결함을 비판하거나 그 정부를 이은 정당의 정책(사대강 등)을 비판해도 이들이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이들은 애초에 도덕 때문에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했던 것이 아니라 반북 때문에 지지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비판해도 의미가 없지요. 북한과의 교류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정책은 무엇이 되었건 다 비난했던 것은 이들은 반북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두 차례 침략으로 인해 반으로 똑 쪼개졌습니다. 일제강점기로 민족주의가 격화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반북이 격화되었습니다. 이 둘은 표면상 이념갈등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침략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격화된 민족주의와 반북의 충돌이 빚어낸 갈등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독재자를 비난하면서 독재자를 지지하거나 교류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독재와 반민족주의자들과 싸웠던 민주주의자들은 애국자입니다. 맞죠? 국외 독재와 반체제주의자들과 싸웠던 반북은 애국자입니다. 맞죠? 이 둘은 관점만 달리하면 둘 다 애국자입니다. 그런데 약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무조건 민족을 위해 일해야 돼, 라고 생각하며 북한과 교류합니다. 무조건 반북을 해야 돼, 라고 생각하며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합니다. 약해졌기 때문에 민족이란 미끼로 국외 독재자에게 이용당하고 북풍이란 공포로 국내 독재자에게 이용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부류의 애국자가 두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쪽이건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이 두 애국자는 싸울 일이 없어 사회적 갈등이 없었을 거라 적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저는 이제 민족이 국가의 정체성이란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민족이 아닌 민주주의 체제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군사독재정부와 맞서 싸웠던 민주주의자들이 북한의 독재자와도 맞서 싸웠다면 우리는 갈등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도덕이든 트라우마든 약함은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원인을 알았다면 국외 통일보다는 국내 통일부터 먼저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도덕적인 정부가 뭔 정책을 내놓더라도 삐걱거리는 것은 반북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포용하려면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국내외 독재자를 비판해 국내 통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는 체제의 시대로 갑시다.

 

 

 

---

 

사실 사회갈등 중에 위계질서, 성차별, 금전만능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역할존중도 다뤄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하네요. 간단히 써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나이, 성별, 학벌, 지위, 자본, 지역 등 관계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위계질서 같은 관습으로 인해 불평등을 야기했다. 이런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평등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역할이다. 어느 누구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수행한다면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이렇게 역할을 기준으로 평등하게 대하게 된다면 위계질서로 인한 불평등이나 성별로 인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이가 적더라도 역할을 수행하면 존중해야 하며 나이가 많더라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면 계속 근무할 권리가 있다. 여성도 군인이나 경찰과 소방관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남성도 간호사나 가정주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할의 수행여부가 존중의 척도가 되기 때문에 나이나 성별이 상관없어지는 것이다.

 

덩달아 몇 가지 문제도 더 해결할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 아무래도 젊은 시절보다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아 대우를 높게 받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정년을 퇴직했어야 했다. 이 점은 역할의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해결이 된다.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 그 만큼 대우를 적게 받으면 되는 문제다. 연령이나 경력이 아닌 일의 기여도로 대우를 받게 되면 일을 할 수 있음에도 퇴직하게 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낳는 동물이므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완전한 인간의 평등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점 또한 역할을 통해 완화할 수 있다.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보호할 때에만 불평등하게 대할 수 있고, 피보호자는 보호받을 때에만 불평등을 감수하면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보호하기 위해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이건 분명 불평등하다. 하지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니 보호자는 보호할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 있고, 피보호자는 보호받을 때에만 불평등을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계급이 있는 사회체계에도 적용이 된다. 사장과 사원의 관계에서도 역할을 위한 업무를 하고 있을 때에만 불평등이 적용된다. 근무시간 외 또는 일을 그만두거나 해서 역할에서 벗어나면 그 둘은 평등한 사이가 된다. 대통령과 말단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만 계급이란 불평등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어떤 관계라고 하더라도 필요에 의한 불평등은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시해두면 평등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또 봐요.

신고

 
[잡담] 체제의 시대, 국가의 진화 (0) 2019/05/03 PM 11:01

체제의 시대, 국가의 진화

 

 

 

이번에는 정치 경제 체제 및 냉전의 시대를 쭉 훑어보았습니다. 정말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것도 있지만, 모르고 있던 것은 더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정치 경제에 관해서는 거의 써본 적이 없어서 많이 틀린 모양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 교육철학은 주관적인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객관적인 지식을 쌓아감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교정해나가는 겁니다. 단계별 생각 없이 한번에 모든 지식을 받아드리면 그 지식에 주관이 잡아 먹혀 자신의 주관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고정된 틀에서만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관부터 구축해야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뚜렷해지면 객관적인 지식과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어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고할 수 있게 됩니다. (제 교육철학은 인간교육을 통해 꾸준히 정리할 예정입니다.)

 

저는 우선 현상을 보고 본질을 찾아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부족하거나 잘못된 지식으로 용어의 오용은 있을 수 있어도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후 지식을 얻어감에 따라 용어의 오용도 사라지고 생각도 점점 더 정교해져 갑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지식을 받아드릴 때엔 어떠한 것(편견, 도덕, 트라우마, 욕망, 권위 등)에 약해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하여 판단한 뒤 결론을 내려야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인간의 본질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사상들을 접목해갑니다. 그 본질부터 시작해 지식의 증가에 따라 조금씩 정교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번영에 방해가 되는 일부 노조만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는 기업의 편을 들어가며 반대하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저임금 상승에는 기업의 책임을 물으며 찬성합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본질을 시작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어떤 진실에 대한 의문 또한 발전해 나가면서 점차 해소됩니다. 저는 우수한 인간이 바보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명백한 진실입니다. 바보라면 우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우수한 인간들은 바보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우수한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진실은 분명히 맞는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바보처럼 행동할 때가 있던 겁니다. 도덕에 약하거나, 감정에 약하거나, 욕구에 약하거나, 돈에 약하거나 하는 등의 약함이 우수한 인간을 바보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를 하나로 묶어줄 어떤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민족이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민족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만약 민족이 우리나라의 정체성이었다면 같은 민족인 북한과의 화합 때문에 이렇게 커다란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저는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체제의 시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점차 발전할 것이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되든 계속 쓸 겁니다. 쓰다 보면 잘 쓰게 되겠죠. 쓰면서 발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정체성

 

