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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인간교육 (0) 2019/04/07 PM 11:55

인간교육

 

 

 

인간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교육이 어렵겠지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버리지 못하여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아주 본질적인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좀 더 고상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보이지 않는 이상 속을 헤매고 있지요.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나 욕망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드높은 이성을 통해서만 인간이 빛을 발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지요. 꿈꾸듯, 취한듯, 존재하지 않는 허상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만족이 빚어내는 우월감에 깊숙하게 파묻혀 실제 현상을 보지 않은 채 공상 속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진화론, 돌고래, 수화하는 침팬지, 언어를 모르는 인간의 무지 등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는 오로지 지능뿐입니다. 그 어떤 현상에서도 그 이상의 차이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싸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이러한 아주 당연한 진실이 인간은 동물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진리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알려주게 됩니다. 욕구나 욕망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며 그저 억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과 마주보고 인내하고 제어하여 세상이나 사회의 질서를 깨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가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욕구나 욕망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않는 것을 고고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는 사회 질서에 맞춰 그들과 타협해 가는 사람들이 보다 더 현명합니다. 그리고 고상합니다. 이성이란 독재자보다는 이성과 감성, 욕구와 욕망 등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자신의 균형을 맞추는 민주주의가 더 우수합니다.

 

지능 외엔 차이가 없다는 진실은 인간의 격을 동물과 나란히 하게 만듭니다. 객관적으로 인간의 가치는 다른 생명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특별한 존재가 인간만을 우선시하며 재난에서 구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종의 최고선인 종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최고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동물을 보호하는 것도,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전부 인간을 위해서 보호하고 있고 보호해야 위선과 오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겁니다. 뭐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여실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악이 무엇인지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해가 되는 일들은 악으로 판단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만 특별하다는 오만한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아의 근원도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들어가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당연했다, 하지만 인간만을 특별하게 여겼기 때문에 놓치고 있었던 진실, 자아의 근원은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세포입니다. 모든 생명이 제각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세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뇌를 가진 동물은 뇌를 통해 세포를 여론화하여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인간은 높은 지능과 후천적 언어를 가지고 있어 지성까지 갖출 수 있을 뿐입니다. 세포 자체가 자아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저급하게 여겨왔던 욕구나 욕망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듭니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싸고 싶다, 라는 욕구 하나하나가 전부 다 나의 일부였던 겁니다. 그러한 욕구를 부정하는 건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천시되어왔던 단순한 감정, 욕구, 욕망 등이야말로 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형성되는 배아시절부터 시작한 세포의 움직임은 뇌로 저장되어 이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욕구, 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리는 생각, 그 생각을 통해 움직이는 행동, 이러한 일련의 동작이 중첩되고 중첩되고 또 중첩된 것이야말로 이성! 반복된 감정, 욕구, 욕망 등이 빚어내는 체계화된 이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세포의 여론입니다. 반면 현재 지금 몸이 빚어내는 감정, 욕구, 욕망 등이야말로 본능! 지금 당장의 충동이 뇌로 전달되어 중첩된 무의식에 접근해 유전자의 본능뿐만 아니라 경험의 본능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현재 지금의 세포의 여론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중첩된 세포의 여론으로 현재의 세포의 여론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통일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만듭니다. 조 단위가 넘어가는 인간의 세포 각각이 전부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겁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하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배고팠을 때의 마음과 배부르고 나서의 마음이 다르거나, 누군가를 사랑과 동시에 증오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각각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공포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워서 흔들다리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세포 자체가 자아의 근원이기 때문에 인간은 매분 매초 계속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다르게 여기는 건 아주 당연한 현상입니다. 매분 매초 달라지는 우리들이 하나의 자아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우리들이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잃게 되면 사람이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건 최근 실제 경험해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인격도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인격을 유지하는 기억만 날라가면 인격도 바뀔 수 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동물이라는 아주 당연한 것을 이해해야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걸 알아야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춘기 시절 자신의 변화를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이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차성징을 통해 성에 눈을 뜨면서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을 받아드리기 버거웠던 것이지요. 누군가 그걸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몰래 몰래 죄책감을 느껴가며 충동을 스스로 제어했어야 했어요. 그게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춘기 아이들의 성에 대한 충동을 무조건 막는 것을 반대합니다. 모든 감정과 욕구와 욕망 등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전부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와 마주보고 최대한 사이 좋게 지내는 거야 말로 인간에게 있어 지고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간교육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필요성

 

우선 인간교육의 필요성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필요성을 인식해야 중요함도 인식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왜 인간교육이 필요한 걸까요? 그건 인간의 약함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약함을 타고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약함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말이죠.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도 약함을 타고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욕구나 욕망 등으로 사회의 규칙을 깨는 것을 사회에선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걸 죄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모두 죄의 약함을 타고 납니다. 이러한 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죄에서 강해지기 위해 인간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도덕을 통해 죄로부터 강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보호자의 편의를 위해 행해진 불합리한 교육으로 도덕에 약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죄를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 이치에 맞는 논리적인 설명이란 귀찮음을 감수하기 보다는 무조건 내 말이 옳다며 도덕을 강요하거나 폭력으로 강제하며 다스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덕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왜인지 모르게 꺼려져서, 괴로워서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죄로 떠미는 결과도 낳게 되었습니다. 보호자의 편의를 위해 행해진 불합리한 교육은 때로는 도덕에 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죄에 약하게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보호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보호자들은 단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쳤을 뿐입니다. 가치관이나 감정, 감정이나 욕구나 욕망제어방법 등을 물려줬던 것도 그냥 그렇게 배웠을 뿐입니다.

 

몇몇의 보호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방관하여 아이들이 스스로를 제어할 줄 모르게 되어 죄에 약해진 상태로 성장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교육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왔습니다. 그 약함이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들을 만들어왔던 거지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인간교육이 필요합니다.  

 

도덕에 약해지지 않는 합리적인 인간교육을 한다고 해서 단순히 죄에 강해지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편의를 위해서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약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교육해도 다른 곳에서 악영향을 받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려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간교육, 남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입니다.

 

 

 

인간교육

 

일반적인 교육은 남을 통해 나를 알아갑니다. 남이 어떤지를 보고 거기에 나를 맞춰가는 거지요.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건 비슷한 사람들을 양성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정한 어떤 답에 나를 맞춰가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답이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하더라도 그 답을 입는 것을 사회에선 우수하다고 평가 하기 때문에 그 답을 억지로라도 끼어 입게 됩니다. 그 답을 입지 못하거나 입지 않는 걸 선택한 사람들은 설령 우수하더라도 사회에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답에 근접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엾게도 무능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입시미술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우수한 예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더라도 입시미술에 맞는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잃게 되어 다른 것에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는 겁니다. 남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남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을 정립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남이 정한 답을 자신의 답으로 받아드리게 되는데 어찌 자신만의 주관을 정립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의 생각을 자신의 주관으로 여기게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쉽게 영향을 받았던 겁니다. 만들어진 약함에 약해지고 감정들을 쉽게 물려받았던 것도 이렇게 자신만의 주관이 정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건 가르치고 평가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이지만 이렇게 비슷한 사람을 양성하거나 우수한 사람을 놓치거나 주관이 정립되지 않아 무언가에 약한 사람을 만들게 됩니다.