민족에 대해 알기 위해 과거에 대한 많은 글을 다시 한번 읽고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반감이 적게 될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상태임을 고백합니다. 처음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왜 우리나라의 우수한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의 화합과 통일에 목을 매며 국익을 낭비하는 걸까그러한 의문은 그들의 정체성이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였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또한 저 스스로가 지금까지 가지고 괴로워했던 수많은 도덕적 약함(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는 도덕적 제약)을 떠올리며 그들의 불합리한 행동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이란 도덕적 약함 때문에 발생했다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반대세력인 반북, 반공주의자들 또한 결과적으로 비슷한 상황임을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지식인 계층이었던 민주주의자들이 오래된 교육으로 민족이란 도덕에 약해진 것처럼, 노동자 계층이었던 다수의 반공주의자들은 전쟁에 의한 트라우마로 인해 북한과 공산주의에 약해져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약함은 상당히 슬픈 상황을 야기합니다.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들은 군사독재정권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북한의 독재자와 대화를 하려고 시도합니다. 북한에 약해진 반북, 반공주의자들은 북한의 독재와 공산주의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되는 상황을 모두 각자 가지고 있던 약함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약함은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누구에게 쉽게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하나 두 가지 약함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굳이 묻게 된다면 지식인 계층에게 물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여건상 교육의 기회를 받기 어려웠던 노동자들에게 물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식도 힘이라면 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트라우마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로 민중의 의향과 부합되지 않는 북한과의 교류를 시도했던 것은 민족이란 도덕적 약함으로 발생한 독선적인 정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정녕 민주주의자였다면 민족이 아닌 국민부터 챙겼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라 할지라도 국가를 책임지는 정치가라면 그들의 트라우마 또한 살폈어야 했습니다. 국가를 이끌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의 트라우마를 살피지 않은 결과 반북, 반공주의자들은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였고, 그 뒤를 이은 정당을 꾸준히 지지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서 군사독재정권을 물러나게 된 애국자와 북한의 공산주의를 몰아낸 애국자들이 서로 싸우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겪은 치욕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 중 반민족주의자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팔아먹었던 인간들, 또는 그 인간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많은 수의 군사독재정권 지지자들이 전부 그런 인간이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전쟁에 의한 트라우마로 발생된 반북, 반공주의자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반민족주의자들을 핑계 삼아 북한과의 민족적 화합을 추진하는 것이 정말 민주주의적인 정책인지 의문이 듭니다. 민중의 의지에 부합하지 않는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과의 화합은 민주주의가 아닌 민족주의가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화합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트라우마에 약해진 사람들을 달래며 잠시만 참아달라고 주장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난 간의 역사를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북한이 그러한 화합을 이용해 먹어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우수한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을 위해서 일을 했지만 북한의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독재 유지를 위한 체재강화에만 나서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독재자에겐 이미 민족은 그저 체제 유지를 위한 이용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말 민족을 위해서였다면 일당독재에서 물러나 통일을 위한 발걸음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북한의 인민은 민족주의일지 몰라도 독재자는 이미 민족에서 체제의 시대로 넘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체제의 시대는 후술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게 됩니다. 민족의 반이 일당독재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은 하위로 내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가? 저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미 민주주의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민족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버리고 북한과 통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민족을 위해서 과거 군주제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민중의 자유를 위한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체성이 정리되게 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민족의 시대에서 체제의 시대로 국가가 진화하게 되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국가의 정체성 확립은 사회적 갈등은 물론이고 대북정책과 대외외교도 좀 더 수월해 지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사회적 갈등은 비단 이념갈등이나 영호남지역갈등뿐만 아닙니다. 국제결혼을 통한 다민족화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 또한 막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아닌 체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갈등을 생각해보십시오. 민족주의에 약해져 북한에게 이용당해왔던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이 아닌 체제를 정체성으로 삼아 일당독재의 북한을 비판하는 동시에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한다면, 민주주의자와 반북 반공주의자와의 화합이 가능해질 거라 생각이 되지 않으십니까? 물론 이것은 순진한 발상입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수년 지속되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갈등해소를 위한 화해의 손길을 건네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민중의 트라우마를 외면하고 주입된 민족주의를 위해 북한의 독재자와 화합을 시도했던 민주주의자들이 먼저 손길을 건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민주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념갈등이 끝을 맺으면 자연스럽게 지역갈등도 점차 해소될 거라 예상합니다. 그들의 갈등의 근원은 이념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북정책도 보다 명료해집니다. 북한이 일당독재 공산주의체제를 포기 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없다, 라는 보다 분명한 의지를 표명하여 민족을 넘어 국가를 단결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겁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체제 통일조차 반대합니다. 민주주의자로서 독재자와 같은 나라로 살아가는 것이 싫습니다. 이것이 이상합니까? 이렇게 통일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갖추게 되면 평화로의 길은 더더욱 밝아집니다. 왜냐하면 내부갈등이 적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어떤 경우에도 일당 독재 공산주의체제국가와 통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천명한다면, 국익을 위한 평화협상에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산 제품에 KOREA라고 붙여질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보고 두려워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보았습니다. 민족에 약해지지 마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국민입니다. 국민들은 국가에 헌신하라고 지지하는 거지 민족에 헌신하라고 지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개중 민족주의자도 있으니 전부는 아닐 겁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민족이 아닌 체제에 두게 된다면 국내에 거주하는 다민족을 포용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미국이 어떻게 강해졌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민족이 아닌 체제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이 어떻게 강해져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중국의 경우에는 알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는데, 이들도 민족이 아닌 체제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의 중국. 민족이고 뭐고 간에 체제아래 모두 평등하다는 것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강하게 발전했다고 추측합니다.

 

 

이제는 혼란을 끝내야 합니다. 그 동안은 그 누구도 혼란을 종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혼란의 원인이 약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정권이 바뀌어 나가면서도 여전히 민주주의자들은 북한한테 이용당했고, 반공주의자들은 군사정권과 이어진 정당의 북풍에 이용당해왔습니다. 이런 국익에 해가 되는 것은 이제 끝내야 됩니다. 이제는 과거 위인이 정해둔 민족이란 도덕에 얽매여 정책을 추진하기 보다는 현재 국민의 의향에 맞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과거 위인의 것입니까? 현재 국민들의 것입니까? 확실히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민주주의자로서의 태도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혼란은 국가의 발전에 해만 될 뿐입니다. 정체성 확립을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민족이면 독재해도 용서해주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민주주의자로서 독재는 악이라는 분명한 정의아래, 국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독재자와 협상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술할 체제의 시대를 통해 국가진화의 필요성을 역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넘어가기 전에 통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독일 통일을 보며 우리나라 통일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있지요. 하지만 독일은 서로간의 전쟁으로 증오를 쌓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일당독재자가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 민족이 저물기 전의 시대였으니 말이지요.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였던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가 되었고, 예멘은 아직도 내전 중입니다. 다른 나라의 예로 우리나라 통일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건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체제의 시대

 

시대가 흐르면서 몇몇 나라들은 민족이 아닌 체제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 확립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미국의 역사서는 사놓았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아서 피상적인 정보로만 접근해보겠습니다.(이하 생략) 이후 지식이 늘면 체계화될 것입니다. 미국은 모두 아시다시피 이민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민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다민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민족이 아니라 체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은 청교도들로 시작했음에도 종교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종교보다 자유가 더 높습니다. 어쩌면 목숨보다 자유가 더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생명이나 타인의 생명보다 자유가 더 높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중국

 

중국은 모두 아시다시피 일당독재와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드린 명목상의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이들도 56개 민족이 거주하는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러한 다민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유지할 수 잇는 것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통해 체제 위에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리석거나 악으로 판단되는 사례를 관찰할 때 도덕에 약해지면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문화대혁명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과거 민족과의 단절이 이루어졌습니다. 민족의 시대를 넘어 체제의 시대로 진화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티베트 독립을 막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갖은 반발과 비난에도 꿋꿋이 하나의 중국을 관철했던 겁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종교탄압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일당제 사회주의 체제 위에 종교조차 있을 수 없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미국은 체제를 위해 기독교로 시작했음에도 종교를 존중했습니다. 중국도 체제를 위해 종교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결과는 극명하지만 목적은 동일합니다. 체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정체성. 이 정체성 유지야말로 중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중국은 체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종, 민족, 문화를 넘어서 하나를 묶어주는 정체성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 관계없는 사실입니다.

 

 

독일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패망한 뒤로 민족의 시대에서 체제의 시대로 진화했다고 생각되는 나라입니다. 지금 검색해봐도 지식인들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수는 독일을 예를 들어가며 탈민족주의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췄기 때문에 주장이 먹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저 탈민족만 하게 되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탈민족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을 대신할 어떤 정체성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로 다시 들어가서, 독일은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입니다. 민족의 우수함을 위해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가 난민수용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엇이 더 강국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확신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들조차 민족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과거에 얽매일 뿐인 구시대적 관념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

 

북한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들을 농락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진정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이용할 생각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진정 그들이 민족을 위해서 행동했더라면 진작에 일당독재체제를 버리고 통일을 위한 세부적인 사안들을 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손만 잡고 이익을 취하면 다시 멀어져 갔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이미 민족은 자신들의 일당독재를 유지해줄 수 있는 체제 아래에 있던 겁니다. 저는 민족주의에 약해진 선량한 민주주의자들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변하길 바랍니다. 북한과의 화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바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손해를 봐가면서 그들의 독재를 유지시켜줄 가치는 없습니다. 많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내부에서 시민의식이 깨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낙수효과가 진짜 존재할 것이라 믿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북한은 이미 예전에, 체제의 시대를 걷고 있던 겁니다. 그러니까 개판오분 전으로 운영해도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작에 망했어야 할 나라가 유지되어왔던 것은 민족이 아닌 체제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요, 지네들은 이미 체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민족이 중요하다며 언제나 손을 건네오는 선량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용해가며 얼마나 웃었을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들은 중국과 마찬가지의 행보를 보입니다. 종교탄압하고 있거든요. 이 또한 체제의 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

 

일본도 아직 민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아직도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느긋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들이 조상의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이는 방금 검색한 독일 탈민족에 관련된 글에서도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이 자성을 하고 다른 나라에 사과를 했던 것은 그들이 민족의 죄를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우리 조상이 잘못했었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에도 무관심합니다. 세습까지 하는 곳이 있다고 하지요. 이런 것들이 이들이 아직 민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점 점들로 하여금 우리가 체제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면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보세요. 체제의 시대로 돌입하여 다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국가 정체성을 갖춘 나라들이 강국이 되었고,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들과 발맞춰 체제의 시대로 돌입한다면 우리들도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일본이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대하고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 사과는 우리가 강국이 되어서 받든 말든 선택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정말 일본의 그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다면 일본보다 강해지는 게 우선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저는 예전에 일본의 죄에 대해 의식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분명 일본의 과거 행적은 악이며 죄입니다. 하지만 그걸 제가 의식적으로 괴로움을 느끼며 증오를 가질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비판해도 충분했던 문제였습니다. 제가 왜 그런 도덕적 약함을 껴안아야 되는지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런 증오도 물려주지 않을 겁니다. 저는 더 이상 감정적인 증오가 아닌 이성적인 비판을 통해 나은 길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하 지식이 부족하여 다른 예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민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세계대전 이후 다민족의 시대가 저물고 있고, 냉전 전후 체제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인터넷 이후 전세계단일민족의 시대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민족이란 절대적인 진리 앞에 감히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민족에서 벗어나 체제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시류에 뒤쳐지면 도태될지도 모릅니다. 체제의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과 중국과 독일의 발전을 보십시오.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두 독재자들에게 이용당할 겁니까? 저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평합니다. 두 부류의 애국자가 두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이용당하는 나라. 참으로 슬프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정말 친북이 있을 수 있고, 친일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많은 수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는 애국자들의 약함을 독재자들이 이용해먹은 겁니다. 한쪽은 민족이란 미끼를 통해 이용해먹고 한쪽은 북한이란 위협을 통해 이용해먹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약함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족이 아닌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분명하게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로서 민족의 시대를 넘어 체제의 시대로 국가의 진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강대국의 반열로 올라설 때입니다.

 

이후 지식이 늘어날 때마다 종종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일요일 날 올리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미리 올립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사물의 본질은 대체로 맞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본 것이 맞는지 확인했으니 알 수 있었습니다. 틀릴 때에는 보통 한가지 사실에만 집중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아 발생하는 몰이해 때문이거나, 자신의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실수를 거듭할수록 저는 좀 더 잘 볼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젠 약함도 넘어보려고 노력하려고 하니까 더 잘되겠죠 뭐.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번엔 자기혐오에도 약해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하나씩 약함을 없애갈 겁니다.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 현상이 무서워서 도망간 적도 많기 때문에 그런 것도 극복해보고는 싶습니다.

 

저는 교육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지, 인위적인 평등을 주장하진 않습니다. 능력과 관계없는 인위적인 평등은 결국 능력의 하향 평준화를 부를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능력과 관계없는 가산점들이 되겠습니다. 군복무 가산점이나(폐지됐죠.) 여성가산점이나 대학 기회균등제도 등에는 반대합니다. 대학의 기회균등은 교육 기회균등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한정된 입학 정원에서 능력과 관계없는 기회균등은 국가능력의 하향평준화를 부르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중고등학교과 대학교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요. 차라리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여 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주어 대학입학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더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어는 좀 더 정리해야겠지만, 어쨌든 언젠가 한번 그것에 대해 써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일요일만 쓰지는 않을 겁니다. 그 동안 일요일만 썼던 것은 힘들어도 주에 하나는 써서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요일에 쓰겠지만 아무 때나 쓰고 싶어지면 쓸 예정입니다

 

아하, 아하하 생각을 정리하고 지식을 삼켜나가는 과정이 못내 즐겁네요. 지식을 삼켜감에 따라 세상이 점차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아 혼란이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으니 이제는 지식을 삼켜 성장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얼마만큼 쌓아 올려야 그럴듯한 철학서가 나오는 거죠? 한참 남았는데? 아무튼 이제 시작이네요. 인생. 지금 저는 제가 라는 인식을 통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저번에 썼던 꿈에 교사도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또 만나요.

신고

 
[잡담] 사랑 받는 나라, 정체성 혼란의 끝을 고한다 (1) 2019/04/28 PM 11:53

 

사랑 받는 나라, 정체성 혼란의 끝을 고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다.]

 

오늘은 우리사회를 혼란케 한 원인과 그 원인해결을 통해 사랑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 원인은 의외로 간단해서 많이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허탈하게 웃으며 “아, 뭐야 겨우 이런 거였어?”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약함이기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약함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약함을 무작정 비난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정체성 혼란

 

민주투사와 군사독재정권의 시대를 알기 위해 밤새 이것저것 읽었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던 사건도 있고 모르고 있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저에게 그 시대의 슬픔을 알려주었습니다. 단순히 결과만 보고 슬픈 시대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원인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슬픔투성이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그 시대의 슬픔은 군사독재정권의 독재를 위해 일으킨 고문이나 총살 또는 사회적 갈등조장 따위가 있겠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러한 슬픔들을 알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슬픈 사건들은 왜 벌어졌던 걸까요? 단순히 쿠데타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뇨, 아뇨,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정권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했던 걸까요? 그 시대의 진정한 슬픔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민주투사와 군사독재정권의 대결이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 시대는 정확히 말해서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에 약해진 반공주의자라는 두 부류의 애국자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와 군사독재정권과 매국노가 이들을 이용해먹은 시대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민주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좋은 것인지 알고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민족주의를 주입식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다음은 반공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시대적 여건 상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채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에도 약해지진 않았습니다. 피상적으로 그것이 옳다고는 여기지만 그것에 얽매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이들은 6.25 전쟁으로 공산주의를 뿌리깊게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의한 트라우마로 공산주의에 약해진 반공주의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쿠데타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됩니다. 그걸 본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군사독재정권타도에 앞장서게 됩니다. 여기서 반공주의자는 민주주의와 군사독재정권 중 어느 쪽을 지지할지에 대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닌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자건 군사독재정권이건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단순하게 공산주의만 멀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한쪽은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여서 북한과 사이 좋게 지내려고 합니다. 한쪽은 군사독재정권으로 북한과 싸운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반공주의자는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고 민족주의에도 약해지지 않은 반공주의자들은 상대의 정체와 관계없이 북한과 멀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걸 본 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어째서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여겼던 민족주의에 약해져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반공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자들도 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어째서 북한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거야?’ 그들도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여겼던 반공주의에 약해져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과 친하게 지내려는 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영호남 지역갈등을 격화시키기로 합니다. 인구수의 차이를 보고 더 많은 인구수가 있는 쪽에 힘을 실어주자 힘을 받지 못한 지역은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들과 힘을 합치게 됩니다. 그래서 한쪽 지역은 민주주의자, 한쪽 지역은 반공주의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러는 동안 참 슬픈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주의에 약해져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합니다. 민족주의를 위해 북한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기만 하면 북한에게 뒤통수를 맞곤 했습니다.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약해져 군사독재정권에 이용당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잘못된 일을 저질러도 북풍 하나면 해결되곤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민주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은 애국심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자들은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 애국자입니다.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려고 애를 쓴 애국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체성 혼란으로 서로를 적대하고 있을 때, 공산주의자들과 군사독재정권이 이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 동안 매국노는 여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곳 저곳 붙어 다니며 이익만을 챙기게 됩니다.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제껏 혼란을 겪어온 것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에 약해져 있어 우리나라만의 정체성 확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민족이 아닌 우리나라만의 정체성은 확립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자아 찾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 당시 민주주의자들이 반공주의자들에게 ‘나는 민주주의자이므로 공산주의를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아마 반공주의자들은 민주투사가 되었을 겁니다. 도대체 왜, 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싸웠어야 했던 겁니까? 아니 되게 이상하지요? 민족주의만 빼면 민주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싸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둘의 이해상충은 오로지 민족주의 말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상하게 여겼을 거 같아요. “아니 왜 저 나라는 민주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싸우는 거야?”

 

군사독재정권은 자신들이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고 있다며 보수를 자처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가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누구보다 보수적이어야 할 민족주의자들은 진보가 되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원래 극우는 민족주의자가 아닙니까? 나치라던가 보면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될 때 발생하는 게 극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에요.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극우가 사대주의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좌니 우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에 약해진 반공주의자라는 두 부류의 애국자와 그 애국자들을 이용해먹는 공산주의자, 군사독재정권, 매국노가 되겠습니다.

 

 

아마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들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을 부정하면 우리들의 정체성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민족의 아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미 체제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시대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다민족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냉전 전후로 체제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이후로 단일민족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다민족의 시대와 체제의 시대와 단일민족의 시대가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서 다민족의 시대는 저물고 있고 체제의 시대는 진행 중에 있으며 단일민족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던 겁니다.

 

처음에 저는 저에게 민족주의가 없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걸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저는 이미 민족이 아닌 체제의 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주주의자였던 겁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리고 6.25 전쟁으로 전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이미 우리는 민족의 아이가 아닌 체제의 아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민족의 모든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민족과 민주주의라는 두 뿌리를 다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피를 물려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잇고, 우리에게 피를 흘려준 민주주의의 기술과 체제를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입니다!