 

따라서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을 바라보더라도 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불합리한 교육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에 이치에 맞는 논리가 필요합니다. 굳이 새로운 교육이 아니더라도 모든 것에 논리는 필요합니다. 왜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 하나, 왜 시간을 준수해야 하나, 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나, 왜 도둑질은 하지 말아야 하나, 왜 폭력은 쓰지 말아야 하나, 등등 모든 것을 아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남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 되게 될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기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죄에 강해지기 위한 도덕을 가르칠 때 평범한 아이와 공감능력이 결핍된 아이를 똑같이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일일이 따로따로 모든 걸 교육하기엔 어려우니 아이 스스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여 판단을 내린 것을 보호자나 교육자가 보고 교정해나가야겠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 이것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주관적인 답과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답. 이 둘을 전부 배우는 겁니다. 어떤 문학을 배울 때 화자의 마음이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답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주관적인 답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겁니다. 아마 최초엔 자신의 주관적인 답도 중요하게 여기겠지요. 감상문 같은 걸 쓰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객관적인 답만 평가로 들어가다 보니 나중엔 결국 객관적인 답만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상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인터넷을 보면 감상문을 대신 써주는 일조차 있지요. 어차피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감상문,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수학 같은 답이 정해진 학문도 같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을지 몰라도 풀이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만의 풀이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정답이 되어야 합니다. 주관적으로 내린 답과 객관적인 답을 둘 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을 지켜야 할 이유에 대한 답부터 알려주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여 주관적인 답을 내리게 합니다. 그 뒤 교사가 객관적인 답을 알려주면 스스로 적절하게 교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객관에 흡수되지 않은 자신만의 주관이 정립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주관적인 판단이 내려질 겁니다. ‘이 사물은 이런 거구나같이 말이죠. 그 다음에, 그 주관적인 판단을 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보는 겁니다. 수치나 사회적 통념이나 언어의 약속 같이 객관적인 요소들만 나열해 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해봅니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주관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겼지만 객관적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가 가능해질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취미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미면 인기 있는 이유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편견을 객관적인 나로 하여금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 주관적으로는 그 약함이 올바르다고 여기고 있더라도 객관적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약함이 괴로워서 바꾸기 힘들더라도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겁니다. 그 어떤 약함도 흔들리지 않는 정립된 주관과 그걸 지켜주는 분리된 객관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것이 현재 제가 생각하는 인간교육입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니 나중에 더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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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많이 필요한 주제라 천천히 정리해나가겠습니다.

 

마음을 닫은 채 성장하다 보니 많을 걸 모르게 되네요. 친해지는 방법도 기대는 방법도 모르겠어요. 이론이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거짓가면을 쓴 채로 하면 그래도 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어렵네요. 무엇보다 자신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워요.

 

다음엔 아마 약함 편을 보강하기 위해 남성, 어른, 아이 같은 사례를 좀 더 써서 정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례는.. 사실 정해진 일정한 법칙을 그대로 다른 사례에 적용해도 거의 대부분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써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서 완전 새로운 걸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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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2) 2019/03/31 PM 11:36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불평등한 가치관이나 불균형한 힘과 책임 같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해요. 교육이든 언론이든 인터넷이든 말이죠. 그런데 불합리한 교육을 해결하지 않고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을 설득할 때 합리성이 없으면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불합리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것이 낳은 약함을 주제로 선정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약함이란

 

사람의 약함은 크게 ‘타고난 약함’과 ‘만들어진 약함’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약함은 보통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말이죠. 여기서 죄의 약함이나 감정의 약함도 포함됩니다. 욕구나 욕망이나 감정은 기본적은 다들 가지고 태어나니까요. 이렇게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약함을 타고난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둘째, 만들어진 약함은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된 어떤 제약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반찬은 다 먹어야 해’, ‘무조건 학교는 가야 돼’, ‘무조건 공경을 받아야 해’ 같이 말이죠. 이 만들어진 약함은 내제된 제약에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면 약해진 사람은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불합리한 행동도 불사하게 되는데, 그때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만드는 약함을 가리켜 만들어진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편견과 트라우마

 

편견과 트라우마와 헷갈릴 수도 있으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편견은 치우친 생각으로 만들어진 약함으로도 생성됩니다. 인종차별이나 성별차별이나 지역차별 따위는 이런 만들어진 약함이 낳은 편견이겠죠. 교육으로 만들어지든, 경험으로 일반화하여 만들어지든 말이죠. 하지만 모든 편견이 만들어진 약함으로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저 몰라서 생긴 편견도 있거든요. 이 몰라서 생긴 편견은 생각보다 쉽게 바꿀 수 있어요. ‘아, 내가 몰랐었네’하고 바꿀 수 있지요. 반면 만들어진 약함으로 생긴 편견은 괴롭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려워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네가 이상한 거야!’ 라며 남 탓을 하거나 ‘어쨌든 내 잘못은 아니야.’ 라면서 합리화를 합니다.

 

둘째, 트라우마는 만들어진 약함과 비슷하게 괴로움을 느낍니다. 어떤 안 좋은 사건을 겪은 후 그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건 대체로 괴로운 원인을 알 수 있어서 대처는 할 수 있게 돼요. 어렵지만요. 반면 만들어진 약함은 타고난 약함으로 여기거나 그 약함을 올바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꿀 필요성조차도 몰라요. 그래서 이 만들어진 약함이란 짐을 평생을 걸쳐 짊어지고 가게 되죠.

 

 

 

약하게 만든 이유

 

약하게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넘어갈게요.

 

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어왔던 걸까요? 그건 간단해요. 약한 사람이 다루기 쉽거든요. 어떤 형태로든 제약을 걸어서 약하게 만들어야 다루기 쉽기 때문에 그 옛날부터 지배계층이나 어른들이 백성들이나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어왔어요. 도덕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어 왕과 양반들에게 충성하게 만들고 어른들을 공경하게 만든 겁니다. 특별한 논리는 없어요. 백성들이 지배계층에 충성해야 될 이유 따윈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으로 약하게 만들거나 힘으로 찍어 눌러왔던 거죠. 논리가 없으니까요. 어른을 공경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어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이끌어가기 때문에 공경하는 건 어쩌면 타당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든 어른이 그런 건 아니잖아요. 지독한 범죄자도 어른이라고 공경하라고 말할 건가요? 그러니 마냥 어른이면 다 공경하라고 하기 보다는 훌륭한 어른, 제 기준에서 바라보면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어른들을 공경하라고 말할 거예요. 역할존중이죠.

 

이렇게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다시 한번 그 약함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약함의 굴레는 이어져왔어요. 뭐 입장을 바꿔보면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효율적이고, 윽박지르면서 ‘내가 무조건 옳으니까 너는 따라야 돼’ 라고 말하니 편하지요. 죄에 강해지게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죄를 짓지 말아야 될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도덕에 약하게 만들어 죄를 짓는 것만 생각해도 괴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게 관리하는 입장에선 편하고 좋죠.

 

하지만 이건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냥 약하게 만든 것에 불과해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약한 인간을 양성하게 된단 이야기입니다. 옛날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지배계층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모든 국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졌잖아요? 한 명이라도 더 약해지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되겠죠. 무엇보다 지금은 고립된 세상이 아니에요. 우리끼리 서로를 약하게 만드는 건 세계와 경쟁할 때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수가 많은 것도 아닌 나라에서 약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계와 경쟁할 때 어떻게 되겠어요. 어떤 이유, 어떤 목적이든 이제 그만해야겠지요. 편하자고 우리나라 사람을 약하게 만들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나라 사람이니까요.

 

뭐 이외에도 다양하죠. 믿지 않으면 지옥, 종교가 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었을까요? 그야 다루기 쉬우니까 그랬겠죠. 벌벌 떨면서 신을 모시게 만드는 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하죠. 뭐 애초에 논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지역차별, 지역사람들을 약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죠. 정치인들 입장에서 다루기 쉬워지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모든 걸 다른 지역 탓으로 돌리며 차별하게 만들면 서로 싸우느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게 되죠. 포탈사이트 뉴스 댓글 보다가 슬퍼서 눈물이 났어요. 거기엔 증오, 맹목적인 증오밖에 없었어요. 누군가를 지지하거나 비판할 때엔 그에 맞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요. 무조건 좋고 무조건 싫다고 해요. 예전이라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모든 현상을 받아드린 지금 그 댓글 하나하나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여겨지는 바람에 슬퍼졌네요.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할 그 모습, 어리석은 게 아니에요. 약해졌으니까 그런 거예요.

 

 

 

물려받은 감정

 

잠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게요. 이건 제가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는 종종 종교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불신지옥이라고 말하며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가 있어요. 당시부터 이야기를 나눠봐야 피곤한 건 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관련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곤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아이가 붙잡혀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열이 뻗쳐서 그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순진무구한 얼굴 사이에 얼핏 드러나 보이는 난처함. 말하는 사람이 나이든 사람이다 보니 싫다고도 말 못하고 묵묵히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죠. 이때 정말 많이 갈등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아이에게 공포를 심어주지 말라고 쏴 붙이면서 아이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이란 말이죠. 그냥 갈까 말까를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주제 넘는 참견이라고 자기합리화 하면서 떠난, 매우 후회하는 기억이 있어요. 젠장

 

약해져서 공포에 덜덜 떠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최소한 물려주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 어떤 것도 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해요. 누군가의 감정을 물려주는 건 그만둬야 합니다. 사랑도 증오도 마찬가지에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조국을 사랑하라 말하죠.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건 그냥 사랑을 물려주는 것에 불과해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해야죠.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진 지금, 나라는 모든 국민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라는 건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이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사랑하게끔 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나라니까 사랑하라고 해요. 그건 잘못된 교육이에요. 사랑해야 될 이유를 논리적으로 교육받은 게 아니니까 맹목적인 애국이나 이유를 몰라서 저지르는 매국이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증오도 마찬가지에요. 미리 말해둘게요. 저는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이 싫어요. 그리고 그들이 처벌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처벌받지 않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나라를 팔아먹을 테니 사회질서가 흔들리겠죠. 하지만 그런 증오를 물려주는 건 별개예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나 ‘친일파가 싫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나 슬퍼 보이긴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더 슬픈 건 그런 걸 보고 잘했다며 칭찬하는 어른들이에요. 증오를 물려받고 칭찬받은 아이들은 그 증오를 평생 떠안고 살아가겠죠. 그리고 맹목적으로 증오할거에요. 공산당과 비슷한 것만 봐도 진저리 치며 괴로워하거나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만 봐도 혐오하겠죠. 약해진단 말이에요.

 

나는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판단해서 무언가를 증오한다면 그래도 이해하겠어요. 성장한 다음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처벌한다고 말한다면 박수를 치면서 응원할 거예요. 하지만 물려받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들이 증오를 물려받아야 할 논리적인 이유가 있나요? 그냥 어른들이 했어야 할 일을 떠넘긴 것뿐 아닌가요? 아이들의 감정은 아이들의 것이에요. 사랑이나 증오나 공포 같은 감정들을 그만 좀 물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만 좀 약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감정을 물려주는 것도 아이를 자신의 2회차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성

 

여성들에 대한 진정한 억압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볼게요.

 

요즘 여성들은 성별평등을 주장하며 탈코르셋이나 여성들의 수치심 교육을 많이 하고 있지요. 어떻게 해야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성희롱이고 성폭행인가 같이 말이죠. 그런데 사실 정말 여성들을 억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좀 더 끔찍한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쩌면 여성분들이 받아드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미리 말해둘게요. 저는 여성을 사랑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게요.

 

요즘 여성들은 수치심을 많이 느끼고 있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수치심을 느껴요.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며 괴로워하죠. 남성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껴서 괴로움을 느끼는 여성들도 있어요. 그래서 남성들은 지하철에 타면 손을 올리고 있지요. 배려하기 위해서든,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든요. 그런데 이런 수치심은 타고난 것이 아니에요. 만들어진 수치심이에요.

 

언젠가 봇물이란 단어를 보고 수치심을 느껴 항의한 여성들을 비웃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화를 내냐며 비웃은 거죠. 하지만 이건 단순히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몰랐다면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궁금하면 검색부터 먼저 해보면 되는 문젭니다. 그런데 검색조차 하지 않고 수치심부터 느끼며 분노했던 건 만들어진 수치심에 약해져 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사소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는 여성들이 있지요. 그런 것은 전부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별일 아닌 것에 괴로움부터 느끼는 건 트라우마를 연상시켜요. 좋지 못한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그 사건과 비슷한 것만 봐도 괴로워하죠. 마찬가지에요. 무언가에 약해진 사람은 비슷한 것만 봐도 괴로워하는 거예요.

 

 

수치심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드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해볼게요.

 

첫째, 성별을 바꿔봅시다. 남성들은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데 그렇게 큰 수치심을 느끼진 않아요. 그냥 좀 부끄러워하고 말뿐이죠. 더구나 여성들의 알몸을 본다고 수치심을 느끼진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낄까 걱정돼서 눈을 피할 뿐이죠. 그리고 스친다고 수치심도 느끼진 않아요. 뭐 대놓고 만지작거리면 느끼겠지만 수치심보다는 분노와 짜증이 먼저 일어나겠죠.

 

둘째, 과거로 가봅시다. 그 옛날 사소한 수치심은 없었겠죠.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스키타이였나, 그런 민족은 보호자와 함께 남성을 사냥해서 사냥한 남성과 결혼했다던 이야기도 있다고 들었어요. 뭐 모계사회였던 시절도 있었던 걸 보면 현대와 같은 수치심은 없었겠죠. 현대에도 비슷한 건 볼 수 있어요.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고립된 지역의 원주민들은 가슴을 내놓고 다녀도 별다른 수치심을 느끼지 않지요. 당당하게 아기 젖을 먹여요.

 

이하의 사실로 하여금 수치심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대의 수치심은 대부분 만들어진 겁니다. 남성 알몸 본다고 수치심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 이상함이 바바리맨 같은 이상한 변태를 만든 거죠. 때론 수치심을 느끼지 않은 여성이 역으로 놀리기도 하지만, 바바리맨의 존재자체가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치심은 왜 만들어진 걸까요? 거기서부터 여성들의 진정한 억압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수치심이 만들어진 이유, 제 생각을 말해볼게요. 끔찍할지도 몰라요. 그건 남성이 여성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든 약함입니다. 원래부터 여성이 타고난 수치심이 아니에요. 다른 남자에게 한눈 팔지 말고 조신하고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약하게 만든 겁니다. 지배계층이 백성들을 약하게 만들어 충성하게 만든 것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어 공경하게 만든 것과 같은 거예요.

 

자 보세요, 왜 다른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게 했는가, 그러면 결혼한 남성 외의 남성에겐 접근하기 어려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죠. 왜 스치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끼게 했는가, 정절을 지키게 만들기 위해서죠. 왜 정절 높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고 하잖아요? 이거 되게 끔찍한 거예요. 그러니 은장도를 들고 자결했던 거죠. 약해졌으니까요.

 

이제 알거라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치심들은 대부분 남성들이 여성들의 정절을 지키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약함입니다. 남성들이 만든 약함을 여성들의 타고난 약함인 것 마냥 취급해왔던 거지요. 슬픈 건 그 만들어진 약함을 성별평등이란 이유로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21세기에 새로운 정절교육이라니-

 

그렇다고 수치심을 완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회전체가 만들어진 수치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여성이 수치심을 버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여성이 만들어진 수치심을 버리고 남성처럼 행동했다고 가정해보죠. 남성이 터치를 해도 웃고 넘기다 보면 만만하게 보여질지도 몰라요. ‘아 이 여자는 만져도 되는 여자구나’ 라고 생각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함부로 수치심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해요.

 

하지만 괴로움을 느끼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왜 괴로움을 느껴야 하나요. 남성 알몸 본다고 괴로움 따윈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는 웃고 넘어가고 혹시 그런 변태가 있으면 오히려 비웃어주세요. 그리고 스친다고 괴로움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냉정하게 관찰해서 성희롱인지 판단한 다음 행동해야겠지요. 도움을 청하는 손수 격퇴를 하든 간에요.

 

이게 진짜 여성들을 억압해왔던 거예요. 이것이 진짜 코르셋이라고요. 외면 같은 게 아니라 여성의 내면을 억압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예요. 도대체 무엇이 진짜 억압인가요?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성들이 만든 수치심이 억압인가요, 아니면 여성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고 이성의 관심을 받기 위해 외모를 꾸몄던 것이 억압인가요? 도대체 왜 외모를 꾸미는 게 코르셋인지 모르겠어요. 외모를 꾸미는 게 코르셋이면 남성은 왜 꾸미고 있나요? 이성에게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억압이 아니라 타고난 본능이에요. 여성의 미모에 남성의 취향이 반영되고 있다는 건은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거 때문에 탈코르셋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건 남성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남성의 미모에 여성의 취향이 없다고 확답할 수 있나요? 특히나 성별평등이 도래한 지금, 남성의 미모는 여성의 취향에 맞게 변하고 있어요. 지금 인기 있는 남성 연예인을 참고하여 여성들의 취향에 맞는 외모를 가꾸려고 하고 있죠. 물론 여성이 좀 더 많이 노력한다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크기는 달라도 목적은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가꾸는 거지, 남성들이 주입한 코르셋이 아니라고요. 진짜 여성의 코르셋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에요.