 

이것 하나면 우리는 그 많은 혼란들을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에서 정체성 확립을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들의 애국자들은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왜 독재정권을 몰아낸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몰아낸 반공주의자가 싸워야 되는 겁니까.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흔히 북한과의 화합을 시대의 화합이라 일컫기도 하지요. 그런데 말이죠,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의 화합도 시대의 화합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부디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여 더 나은 나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몇 가지 추가로 알아보도록 하죠.

 

왜 우리나라는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는 걸까요? 그건 이기심이 아닌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지지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나라는 북한과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그건 친북이 아닌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군사독재정권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지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혼란은 친북이건 친일이건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자는 반공주의자를 친일이라 몰아붙였고 반공주의자는 민주주의자들을 친북이라 몰아붙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은 친북도 친일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서로는 중상모략이라 생각하며 무시하며 어떠한 변화도 없던 겁니다. 실체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진짜 친북과 친일은 이런 민족주의에 약해진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에 약해진 반공주의자들을 이용해먹었고, 그런 이용 당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저들은 진짜 친북 또는 친일이 틀림없다’ 라고 믿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원인이 분명함에도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면, 민주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라 불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은 만들어진 약함에 어디까지 슬픔을 감내해야 하나요? 부탁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엔 민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이제 체제의 아이들이니까, 부디, 최소한 민족주의를 민주주의 아래로 내려주세요. 민족보다 나라를 우선시해주세요. 부탁 드리겠습니다.

 

젊은 세대가 여당을 지지하는 건 민족주의자라 그런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자라 그런 겁니다. 나이든 세대가 야당을 지지하는 건 군사독재정권 지지자라 그런 게 아닙니다. 반공주의자라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를 멀리하는 민주주의자가 나타난다면 이 둘 모두에게 지지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는 여당에서 변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군사독재정권과 이어진 쪽을 지지하지 못하지만, 나이든 세대는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어느 정당이든 공산주의만 멀리하면 지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쉽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게 우리나라의 화합을 만들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상의 공백

 

정체성 혼란의 여파는 사상의 공백까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켜줄 우리만의 사상이란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걸 만들어줄 사람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자는 민족주의에 약해져 공산주의자와 친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반공주의자는 공산주의에 약해져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순 속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상을 추구해야 했습니까?

 

본디 사람은 무책임한 힘인 돈을 탐하게 되어있습니다. 돈은 감정과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단으로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패한 관리들이 돈을 탐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어찌 보면 당연한 타락을 막아주었던 것은 철학이나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돈 위에 있게 만들어줬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를 보세요. 우리나라만큼 코인 열풍이 심하게 분 곳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는 금전만능주의자들이 많아요. 이는 전부 정체성 혼란으로 빚어진 사상의 공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왜 낙수효과가 실패한 것 같습니까? 낙수효과라는 것은 돈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야 효과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상의 공백으로 많은 사람들이 금전만능주의에 빠지자 돈을 나누기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질 않았던 겁니다.

 

왜 소득 주도 성장이 더딘 것 같습니까? 소득 주도의 성장이라는 것은 결국 소득을 얻은 사람이 얻은 만큼 소비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상의 공백으로 많은 사람들이 금전만능주의에 빠지자 돈을 쓰기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돈이 돌질 않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경제정책은 이처럼 사람들의 사상이 아주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돈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사상에 따라 경제가 바뀌는 겁니다.

 

최근 경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째, 규제

 

우리나라는 정부가 너무 규제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규제 안하고 나서 어땠는지 봐왔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금전만능주의자가 많기 때문에 규제를 하지 않으면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규제를 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둘째, 최저임금

 

최저임금과 생산성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생산성 증가가 적은 상태에서 최저임금을 많이 올리니까 우리나라가 힘든 거다, 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이번 최저임금 상승은 생산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번 최저임금 상승이 높았던 것은 생산성에 따른 임금 상승이 아닌, 지금까지 부당하게 저임금으로 고용되어왔던 사람들을 위한 임금 분배 정상화입니다. 많이 버는 사람들의 임금을 줄여 적게 버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된다는 겁니다. 100을 생산하는데 손해 보는 쪽 없이 임금만 상승시키면 당연히 힘들죠. 양극화를 줄이기 위한 부의 분배 정상화를 위해 이러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돈을 분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힘든 거지, 생산성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부자가 부를 분배 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꺼내며 부자가 손해를 감수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전문가 여러분, 여러분들도 우리나라 출산율은 아시고 계시잖아요. 왜 출산율이 적은지도 아시잖아요. 돈이 없어서잖아요. 물론 책임감이나 가치관의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나라는 지금 멀쩡하게 일하는 사람도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어요. 그렇게 양극화가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임에도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핑계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건, 우리사회의 죽음을 방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부탁 드려요. 우리사회를 살려주세요. 부탁합니다.

 

 

지금까지 정체성 혼란으로 빚어진 사상의 공백으로 나타난 금전만능주의가 만들어낸 폐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외에도 투기, 사기, 탈세 등의 모든 돈에 관련된 부도덕은 금전만능주의가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니까 그런 겁니다. 참 슬픈 일이지요. 그에 영향을 받아 돈이 없는 사람들조차 금전만능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금전만능주의를 추구하면 이익을 보는 건 당연히 돈이 많은 사람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금전만능주의를 추구한 것은 우리에게 우리만의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금전만능주의를 견제할 사상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처럼 정체성 혼란은 사회적 갈등은 물론이고 경제적 갈등까지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계속 진행 중입니다. 아시고 계시겠지요. 우리나라의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정체성 혼란부터 정리하고 시작해야 될 문제였던 겁니다. 정체성 혼란이 끝나지가 않았으니까 뭘 해도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말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만의 정체성을 확립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포용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것으로 정체성 혼란의 끝을 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으로 빚어진 사상의 공백을 메꿀 우리만의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걸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도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사랑 받는 나라

 

사실 이 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를 해결하려면 우리나라만의 힘으론 해결이 어렵겠지요. 그러니 다른 나라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협력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우리나라가 사랑 받는 나라가 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 ‘사랑 받는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첫째, 정체성 확립

 

우리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로서 정체성이 확립된다면, 전세계의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돈과 관계없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는 나눴으니까요. 6.25 때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준 것처럼 우리를 위해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도와야겠지요. 돕고 도와야 다음 번에도 도움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 한번 난민 받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며 반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6.25때 전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은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나라가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난민에게 들어가는 세금 한 푼이 아깝다고 반대한다는 겁니다. 진짜 그러면 되겠어요? 정말 슬펐습니다. 물론 무작정 다 받으라는 건 아닙니다. 난민을 받을 때 감정적으로 받지 말고 규칙에 의거해서 받아야겠지요. 우리나라가 원래 난민 통과가 낮으니까 난민을 반대하는 분들도 거기까지만 해주세요. 통과한 난민은 받아드려야 됩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남들도 우리를 돕지 않아요. 부탁입니다. 우리도 도와줍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려울 때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어다가 나라에 돈을 가져왔지요. 우리는 그런 나라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번 것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는 걸 고깝게 봐서 되겠나요? …… 최소한 불법체류자는 반대한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상의 공백 메꾸기

 

정체성 확립을 통해 사상의 공백을 메꾸게 된다면 금전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전세계로부터 사랑 받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금전만능주의자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어려운 타입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돈만 밝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돈만 밝히는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 돈과 관련된 것만 관계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의 돈이 떨어지면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맺어진 관계는 돈이 아니면 도와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미세먼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돈이 더 많습니까, 중국이 돈이 더 많습니까? 우리는 돈으로 접근하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돈 이상의 어떤 것으로 사랑을 받아야만 이런 문제에 있어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셋째, 문화

 

저는 이제 전세계가 인터넷을 통해 단일민족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흐름 속에서 우리의 언어와 문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문화를 상징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최근 우리의 대중 문화는 세계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더욱 발전시켜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기를 바래봅니다. 우리나라의 대중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알고 부도덕한 일로 뉴스에 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꾸준히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국민의 가치

 

우리나라는 관광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관광자원이 우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입니다. 우리 국민들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관광자원은 사람입니다. 대중 문화를 관람하기 위해 방문해오는 사람들이나, 쇼핑을 하기 위해 방문해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우리의 가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치안을 더욱 우수하게,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을 더욱 우수하게, 우리나라의 품위와 품격을 더욱 우수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가치를 올려야 사랑 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힘을 가진 이른바 사회의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우리나라는 좀 예외적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폐를 끼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래도 도덕적 약함에 지배 받다 보니 다른 나라를 침략할 생각을 거의 안 했어요. 평화로운 민족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민족의 후예라는 건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도덕적 약함 때문에 손해 본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득 볼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굳이 애써서 민족을 부정할 필요가 없이, 필요한 부분은 우리가 물려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물려받은 민주주의자니까요.