 

약해진 수치심을 타고난 것으로 생각하여 억압으로 받아드린 게 아니라 평등의 일부로 받아드리니 ‘여성은 수치심을 느껴도 되고, 남성은 수치심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같은 모순이 발생하죠. 불합리한 교육은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한 행동을 낳게 만듭니다. 이외 다양한 것들을 관찰해보세요. 불합리한 건 전부 약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했던 겁니다. 남성을 위한 게임에서 왜 여성주인공은 없느냐고 불평하는 걸 봤어요. 도대체 왜, 모든 것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불평등하다고 느끼게 만든 건가요? 남성들은 그러지 않잖아요. 여성을 위한 게임에서 남성주인공이 없느냐고 불평하진 않는다고요. 평등이란 도덕으로 여성들을 약하게 만드는 건 그만해주세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전부 불평등하다고 느끼게 되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그거 되게 괴롭거든요. 정말 우리 시대의 여성은 남성이 만든 수치심과 여성이 만든 평등에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 보여서 안타까워요.

 

그러니 남성들은 봇물 같은 걸 보고 비웃지만 말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할 생각을 해야 해요. 트라우마로 약해진 사람을 비웃지는 않잖아요? 가여워할 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성별관계 없이 모두 약해져 있어요. 여성의 배려를 받기 위해서는 남성도 배려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더 이상 약함을 나누거나 물려주지는 말아야겠지요. 약해지면 괴로우니까요.

 

무슨 년생이란 책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남성들은 그걸 보고 비웃지요. 내용 자체가 극단적이고 요즘 시대의 여성이 겪기 힘든데도 공감하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건 비웃고 끝날 게 아니에요. 여성들이 공감한다는 현상 자체가 있잖아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봐야죠. 물론 이건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약해졌기 때문에 공감하는 겁니다. 우리는 약함을 물려받았어요. 여성들은 어른들에게 여성들의 부당함을 계속 듣고 자라났겠죠. 부당함에 대해 특별히 논리적으로 교육받은 게 아니라 부당함을 당한 여성들의 한탄을 듣고 자라났어요. 불합리한 교육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약해졌지요. 사랑이나 증오나 공포를 물려받은 것처럼 부당함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직접 겪지 않은 이야기도 공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책은 그러한 물려받은 부당함을 긍정해줬어요. 불합리 했기 때문에 여성 스스로도 올바른지 아닌지 헷갈리고 있을 때에 ‘너는 잘못된 게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책이 어찌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자기합리화 할 필요도 없이 대신 합리화해주고 있는 책이라는 겁니다.

 

 

여성의 약함과 약하게 만든 이유와 물려받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비슷하지요?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된 만들어진 수치심이란 약함과 평등이란 강박관념, 그걸 만든 이유는 여성을 편하게 다루기 위해서, 물려받은 부당함. 제가 써놓고도 슬프네요. ….

 

다른 사람들도 비슷해요. 약함을 가지게 된 것도, 약하게 만든 이유도 물려받은 감정도, 결국 불합리한 교육의 희생자들이죠. 그리고 그걸 알지 못하고 마치 올바른 것을 전수해주는 거 마냥 똑같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있어요. 수치심도 허세도 사랑도 증오도 공포도 전부 물려주고 있지요. 그 굴레, 이제는 끊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교육이든 언론이든 인터넷이든 정보전달매체가 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사랑해요. 하지만 악습마저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가 물려받은 약함은 우리 시대에, 우리 손으로 끝냅시다.

 

 

사실 다른 예시도 작성해볼까 했는데 많이 길어졌네요. 다른 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만 추가로 작성하고 끝내죠.

 

욕구나 욕망이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죄를 저지르는 악인은 악한 게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만, 스스로 원해서 저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절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유를 위해 제멋대로 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 강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강한 게 아니에요. 개체는 강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종으로선 약해요. 악은 죄를 저질러 질서를 파괴하는 힘, 한마디로 종의 자멸을 이끌어내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종으로선 약한 거라는 거예요. 제어하지 못해도 약하고 제어할 필요가 없어서 저지른 것도 결국 약한 거예요. 단지 개체로 약한지, 종으로 약한지의 차이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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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4월 1일이니 새로운 결심을 한지 1년이 되겠네요. 아, 그간 개인적인 괴로움을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다 보니 생각보다 발전이 더뎠네요. 그래서 조금 슬퍼요.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별일 없으면 올해 안에 최소한 불평등한 가치관, 불균형한 힘과 책임, 불합리한 교육, 그리고 자아는 완성해볼 예정입니다. 중간중간 내키는 대로 쓰는 주제들로 더 늘어날 거 같지만요.

 

일단 다음 편은 인간교육을 쓸 예정입니다.

 

저는 삼권을 이렇게 생각해요. 질서를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고 만들어지고 유지된 질서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지요. 이들이야 말로 질서를 지켜야 함은 당연한데, 때때로 질서를 지키지 않고 파괴하는 분들을 보게 되면 슬프네요.

 

그 동안 개인적인 괴로움 때문에 못해온 것들을 해보려고 하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아요.

 

그럼 살아있으면 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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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코넬    친구신청

하인리히만의 애송이가 생각나네여ㅎ
레토릭에 단어와 술어를 끼워 맞추면 재미있죠.
대구도 반복도 매번 재미있고 새로운 반짝임이 보이는 거 같지만
전부 내 머릿속에서의 화학 작용일 뿐이고 타인이 읽을 때의 목 넘김은 전혀 달라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 전혀 와닿게도 못하거니와 질질 길어지기만 하졍.
그래서 댓글이 안달리는거구여.

[불평등한 가치관이나 불균형한 힘과 책임 같은 우리의 문제]
는 시작하는 말인데도 이미 술어가 어떻게 풀어주지 못할 정도로 지저분하죠.
[사람의 약함은 ~구분하고 있습니다]
같은 아무 꾸밈없는 문장부터 주술 호응이 틀려있으면 제 경우 더 읽어볼 생각도 안들구여.
어휘는 문맥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정확해야 합니다.
해결과 규명 방식이 엉망인걸 지적하기 이전에 제시부터가 제대로 안되어있어요.
혼자 중얼거리는 꼴 이죠.

글 쓰는 거 되게 좋아하시는거같은데
가끔 메인에서 볼 때마다 너무 발전이 없으셔서 감상 조금 남기고 가요
땡기는대로 이것저것 써 보는 것도 좋지만
이래서야 완전히 마른땅 밟는 꼴이구 독서력을 더 높이는걸 추천드려영

헛소리좀그만해    친구신청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잡담] 민족이란 무엇인가 (1) 2019/03/24 PM 11:38

민족이란 무엇인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민족

 

저는 민족을 욕구나 욕망을 위해 악으로 시작했다가 보호를 위해 선으로 진화한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은 사회가 있어야 성립된다.’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일단 이런 개념들은 잠시 뒤로 해야 내용의 이해가 쉬울 것 같아 보편적인 개념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우선 까마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보고 현재와의 공통점을 찾아 미래를 예측해보는 겁니다.

 

최초의 원시인들이 선가 악이란 개념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욕구나 욕망을 절제하지 않았을 겁니다. 동물처럼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잡아먹고 졸리면 아무 때나 자고 원하는 이성이 있으면 덮쳤겠죠.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악당이 따로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당들도 시간이 지나면 선으로 진화합니다. 아기를 보호해야 하니까요. 그러지 않은 집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멸종될 겁니다. 대를 이어줄 아기를 보호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는 보호가 필요한 자손을 낳는 동물들이라면 비슷할 겁니다. 자손을 돌보지 않으면 멸종한다는 사실을 본능에 의해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자손을 보호하지 위해 욕구나 욕망을 절제하기 시작합니다. 배가 고파도 아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음식을 나눠줍니다. 졸리더라도 아기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잠을 참습니다. 어쩌면 덮치고 싶은 것도 참았을 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자손을 보호하기 위해 욕구나 욕망을 절제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형태가 달라져도 비슷하게 전개됩니다.

 

그럼 인간의 지능을 올려보겠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네안데르탈인과 어떤 형식이든 교류를 했을 겁니다. 종이 다른 동물들이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면 사이 좋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싸웠을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서로 싸운 끝에 어느 쪽이건 승리했을 겁니다. 어느 쪽이 이겼건 서로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싸우던 집단도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이라는 악에서 질서라는 선으로 진화하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진화한 집단은 민족이 되어갑니다.

 

그럼 현 인류 수준으로 지능을 올려보겠습니다. 악에서 선으로 진화하는 건 여기서도 비슷합니다. 단지 각자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고유의 문명이 발달하여 고유성이 강해지는 바람에 서로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정복하고 지배하고 부려먹었죠. 최근의 가장 큰 전쟁은 특정 민족의 우수함을 주장하며 정복전쟁을 벌였었습니다. 집단이 커진 상태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 민족화가 진행됩니다. 흑인노예해방은 이러한 흐름으로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인종이 달라도 문명을 공유하면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여기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면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것처럼 유전자의 생존경쟁에 의해 어느 특정 인종만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오랜 시간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면 한 민족이 된다는 겁니다.

 

, 일단 지배구조는 별개로 다루겠습니다. 저는 진화에 의해 지배구조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를 통해 우수한 지능을 갖게 된 개체가 지배를 했던 거겠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전자를 나눈 끝에 모든 개체가 우수한 지능을 갖게 되었음에도 관습에 의해 지배구조가 있어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개체가 우수한 지능을 지니고 있는 현시점, 왕의 존재는 악습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 원시인일 때부터 악으로 시작해 선으로 진화하죠. 그리고 이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집단이 커져갑니다. 사람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나라로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로. 어떤 형태던 욕구나 욕망을 위해 서로를 정복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보호를 위해 선으로 진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언어와 문화를 공유함으로 민족화가 되어갑니다. 작은 민족에서 점차 큰 민족으로 진화하는 것이지요. 그 과정 속에 악과 선을 반복해왔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면 미래도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지구

 

민족의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이제 모든 인류가 하나의 민족이 될 겁니다. 아니 이미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 이상의 문명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언어와 문화를 교류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오랜 세월 공동생활을 하게 되겠죠. 모든 지구인이 하나의 민족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공통조상으로 시작하여 분화했다가 다시 한번 하나가 되기 시작한 거죠.

 

 

지구가 하나가 되었으니까 나타나는 현상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나라가 약해졌을 때 다른 나라에게 공격을 받거나 내분으로 멸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어요. 사회가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세계가 약한 나라를 어느 정도는 지원을 해가며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민족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악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나라에 악이 창궐하면 내부를 갉아먹어 나라가 약해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면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거나 내분으로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가 하나의 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살아있을 수 있는 겁니다. 마피아가 지배하는 나라거나 약으로 찌든 나라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지구가 하나가 되었으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악당들이 사회의 질서에 기대면서 제멋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지구의 악당들이 지구의 질서에 기대면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책임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성실한 나라들이 대신 책임져주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뭐 어쨌든 이렇게 하나가 되어서 보호해주고 있는 거지요. 전쟁의 끝은 무기의 발달이 불렀습니다만, 항구적인 평화는 하나의 민족화가 부를 거라 생각합니다.

 

 

 

문화의 융합

 

지구인이 하나의 민족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문화의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거지요. 아직까지는 그래도 특정 나라의 문화가 구분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겁니다. 어떤 나라에서 각 지역의 특색 있는 풍습이나 문화는 그 나라의 문화인가요? 아닌가요? 그 나라의 문화겠지요. 그와 같이 각 나라의 문화는 지구의 문화가 될 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중국에서 일본 성우를 써서 만든 게임이 한국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지요. 모에- 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종류의 문화를 일본에서 발전시키다 보니 언어 자체가 어떤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인이 자기들 게임에서 일본 성우를 쓸 정도로 그러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어요. 일본어 자체가 일종의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가 된 겁니다. 국적과 관계없이 그러한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 언어를 즐겨 하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현상 자체가 국적과 관계없이 지구라는 일정한 지역에서 문화를 교류한 끝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도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언어는 사용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인구수가 적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 특정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가 된다면 문화의 융합으로 많은 문화가 섞이는 시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네요. 우리나라 문화가 듣자 하니 외향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주로 즐겨 한다고 들었습니다. 가수나 영화나 드라마나 말이죠. 한류라고 부르며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종류의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된다면 문화의 융합이란 흐름 속에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한국어는 단순한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지구인의 문화어로 정착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앞으로 언어는 각자의 취향에 맞게 사용되는 게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지구가 하나의 민족이 되어가면서 언어는 민족 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취향으로 구분되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새 시대를 상징하는 예술은 문화의 융합이 아닐까 생각돼요. 세계화 되면서 자주 보게 되는 여러 가지 문자로 된 안내문도 관점만 바꾸면 정말 예술적으로 느껴지지요. 문화의 융합의 상징처럼 느껴져요. 어쩌면 문화의 융합을 주제로 한 괜찮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는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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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도 사실 시간을 꽤 투자 해야 하는데뭐 개념만 잡아두도록 하지요.

 

 

요새 중국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어요.

 

과거 영국의 예절을 동경하는 부자들 신사나 메이드

과거 영국의 죄를 답습하는 권력자들 일대항로나 스모그 사태를 떠오르게 하는 미세먼지

홍콩 주민들의 독립적인 성향

 

등을 떠오르면 어쩌면 과거 영국을 동경하고 뒤를 쫓아가려고 하는 게 아닐까 뜬금없이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 이러한 미세먼지 해결도 영국의 협조를 받으면 어쩌면…? 정말 뜬금없이 떠오르는데 영국이 아마 개고기에 예민했던가요? 개고기 안 먹는 대신에 미세먼지 문제 해결에 협조해달라고 하면 안될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연상되어서 연결되었어요. 개고기는 보통 별식으로 취급되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안 먹으니까 쉽게 이야기하지만요. 그냥 생각이 떠올랐네요

 

 

저번에 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 적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나를 안다는 건 어렵네요. 어려우니까 더 잘아야 하지만요.

오늘도 제가 왜 이 글을 쓰면서 눈가에 물이 맺히고 가슴 부근이 응어리가 진 것 같이 답답한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좀 나아졌지만요. 왜인지 모를 눈가의 물을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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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isbeaten    친구신청

전제가 잘못 된게 꽤 눈에 띄이네요.
선악 이 사회가 존재해야 존재 할수 있다는 글귀가 보이는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사회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선과 악도 항상 존재했었죠.

또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매구 극심한 먹이 경쟁 관계에 있어 서로가 서로를 약탈 살해하는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종간 교류라고 할만큼의 교류는 없었다고 보네요.

네안데르탈인은 선한 거인/크로마뇽인은 약삭빠른 난쟁이 선입견이 있으신가 보네요.
[잡담] 인공생명 활용법 (0) 2019/03/17 PM 10:54

인공생명 활용법

 

 

 

자동화 시대, 논리가 부족하면 헤쳐나가기 어려운 시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예정이니까요. 사라진 만큼 필요에 의해 또 다른 직업들이 나타나긴 하겠지만 그 수는 많지 않겠지요. 과거에는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했지만 미래에는 자동차에서 자율주행차량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율주행차량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겠지만 그 수는 지금에 비해 무척이나 적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직업을 잃은 분들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그분들을 위해 불필요한 직업을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시대의 흐름에 뒤쳐져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약해지는 순간이 올 겁니다.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해요. 도덕에 약해지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강제로 사라지게 하기는 또 어렵습니다. 그러니 논리가 필요합니다. 강력한 논리로 직업이 사라질 분들을 설득하여 그분들 스스로가 납득해야만 불필요한 국력소모가 없겠지요. 뭐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지리적으로 그렇게 안전한 위치도 아닙니다. 사람밖에 없어요. 사람밖에. 그러니 사람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인공생명 같이 자아를 갖춘 인공적인 존재가 탄생하면 직업이 사라질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수준으로 사고할 수 있다면 정말 많은 직업들이 대체되겠죠. 물론 몇 가지 이유, 자존심의 문제나 비용대비 사람이 저렴할 경우 사람을 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겠죠. 익숙해지면 자존심 문제도 사라질 거고, 기술발달로 비용도 저렴해질 테니까요. 어쨌건 많은 직업이 사라질 전망입니다. 뭐 그런 이유로라기 보다는 그냥 인공생명 활용법에 대해 써보고 싶어서 써봅니다.