 

 

다섯째, 기타

 

저번에 한번 개고기를 먹지 않는 조건으로 개고기를 먹는 것을 싫어하는 나라로부터 미세먼지에 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사실 그냥 생각나는 데로 쓴 거였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개고기가 별식인 만큼 그걸 질색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들을 배려해서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배려는 곧 사랑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런 것 하나하나가 사랑 받는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물론 이것은 먹지 않는 사람의 의견이므로 먹는 사람들이 직접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입니다.

 

저번에 한번 화폐 단위를 바꾼다면 환이 아닌 냥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지요.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느껴져 귀엽다고 느끼기 때문에 전세계가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사랑 받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개고기와 달리 뭐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잖아요? 우리역사에서 쓰이던 단위니만큼 당위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는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우리나라가 사랑 받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노력들은 전부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모범이 되어 자연스럽게 인류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걸 꼴사납다고 여길지도 몰라 말해두겠습니다. 인기인이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꼴사납다고 느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꼴사나운 게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자국민은 물론이고 전세계로부터 사랑 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

 

어.. 음 썼네요.

 

저는 초등학생 때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뭔가 반짝 반짝하는 별들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는 불합리한 세상에 절망하여 인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몸을 제 의지로 다룰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완전히 포기했었지요. 그렇게 포기하고 살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절망을 글로 옮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사는 것에 대한 의욕조차 없다 보니 장래희망을 위해 뭔가 노력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만 살았어요. 어떤 집단에 속하든 딱 필요한 만큼만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적당 적당히, 전력을 다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근처에 있는 인간의 죽음을 알게 되어 삶의 무상함을 느껴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가 인간의 목적이 생존과 번영이라 생각하고는 일단 생존하기로 결심했지요. (이후 언젠가 어떤 질문에 생존이 목적이라고 대답한 기억이 있네요. 얼마나 어이없을지.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어요.) 그 후 우연찮게 방송국과 관련되었습니다. 매일매일 뉴스와 라디오를 듣다 보니 기자가 되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그러면 뭐할까요… 마찬가지로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지 아직 스스로를 용서하지도, 그리고 약함도 알지 못했을 때여서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가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쉬고 있을 때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어요. 그렇게 스스로를 용서하고 나서는 철학자, 사상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직까지 이어져오고 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철학자나 사상가나 소설가는 계속하고 싶어질 것 같으니 앞으로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약함도 알게 되었으니까 조금 더 진취적으로 살아보고자 합니다. 뭘 하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노력해야겠어요.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겠는데, 이왕이면 머리를 쓸 수 있는 일을, 학업에 지장이 없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럼 또 만나요.

 

신고

 

서퓨    친구신청

본인이 쓰심?
글 잘쓰셨네요.
퍼온게 아니라면 추천.
[잡담] 북핵문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3) 2019/04/21 PM 11:59

북핵문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제 몰이해는 언제나 불합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리분별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매체라는 몇 겹의 필터를 거쳐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정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정치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명백하게 드러나 보이는 도덕적 결함을 지닌 정치인들을 보며 화를 냈고, 그 정치인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응원을 하곤 했습니다. 순수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응원을 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 한 켠에 응어리가 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북한문제에 있어 불합리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은 북한의 추종자인 것이 틀림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비난 받은 사람들은 그에 대응하여 친일이라며 비난을 합니다. 한쪽은 친북, 한쪽은 친일. 그걸 가지고 싸우는 정치인들. 저는 그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 것이었을까요? 언젠가 한번 북한의 추종자라는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손익을 따져보았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몰락한 나라를 추종해봐야 이익이 남을 리가 없습니다. 사상을 따져보았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오랜 시간 세뇌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그런 망할 사상을 따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그 정도의 위치에 있기 어렵습니다. 설령 있더라도 매우 적을 겁니다.

 

답은 알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1, 2, 3년 그리고 그 이상. 시간이 흐르고 변혁, 혁신을 주장하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등장함에도 우리나라의 이러한 사회적 풍토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조금 사리분별이 가능해져 그러한 싸움에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정치인들의 자리보존을 위한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 무의미한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 외엔 도저히 합리적인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비슷한 고민을 했을지도 모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시작하겠습니다.

 

 

 

도덕적 약함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간단한 정의로 시작합니다.

 

만들어진 약함이란, 편의 또는 이용을 위해 불합리하게 주입된 어떠한 제약을 의미합니다. 이 제약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문에 제약에 얽매이게 되어 불합리한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그 행동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이 만들어진 약함 중에는 도덕적 약함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이것도 올바른 것을 가르칠 때 합리적으로 이해시킨 것이 아니라, 무조건 올바르다고 주입하여 가르친 끝에 발생하게 됩니다. 올바른 것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고, 그 괴로움 때문에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행동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저는 이 도덕적 약함을 통해 현상을 해석하니 답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북한문제에 불합리하게 대처하는 까닭은 민족이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민족주의가 되겠습니다. 민족의 영광, 민족의 우수한, 민족의 치욕 등등 민족이란 말에 약해져 있던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북한에 모질게 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민족이란 것 하나 때문에 북한 추종자라는 부당한 비난을 당하더라도 감내해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는 민족의 통일을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것이야말로 민족주의에 약해진 사람들의 종착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정도 답을 얻은 뒤에 포탈사이트 뉴스 댓글을 보고 현 정권에 대한 비판들을 조사해보았습니다. 비판적인 의견뿐만 아니라 거친 욕설과 함께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분들도 있는 걸 보면 아마 현 정권을 결사 반대하는 분들 일거라 봅니다. 그런 분들의 의견이니 가장 취약한 부분들만 문제 삼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성정책, 대북정책, 경제문제, 인사권문제(여성부, 헌법재판관 등), 노조문제, 에너지자원문제(원자력), 딸 이민문제 등

 

아마 더 있겠지만 주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중립적인 사람들도 이번 정권은 여성정책과 대북정책이 문제라고 꼬집더군요. 이 문제들은 과연 도덕적 결함일까요? 아뇨, 아뇨, 이건 전부 나름대로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거죠. 분명하게 선을 긋고 시작해야 합니다. 저번 정권은 도덕적 결함이었습니다. 이번 정권은 그러한 점은 대체로 극복하고 나왔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에서조차 도덕적 결함은 눈에 띄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앞서 설명한 도덕적 약함입니다. 지금 발생하는 대부분의 불합리한 행동은 전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번 정권을 비판한다고 해서 저번 정권이 낫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덕적 결함과 도덕적 약함을 저울질 해보세요. 어느 쪽이 나은지 알게 될 겁니다. 도덕적 약함은 분명 불합리한 행동으로 미래를 어둡게 만들지만, 도덕적 결함은 그 미래가 오기 전에 어두워집니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도덕적 결함이 아닌 도덕적 약함을 비판하고 있으니까, 도덕적 약함만 극복하면 괜찮아 질 거라 생각합니다.

 

 

일단 주제가 북핵문제니까 북한 중심으로 설명하고 후에 나머지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요즘 북핵문제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보였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각국 정상들에게 북한 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을 보고 북한 대변인이라며 조롱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최근엔 북한에게 오지랖소리를 들어도 옛날보단 나아졌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이런 불합리한 행동들. 이 문제들은 전부 민족이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북한 관련된 모든 행동이 민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의 행태지요. 우리는 모두 민족주의를 올바르다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옛날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주구장창 들을 정도였죠.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불합리한 교육이 주입된 만들어진 민족주의자라는 겁니다. 민족주의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불합리하게 행동했던 겁니다. ‘무조건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게 올바른 거야’, ‘무조건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해야 돼’, 이렇게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불합리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휘둘리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 서서 통일의 가능 여부를 계산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없습니다. 민족을 위해서라는 미명아래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오지랖소리를 들어가면서라도 북한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어요. 아주 전형적인, 도덕에 약해진 사람의 증상입니다.

 

 

그리고 이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어요. 누가 봐도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보이니까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다. 카드 패를 다 보여준 경기를 어떻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나요? 미국이나 북한이나 북핵문제를 가지고 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데, 민족주의에 약해진 우리나라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카드 패를 다 보여줘 가며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히 손해를 보지요.

 

만약 목적이 한반도 평화까지였다면 이렇게까지 불합리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핵포기 후 종전만 해도 충분히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에 한발 뒤로 물러나 국익을 위해서 행동해도 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에 약해져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통일을 원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설령 좀 손해를 보더라도 북한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바라니까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같이 한반도를 중점에 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미국과 중국에 휘둘리고 있고 그러니까 일본을 멀리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합리한 교육으로 만들어진 민족주의자니까요.