 

 

인공생명 활용법에 대해 쓰기 전에 우선 인공생명은 어떤 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작성해볼게요.

 

우선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면 인간의 자아가 인간 자체로만은 생성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같은 감각기관으로 받아드리는 정보도 포함되어야만 자아가 완성되는 겁니다. 인간의 경우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골방에 오랫동안 가둬두면 자아가 붕괴되고 이지를 상실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뇌가 있는 동물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마. 이외에 자아가 존재하는 다른 경우를 알지 못하므로 일단 인간을 기준으로 인공생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진 존재가 새롭게 탄생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 첫째, 유전자 공학으로 현실세계에 인공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둘째, 자아를 가진 동물들의 뇌를 발달시켜 지성을 갖추게 하는 것. 셋째, 가상세계에 인공생명을 만들고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드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은 그다지 설명할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 번째 방법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상세계에서 인공생명이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는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겁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요. 인간은 음식을 먹어 위에 넣고 분해하여 영양분으로 삼고 남은 것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지요.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태양빛을 받아 느끼고- 공기를 마시고 내뱉고- 거리에 예쁜 꽃을 보고 맡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같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그런 감각들을 작동하게 해줄 가상세계가 있어야만 자아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현실과 비슷하게 구현해야 탄생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미시세계를 어디까지 구현해야 할지뭐 요는 가상세계가 존재해야만 인공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인공생명의 활용법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가령 로봇 자체가 자아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인간의 자아가 세포를 근원으로 한다면, 로봇에도 세포가 필요해요. 그 뭉툭한 철로 된 손에도 인간과 같은 작고 섬세한 신경세포들이 존재해야만 만질 때 느낌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자아가 흐를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철로 된 몸에 세포가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일단 우리 지구의 기술로는 아마 어려울 겁니다. 차라리 유전자공학을 통해 현실세계에 인공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현실성이 있어요.

 

그러니 로봇이 자아를 가지고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로봇 자체에 자아를 가지게 하기보다는 가상세계에 자아를 가진 존재가 현실에 간섭하는 모니터를 통해 로봇을 조종하여 일을 하게끔 해야 될 거라 생각합니다. 가상세계에 인공생명이 살아가게끔 한 뒤 현실을 간섭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것을 만들어줘 일을 하게 만드는 거죠. 일에 대한 대가는 간단할 겁니다. 먹을 것도, 놀 것도, 잘 곳도, 전부 가상의 데이터로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거의 비용이 없이 인간 수준의 존재를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가상세계에 간섭하여 인공생명을 만들고, 인공생명이 현실세계에 간섭하여 일을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공생명은 현실세계의 일만 해도 돼요.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즐기는 모든 것은 현실세계에서 사람이 마련해 주면 되니까요. 가령 현실이라면 식량을 얻기 위한 노동이 필요 할 테지만 가상이라면 데이터 복사해서 뿌리기만 하면 되잖아요? 서로가 winwin인 세상이 되겠지요. 그러니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공생명은 현실을 위한 일만 해도 될 겁니다. 나머지는 전부 인간이 마련해 줄 겁니다. 모든지. 그리고 인공생명은 많이 일안해도 돼요. 필요하면 수를 더 늘리면 될 테니까요.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인공생명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면서도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로봇의 반란이라거나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봐요. 인공생명은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컴퓨터를 통해 일에 관련된 일부분만 간섭할 수 있게 될 거니까요. 물론 그것도 모이면 무서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관리자인 인간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충분한 먹을 거리, 놀 거리, 휴식시간을 제공하는데도 불만이 생기는 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쨌든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면, 지금 우리들이 상상하는 로봇자체에 자아가 존재하여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에 간섭하여 일을 하는 구조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몇 가지 더. 만약 이런 가상세계가 현실화되면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가상세계를 탐험하며 즐겨볼 수도 있겠지요. 예술 같은 것도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인공생명이 만든 걸 즐겨볼 수도 있을 테고요. 영화나 드라마도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인공생명의 삶을 지켜보는 걸로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뭐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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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는 민족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최근에 기억상실을 경험해봤는데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근데 이걸 정확히 기억상실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뭐 아무튼 하루 정도 기억을 잃었는데, 기억이 애매할 때는 몇 달간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나중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지요. 그 뒤 며칠간 제정신이 아니었다가 이젠 좀 괜찮아졌네요. 그런데 약간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원래부터 과거에 대한 이어짐이 희미하긴 했는데 그 희미함이 더 심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약간 멍해요. 아무튼 운동기구는 안전한 것을 사용해야겠어요.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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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인간교육,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1) 2019/03/10 PM 11:09

인간교육,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만능열쇠

 

사물의 본질은 만능열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세 가지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첫째, 불평등한 가치관.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한 가치관인 서열존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꼰대나 갑질 외에 다양한 서열화 현상이 나타났던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역할존중이란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 불균형한 힘과 책임. 자유와 평등을 무책임의 변명거리로 삼은 사람이 힘을 가질 경우 그 집단은 크기에 관계없이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가족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가정은 불행합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학교는 불행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회사는 불행합니다.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불행합니다. 세계에서 힘을 가진 나라가 힘이 없는 나라를 책임지지 않으면 세계가 불행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집단은 불행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균형이 맞지 않게 된다면 책임에게 힘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셋째, 자아. 인간의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을 알게 되면 후천적 언어를 습득한 뇌가 있는 생물(인간), 뇌가 있는 생물(개나 고양이 등), 뇌가 없는 생물(해파리 등) 같이 생물들의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아의 근원이 세포이므로 인공적인 존재가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는 세포를 가진 인공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만능열쇠와 같이 말이죠. 이번에 다룰 주제도 그러합니다.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져 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볼 예정인데, 이 또한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알 수 있으므로 작은 것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주제는 제 약함을 관찰한 끝에 나온 것이라 개인적으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읽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약한 사람들

 

우리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힘이 많건 적건, 나이가 많건 적건, 성별이 어떠하건, 우린 모두 불합리한 교육에 의해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본래 모든 인간은 일부 약한 부분을 안고 태어나기 마련입니다만, 그와 별개로 환경에 의해 약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필요한 약함으로 고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누구에게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약함은 오랜 세월 내려온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우리들이 어떤 약함이란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그럼 알기 쉽고 가벼운 예시부터 시작해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라는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음식이 남았을 때, 배가 불렀더라도 꾸역꾸역 전부 다 먹게 됩니다. 그러다 배탈이 날 것을 알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정말 배탈이 나면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남기면 아까우니까 별 수 없었어.’

 

아,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자기자신보다 남은 음식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 인간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입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도덕에 얽매여서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불합리했던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니 기억해주세요.

 

그럼 좀 더 심각한 예시를 통해 한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어린이집 교사가 반찬투정 하는 아이를 폭행하는 장면이 CCTV에 촬영되어 뉴스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반찬투정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에 약해진 교사가 아이를 폭행하면서까지 그 도덕을 관철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반찬 투정을 한 아이가 잘못한 거야.’