 

 

저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행복도 포함됩니다.)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통일까지 찬성하는 건 아니에요. 만약 통일을 한다면 민족주의에 약해져 무조건 해야 돼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 통일을 해야 합니다. 합리적이지 않으면 통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전세계단일민족

 

민족주의자 분들은 민족에 큰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민족이란 건 애초에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예전에 읽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민족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이런 정의에 의하면 앞으로 오랜 세월 공동생활 하면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할 전세계인은 모두 단일민족이 될 거란 예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인종이나 국가도 관계없다고 하니까요. 무기의 발달이 부른 평화 속에서 오랫동안 국가간 교류만 해도 충분히 단일민족화가 이루어질 겁니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미래는 그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빠르면 백 년, 정말 질질 끌어도 천 년에서 만 년이면 피가 섞이고 문화가 섞여서 단일민족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멸종하지 않는 한, 지구를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의 분명한 사실이 눈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과거에 한반도는 한 민족이었습니다. 미래에 전세계는 단일민족화가 될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의 민족에 얽매여 거기에 급급할 필요 없이 국익을 충분히 생각해가며 통일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왜! 굽혀서 들어가야 하나요? 정말 통일을 하더라도 우리가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왜 유리한 고지를 알아서 넘겨주고 있는 건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역사라는 건 우리의 역사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특정 민족에 집착하여 그 민족의 우수성을 위해 세계와 전쟁을 벌인 국가의 역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민족주의의 끝을 보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우수한 사람들이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불합리한 교육으로 만들어진 민족주의자라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속, 계속 민족주의가 옳다고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는데 약해지지 않기는 어렵겠지요.

 

 

 

전국민투표

 

간단히 쓰겠습니다.

 

정말로 우리들의 소원이 통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었다는 이유 하나로 통일을 해야 한다면 미국과 영국도 통일을 해야 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건 이상하지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일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와 버렸습니다. 체제도 다르고 생각도 많이 다를 겁니다. 그리고 그 민족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정체성도 흐려질 겁니다. 전세계가 단일민족화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통일을 반드시 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우리의 미래는 우리 국민들이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예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이 있겠습니다. 브랙시트라고 했던가요? 그건 아무래도 젊은 층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아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만, 어쨌든 자신들의 국가가 어디에 속할지를 국민이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는 겁니다. 방법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전국민투표를 통해 우리 국민들의 의향을 알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통일을 찬성하는 측도, 반대하는 측도, 마음의 정리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 무조건 찬성하는 사람과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걸 감안해서라도 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우리의 미래는 과거 위인들이 만든 도덕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무조건 통일 찬성’, ‘국익을 담보로 한 합리적인 통일 찬성’, ‘무조건 통일 반대같이 조금 세세해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타

 

앞에서 설명한 이번 정권의 문제점 몇 가지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게요.

 

여성정책 성별평등이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불합리하게 정책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여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가산점을 줬다는 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약해져 있으면 역차별까지 일으켰던 걸까요. 혹자는 비율이 맞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신입은 대체로 비율이 맞거나 여성이 많은 경우도 많습니다. 전체 비율을 맞추려고 하니까 불합리한 정책이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인사권 문제(여성부, 헌법재판관) – 마찬가지로 성별평등이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중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성별평등에 맞춰 그것에 적합한 인재를 찾다 보니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헌법재판관의 기준에 여성, 서민, 40, 비서울대, 지방 등의 어떤 특정한 올바름의 제약에 휘둘리다 보니까 많은 반대에도 강행했던 겁니다. 이런 건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도덕에 약해져 있어서 그런 겁니다. 저는 역할존중을 가치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성별이 어떠하던, 서민이든 부자든, 나이가 어떠하던, 학벌이 어떠하던, 지역이 어떠하던 간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중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인사는 그렇게 진행되길 바라봅니다.

 

노조문제 노조는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니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을 돌보지 않는 노조에게도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노조가 반드시 올바르다는 보장은 없는데 노조의 편을 들어줄 때가 있다 보니 불합리한 결과가 나타날 때가 있었습니다.

반면 최저임금 쪽은 기업의 무책임함 쪽에 무게가 더 실린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은 이미 더 높은 최저임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저임금으로 자영업이 힘들어지거나 물가가 오른 건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힘이 책임을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 된다면 힘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힘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에너지 자원문제(원자력) – 원자력 사고를 경험하고 나서 그것에 약해지는 바람에 불합리하게 무조건 반대라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에너지 개발을 위해 원자력 건설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걸로는 원자력 건설을 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순하게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라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면 다시 재개해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좁은 땅, 우리나라만 원자력 건설 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문제

 

포탈사이트 뉴스 댓글들을 보면 경제를 망쳤다고 하길래 2019년 경제전망 한국은행이나 기업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과거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던 것 같았습니다. 단지 최저임금 상승의 영향으로 물가가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정책으로 나타나는 경제의 변화는 빠르게 피드백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세계경제에 영향을 받는 것도 클 것입니다.

 

딸 이민 문제

 

사실 이건도덕과 관계없이 그냥 감정의 문제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몰라 말하는데 임기를 마치고 이민을 갔어도 되는 문제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얼마나 비판할 것이 없으면 이런걸 비판하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감정의 문제가 사소한 것은 아닙니다만, 도덕적 결함과 같은 눈높이로 보기에는 걸맞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미래

 

저는 지금까지 정치인을 뽑을 때 도덕적 결함이 있나, 없나만은 확인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건 과거를 통해 배운 것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도덕적 약함에 지배되어왔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도덕적 약함으로 치욕을 경험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것이 좋다며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고 개방을 하지 않은 탓에 기술발달이 뒤쳐서 힘이 약해졌지요. 그래서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하게 말해두는데 침략한 쪽이 잘못한 겁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저 또한 매번 주장하던 것 중 하나입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해를 끼치는 침략은 악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세의 침략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무능함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무능함은 우리의 것만 좋다는 도덕적 약함으로부터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미 도덕적 약함으로 불행한 역사를 경험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해 배워야겠지요. 이제 앞으로는 도덕적 결함뿐만 아니라 도덕적 약함도 극복한 사람들이 지도층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도덕적 약함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판하여 도덕적 약함을 직시하고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도덕적 결함을 극복한 이때야말로 도덕적 약함을 극복할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세상의 불합리함에 절망해 모든 걸 포기한 이후 나를 위한 노력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전부 상황에 맞춰서 그 상황에 맞는 노력까지만 했죠. 그 이상은 그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요. 도저히. 어떤 그룹에서 그룹 사람들이 어떤 시험을 볼 때 상황에 맞게 같이 필기시험을 치고 합격했어요. 그 뒤에 그룹에서 멀어지자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실기는 보러 가지조차 않았어요. 몇 번이고. 그런 것처럼 삶의 종착지에 서있는 것처럼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벼랑 끝에서 멈춰 서느냐 떨어지느냐의 기로에 서있었을 뿐이었어요. 이제는 온갖 시시한 것들을 떨쳐내고 벼랑에서 멀어져 스스로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진심으로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사족에 다는 까닭은 어떤 인간에게서 이런 생각이 나오는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다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뭐 괜찮겠거니, 생각이 들어서 쓰고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 이후론 약함보다는 인간교육을 중심으로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글쎄요, 뭘 쓸지는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

 

화폐 단위 얘기도 있던데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만약 바꾼다면 환보다는 냥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귀여워서 호감을 살 거 같은 단위라 어쩌면 외국에서 우리나라 돈을 소장품으로 구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또 만나요.

신고

 

Kim0    친구신청

이번 정부를 도덕적 약함 정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선의 - 좋은 뜻과 의지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과 그 주위의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되어야 하는 것은 힘이 따라주지 않아 되지 않고, 주의해야 할 것을 너무 쉽게 해 버립니다.

일자리의 남녀 비율 문제의 원인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민하는 노력 없이 '할당제'를 이야기 합니다.
이번 버닝썬 사건의 철저 수사를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북핵 문제도 현실 분석보다 선의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현 정부에 돌아선 계기는 다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http://m.ktv.go.kr/content/view?content_id=556367

"문 대통령은 특히 몰카를 이용한 성범죄에 대해 사건이 발생한 초동단계부터 가해자에 대해 엄중하게 다뤄나가고 피해자는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수사가 시작되면 해당 직장이나 소속기관에 즉각 통보해 가해를 한 것 이상의 불이익이 가해자에게 반드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시했습니다."

다시 찾아봤는데, KTV에 나왔으니 조중동식의 왜곡은 없겠죠.
수사가 시작되면 ... 이라는 말을 다시 확인하니 착찹합니다.

세인트XI    친구신청

현재의 남북간의 교류 목적이 민족화합,통일 같은 말랑한 관점이 아님.
북한은 북핵 포기 OR 축소와 종전을 걸고 보통국가 진입을 목적으로 하는것이고,
우리는 휴전상태가 아닌 완벽한 종전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임.
그렇기 때문에 3번의 정상회담에서도 통일이니,연방제니 같은 국가 통합에 관한 목표나 논의는 전혀 없음.
애초에 민주공화정인 남한과 실질적 왕정국가인 북한이 한 체제로 합쳐지는 것은 전쟁아니면 불가능함.
때문에 현재의 남,북,미의 회담과 교류의 실질적 본질은 딜을 위한 비지니스 미팅임.
북한은 우리를 통해 미국과 가장 적절한 딜을 하여 경제제재를 풀고 보통국가로 올라서려는 것이고
미국은 종전선언과 경제제재 카드를 가지고 북핵해결과 트럼프 재선,주한미군을 통한 중국의 군사적 경계 유지가 목표이고
우리는 형식적일 지언정 종전선언을 통해 한반도가 군사적으로 안정된 지역임을 세계에 보여주어
그동안 휴전지역이라 손해보고 있는 수많은 경제지표와 평가에서 장기적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이 목표임.
때문에 북한이 북핵으로 미국과 딜에 성공해서 보통국가가 되면 우리와는 현실적이던 형식적이던 각각의 개별 국가로
서로 인정하는 시점이 올테고, 장기적으론 휴전선이 국경의 개념으로 변해가 통일은 물건너 가고 완변한 이웃국가가 될 것이라 예상함.

나가레료마    친구신청

깨시민들이 왜 10년 전에는 힘을 못썼을까... 안타깝다.
[잡담]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0) 2019/04/14 PM 11:56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연관 글

인간교육,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인간교육

 

 

오늘은 다른 사례들을 조금 정리해볼까 합니다. 남성부터 시작할 건데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시작해봅니다.

 

가장 기본적인 약함이 무엇인가만 작성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약함

 

사람의 약함은 타고난 약함만들어진 약함약함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약함

 

사람은 감정, 욕구, 욕망 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죄의 약함을 타고납니다. 그 외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약함을 타고난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둘째, 만들어진 약함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되거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어떤 제약을 의미합니다. 이런 약함에 약해진 사람은 내제된 제약에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때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약함을 만들어진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이하, 편견과 트라우마, 약하게 만든 이유, 물려받은 감정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성

 

남성의 진정한 억압, 그것은 허세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조신함 같은 여성스러움을 강요하기 위해 수치심을 주입했다면, 남성은 강인함 같은 남성스러움을 강요하기 위해 허세를 주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시절부터 그래왔어요. 남자아이가 아파서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며 혼내죠. 아파도 울면 안돼, 슬퍼도 울면 안돼, 보세요. 남성다움을 강요하기 위해 강한 척이라는 허세를 주입하고 있지요? 아파도 안 아픈 척, 슬퍼도 안 슬픈 척, 허세 부리게 만들었어요.

 

사회 전체가 이런 허세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비웃기까지 해요. 어떤 스포츠에서 남성 선수가 경기에서 지고 난 뒤 울분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면 그걸 가지고 비웃더라고요. 남자가 질질 짠다고요.

 

여성의 수치심과 같이 남성에 허세를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내제된 약함이니까요.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수치심이나 허세가 남성중심사회가 만든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본적이 없어요. 허세로 인한 결과물을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적이 있는데, 허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외 남성의 부당함을 살펴보면 대부분 허세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게 됩니다. 불편해서 항의해도 남자잖아, 참아라는 결론이 나와요.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에요. 그럼에도 남성은 이걸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웃음을 당하거든요. 약하다고요. 참 웃기죠? 강한 척하는 허세를 강하다고 여기고, 그러한 허세에 약해지지 않은 사람을 약하다고 여겨요. 그래서 남성들은 허세를 쉽게 버릴 수가 없어요. 여성들이 수치심을 버리면 만만한 여자라고 여겨질 위험이 있는 것처럼, 남성들이 허세를 버리면 약한 남자라고 비웃음을 당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성들은 여성인권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남성들은 저조하죠. 그것을 보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어요. 남성은 단합이 되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이건 단순히 단합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부당함을 느껴 남성인권운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죠. 예를 들어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높은 가산점을 부여 받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고 해보죠. 그러면 사회반응은 어떨까요? 소소하게 이슈가 있어도 결국 잠잠해지죠. ‘남자잖아, 참아이거예요. 결국. 보세요. 결국 남자들도 불합리한 교육의 희생자일뿐이에요.

 

 

허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이해되셨을 거라 생각해요. 뭐 이해되셨어도 허세가 문제라고 말하고 다니긴 어렵겠지요. 약하다고 비웃음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 어려운 문제죠? 하하

 

허세가 만들어진 이유야 뭐 당연하게 책임을 지게 만들기 위해서죠. 국가와 가족을 책임을 지게 만들기 위해서 강한 것을 강요했어요. 총칼이 무서운 건 성별과 관계가 없죠. 하지만 그 옛날 남성중심사회에선 남자가 보호를 했어야 했어요. 무서워도 보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섭지 않은 척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허세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허세는 쉽게 버릴 수가 없지요. 허세 부리지 않는 남성은 약하다고 비웃음 당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언제까지 허세부리고, 부리게 만들 건지-

 

남성에게 강함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강한 척할 필요까지 있을까요? 필요에 의해 강한 척 할 수도 있는데, 필요하지 않는 때에도 강한 척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술 마시고 운전 못해도 약한 게 아니에요. 현명한 거죠.

 

 

그럼 허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볼게요.

 

남성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

 

남성은 성추행 당하거나 성폭행 당하면 쉽게 말하고 다니지 못해요. 여성과는 다른 이유에요. 거기서 쌘척하지 않으면 비웃음 당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쌘 척하고 있어요. 여성에게 당하면 오히려 좋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있을 정도예요. 이런 상황에서 쉽게 말하고 다니긴 어렵겠지요. 이 또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주입해온 강한 척 허세 부리는 것에 영향을 받은 끝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음주운전

 

음주운전은 크나큰 죄입니다. 저는 그 죄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런 죄를 짓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남성이 주로 음주운전을 하는 건 술에 취해도 운전을 잘할 수 있다라는 강한 척 허세를 부리다 보니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사의 통계를 참고할게요. 한 외국에서 남성과 여성의 주행거리를 동일하게 설정한 후 사고 발생비율을 계산해본 결과 남성이 여성보다 2배가 많은 사망사고를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가리켜 남성의 음주운전 버릇을 꼽았다고 해요. 남성이 여성보다 음주운전 비율이 높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 왜 남성이 더 높겠어요. 강한 척 허세를 부리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요. 슬프게도 말이죠.

 

남성에게 강요된 보호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성인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다가 희생되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부당하다고 주장을 해요. 하지만 그때엔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때엔 남성중심사회였기 때문에 힘을 가진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했던 거지요. 그걸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요. 이제는 남성중심사회가 아니잖아요?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노약자를 보호해야겠지요. 하지만 허세 때문에 그게 실현되기가 어려워요. 우리나라에서 근본적인 성별평등이 이루어지려면 군복무에 관련된 사항을 해결해야겠지요. 하지만 이런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워요. 쌘 척 해야 하거든요.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덜 물들었으니까 그에 관해 항의를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사회 전체가 허세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에요.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군복을 입으며 쌘 척하는 남성들이 이슈가 되기도 했지요. 아직도, 아직도 그러한 허세가 남아있고, 그걸 올바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바뀌지 않는 거죠.

 

개인적으로 군복무의 성별평등이 이루어지려면 현실적인 군복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전문병과를 제외한 병사들은 굳이 오래 복무할 필요가 없어요. 소총수가 배울게 얼마나 있나요. 진지구축이나 총 쏘는 법, 화생방교육, 등등은 정말 몇 개월 내에 전부 배울 수 있어요. 6개월에서 9개월이면 시간이 남아돈다고요. 그래서 할 거 없어서 매일 예초나 돌리거나 삽질이나 하고 있죠. 그리고 사실 특기병조차도 예비군으로 들어가면 소총수가 되잖아요. 굉장히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말이죠, 모든 전문병과를 (국경경계 포함)직업군인으로 돌리고, 나머지 의무복무는 전부 소총수로 돌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총수는 기본적인 교육을 한 6개월 정도 받고, 나머지 3개월에서 6개월정도를 예비군에서 훈련 받는 겁니다. 차라리 이게 더 오랫동안 군에 관련된 감각을 잊지 않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3년에서 6년간 분기별로 1주일씩 혹한기나 유격 같은 훈련을 받은 거죠. 이러면 기간은 줄더라도 훈련의 질은 높아질 거라 생각해요. 뭐 예비군을 고용하는 회사가 부담이 될 수는 있는데 그건 국가에서 지원해야겠지요. 어쨌든 기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훨씬 낫다 이겁니다.