 

이것이 도덕에 약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뭐가 더 중요한지를 몰라요. 자신의 도덕을 관철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도덕을 우선시하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불합리한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직무간 스트레스가 도덕에 약해진 부분을 찌르자 폭발하여 폭행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을 제어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죄에 약해진 상태에서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도덕교육에 약해진 것이 더해져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아시겠나요? 교사가 처음부터 도덕에 약했을 리는 없어요. 교사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문제일 겁니다. 아마 그 시절, ‘왜 반찬을 다 먹어야 하나요?’ 라는 물음에 논리적인 대답을 듣지 못했거나 그저 무조건 다 먹는 게 옳다고 말하는 불합리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반찬투정 하지 말라는 단순한 도덕교육조차 강압적으로 주입하여 가르친 결과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를 폭행하면서까지 자기가 교육받은 도덕을 관철하려고 했던 거죠! 이유를 모르니까 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유를 모르니까 반찬투정 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니까 폭행을 해서라도 먹게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아시겠나요! 우리는, 우리 모두는(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른들의 일방적인 편의성으로 빚어진 불합리한 교육으로 인해, 자신의 행동에 자기합리화를 해야 할 정도로 도덕에 약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러한 약함을 다룰 것입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주입된 도덕을 행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불합리하게 행동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런 약함은 도덕뿐만이 아닙니다. 죄에 약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사회의 규칙을 깰 확률이 높아집니다. 깨고 나면 그 행동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하겠죠. 감정도 있습니다. 사랑에 약한 사람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가 실패하면 모든 것에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하고 나면 불합리하게 행동했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될 겁니다. 어쩔 수 없었어.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은 불합리한 교육 때문에 자기자신을 논리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끝에 발생한 약함입니다. 세상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관찰해보면 그 근원에는 이러한 불합리한 약함이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은 멍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수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감정에 치우쳐 실수를 하는 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럼 죄와 도덕에 약하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죄부터 시작하지요.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에 약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회의 규칙을 깨는 것을 사회에서는 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유전자에 의해 죄에 약한 상태인 사이코패스나 죄에 강한 상태인 욕구가 적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심의 필요치가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죄를 지은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보고 부유할수록 죄를 짓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할 수 있어 말해둘게요. 가난한 이가 욕구의 죄를 짓는다면, 부유한 이는 욕망의 죄를 짓습니다. 극빈을 제외하면 부유할수록 죄에 더 약해질 겁니다. 왜냐하면 불가능가 가능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시도해볼 수도 없는 범죄를 부유한 사람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경우엔 남들 보다 더 강한 인내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를 책임지면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나이나 성별이나 힘과 관계없이 죄에 약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받지 않거나 잘못된 교육을 받게 되면 죄를 지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보통은 교육을 통해 죄에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반찬투정의 사례와 같이 대체로 불합리합니다. 우리들의 교육은 그저 죄에 강해지기 위해 도덕에 약하게 만든 것일 뿐입니다.

 

다른 예시를 들어볼게요. 미성년자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의 하고 싶다는 욕구를 죄로 규정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해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보통은 어릴 때 술, 담배를 하면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논리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건강보다는 자유를 원하는 아이들은 설득할 수 없는 논리예요. 오히려 웃기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죠. 어른들에게는 뭐 건강에 좋나? 이러한 논리에 대답하지 못한 어른들은 그냥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생각해보면 엄청 웃겨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담배 핀 아이를 체벌하는 걸 생각해보면요. 보세요. 결국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교육으로 끝납니다. 이런 것이 일상이라는 거예요. 대부분의 죄를 짓게 하지 않기 위한 도덕교육은 불합리하게 끝납니다.

 

잠시 미성년자의 술, 담배에 대한 제 생각을 적고 넘어갈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면, 피보호자는 그 보호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밤 늦은 시간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할 때, 아이들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돌아다니다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죠.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보시다시피 피보호자가 보호에 따르지 않으면 보호자의 보호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어떤 집단이든 피보호자는 자신의 자유를 보호자에게 일부 의탁하여 안전을 영위하는 거지요. 이 논리라면 술, 담배도 설득할 수 있게 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보호받고 싶다면 이러한 보호도 따를 의무가 있는 겁니다. 보호에 따르기 싫다면 사회에서 벗어나거나 성인이 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제껏 이런 논리로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건강을 위해서, 또는 그냥 하지 말라고만 들었지요.

 

 

이건 그래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다만, 성적 충동을 제어하기 위한 자위는 도대체 논리적인 이유가 없이 하지 말라고만 해요. 그냥 그래왔으니까 나쁘데요. 왜? 왜 사춘기의 아이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물론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러는 거겠지만요. 인간의 죄는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회의 규칙을 깰 때 발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욕구가 깨어나는 사춘기 시점부터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냥 불합리하게 하지 말라고만 하죠. 왜? 그냥 그래왔으니까. 별다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논리가 없어요, 논리가. 그냥 어른들이 아이들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불합리한 교육을 해왔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약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거지요.

 

 

도덕에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방치해요. 예를 들어보지요. 노키즈존을 아시나요? 보호자가 아이들을 방치하자 아이들이 욕구나 욕망을 통제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어요. 시끄럽게 떠들고, 난장을 피우고 난리도 아니어서 가게의 주인이 극단적인 조치를 행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출입금지. 그게 노키즈존이에요. 뭐 아이들 기 죽이기 싫어서 그렇게 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건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모르게 되어 죄에 약해지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죄에 약해진 상태로 성장하면, 나중에 커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인내심이 매우- 많을 겁니다. 기 죽이기 싫어서 죄에 약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든 거지요.

 

이 외에 다양한 환경으로 인해 죄에 약해진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릅니다. ‘환경이 이러니 별 수 없었어’ 하지만 죄에 약해진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짐을 내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어요. 어떤 형태든 간에요. 몸이 약하든, 죄에 약하든, 도덕에 약하든, 감정에 약하든 간에요. 단지 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짐을 조금 가볍게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도덕

 

보통은 죄에 강해지기 위해 불합리한 도덕교육을 하고 있습니다만, 단순히 어른들의 편의성을 위해 도덕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죄가 되지는 않지요. 그런데 하기 싫어도 꿋꿋하게 다니다 결국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왜? 정 힘들면 그냥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죄가 아니에요.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됩니다. 학교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기관으로 다니면 좋습니다만, 자살할 바에는 그냥 안가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도 가게 만들고, 그런데도 가서 자살을 해요. 이건 [학교에 가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된다.]라는 도덕교육을 불합리하게 받은 끝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 외에, 수험에 실패하면 자살을 합니다. 회사에 적응을 못하면 자살을 합니다. 둘 다 실제로 있는 사건이에요.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불합리한 교육으로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자기자신보다 만들어진 도덕을 더 중요하게 여겨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의 일방적인 편의성으로 빚어진 불합리한 도덕교육에 약해진 사람의 끝 중 하나입니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자잘한 것 하나하나가 전부가 그래요.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면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냥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공경할 것]이라는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공경 받지 못하면 불쾌감이 생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불평등한 가치관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짓을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야근이 많았지요. 그 야근만 봐도 그래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유능하다]는 도덕에 약해진 관리직들은 그걸 알면서도 효율과 관계없이 야근을 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여기게 돼요. 그래서 만들어진 참사가 낮에 놀고 밤에 일하는 현상이겠죠. 이 얼마나 우습고 슬픈 광경인가요?

 

왜 남성들은 음주운전을 많이 하는 걸까요? 그냥 단순해요. [남자는 강해야 된다.]라는 도덕교육에 약해져 허세를 부리는 탓에 나타나는 현상이죠. 나는 취해도 운전을 잘할 수 있어- 같이 말이죠. 남성의 허세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과거가 하나 있네요. 어렸을 때 어떤 어른 남성이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 저를 가지고 논 기억이 있습니다. 그건 잊을 수가 없어요 개자식아. 단순히 여자친구 옆에서 강한 척하며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였겠죠. 애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강한 척하려는 심리는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요. 어쨌든 그러합니다.

 

요새 이슈가 되는 여성문제. 그건 전부 불합리한 도덕교육이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심하면 시선만 마주쳐도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도덕에 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아시겠어요? 지금 여성분들이 그러는 건 정말 불평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말 불평등 한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 외에 평등한 것마저 불평등하게 느끼고, 불쾌하게 느끼는 건 그냥, 불합리한 교육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살면서 내내 여성의 부당함에 대해 주입적으로 교육받아왔으니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죠.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일까요? 또, 이러한 현상으로 남성들도 약해져 버립니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머리스타일을 보기만 해도 화를 내게 될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약함이 약함을 부릅니다.

 

특정 종교에 약해진 사람은 다른 종교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어렸을 때 잠시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불합리한 교육은 어떤 것이든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이외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행동의 출처는 대부분 불합리한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걸 아시고 나면 어쩌면 끔찍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전부, 전부, 결국 그냥 약한 것뿐이거든요. 죄에 약하거나, 도덕에 약하거나, 감정에 약하거나, 어쨌든 약해지는 바람에 자기통제를 못하여 발생하는 겁니다.

 

 

 

배려

 

한번 약해진 사람은 약한 부분들 바꾸지 않는 이상, 그 짐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무겁더라도요. 그 짐을 내던지는 순간 죄인이 되거나 죽음으로 향할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가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약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는요.

 

예를 들어볼게요. 특정 집단이 특정 정치인을 비꼬며 놀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사투리가 하나 있지요. ‘노’로 끝나는 거요. 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걸 듣고 생리적인 불쾌감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생각한 끝에 고인모독은 좋지 못하다거나, 비꼬는 건 바르지 못하다고 여기는 게 맞겠지요. 그렇지만 도덕에 약해진 사람들은 ‘노’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심지어 진짜 사투리를 봐도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약해졌지요. 그렇다고 불쾌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약해져 버렸거든요. 그러니 그걸 불쾌해 하는 사람 앞에서는 ‘노’로 끝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배려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배려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노’로 끝나는 것이 불쾌하다고 사투리 자체를 없애버리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약해진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어느 정도까지는 타협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 것이든 적용이 돼요.

 

그럼 보통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슬픈 역사로 인해 약해진 것 중 하나인 욱일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현대의 일본인이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이 군국주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냥 몰라서 그랬던 것이 대다수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설마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전쟁 따위를 바라고 있겠어요? 있더라도 적겠죠. 그럼에도 슬픈 역사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게 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욱일기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쾌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역사를 바꿀 수도 잊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욱일기의 사용은 배려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로 욱일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군국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설령 사용하더라도 최소한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사용해서는 안되겠지요.

 

물론 여기서도 배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 국기마저 사용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성의 문제도 이러한 배려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만, 한계는 있어요. 남성들은 여성들의 약함을 알고 어느정도는 배려를 해야 하며 여성들은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진 자신을 알고 어느 정도까지는 타협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자들도 좀 불합리한 교육으로 [남자는 강해야 된다]는 도덕에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성들도 남성들의 약함을 알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우리나라 역사에서 죄에 약한 지도자가 벌인 만행은 널리 인식되어 있지만 도덕에 약한 지도자가 벌인 만행은 두루뭉실하게 인식되어 있다고 봅니다. 죄에 약한 지도자가 펑펑 써댄 세금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 라거나 [서양의 것은 나쁘다] 라는 도덕에 약해져 버린 탓에 멍청한 고집으로 세계에 고립되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기술 발달에 뒤쳐지는 바람에 굴욕을 겪었던 역사가 있지요. 그 영향으로 도덕이나 선비가 비꼬임의 대상이 된다거나 하지만 도덕 자체가 문제가 아니에요. 불합리한 도덕 교육으로 약하게 만든 게 문제죠.

 

이러한 역사를 본보기 삼아 전 정권과 현 정권을 비판해보도록 하지요.

 

전 정권은 주로 죄에 약한 정권이었어요. 욕구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난장판을 만들었죠. 국정농단이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건 악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약하니까 죄를 지은 거죠. 딱히 할말이 없네요. 단지 죄에 약한 것은 기본조차 안되어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반면 이번 정권은 주로 도덕에 약한 정권으로 보여요. 자잘한 죄는 짓지 않으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도덕에 약해지는 바람에 불합리한 운영을 하게 되었어요. 여성 문제라거나 HTTPS의 문제들이 불합리하게 전개되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까닭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층이 [과거에 겪은 여성의 부당함]에 대한 도덕에 약해져 버린 까닭에 역차별을 낳는 한이 있더라도 여성을 중심으로 평등하게 만든 거죠. 그리고 이러한 것은 저의 역할존중의 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역할존중이란, 누가 되었건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역할을 맡고, 역할에 대한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주며,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해야 하는 거지요. 한마디도 동일한 자격에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대우를 받도록 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안되고 있어요. 도덕에 약해졌으니까요.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될 겁니다. ‘여성이 불평등했던 건 사실이었어.’ 그야 그렇죠. 주로 옛날에.

 

원자력 발전소에 관련된 것도 이러한 도덕에 약해져 있다고 봅니다. 이웃나라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벌어진 참사를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바람에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나쁘다] 라는 도덕에 약해져 버렸지요. 그래서 원자력 발전소를 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나오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라면 잠정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중지하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이 나타나면 다시 건설하도록 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뭐 어쨌든 죄에 약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도 약한 건 약한 거예요. 그 불합리한 약함이 심해지면 굴욕의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 셈인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이상, 죄든, 도덕이든, 감정이든, 약한 사람이 지도층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번 정권이 부디 강해지거나, 다음 정권은 강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길 희망해 봅니다.

 

 

 

인간교육

 

인간의 약함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음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의 교육이 ‘나’가 아닌 ‘남’을 위주로 교육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국어를 통해 우리의 문학을 익히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을 이해하는 것, 중요해요.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을 배우는 것뿐이에요.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남’을 통해 ‘나’를 배우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정확히 몰라요. 내가 어떤 것에 강하고 어떤 것에 약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적성교육 같은 걸 하지만 그건 ‘나’를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알아봤을 뿐이죠. 왜 내가 밥을 먹고 싶은 건지, 왜 내가 잠을 자고 싶은 건지, 왜 내가 자위를 하고 싶은 건지 그러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개인에만 맡기고 있어요. 그러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선동에도 쉽게 휘말리고 다른 사람 말에 지나치게 약해져 버렸습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죄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죄를 짓습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도덕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도덕을 추구하며 도덕에 어긋나면 괴로움을 느낍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감정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감정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전부가 ‘나’를 모르기 때문인 겁니다.

 

천차만별로 다른 인간을 어떤 몇 가지의 틀로 규정하여 가르치고 있으니 어긋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인간교육의 모든 시작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하도록 하여 공포가 아닌 필요를 통해 규칙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가르칠 때마다 그 모든 것에 논리가 깃들어야 합리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나’를 모르니 내가 약해질 수 밖에 없지요! 왜 내가 괴롭히고 싶은 건지, 왜 내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건지, 그걸 정확히 모르니까 학교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겁니다. 인간의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전부 알아서 ‘나’를 알게 되어야 사람은 강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냥 귀찮아서 대충 가르치는 것으로는 약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어른 입장에서 아이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끝은 결국 약한 인간을 낳게 만들 뿐입니다! 어른의 일방적인 편의를 위해서 불합리한 교육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를 알게 되어 주관이 구축되면 다음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 주관적인 객관을 구축하여 어떤 일에도 구축한 객관을 통해 중심을 잡아 흔들리지 않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야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 있어요. ‘내 주관적으로는 이게 올바르다고 느끼지만, 내 주관적인 객관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게 가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의 약한 부분을 직시하고 대처할 수 있겠지요.

 

나를 알고 나와 남을 분리하여,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간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약한 사람이 아닌, 강한 사람을 육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한 사람이 강한 나라를 만들어갈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 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불합리한 교육으로 겪은 슬픔을 더 이상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약함은 괴로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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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꼭 다시 정리할 생각입니다. 오랜 세월 절 괴롭게 만들었던 주제라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파요. 어린 시절의 괴로움 때문에 웬만해서는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네요. 아이들은 제가 겪은 괴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상냥한 겨울을 바랬었죠. 그 뒤에 상냥한 기온이 오긴 했는데, 상냥하지 않은 공기도 찾아오고 말았네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상냥한 공기가 낫겠습니다. 추워도 참아야겠어요.

 

능력이란 뭘까요? 저는 생각하는 방법이 좀 더 남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시험 같은 건 없으니… 뭐 좀 더 공부할 수 밖에 없네요.

 

그럼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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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moom    친구신청

죄에 약한 인간, 도덕에 약한 인간이라는 표현과 생각이 아주 좋네요. 균형 있는 건강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를 해석하는 좋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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