 

이걸 통해 손해를 보는 건 아마 군 고위직이겠지요. 병력이 줄면 고위직도 줄어들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비효율적인 군복무제도를 나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이 불필요한 낭비를 해야 하나요?

 

이렇게 불필요한 기간을 줄이면 여성에게도 국가에 대한 시간 투자를 유도하는데 보다 더 쉬울 거라 생각해요. 여성이 군복무를 할 필요는 없어요. 남성도 신체적으로 적합하지 않으면 군복무를 하지 않는걸요. 그저 평등하게 국가에 대한 시간투자를 하기만 하면 됩니다. 타이트하게 줄이면 9개월, 6개월 정도 국가에 대한 시간 투자를 하고 3개월 정도 예비군 형식으로 응급처치나 재해대피요령을 받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뭐 어찌되었건 여성도 같이 국가에 대한 시간을 투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성별평등이 시작되겠지요. 언젠가 어떤 여성강사가 성별평등을 위해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의무와 권리의 상관관계라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비판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참 슬프죠. 남성이 여성의 수치심에 길들여진 것처럼, 여성도 남성의 허세에 길들여져 있어요. 손익관계를 떠나서라도 이렇게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허세를 타고난 것으로 생각하니 허세로 발생하는 부당함에 대해서는 항의하면서 패배에 대한 울분으로 슬퍼서 눈물 흘리는 것조차 질질 짠다고 비웃는 모순이 발생하죠. 불합리한 교육은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한 행동을 낳습니다. 이외에도 하나하나 살펴보세요. 남성이 느끼는 부당함은 대체로 허세 때문에 발생했거나 해결할 수 없는 거예요. 참 허세 때문에 괴로운 것도 괴롭지 않은 척 해야 하고, 슬픈 것도 슬프지 않은 척 해야 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 쌘 척하는 건 너무 가여워요.

 

그러니 여성들은 허세에 찌들은 남성들을 보고 비웃지만 말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할 생각을 해야 해요. 남성들의 약함을 배려해서 허세를 권장하거나 유도하지는 말아야 해요. 그리고 남성들도 자신들이 허세에 약해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더 이상 약함을 나누거나 물려주지는 말아야겠지요. 약해지면 괴로우니까요.

 

여성들이 과거 여성들이 겪은 부당함을 물려받았다면, 남성들도 남성들이 행하던 부당함을 물려받았어요. 그러니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성의 허세에서 벗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거죠.

 

 

뭐 일단 여기까지 쓸게요. 중요한 건,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억압하던 제약이었음을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제약은 악습이에요. 저는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하지만 이 악습마저 사랑하지는 않아요. 불필요한 걸 없애고 우리 손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외관계

 

예민한 문제니까 몇 가지만 간단히 말할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하지요. 저는 그것을 긍정해요. 하지만 관점이 조금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어요. 저는 역사를 통해 반성을 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분들은 반성보단 증오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증오나 북한에 대한 증오나, 결국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이상 물려받은 것일 텐데요. 증오를 물려받고, 또 물려주려고 하는 걸 보면 참 슬픕니다. 다른 사건들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역사를 통해 증오를 잊지 않기 보다는 반성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것 또한 올바름을 물려받은 것이지요.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소원이에요. 그리고 그 소원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는 거죠. 지금 저는 그렇게 통일을 바라지 않아요. 뭐 어차피 이제는 전세계 사람이 하나의 민족화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만년? 천년? 어쩌면 백년 안에 하나의 민족이란 인식이 당연해 질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과거의 세계대전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처럼, 미래에는 지금 국가간의 신경전을 어리석다고 여길지도 모르죠.

 

 

이외 다양한 것을 전부 살펴보세요. 불합리한 건 전부 불합리한 교육에 영향을 받은 거랍니다.

 

 

어른과 아이는 나중에 쓰도록 할게요.

 

 

---

 

평범

 

오래 전, 아마 학생일 때, 분노를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화가 날만한 상황에 화가 나지 않자 평범해지기 위해 화가 난 척을 한 것이죠. 내용은 좀 돌려 말해서,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라는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들었어요. 보통이면 화가 나거나 슬퍼하겠죠. 그런데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나오게 된 연유를 깨닫자 마자 화가 나지 않은 거예요. (물론 이해 못하는 건 화가 났어요.)

 

그걸 보고 저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면 화가 나서 화를 낼 텐데 왜 나는 화가 나지 않는 거지’,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해지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어요. 화가 나지 않아도 화를 나는 척을 하게 된 거죠. 분노를 연기하는 나와, 그 연기를 하는 걸 지켜보며 비웃는 나와, 그 둘을 전부 지켜보며 한심해하는 나, 그 순간 갈라짐을 동시에 느끼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건 생생해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자신을 보며 연기 잘하네라고 조소한 것은 잊지 못해요. 끔찍했어요. 그럼에도 저는 그게 평범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평범에 맞춰 감정을 연기했고, 그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해가며 절망했어요. 제가 지쳤다는 건 바로 이거예요. 만들어진 평범에 얽매이는 게 지쳤다는 거예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그걸 할지도 몰라요. 습관이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그게 걱정이 돼요. 불안도 하고요. 어쨌든 제가 말한 평범을 포기한다는 건 그런 의미예요.

 

 

미세먼지,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는가

 

미세먼지의 의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요. 그 중 과학계의 의견이 있어 귀담아 들었습니다. 겨울철에는 중국의 영향이 70프로 가량되지만 봄철에는 15프로 가량이다 라는 의견을 들었어요. (기사로만 접해서 그 의견이 전부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 의견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최근에 연달아 발생한 미세먼지 저감조치를 경험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에요. 중국의 영향이 크지 않다면 그 정도의 먼지가 국내의 영향으로만 커져나갔다는 건데, 그건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외부의 요인이 적은 상태에서 그렇게 큰 차이로 먼지가 늘어났다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관점을 달리해야겠지요. 봄철에 중국의 영향이 15프로다, 최근 미세먼지 저감조치가 연달아 발생했다, 이 두 가지가 진실이 되려면, 봄철의 영향이 15프로라는 건 평균일 뿐이다, 라는 결론이 나오죠. 특정 날에는 15프로 이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특정 날에는 15프로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라는 결론이면 우리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는 건 매우 타당해요. 우리가 실질적으로 불편과 불안을 느끼는 건 평균이 아니라 고점입니다. 100~150정도가 되면 외출도 막을 정도로 실질적인 불편이 나타나죠. 그리고 그 불편이 일상화 될까 봐 불안을 느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국민들을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건 특정 날에 대한 진실과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대책을 내놓는 거겠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과학계를 의심하지 않아요. 저는 앞으로 인간의 개성이 국적이 아닌 직업, 취미 등으로 분류될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의 민족화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진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국적보다는 직업이나 취미가 개인의 개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과학자여서 신뢰하기 보다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자존심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맹신은 아니지만요. 객관적으로 보면 평균적으로는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신뢰와는 별개로, 자연현상만 보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현상도 관찰해서 국민들의 마음까지 다독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뭐 의견 전체를 본 것은 아니어서 어쩌면 그 방법까지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미래

 

과거를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용서했고 현재를 관찰하여 약함을 알아냈고 미래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감정과 욕구와 욕망이 깨어났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를 보니 현재가 너무 초라하네요. 할 게 너무 많아요. 그래도 지난날의 삶을 되풀이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걸 위해 준비해온 기간이었으니까요.

 

 

 

제가 글을 쓸 때 머리 속에서 쓴 걸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정리되기 때문에 문장의 시작과 끝이 달라질 때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조사나 접속사가 잘못 활용될 때가 많았어요. 처음부터 잘 쓰거나 한번은 퇴고를 해야 하는데, 나름대로 정해둔 시간 안에 작성하려고 하다 보니 오타나 비문이 넘쳐나더군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쓰고 본 것은, 완성에 집착하기 보다는 쓴다는 습관을 길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뭐 쓰다 보면 더 늘겠죠.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에 편집자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생각하는 법은 이제 나름대로 할 줄 안다고는 생각하는데 말하는 기술이나 쓰는 기술이 부족하네요. 마음이 약해질 때엔 누군가에게 이런 기술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기도 해요. 하지만 누가 도와주겠어요. 저 스스로 노력해야겠지요.

 

 

그럼 또 만나요.

신고

 
이전 21 현재페이지22 23 24 25 다음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